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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왜 밀항하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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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8
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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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밀항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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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극계의 혜성 손목인·신카나리아·박단마 등 10여 명 ‘문제의 밀도일 진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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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9일, 20일부 각 신문은 2면 기사에 “저명 연예인 밀도일(密渡日)”이란 타이틀로 어트랙션계의 혜성 손목인, 영화인 안경호, 악극계의 프리마돈나 신카나리아, 박단마 등을 위시한 5, 6명의 도일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사회로 하여금 큰 센세이션과 아울러 비난의 소리를 높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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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들은 밀항을 한 것인가? 또는 다른 지방(국내)에 남몰래 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의혹을 품는 자들도 있을지 모르나 필자는 오래 전부터 그들의 여러 가지 사정을 사적으로 규지하고 차마 방조는 못 했으나마 마음의 동정만은 해오던 터이므로 편집자의 의뢰에 따라 몇 마디의 글을 쓰게 된 것이며, 이 글이 일반 사회에 발표될 시기에는 적으나마 이들의 행동에 대해서 동의를 표하여 줄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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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안경호와 한국 악극계의 지배자 손목인은 틀림없이 수 명의 동료와 함께 도일하였다. 물론 신문에 보도된 바와 같이 이들은 암야를 이용한 선편(船便) 밀항이었다. 이들이 부산 제○부두에서 출항할 적에 그 밤의 모험의 여행을 축복한 자나 더욱이 앞으로의 성공을 바란 자는 나와 K라는 친구와 R씨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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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밤 부산의 거리는 유달리 흐렸다. 배를 타기 전에 적어도 저녁밥만은 취하여야 할 안과 손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땅 위를 걸어가며 발작적인 우울과 불안에 잠겼다. 밥은 목을 넘어가지 않았다. 가슴을 치미며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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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아 잘 있거라, 이런 감정보다도 폭풍과 거센 파도를 헤쳐가며 일본으로 간다는 생각보다도, 이들을 한없이 괴롭힌 것은 집안사람과 조금 전까지 같이 앉아 이야기하던 친한 사람들이 걱정되는 것이었다. 서울에 잔류시키고 일본으로 떠나기 위하여 3개월 전부터 하부(下釜)하였다. 그는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소위 어떤 학구적이나 예술적인 견지에 있어서의 완전한 영화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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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어떤 우연과 심각한 민족정기 때문에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고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영화에 취미라기보다도 일종 변태적인 정력을 경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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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극영화엔 흥미는 가졌으나 하나의 작품도 만들지 못했으며 단지 초보자로서 습득하여야 할 기록(다큐멘터리)적 장면을 촬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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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일부의 오해와 편견에 의한 불평의 대상자이기도 했으나 여하간 그가 처음 필자와 만났던 금년 2월부터 현재까지 나는 별로 특기할 만한 그의 결점을 발견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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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일본으로 떠나기 약 한 시간 전 그는 나를 만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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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남겨둔 식구들은 아마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오. 