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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창작평 - 실증문학을 기초로한 구성적 월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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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29
권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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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월 창작평
 
2
실증문학을 기초로한 구성적 월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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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이 남의 작품을 비평해 본 일이 없다. 비평해 보겠다는 의도나마 가져본 일이 없었다. 또 앞으로라도 문예비평가가 되고자 하는 욕구는 갖지 않는다. 그것은 ‘개자(芥子)의 맛은 씹어보아야 안다’는 격으로 어떠한 작품임을 물론하고 자기 자신이 친히 숙독 상미(詳味)하여 본다든가 그것이 만일 희곡일 것 같으면 무대화하여 보기 전에는 그 최후적 가치를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니 정당한 의미의 문예비평가적 입장에서 볼 때에는 자극적 태도라고 할는지 모르나 제3자인 타인이 붓으로나 혹은 입으로 말하는 문예의 비평이나 소개 또는 연구 같은 것에 얼마나한 가치와 신뢰가 있게 될 것인가? 이 점에 대하여 나는 스스로 회의적임을 면치 못할 뿐 아니라(그렇다고 문예비평 그 물건을 본질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꿈속에라도 망상해 볼 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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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남의 작품에 대하여 호의를 가진 일개의 독자에 불과하다. 어떠한 호감을 주는 작품이면 그것을 재삼 숙독하며 선모(羨慕)하였고 그렇지 않은 작품이면 즉 불쾌를 주는 작품이면 차라리 침묵으로써 그것을 푸대접해 왔을 뿐이다. 아마 이것이 내 자신에 있어서는 이 앞으로라도 가장 타당한 노릇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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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기에서 내가 지금 붓을 드는 것도 이것이 결코 엄격한 의미의 예술비평가적 태도에서 특히 그 세부적 구조와 ‘이즘’이며 그 표현상 기교에까지는 언급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또는 본류적인 유파적 경향을 지적 비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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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작품이 말하는 최고적 정신이 나변(那邊)에 있는가? 이것을 사회적 객관 의식에 즉, 다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중심적 경향인 변증적 유물론 내지 실재론적 견지에서 간단히 결론적으로 비판하여 우리가 가질 문예의 행동성, 통일성, 적극성, 창조성, ××성적 그 지도적 원리를 토구(討究)하는 데에 있어서 백 분의 일이라도 보좌가 된다 하면 나는 스스로 만족하려 하는 바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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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진(失眞)』 (동광) ― 이기영 씨는 이 작품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려 하였는가? 나는 작품의 주안점이 어디 있는 것을 첫째로 발견 할 수 없다. 주인공 ‘경식’이는 한 실직한 자산노동자로서 기근을 못 이겨서 쌀을 팔아가는 노파를 지게 작대로 내려치고는 그 쌀을 빼앗아 다 먹었다. 그리고 그 익일에 자기에게 피살된 그 노파가 곧 같은 빈곤한 처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무한히 그는 양심상 고통을 느끼었다. 이 사실에 있어서는 누구나 다같이 동정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기의 죄를 경관에게 자수하고 붙들려 가는 것으로 이 단편은 종막을 고하고 말았으니 결국 범죄의 여하를 막론하고 소위 현법을 긍정하는 태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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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작자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이 작품을 쓰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작품에 나타난 ‘경식’이 전후 행동이 이미 다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경식’이가 첫째로 번뇌를 사게 된 것이 단일한 인도주의자적 심리의 발작이 아니라 계급적 동류감에 그와 같이 된 것이 사실일 것 같으면 ‘경식’이 자신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범죄를 하지 아니치 못하게 한 이 사회에 대한 어떠한 최후적 행동이 있고야 말 것은 필연한 사실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서도 작자는 ‘경식’이를 이 길로 인도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그런데 왜 ‘경식’이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였는가? 