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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流鬪士[여류투사] 『루이스』의 片影[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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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미셀은 1830년에 남부 불란서 뿌롱클 고성에서 출생하였다. 불란서의 노동자들이 그를 ‘혁명의 화신’ ‘노동자의 여신’ 또는 ‘선량한 루이스’ ‘공포를 모르는 루이스’라고 찬양하며 존경하는 만큼 루이스는 실로 당시××운동의 화형이요, 노동계급의 여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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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모친은 빈한한 농민의 고아로 이 성의 시녀가 되어 있는 동안에 성주의 아들과 정을 맺게 되며 그 결정으로 루이스를 낳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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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는 이 성내에서 온전히 이천년간을 평화와 안락으로 생활하여왔다. 그의 부친은 비상히 동물을 사랑하는 성벽(性癖)을 가져서 진진 기기한 각종의 동물을 사축(飼畜)하여서 성내는 소동물원을 이룬 관이 있었다. 따라서 아직 어린 루이스도 자연히 동물을 친애하는 정이 두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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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생애가 비상히 자애심에 대한 애념(愛念)이 심절하였던 것은 이때부터 양성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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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평화로운 생활 가운데에도 그에게는 남에게 말 못할 깊은 번뇌가 있었다. 그것은 즉 사생아라는 별칭을 듣게 된 자기자신을 저주하는 비애였다. 모친은 카톨릭교의 골신자로서 생에 대한 일체의 것을 한갓 운명에다 맡겨 두는 만큼 루이스의 경우는 일층 신송(辛竦)을 더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850년에 부친의 별세를 당하고서 장연히 모친과 함께 근소한 금품을 가지고 고성을 떠나게 되었으니 그의 고적한 모녀는 빈고에서 울지 않으면 안 될 비운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루이스의 참된 생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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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을 떠난 후의 루이스는 생활을 위하여 소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관립소학교에 취직을 하려면 정부에 대한 서약이 있어야 되므로 이것을 기피하기 위하여 모친과 함께 다시 소부락으로 이전하여 그곳에서 사립소학교를 건설하였다. 물론 극히 조그만 학교로 수용된 아동들로 모두 빈곤한 가정의 자녀였다. 이때부터 루이스의 가슴에는 무슨 ‘싹’ 이 자라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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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에는 파리의 소학교에 초빙되어 갔었으나 근소한 보수로도 항상 빈곤한 사람들을 구제하여 모녀의 생활은 한결 같이 참담하였다. ‘의식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왜 빈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줄은 모르는고? (차간26자 약)……’ 이 문제는 결국 루이스 스스로 하여금 사회조직의 결함을 자각하게 한 동시에 사회운동의 투사가 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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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는 그의 자애심과 용감력을 부친에게 받았으나 귀족의 피만은 이어 받지 않았다. 언제나 그는 평민의 양우(良友)였다. 모친의 조부가 가졌던 사회개혁사상이 루이스에게 어떠한 감화를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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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보불전쟁의 풍운이 권기(捲起)할 때 루이스는 동지들과 함께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하며 파리에서 일대 시위운동을 개시하였다. 이로부터 루이스는 자유의 투사라는 이름을 불란서 전토에 날리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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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3세가 드디어 전패한 후 제정은 도괴(倒壞)되고 공화정부의 수립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혁명당은 이 자본주의적 신정부를 극단으로 부인하는 반면에 공산적 코뮌을 갈구하여 일 규(揆)가 발발하였나니 이것이 소위 파리 코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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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도 물론 이 규중에 있었다. 그러나 포연탄우 속에서도 오히려 부상자의 간호에 시종한 데에는 누구나 그의 대담하고도 인자한 행동에 감복치 않을 수 없었다. ‘공포를 모르는 루이스’ , ‘선량한 루이스’ 의 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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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중에도 다행히 루이스의 몸에는 일탄일실(一彈一失)도 맞지 않았으나 결국은 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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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몸이 법정에 나서게 되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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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변호를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총을 들고 ××한 이 사실을 부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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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은 곧 발언을 중지시킴으로 루이스는 끝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하고자 한 말을 다 하였다. 