허나 제 목적만은 관철할 작정이며 더욱이 우리의 일이 완성되기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진력하여 주신 분의 기대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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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다른 악극인들처럼 가족에게 일언도 하지 않고 떠난 것은 아니다. 그는 작년부터 도일의 계획을 착착 준비하였으며 나아가 그의 부인은 남편이 하는 영화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지극히 이로운 것이 틀림없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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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부인은 자기의 치마저고리, 반지, 기타 생활비마저 절약하여서라도 남편인 안이 8·15 해방 후 꾸준히 영위하여 오는 기록영화 제작에 조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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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의 밀항 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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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지난 6월 10일의 도일을 합쳐 해방 후 세 번째의 밀항이다. 6·25 사변 전 2차에 걸친 밀항은 그의 정신과 행동에도 큰 충동을 주었다. 일본에 상륙해서라도 거류민증 같은 것도 하나 없고 그렇다 해서 일본 특히 동경의 지리에 밝지 못한 그는 발 한걸음을 옮겨놓는 것도 극히 주의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만일 그가 일본 경찰이나 무허가 입국을 취체(取締)하는 기관에 발각된다면 아무 소기의 목적도 수행치 못하고 추방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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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조바심이 나고 공포심도 생긴다. 그 전이나 지금이나 일본에 입국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 즉 공식과 비공식의 수단이 자연적으로 취하여지게 되는데 안은 언제나 ‘공식적 입국’에는 완전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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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20여 종의 서류 수속과 장구한 시일을 ‘여권’을 얻기 위해 소비하였으나 그는 한 번도 여권을 만져보지 못했다. 대한민국 외무부의 절차가 끝났다 하더라도 스캡(SCAP,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연합군 점령기 동안 일본에 있었던 ‘연합군 최고사령부 의 의미로 ’ 해석됨 ─ 편집자)의 입국허가증(사증)을 입수치 못하여…… 이뿐만 아니라…… 외무부 내에 그의 일본행을 반대하는 직원이 확실히 있다고 그는 언젠가 필자에게 말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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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이유로 밀항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출발 자체에 있어서는 간소하며 편의한 처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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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톤(대개가 그러하다) 정도의 선박이 상용되는 밀항선이었다. 안은 3만 피트 이상의 촬영된 필름을 생명처럼 거느리고 지난번 두 차례나 일본으로 갔었다. 그곳에서 상기하였던 이외의 제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영화의 현상, 녹음, 편집, 음악, 자막 등 현대 기록영화로서의 제반조건을 구비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겨우 완성되었던 것이 6·25 이전의 「민족의 절규」제1부 및 제2부인 바 이것은 최초의 목표는 고사하고 그의 미숙한 촬영기술로써 어떤 기술적 수준에서는 영화 이전의 것이었으나 여기서 특기하여야 할 것은 해방 후 영화인의 대부분이 좌경하여 ‘조선영화동맹’이란 괴뢰 단체를 만들고 공산주의 사상의 침투만을 획책한 영화(기록) 제작에 급급하였으나 분연 안은 민족진영을 위한 유일한 아마추어 카메라맨으로서 제1보를 내디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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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 제작소 같은 데서 왜정시 근무한 경험이 있던 전문적 카메라맨은 안을 영화인이라고 부르기를 싫어한다. 그 이유를 필자는 이해한다. 허나 그는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의 선각자가 취하여 온 것처럼 가장 초보적인데서부터 카메라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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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좌우 격심한 대립, 이승만 박사의 귀국…… 그의 최초의 군중 앞에서의 연설, 공산주의자와 민족진영을 대표한 이 박사와의 역사적인 회견(이것은 민족진영과 공산당과 합작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반탁 운동의 전개, 미·소 공위의 개막과 그 결렬의 시계(時季), 유엔 한위의 내한, 5·10 한국 최초의 자유선거, 민국 정부의 수립과 맥아더 장군의 내한 등등을 수록한 「민족의 절규」는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 독립 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장편 기록영화라고도 할 수 있고 후세의 국민들이 한번은 필견하여야 할 산 역사와 민족의 생생한 기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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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영화가 그 당시나 현재의 한국의 기술로써는 도저히 완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안은 두 차례나 무시무시하게도 밀항(도일)하였던 것이다. 