작자는 ‘경식’이를 배리직은 한 인도주의자로 만들고 말았는가? 이왕 사지 못할 ‘경식’이면 왜 하필 ××대(臺)에다 올려 앉힐 맛이 무엇인가? 작자는 이와 같은 비극을 연출케 하는 이 사회를 저주나 또는 원망하기 위하여 ‘경식’이를 한 개의 제물로 사용하였는가? 그러나 그따위 눈물겨운 양심적 호소 같은 데에는 눈도 거들떠보지 않을 이 사회, 이 제도인 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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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집』 (조선지광) 동씨 작 ― 이 작품은 아직 전개된 사건의 결과를 보지 못하였으니까 말하기는 어려우나 어쨌든 읽고 난 인상이 깊다. 앞으로 좋은 결과를 보여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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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아사(餞迓辭)』 (동광) 최서해 씨 작 ― 이 작품에 대하여서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려 하거니와 쓸데없는 잔 사설로 「페이지」 수만 채우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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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紅焰)』 (조선단문) 동씨 작 ― 여기서 독자는 씨의 재래의 작풍에서 새로운 경지를 시험한 노력을 엿볼 수 잇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약한 자의 가슴에 숨어 있는 위대한 잠세력을 암시한 점에서 성공하였다. 이 사회를 그대로 두고서 어디를 간들 무산자의 고통과 비애를 면할 줄 있으랴? 병들고 낯익은 옛집을 버리고 감자와 율밥을 찾아 북으로 북으로 장백산맥을 밟고 간도를 찾았던 백의무산군은 다시 그곳의 지주와 자본벌에게 착취와 압박을 여지없이 받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문서방’은 지주인 ‘인가’에게 자기의 귀여운 딸을 무리한 횡포와 강제에 못 이겨 빼앗기고 그 아내는 그 일로 인하여 단 한 번이라도 자기의 딸의 얼굴을 뵈여지라고 애통을 하다가 뼈에 사무치는 한을 품고 그대로 죽었으니 딸 잃고 아내조차 비참히 잃은 ‘문서방’의 애통만으로 끝내고 말 것이냐? 약한 자의 힘은 여기에서 비로소 폭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기의 힘이 강하다고 믿던 ‘문서방은’은 ‘성냥’ 한 가치로 너무나 대담히 철광 같은 ‘은가’의 총벽을 돌파하고서 그의 적 ‘인가’를 죽이고 그 딸을 자기의 품에다 안을 때에 성공의 개가를 아니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부녀는 앞으로 어찌하여야 살 것이냐? 이것을 독자는 더 묻지 말라. 일사(一死)를 각오한 ‘문서방’이 할 일은 이에서 다 한 것이다. 간도 백의무산군의 아니 전 무산 계급의 ××는 이 길을 밟고야만 현실될 가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 중에서는 우연 가운데에서 민족적 경향의 암시가 보이는 듯한 혐이 없지 못하다는 말만 부쳐둔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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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낙원』 (동광) 방인근 씨 작 ― 태작(駄作)이라기 보다도 차라리 소설 아님에서 더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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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날』 (별건곤) 이익상 씨 작 ― 이 작품 역시 말할 흥미가 없다. 한 신문사원이 수월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하여 정귀(偵鬼)들에게 쪼들리며 곤란으로 지나가다가 그믐날 월급을 찾아가지고는 아내와 함께 어린 아들을 데리고 본정통을 들어서서 물건을 산다. 아이스크림이며 양식을 먹는다, 어린아들의 노리개 감을 사준다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무슨 그리 큰 의의를 갖게 되는 것인가? 차라리 월급을 모처럼 찾아가지고 나서자 정귀들을 만나 다 떨리고는 어린 아들의 약속까지도 지켜주지 못하고 빈주먹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로 끝을 맺었던들 얼마쯤 읽을 의미라도 있었을지 모를 것이다. 실패 대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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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악마』 (동광) 동씨 작 ― 이 작품은 더욱 실패다. 이 작품은 쓸데없는 고독에서 옛날에 있던 ‘로맨스’를 기억장으로부터 들추어내서 끄적여 본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제재에 궁한 작품이다. 차라리 공상문학이라 할까? 더 말하지 않거니와 작자는 좀 더 엄숙한 태도로 붓을 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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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손』 (조선지광) 김영팔 씨의 이 작품은 처음 읽을 때와 다 읽고 인상이 너무도 다른 데에서 섭섭한 생각이 없지 못하다. 주인공 ‘윤일’이와 같은 일터에서 일급노동을 하는 ‘박서방’은 충분한 증명은 없다 할지라도 암암리에 일본 사람의 ‘스파이’노릇을 하기에 충성을 다하는 빛이 보이는 인물이다. ‘윤일’이는 넉넉히 이것을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윤일’이가 굶주리는 마누라를 위하여 모처럼 고기를 사들고 갈 그날의 일급을 술집에다가 털어 바치고 마지막으로 주모가 조는 것을 기회로 하여 돈궤에다 ‘검은손’을 대게 된 것도 이 불량한 ‘박서방’에게 대한 어떠한 행동에 대한 암시가 없었다. 