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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내 나이 마흔이니 뜻을 조각에 두고 지낸 것이 20년이나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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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무살 적에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생 27명 중 24번으로 겨우겨우 치루고 동경을 향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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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학 시대에는 학교 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고 우미관, 단성사, 광무대로 허구한 날 돌아다니었는데 그때의 짝패로 일보(*소설가 함대훈의 호) 형에게 소개하여도 좋을 사람은 회월 박영희 형과 고범 이서구 형과 그리고는 비사제(鄙舍弟) 팔봉 김기진 등을 들 수 있습니다만은 그러나 이 사람들은 완전히 우리의 당파는 아니었고 미지근한 동정자들이어서 나처럼 전문적이지는 않았던 만큼 학교 성적도 월등 좋았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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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으로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구경을 많이 다니고서야 제 무슨 수로 학과를 담당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지긋지긋한 시험 때를 당할 때마다 협잡하는 기술과 창의만은 신중하여서 근근히 낙제를 면하였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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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3학년이 되고 보니 학교 안팎 사정도 짐작하게 되고 선생님들의 눈치도 볼 줄 알게 되었는데, 때마침 커다란 폭풍우의 전조를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통에 나도 엄벙덤벙 하다가 어찌어찌 하여서 톨스토이를 읽게 된 것이 예술이라는 병에 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하두 하기가 싫던 대수나 기하나 영어 단자(單子) 하나를 알지 않고서도 사람으로서 할 일이 또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무던히 좋아하였을 뿐더러, 활동사진이나 연극이나 잡가를 통하여 가뜩 배운 것이 있는지라 옳다구나 하고서 연일 진고개 서점으로 다니며 연애 소설집 등을 모아 오기 시작하였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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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오는 학비가 부족하면 전당질도 하고 일가들에게 거짓 전갈도 하고 하여 백여 권의 연문학(軟文學) 서적을 싸들고 한편으로는 머리를 기르기를 시작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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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만치 하고 보니 과연 내가 훌륭하게 된 것 같았고, 우리 동창들 중에서도 나와 비슷비슷한 사람이 한둘씩 생겨나게 되는데 먼저 말한 박영희나 김기진이나 박팔양이나 이백수나 또 1년 위의 나빈이나 1년 아래의 최승일이 있었고 다른 학교에는 휘문에서 정백과 노작 홍사용이와 양정에서는 마해송 이를 알게 되어서 만나면 제법 구수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하였는데 끝장에 가서는 고범 이서구와 상의하여 가지고 반도구락부라는 것을 만들어 보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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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이나 그 때는 신열이 나도록 돌아다니면서 준비를 해가지고 금곡원에서 그야말로 성대한 발회식을 하여 보지 않았겠습니까. 꼭 이 통에 배재학교에서 체조 선생님이 눈독을 들이고 나를 붙잡으려 하였지요. 그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라 3학년 적부터 체조 시간에는 슬그머니 도망쳐서는 호떡집 가서 놀다가 종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어슬렁어슬렁 돌아가는 상습범자를 단단히 혼을 내시겠다는 것인데, 나 역시 그만한 눈치쯤은 미리 아는지라 나는 나대로 피해서 그야말로 공방 양편에서 별별짓을 다하다가 어느 날 (급장 현 배재중학교 교유(敎論) 장용하 형)의 청을 피할 길이 없어서 체조 시간에 출석을 하였더니 선생님이 여간 성이 난 것이 아니어서 당장에 벌을 서라고 호령을 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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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사! 