다행히 재판장이 비겁하지 않거든 곧 이몸을 죽여라. 만약 나를 살려 내보낸다면 다시 민중에게 돌아가서 ××적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이것이 법정에 나선 루이스·미셀의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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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의 결과 무기도형인으로 뉴 - 카레트니아로 가게 되었다. ‘안리·로세후올’ 도 같이 가게 되었다. 뉴 - 카레트니아로 간 루이스는 동인의 병자도 간호하며 또 압제에 우는 토민(土民)들을 위무(慰撫)하기도 하였다. 토민과 접촉이 잦음에 따라 토어를 알게 된 루이스는 토민들에게서 들은 신화와 고담을 모아서 재미있는 책자도 만들고 또 토민들의 아동을 위하여 소학교도 창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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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동지간에서는 「파리코뮌」의 희생자에 대한 특사운동이 맹렬하였던 결과 1879년에 루이스만은 정부로부터 특사을 명하였다. 그러나 루이스는 “파리코뮌의 연루자 전부를 해방한다면 모르거니와 자기 혼자만은 이 은전을 받을 수 없다.” 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2년 후, 즉 1881년에 이르러서 일반특사가 있었을 때에야 루이스는 파리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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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에 파리의 실업자군이 대시위운동을 단행할 때에 루이스는 그 선두에 섰으나 행진중에 「빵집」을 돌습하고서 「빵」을 함부로 거리에다 산포하는 등 실업군들의 폭행을 그대로 두었던 혐의로 결국 주범으로 몰려서 강도죄의 명으로 세이누법정에 호송되었다. 동지 로세후올이 이 사건의 증인으로 소환되었을 때 극력으로 루이스의 결백을 변호하였고 뉴 - 카레트니아에 있을 때 루이스의 행장을 끌어 숭고한 인격자임을 증명하였으나, 루이스는 이것을 거절하며 “나는 변명하지 않겠다. 군등이 좋을 대로 하라.” 이와 같이 재판관에게 대질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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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의 결과는 9년간 금고였다. 이 판결이 세상에 공개되자 ‘루이스를 방면하라’는 운동이 동지간 뿐만 아니라 일반의 여론이 되어 각 신문과 대의원까지도 이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3년 후에 다시 출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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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 후의 루이스는 더욱 운동을 격렬히 함으로 정부는 가일층 고압을 한 결과 루이스는 할 수 없이 영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영국에는 각국에서 망명자가 다수 회집하여 있어 그들의 40여 명 되는 자제를 수용할 만한 소학교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또 모든 노동자들의 집회에 출석하여 기회있는 대로 열변을 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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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하여 수년을 영국에서 체류하는 동안에 불국의 동지 찌르 - 르가 와서 열심히 불국노동자의 참상을 설명하며 귀국을 권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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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벌써 ‘노동자의 여신’ 루이스는 70의 고령으로 건강에 많은 쇠약이 있었으나 오히려 동지와 함께 일관한 자기의 주의 - 무정부주의 - 를 선전하기 위하여 불란서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1903년 4월 쓰 - 론지방의 유설(遊說)중 폐렴에 걸려 익년 4월 9일에 영면의 길에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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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75년간 생애는 실로 불과 피의 생애였다. 그의 타는 듯한 반항심, 이것은 노동계급의 가슴에 주사되어 부정불의에 대하여 분노의 봉화를 들어서 자유의 갈구를 고취한 점에 있어서 루이스는 실로 실제 전선의 대표적 투사였다. 「파리코뮌」의 ‘빵의 일규(一揆) 같은 것은 루이스 전생에 비하여 일매 삽화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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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루이스의 일생을 통하여 한 가지 더 표창할 것은 그의 심절한 자애이다. (물론 소위 인도주의적인 자애와는 상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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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요 또 우인인 로시후올은 루이스의 죽기 전 20년간 생활을 보증하였으며 문호 유 - 꼬어는 루이스로부터 자작의 시를 받고 그의 반례(返禮)로 명저 노틀담을 보냈던 인연으로 우인이 되어서 그의 생활을 보조하여주었으나 루이스는 그것을 모두 빈한한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는 언제나 늘 적빈(赤貧)한 생활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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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 대한 그의 일화를 한두 개 소개하고서 끝을 맺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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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날 오후에 앙후온쏘·몬텔뀨와 졸지·뮤시라는 두 신문기자가 길가에서 루이스를 만났었다. 