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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기(王氣)는 벋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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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9.
김동인
1
왕기(王氣)는 벋어서
 
 
2
영흥 흑석리(永興黑石里)─.
 
3
동쪽으로는 멀리 바다를 끼로 서쪽으로는 산이 둘러 씌운 이 산간 소읍에는 다른 곳보다 저녁이 먼저 이르렀다.
 
4
산 너머에는 아직 햇빛이 시뻘겋게 빛날 때임에도 불구하고 여기는 벌써 황혼도 지나서 어두운 밤으로 들어선다.
 
5
순간 순간, 산촌의 저녁은 놀랍도록 빨리 저물어 간다.
 
6
한 집 두 집 하여 어느 덧 집집이 모두 빨간 아지깨 등잔 아래 고요한 밤을 잠자려 한다. 이 때에 이 동리 어떤 집 작은사랑 문이 덜컥 열리며 한 소년(아니 청년일까, 십 칠팔 세 나 보이는)이 나타났다.
 
7
손에는 활이 들리었다. 그 청년은 캄캄한 뜰안에 번쩍 내려서서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벌써 하늘을 장식한 별들─ 총총히 박힌 별들을 잠시 우러러본 뒤에 몸을 가다듬고 버티고 섰다.
 
8
건너편 건너다보이는 곳에는, 어떤 선비의 집인 듯 깜틀깜틀 창 안에 엷은 등잔 그림자가 나비친다.
 
9
「어디─」
 
10
어두운 밤에 놀랍게 빛나는 눈을 한 번 휘저은 뒤에 청년은 살도 없는 빈 활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는 줄을 와짝 잡아당겼다.
 
11
쉽지 않은 큰 활이었지만 이 젊은이의 힘에는 그만 굴복을 하여 부러질 듯이 구부러졌다. 그것을 기껏 당겼던 젊은이는 살도 없는 활을 건넛집 깜틀거리는 등잔을 향하여 탁 놓아 주었다.
 
12
쌕! 하는 소리가 함께 활은 도로 허리를 폈다. 젊은이는 다시 활을 잡아 당겼다. 다시 살도 없는 활을 건넛집 등잔을 향하여 놓았다.
 
13
같은 일을 거듭하기 마흔 아홉 번, 남이 보자면 아무 의미도 없는 싱거운 노릇이지만, 젊은이는 제 일심과 정력을 모두 부어 넣는 모양이었다. 그의 건강한 이마에서도 구슬땀이 비올 때 낙수물 같이 흘렀다.
 
14
이렇게 칠칠 마흔 번을 빈 활을 쏘아본 뒤에는 도로 활을 가지고 작은사랑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15
이 기괴한 행동─.
 
16
이것은 비단 오늘만 한 일이 아니었다.
 
17
저녁이 지나고 천하가 캄캄하게 되어 건넛집 등잔이 깜틀거리기만 하면, 매일 일과(日課)와 같이 활을 들고 나와서는 빈 활을 먹여서 건넛집 등잔을 향하여 놓고 하는 것 이었다.
 
18
아무도 이것을 본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아는 사람도 없었다.
 
19
이러한 기괴한 일을 거듭하기 석 달 하고도 열흘─ 만 백일째 되는 날, 이 날도 여전히 어두운 뒤에 활을 들고 뜰에 내린 젊은이의 얼굴에는 저으기 긴장된 기색이 보였 다. 목욕 재계라도 하였는지 그의 머리는 기름기까지 쪼르륵 돌았다.
 
20
뜰에 내린 젊은이─ 여전히 활을 먹였다. 여전히 정력을 다하여 건넛집 등잔을 향하여 활을 놓았다.
 
21
한 번, 두 번, 열 번 ,스무 번, 마 흔 번, 마흔 여덟 번까지 놓았다. 마지막 먹이는 이 활이야말로 백일째 되는 마지막 날 최후로 던지는 살이었다.
 
22
『에익!』
 
23
얼굴이 주홍빛이 되며 최후의 정력을 다하여 최후의 줄을 놓아 주었다.
 
24
그 순간이었다. 건넛집 창 안에 깔틀거리던 등잔이 깜빡 꺼져 버렸다.
 
25
우연일까?
 
26
정성의 결정일까?
 
27
창 안에 깜틀거리던 불이 캄캄해지는 순간, 이 젊은이는 방심(放心)한 듯한 태도로 멍하니 서 있었다.
 
28
건넛집에서는 바삐 다시 불을 켜 놓은 모양이었다. 창 안에 등잔은 다시 보였다. 그것이 보이는 순간, 젊은이는 다시 펄떡 정신을 차리며 또 다시 활을 먹여 그 등잔을 향하여 놓았다. 순간 다시 등잔은 캄캄히 꺼졌다.
 
29
건넛집에서는 등잔을 켜고, 켜면 이편에서는 빈 활로 쏘아 죽이고─ 이런 일이 거듭되기 칠팔 차, 젊은이의 얼굴 위에는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30
『인제는 천하 무적이로다.』
 
31
시험삼아 하늘 나는 기러기를 향하여 빈 활을 쏘아보았다. 기운차게 남쪽으로 핑 돌고 그냥 땅으로 향하여 떨어진다.
 
32
활을 연습하기를 십 수 년, 최후의 정성을 다하기를 백일 간─ 인제는 천하 무적의 명궁수로다! 지상천하에 내 궁력을 당할 자 누구냐? 자연히 터져오르는 미소를 감추 지 못하고 혼연히 작은사랑으로 사라져 버리는 젊은이─.
 
33
그 근방의 호가(豪家) 이자춘(李咨春)의 집 맏아들로 태어난 이성계(李成桂)였다.
 
34
이튿날 이 젊은이는 부러 건넛집까지 찾아가 보았다.
 
35
『어젯밤 하도 갑갑하갈래 뜰에 나와 보았더니, 댁에서 웬 일인지 연방 불어 껐다 켰다 하시니 무슨 일이 계시옵니까?』
 
36
시치미를 떼고 이렇게 물을 때에 그 집 주인 선비도 의아하다는 듯이,
 
37
『글쎄올시다. 바람도 없는데 몇 번씩 까닭 없이 불이 꺼지기에 켜 놓으면 또 꺼지고 꺼지고, 알 수 없는 일입니다.』
 
38
『허─, 웬 일일까요?』
 
39
『글쎄올시다. 기름도 마르지 않고 바람도 없는데 불이 왜 꺼쪘는지 알 수 없는 일인데요.』
 
40
그 장단을 맞추어 의아한 듯이 머리를 기울여 주기는 하였지만, 성계의 마음은 희열과 만족으로 견딜 수 없었다.
 
