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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문동록(杜門洞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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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4
김동인
1
두문동록(杜門洞錄)
 
 
2
我太祖受命初, 七十二生不肯歸化, 說門於谷 外閉而不開, 令赴擧則執鞭而出曰, 吾將行商, 爭先走避, 以至殺身成仁. — 趙遠命의 記蹟碑中 一節
 
3
太祖親臨敬德宮, 說科欲爲招諭, 七十二子 解冠代着蘆竺負草席, 踰敬德宮前峴而去, 無一人就試, 太祖震怒, 命焚其蘆. — 實記中 一節
 
4
「이태조 등극 후에 고려유신(遺臣) 七十二인은 태조께 귀화하기를 꺼리어서 만수산 아래로 피하여 거기 숨어 문을 닫고 나오지 않고 정부에서 부르면 그들은 채찍을 들고 나와서(우리들은 장사아치나 되겠다)고 하면서 서로 다투어 피하다. 하릴없이 그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5
「태조가 고려의 유신들을 부르고자 경덕궁에 친림하여서 과거를 볼 새 七二인은 관을 벗어 던지고 패랑이를 쓰고 초석을 지고 경덕궁 앞 재를 넘어서 모두 피하여 한 사람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 진노하여 그들의 오막살이를 불놓았다.」
 

 
6
명태조 홍무 二十五년 임신 七월 열 엿샛날.
 
7
그간 오백 년 간을 누려 오던 왕씨의 사직이 꺾어져 넘어가고, 어제까지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있던 무장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서 이 삼천리 강토를 호령하게 되었다.
 
8
오래 벼르던 야망을 여기서 성공한 신왕의 득의는 여간이 아니었다.
 
9
돌아보건대 청년 시대에 안변 설봉산 토굴에 숨어있는 중 무학에게서 「그대는 장차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들은 이래, 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잊히지 않던 야망을 여기서 비로소 성공을 한 것이었다.
 
10
공민왕 때에는 그 때의 재상 신돈의 위력에 눌리어서 어디 감히 엿볼 기회조차 없었지만, 신돈도 죽고 그 뒤로 공민왕도 승하하고, 어린 임금 우왕(禑王)이 등극한 이래로 차차 차차 구체적으로 꾸미어오던 놀라운 연극이 오늘날 성공을 한 것이었다.
 
11
어젯날까지도 같은 왕의 아래서 함께 신하로 지내오던 동료들이 오늘부터는 당신의 앞에 허리를 굽히고 신사(臣仕)를 하는 모양도 공명심의 한편 모퉁이를 두드려주는 통쾌한 일이었지만, 그것보다도 삼천리 강토 — 국조 단군에서 비롯하여 삼천 팔백 년 간을 동방의 예의의 나라로서 이름 높은 오랜 강토 — 선조(先朝) 태조 왕건의 모두 통일하여 한 덩어리로 만든 이 커다란 땅덩이가 오늘부터는 당신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는 무엇에 비길 수 없이 기뻤다.
 
12
「이미 내 손 안으로 들어온 이상은 좋은 국가를 만들어서 첫째로는 이 백성으로 하여금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 게 하고 둘째로는 내가 단지 사직을 탐내어 반역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 알려 둘 필요가 있다.」
 
13
이리하여 신왕은 이 새로 얻은 사직을 튼튼히 할 계획을 세웠다.
 
14
그러나 신왕은 한 가지의 점을 깊이 생각지 않았다. 그새 천여 년 간을 이 나라의 국교(國敎)로 되어 온 유교가 가르친 바 <충신은 불사이군(不仕二君)>이란 사상이 깊이 깊이 이 백성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점을 신왕은 잊었다.
 
15
그새 고려 왕조를 섬길 때부터 이 신왕과 밀계(密計)를 같이하던 재상 (정도전, 조준, 남은, 심덕부, 배극렴, 그 밖)들은 물론 이 새 국가를 찬성하였지만, 고려조의 다른 신하들은 신왕의 부름엠 응하지 않았다.
 
16
전조 명유 가운데 아직 남은 이색(李穡)이며 길재(吉再), 원천석(元天錫)외의 많은 재상들을 불러 보았지만, 이 부름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17
그래서 그 뒤에는 먼젓번 불러 본 사람에게 버금가는 사람들을 불러 보았지만, 그래도 역시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18
전조 공민왕 때부터 등과를 해서 그 벼슬이 삼중대광 시중에 까지 이르고, 그의 높은 학문으로 고려 온 백성의 흠앙을 받던 바 명유 이색(名儒李穡)은 신왕과 본시부터 고유도 깊었다.
 
19
그래서 신왕은 등극하면서 곧 이 유명한 학자를 불렀다.
 
20
이 학자를 당신네 편에 끼기만 하면 이 학자를 흠앙하는 많은 선비와 백성이 이 국가에 귀화하겠으므로 —.
 
21
그러나 이 유명한 선비가 신왕에게 취한 태도는 어떠하였나?
 
22
신왕의 부름에 응하여 이색은 입궐은 하였다. 그러나 신왕에게 대하여 가벼이 읍한 뿐 절하지 않았다. 불쾌한 일을 참고 신왕은 탑(榻)에서 내려서 정중히 이색을 맞았다.
 
23
그러나 좀 뒤 시강 때에 왕이 다시 탑에 오르매 이색은 벌떡 일어나며,
 
24
『이 노부(老夫)는 앉을 자리가 없소이다.』
 
25
하며 딱 버티고 섰다.
 
26
너무도 무엄한 일이었다. 그러나 왕은 꾹 참았다. 그리고 간곡한 말로 이 새로운 나라를 도와 달라고 간청을 하매 이색은,
 
27
『망국의 늙은 선비가 참람되이 무엇을 지껄이리까? 늙은 몸이 고향에 돌아가 해골 묻을 자리나 준비하게 해 주시면다.이겠습니다.』
 
28
하고 그냥 어전을 물러나가 버렸다.
 
29
그리고 이내 그 뒤 사 년 간을 산수간에 방황하다가 갑자가 망국의 유한을 품은 채 한 많은 일생을 수수께끼의 죽음을 하여 마쳤다.
 
30
정몽주, 이색과 함께 삼은(三隱)으로 이름 있는 길재(冶隱吉再)는 또 어떠하였는가?
 
31
길재는 고려 조 창왕(昌王) 시대에 문하주서(門下注書)로 있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신왕, 그 때의 이시중이 창왕을 신돈들의 종자라는 누명을 씌워서 왕위에서 쳐내고 공양을 세울 때에, 분연히 관직을 모두 내어던지고 고향 선주(善州)로 내려가고 그의 늙은 어머니를 섬기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32
지금 신왕의 다섯째 아드님인 방원 대군과 동문 수학을 한 새였다. 그런 인연으로 신왕이 등극을 하고 길재를 불러 보았다. 그러나 길재도 나오지 않았다. 부르는 때마다 매번 글월로써 사양하는 뜻을 나타낼 뿐,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로부터 썩 뒤에 방원은 관부에 명해서 억지로 길재를 서울까지 데려왔다. 그리고 박사를 제수하였으나 길재는 여전히 입궐치도 않고 그냥 사퇴해 버리고,
 
33
「계집에게는 두 지아비가 없고 신자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 하옵니다. 포의(布衣) 본시 한미한 선비로서 전조에 벼슬하여 문하주서에 까지 이르렀는데, 불행히도 임금을 잃은 바 되었사오니 인제는 이 포의로 하여금 고향에 돌아가 늙은 어미나 봉양하며 여생을 보내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34
이런 뜻의 글월을 올리고는 다시 고향으로 숨어버렸다.
 
35
조윤(趙胤)은 이 신왕의 총신 조준(趙俊)의 아우였다.
 
36
그러나 형과 뜻을 달리한 조윤은 신왕을 섬기려 하지 않았다.
 
37
일찍 아직 고려 왕조 시대에 윤은 형 준의 마음에 반란의 뜻이 있는 것을 보고, 통곡을 하면서 형을 말린 일이 있다.
 
38
『우리 집안은 이 나라의 귀한 동량이 아니오이까? 이 국가와 운명을 같이해야 할 우리부터가 이러해서야 어떻게 되겠읍니까?』
 
39
하면서 이시중과 떨어지기를 간원하였다.
 
40
형 준은 아우와 뜻을 달리하고 이시중과 결탁하여 새 나라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자기는 이 새 나라의 개국공신이 되었으나, 낡은 나라에 그냥 충성된 동생의 안위가 근심되어, 개국 공신의 이름 가운데 동생의 이름까지 적어 넣었다. 이 덕에 조윤은 개국 초에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제수하게 되었다.
 
41
그러나 뜻에 없는 벼슬을 받은 윤은 즉시로 이것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지금껏 오던 자기의 이름 윤(胤)을 견이라 고치고 자(字)를 종견(從犬)이라 하고 두류산(頭流山) 속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42
「나라를 잃고 죽지 못한 것은 개나 다름 없다.」
 
43
「주인을 잊을 수 없는 것이 개와 같다.」
 
44
이러한 뜻 아래서 스스로 개라 부름이었다.
 
45
두류산에서 다시 청계산(淸溪山)으로 — 산간으로 방황을 하며 봉우리에 올라가서는 서울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고 하므로, 남들은 그 봉우리를 망경봉(望京峰)이라 일컬었다.
 
46
그 썩 뒤에 왕은 이 충성에 감복하여 몸소 그를 만나 보았는데 조윤 — 변하여 지금은 조견 — 은 역시 절하지 않고 불경한 말을 함부로 하였다. 왕은 모두 관대히 보았다. 그리고 산에 석실(石室)을 지어 주어서 거기 있으라 하였으나, 조견은 그것도 싫다하여 양주 송산으로 또 피하여 버렸다.
 
47
구조의 학자로 원천석(元天錫)도 불러 보았지만, 원천석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 후년 태종은 몸소 치악산 속에 원천석을 찾은 일이 있었지만, 원천석은 몸을 피하여 만나지도 않았다.
 
48
이 원천석이 후일 죽을 때에 자기의 자손에게 유언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천석 생존 시에 저술한 야사(野史)를 넣어둔 궤짝을 이후 대대로 후손에 성인(聖人)이 나지 못할진대 열어 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대를 지나서 증손 시대에 드디어 그 궤짝을 열어보니, 거기는 고려 말년의 역사가 그대로 적히어 있었으니, 말하자면 이씨조선에서 만들어낸 고려사와는 대상부동한 것으로서, 그것을 발견한 후손들은 망지소조하여 이런 것을 그냥 두었다는 멸족을 당하겠다고 즉시로 불살라 버렸다.
 