이제는 이 학교와 마지막이로구나 하고 단호한 호령에 복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만한 기운은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바로 집에 있는 백여 권의 문학 책에서 나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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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세가 이렇게 되고 보니 선생님도 어이가 없어 관대하게 용서를 하시고 말았고 그 후부터는 아주 체조 시간에는 빠져서 자유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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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이든지 종교든지 간에 신앙하는 사람의 태반은 공덕이 있다고 해야 하는 것과 같이 문학을 하여서 목전에 이런 효과를 직접 체험하고 보니 그만 신이 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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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점점 날뛰다가 매일신보 일요문학란에 ‘미문(美文)’ 을 투고 하여서 상을 타며, 또 한편 소설이라고 써서 인쇄, 무엇이라는 잡지에 보내는 등의 망발을 하고 다니다가 급기야 등사판 인쇄로서 시 잡지를 고범의 주재로서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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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길어지는 머리털은 이제 와서는 눈썹 너머를 가리게 되니 ‘오스카 와일드‘ 배워야 되겠다고 칠피구두부터 신게 되었지요. 명주 두루마기에 이런 신을 신고 이런 머리를 하고 공책 단 한 권만을 가지고 중학교를 가는 중학생을 생각만이라도 하여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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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보 형! 그저 웃어 버리시겠지요. 이래저래 허둥거리며 일년을 또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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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중에도 나로서는 중대한 번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 와서도 내 신세를 망치게 하였는지 또는 잘 되게 하였는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인데 문학하는 친구가 너무 많이 생기는 것이 나로서는 탐탁하게 생각하여 지지 않았고 낸들 바로 말하면 학교 공부가 하기 싫은 판에 덤뻑 손을 대어 이것도 자꾸 읽어 보고 써 보고 하니 무슨 5전 짜리 입장권 사 가지고 우미관 구경하는 것 같이 손쉬운 일도 아닌 것을 알게 되었을 뿐더러 남들이 학교공부에 이골이 나서 하는 동안에는 잘하든 못하든 나는 나대로 엉뚱한 짓을 하여서 놀래주고 한층 높은 곳에 앉아서 속된 놈들을 깔보고 하자는 것인데 이렇게 우- 하고 모여지니 한 자리도 안온하지 않고 무서운 경쟁이 있어지는 것 같기도 하여 염려를 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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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궁리 끝에 “에라 너희들이 그렇게도 희망한다면 문학의 자리는 너희들에게 주고 나는 철학을 하여서 여전히 고고한 지위를 차지하겠노라“ 고 제법 하야 성명 비슷한 말을 남기고서 철학개론 부스러기를 읽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기평정미(紀平正美)의 책표지의 뱀이 뱀을 물고 있는 그림을 보고서 고개를 끄떡거리던 것만은 아직도 눈앞에 완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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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말한 바와 같이 이 점이 나의 성격의 중요한 일면입니다. 이 까닭으로 나는 지금까지 별별 일을 다 하여 보았고 원체 건강하지 못한 체질이라 부인병만 빼놓고 갖은 병을 다 앓게도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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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전에 춘원을 만나서 “춘원이나 내나 간에 체험만 있어서는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치 되었으니 그만 갈 데로 갑시다“ 라고 말만은 하였으나 원통한 것은 아직도 갈 길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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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먼저 이야기로 돌아가서 상학 시간이 되면 책상 한 모퉁이에다가 머리를 박고서 어이켕 철학과 니체의 철학을 읽고 지내다가 수신 선생님 강만씨에게 꾸중도 듣고 산구라는 지리 역사 선생님을 울리기도 하고 미모의 미국 여자 선생님의 사진도 도적질 하여서 박아가지고 시계 뒤딱지에 붙이고 돌아다니는 판에 신경쇠약이라는 영문도 모를 병에 걸려서 반은 연극을 가미하여 가지고 새벽에 남산 봉화 둑에 올라다니며 눈물을 흘려 