41
살 없는 빈 활로 건넛집 불을 껐다!
 
42
과연 명궁수였다.
 
43
그 뒤에 산에 가서 사냥을 하면 그의 살이 날아가는 곳에 반드시 맹수 한 마리는 거꾸러지고 하였다. 백발이면 백중이요, 천발이면 천중으로, 그가 한 번 마음 먹은 것이 면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44
산수가 험준한 곳에서는 인물이 나도 험준한 것─ 험준한 함길도(咸吉道) 산중에 태어난 이 젊은이는 남이 헤아리지 못할 외딴 궁이를 마음 깊이 배포하고 홀로 이 산간 을 돌아다니며 장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45
이러하기를 수년, 어느 해는 광성(匡城)의 험준한 산간을 여건이 필마단기로 표랑하고 있던 성계는,,
 
46
「大風起兮여 雲飛揚이로다.
47
威如海內兮여 歸故鄕이로다.
48
安得猛士兮여 守四方고」
 
49
흥겨운 마음으로 옛날 한태조의 대풍가를 부르면서 어떤 산간 바위에 말에서 내려서 잠시 쉬고 있었다.
 
50
우러러보면 높다란 하늘─ 저 같은 하늘 아래 임금도 있고 백성도 있구나. 임금은 별 종자며 백성은 별 종자랴.
 
51
지금 이 외따른 산간에 드러누워 혼자서 콧노래 부르는 외로운 표랑객인들 장차 임금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
 
52
혼자서 당치도 않은 생각을 하며 우두커니 누워 있을 때에, 이 궁사(弓士)로서의 날카로운 귀에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53
보통 사람이면 듣지 못할 소리였다.
 
54
쌕! 그것이 마치 소나무에 부는 바람 소리와 비슷하여 보통 사람이면 단지 바람소리라 하여 허수로 넘길 소리였다. 그러나 이 궁수의 날카로운 귀는 그것이 틀림없는 시 위 소리임을 알았다.
 
55
그의 몸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으켰다.
 
56
순간 전까지 고요히 태평에 잠겼던 그의 두 눈은 마치 쥐를 본 고양이같이 난란히 빛이 났다.
 
57
「이 산간에서 들리는 시위 소리는 웬 것이냐?」
 
58
경계하는 눈으로 두루 살피려 할 때에 퍼석퍼석 하며 서편 숲에서 한 마리의 사슴이 뛰쳐나와서 좀 더 비틀거리며 오다가 픽 쓰러지고 만다. 그 사슴의 앞 머리에는 살 이 깊이 박혀 있다. 시위 소리는 그 사슴을 쏜 사냥군의 살에서 난 것인 모양이었다.
 
59
성계는 사슴을 보았다.
 
60
우연한 일일까? 살은 사슴의 머리 정면, 두 눈깔의 꼭 가운데 깊이 박혀 있었다. 우연히 거기를 맞추었다면 여니와, 그곳을 겨누어서 맞춘 것이라면 그 사냥꾼의 궁술 도 또한 비범한 것이었다.
 
61
문득 호기심을 일으킨 그는 몸을 일으켜서 사슴이 넘어져 있는 곳까지 가려 하였다.
 
62
그 때에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이 바위와 개천과 비탈뿐으로 된 산간에 말을 달릴 평지는 조금도 없다.
 
63
그런 곳임에도 불구하고 들려 오는 그 말발굽 소리는 속력을 다하여 달려오는 소리였다. 바위를 건너 뛰는 소리 ─ 후덕덕툭턱하면서 고르지 못한 산길을 마치 평지인 듯 이 달려오는 그 소리 뿐으로도 쉽지 않은 명기수밈을 알 수가 없었다.
 
64
후덕덕!
 
65
바위 뒤에서 홀연히 한 마리의 말과 한 개의 사람이 날라서 건너와 성계의 앞에 탁 멎었다. 동시에 마상의 엽부(獵夫)는 몸을 날려서 땅에 내려섰다.
 
66
『호─, 여기까지 와서 죽었군. 나이 먹은 놈이라 기운도 좋지.』
 
67
곁에 사람이 있는 것은 개의치도 않은 듯이 사슴을 가볍게 일으켜서 허리에 찼던 칼로 목을 찔러 거기서 쿨쿨 쏙는 피를 들이킨다.
 
68
잠시를 들이키고 있다가야 비로소 성계를 보며
 
69
『노형도 좀 자시겠소?』
 
70
성계는 잠시 탄상하는 눈으로 그 젊은이를 보았다. 보아하니 아직 스물이 넘지 못한 소년이었다. 그 위에 부드러운 뺨이며 불그스레한 얼굴빛이며 샛별같이 빛나는 눈이 며가 사내로 보기에는 아깝도록 예쁘게 생긴 인물이었다.
 
71
『혼자 자시오.』
 
72
성계는 미소하면서 대답하였다.
 
73
『혼자 먹자니 미안하구려.』
 
74
『염려 말고 자시오. 빼앗진 않을 테니…』
 
75
『허허─ 빼앗으면 빼앗기긴 허구?』
 
76
『젊은녀석 하고는 제법인걸. 말도 무던히 타고 활도 무던히 쏘는 모양인데.』
 
77
『무던해? 노형의 눈썹을 다치지 않고 눈깔을 꿰라 해도 넉넉히 맞추겠소.』
 
78
『내가 눈을 감아두?』
 
79
『감고 있다가도 시위소리가 나면 저절로 뜨거든.』
 
80
『어디 내기를 해 볼까?』
 
81
『그럼세.』
 
82
『무슨 내기─?』
 
83
『모가지를 걸까?』
 
84
『모가지를 걸자니 자네 죽이기가 아까와. 그럴 것 없이 내가 지면 내가 자네 동생이 되고 자네가 지면 자네가 내 동생이 되기로 하세.』
 
85
『그러세.』
 
86
『거리는 오십 보, 살은 세 대.』
 
87
『한 대!』
 
88
『세 대로 하세.』
 
89
농인지 진정인지 알 수 없는 내기는 결행을 하게 되었다.
 