49
김자수(金自粹)는 신왕과 본시부터 친교가 있던 사람으로서, 신왕 등극하여 몇번을 불렀지만 응치 않고, 마지막에 태종이 형조판서에 명하여 부를 때에 김자수는 당일로 가묘(家廟)에 하직하고 추령으로 몸을 피하여,
 
50
『오늘날이 있을 줄야 뉘 알았느냐?』
 
51
고 통곡하고 독약을 먹고 자진하였다.
 
52
김진양(金震陽), 서진(徐  ), 이숭인(李崇仁), 이집(李集), 이고(李皐), 윤충보(尹忠輔), 그 밖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모두 불러 보았으나, 모두 한결같이 이 신왕을 피하여 몸을 숨겨버렸다.
 
53
뿐만 아니었다.
 
54
도대체 백성들부터가 이 신국가 건설에 대하여 냉담하기가 짝이 없었다.
 
55
새 국가의 재상들이 위의 당당히 행차를 늘이우고 길을 가면, 백성들은 모두 모퉁이로 들어가 숨지만, 이것은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눈허리가 시어서 보기 싫어 피하는 것이었다.
 
56
재상들의 행차는 커녕, 왕의 거동에 대하여도 문을 굳이 닫고 나와 보지를 않았다.
 
57
공민왕으로부터 우왕, 창왕, 공양왕의 네 대의 고려 임금을 섬긴 경험이 있는 신왕으로서는 이 일도 매우 마음에 걸리었다.
 
58
고려조 시대에는 왕의 거동이라도 있으면 가가호호의 남녀 노소가 모두 길에 나와서 환호성을 내며 절하여 거동을 보지 않았던가? 더욱이 소년왕 우(禑)는 흔히 홀로 말을 타고 나다닌 일까지 있었는데, 이 소년왕의 영특한 자태가 궁문 밖에 나타나면, 백성들은 모두 왕을 에워싸고 기쁨에 넘치는 축수를 드리지 않았던가? 이리하여 그 때는 왕과 백성은 그야말로 부자의 사이와 같은 친애를 서로 주고 받지 않았던가?
 
59
거기 반하여 지금의 상태는 너무도 쓸쓸하였다.
 
60
당신과 몇 당신 신하들은 모두 새 국가를 건설하였다고 기쁘다 덤비지만, 함께 기뻐하여 주어야 할 백성들은 왜 이다지도 무관심한가? 무관심을 넘어서 찬 눈으로 보고 있나?
 
61
말하자면 이 새 나라는 온 국민의 나라가 아니라, 당신 네 수개인의 나리인 듯한 감이 있었다.
 
62
「당신네는 당신네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63
백성들이 새 나라에 대한 태도는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64
이것은 웬 까닭일까?
 

 
65
돌아보자면 당년보다도 더 오백년을 소상(溯上)하여 고려 왕국 건설 초.
 
66
위걸 왕건(王建)이 일어나서 신라를 합병하고, 뒤이어 궁예와 진훤을 통일 합병할 때 — 천 년의 기나긴 신라 사직을 신흥 고려 태조 왕건이 곱다 랗게 물려받을 때, 신라의 백성들은 아무 말 없이 이 새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가? 신라의 재상들은 아무 말 없이 새 임금께 신사하지 않았던가? 신라의 왕까지도 이 새 임금의 인격에 탄복하여, 스스로 나라를 바치고 당신의 가족까지 거느리고 고려 서울로 와서 여생을 보내지 않았던가?
 
67
천 년의 긴 사직이 남의 손으로 넘어갈 때에도 사소한 기침도 없었거늘, 지금 겨우 오백 년의 사직이 넘어가는 데 왜 이다지도 말썽이 많은가?
 
68
더구나 왕건이 신라를 합칠 때는 수차 군사의 힘까지 빌었거늘 당신이 고려를 삼킴에는 한 개의 병력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낡은 신하와 백성들은 왜 이다지도 냉담한가?
 
69
한 개의 국가라 하는 것은 임금과 백성이 합하여 비로소 성립되는 것 — 지금 이 새 나라는 임금은 있으나 백성이 없다.
 
70
여기서 이 새 임금은 비로소 덕화(德化)라는 점을 느꼈다. 지금 이 나라의 백성들은 당신의 위력에 당치 못하여 반대성은 못 올리나, 위력으로는 머리는 수그리게 할 수 있지만, 마음을 수그리게 할 수는 없다는 점을 비로소 느꼈다. 그리고 덕화의 방면을 베풀기 위하여서는 당신은 그 그릇이 아님까지도 알았다. 이리하여 급거히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부르기로 하였다.
 
71
이전 안변 설봉산 토굴에서 만나본 일이 있는 무학대사는 오늘날 신왕 당신께 결함된 듯한 덕화의 방면을 넉넉히 보충할 수 있음직하였다.
 
72
풍문에 들리는 바에 의지하건대 무학대사는 지금 관서 어떤 산사에 숨어 있다고 전한다. 왕은 경기 황해 평안의 세 방백에게 급령하여 무학대사의 있는 곳을 알아서 모셔 오게 하기로 하였다.
 
73
그러면서도 그냥 근심되는 것은 무학대사가 와 줄는지 어쩔지 하는 점이었다. 부르는 사람마다 모두 피하기만 하니까, 무학대사도 안 올 것 같이만 생각되었다.
 

 
74
등극한 지 얼마를 지나지 않은 그 어떤 날, 왕은 편전에서 총신 몇 사람과 같이 앉아서 이 새로 이룩한 나라를 조리할 방략을 의논하다가 문득 탄식하였다.
 
75
『내가 왜 이다지도 덕이 없담!』
 
76
『?』
 
77
총신들은 의아하여 눈을 들었다.
 
78
『내 덕이 공양군(恭讓君)보다도 부족할까? 공양군은 섬겼지만 이성계는 못 섬기겠다 —』
 
79
총신들은 묵묵하였다. 대답할 바를 모른 것이다. 그들도 다 같이 맛보는 쓰디쓴 일. 그들 끼리끼리는 소위 새 나라를 이룩했다고 좋다고 덤비지만, 함께 즐겨하여 주는 사람이 없는 싱거운 국가이었다.
 
80
한참을 묵묵히 있은 뒤에 이번 개국공신 중의 가장 지혜 많은 정도전(鄭道傳)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
 
81
『전하, 과거를 한 번 보여보면 어떠하올는지.』
 
82
『?』
 
83
『과거를 한 번 보여서 구신 중에 단 한사람이라도 취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뒤따라 다른 구신들도 올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상하여 선뜻 혼자서 앞장서기는 힘들지만, 앞장서는 사람만 있으면 뒤따르는 사람도 있을까 하옵니다.』
 
84
지혜 주머니라 불리는 정도전의 의견이니만큼 일리 있는 말이었다.
 
85
『올까?』
 
86
『글쎄올시다. 일변 과거령을 내고 뒤로는 과거에 취시토록 등을 밀면 안 나오려야 할 수 없겠읍지요.』
 
87
『등을 어떻게 밀겠소?』
 
88
『새 정부의 첫 번 과거이니만큼 전조에 벼슬했던 사람도 다시 등제를 하지 않으면 전조 벼슬을 깎아 없애 버린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을 놓아서 전조 태학생이며 무변들이 이번 취시치를 않으면 아마 후환이 있으리라는 소문을 민간에 펼쳐 놓으면 겁 많은 선비깨나 혹은 욕심 많은 무변깨는 올는지도 알리이까? 그리고 단 몇 명이라도 벼슬을 주어 놓으면 체면상 앞장 서지 못했던 전조 구신들도 혹은 어슬렁 기어나올는지도 어찌 알겠습니까?』
 
89
하면서 정도전은 빙긋이 웃었다.
 
90
그럴 듯한 말이었다. 잠시 뒤에 왕도 빙긋이 웃었다.
 
91
『어디 해 보아야 손해될 일은 없으니, 해 보도록 절차를 차리어 보시오.』
 
92
— 이리하여 그 이튿날에는 이 정부의 첫 번의 과거령이 내렸다. 거기는 정도전의 의견대로.
 
93
一, 문과와 무과를 본다.
 
94
一, 전조에 벼슬하였던 사람이라도 이번 다시 등제하지 않으면 전조의 벼슬은 인정하지 않는다.
 
95
一, 새 조정에 대하여 혹은 꺼릴 만한 일을 한 사람이라도 이번에 취시한 사람에게 한해서는 이전의 죄를 말하지 않는다.
 
96
一, 이번 과거는 이 조정의 첫 번 일이니만큼 전조 구신들에게도 특별히 취시하기를 허락한 바이나, 이 다음번 과거부터는 전조에 벼슬하였던 사람들은 조정에서는 다시 안 받는다.
 
97
— 이러한(위협미를 꽤 많이 띤) 과거령이 내렸다.
 
98
그리고 그 한편으로는 사람을 놓아서, 전조에 등제했던 사람으로서 이번 과거에 취시하지 않으면 이것은 분명히 새 나라에 열복치 않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 엄벌이 있을 듯하다는 소문을 널리 퍼치었다.
 

 
99
— 첫날은 문과.
 
100
— 이튿날은 무과.
 
101
이렇게 배정되었다.
 
102
그 첫날 문과 고시일에 왕은 총신들을 거느리고 과거장인 경덕궁(敬德宮)에 거동하였다.
 
103
돌아보아야 모두 초조한 얼굴이었다.
 
104
몇 명이나 오려는가?
 
105
그 새 내밀히 조사한 바에 의지해도 얼마가 올 것 같지 않았다.
 
106
이 군신이 모두 잘 아는 바이어니와, 이전은 과거 때가 가까워오기만 하면 서울 장안의 선비며 무부들은 물론이고, 온 고려 방방곡곡에서 밀려온 무리들로써 서울은 물 끓듯하지 않았는가? 어디를 가도 그 소리, 어디를 가도 그 공론 — 거리, 골목, 교외, 장안, 할 것 없이 과거 때문에 물끓듯하고 서울을 처음 구경하는 시골 과거객들의 두룩거리는 모양이 골목이고 거리고 안 보이는 곳이 없지 않았던가?
 
107
그랬는데 이번은 너무도 쓸쓸하였다. 시골서는 몇 사람 온 듯하였다. 그러나 왔댔자 몇 사람이나 될까?
 
108
『전하, 취시할 시골 문무부들 때문에 장안은 매우 소란한 모양이옵니다.』
 
109
이렇게 말하는 신하도 있기는 있었지만, 그것이 거짓인 줄은 군신이 다 잘 아는 바다.
 
110
초조히 그래도 기다리는 과거 시각.
 
111
예전 같으면 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미리부터 과거장에는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있고, 왕은 느직이 거동을 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왕이 거동한 뒤에도 과장에는 겨우 시골 사람 몇 명이 두룩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112
그 날 과시는 시각을 늦추어서 한 각이나 더 기다려 본 뒤에야 하였다. 그러나 텅 빈 과정에는 시골 선비 몇 명이 꿈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113
그리고 그 날 과거 시각쯤 하여 왕이 임어한 경덕궁 정전에서 건너다 보이는 언덕 마루에는 괴상한 행색의 인물이 뒤를 이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넘어갔다.
 