노동군이 ‘스트라이커’나 어떠한 단체적 행동을 할 때에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곧 ‘스파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자를 제멸(除滅)치 않으면 노동군의 그 ×××행동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이 작품에 퍽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반드시 ‘윤일’이는 ‘박서방’에게 대한 복수적 행동이 있으리라는 예측을 가지고 읽었었다. 그랬던 것이 종막에 이르러서는 주인공 ‘윤일’이의 적수인 또 적수가 되어야 할 ‘박서방’ 문제는 없어지고 돈궤에다만 ‘검은손’을 대어서 성공을 하고는 ‘생활의 검은손의 큰 힘을 깨달았다’는 것으로만 끝을 맺고 말았으니 사건의 전개와 포착이 독자의 예상과 닮은 것은 그만두고라도 주인공 ‘윤일’이는 결국 졸약(拙弱)한 자인 동시에 야비한 성격의 소유자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면 ‘생활의 검은손의 큰 힘’이라는 이것은 도리어 무가치 무의미한 말로 돌아가고 말았다. 『개밥』 (동광) 주요섭 씨 작 ―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사건의 연락과 그 수사에 있어서 상당히 세련된 작품일 뿐만 아니라 그 제재의 선택에도 평범한 듯한 위에서 작자의 고심한 노력이 보인다. ‘아씨댁’ 살림살이와 행랑살이가 한울타리 한대문 안이면서도 별건곤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거니와 ‘없는 놈은 부잣집 개 신세만도 못하다’는 이 사실은 이 작품에서 비로소 여지없이 폭로가 되고 말았다 행랑방에서 울고 앉았는 어린 ‘단성’이는 아씨댁 서양개가 조석으로 먹는 고기 죽밥에 침을 삼키었다. 그러다가 ‘단성’이는 결국 개가 먹는 그만한 것도 못 먹어서 영양부족으로 죽게 될 때에 어멈은 그 딸 ‘단성’이를 먹이기 위하여 전에 하던 버릇으로 개밥에다가 손을 대다가 그 고기 죽밥의 주인인 ‘개’에게 들켜서 개와 두잽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얼마나 현 제도에 대한 치떨리는 풍자적 비극이냐?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여기에서 더한 걸음 나서는 행동이 없어서는 아니 된다. 작자는 또한 이 점을 간취하기에 민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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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멈은 필경 그 개를 물어뜯어 죽이고 피투성이한 그대로 개밥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단성’이에게로 달려 왔다가 ‘단성’이가 죽은 것을 보고는 뒷미쳐 밖으로 뛰어 나아가며 ‘단성’이를 부르며 고성쳤다. 정신이상자로 취급을 하였으나 이것은 결코 정신의 이상이 아닌 것이다. 무산군의 불멸적 폭풍적 행동을 자본벌들은 광증시(狂症視)하리만은 분화구처럼 내품은 광분과 홍염을 가슴에 품은 무산군은 주먹으로 땅을 치며 가두로 아니 내달릴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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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와 같은 행동만으로는 최후적 ××를 기대할 수는 없는 만치 여기에서는 더 한 걸음 다른 조직적 구체적 행동이 필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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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의미에 있어서 ‘어멈’을 문 밖으로 지향없이 내보내기보다는 ‘아씨’에게로 뛰어들며 ‘단성’이를 찾는 것이 작품의 그 구도상으로 보아서도 더욱 조직적 적극적 효과를 가질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멈’이 가질 필연적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아씨’의 전화를 트는 장면 같은 것은 당초부터 없앨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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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작품은 자연주의적 묘사법에서 아직 완전히 탈출치 못한 것이니만치 작풍에 대한 불만이 좀 없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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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거지』 (조선지광) 조명희 씨 작 ― 작자는 무엇보다도 ‘없는 자에게 있어서는 친척도 없다.’는 이것을 지적하기에 주안을 한 듯 싶다. 그렇다.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는 형제도 ××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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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자여, ‘장돌’이 모자는 그 친척의 집에서 쫓겨나서 결국 ‘새거지’가 되고 말았으니 ‘장돌’이 모자의 살길은 영영히 그밖에 없는가? 무장공자(無膓孔子)가 아니 어떠어떠한 복구심(復仇心)도 갖지 못하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날이 ‘새거지’를 낳는다. 중산계급은 무산계급으로, 무산계급은 다시 무전걸객으로 ― 죽음으로 ― 이와 같이 나날이 속도를 더하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는 반드시 비판이 있어야 하는 동시에 어떠한 행동의 암시가 있어야만 작품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게 될 것이 아닌가? 