보았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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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연애, 철학과 신경쇠약은 이 당시에는 아주 끼어다니는 것으로서 알고 무슨 기회든지 한 통을 치르어 놓지 않아서는 행세를 못할 때이니 심지어 춘원의 소설 ‘윤광호’ 를 그대로 해버리는 친구들도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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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저래 하기 방학, 동기 방학을 거쳐서 졸업 시험이 당도하는데 교과서라고는 한 권 사 본 일이 없고 상학 시간이라고 하여 필기 하나, 말 한 구절 새겨들어 놓은 것이 없으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나, 회월, 팔봉 등이 제가끔 학교를 하직하고 동경으로 떠난 뒤이라 나는 그 반대로 최후까지 앉아서 배기는데 비상수단을 쓰되 하나는 선생님들을 위협할 것과 하나는 커닝을 과학적이고 단체적으로 할 일이라는 주견을 세우고 우선 교무주임 선생님부터 교장 문제를 가지고 놀라게 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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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말썽도 다소는 되었지만 학교로 보아서도 이따위 학생이 아주 지긋지긋한 판이라 성적 여하를 묻지 않고 졸업장을 줄 작정이었는지라 큰 수고 없이 타기는 하였으나 이 취인(取引 *거래)에 소중한 장발을 깎이고 졸업사진은 학생복이 없는 탓으로 설왕설래하다가 이것도 결국 기숙사에 가서 저고리 하나를 얻어서 입고 맨 뒤에 서서 참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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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중학교 시대라느니보다 불량 소년 시절을 말씀한 것은 내가 지금 소일하는 조각을 지망하게 된 경로가 여기에 있었던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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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졸업이라고 하고 한 달포를 서울서 무료히 돌아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번에는 동경 유학을 계획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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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 말썽거리가 하나 있으니, 다른 것이 아니라 비사제(鄙舍弟) 팔봉이 공업학교엘 간다고 하고서 중학 졸업장도 없이 동경엘 가서는 학교도 입학하지 않고 문학을 합네 하고 날뛰는 것이 부모들의 비위에 썩 좋지 못하였는지라 나의 의견에 성큼 찬성을 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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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나는 나대로 고집불통의 성격이 있고 또 그 위에다가 아주 추근추근한 배짱을 가진 때이라 빈번한 문서전을 한 끝에 결국 허가를 맡았으나 조건이 붙기를 법률을 전문으로 하라시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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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만한 선에서 타협을 하여 가지고 현해탄을 건너게 되었으니 때는 정히 6월 상순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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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관(下關)에 내려서 엄벙덤벙 하다가 기차 시간을 놓치고 아무거나 타 볼 수밖에 없는지라 덜거덕거리는 완행으로써 동경에를 만중(晩中 *밤중)에 도착하여 가지고 와세다 방면까지 반은 걷고 반은 인력거 신세를 지고 아우를 찾아가니 첫밤에 시골놈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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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인가요. 시인이니, 시성이니 하여 놀림감으로 쓰려고 하는 지라 이것이 나의 꼬부라진 마음에 마땅찮아서 그 이튿날부터 먼저 동경에 온 패들을 골려주기로 하였는데 각개 격파의 전술로써 한명 한명씩 달달 볶아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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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나 전문학교의 입학기는 지난 지 오래고 그렇다고 해선 안 될 전문부에 들어가서 서자 비슷한 대우는 더욱 받기가 싫고 그래 놀 수는 또한 없는 일이고 하여 다 밝게 영어나 준비 한다고 하면서 동경의 표면, 이면의 구경을 일과 삼아서 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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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 ‘우연’ 이라는 수수께끼가 등장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느 날 (上野(*상야 우에노)) 공원을 지나가다가 지금의 일본미술원 전람회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작자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으나 <노자>라는 제명으로 석고 착색을 한 조각을 보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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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서 나는 이리저리 훑어보고 나대로 궁리를 하기 시작하였지요. 