114
도포를 입고 패랑이를 쓰고 등에는 멍석을 진 수상한 무리들 — 한 눈빨도 이 경덕궁 쪽으로 던지지 않고 머리를 푹 가슴에 묻은 채 터벅터벅 한 사람이 지나가면 그 뒤로는 또 한사람이 달리고 또 그 뒤로도 달리고, 이리하여 적지않은 수효의 사람이 이 마루를 지나갔다.
 
115
초초함과 불쾌함을 참고 오늘의 과거의 총재자로서 정전에 좌정한 왕은, 이 괴상한 행색의 사람들을 그저 넘길 수가 없었다.
 
116
그래서 시신을 불러서 그 행색의 인물들의 정체를 알아 오라 하였다.
 
117
구조의 태학생 — 왕씨 조정의 유생들이었다. 오늘의 이 강제적 과시를 모면할 겸, 또한 장차 이를 액을 피하기 위해서 선조 대대로 살던 정든 서울을 등지고 떠나는 망국 유민들이었다.
 
118
『무얼?』
 
119
격노와 감격.
 
120
이 수상한 인물들의 정체를 알 때에, 왕은 형용키 어려운 감정 때문에 눈에는 눈물이 칵 씌워졌다.
 
121
— 아아, 이렇듯 내가 인망이 없더냐?
 
122
『전하, 진정합시오. 정몽주의 문하에서 오래 주정(朱程) 의 학을 배운 선비들이라 무서운 놈들이옵니다. 그렇지만 설마 무부들이야 안 오리이까. 명일이 있지 않소이까? 명일은 전조 무신들이 죄 취시하러 올 듯하옵니다.』
 
123
왕의 불평한 기색을 보고 남은(南誾)이 곁에서 이렇게 여쭐 때에, 왕은 도리어 불쾌한 눈을 남은의 위에 부었다.
 
124
「온 고려의 민심이다.이시중께로 돌아왔습니다. 이젠 일어섭시다. 낡은 왕씨의 사직을 꺾어 버리고 큰 기업을 새로 세우십시다.」
 
125
매일 이렇듯 졸라서 당산으로 하여금 드디어 일어서서 오늘날 이 자리를 잡게한 인물들이 누구였더냐? 지금 이 아래 늘어앉은 이 인물들이 모두 입을 같이하여 고려의 민심이 죄 당신께로 돌아왔다고 충동치 않았느냐?
 
126
그들의 그 말에 온전히 속은 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려의 민심이 이렇듯 아직도 구 왕조에 연연하리라고는 뜻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 때의 동료, 오늘의 신하들의 말을다.믿었었다. 믿었기에 당신도 일어선 것이다. 만약 이렇듯 고려의 민심이 왕씨를 떠나지 않은 줄 알았더면 애 당초 일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127
그랬더니 지금 이 꼴은 무엇이냐?
 
128
당신의 눈앞에 늘어앉은 이 소위 공신들은 모두 오로지 자기네 각각의 공명을 위하여 거짓말로 속였던 것인가?
 
129
— 백성이 없는 국가.
 
130
왕은 연하여 쓴 입맛을다.었다.
 

 
131
그날 서울을 망명한 왕씨조 태학생은 합계가 七十二인이었다.
 
132
서울 교외에서 차마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서울을 선뜻 떠나지 못하여 돌아서서 구경(舊京)을 슬퍼하던 앞에 태학생들은 거기서 우는 동안에 뒤따르는다. 망명객을 만났다. 이리하여 한 명, 두 명 모이기 시작한 것이 일흔 두 사람이 모였다.
 
133
모두다.아는 얼굴. 전조에 있어서 형이여, 아우여 하며 한 임금을 한 마음으로 섬기던 동지들이었다. 지금 나라를 잃고 임금을 잃고 지위를 잃고 신분까지도 잃은 그들은, 단지 이제는 이 서울에 그냥 있을 수 없다는 생각 아래 지향 없는 망명의 길을 떠난 것이었다.
 
134
목적지도 없고 방책도 없는 망명의 길이었다.
 
135
문하시중 이성계를 섬긴다? 그런 망측한 생각은 하여 본 일도 없었다. 왕씨 이미 없으니 왕씨 아닌 임금이 어디있으랴?
 
136
지금 이 나라의 이름은 그냥 <고려>라 하지만, 그들은 이 새 나라를 고려라 보지 않았다. 이 고려가 아닌 <새 고려>에 신사(臣仕)란 웬 말이냐?
 
137
이리하여 여기서 모인 일흔 두명은 오백 년 고도의 최후를 통곡한 뒤에 황혼의 해를 가슴에 안고 만수산 아래까지 이르러서 거기 이 망국 유생끼리의 한 마을을 만들고 문을 굳게 닫고 일체 세상과의 교섭을 끊었다.
 

 
138
이리하여 전조 문과는 한 사람도 취시한 사람이 없었다.
 
139
그 이튿날 — 무과 과거를 보는 날이었다.
 
140
심사가 불평하여 왕은 이 날은 도대체 경덕궁에 거동하기까지 싫었다. 연하여 왕의 눈에 떠오르는 것은 어제 경덕궁 맞은 편 언덕마루를 타고 넘던 전조 태학생들의 모양이었다.
 
141
오늘 다시 고시를 한댔자 여전히 시골서 올라온 무부 몇 개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그 따위 고시는 중지하고 싶기까지 하였다.
 
142
그러나 새 정부 선 뒤의 첫 번 과거를 흐지부지 해버리는 것은 이 정부의 위신을 더욱 떨구는 데 지나지 못할 것이겠으므로 하릴없이 경덕궁으로 거동은 하였다.
 
143
『무부는 문사와 다릅니다. 오늘은 아마 전조 무신들도 꽤 오리라고 믿습니다.』
 
144
왕의 불평한 안색을 보고 이렇게 위로하는 중신들부터가 도대체 자기네 말을 스스로도 믿지 않았는지라 왕이 믿을 까닭이 없었다.
 
145
그러면서도 행여나 하는 요행심뿐은 그래도 가지고 갔었는데 이 요행심도 또한 헛것이었다.
 
146
어제와 꼭 반대의 방향으로 역시 창덕궁 건너 언덕을 갈(蘆) 쑥더기를 쓴 무부의 무리가 하나 또 하나 서쪽에서 동으로 동으로 넘어갔다.
 
147
무부 — 작은 절에 구애치 않던 호활하던 이 무리.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음침한 얼굴이날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던 그들이어늘, 오늘은 역시 어제의 문사에 지지 않을 만한 힘없는 걸음걸이로 한 사람 또 한 사람 언덕을 넘는다.
 
148
그 날 온종일 왕도 입을 벌려 본 일이 없었다. 신하들도 입을 벌려 본 일이 없었다. 서로 얼굴을 보는 일조차 없이 음침하고 불쾌한 얼굴로 그 잔일을 보냈다.
 
149
저녁 환궁할 때에야 비로소 한 마디 입밖에 내었다 —
 
150
『내 덕이 그다지 없던가!』
 
151
이 자탄에 대하여 무슨 좋은 복계를 하는 재상도 없이 군신은 수창궁으로 돌아왔다.
 
152
— 이리하여 이번 과거에서는 조정에서 목적했던 바 전조 유신들은 문무반을 막론하고 한 사람도 얻지 못하고 시골 선비 몇과 시골 무관 몇을 겨우 얻었을 뿐이었다.
 
153
이런 일 등으로 왕은 당신께 부족한 <덕화>의 힘을 구하기 위하여 하루 바삐 무학대사를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154
그 날 서울을 벗어난 무사들은 하나씩 하나씩 동교에 모여 거기서 四十八인의 집단이 되어 보봉산(寶鳳山)밑에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서 전조 문신들이 밟은 길과 같이 四十八인의 한 부락이 생겨났다.
 
155
— 세상에서 일컫는 바 서두문동(西杜門洞)은 이 문신들의 七十二인이 숨었던 곳이요, 동두문동(東杜門洞)은 무신 四十八인이 숨었던 곳이다.
 

 
156
실패 — 입맛 쓴 실패였다.
 
157
이번 고시에 뽑힌 새 벼슬아치들의 숙배를 불쾌한 마음으로 받은 뒤의 며칠 간은 왕은 내전에서 나오지 않았다.
 
158
연하여 눈 가에 떠오르는 망명 유민들의 모양은 이 왕의 오늘의 자리를 비웃는 듯이 떠나지를 않았다.
 
159
이러한 가운데서 아직도 그래도 바라는 것은 무학대사 수색이었다.
 
160
경기 황해 평안의 세 도 방백에게 명하여 두었으니 지금도 한창 무학의 있는 곳을 찾는 중이겠지만, 어서 찾아내어 지금이 인덕(人德)이 없는 당신으로서 좀 더 중망을 모아서 새 국가의 기초를 든든히 하여야 할 것이다.
 
161
그리고 수일 후 내전에서 비로소 편전으로 나온 왕은 정도전을 불러서 이 국호를 고칠 일을 의논하였다.
 
162
이 국호는 이미 갈기로 내정은 되어 있었지만, 여러 가지의 편의상 나라의 이름을 그냥 고려로 하여 두었다. 그것은 — 첫째로 국호까지 갈면 민심이 새 왕조에 심복치 않을 근심이 있었음이요, 둘째로는 민심보다도 전조의 문무 유신들로 하여금 이 나라는 마치 공민왕에서 우왕으로 — 창왕에서 공양왕으로 — 변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임금만이 변하였지 나 라 자체는 아직 고려국이라는 것을 알려서 심복케 하려 힘이었고, 셋째로는 지금 상국으로 섬기는 명나라에 대한 캄플라아 지상 국호까지 변경하였다가는 이 새 왕조를 명나라에서 인정하지 않을 근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63
그러나 이제는 그런 고려를 다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164
아무리 국호를 그냥 고려라 하여도 전조의 신민은 이 이씨의 이륙한 고려를 왕씨 고려의 연장(延長)으로는 결코 보지 않았다. 전조의 신민이 새 나라를 고려라 보지 않는 이상에는, 구태여 남이 붙인 이름을 그냥 습용해서 불쾌한 연상을 그냥 계속시킬 필요가 없었다.
 
165
명나라 문제도 이제는 캄플라아지뿐으로는 당할 수가 없었다. 전조 유신들의 일부분은 이 이씨의 땅에 머물러 있는 것조차 더럽다 하여, 뒤를 이어서 중원 땅으로 망명을 한다. 그리고 이씨의 새 나라를 싫다하고 중원으로 달아나는 그들인지라, 당연히 그들의 입에서 왕조의 변혁이 가장 나쁜 형식 아래 명나라 조정의 귀로 들어갈 것이다.
 
