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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 있어서 예술의 계급적 대립을 부정하는 계급예술을 부인하는 예술가들을 통틀어서 「부르주아」예술가라고 말하면 좀 독단 같다만 그네들의 계급예술을 부인하려는 이론답지 못한 이론보다도 그네들의 사유와 관념에서 실제 행위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먼저 자백하는 다음에야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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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들은 어떠한 이론적 조건을 들어 오늘날 계급예술을 부인하며 따라서 「부르주아」예술가라는 칭호까지 벗어나려 할지라도 그네들의 영역을 벗어난 우리 즉, 계급예술을 시인하는 무산계급의 우리로서는 좀 미안하나마 그네들에게 「부르주아」예술가라는 존호를 아니 바칠 수가 없다. 그러면 계급예술을 부인하는 그네 즉, 부르주아 예술쟁이들의 주의 주장을 검토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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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계급이 없다’는 그 뜻은 예술은 영원이라는 뜻을 배경한 말이다. 즉, 시대와 환경을 떠나서 있다는 말이다. 예술과 사회는 전연 독립한 별개물이라는 의미도 이 속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대체 초시대, 초사회라는 영원의 예술이란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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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작자의 감정과 사상의 표현인 것만은 그네들도 부정치 못할 사실일 것이다. 그러면 시대와 환경을 떠난 소위 영원성을 가진 예술품이 있다 하면 그 예술품의 작자도 시대와 환경을 떠난 영원의 인격자라고 아니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불행히 인간은 자기의 입각지인 현실적 지배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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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에 의하면 예술은 종교, 도덕, 법률, 철학 등과 함께 사회적 의식의 일형태, 일요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일시대 예술은 다소를 물론하고 그 시대의 지배계급의 계급적 편견이 감염되는 것은 사호(些毫)의 의심도 없다. 그리고 이 계급적 편견이 생기게 되는 이유는 계급적 수립을 생기게 하는 사회적 생산관계에 불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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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물질적 조건이 사회적 의식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다른 문화와 함께 예술도 그 시대 그 사회의 제도 여하에 의하여 변화하는 것이다. 상의 간단한 근거만으로도 소위 예술의 「영원성」은 근저로부터 매장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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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영원이란 말을 훨씬 에누리하여 들으면 인생은 영원이라는 말과 같다. 인생은 영원이다. 천년 전의 인생이나 천년 후의 인생이나 인생은 인생이다. 그러나 원시인의 사상과 현대인의 사상이 같을 리 없다. 또한 인생이란 근본적으로 계급적 차별이 있을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계급이 없는 또는 없어야 할 인생이면서도 봉건시대에는 귀족 대 평민계급이 있었고 현대에는 자본계급과 무산계급이 대립하여 있다. 이것은 더할 수 없는 인간사회의 결함이면서도(지배계급은 이것을 합리적으로 여기겠지만)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대립으로 과거의 역사는 일관하지 않았느냐? 인류의 역사는 오로지 계급투쟁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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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도 이와 같다. 근본적으로 예술이 어떠한 계급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천년 전의 예술이나 천년 후의 예술이 예술은 예술이면서도 같은 예술이 아닌 사실은 역사가 잘 증명하는 바이다. 문예부흥 이전의 예술사상과 프랑스혁명 당시의 그것과 얼마나 사이가 현수(懸殊)하뇨. 아무리 예술의 시대적 변화를 부인하는 자라도 이태리의 고전문학과 러시아의 혁명문학이 같다고 할 용기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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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가 평화시대에는 상부상조하다가도(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과거에는 아직 없었다만) 혁명시대를 당하면 전투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화시대의 예술은 향락적일 것이나 비상기(즉 현대와 같은)를 당하면 선전 또는 전투예술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계급을 옹호하는 보수예술 대 신흥예술 즉, 혁명예술의 계급예술이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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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한번 예술은 영원이란 말과 비교하여 말하면 골할이 도덕군자들이 도덕은 하나뿐이라고 즉, 절대라고 하는 말이나 같다. 절대선이나 절대애라는 것이 혹 이론이나 관념상으로는 성립이 된다 할지라도 사실은 이것을 부정한다. 중세기에 귀족이 농노에게 베푼 도덕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이 또한 ××사회에까지 생명을 존속할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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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호가 생산자에게 다소의 물질(곡물 혹 금전)을 투하하는 것이 「적선?」이다. 노동자가 자본주의에게 굴종하는 것이 「호인(好人)?」이다 하는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송이다. 