이 날 동행으로서 팔봉과 같이 갔는지라 형제가 웬 공원 의자에 앉아가지고 토의를 거듭한 나머지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을 하여 보자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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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보통학교 시대나 서당에서 공부하던 시대에는 내가 습자나 또는 도화에는 성적이 제법 좋은 편이어서 학교 대표로서 공진회 출품까지 한 일이 있었으나 중학생 시대에는 무엇 하나 침착하게 학교 공부라고는 하여 본 일이 없었던 관계로 아우만큼 도화에도 열심히 없었고 따라서 성적도 좋지 않았는지라 미술학교에 지망을 한다면 차라리 아우가 하는 편이 상식일 것이나 여기에도 두 사람의 성격의 차이로 경솔하나마 단행을 하여버린 다든지 탈속을 한다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한 걸음 앞장을 서 보겠다는 등의 야심이 내게 과한 바 있어서 그만 내가 미술학교에 지망을 하여 버리고 아우는 이것을 적극 지원하는 태도를 잡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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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미술학교는 관 · 사(官 · 私) 두 곳이 있어서 그 내용을 조사할 겸 찾아다가 만조보인지 조지(朝知)신문인지 잘 알 수 없으나 신문사 객원 기자 비슷한 지위에 있으면서 조선 유학생을 위한 자선 단체란 곳에서 일을 보는 분에게 의논하였더니 극구 칭찬하며 관립미술학교에 입학을 하되 9월경에 금년부터 처음으로 선과생을 모집하게 되었노라 함으로 나는 그야말로 작약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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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다가는 법률을 배우겠다고 하고서 슬슬 속여가며 문학을 하느니보다는 미술학교에 입학을 하여 놓고 건축 미술을 배운다고 하면 이것은 공업에 가깝다고 좋아 하실 것이고 또 하나는 원래 법률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니 이것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문과 입학만 해도 내년 봄까지 기다려야 되는 판이니 공연히 1년이라는 세월을 보낼 수도 없고, 또 한편 반드시 입학이 될 것이라고 장담도 못할 지경이고 또는 문학을 하느니보다는 예술 전반, 문화반을 이해하여서 문명비평가로서의 길을 열어보자는 엉뚱한 생각도 ‘칼라일‘과 ’고산저우(高山樗牛)‘를 애독하던 때이라 다분히 가졌음으로 덮어놓고 미술학교 시험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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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과에는 나 한 사람이고 서양화과에는 장발, 공덕진, 김창섭 형 등이 수험을 하였는데 천만 다행으로 입학은 되었으나 입학 시험장에서 고생하던 것은 못내 잊혀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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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 때의 시험 본 데생을 지금 찾아볼 수가 있다면 해괴망칙할 것이니 중학 시대에 목탄화란 그려보지도 못하였을 뿐더러 그리는 구경조차 한 일없고 단지 밀레의 화면을 통하여 콩테는 지레 짐작으로 알았으며 입학시험전에도 연구소 같은 곳에도 가 볼 작정도 하지 않고 일체를 운명과 요행에 맡기고 또 한편 조선사람이니 관대하게 하여 주겠지라든가 조각과에는 지망한 사람이 없으니 무어 생색을 내 줄 터이지 하는 등의 떡심을 가졌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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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력을 가지고서 나는 조각이라는 것을 비로소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이 당시에는 대략 이와 같으리라고도 생각되어집니다만은 그 중에서도 나는 월등나게도 물덤벙 술덤벙 하였고 그 끝에는 실없이 덤빈 것이 그만 골수에 사무치게 되엇으며 지금와서는 좀처럼 떨어지지 못하겠고 그 덕분에 제대로의 행세도 하고 겸하여 입에 풀도 바르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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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입학을 하여 보니, 조각과 전체의 학생이라고는 24~5명 밖에 되지 않는데 조선인은 단지 나 하나이고 