166
이럴진대 이제는 고려라 함는 낡은 국호를 <조선>이라 고치기로 하였다. 그런 뒤에 이 새 국호의 윤허를 급히 받을 겸 또한 명나라의 의향도 좀 더 똑똑히 알아볼 겸 — 더우기 알아보아서 변명(왕씨 고려를 뒤집어 엎은 데 대한)도 할 겸 해서 명나라 서울로 사신을 또 보냈다.
 
167
그리고 한편으로는 강압 정책을 쓰기로 하였다.
 
168
이건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합칠 때의 예로 미루어 심복시킬 희망으로 그냥 두었었지만, 무장 출신의 성미 괄괄한 이 왕으로서는 오래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169
동두문동에 숨은 전조 무사 四十八인이며 서두문동에 숨은 문사 七十二인을 불러 내려고도 여러 번 왕사가 달려 갔지만, 그냥 두문동은 문을 굳이 닫고 왕사를 만나지도 않았다.
 
170
그러는 한편 서울 백성들에게도 새 정부를 환영하라고 강제하였다.
 
171
뒤따라 내리는 탄압. — 그러나 전조 백성들은 아무리 하여도 이 신왕을 기쁘게 맞지 않았다.
 

 
172
새 나라를 이룩한 뒤에 그 새 나라를 조리하기는 매우 바빴다.
 
173
이 번잡한 용무를(고금에 드문 지혜덩이인) 정도전이 없었더면 도저히 당하여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174
온몸이 지혜로 뭉쳐진 듯한 정도전에게서는 연하여 꾀가 났다.
 
175
집 제도를 고쳤다. 아직껏 집 제도라는 것은, 큰 방은 아래쪽에 등지고 앉으면 동향하게 되고, 건넌방은 남향하게 되는 것으로서, 방 자체는 큰 방은 남향이요 건넌방은 동향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평범하고도 가장 상식적 제도로서, 만약 특별한 정책상 필요만 없으면 인류 가 가질 가장 당연한 건축 제도였다.
 
176
그것을 정도전은 고치게 하였다.
 
177
즉 남향하여 마루가 있고 마루에 붙어서 서쪽에는 큰 방이(동향으로) 마루를 향하여 달리고 동쪽에는 건넌방이 역시 (서향으로) 마루를 향하게 달리도록, 그리고 큰방의 남쪽으로는 부엌이 달리도록, 이런 새 건축 제도를 세웠다.(지금 서울 근방의 보통 집 제도가 그것이다.) 만약 이 집 아랫목에 앉으면 자연히 북향하여진다. 이런 제도의 집에 앉으려면 무가내하고 북면하게 되는 것으로 서, 지금의 새 왕에게 북면하게 되는 것으로서, 지금의 새 왕에게 북면하지 않으려는 고려 백성들에게 집 제도로서 무가내하게 북면케(형식상으로나마) 한 것이었다.
 
178
가옥의 높고 낮기로도 엄연히 귀인의 집과 민가를 구별케 하여, 억지로라도 평민의 지위를 낮추어 놓았다.
 
179
그리고 관권을 우쩍 높이고 정숙케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열복치는 않으나마) 무서워서라도 복종하게 하여 놓았다.
 
180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숭상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일석삼조(一石三鳥)의 격으로서, 한편으로는 불교를 누르고 유교를 숭상함으로써 삼국 명나라에 아첨하여 어서 바삐 삼국의 동정과 윤허를 사려 함이요, 한편으로는 고려 유민들 가운데 유림(儒林)의 동정을 좀 사려함이요, 또 한가 지로는 전조 유래의 종교를 꺾어버리어서 전조의 것은 냄새까지라도 모두 없애려 함이었다.
 
181
이 땅에 허다한 금씨(金氏)라는 성의 금이라는 음은 <쇠>를 뜻함으로서 <쇠>는 나무 <오얏─李氏>를 꺾는 자라 하여 <금씨>발음을 못쓰고 <김>이라고 고치게 하였다.
 
182
관서 사람은 성미가 강직하고 괄괄해서 꺼릴 바 많다 하여, 정부 요로에는 일체로 평안도 사람은 쓰지 않기로 하였다.
 
183
아직껏은 어떻든 회유하여 보려고 노력하던 전조 유신들에게 대한 탄압도 차차 격화하였다.
 
184
그러는 한편으로는 온갖 잔문을 꾸며내어서 미신(迷信) 적으로 이번 이시중이 나라를 얻은 것이 옛날부터 하늘이 작정하였던 일이라는 듯이 말을 펴쳤다.
 
185
그러는 때에 애써 찾던 무학대사가 입경을 한 것이었다.
 

 
186
무학은 황해도 곡산 고달산(谷山高達山)에 숨어 있던 것을 경기, 황해, 평안의 삼도 감사가 함께 찾아가서 왕명으로 서울로 데려온 것이었다.
 
187
왕은 이 옛날 벗을 보고 환희하였다.
 
188
이 왕이 이전 한갓 소년 무장으로 있을 때에 벌써 오늘날이 있을 것을 알아낸 무학은, 왕에게는 진실로 감회 깊은 옛 벗이었다. 그날 밤 조용한 때에
 
189
『대사, 전조 유민들을 심복케 하려면?』
 
190
무학에게 대하여 왕이 이렇게 물을 때에 무학은 잠시를 무표정한 얼굴로 왕을 마주보다가,
 
191
『짧은 세월에 심복케 하기는 불가능할까 봅니다.』
 
192
하였다.
 
193
왕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이즈음 늘 이런 생각이 왕의 마음에 있던 차라 더욱이 뜨끔하였다.
 
194
『전하, 전하는 아까도 고려 태조의 기업을 말씀하시는 듯하오나 고려 태조의 기업과 전하의 기업을 비교하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 하옵니다. 신라 왕조와 고려 왕조는 왕조부터가다.옵고, 고려 태조와 전하는 사람됨이다.옵고, 백성도 또한 신라와 고려를 비길 것이 아니옵니다. 전하와 고려 태조를 비기건대, 고려 태조는 용맹보다 슬기가 더 큰 이옵고 전하는 덕보다 기략이 더 큰 분이옵니다. 또 백성으로 볼지라도 신라 말년에는 정치가 해이되고 군웅이 할거해 있던 시대로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성주(聖主)의 출현을 기다리던 대신에, 고려 말년은 정치가 얼마간에 해이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공민대왕 시대에 편조존사(遍照尊士)의 덕화에 마음껏 멱감은 백성들이라, 그냥 왕씨 사직을 사모하는 백성들일뿐더러, 그 소위 정치의 해이라 하는 것도 말하자면 무엄한 말씀이오나 전하께서 고려 사직을 꺾으려 부러 흐려 놓은 것이니 만큼 백성은 도리어 전하를 꺼리옵고, 고려 사직의 만만세를 축 수하던 처지가 아니옵니까? 말씀하자면 신라 금부대왕은 당신 힘으로 들기 힘든 사직을 고려 태조께 바치신 것이옵고, 고려 최후 삼대의 왕께서는 안 놓으시려는 사직을 전하께서 둘러엎으신 것이오라, 고려 말과 신라 말은 비교할 것이 아니옵니다.』
 
195
무엄하고 대담한 말이었다.
 
196
그러나 왕은 묵묵히 들었다. 마디마디가 가슴을 찔렀다.
 
197
후회도 연하여 났다. 당신만 최영과 힘을 아울러서 이 고려 사직을 붙들기에 전력을 하였다면, 지금 쯤은 이 나라는 꽤 아름답고 훌륭한 나라를 이루었을걸 — 정도전, 남은 혹은 다섯째 아드님 방원 등의 어리떵떵거리는 바람에 공연한 야욕을 내지나 않았던가 하는 생각조차 꽤 강렬히 일어났다.
 
198
그러나 인제는 뒷걸음도 치지 못할 자리였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에는 이 국가로 하여금 훌륭한 국가로 만들고 국민으로 하여금 행복된 국민이 되게 하도록, 이미 저지른 일이라 이제부터라도 정도(正道)하여야 할 것이다. 이미 이룩한 이상에는 이제부터라도 좋은 국가를 만 들어서 마진국의 시조(始祖)와 같이 천재 후까지 웃음을 남겨서는 안될 것이다. 이성계는 자기 야욕 때문에 자기의 임금을 배반하였다는 악명은 결코 남겨서는 안될 것이다.
 
199
좋은 국가를! 좋은 국가를!
 
200
왕은 한참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
 
201
『대사, 지난 일은 지난 일, 인제부터라도 이 백성에게 덕을 베풀기 위해서 오늘 이렇듯 대사를 맞아온 것이외다. 대사는 모든 것을 탓하지 말고 이 백성을 도탄의 경에서 구해내는 데 힘을 써 주시오.』
 
202
무학은 즉시로 응하였다 —
 
203
『전하는 천도를 합시오. 무엇보다도 왕씨를 섬기던 이 백성을 오늘부터 이씨를 섬기란댔자 곧 시행이 되지 않을 것이오며, 시행이 안되면 전하께서는 그 억세신 성격이 거슬리시겠고 거슬리시면 강압을 가해서라도 시행되기를 강제하실 것이며, 강압이 가해지면 백성의 마음은 더욱 빗나갈 것이매, 이 오백 년의 도읍지를 버리시고 천도를 합시오. 그리고 신부의 백성에게 덕으로 임하셔서 전하의 덕화가 온 국내에 미치도록 하는 것이 최량지책일까 하옵 니다.』
 
204
왕은 무학의 말을 들어서 천도하기로 정하였다.
 
205
그리고 새 도읍지가 될 만한 곳을 신하들을 보내어 물색하였다.
 
206
그러면서 흔히 혼자서 속으로 보는 것은 그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는 한 개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이런 이야기 — 때는 공민왕 시절. 어떤 평민 계급의 형제가 길을 가다가 아우가 길에서 황금 두조각을 얻어서 하나는 형을 주고 하나는 자기가 가졌다.
 
207
그런데 그 형제가 양천강(陽川江)강변까지 이르러서 아우는 자기의 금을 강에 내던졌다.
 
208
형은 이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무슨 까닭으로 내버리느냐고 물으매 아우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
 
209
『내 평생 형님을 애모하는 마음이 심했는데 오늘 형님께 금을 드리고 생각하니 투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황금이란 그러고 보니 더러운 것이라 내버렸습니다.』
 
210
이 말에 형도 자기의 가슴을 치며 네말이 옳다 하고 자기의 금도 강에 내던졌다.
 
211
— 이런 이야기.
 
212
아아, 이것은 전혀 그 때 재상 신돈의 위대한 감화력의 소산이었다. 신돈 집정 겨우 육년 간 그런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덕화는 얼마나 일반 민중에게까지 감화되었던가?
 