다소 사회와 몇 개인의 재력이 도입도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를 아는 몇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자신의 사재와 현재는 조방(조선방직주식회사 ─ 편집자) 사장으로 있는 강일매 씨의 절대한 원조였다고도 한다. 여하간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금반의 그의 제3차의 밀항이 결국 신문의 사회면에 대대적으로 보도됨을 계기로 영화 연예계는 물론 일반 사회에 까지 큰 파문을 초래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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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차의 밀항…… 신문은 손목인, 신카나리아의 도일을 안보다도 더욱 주요하게 취급했으나 역시 금반 사건의 주동은 안인 것이다. 손이나 신은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대중악계의 대표적 존재였고 거기에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다소(?)나마 있었던 까닭에 신문의 착안점은 정확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어느 하나의 신문치고 그 밀항의 이유를 상세히 취재 못하고 있다. 그들은 확실히 부산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들이 고국을 등지고 그 지긋지긋한 일본에까지 간다면 여기에는 커다란 사유가 있을 것이다. 부산에서 제주도를 한번 가려도 반년이나 일 년 가까이 이것저것 등으로 생각하는 자가 있는데 더욱이 가족을 피난지인 살풍의 도시 부산에 남겨두고 어째서 일본으로 간 것일까? 필자와 독자의 관심은 이의 초점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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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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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3월 어느 날 친우 K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보지 못하였던 나를 만나자 자네의 힘이면 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꼭 힘써달라고 애걸하듯이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 부탁인즉 사실 간단하였다. ……하나는 일본 ○○상선회사에 보내는 의뢰장의 초안과 공보처와의 연락을 취해 달라는 것이었다. K의 말을 들은 즉 안이 ‘좋은 영화’를 이미 촬영 완료하였는데 이것을 일본에서 완성하여야만 되고 더욱 「민족의 절규」의 프린트가 6·25에서 9·28 사이 공산군에게 탈취되어 그것이 현재 한국에는 단 1권도 없는 바 겨우 6·25 전 일본에서 완성시 원판을 두고 온 것만이 남아 있는 즉 이를 다시 제작하여야만 된다는 것이다. 대단히 좋은 일이다. ……나는 우선 이렇게 생각하고 안이란 어떤 인물인가 물은 즉 그의 대략 경력을 알려주는 것이다. 정력 하나로 꾸준히 일하는 초보적 영화인…… 영화의 예술성 같은 것은 전연 모르고 건국 초창기의 현실의 움직임을 될 수 있는 한까지는 기록하려고 애쓰는 순진한 청년…… 이런 선입감적 개념을 버리지 않기로 하고 그 후 안과 처음 만났다. 장소는 부산시 만성여관 2호실에서 K와 세세지사를 주고받고 하는데 안은 서울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그날 밤 하차하자마자 우리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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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촬영한 것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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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만 피트는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천연색 필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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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기록장면은 어떤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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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절규」×××××로서 9·28 서울 수복 전 자신이 국군 각 사단과 미8군 사령관의 허가를 얻어 유엔군에 종군하면서 촬영한 전선 묘사와 평양에서 이 대통령을 시민이 환영하는 장면이라든가 초산(楚山) 진출에 따르는 압록강의 유구한 흐름 또한 피비린내 나는 청진 진격 그 후의 철수 작전 등 최선을 다해서 촬영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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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완전히 제작하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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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서는 이것이 천연색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현상조차 할 수 없고 가부간 일본에 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제작비 ○천 원을 어떤 독지가가 부담하겠다 하여 공보처의 추천을 받아 외무부에 여권을 신청하였으나 함흥차사입니다. 여하간 일본에 꼭 가는 길밖에 없는데 절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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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이러한 정도의 이야기를 한 후 안과 헤어졌다. 