90
성계는 그 자리에서 성큼성큼 걸어서 오십 보를 가서 젊은이를 향하여 돌아섰다.
 
91
『자, 쏘게!』
 
92
한 마디 던지고는 고요히 눈을 감고 섰다.
 
93
이편 젊은이는 활에 살을 먹인 뒤에,
 
94
『여보게, 내 살은 백발 백중이야. 해야 자네 눈깔만 손해날 테니 그만두세.』 하였다.
 
95
『그럼 동생이 되겠나?』
 
96
『웬 말이야?』
 
97
『그럼 두 말 없이 쏘게.』
 
98
이리하여 두 청년은 마주 섰다. 미청년은 이윽고 살을 잔뜩 먹였다가 숨을 맞추어 가지고 줄을 놓았다.
 
99
눈을 감고 고요히 있는 성계─ 물론 눈에 살을 맞았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왼손이 한 번 번득일 때에 날아 오는 살은 그의 눈 앞 한 치의 거리에서 그의 왼손에 잡 히었다. 그리고는
 
100
『다시 한번!』
 
101
하고 눈은 떠보지도 않았다.
 
102
미청년은 의외인 모양이었다. 잠시 눈이 퀭하니 건너다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살을 먹여서 쏘았다.
 
103
그러나 둘쨋번 살은 성계의 오른손에 잡히어 버렸다.
 
104
『살 하나 남았지? 또 다시.』
 
105
그냥 눈은 뜨지도 않고 던지는 이 말에 미청년은 나머지의 살을 활에 먹이지 않고 내버리고 말았다.
 
106
『 옇님! 형님, 눈깔 가죽 두껍기도 하우.』
 
107
『살이 안 박히냐?』
 
108
『할 수 없읍니다.』
 
109
타협은 성립되었다.
 
110
성계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이 쪽으로 돌아왔다.
 
111
『그래, 동생 이름이 뭐라?』
 
112
퉁두란(佟豆蘭)이오. 본래 여진(女眞)나라 금패천호 아라불화(金牌千戶阿羅不花)의 아들로 고려에 귀화한 한 사람이외다.』
 
113
『나는 이성계라는 사냥군일세. 한데 자네는 얼굴이 계집애같은 녀석이 외모와는 딴판으로 호기로운 사내 행세를 하나 웬일인가?』
 
114
『별 말씀! 금마초(錦馬超)라는 칭호를 듣는 미남자로, 오호대장 중에 제일 위되는 마초가 있고, 부모선생(婦貌先生)이라는 이름을 듣던 장자방(張子房)도 있거니와, 미 님자라고 계집애다우라는 법이 어디 있소?』
 
115
『호─ 수작까지 제법이로구나.』
 
116
둘은 마주 앉았다. 퉁두란이 쏘아 잡은 사슴을 가운데 놓고 퉁두란이 내논 소금을 앞에 펴놓고 칼을 뽑아서 고기를 뜯어 먹으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117
「왕의 종자는 별 종자냐?」
 
118
가슴에 적지 않은 야망을 품고 그 기회를 기다리노라고 산간에서 모호한 생활을 하는 성계─ 한 대의 살로서 한 마리의 맹수를 잡으면서 장차 이런 구구한 짐승 사냥보다 국가 사냥을 꿈꾸는 불규의 청년은 여기서 그 무력과 뱃심이 아무리 보아도 범인(凡人)이 아닌 퉁두란을 만나서 내심 깊이 결심하는 바가 있었다.
 
119
놀라운 음모의 성공을 꾀하려면 거기 적당한 용기와 지혜가 겸비한 보조자가 절대로 필요하다. 이 퉁두란이란 미청년이 거기 쓰이지 못할까?
 
120
『여보게, 사내녀석이 그래 구구히 사슴 사냥를 하고 있담? 좀 더 큰 사냥은 염도 못 내나? 못난 녀석 같으니 ─』
 
121
농담삼아 이렇게 등떠 보았더니 퉁두란의 대답이 이것이었다─
 
122
『강태공이 위수(渭水)에서 고기 낚시질을 했답니다.』
 
123
주고 받은 이야기로 뱃심이 적지 않은 것을 본 뒤에 그 날 저녁 성계는 두란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124
그날 밤 이자춘의 집 사랑에 주안을 마주하고 앉은 젊은 주객.
 
125
그 술좌석을 모시는 한 개 아리따운 처녀가 있었다. 성계의 작은부인 강씨의 조카딸되는 처녀였다.
 
126
술을 먹는 체하지만 마음에 딴 배포 가있는 성계는 정신이 똑똑하여 눈앞에 노는 한 개 딴 청년과 미처녀의 행동을 주시하였다.
 
127
술의 조력도 있겠지만 아리따운 처녀가 부어주는 술에 그만 넋이 빠져서 정신을 잃어가는 젊은 미청년과, 그 청년의 계집애 같은 아름다운 얼굴에 심상치 않은 눈을 던 지는 조카딸의 모양을 슬금슬금 보면서 성계는 내심 매우 흡족히 여겼다.
 
128
그로부터 수일 후 그의 집에서는 한 쌍의 새로운 부처가 생겨났다. 퉁두란과 처녀가 드디어 혼인을 하였 것이었다.
 
129
의형제 겸 조카사위 겸, 이중 삼중으로 얽어매어서 이성계는 퉁두란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려 하였다.
 
130
그러는 동안, 누차 서울에도 왕래를 하여 시극의 형편을 살펴보았다.
 
131
그러나 퉁두란과 가까이 사괴면서 성계는 도리어 의외의 점을 발견하였다. 퉁두란의 가슴에 품고 있는 꿈이 결코 자기의 꿈보다 적지 않은 점이었다. 성계는 퉁두란으로 하여금 한실(漢室)의 제업(帝業)을 도운 장자방이 되기를 바라고 촉망했지만, 퉁두란의 품은 꿈은 도리어 유방(劉 邦)이 되기를 몽상하는 모양이었다.
 
132
어떤 날 시험삼아 붓대를 가지고 희롱하다가 종이에다가 무심히인 듯이,
 
133
「一尺長劍安社稷」
 
134
이라 써 놓았더니 맞은편에서 붓을 가지고 희롱하던 퉁두란이 편안안(安)자를 엎을 복자로 고치고는 싱긋 웃어보였다.
 