213
그 후 우왕 십사 년, 창왕 일 년, 공양왕 사 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지나고도 아직도 고려의 왕조를 그렇듯 애타히 사모하는 것은 그 때의 덕화가 너무도 컸던 연고일 것이다.
 
214
무학의 덕화력이 신돈에 미칠지 어떨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러나 무학도 득도한 고승(高僧)이니 범인과는 다를 것이다. 이 무학의 손을 빌어서 덕화의 방면을 잘 연구해야 할 것이다.
 
215
이리하여 왕은 무학을 사부로서 서울에 머무르게 하고, 지금 당신께 결핍된 되덕적 방면의 수양을 쌓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216
어서 천도를 하려고 후보지를 물색하나 적당한 자리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217
왕은 차차 이 수창궁이라는 대궐이 마음에 켕기기 시작하였다.
 
218
우왕 시대의 창건한 이 대궐은 지금의 새 왕은 이전 고려조의 우왕, 창왕, 공양왕의 세 임금을 모신 그 대궐이었다.
 
219
이전에는 허리를 굽히고 서서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하던 그 용상에 주인 노릇하기도 좀 마음이 이상하였거니와, 더구나 전 삼대의 왕이 침전으로 쓰던 침전에 들기가 매우 거북하였다.
 
220
이 용상, 이 침전의 이전 주인은 삼대가다.당신 손에 참혹한 최후를 본 것이다.
 
221
그 위에 더더구나 전 왕조시대의 궁녀 중에 자태 아리따운 자 몇을 그냥 두어서 때때로 침석에 까지 모시게 하기는 하지만 양심상 매우 거리끼었다.
 
222
때때로 내시의 부액을 받고 궁풀이라도(이전에는 허리를 굽히고야다.던) 거닐때는, 문득 저 편 숲에서 말탄 소년왕이 뛰쳐나오지 않는가 하는 겁까지 생길 때도 있었다.
 
223
이리하여 오래 두고 벼르던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이 왕위는 기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근심되는 것이었다.
 

 
224
그 해 시월 열 하룻날. 왕의 탄신일이었다. 이 왕이 왕으로서는 처음 맞는 탄신일이었다. 처음 맞는 탄신일이어니, 대궐에서의 축하연은 굉장하였다.
 
225
그러나 이 왕으로서의 처음 맞는 탄신일에도 이 날을 축하하며 경하하는 사람은 왕과 몇 그의 신하들 뿐이었다.
 
226
개경 십만 장안은 쓸쓸하였다. 경하의 기분이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보통날보다도 오히려 쓸쓸한 편이었다.
 
227
이러하기 때문에 대궐안의 잔치도 겉으로는 흥성스러운 편이었으나, 안으로는 암담한 일면을 거저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한 때에 이 잔치에서도 한 개의 기괴한 일이 생겼다.
 
228
그 잔치에는 설매(雪梅)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가무도 능하고 얼굴도 뛰어났거니와 음하기로도 남에게 빠지지 않을 만한 기생이었다.
 
229
그 기생에게 향하여 어떤 재상이 술김에 농담삼아
 
230
『너는 아침에는 동가(東家)에서 먹고 저녁에는 서가(西家)에서 묵는다니 나하고는 한 번 어떠냐?』
 
231
고 던졌다. 거기 대하여 설매는 곧 대답하였다 —
 
232
『동가식하고 서가숙하는 천비오니, 어제는 왕씨를 섬기고 오늘은 이씨를 섬기시는 대감과도 그다지 짝이 떨어지지는 않겠습니다.』
 
233
순간에 칵 퍼지는 참담한 기분. 그 가운데서는 권병에 못이기어 오늘 이 잔치에 나왔던 몇몇 전조 유신들의 느끼는 소리까지 들렸다.
 
234
왕도 이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못 본체 하였다.
 
235
못 본첸즌 하였지만 가슴이 쓰리었다. 한 개 천비까지도 그냥 고려의 사직을 잊지 못하는 것이었다.
 
236
『천도를 해야겠다. 여기서는 설혹 참말로 덕화를 펼지라도 그 덕화를 받아줄 백성이 없을 모양이다.』
 
237
아아, 내가 이룩한 사직도 이와 같이 튼튼해지과저.
 
238
이리하여 왕은 이 개경 인구와 전조의 구신들은 장구한 세월과 숱한 공력이 아니면 결코 귀화시키지 못할 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고, 왕화를 효과 있게 펴기 위해서는 어서 바삐 천도를 하여야겠다는 점을 더욱 통절히 깨달았다.
 
239
잔치가 끝난 뒤에 왕은 조용히 정도전을 불러서 어서 천도를 고르라고 다시금 채근하였다.
 
240
계룡산, 한양부 — 이 두 고장을 후보지로 정하고 계룡산을 좀 더 무겁게 보아서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하는 중이었다.
 
241
하루라도 바삐 이 고려 서울 개경을 벗어나고 싶었다.
 
242
더구나 왕씨 일족의 몇몇 사람은 이 새 국가를 도로 둘러 엎으려고 꿈틀꿈틀 음모를 하는 기색조차 보였다.
 
243
이 서울에 그냥 있다가는 무슨 일이 폭발될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244
지금 가슴에 배포한 온갖 원대한 계획을 마음놓고 베풀 만한 땅을 어서 골라내자.
 
245
이리하여 왕의 마음은 꽤 초조하였다.
 

 
246
그 해 겨울은 그다지 신통한 일이 없이 지나갔다.
 
247
신통한 일은 없었다. 그 대신 불쾌한 일은 뒤를 이어서 생겼다.
 
248
이씨 고려 첫해 — 그 섣달도 다 간 그믐께 또 한 가지의 불쾌한 사건이 생겨서, 이 새 군신의 마음을 좋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이 새 사건 때문에 왕씨 고려의 유신들은 또 수군거리며 나라 잃은 통곡을 또 다시 하였다.
 
249
사건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왕씨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 때에 금주(金澍)를 하절사(賀節使)로 명경(明京)에 보내었다.
 
250
금주가 명경에서 자기의 임무를 다할 동안, 그의 고국에서는 왕씨 고려가 꺾어지고 이씨 고려가 새로이 선 것이었다.
 
251
그러나 만리 타향에 있는 금주는 본국에 그런 비극이 생겼다는 것은 알 까닭이 없었다.
 
252
그는 자기의 임무를 곱다랗게 치른 뒤에 어서 이 일을 내왕(乃王)께 복계하러 다시 길을 재촉하여 고국으로 돌아왔다.
 
253
위로는 임금, 아래로는 집안처자를 하루 바삐 만나기 위하여 길을 재촉하여 압록강까지 이른 금주는 거기서 뜻밖의 보도를 들었다.
 
254
— 왕씨 고려가 망하였다.
 
255
— 문하시중 이성계가 새로 왕이 되었다.
 
256
금주는 정신이 아찔하였다.
 
257
강 하나 건너면 고국 —그러나 그것이 고국일까? 산천은 그 산천이요, 백성은 역시 그 백성이지만, 주인이 갈린 이상 그래도 그것이 고국일까?
 
258
처자도 보고 싶기는 하였다. 그러나 주인 갈린 이땅에 발을 들여놓기가 싫었다. 거기서 금주는 다시 이 땅에 들어오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조복(朝服)과 신을 벗어서 하인을 시켜서 서울 자기 집으로 보냈다.
 
259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내가 강을 건널지라도 이 몸을 둘 곳이 없으니, 이냥 다시 중원으로 돌아가노라. 이날(十二월 二十二일)을 기일(忌日)로 알고 지금 보내는 조복과 신을 내몸으로 알고 장사지내거라.」
 
260
이러한 글을 집으로 던지고서…
 
261
그렇잖아도 불평이 폭발되려 하는때에 이 사건은 또다시 한 번 개경을 뒤집어 놓았다. 여기서도 수군수군 저기서도 수군수군 — 사람이 모이면 그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는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262
이렇듯도 당신께 심복치 않는 전조 백성들을 볼때에 신왕의 마음은 차차 격화되기 시작했다.
 
263
『에익, 지독한 —』
 
264
본시 무장 출신의 신왕.
 
265
괄괄한 성미를 지어서 억누르고 하여 보았지만, 나날이 그 도수가 더하여 갈 뿐이었다.
 
266
『대사!』
 
267
어떤 날 무학과 마주앉은 신왕 — 불쾌한 음성으로 무학을 불렀다.
 
268
『네이』
 
269
『대사, 덕화(德化)를 받지 않으려는 백성에게도 덕화를 베풀어야 하오?』
 
270
『시덕은 전하께 있사옵고 욕덕은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니까? 덕을 강제하는 것은 묻거만도 못한 것이옵니다. 멱감기 싫어하는 전조 신민에게 덕을 강제하느니보다 는 새로운 곳에서 신부민에게 덕을 보여 주시어야 할 줄 생각하옵니다.』
 
271
『그럴까?』
 
272
『전조 왕태조께서 아무리 덕있는 이라 할지라도 계림에 정도를 하셨더면 반드시 실패를 했을 줄로 생각하옵니다.
 
273
무엇보다도 전하께서 수선을 하셨으면 — 땅이 없어서 이곳에 눌러 계시오니까? 대신들에게 재촉하여 신도를 어서 선택하시고 하루 바삐 천도하시도록 힘쓰시는 것이 최급무일까 하옵니다.』
 
274
『마음은 급하지만 어디 마음대로 일이 되오?』
 
275
괄괄한 성미 — 당장에라도 군사를 풀어서 심복치 않는 신민들을 모두 도륙이라도 하고 싶었다.
 

 
276
그해는 경사스러운 해임에도 불구하고 신조 군신은 모두 불쾌한 심경으로 보내고 이듬해 계유(癸酉) 정월. 작년에 명나라에 청드렸던 <국호 변경>의 허가가 이제 나왔다.
 
277
초조한 가운데서 기다리던 바였다.
 
278
아직 심복한 백성이 없는 새 나라 — 왕과 몇몇 재상끼리 서로 왕이여 신하여 부르고 불리고 있지, 밖에서는 나라 다운 곳이 없었다.
 
279
그 위에 상국인 명나라에서까지 아직 한 국가로 인정한다는 성명이 없으매, 그야말로 아주 존재가 빈약한 국가였다.
 
280
백성만 죄 심복하였으면 명나라의 윤허가 없을지라도 국가로서 버틸수가 있을 것이다. 임금과 정부와 백성이 모두 <한 개 완전한 국가>로 인정하면 명나라로서도 드디어 윤허치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281
신국가 창설에 대하여는 물론 이 길이 최상책일 것이다.
 
