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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산계급운동이 1927년을 과정하여 오는 동안에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격렬한 이론투쟁으로 일관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부인치 못할 사실이다. 문예운동진영 내에 있어서 이와 같은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격렬한 이론투쟁은 이론확립을 위하여 감행되었고 이론확립은 전체성적 운동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문예운동으로서의 과거 일 년간 이론투쟁을 계속한 이유가 있고 또한 역사적 의의가 존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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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아래에 1927년인 과거 일 년간 이론투쟁이 얼마나 격렬하였었다는 것을 반증하기 위하여 논전한 것을 간단히 지적하여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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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씨, 김기진씨, 권구현씨 등의 비평가의 태도를 맑스주의적으로 규범하기 위한 논전은 일찍이 보지 못하던 이론투쟁이었다. 이와같이 하여 같은 진영 내에서 동지 간의 논전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문예운동에 있어서 주체적 지도확립을 위하여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동지들의 활동 - 계급적 행동을 넉넉히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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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산씨를 중심으로 한 조중곤씨, 한설야씨, 임화씨, 필자 등의 이론투쟁은 ‘아나’ 적 문예이론, 허다한 비맑스주의적 문예이론을 배격하고 극복시키기 위한 논전이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과정하여 오는 동안에 문예영역내에는 나날이 전체성적 운동과 합류되어 가는 새로운 진전이 보였다. 다시 말하면 이론투쟁의 결과는 이론확립을 낳게 되었고 이론확립은 새로운 과정을 규정하게 되었다. 그러면 새로운 과정이란 어떠한 과정을 지적하여 운위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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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론투쟁 과정에서 실천과정으로의 비약을 의미한 것이다. 이론에서 실천을 밟게 되는 것은 필연적 과정인 동시에 또한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지않으면 아니 될 단계이다. 그러나 과거 일년 간에 문예운동은 완전히 실천과정을 과정하지 못하였고 이론투쟁기를 과정하여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혀 실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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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구현씨의 「신년창작평」에 대한 한설야씨의 박문(駁文)은 무엇을 지적, 검토하였으며 문예운동진영 내에 여하한 영향을 끼쳐 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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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씨의 평적 태도는 순정한 맑스주의 입장에서 일반작품을 비평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구명한 다음에 중간파적 평이라고 지적하였다. 사실 중간파적 비평인 것을 폭로하였다. 우리는 작품행동에 있어서 맑스주의적 비평기준을 기대하였고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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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운동이 전체성적 부분운동으로 완전히 진출하기 위하여 방향전환을 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그래 여기에 대한 이론투쟁이 또한 격렬하였던 것은 사실이다.『조선지광』7월호에 발표된 박영희씨의 논문을 비롯하여 『중외일보』지상에 기재(記載)된 김영수(金榮秀)씨의 「방향전환기에 입(立)한 문예운동」과 그 외에 여러 동지들의 발표한 논문 등은 우리가 반드시 과정해야만 할 과정에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감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문예운동으로서의 방향전환을 기계적 공식으로 수행하지 않기 위하여 이론투쟁을 전개하였고 일반 문예운동자는 여기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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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기관지인 『예술운동』창간호에 기재된 두 동지 ─ 박영희, 이북만의 글을 보더라도 얼마나 방향전환기에 있어서 그 단계에 적합한 이론투쟁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넉넉히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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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씨의 평론 「무산계급문예이론의 정치적 역할」도 방향전환기에 있어서 이론투쟁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비록 짧기는 하였으나 할 말은 어느 정도까지 다하였다고 볼 수 있는 구체적 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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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북만씨의 논문「예술운동의 방향전환론은 과연 진정한 방향전환론이었던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였는가? 방향전환에 대한 이론을 분석 검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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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조선의 현단계를 구명하였고 다음에 제3동지의 글을 검토하여 오류, 인식부족 등을 지적하였으니 제1은 김영수씨의 이론이 기계적 야합인 것을 표명하였고, 또한 속학자적 의식의 발로라고 지적한 다음에 우리는 이와 같은 이론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단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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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김영수씨가 과연 그와 같은 오류를 범하였던가? ……“새로 대두하는 애국문학파와의 공동행위를 필요로 한 것만큼 벌써 시간적 역할을 마친 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도 해체됨이 당연할 줄로 믿는다.” 이와 같은 김씨의 논조는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 프롤레타리아문학은 현단계에 있어서 불필요하다 오직 애국문학이 . 있을 뿐이다. 민족단일당은 이와 같은 행위를 요구하고 있지 않느냐? ─ 여기에 김씨의 오류가 존재한 것이다. 이북만씨는 이것을 여지없이 폭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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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석씨의 이론은 예술을 과중 평가한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또한 박영희씨의 논문과 김기진씨의 논문이 또한 여러 동지들의 논문이 거개(擧皆) 이론투쟁에만 그쳤고 실천적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설파하였다. 과연 실천적 행위에 있어서는 소리칠 만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였던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 점으로 보아 과거 일년간의 문예운동은 이론투쟁기를 과정하여 왔다는 것을 반증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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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만씨의 평론 역시 이론투쟁기에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감행하였고 역사적 의의, 계급적 임무를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같은 진영 내에서 작품행동에 대한 이론투쟁이 전개되었으니 조명희씨의「낙동강」을 제2기적 작품이라고 김기진씨가 지적한 데 대하여 조중곤씨는 제2기적 작품이 될만한 요소를 구비하지 못하였다고 반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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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낙동강」은 제2기적 작품이 못되었던 것이요 현단계가 요구하는 작품행동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두 동지의 논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작품한계에 있어서 실천을 위한 이론투쟁을 같은 진영 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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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곤씨의「낙동강과 제2기 작품」이란 평론은 작품행동을 감행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이론투쟁이었고 실천적 이론전개로 생각할 수 있다. 