135
퉁두란의 품고 있는 꿈이 결코 자기의 꿈보다 적지 않은 것을 발견할 때에 성계는 내심 몸서리쳤다.
 
136
이 비상한 인물─ 그 역량이 무술이며 도량이 자기 한 사람 외에는 대적할 사람이 없는 희대의 호걸이, 만약 자기에게 심복을 하여 자기가 장차 하려는 놀라운 일의 조 력을 하여 주면 다시 구할 수 없는 귀한 보조자이지만, 그와 반대로 만약 자기와 대립하게 된다면 또한 당대에 가장 무서운 인물이었다.
 
137
이 일을 어쩌나?
 
138
대립하자면 성계로도 무서웠다. 심복을 시키자니 좀체의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또한 이 인물을 없이하여 버리자니 처치하기도 곤란할 뿐더러 아까왔다. 만약 심복의 보조자가 된다면 천하에 둘도 없는 호걸이어니, 어떻게 하여서든 심복을 꼭 시켜야만 되겠는데 심복할 듯 싶지는 않았다.
 
139
뿐더러 퉁두란의 편으로 보자면 도리어 내심 성계에게 <장자방>이가 되어 주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140
이 북국 태생의 미청년이 색(色)을 가까이한 뒤부터는 그의 코 아래 수염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수염이 야말로 성계 자기의 코 아래 달린 노랗고 빈약한 수염과 달라서 윤택 있는 자염(紫髥)이 그득히 나는 위에 더욱 기괴한 것은 좌우편에 한 올씩이 유난히도 굵고 빛나는 것이 나서, 그것이 또한 다른 수염들보다 길게 벋어서 더 욱 그 위풍을 돋우는 것이었다.
 
141
『형님, 이게 용수(龍鬚)외다.』
 
142
사실 전하는 바 용수였다. 이 용수는 반드시 천자가 될 사람에게야 난다는 전설이 있는 것으로 퉁두란은 그 수염을 애지중지하고 얼굴을 씻을 때에도 다칠세라 고이고이 씻고 그런 뒤에는 돌돌 말아서 다른 수염 사이에 감추어 두는 것이었다.
 
143
성계에게는 이것은 한 고통거리였다. 같은 솥의 밥을 먹고 함께 지내는데 왜 퉁두란에게는 저런 수염이 나고 내게는 이다지 빈약한 수염이 나는가? 홀로 거울을 들여다 보고 탄식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144
『이 뒤 형님을 대도독(大都督)을 시켜 드릴까? 하하하하…』
 
145
계집애같이 예쁘던 얼굴에 수염이 나니 아주 귀인다운 얼굴로 변한 퉁두란의 이런 농담을 들을 때는 성계는 겉으로는 웃어 보였지만 내심으로는 불쾌하고 하였다.
 
146
어떤 날 성계는 퉁두란과 술을 먹었다.
 
147
성계는 먹는 체만 하고 모두 몰래 쏟아 버렸다. 술을 즐기는 퉁두란은 그냥 받아 먹었다.
 
148
『한 말 술을 먹겠나?』
 
149
『두 말 먹으리다.』
 
150
『어디─』
 
151
권하는 대로 얼마고 먹어서 마지막에는 두루뭉수리가 되도록 먹었다.
 
152
그날 밤 성계의 집 하인의 부축을 받아서 (새로 장만한) 제 집으로 돌아갔다. 그 밤 정신 모르고 잔 퉁두란은 이튿날 아침 세수를 하려다가 코 아래를 만져보고 깜짝 놀 랐다.
 
153
용수가 없어진 것이었다. 만져보고 또 만져보고 거울로 비치어보고 아내에게 검사까지 시켜 보았지만 용수는 간 데 없었다. 동시에 몽롱한 기억이나마 남아 있는 바는 어 제 성계가 자기를 보내느라고 일으켜 줄 때에 두어 번 코 아래가 지독히도 뜨끔 뜨끔 아픈 일이 있은 일이었다.
 
154
퉁두란은 눈이 벌겋게 되었다. 즉시 칼을 차고 성계의 집으로 달려갔다. 다짜고짜 성계의 방으로 뛰쳐 들어갔다.
 
155
무슨 일인지 매우 긴장된 얼굴로 있던 성계는 퉁두란이 눈에 핏기를 올려가지고 들어오는 바람에 싱겁게─ 어울리지 않게 씩 웃었다.
 
156
『일찍 오네 그려?』
 
157
『일찍?』
 
158
말을 채 맺지도 않았다. 그의 손이 한 번 움직일 때에 육척 장검은 어느덧 뽑혀서 성계를 향하여 내려갔다.
 
159
피할 곳 없는 좁은 방 안에 여섯 자 긴 칼이 돌아갔는지라 성계의 허리는 두 도막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로 어떻게 돌았는지 성계의 몸은 상처 한 군데 없이 도리어 몸을 날려서 퉁두란의 맞은편에 달려들면서 그 손목을 꽉 잡았다.
 
160
『이게 무슨 짓인가!』
 
161
『이놈, 내 용수를 뽑고!』
 
162
『그런게 아니라─ 』
 
163
『아니가 뭐야!』
 
164
무력으로써 성계를 대할 수 없는 줄은 잘 아는 퉁두란은 그냥 손을 빼 가지고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그날 진일을 용의 울음 소리 같은 퉁두란의 통곡성이 났다.
 
165
구로부터 반 삭 간을 두문불출하고 이불을 쓰고 누워 있었다.
 
166
그 동안 성계는 퉁두란의 집에 가서 잠시를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167
─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막형막제하여 누가 낫고 누가 듯하달 수 없는 점.
 
168
─ 세상에 두 주권자가 있지 못할 점.
 
169
─ 둘이 서로 다투다가는 둘이 다 거꾸러질 염려가 있는 점.
 
170
─ 한 사람은 웃사람이 되고 한 사람은 좋은 보조자가 되어야 큰 꿈을 가히 성취할 점.
 
171
이런 점을 누누히 설명하고 마지막 자기에게 심복하여 주기를 간청하였다. 이미 용수가 없어졌으니 인제는 큰 꿈은 버리고 좋은 보조자가 되어 달라고 탄원하고 간청하 였다.
 