안과도 친한 K는 그 후도 나에게 여러 번 찾아와 영화의 제명을 지어달라고 했으나 그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것조차 그들의 뜻을 이루어줄 수가 없었다. 안과 K는 계획과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부산 제○부두에 도착하고 있는 일본 ○○상선회사 군수품 수송선의 사무원인 일본인 우좌미(宇佐美)란 자를 이용하기로 했다. 우좌미에게 K는 영화 완성을 위한 일본행의 절실성과 당신들이 이 일에 조력하여 준다면 이는 하나의 한일 친선이 될 것이며 우리 영화 문화계에도 큰 성과를 초래시키는 것이라고 역설하였기 때문에 순진한 우좌미는 다소의 의향을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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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상선회사 본점에 한국 정부 모 고관은 비공식인 그의 개인의 자격으로 안과 영화 완성에 필요한 인원의 도일을 원조해 주기 바란다는 서한을 수교하였으며 동 서한을 접수한 상선회사에서는 모 고관의 이름만 듣고서도 감격하여 한국에서 임시로 채용한 직원이란 명목으로 안과 수인(數人)의 도일 및 일본에서의 2개월간의 체류를 승낙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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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상선회사는 미군의 서플라이를 동란 이래 담당하고 있는 관계상 직원(선원)은 GHQ(총사령부)의 징용원이며 한국인도 다소 근무하고 있으므로 한국인에 한해서는 일본 상륙을 2개월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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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안과 수명(數名)은 형식상에 있어 ○○상선회사의 임시직원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도일한 것은 밀항이 아니라는 견해도 성립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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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떠나는 것은 작정되었으나 돈이 제일 문제이다. 독지가 M씨는 한국은행권밖에 없으므로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갈 수는 없고…… 그래서 외화(정부보유불)와의 환산에 갖은 각도로 노력했으나 어찌되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당시의 내무장관 . 장석윤 씨도 이에 진력하였던 것인데 시일 관계로 실패한 것 같다. ……그렇다면 도떼기시장이나 40계단 아래 달러 상인으로 부터 미불(美弗) 혹은 일화(350대 1의 비율)와 교환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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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체의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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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손 등 그의 일행의 도일을 신문은 끝까지 비난하였다. 물론 사회의 공기(公器)란 신문이기 때문에 일반 사회 자체도 “적어도 예술인이 조국을 버리고 더욱이 이런 난시에 일본으로 도망치다니” 하며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며 몇 사람들로부터 내 자신도 직접 들은 적이 있다. 허나 나는 이들에게는 하등의 죄가 없다고 단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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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그다지 영화가 무엇인지 예술이 더욱 어떠한 것인지 알지도 못하던 사람이다. 그가 해방 후 민족적인 어떤 충동으로 카메라(촬영기)를 들고 마음 옮기는 대로 촬영하였다. 6·25전까지의 어떤 결정(結晶)이 「민족의 절규」1부, 2부이며 이것 역시 일본에서 완성했고 한국에서 상영되자 기술상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크게 자랑할 것이란 해방 후 최장편의 민족 독립 기록영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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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그리 학식이 많은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대 사회관계에 있어 오해를 받기 쉬운 사람이다. 그는 9·28 후에도 초지를 관철하여 카메라를 들었다. 갖은 방법으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기울여 천연색 필름으로 약동하여 싸우며 이겨나가는 국가와 민족의 생생한 모습을 캐치하는데 청춘의 중요한 시일을 바친 것이다. 필름은 안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손수 주신 것도 있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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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우리 정부가 수립되기 전부터 일인(日人)이 남기고 간 영화촬영소의 기구와 시설은 공산주의 영화인에게 빼앗기었다. 물론 대부분의 영화인이 좌경되었을 때이긴 하나…… 영화 하나를 현상하기 위해서, 녹음·편성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갔다는 것은 안뿐이 아니라 현재 국방부 정훈국 소속 촬영대에서도 그러하지만 한국에는 완비한 시설이 전무한 것이다. 문교부나 공보처나 외무부는 냉랭한 태도이다. 