282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백성이 승복치 않으니 지금은 다른 방도를 강구할 수 밖에 없다. 상국 명나라에서 <일개국가>로 인정을 받아 놓으면, 아무리 백성들이 심복치 않는다 하여도 또한 어떻게든 버틸 수가 있을 것이다. 버티는 동안에는 장구한 세월을 지나면 백성들도 언젠가는 심 복할 날이 있을 것이다.
 
283
백성을 심복케 하기 위하여 그 수단상 아직도 고려라는 낡은 국호를 써 왔지만, 그만한 사술(詐術)로써는 백성들이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284
그럴진대 인제는 <고려>라는 왕씨의 낡은 국호는 집어 치우고 이씨의 새 국호를<조선>이라 하기로 하고 명나라에 그 윤허를 청하였던 것이 인제야 허가가 난 것이다.
 
285
국호가 허가가 난 것은 즉 이 새 나라를 명나라에서도 인정해 준다 하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286
인제는 무서운 것이 절반은 없어졌다.
 
287
순서가 바뀌어지기는 하였지만, 명나라에서 윤허가 난 이상에는 정정당당히 이 새 국호로써 이 나라 백성위에 임할 수가 있을 것이다.
 
288
이 새 국호의 윤허를 받기 위하여 이씨 정부가 쓴 수단은 과연 용하였다. 일대 지혜가 정도전이 두고두고 연구한 끝에 이 중대한 임무를 띤 사자로서 조반(趙半)이라는 재상을 골라내었다. 조반은 중국서 생장했고 중국말에 능하고 중국 문서에도 통한 인물이었다. 이 인물에게 정도 전은 꾀를 불어넣어서 가게 한 것이다.
 
289
정도전이 미리 짐작했던 바와 같이 명나라 고황제는 조반을 인견하면서 댓바람에 꾸짖었다. 이신벌군하여 새 나라를 이룩한 신조를 인정치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290
여기 대하여 미리 정도전에게 꾀를 받고온 조반은 능란한 중국말로써 복주하였다 —
 
291
『폐하, 배신이 무식하와 잘 알지는 못하옵지만, 역대 창업지주로서 이런 길을 밟지 않으신 분이 없는가 하옵니다. 폐하께서는 그것을 이신벌군이라 하옵지만 그것은 순천혁명(順天革命)이옵지 이신벌군으로 볼 종류가 아닐까 하옵니다.』
 
292
물론 이씨 왕의 신조를 변명하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명나라의 창업을 풍자하는 뜻도 섞인 것이다.
 
293
원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명나라도 이신벌군이 아니오니까? 단지 고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폐하도 그런 과거를 가진 사람이외다. — 이런 뜻이 다분히 포함된 말이었다.
 
294
고황제도 거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295
그래서 조반의 중국말 잘하는 것을 칭찬하였다. 그러매 조는 거기서도 또한 고황제의 마음을 붙들만한 대답을 하였다.
 
296
『배신은 본시 중원에서 생장하와 일찍이 폐하를 탈탈군중(脫脫軍中)에서 뵈온 일이 있읍니다. 당년에 그다지 지위가 높지 못하시던 한 무장이 오늘날 하늘의 뜻을 받자와 대국의 천자가 되셨사옵니다.』
 
297
이리하여 명나라 황제로 하여금 이씨 고려를 이신벌군이라고 억누르지 못하게 꾸미어 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조선이라는 국호의 윤허를 받고 이성계가 조선국왕이라는 점을 명나라에게서 인정케하여 놓은 것이다.
 

 
298
인제는 천하에 꺼릴 바가 없었다.
 
299
백성들이 심복치 않는다 하지만 단지 심복치 않을 뿐이지 반항은 할 줄을 모르는 백성들이었다. 소극적 반항 행동은 꾸준히 있지만, 적극적 반항은 할 줄을 모르는 백성들이었다.
 
300
관가에서 무슨 일을 시킬지라도 행하지 않는다. 재촉이 심하여 피할 수 없이 되면 다른 곳으로 몸을 숨겨 버린다. 그뿐이지 적극적으로는 반항은 하지 않는다. 그런지라, 성가시고 불쾌하기는 하지만 위험한 일은 없었다.
 

 
301
이러는 동안 신 정부의 탄압을 피하여서 망명한 구조 태학생 서두문동의 문사 七十二인과 동두문동의 무사 四十八인은 어찌 되었나?
 
302
새 정부에서는 몇 번 사람을 시켜서 그 문무생들을 끌어 내 보려고 노력하였다.
 
303
좋은 말로 달래 보기도 하였다. 유리한 조건으로 꾀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달래는 데도 유혹에도 위협에도 모두 응치 않고 문을 굳이 닫고 망국 유민으로 자처하였다.
 
304
신 정부에서 그들을 끌어내고자 한 것은 그들의 인물을 사랑하여 쓰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도 그 들을 끌어내어 중하게 쓰면 왕씨 고려의 유민들의 마음도 좀 돌아질까 하는 요행심에서였다.
 
305
그러나 아무리 달래고 위협하고 했지만 일체로 응치 않으므로, 그냥 이럭저럭 지내는 동안에 그들의 존재까지 잊어버렸다.
 
306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그 새 기관의 행정을 꾸미느라고 돌아가는 서슬에, 어느 덧 두문동의 문무인들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이씨의 이룩한 새 나라는 명나라에게 <조선>이라는 국호까지 윤허를 받고 이제는 튼튼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307
두문동에 숨은 백여명의 인물의 진퇴 따위는 인제는 새 정부에서 마음 쓸 필요도 없을이만큼 미약하게 변하였다.
 
308
아무 협위도 느끼지 않았다.
 
309
아무 쓸모도 발견되지 않았다.
 
310
그야말로 그들이 자처하는 바와 같이 산 송장에 지나지 못하였다. 호흡이 통하니 숨을 쉬는 것이요, 피가 돌아다니니 그냥 살아가는 뿐이지, 세상에서는 잊어버리운 존재였다.
 
311
새 정부가 지금에 있어서 꺼리는 바는 이 두문동의 백 二十인의 문무 유민들이 아니요, 왕씨(王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전조의 종친 — 말하자면 이 국가의 이전 주인의 일가들이었다.
 
312
이 긴 소매의 무리들에게 무슨 실력이 있어서 무서우랴만, 새 조정에서는 자기네가 한 행사가 있는지라 늘 불안하였다. 계유년도 이럭저럭 지나고 갑술년에 드디어 왕씨 일족에 최후의 수단을 썼다.
 
313
그 새 두고두고 천도할 땅을 구해오다가 드디어 남경(南京=한양부)으로 천도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314
처음에는 계룡산을 도읍지로 정하려고 왕이 친행까지 하여 검분하고 역사까지 시작을 하였다가, 계룡산은 지형이 협일하고 토지가 더러우며, 교통이 불편하고 물길이 멀어서 도읍지 되기에는 부적당하다 하여, 다시 고른 결과 한양으로 작정이 된 것이다.
 
315
이렇게 도읍지를 옮기게 될 때에 송경에 그냥 남겨둘 왕씨 일족의 문제가 일어났다.
 
316
『어찌하리까?』
 
317
『글세 —』
 
318
그들을 그냥 버려 둔댔자 아무 일도 저지르지 못할 것이지만, 자기의 행사를 짐작하는 새 조정에서는 그냥 버려 두기가 꺼림칙하였다. 그냥 버려 두었다가는 무슨 후환이 반드시 일어날 듯이 보였다.
 
319
남겨 두자면 무시무시하지만 없애자니 그럴만한 죄명(罪名)이 없다. 그것도 열사람 스무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처치도 할 수 있겠지만, 수백 명이 넘는 이 왕씨들을 모두 어떻게 처치하나?
 

 
320
어떤 날 각 골목, 거리에 통문이 나붙었다.
 
321
왕씨들을 부르는 글이었다.
 
322
「임금의 계통이 갈리면 전 임금의 일족은 잔멸을 시키는 것이 고금의 상례이다. 그러나 성상께서는 특별히 관후하시어서 너희들이 그냥 이 성대의 백성 노릇을 하는 것이다.
 
323
그렇지만 이렇듯 아무 구속이 없이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도 법을 흐리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왕씨의 일족을 모두 가까운 해도(海島)에 정배를 보낸다.
 
324
이 관후하신 처분에 너희들은 마땅히 감읍할 것이로되, 일은 이것뿐이 아니고 지금 비록 법을 밝히기 위하여 성의에 없는 유배를 명한다 하나, 이것은 잠시의 일이요 얼마를 지나지 않아서다. 너희를 부르셔서 일시동인하에 너희의 번성을 조장하실 계획이시다.
 
325
이 성은을 너희는 어떻게 보답하려느냐? 너희가 전조의 총친이라 하되 전조에서 이런 쾌사를 일찍이 본 일이 있느냐?
 
326
××일까지에 너희는 온갖 준비를 끝내고 ○○해변에 모이라. 거기는 너희를 해도로 호송할 수십척의 배가 등대하여 있을 것이다. ××일까지라 하면 준비를 위하여서는 넉넉한 날짜로다. 그 날까지는 어김이 없이 ○○해변에 모이도록 하라.
 
327
그러나 개중에는 이 거룩하신 뜻을 오해하는 자가 있어서, 이 관후하신 처분을 모면해 보려고 엷은 꾀를 쓰는 자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지금 관후하신 성상도 교활한 수단을 농락하려는 자에게 결코 용서함이 없으시리라. 스스로 자멸지책을 취하지 말고 이번의 이 관후하신 은전에 멱감으라. 기한인 ××일 이후에 이 강역내(유배지 이외)에서 왕씨가 발견되는 자가 있으면, 그 자는 다시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리라. 성상께서 관후하시다고 너무 과한 어리광은 부리지 말아라. 이번의 처분은 최후의 처분이시다.」
 

 
328
골목 거리를 막론하고 도배하듯 붙인 이 통문 아래서 송경의 시민들은 의아한 듯이 머리를 기울이고 하였다.
 
329
사실 의외의 관후한 처분이었다.
 
330
과거의 몇몇 왕씨며 전조 유신들에게 행한 형벌이며 더욱이 전조의 세 폐왕(廢王)에게 행한 일을 잘 알고 있는 이 시민들에게는 이번의 이 처분은 너무도 가벼웠다.
 
331
더욱이 왕씨의 일족들은 이 통문을 보고 작약하였다. 삑삑이 숨어서다.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언제 자기네 위에 어떤 형벌이 어떤 명목과 형식 아래서 내리게 될는지 예측도 할 수 없으므로 전전긍긍히 지내던 터이다.
 
332
그런데 지금의 통문에 의지하건대 겨우 해도 유배이다.
 
333
이 경한 처분에 대하여 왕씨들은 진심으로 감읍하였다.
 

 
334
새 정부에서 지정한 날이 이르렀다.
 