172
이리하여 반 삭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퉁두란에게서, 一, 자기는 이미 용수가 뽑혔으니 큰 뜻을 버리겠다.
 
173
一, 큰 뜻을 버린 이상에는 끝끝내 좋은 보조자는 되겠다.
 
174
一, 그러나 자기는 과거에 큰 뜻을 품었었으니 이후 요행 일이 여의하게 되는 날이라도 일개 대장이나 재상으로 일성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일만 성취된 뒤에는 낙향하 여 일생을 구름이나 희롱하며 보내지, 결코 과거의 경쟁자의 재상 노릇은 안하겠다.
 
175
이만한 조건으로 퉁두란도 드디어 이불을 걷어 치워 버렸다.
 
176
그러나 그 뒤부터는 퉁두란은 늘 앙앙 불락하였다. 이전과 같이 얼굴에 화기도 없고 그다지 자주 찾아다니지도 않았다. 모든 일에 낙심을 한 사람같이 열성이 없었다.
 
177
성계를 원망하는 마음도 여전히 삭아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178
어떤 날 성계는 변소에 갔다가 일을 끝내고 일어서려 할 때였다. 저편쪽에서 나는 기괴한 숨소리가 문득 들렸다.
 
179
보통 숨소리면 얼결에 듣지도 못했겠지만 그것은 정녕코 활을 메울 때라야만 내는 숨쇨─ 무인 성계의 귀에는 날카롭게 들렸다.
 
180
펄떡 정신을 차릴 때는 시윗소리와 함께 살이 변소 벽을 뚫고 날아 들어왔다.
 
181
손을 날려서 살을 잡았다. 동시에 날아오는 둘쨋살, 세째살, 세 개를 다 잡았다. 잡아서 세 개를 다 뚜꺽 분질러 가지고 변소 밖으로 썩 나섰다.
 
182
퉁두란이 뜰에 활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성계가 죽지 않고 살을 손에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진다.
 
183
성계는 허허 웃었다─.
 
184
『여보게, 그러다가 내가 맞으면 어쩐 텐가? 아무리 내기로서니 미리 알리지 않고 쏘면 잘못하면 맞기도 쉬운 법─ 형의 역량을 시험하기도 너무 과하이.』
 
185
이 웃는 바람에 퉁두란은 얼굴이 뻘겋게 되어, 같이 싱겁게 웃었다.
 
186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성계와 퉁두란은 함께 호랑이 사냥을 갔다가 백두산 상봉까지 이르러서 천지(天地)를 구경한 일이 있었다.
 
187
찬란한 오색 구름을 발 아래 굽어보며 천지까지 이르러서 함께 나란히하여 천지를 굽어보는 동안, 성계는 문득 어디인지는 모르나 살기가 몸을 엄습하는 것을 깨달았다.
 
188
펄떡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순간, 퉁두란의 억센 양팔은 등뒤로 성계를 갑자기 떠밀었다.
 
189
방심하고 있다가 떠밀리운 성계는 불의 중의 일이라 수십 길 벼랑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190
그러나 아직껏의 생애를 무술로 단련한 성계는 떨어지는 도중에 가로벋어나온 한 개 바위 뿌리를 걷어잡고 거기 매달렸다. 매달린 다음 순간 한 번 소리치며 몸을 추킬 때에, 그의 몸은 나는 새와 같이 도로 동구 밖으로 솟아 올랐다. 그때는 바야흐로 퉁두란이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동굴 속으로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191
여기 딱 마주 친 두 사람의 인물─ 퉁두란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으로 검붉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성계의 눈에는 미소가 나타났다.
 
192
『여보게, 장난도 너무 심하이. 불의에 밀치면 낸들 안 떨어지겠나? 그런 시험이 어디 있담?』
 
193
빙긋이 웃으면 마주 서 있는 성계를 잠시는 얼 빠진 듯이 바라보고 섰던 퉁두란은 눈에 눈물을 그득이 괴어가지고 드디어 항복을 하였다─.
 
194
『형님, 용서합시오.』
 
195
『용서란?』
 
196
『형님도 짐작은 하실 것. 너무 조롱하시지 말고 용서합시오. 차후에는 결코 그런 일이 없이 형님께 심복하리다.』
 
197
종내 마음을 샀다.
 
198
이 불평을 품은 어느 퉁두란으로 하여금 마음으로 복종을 하게 하려고 얼마나 노심을 하였던가?
 
199
지금 그의 마음이 종내 꺾이고 심복하기를 맹세하였다.
 
200
성계의 눈에도 기쁨의 눈물이 괴었다.
 
201
고려 공민왕 구년(지정=至正이십년) 경자 하사월에 성계의 아버지 자춘이 마흔 여설 살의 장년으로 세상을 떠났다.
 
202
그 때는 서울 출입이 잦고 그의 무용으로서 공민왕께 벼슬아여 만호(萬戶=벼슬)가 된 성계는, 창황이 함흥(함흥에 이사한 때였다)으로 내려왔다.
 
203
이 집안의 맏아들 이만호는 아버지의 시신 앞에 안장서 울음 섞인 소리로 하소연하였다.
 
204
『아버님, 왜 좀 더 생존해 계시지 못하셨읍니까? 지금 바야흐로 큰 꿈을 이루려고 첫 발자국을 내짚었거늘, 그 성공을 보시기 전에 왜 벌써 떠나셨읍니까?』
 
205
자, 인제는 좋은 자리를 구해서 시신을 안장을 하여야겠다.
 
206
슬픔 가운데서도 복지(福地)를 구하기 위하여 널리 사람을 내세워 알아 보았다.
 
207
그 어떤 날, 밖에 나갔던 동복(童僕)이 숨을 허덕이며 달려왔다.
 
208
『왜 이리 소란스러우냐?』
 
209
『상주마님, 저 다른 게 아니라요, 저 방금 동산(東山) 앞으로 중 둘이 지나가면서 여기 명당이 있기는 있구만 아는 사람이 없구나 하면서 돌아보며 돌아보며 가요.』
 
210
『무얼?』
 
211
재처 물으면서 이만호는 벌써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212
『어디쯤이냐?』
 
213
『함관령(咸關嶺) 쪽으로 가던걸요.』
 
214
일변 들으면서 말에 오른 이만호는 말을 전속력으로 달려서 함관령 쪽으로 갔다.
 
215
그가 앞서 가는 중을 뒤따른 것은 함관령에 다 다다라서였다.
 