작가는 언제나 늘 민중의 사상보다 한 걸음 나서서 선구자적 임무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니 따라서 작품의 내용이 이 현실을 그대로 소개 또는 해부하는 데만 그쳐서는 아니 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 있어서 독자는 ‘새거지’의 가치를 따로 발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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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과 소설』 (별건곤) 최승일씨 작 ― 이 작품은 제재의 추택(推擇)으로부터 그 구상과 표현에 이르기까지가 전혀 평범에서 평범으로 흐르니만치 아무것도 문제가 붙지 않는다. 차라리 실패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대로라도 말하자면 이 작품은 빈한한 문사의 생활의 일면을 그려 놓은 것인데, 그 종막에 있어서 주인공의 ‘꿈’을 현실로 고치고 의사에게 약을 얻어 가지고 나서는 것으로 끝을 맺고 말았으면 옛날에는 동창생이었으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빈부의 차가 현수(懸殊)한 그 의사에 대한 주인공의 ‘세상에 남에게 자선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다 이러할까?’하는 그 심적 고민이 얼마쯤 의의 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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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좀 더 심각미를 보이기 위하여 그리하는지는 모르나 흔히들 요리키 어려운 듯한 장면이면 이것을 ‘꿈’으로 만들어 놓고 주인공을 강제로 그리 몰아 넣어서는 한바탕 몽환극을 연출시키는 폐단이 있다. 조명희씨의 작품에서도 이번 ‘새거지’와 함께 이러한 것을 두 번이나 나는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유치한 표현수법일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적 공산파 작가들이나 취할 짓이요, 적어도 유물론적 과학적 기초를 둔 우리네의 실증문학에 있어서는 환영할 수 없는 작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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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작일 기재된 김영팔 씨의 『검은손』 끝에 『그러나 이 작품 중에는……』의 넉줄은 최서해 씨 『홍염』에 계속이 잘 못 들어간 것임을 이에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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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공조합대표』 (문예시대) 송영 씨 작 ― 작자는 이 작품에서 노동군의 ×××행동성을 암시하는 한편으로 자본벌의 포악한 야성을 적발하려고 하였다. 그 의도만은 존경한다. 그러나 작자는 제재가 주는 사건을 너무도 객관적으로 요리한 까닭에 작품이 말하려하는 최후적 의의를 도리어 말살시키고 말았다. 어째서 ‘창호’가 반드시 대회(회의 명칭과 그 의의로 말하여야 할 것이다)에 출석하지 않으면 안 될 필연적 조건이라든가 ‘쥔’이 ‘창호’의 행동을 분개할 이유 등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고는 이 작품의 실증적 공효(功效)를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쥔’이 ‘창호’의 부친을 능욕하여 기절케까지 하고도 무사히 현장에서 발꿈치를 돌려세운다는 것은 혹 사실에 있어서는 통과될 일일는지 모르나 작품의 구성적 가치를 발휘하기 위하여서는 될 수 없는 노릇이다. 반드시 ‘창호’의 처에게 죽든가 무슨 최후적 거조(擧措)를 당하여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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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게도 이 작품은 실패에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작자의 피있는 감정은 앞으로 좋은 작품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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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미인의 사』 (문예시대) 독견 씨 작 ― 포착한 사건을 조종하기에는 무던히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탐정 소설격으로 된 점에서 독자의 순간적 흥미는 끌 만치 되었다. 그러나 평자는 묻노니 작자는 이 작품에 무엇을 암시하려 하였는가? 즉 이 작품의 최고적 정신이 나변에 있는가? 자애의 삼각적 관계가 낳는 비극을 말하려 하였는가? ××주의자들의 암흑면을 폭로하려는 심사인가? 그렇지 않으면 현대 법망의 귀력적(鬼力的) 권위를 표영하기 위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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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작자 독견 씨는 그러한 의미에서 쓰진 않았으리라. 그러나 작자의 설명이 여기에서는 아무러한 효과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악선전이 되는 이외에는 이 작품은 아무러한 사회적 의의도 갖지 못한다. 초기에 있는 여성운동 내지 사회운동자들로 하여금 전 사회적으로 의혹을 받도록 밖에는 이 작품은 되지 않았다. 즉 민중과 ××주의자와의 ××를 중상하기 위하여 된 작품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작자는 작품을 쓰기 전에 먼저 생각에 신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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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문예시대) 조중곤 씨 작 ― 별로 결점이 없는 작품인 동시에 별로 깊은 의의도 갖지 못한 작품이다. 