필자의 『조선일보』지상에 발표한「무산문예가의 창작적 태도」란 논문도 이상에 지적한 바와 같이 현단계가 요구하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작품규범의 이론이었다. 그러나 과연 제2기가 요구하는 작품은 한 편도 발표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과거 1년 간의 문예운동은 작품행동에 있어서까지 이론투쟁기를 과정하였다 뿐이지 실천과정을 과정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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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여러 동지들의 격렬한 이론투쟁이 전개되었으나 여러 가지 관계상 일일이 매거(枚擧)할 수는 없다.(여기에 대하여서는『조선지광』신년호에 기재된 필자의 졸론(拙論) 중 평단을 논의한 부분을 참조하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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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말하면 무산계급문예운동에 있어서 확실히 이론투쟁기를 과정하였다. 그러면 우리의 운동이 금년에도 내내 이론투쟁만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다. 문예운동 진영 내에 실천적 신전개를 의식적으로 감행하기를 노력하여야 한다. 어느 동지는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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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이 없는 실천은 망동이요, 실천이 없는 이론은 공상이다. 위대한 실천을 낳기 위하여는 그 이론적 근거가 명확하여야 하고, 그 이론적 근거가 명확하려면 이론확립을 위한 부단한 이론투쟁이 있어야 할 것이며, 이론이 가치판단을 하기 위하여는 그 이론이 규범한 실천의 검토를 필요로 하며, 그 실천의 검토를 정(正)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는 비평가의 객관적 태도를 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산계급문예운동에 있어서도 이론확립을 위한 이론투쟁이 존속하는 것이며 그 실천의 비평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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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논리가 오류를 범하지 않은 정당한 이론이라면 과거 일년간 이론투쟁에 대한 실천적 효과가 반드시 있어야만 할 것이다. 또한 문예영역 내에서 이론확립에 의한 실천적 행위가 없이는 문예의 기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는 동시에 전체성적 운동을 위하여 발랄한 투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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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유하에 우리는 신년 벽두부터 실천행위를 감행하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 1927년인 과거 1년간은 이론투쟁을 하기 위하여 한군데로만 집중되었으나 1928년인 금년 1년간 어느 정도까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 투쟁이론에 의하여 실천적 행위에 유의하자. 그래 금년 1년간 조직적 행동화를 나타내게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론투쟁을 전혀 중지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이론투쟁이면 어디까지 격렬한 논전을 전개시켜 맑스주의적 방법론에 의한 주의적 지도이론 확립에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도 또한 가치 있고 의의 있는 역사적 계급적 임무를 완전히 수행하기 위한 일반 문예운동자의 태도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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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계급 문예운동이 무산계급 해방운동과 합류되어 현단계의 임무를 부분적으로 다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증하는 사실이다. 그래 예술운동도 전체운동도 전체성운동에 일익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손으로 벌써 구명된 지 오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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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일익적으로 진출하게 된 임무를 다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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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아래에 네 가지 행동을 구별하여 신년부터 실천과정을 과정하는데 한 도움이 되고자 한다. 그래 동지와 같이 조직적 통일의 행동을 감행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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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술영역에 있어서는 포스터 운동을 일으키어 모든 선전의 행위를 도모할 것이다. 여기에 유의하는 미술 동지는‘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으로 집중되기를 바란다. 그래 맹원으로서의 현단계가 요구하는 미술행동을 수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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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극운동, 무산계급예술운동에 있어서 연극부문이란 한 개의 중요한 부분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 연극행동이 예술운동에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감행할 수가 있고 현단계운동에 일층 효과를 맡아낼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다같이 인증하는 바이다. 연극과 선전! 이것은 서로 떨어지지 못할 관계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유의하는 연극동지는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으로 모이어 우리 운동에 가장 효과 있는 연극행동을 수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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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작품행동 ─ 나는 이 위에서 과거 일 년간 이론투쟁을 과정하는 가운데 제2기적 작품을 제작하기 위하여 작품기준, 작품규정의 이론이 어느 정도까지 논의되기는 되었으나 작품행동에 있어서는 과연 제2기인 방향전환기의 작품이 한 개도 없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 점으로 보아 작품에 있어서는 더구나 실천적 행위를 다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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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1928년인 신년부터 제2기적 작품, 방향전환기적 작품을 제작하여 현단계에 적합한 작품행동을 의식적으로 감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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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행동, 무산계급, 문예운동의 기능이 작품행동뿐만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손으로 구명된 지 오래이다. 다시 말하면 같은 진영 내에 동지들의 행동이 예술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체성적 투쟁이며, 적극적으로 투쟁하며 맑스주의적 방법론 인식 하에 조직적 통일행동으로 진출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문예이론으로서의 투쟁이론인 것이 증명되는 동시에 이론과정에서 실천과정을 밟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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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의미에 있어서 1927년인 과거 1년간을 이론투쟁기라고 한다면 1928년은 실천과정기로 맞이하기를 동지들에게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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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외일보』, 1928년 1월 10일 -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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