216
『대사! 대사!』
 
217
말에서 고함을 지르고, 그 소리에 두 중이 돌아볼 때는, 그는 어느덧 중의 앞에까지 이르러서 말에서 내렸다.
 
218
『대사! 명당이 어디 있소?』
 
219
『?』
 
220
『동산에 명당 자리고 있다고 그리셨지요?』
 
221
『빈도는 알 수 없는 말씀이외다.』
 
222
『무얼?』
 
223
무인으로서의 성급한 이성계는 한 순간 주먹으로 모여드는 힘을 느끼면서 달려들려 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고 억지로 긴장을 약간 삭였다.
 
224
『대사! 소원이올시다. 좋은 구멍에 어버이를 모시고자 하는 자식의 정성이외다. 너무 괄시 마시고 가르쳐 줍시오.』
 
225
『글쎄올시다.』
 
226
늙은 중과 젊은 중이었다. 늙은 중은 젊은 중을 보았다.
 
227
젊은 중은 늙은 중을 마주 보았다. 그런 뒤에야 응하였다.
 
228
─.
 
229
『글쎄올시다. 당신의 효성보다도 당신의 기골을 보고 가르쳐 드릴까?』
 
230
『네, 제발─』
 
231
『그럼 돌아서 갑시다.』
 
232
그들은 다시 돌아섰다. 돌아서서 다시 동산까지 뒷걸음 쳤다.
 
233
『구멍이 좋은 것이 둘이 있소이다.』
 
234
『어떤 것 어떤 것이오니까?』
 
235
『하나는 제왕(帝王)의 구멍, 그 구멍에 쓰면 자손에 제왕이 생겨날 것이요, 하나는 장상(將相)의 구멍, 그 구멍에 쓰면 자손에 청사상에 이름 떨칠 위걸이 생겨날 것이 외다. 보아하니 제왕가의 인물은 아닌 듯하니 장상혈을 가르쳐 드리리다.』
 
236
말을 듣는 동안 이만호의 가슴은 놀랍게도 방망이질 하였다. 여기 자손 중에 임금이 생길 구멍이 있다 한다. 그 구멍을 어찌 놓치랴.
 
237
『아니올시다. 상혈을 가르쳐 줍시오.』
 
238
『그게 무슨 말씀이오?』
 
239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란 최상(最上)을 겨누어야 겨우 하지상(下之上)쯤은 얻는 것─. 어찌 미리부터 하(下)를 구하리까?』
 
240
늙은 중은 또 다시 젊은 중을 굽어보고 빙긋이 웃었다.
 
241
『당신의 기골이 그만 뱃심은 넉넉히 있음직하오. 그러면 상혈을 가르쳐 드리리다.』
 
242
중에게서 명당 자리를 자세히 알아가지고 거기다가 잊지 않도록 표적을 할 때에는, 이만호의 얼굴에는 초상 상제답지 않은 희열의 웃음이 넘치어 있었다.
 
243
갖 별 임시에 두 중에게 사례를 하며 그 이름을 물으니 늙은 중은 뇌옹(懶옹(翁))대사요, 젊은 중은 그의 제자 무학(無學)이었다.
 
244
『산소 자리가 좋아서 이후 벼슬에 붙는 날이 있거든 오늘의 은혜를 그 날 백 곱하여 갚으리라.』
 
245
『네, 그 대신 경계하는 말씀은 자리의 영험으로 이 뒤 뜻 안한 높은 자리에 오르실 때가 계시면 그 날 불도(佛道)를 너무 학대하지 맙시요.』
 
246
이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두 중은 갈 길을 갔다.
 
247
아버지를 명당에 안장하고 이젠 고향에 아무 마음 걸리는 일이 없는 이만호는, 무서운 야망을 품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의 벗이요 겸하여 보조자되는 퉁두란도 고려 왕조의 무관의 한 자리를 얻어 하고 있었다.
 
248
본시 용맹과 지혜가 사람의 위에 서는 그는 벼슬에 붙으면서 나날이 높아져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놀라운 꿈이 실현될 듯 싶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애처롭게도 중도에 서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249
왕(공민왕)의 신임이 차차 두터워 가려할 때에 무서운 인물 하나이 나타난 것이었다. 마침 왕후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승하하였다. 왕후를 몹시도 사랑하던 왕은 왕후 의 승하에 낙심천만하여 세상만사가 모두 귀찮아졌다. 그래서 편조(遍照)라는 중을 불러 올려서 환속(還俗)을 시키고 신돈(辛旽)이라 이름까지 내려 주고 대소사를 모두 신 돈에게 일임하여 버렸다.
 
250
신돈은 놀라운 인력과 감화력과 수완을 가진 인물이었다. 아직껏 대대로 고려의 명문으로 내려오던 호가(豪家)들을 모두 눌러 버리고 평민과 약자(弱者)를 위한 정치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재래의 권력가 중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악매성과, 그와 반대로 평민 계급에서 일어나는 감사의 하례 아래서, 이 나라의 대표자인 신돈의 정치는 나날 이 진척되었다.
 
251
이 신돈의 위력에 눌려서 문무 고관들은 손가락 하나 쓸여지가 없었다. 신돈을 모해하려는 공작도 상당히 하여 보았지만, 임금의 절대 신임과 백성의 지지 위에 서 있는 신돈의 세력은 어찌할 바가 없었다.
 
252
이 신돈의 위력에 눌려서 이만호는 가슴에 품은 무서운 야망을 잠시 감추고 은인 생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53
중앙 무대를 꿈꾸고 상경하였던 그는 신돈의 명령으로 변방을 지키러 돌아다니기에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놀라운 안력을 가진 신돈은 이만호의 야망을 짐작하였든지, 잠시도 중앙에 멈추어 두지 않고 이 일이 끝나면 저 일로, 그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로 변방으로만 내보냈다.
 
254
돌아다니는 동안 민심이나 수습하여 두려 하였지만 천하 백성이 신돈 한 사람만을 흠앙하는 때라, 아무리 전쟁은 잘한다 할지라도 일개 무장에게 마음을 주지를 않았다.
 
255
이러한 불만하고 불쾌한 세월을 보내기 수 년, 공민왕 이십 년에 신돈이 왕의 노염을 사서 명 아닌 목숨을 끊긴 뒤에야 비로소 다시 중앙 무대에 나타났다.
 