말하자면 한 빈곤한 노동자의 하루 동안 생활과 그 심경을 묘사한 소작품이다. 그러나 작자의 순실한 감정에는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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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斷膓)』 (문예시대) 일엽 씨 작 ― 이 작품에 대하여서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려 하거니와 시대전환기에 있어서 의례건으로 생기는 추락한 분자들의 감상적 심경과 그 추태를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표본이 되는 두 개의 부정남녀로 주인공을 삼고 희비극을 연출시킨 다음에 기 제호 왈 ‘단장’이라 하였으니 작자 일엽 씨는 차작을 세출(世出)한 그 심경이 나변에 재호(在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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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백동화(五錢白銅貨)』 (문예시대) 종명 씨 작 ― ‘로이터’ 활동사진격으로 된 한 개의 소품이라는 말만을 하여 둔다. 작자는 좀 더 무게있는 작품을 보여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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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혼불과(落魂不過)』 (문예시대) 최서해 씨 작 ― 이 작품은 제재로부터 소설로는 되지 않았다. 셋방살이로 돌아다니는 빈한한 부부일 망정 오히려 행락을 맛보는 나머지의 배부른 대화에 그치는 소품이다. 더 말하지 않거니와 작자는 창작에 대한 존엄을 갖기 바란다.
 
 
 

6

 
39
『새살림』 (문예시대) 윤기정 씨 작 ― 작자는 이 작품에서 그 무엇을 암시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다. 작자의 건실한 생각에 많은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작품은 애석히도 실패에 돌아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두동강이진 즉, 산반분과 하반분이 서로 연락될 수 없는 각각 독립적 성질을 가진 작품이다. 작자는 ‘새살림’이라는 것에 어떠한 상징적 의미를 붙인 것 같다마는 이 작품은 상반분 즉 ‘박십장’의 이야기의 뒤를 이어서 그와 같은 방법 그렇지 않으면 좀 더 적극적 수단으로 ‘김십장’을 여러 노동자들은 조처(措處)해 버리는 것으로 끝을 맺었던들 ‘장옥(長屋)’에 있는 노동군은 힘이 있는 노동군이 되는 동시에 이것이 사회적 의의를 갖기에 충분하리만치 작품의 질적 효과를 나타냈을 것이다. 그리고 하반분은 따로 떼어서 한 개의 독립한 작품을 만들었던들 작자는 얼마쯤 성공하였을는지 모를 애석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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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외(此外)에도 모군의 작품이 ― 소설 희곡 시가 등 ― 남아있는 줄 알면서도 시간상 관계로 부득이 평필을 놓게 되는 것만은 스스로 섭섭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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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신년의 문단은 수로는 연례에 없는 대 수확이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그다지 괄목할 가치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큰 유감이다. 그중에서라도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면 평자는 외람히 최서해 씨의 『홍염』을 첫손가락으로 꼽고 그 다음으로 송영씨의 『석공조합대표』와 주요섭의 『새살림』이 작품으로서의 작품화를 논평하기보다도 목적론적 견지에서 된 즉, 구성적 의의를 가진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무엇보다도 작품의 그 기초적 정신에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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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한마디 부언하고자 하는 바는 재래 우리네의 작품은 민중이 맛보는 현실의 불안과 함께 절망을 느끼는 데에서 그쳤을 뿐이다. 민중과 함께 저주의 눈물을 흘려왔을 뿐이다. 그러나 언제나 늘 민중의 사상 감정보다 한 걸음 나서서 지도적 임무를 갖지 않으면 아니 될 작가로서 갈 바를 모르는 민중과 함께 울기만 하면 어찌할 것이냐? 민중은 벌써 오래전부터 울어왔다. 지금은 울기에도 지친 민중이다. 함정에 든 ‘범’에게 눈물만 흘려주면 소용이 무엇이냐? 함지(陷地)에 대한 설명이야 천백 번 들려준들 쓸 데가 있으랴? 단 한 번이라도 벗어날 길을 살길을 일러주어야 한다. 작가의 임무는 오롯이 여기 있다. 이와 같은 정신을 갖지 못한 작품이면 그것이 비록 어떠한 미사여구로 수를 놓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죽은 놈의 입김만치도 아니 여긴다. 그러면 앞으로도 2월 창작 평을 다시 기다려보자.
【원문】1월 창작평 - 실증문학을 기초로한 구성적 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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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구현(權九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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