문교부에 예술과가 있으나 국민은 그런 과가 있는지조차도 모르며 그들의 사무나 행정 역시 전연 백지이고 외무부는 이런 영화를 만들기 위하여 도일하는 목적도 인정치 않아주며 혹시 외부의 권고라 할까 압력이 가하여질 때 겨우 한국 정부 측의 승인을 허락하나 일본 정부의 입국허가증(사증)조차 얻어주지 못하는 애달픈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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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상인 등은 자유로이 일본에 간다. 특권계급이라든가 다소 금력과 권력이 있는 자는 일본에 갈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인은 충분한 이유, 문화적 의의, 민족예술에의 도움을 목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부뿐이다. 불행한 것은 이들임이 틀림없다. 안은 영화를 만드는 데 대중음악인 손목인의 원조가 필요하였다. 영화에 있어서 음악효과가 차지하는 힘은 참으로 크며 “대한민국 건국사” 라고 가제(假題)한 동 기록영화는 어디까지나 한국에서의 제 사건과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관계상 한국인의 음악적 정서가 절대 필요하였다. 순수 음악인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나 안의 지적 수준으로서는 손을 가장 지당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손의 간단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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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형! 내 힘껏 해봅시다. 일본도 오래간만에 구경할 겸 영화 자체의 의의가 크니깐 손목인의 전 실력을 발휘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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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손은 2개월간의 중대한 사업을 완수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친지에게 맹세하였으며 오는 8·15 전까지에는 여하한 난관이 있더라도 동 영화를 제작 동반하여 해방과 독립의 기념으로서 국민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스스로 약속하였다. 부산을 벗어나 험악과 곤란만이 있을 일본으로 그래도 사나이가 하는 일이라고 막연한 자신만을 가지고 떠나야 할 밤, 안과 손은 자기들의 심경이나 입장을 모르고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입으로만 말하기 좋아서 이러니저러니 빈정대는 모습을 생각하였고 더욱 돈 한 푼 제대로 집에 내던지지 못한 까닭에 가족들이 혹시나 굶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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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떠난 2일 후 이들은 일본 고베[神戶]항에 무사히 도착하였으며 태연히 상륙하여 현재 일에 착수하고 있다는 제1신(信)을 K에게 보내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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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나리아와 그 외의 일행은 한국에서 24시 노래하고 춤추며 무대 위에 섰댔자 제대로 밥도 먹을 수 없는, 그러한 처참한 현실과 이 이상 타협할 힘마저 잃어서 손목인 등이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에 간 것이 어느 정도 확실해졌는데 결국 손 등이 귀국할 시엔 필히 돌아올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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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은 신카나리아 등의 밀항과는 전연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그는 자기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도일하는 것만을 밀항의 선량한 이유로 그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영화 이외의 밀항이나 그를 기획하고 있는 자는 무시하는 태도였다.
 
 
49
기록영화에 미친 사나이 안경호, 그는 벌써 일본에 3회나 밀항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남긴 것은 「민족의 절규」1, 2부며 이번엔 총천연색 영화 「대한민국 건국사」(아마 이렇게 제목이 될 것이다)를 선물로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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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들의 입장, 명예와 모험과 욕설과 곤란이란 희비 4중주를 인생의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이들에겐 밀항이라든가 신문의 비난쯤은 문제가 아니다.
 
51
밀항했다고 떠들어대는 인간과 이들과의 인생관이나 목적의식엔 이미 머나먼 거리의 차이가 있는 것이고 일본에서 여기서 발행된 신문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는 것도 알려져 왔다.
 
52
여하간 영화만 완성해 가지고 가자, 여권 하나 제대로 내주지 못하는 조국일망정 예술가에게 우대는 고사하고 헌신발처럼 취급하는 한국일망정 우리의 초지와 힘과 정성을 기울여 영화를 완성해 가지고 간다는 것이 제2신이며, 또한 안은 다음과 같은 부언하였다.
 
53
“지금 우리들이 고생하고 있는 이야기를 전하지는 않습니다. 허나 일은 진행 중입니다. 이것만이 무한히 기쁜 일입니다. 끝으로 부탁이 있는 바 서울에 있는 가족들이 혹시 죽지나 않았나 그곳에서 문의해 주십시오. 참 걱정이 됩니다. 공보처장 이 선생(이철원)에게 영화는 우수하게 될 것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54
─『재계』(1952. 8)
【원문】그들은 왜 밀항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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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단마
 
  # 손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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