256
중앙 무대에서는 두 손을 들어서 환영하였다. 오랫동안 중의 위력 아래 눌려 있던 동지들이니만치 서로 동정하는 마음이 적지 않은 위에, 그 사이 신돈의 명령으로 변방으 로 돌아다니면서 나타낸 그의 혁혁한 무공까지 아울러 그의 전도에는 다시금 광명이 나타났다.
 
257
신돈 죽은 뒤의 고려의 조야에는 정치가가 없었다.
 
258
온 몽뚱이가 한 개 충성의 덩어리인 듯 한 최영(崔塋)은 단지 충성 하나밖에는 모르는 일철한 노인이었다.
 
259
이색(李穡)은 그 학문으로는 일대의 고사(高師)이었지만, 문사이니만치 역시 정치적 수완은 없는 인물이었다.
 
260
그 이하의 사람들은 논지할 여지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261
이러한 가운데를 뛰쳐들은 이만호는 그 지배력으로, 정치적 수완으로, 군사적 수완으로 고려를 대표하는 유일의 인물이었다. 온 고려는 이만호의 놀림감같이 그의 손아귀 아래서 놀았다.
 
262
공민왕도 드디어 승하하였다. 그의 좋은 보조자이던 신돈을 일시적 의혹 때문에 죽여 버리고, 그 뒤 사년 간을 미칠 듯한 고적 아래서 지내던 그는, 신돈 죽은 지 사 년 후에 드디어 영원의 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그의 외아들인 우왕(禑王)이 철 모르는 소년의 몸으로서 고려 이천리의 군주로 들어앉았다.
 
263
이 우왕 재위 십 사 년, 그 뒤를 이어 창왕 재위 일 년, 또 그 뒤의 공양(恭讓)왕 재위 사 년, 합계 근 이십 년이라는 고려 말년은 오로지 한낱 이시중 (그때는 성계가 시 중 벼슬에 있었다)의 놀림감에 지나지 못하였다.
 
264
우왕 십 사 년에는 고려 최고의 지주(支柱)인 최영을 죽여 버리고 뒤이어 임금까지 폐하여 정배보냈다가 죽이고, 우왕의 소년 왕자 창(昌)을 임금으로 올려 놓았다가 일 년 만에 다시 내쫓고 뒤따라 죽이고, 왕의 먼 일가되는 요(瑤)를 모셔다가 임금을 삼았다가 사 년만에 그 때 신진 재상 정몽주를 죽이고 뒤따라 왕까지 내쫓고…
 
265
여기서 드디어 사십 년 간을 꿈꾸던 고려 임금의 자리에 오를 동안, 고려라는 한 국가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못하는 모두가 이시중이 줄을 당기는 어릿광대의 놀음이었다.
 
266
이러한 짧지 않은 기간을 이전 백두산 천지에서 맺은 굳은 언약을 퉁두탄은 한결같이 지켰다.
 
267
우왕 오 년 기미(己未)─.
 
268
호남 방면에 왜적(倭敵)의 난이 심하여 연해주에는 인민이 거처하지 못하고 송장이 수백리에 널려 있는 참담하고 어지러운 시국에, 고려 조정에서는 왜구를 막기 위하여 이시중과 퉁두란을 내어 보냈다.
 
269
적장(敵將)은 아기발도(阿只拔都)라 하는 십 오세 난 소년 무장으로서, 비록 소년이라 하나 백마에 금갑으로서 용맹 무쌍하여 누구 감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270
서로 대진한 날, 이시중은 소년 무장 아기발도의 이 위용을 바라보았다.
 
271
진두에 앉아서 이것을 바라볼 동안 이시중의 머리에 문득 생각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 자기가 일개 산촌의 표랑객으로서 어떤 날 한가히 영흥 어느 산골에 누 워 있을 때에 갑자기 자기의 앞에 뛰처나온 일개 소년 용사의 위용이었다.
 
272
같이 홍안의 미소년─ 삼십 년 전의 그 홍안의 미소년은 오늘날 자기의 곁에서 삼십 년 간을 꾸준히 자기의 놀라운 야망을 성취하게 하도록 노력하여 주고 있지 않은가?
 
273
그것을 생각하매 지금 고려 군사와 대전한 홍안의 소년 장군은 비록 원수지간이나마 죽이기가 싫었다.
 
274
이시중은 곁을 보았다. 삼십 년 전의 홍안의 미소년이던 퉁두란─ 지금은 무르익고 완숙하였다가 지나쳐서 차차 초로(初老)의 경에 들어서려는 명장군은 무엇을 생각하는 지 묵연히 앉아 있다.
 
275
『여보게.』
 
276
『예?』
 
277
펄떡 머리를 든다.
 
278
『저것─ 저게 아기발도지? 마치 계집앨세 그려.』
 
279
『……』
 
280
『삼십 년 전의 자네도 저와 같았네.』
 
281
퉁두란이 그의 무겁고 완숙한 눈을 들어서 저으기 이시중을 보았다. 한참을 말없이 이시중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역시 말없이 곁에 놓인 전통과 활을 끌어당긴다. 이시중 은 갑짜기 온몸으로 느끼는 살기에 몸서리쳤다.
 
282
『뭘 하려나?』
 
283
『아기발도를 씁시다.』
 
284
무표정한 무거운 음성이었다. 이시중은 다시 건너다 보았다. 건너편 적진 앞의 소년 장군은 걸상에 걸터앉아서 역시 이 쪽을 바라보면서 부장과 무슨 담소를 하고 있다.
 
285
적장도 알 것─ 이편의 이시중 자기와 퉁두란은 강궁(强弓)으로 천하에 이름 높은 사람─ 제 아무리 금갑은 입었기로서니 태연히 이렇듯 마주 앉았는 것은 그의 담력이 얼마나 한지 알 수가 있었다. 죽이기는 아까왔다. 이시중은 미안한 듯이 퉁두란을 보았다.
 
286
『우리 생금(生擒)해 볼까?』
 
287
『그게 무슨 말씀이오? 길들지 않을 맹수는 생금했다가는 도리어 해를 보는 법이외다.』
 
288
이 말이 채 맺지 못하여 그의 손에서는 백우전(白羽箭) 이 아기발도를 향하여 날아갔다. 한 대, 두 대, 세 대─ 그러나 의외였다. 퉁두란의 강궁도 모두 아기발도의 입은 갑옷에 튀기어서 그냥 튀어나 버렸다. 그리고 소년 무장은 자기의 갑옷을 믿음인지 화살이 오는 것을 알지도 못 하는 체하고 부장과 수작만 하고 있다.
 