335
지정한 장소에는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모여들었다. 오백 년 전에는 한 아버지로 하여 퍼지기 시작한 종자가 지금은 서로 그 촌수도 따질 수 없도록 멀게 된 — 왕씨라는 왕씨는 모두들 모여들었다.
 
336
죽음을 예상하였던 사람들이 죽음에서 피해날 수가 있게 되었는지라, 길은 비록 정배가는 길이라 하지만 무슨 경사로운 곳에라도 가는 듯이 모두들 벙글벙글 웃고 있었다.
 
337
그들은 이길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길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섬에서 몇 해를 살다가 사를 받고 다시 돌아와서 한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할 장래의 꿈을 그리면서, 새 정부의 관원이 명하는대로 등대되어 있는 수십척의 배에 분승하였다.
 
338
보내는 친지들, 떠나는 왕씨들 — 비록 죄를 입고 배소로 떠나는 길이라 하되, 죽은 목숨이 생명 유지되는 길이라 서로 웃음 가운데서 작별을 고하였다.
 
339
순풍에 돛을 달고 배는 차차 한바다로 떠나갔다. 언덕의 사람들이 가물가물 똑똑히 알아보지 못할 만큼 배가 한 바다에 들었을 때 맨 뒷배에서 소라를 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군호 삼아서 각 배에서는 기괴한 일이 시작되었다.
 
340
배 밑에는 미리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마개로 막아 두었던 것이다. 수십척의 배는 일제히 그 마개를 뽑아 버렸다. 그리고 헤엄 잘치는 사람으로 조직되었던 관원들은 웃옷을 벗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341
관원들은 모두 헤엄을 쳐서 육지로 피해오는 동안 사람을 가득가득 실었던 배는 모두 기울어졌다.
 
342
울고 부르짖는 소리. 한바다에서는 놀라운 비극이 연출되었다. 남녀 노소 — 소위 왕씨의 자손이라는 죄밖에는 아무 죄도 없는 수백의 생명은 바다의 원혼으로 화하여 버렸다. 개중에는 좀 헤엄깨나 칠 줄 아는 사람도 있었으나 육지에는 관원들이 지키고 있어서 한 사람도 살아난 사람 이 없다.
 
343
왕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공공히 이 액을 면한 사람은 단 한사람 뿐이었다. 왕우(王瑀)단 한 사람뿐이니 그것은 이 왕우의 딸이 신 조선 국왕의 아들 방번(芳蕃)의 아내이므로 딸의 덕에 참화를 면한 것이다.
 
344
그 밖에도 어느 궁벽한 산골이라든가 외딴 곳에 혹은 한 두 왕씨가 그냥 남아서 살아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것으로서는 왕휴(王 )의 얼자(蘖子)가 민간에 그냥 숨어 있다가 태조 정종 시대를 지나서 태종 시대에 발견이 되어 죽일까 말까 정부의 문제를 일으킨 일과, 해중 비극 이전에 거제도 등지에 미리 정배 가 있던 몇 명 뿐이다.
 

 
345
왕씨 일족을 바다에 집어 넣은 그날 밤이었다. 소년시부터 무장으로서 숱한 전쟁에서 숱한 죽음을 항용 보아오던 왕은, 이 날 왕씨의 수백명을 바다에 집어넣은 것도 그저 보통 다반사 중의 하나이지 마음에 그냥 담아둘 만한 중대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문제는 곧 잊어버렸다.
 
346
그랬는데 그날 밤 왕은 꿈에 하도 놀랄만한 일을 겪었다.
 
347
고려 태조(어째서 고려 태조라 알았는지는 스스로서도 모를 일이로되)가 七장지복을 갖추고 칼을 뽑아 들고 왕의 침두에 서서 발을 구르며 호령하는 것이었다.
 
348
『오백 년 전 이 땅에 세 나라이 어지러이 휘돌때에 그 삼자를 합해서 한데 뭉친 사람이 낸 줄 너도 알 것이다.
 
349
이 땅에 태어난 자로 그 때의 내 공적에ㅓ 멱감지 않은 자 없거든, 너는 내 사직을 빼앗을뿐더러 아무 죄도 없는 내 후손을 씨도 없이 자멸시켰으니 나 또한 그 보복을 할 줄 알아라.』
 
350
왕은 놀라서 깨었다. 양심에 아무 거리낌도 없었는데 이런 꿈을 꾼단 웬 일이냐? 땀에 흠뻑 젖은 왕은 다시 잠을 들지를 못하고 남은 밤을 앉아서 새웠다. 그리고 밤이 채 밝기 전에 근시하는 환자를 불러서 지급히 무학대사를 불렀다.
 
351
왕에게서 왕의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은 한참을 뚫어져라 하고 왕을 마주 보았다. 그런 뒤에야 입을 열었다 —
 
352
『전하는 왜 왕씨 일족을 잔멸시켰습니까?』
 
353
『혹은 후환이—』
 
354
『아니올시다. 그것은 전하 스스로를 속이시는 말씀. 전하는 진심으로 왕씨들을 무서워하십니까? 손에는 촌철이 없고 일을 도모하려야 도모할 비용이 없고 서로 삑삑이 헤어져서 숨을 곳을 찾고 있는 왕씨 잔당을 무서워하실 전하오니까? 이번 이 사건은 단지 전하의 너무도 대범하신 데서 나온 일인가 하옵니다. 무릇 임금은 자국 신민의 한 머리터럭이라도 아끼어서 필요 없이는 끊지 않아야 하는 것이옵는데, 전하는 왜 수백의 생령을 필요없이 도잔을 시키면서도 무서운 줄을 모르십니까? 고래로 역성수명자(易性受命者)는 그 전성(前姓)의 남은 자로 하여금 혹은 봉후 혹은 가작하여 그 현(賢)을 높여 주고 식(識)을 표창하는 것이옵지, 성 같은 자를 잔멸시킨다는 말은 빈도 아 직 들은 일이 없습니다. 이번 일이 만약 일개 무장 이성계의 행사라면 그 무모한 용기를 감탄할 수도 있겠읍지만, 일국 군왕의 조처로는 진실로 해괴한 일이올시다. 고달산에 숨어있는 빈도를 전하께서 불러 내신 것은 이런 일을 조처할 때에 하의를 하시자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355
왜 이번 일에는 빈도와 의논도 없이 행하셨읍니까? 전하 이러시매 빈도는 더 올릴 말씀이 없습니다.』
 
356
마치 어린애를 꾸짖듯 꾸짖는 데 대해서도 왕은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357
왕은 사실 이번의 이 일은 진심으로 후회하였다.
 
358
이번의 이 일은 정략상(政略上)으로도 커다란 실책이었다.
 
359
아직껏 고려의 유민들이 이 새 정부를 신용한다든가 우러러본다든가 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일 때문에 그 감정은 더욱 격화하였다.
 
360
그 비열한 사기 수단 — 정면으로 잡아다가 죽인다든가 했더면 도리어 나았을 것이다. <관후하신 처분> 운운하여 사람을 유인하여다가 수중 고혼이 되게 한 그 비열한 행동을 극도로 밉고 더럽게 본 것이었다.
 
361
신조의 재상들이 전후좌우로 하인배들을 늘이고 위의당당히 벽제를 올리며 지나갈 때는, 길 모퉁이에서는
 
362
『참 관후하게 생기셨군!』
 
363
하고 놀려대고 하였다.
 
364
『그 놈 관후하신 처분으로 물에 잡아넣어 죽일 놈이로군.』
 
365
민간에서는 이런 새로운 욕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전에는 무슨 일에든 그저 침묵을 지키던 백성들이 차차 반항을 시작하였다.
 
366
여기 저기서 군졸 혹은 관리와 백성들과의 충돌이 생기고 하였다. 이전에는 관리나 군졸들이 무슨 트집을 잡을 지라도 슬슬 피하던 백성이거늘, 이즈음 도리어 이편에서 트집을 잡고 말썽을 일으키고 하였다.
 
367
정부에서는 왕씨 일족에게 내린 커다란 실태 때문에 — 그 위에 또한 왕의 엄명도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대로 관리와 백성들 사이의 분쟁을 피하도록 도모하였다.
 
368
그런 관계상 무슨 트집이라도 생길 만한 일이면 관리쪽에서 피하건만 백성들이 도리어 따라오며 말썽을 만들려 하는 것이었다.
 
369
그 백성을다.리는 정부며 그 정부의 지휘와 보호를 받을 백성이건만, 그것은 마치 견원지간과 같아서 융화되기는 도저히 바랄 수가 없었다.
 

 
370
왕은 왕씨 일족에게의 처사에 재미없는 결말을 지은이래, 굳게 결심을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심하였다.
 
371
그러나 본시 무장 출신의 괄괄한 성미 — 좀 하면 노염이 폭발하려 하고 한다. 그리고 노염이 폭발되어 한 일은 뒤에 이르러 보면 반드시 결말이 좋지 못하였다. 이런 일을 차차 겪고 또 겪을 동안 왕은 이 <왕노릇>이 역하여 갔다.
 
372
노염이 날때에는 그 노염을 극도로 추켜가지고 어디로든 푸는 그 통쾌미도 이전 무장 시대에는 맛보던 일이지만, 왕이 된 후로는 억지로라도 노염을 삭이지 않을수가 없는 것이 괴로웠다.
 
373
홀로이 백마에 높이 올라 활을 메고 산수를 방랑하던 재미도 왕이 된 이후에는 도저히 맛볼 수가 없다.
 
374
무한한 자유로움 — 그 자유로움은 인젠 다시 맛볼 수 없는 것이다. 더울 때라도 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가슴을 부채질할 수도 없으며, 남의 집 색시를 보러 담을 넘어다니는 활극도 인젠 다 맛볼 수 없는 노릇이다.
 
375
더구나 이전의 그 자유로운 무장 시대에는 온 고려의 민심이 모두 당신께 향해 있지 않았던가? 상승장군으로서 왕명을 받잡고 왜구 정벌을 가면 반드시 이기고, 이겨서 개선하는 길에는 온 국민이 고기와 술을 들고 나와서 당신을 즐겨 맞아 주지 않았던가?
 
376
「문하시중 이성계 —」
 
377
얼마나 온 국민에게 애경을 받던 이름이었더냐?
 
378
지금 올라 앉은 이 자리. 비록 그 위는 지존이며 위로는 하늘이 있을 뿐이요 아래로는 천만 적자를 거느린 통수사지만, 온 국민의 애모의 염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379
전에는 당신이 지나갈 때에 술과 고기를 들고 나와 만나 주던 백성들이, 지금은 무슨 불길한 것이라도 본 듯이 외면을 하여 버린다.
 
380
이런 줄 알고 얻은 자리는 아니어늘 —
 

 
381
물론 심로(心勞)도 있을 것이지만 호의호식과 안일(安逸)한 생활 때문에 왕의 건강도 전보다 훨씬 못하였다.
 