특권자가 민중을 무애(撫愛)한다든가(마치 사람이 개나 돼지를 어루만지는 셈으로) 공장주가 기공을 다소 동정한다든가 하는 것은 계급사회의 관후한 인류애이다. 이성의 애도 없는 것은 아니로되 이 사회에서는 균형을 잃고 한갓 주종적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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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의 귀족 예술은 농노를 위협하였으며 현대의 자본주의 예술은 황금의 만능을 구차(臨䯉)하는 타면으로 무산계급을 전율케 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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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말하면 좀 과히 생각할 분이 계실는지 모르나 생각해 보라. 오늘날 무산계급과 예술 사이에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음악이나 미술은 물론이요 쉬운 문학서적까지라도 읽을 수가 없다. 첫째, 서적을 살 돈도 없거니와 시간도 없다. 읽어 이해할 지력도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네들의 지능이 선천적으로 열등한 까닭이 아니라 오로지 사회적 환경에 의한 비극적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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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모든 예술은 전 세계를 통하여 무산민중과 하등의 교섭이 없다. 혹 간접적으로라도 민중과 어떠한 교섭이 있을 만한 예술품이 있다 하면 그것은 특권계급, 지배계급 ― 기생충 ― 들의 대금물(大禁物)이다. 그러므로 민중의 눈에 띄기도 전에 그네들에게 횡령을 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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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민중과 근접할 만한 예술은 최근의 유행물인 소위 신극과 활동사진 등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 제재는 흔히 재산에 관한 것이다. 「백만불의 비밀」이라는 노골적 제재를 가진 것은 물론이요 활극, 비극, 사회극, 탐정극할 것 없이 모두가 그 부분은 재산권의 신성을 극도로 주장한 것뿐이다. 도리어 자본주의의 선전기관이라 하여도 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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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는 개별의 괴물이 또 하나 있다. 이것은 협조주의, 온정주의파의 소위 인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불철저한 인도주의 병에 걸려서 「눈물」을 함부로 낭비한다. 자본가에게도 악인에게도 함부로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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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현상을 그대로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 현상을 그대로 긍정하는 태도나 다를 것이 없다. 이따위 선악정사에 대한 비판과 분노가 없는 예술쟁이들은(선악정사를 말함은 비예술적이라고 그들은 주장하리라마는) 명경과 같은 주관주의 하에서 무차별론적 자연관 내지 인생관을 세우려한다. ▣숙한 현실을 무시한 이 무차별론의 필연의 결과든 악을 장동(奬動)하는 반면에 선을 절망하게 하며 추락하게 할 뿐이다. 현재를 긍정하는 반면에 진화를 저해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각별한 눈물과 함께 이따위의 명경주의(주관)란 혈과 열과 생명이 없는 흐리멍덩한 그야말로 무차별적 냉담을 초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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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눈물을 아끼지 않으면 안 된다. 전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서 그의 장애가 되는 물건이 어떠한 의미에서는 가치를 가졌다 할지라도 이것을 배척하며 이것과 싸우며 이것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부르주아계급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비극적 모순이나 전 인류의 해방을 위한 무산계급의 운동은 재래의 일체 문화를 붙잡아 버려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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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의미에 있어서 무산계급의 예술은 선전예술이어야 하며 전투예술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금일에 한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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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이렇게 말하였다. “진정한 의미의 인류문화는 다음 「제너레이션」에 이르러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해체된 다음에 비로소 수립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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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정확한 의미의 완전한 무산계급의 예술은 다음날 계급 없는 사회, 계급 없는 문화건설을 기다려서 비로소 전 인류의 공유적 향락예술로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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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오늘날까지의 소위 인도주의란 진화의 법칙을 무시한 주의요 역사의 필연을 몰각한 주의다. 대항과 투쟁이 인류의 최고의 이상은 아니로되 피지배, 피압박계급의 해방을 위하여서는 이것을 저해하는 상호계급, 지배계급, 압박계급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전쟁이 안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혁명이 곧 이것이다. 귀족과 승려에게 있어서 봉건제도의 와해가 얼마나 비통한 일이랴마는 제3계급은 자유의 천지에 해방되지 아니 했느냐? 