보니까 루이스는 얇고 낡은 옷을 입은 모양이 너무도 추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곧 의복점으로 루이스를 데리고 가서 상당한 것으로 골라서 한 벌을 사주었다. 그러면서도 몬텔뀨는 속으로 “이렇게 준대도 곧 또 다른 사람을 벗어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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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는 그 익일 또 루이스를 만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이스는 어저께 가졌던 의복이며 모자 구드 등을 몬텔뀨의 예상과 같이 남에게 벗어주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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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날 몬텔뀨는 루이스를 방문하니까 수염이 거친 낯선 남자 하나가 「셔츠」만 입고서 무슨 음식을 만들고 있어 몬텔뀨는 이상하게 여기며 “저사람은 누구냐?”고 물으니까 루이스의 대답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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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은 나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추위에 사뭇 밖에서 떨고만 있었던 모양 같은데 내 집은 언제나 늘 바깥문을 열어두는 까닭에 아마 기한을 견딜 수 없으니까 집을 찾아 들어온 것 같습니다. 별로 거리낄 것도 없고 해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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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뗄뀨는 이날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 ‘잠깐 저 남자를 밖에 가서 있으라고 해달라’고 하니까 루이스는 태연히 ‘아니 그럴 것이 없이 내가 잠깐 밖으로 나가지요.’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에 루이스의 면목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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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루이스는 루카스라는 한 폭한에게 저격을 당하여 중상한 일이 있었다. 그때에 루이스는 “루카스에게도 처자가 있을 것이니 루카스가 만일 감옥에 가게 된다면 그 처자는 큰 곤란을 받을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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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신문기자에게 말을 하고서 곧 상처에는 괘념(掛念)치를 않고서 즉시 경찰서로 달려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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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가 죽이려고 한 것은 곧 나요 그대들이 아니다. 이 사건은 나 개인의 사건이요 타인에게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저격을 당하였으나 나는 소송을 제기한 일이 없는데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제3자가 간섭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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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할 때에 배심관들은 루이스의 태도에 감동을 하여서 루카스를 정신병자로 돌려서 병원으로 보내었으나 루이스의 재삼 요구에 의하여 그대로 방면시켜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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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는 거리에서 병견 같은 것을 늘 주어 기름으로써 어느 우인이 불유쾌히 여겨 말을 하매 “나 역시 싫어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누가 내어버린 이것을 기르겠느냐” 고 대답하였다. 루이스가 뉴·카레트니아에 유배중에도 갈 곳 없는 병견은 루이스의 집을 유일한 요양소로 알고 들어 엎드려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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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는 스스로 나같이 추한 여자는 없으리라고 말하였으나 물론 루이스를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다지 추녀도 아니었다. 또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왔으므로 자기에게는 연애가 없었다고 하나 마 - 카렛트·마크미란의 저 루이스 전기 중에 ‘루이스에게는 후엘레타라는 애인이 있어서 「파리 코뮌」 당전에는 함께 총을 들고 활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크미란의 이 기록이 두렵건대 거짓이 아니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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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노동운동』에 실린 근등헌이(近藤憲二) 씨의 『루이스·미셀』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근등 씨의 말과 같이 불란서 노동자로부터 ‘선량한 루이스’ , ‘노동자의 여신’ 이라고까지 존경과 찬양을 받는 일세 투사의 루이스의 전 생애에 대한 기록이라는 이보다도 차라리 표제와 같이 루이스의 일 편영에 불과한 것이다. 루이스를 좀 더 상세히 알고자 하는 독자는 석천삼사랑(石川三四郞) 씨 저 『개정증보 서양사회발달사』를 고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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