382
누우면 즉시 잠이 들며, 잠이 들면 집이 떠나갈 듯이 코를 골던 당신이어늘, 지금은 잠을 깊이 들 수가 없고 오래 계속할 수가 없고 하룻밤에도 세 번, 네 번씩 깨었다.
 
383
이렇게 건강이 못해지니만큼 신경은 더욱 날카로와져서, 노염이 흔해지고 불쾌한 일이 나날이 더 많아 갔다.
 
384
왕은 한양부에 영조중인 새 대궐을 연하여 독촉하였다.
 
385
신경이 약하여지면 약하여지는 만큼, 고려 서울이 더욱 불쾌해지고, 이 수창궁이라는 대궐이 더욱 거처하기 거북하였다.
 
386
그와 동시에 왕은 무학에게 대해서도 차차 불만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387
처음 심산으로는 이전 공민왕 때 신돈과 같은 관계를 맺으려고 불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불러다 놓고보니 생각했던 바와 실제와는 꽤 거리가 멀었다.
 
388
첫째로 무학은 신돈과 달랐다. 신돈은 도승인 위에 또한 정치적 기능과 포용력과 지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 위에 불교식 인류애보다도 민족적 편애심이 더 강하던 인물이었다.
 
389
거기 반하여 무학은 도덕 일방의 한 도승에 지나지 못한다. 무슨 문제든 모두 그것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려고 달라붙지, 정치적 전개며 해결을 지을 기능은 못 가진 인물이었다. 게다가 신돈은 선천적으로 놀라운 감화력을 가졌었는데, 무학은 세 치 혀로 논(論)하여 이론으로 남을 누르려는 사람이었다.
 
390
신돈과 무학이 이렇듯 다른 것같이, 왕으로도 공민왕과 당신과는 전혀 반대(온갖 방면으로) 되는 사람이었다.
 
391
공민왕은 왕자로 태어나서 소시에 원나라 황실에 놀았으며, 그 성격이 어질고 웃사람 노릇에 젖은 사람이었다. 그는 신돈에게 일을 맡김에 온 권리를다.맡기고 자신은 물러앉아서 승하한 왕후의 추억으로 세월을 보내고, 정치상의 진척을 재상에게 청취하고는 장자다이 머리를 끄덕여 두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한 무장출신으로 당신의 머리에 당신 손으로 면류관을 올려놓았으니만큼, 모든 일을 당신이 손수 지휘하고 관할하지 않으면 마음이 아니 놓이는 사람이다. 저 사람을 아무리 신임한다 하여도 지 휘권은 그냥 당신 손에 남겨 두지 않으면 안심을 못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392
양자가 이만큼 서로 다른지라, 무학을 공민왕 때의 신돈과 같이 삼으려고 불러왔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393
때때로는 무학이 자기딴에는 직언(直言)을 하느라고 장소를 구별치않고 무엄한 말을 함부로 할 때는, 칵 불쾌한 생각이 솟아오를 때도 있었다.
 
394
왕은 차차 무학을 부르는 도수가 줄었다. 무학을 불러서 의견을 묻는댔자 무학에게서 나오는 대답은 아무 구체적 실행성을 띤 자가 아니요, 단지 추상적 도덕론에 지나지 못하는지라, 그런종류의 의견은 있으나 없으나 일반이었다.
 
395
이리하여 구오(九五)의 존위에 오르기는 올랐지만 왕의 심경은 차차 음울하고 암담하여 갔다.
 

 
396
그 해에 왕은 동서 양 두문동을 흔적도 없이하여 버렸다. 사고(思考)하여 결정하고 실행한 일이 아니었다.
 
397
어느 날 갑자기 두문동 사건이 생각나면서, 그 어느 해 과거를 보일 때에 앞재를 패랑이를 쓰고 꼬리를 이어 넘어가던 선비들이 눈앞에 선히 보이므로, 근시했던 어던 시종에게 두문동의 그 후를 물어보았다. 물어보면서도 왕은 그것이 벌써 몇해전의 일이라 인젠 산산히 도로 헤어 져 각각 서민으로서 제 생업에 나섰으려니 하고, 그야말로 지나가는 말로 물었던 것이었다.
 
398
그랬는데 그 대답을 듣건대 동서 두문동은 아직 그대로 문을 굳이 닫고 통 세상과는 몰교섭히 지낸다 하는 것이었다.
 
399
이즈음 늘 신경이 불쾌한 감정으로 날카롭게 되어 있던 왕은 이 대답을 듣고 정도 이상의 노염을 내었다.
 
400
『불러도 안 나온단 말이지?』
 
401
『네이.』
 
402
『— 왕명으로 불러도 안 온단 말이지?』
 
403
불쾌한 듯이 내어던지는 이 왕의 말에 시종은 어떻게 복계할 바를 몰라서 어릿거렸다. 그 때 왕이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404
『왕명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지. 끌어낼 도리가 있겠지. 어디 안 나오나 두고 보자.』
 

 
405
이튿날 상명으로 동서 양 두문동에 많을 섶을 가져다 가려놓았다. 동구(洞口)쪽으로 몇 간쯤 좀 입을 만들어 놓을 뿐 그 밖에는 온통 섶으로 둘러쌌다.
 
406
섶에는 불이 질러졌다. 맹렬히 타오르는 섶.
 
407
그 동구 앞에 좀 새를 터놓은 그 바깥쪽에는 관원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즉 왕명에도 나오지 않은 그들이로되 이 불에게는 반드시 쫓겨나올 줄로 믿었다. 그리고 그리로 나오는 유민(遺民)들을 붙잡고,
 
408
「왕명보다도 뜨거운 것이 더 무섭더냐?」
 
409
고 조롱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410
섶의 불은 곧 동네를 쌌다. 반나절도 가지 못해서 동네는 모두 한 더미 잿낟가리로 변하였다. 그러나 불꽃이 필 동안도, 불꽃이 잦을 동안도, 연기에서 재로 차차 식어갈 때까지도, 이 맹화에 동네를 벗어나려고 서두르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불이 혼자서 성하였다가 혼자서 싱겁게 사라질 뿐, 그 동네에는 사람이 있는 듯싶지도 않게 고요히 불 속에서 잦아앉고 말았다. 서두문동의 七十二 문사, 동두문동의 四十八 무사 — 고규(苦叫)성 한 마디도 들린 일이 없이 잔잔하게 불 아래서 사라져 버렸다.
 

 
411
왕명은 무서워 안하지만 화열은 무서워할 전조 유민들을 조소하려고 경덕궁까지 거동을 하여 기다리고 있는 왕에게 두문동의 보도가 들어왔다.
 
412
그 보도를다.들은 뒤에,
 
413
『지독한 놈들이로구.』
 
414
하고는 한 번 높은 소리로 껄걸 웃어보려고 입을 벌렸지만, 왕의 입에서는 웃음소리가 나오지 못하였다.
 
415
왕은 황황히 도로 수창궁으로 환어하였다. 정원에 명하여 오늘 일을 일기에 적지 못하도록 하였다.
 
416
사관에게 명하여 역시 오늘 일은 기록에 남기지 못하게 하였다.
 
417
거기 대한 함구령이 전국에 내렸다.
 
418
부질없이 거기 대한 말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다가 발견된 두 관리는 당장에 효수가 되었다. 서민 측에서도 수십 명의 희생자가 났다.
 

 
419
그날 밤 왕은 침전에 들었으나 몸에는 오한까지 나고 밤새도록 몸을 사시나무같이 떨었다.
 
420
왕으로서는 일시적 희롱으로 한 일이었다. 왕이 불러도 일시적 희롱으로 한 일이었다. 왕이 불러도 안 나오는 유신들이라도 불을 놓으면 뛰쳐나올 것으로 믿었다. 안 오나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하여보지 않았다. 당연히 나올 것으로 믿었다.
 
421
그리고 불에 쫓겨 뛰쳐나온 무리들을 불러다 놓고 심심파적으로 조롱이나 해보고자 하는 일시적 유희기분이었다.
 
422
그랬는데 양 두문동 문무신들은 고요히 불에 타서 죽고 만 것이었다.
 
423
이것은 자살로 볼것인지 타살로 볼것인지 그런 일은 문제도 삼을 바가 아니다. 단지 왕의 일시적 희롱기분으로 백이십명의 생명을 까닭없이 빼앗은 점이 가슴에 사무쳤다.
 
424
「내게 왕 될 자격이 과연 있는가 없는가?」
 
425
일시적 희롱 기분이 낳은 바 너무도 놀라운 결과 — 너무도 의외의 결말에 왕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426
함구령은 가장 효과있게 시행되었다. 영을 어긴 자를 관가에 일러 바치는 사람에게는 막대한 상을 주었다. 영을 어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효수하였다.
 
427
왕의 마음이 특별히 어질다든가 한 바가 아니지만 이 사건은 결과가 너무도 놀라운지라, 이일뿐은 결코 후대에 까지 말거리로 남겨두기가 싫었다. 이 사건에 철없이 주둥이를 놀리다가는 효수를 당한 사람의 수효도 적지 않았다.
 
428
송경은 암담한 기분 아래 눌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느라고 서로 입을 들먹거거리며 상대자의 입을 바라보는 뿐이었다.
 
429
사람들은 서로 사람 만나기를 꺼리었다. 만났다가는 어떤 일로 어떻게 뒤집히어 잡힐지 예측을 할 수가 없으므로, 할수 있는 한 모두 두문불출하였다.
 
430
한산한 거리와 골목, 모두 벙어리와 같이 된 백성들 — 이러한 가운데 포리들은 귀를 추켜들고 동서로 분주하였다.
 

 
431
이리하여 십년 이십 년, 삼십 년 사십 년 — 그 때 그 사건을 목도했거나 직화로 들은 사람들은 차차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났다.
 
432
그들이 함구를 한 채 저 세상으로 갔는지라, 두문동 사건의 진상은 완전히 이 지구상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433
서두문동에 문사가 일흔 두 사람, 동두문동에 무사가 마흔 여덟 사람이 들어 숨었던 일이 있었다, 하는 이외에는 그 진상을 아는 이가 없다. 그 백 스무명의 성명도 미상하고 일흔 두명과 마흔 여덟명이 끝까지 함께 있었는지, 한편 들어오고 한편 나가고 해서 첫 번 입동시(入洞時)와는 다르게 되었는지, 죽은 연월일도 미상하고 온갖 것이 모두 연막 뒤에 감춰져서 똑똑히 식별할 수가 없다.
 

 
434
이리하여 이 수수께끼는 영구히 풀릴 날이 없을 것이다.
 
 
435
(一九三五年 四․五月<月刊野談>所載)
【원문】두문동록(杜門洞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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