또한 최근에 와서는 러시아의 혁명이 이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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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인류의 해방을 위한 운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인도주의」일 것이다. 현실을 그대로 긍정하고 각별한 눈물을 함부로 흘리는 모순만천(矛盾萬千)인 인도주의는 차라리 애도 연도(憐徒)주의라고 하고 싶다. 2천년 전의 기독은 인도주의에 철저하였으나 사실을 신비화한 까닭에 두뇌 속에 다만 이상국을 건설할 뿐으로 십자가의 낙엽이 되고 말았다. 그 형태는 오늘날까지 오히려 인류의 다부분(多部分)을 산우상화 하고 있다. 오늘날 지배계급은 이것을 유일한 기회로 무기도 이용하여 우매한 대중을 더욱더욱 암혈에 쓸어 넣으며 자가(自家)의 만년 기반을 도(圖)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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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회변화의 법칙과 계급전쟁의 역사적 필연을 증명한 근세의 크로포트킨이나 맑스는 대중해방운동 선상에 신서광을 주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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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예술, 애의 예술, 또 무엇 무엇 떠드는 유미주의, 향락주의, 인도주의 예술쟁이들, 속세간을 초월한 선인풍(仙人風)의 예술쟁이들은 다시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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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예술가라고 하면 ‘나는 무산자인데?’, 말을 마라. 군 등의 머릿속에는 황금과 선녀가 가득 소복한 줄도 다 안다. 그뿐이랴. 더욱 부끄러운 일은 의젓한 「부르주아」계급의 기생충들이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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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말한다고 사기배적 양심의 소유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군 등은 모든 것을 본다. 적어도 군 등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정확이 모순된 정확이다. 주취(酒醉)한 자의 그것과 같은 정확이다. 군 등은 예술이란 분위기에 휘말려 그 속에서 흠신 취하고 흠신 노고라졌다. 여기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예술이란 분위기’를 벗어나야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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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벗어나라는 것은 붓을 아주 버리고 밭이나 논을 갈라는 말이 아니다. 벗어나라는 것은 파괴를 의미한 말이다. 파괴와 도피와는 성질이 다르다. 파괴를 위하여서는 대항이 제일 필요하다. 대항을 함에는 그 입각지를 먼저 선명히 하여야 한다. 여기에 오늘날 군 등은 강제적 의의가 있는 줄을 자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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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몇 마디 더 써 보자. 얼마 전 누구에게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달을 보고 ‘아 - 하 달도 밝다’하는 것이 예술이요. 노동자가 공장주에 ‘어디 이놈 두고 보자.’하는 것은 결코 예술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술은 향락적이요 유미적이지 결코 반항이나 또는 전투적인 것이 아니란 말을 의미한 것으로 안다. 이것은 정저(井底)의 와(蛙)와 같은 오해 만천(萬千)의 말이다. 같은 달을 보고 웃는 자가 있는 동시에 우는 자가 있는 줄을 모르는 말이다. 염세자의 예술과 낙관자의 예술이 결코 같을 수 없다. 약자의 예술과 강자의 예술이 다른 것은 중세기의 조선예술과 중국예술이 잘 증명한다. 또 어떤 자는 ‘문학은 표면상 계급적 영향을 받으나 미술이나 음악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문학에는 표면상 상식을 가지고 있으나 회화나 음악에 대하여서는 전연 무식을 표면하는 말이다. 회화는 단순히 색채의 조합으로서만 되는 것이 아니요, 음악은 단순히 음향의 조합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인간의 의식이 활동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있는 곳에는 사회적 환경에 의한 계급적 영향이 동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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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분은 ‘문학은 언어의 형식을 빌어서 선전도 하고 대항도 하려니와 음악이나 회화로써야 어찌할 수 있으랴?’ 또는 ‘임금(林檎) 한 개의 묘사에 무슨 계급적 인식이 떠오르랴?’고 피육적으로 질문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소한 논의를 이로 변증하려면 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차라리 그네들에게는 수학은 예술을 부정치 않을 수 없으며 문학은 물리학을 부정치 않을 수 없다는 합리적 비사실적 조건을 들어 설명할 필요가 있을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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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찰스키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가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는 명확한 투쟁에 기초한 계급문화다. 그것은 「로맨틱」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강렬한 만치 형식의 정제는 없다. 그것은 폭풍적 비극적 내용을 정돈하기에는 너무도 시간의 여유가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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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오늘날 무산계급의 예술은 전투예술인 것만을 기억해두라. 「부르주아」 계급을 옹호하며 구가하는 예술 내지 문화에 도전하는 것이 유일한 전투형식이다. 대항 ― 파괴 ―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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