289
『호! 쓸 만한 소년인데요. 꼭 죽여야겠읍니다.』
 
290
『그럼 어떻게 하나? 아, 참 이렇게 해볼까? 내가 발도의 투구끈을 맞춰 끊고 손쓸 사이 없이 자네는 투구를 맞춰 떨구고, 그 뒤에 내가 적장의 머리를 쏘고…』
 
291
『그러지요.─ 아니 내가 투구끈을 쓰리다. 형님은 덕을 쌓아야 할 분, 부득이하면 여니와 적악(積惡)은 삼갑쇼.』
 
292
그리고 다시 활을 들어서 아기발도의 투구끈을 쏘았다.
 
293
겨냥에 틀림이 없어서 투구끈이 탁 끊어지는 동시에 이시중의 살은 투구를 맞춰서 적장의 머리가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날아간 퉁두란의 살은 적장의 양미간에 깊이 박혔다.
 
294
왜구, 여진(女眞) 등 뒤따라 생기는 전쟁에 나가서도 퉁두란은 할 수 있는껏 이시중이 살인(殺人)할 기회를 막았다. 살인 약탈 등 적악(積惡)은 자기가 맡기고, 덕(德)과 공(功)은 이시중에게로 돌렸다.
 
295
이리하여, 퉁두란과 같은 좋은 보조자의 힘을 빌어서 일변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일변으로는 덕을 쌓으며 또 한편으로는 고려의 정국을 교란하다가 공양왕 사년에 드디어 고려 오백 년의 사직을 둘러엎고 스스로 서서 임금이 되었다.
 
296
이전에는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다니지를 못하던 대궐─ 더우기 용상에 걸터앉아서 과거의 동료들에게 등극 축하를 받을 때는 신왕의 문화은 터질 듯이 기뻣다.
 
297
그 날 공식의 축하가 끝나고 약간 피곤한 몸을 (어제까지도 공양왕이 거처하던) 수창궁 편전에 쉬려 할 때에, 과거 사십년 간을 갖은 신고를 함께 겪던 친구 퉁두란이 사식(私式) 으로 뵈오려 들어왔다.
 
298
들어온 퉁두란─ 묵연히 신왕에 앞에 꿇어 앉았다.
 
299
『전하, 하직을 고하려 왔읍니다.』
 
300
무얼? 깜짝 놀라서 신왕이 눈을 크게 할 때에, 퉁두란의 눈에서는 커다란 눈물이 떨어졌다.
 
301
『인젠 쓸 데 없는 해골, 한가히 여생이나 보내고 싶습니다.』
 
302
『여보게!』
 
303
─ 입에 익은 말이 나왔다.
 
304
『그게 무슨 말인가? 가다니 어디를 간단 말인가?』
 
305
『그 사이 사십 년 간 신의 활에 끊어진 생령이 수만 명이 아니오니까? 전하의 총애는 지극할지나 지옥의 고생이 두렵사오니, 축발위승하고 그 원혼들의 명복이나 빌면서 여생을 보낼까 하옵니다.』
 
306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오르기는 올랐지만 사업은 이제부터야. 그런데 이런 때에 자네를 잃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더 있어서 내 일을 도와 주어야 지.』
 
307
퉁두란은 눈을 약간 치떴다. 신왕의 옷깃을 바라보았다.
 
308
갑옷이 아니요, 찬란한 용포─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내리뜨면서
 
309
『전하, 이전 백두산서의 약속이 있읍니다. 신도 이전에는 이 용상을 외람되오나 꿈꾸던 사람이올시다. 백두산의 약속대로 전하께서 이 높으신 위에 오르시기까지는 견마 의 노를 아끼지 않았읍니다마는 신도 이전에 꿈꾸던 이 용상 앞에 끓어서 전하를 우러를 생각은 추호도 없읍니다.』
 
310
할 말이 없었다. 무어라 대답하랴─.
 
311
그의 심경도 넉넉히 짐작이 갔다. 과거에 당신과 경쟁자의 지위에 서서 함께 이 용상을 꿈꾸던 쾌남아, 그 때에 당신과 경쟁하던 이 자리 앞에, 과거의 경쟁자에게 신사 (臣仕)할 생각은 없다는 그 심경은 양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는 단지 백두산 상봉에서 한 한 마디의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오늘까지 그렇듯 당신께 충실하였나? 그 사 이 사십 년 간을 거기 대하여는 한 마디의 말도 없으므로, 신왕은 물론 인젠 퉁두란이 영구히 당신의 사람이요, 이후 성공하는 날에는 최고의 대우로써 맞으려고 내정하였던 바이어늘, 그는 장래의 영광 등은 생각지도 않고 오 로지 남아의 한 마디 약속에 속박되어 지금껏 그렇게 충실하였나?
 
312
놓아 주기 아까왔다. 그러나 그의 심경을 짐작하니 또한 붙들 수도 없었다.
 
313
사십 년 간의 친구가 홀연히 당신을 버리고 간다, 함에 신왕은 가슴이 쓰릴 뿐이었다.
 
314
이튿날 신왕이 과거의 정의를 생각하여 전별연이라도 열려고 시종을 퉁두란의 집으로 보냈더니, 그는 벌써 어제 대궐에서 나오는 길로 어디론가 종적을 갖추어 버린 것이 었다.
 
315
그 뒤에도 신왕은 무척이 애를 써서 과거의 친우의 행방을 탐색하여 보았지만, 퉁두란의 행방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316
그 이래 퉁두란은 역사(歷史)의 표면과 지구(地球)의 표면에 완전히 사라졌다.
 
 
317
(一九三六年 九月 <野談> 所載)
【원문】왕기(王氣)는 벋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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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왕기는 벋어서 [제목]
 
  김동인(金東仁) [저자]
 
  야담(野談) [출처]
 
  소설(小說) [분류]
 
  야담(野談) [분류]
 
  역사소설(歷史小說) [분류]
 
◈ 참조
 
 
  # 퉁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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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기(王氣)는 벋어서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