하니 쓸쓸하기도 할 뿐더러 처음부터 영문모를 것이 많이 있는지라 한편으로는 조각을 시작한 것을 후회도 하여 보다가 고촌광운(高村光雲)이라는 선생에게서 여러가지로 격려하는 말을 듣고 다시 한번 결심을 하여 보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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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촌광운이라는 선생은 경성 장충단에 있는 박문사(博文寺)의 본존불을 조각한 분으로 근대 일본의 목조를 부흥시켰다고도 할 수 있을 뿐더러 동경 시가의 수많은 동상 중에서 제일 걸작이라고 말을 하는 남목정성(楠木正成) 상과 서향융성(西鄕隆盛) 상을 직접 제작 또는 감독한 분이며 또 시인 이면서도 음악도 할 줄 알며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그보다는 ‘백화(白構)’ 나 ‘명성(明星)’ 에 연달아서 가요를 발표하면서 조선에도 알려진 고촌광태랑(高村光太郞)씨의 엄부이시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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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이 고촌 선생이 조용한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조선 사정을 묻기도 하면서 끝장에 가서는 공부하는 법을 일장 이야기하여 주십디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날부터 자기의 시간표를 작성하였는데 그것은 아침에는 교문이 열리기 전에 학교에 갈 일이며 저녁에는 전등이 들어온 후에야 학교에서 나갈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정해가지고 실지로 하여 보니 차츰차츰 손가락이 제대로 돌아갈 줄도 알게도 되고 내가 만든 것이 과히 창피한 지경은 아니어서 동창들 앞에 내 놓을 적에도 쭈뼛쭈뼛 하지 않도록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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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 때 동창들 중에는 부호 안전(安田)의 집안 사람도 있었고 백작인지는 모르겠으나 귀족 토방가의 도련님도 있어서 교실 안에서 갖은 짓궂은 장난이 많았답니다 .으레 자동차나 승마로써 학교에 와서는 정종이나 맥주 따위를 교실에서 마시며 콧노래 장단에 춤들을 추고 정오만 되면 뿔뿔이 헤어져가지고 극장이 아니면 요리집 순례가 일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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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신통하게도 이 무렵에 한축을 들지 않고 묵묵히 원형(原型) 제작에 골몰하였지요. 어째서 이토록 별안간에 사람이 되었는가 하면 그 까닭은 중학생 시대에 이가 시리도록 ‘장난’도 하여 보았으니 싫증도 나고 또는 수만 리 타향에 와서 공부 성적이 떨어졌다가는 조선놈 욕도 될뿐더러 우선 당장에 창피를 당할 것이니 이것이 몹시 싫었었고 도대체 경쟁하는 마당에 애초부터 참여를 아니하면 모르나 이미 참여하였고 또 중간에 자진하여 기권을 아니한 만치 이 싸움에는 쉽게 선뜩 질 수가 없었던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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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이렇게 다니었고 하숙에 돌아와서는 그래도 배운 버릇을 놓을 수가 없는지라 연극 구경에 분주하게 다니게 되는데 소파 방정환 형과 박승희 형과는 이 통에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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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우리 집에서 세상에 듣느니 처음인 조각이라는 것을 공부하는 줄알고 이것은 약속 위반이니 냉큼 법률을 전공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조선으로 돌아오든지 하라는 최후 통첩 비슷한 것이 오게 되었고 나는 나대로 답장까지 아니하였더니 학비가 오다 말다 하니 돈이 주머니 속에 육장 있어도 모자랄 판에 이거야 견딜 수가 없어서 이 경제 봉쇄를 돌파하는 방법으로 총독부관비생이 되겠노라고 자천 운동을 하여 보았더니 이것이 의외로 속히 되어서 이제는 마음 놓고 지낼 뿐더러 이 바람에 집에서도 대체로 조각이라는 것은 도장 파는 것은 아닌가 보다 하여 안심도 하였을 뿐더러 학비를 주지 않고서 유학을 시키게 되었으니 아닌게 아니라 해롭지만은 않을 뿐더러 시골 사람들의 흔히 하는 버릇으로 자랑거리로 삼게 되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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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학비는 과히 군색치 않고 조각의 매력은 점점 느끼게 되는 판에 천재일우로 학교에서는 새 시험으로 세 교수 분담제를 쓰게 되어 나는 현재 제국미술원 회원 건창대몽(建昌大夢) 선생의 문하로 편입되기를 희망 하였으니 이것은 세 선생 중에서 가장 인격이 고매한 것을 흠모하였던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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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이 나누어지니 과연 맹렬한 경쟁이 생기게 되고 따라서 때로는 감정적 대립, 충돌까지 일어나서 물불을 헤아리지 않게까지 되었더랍니다. 학생들만이 이런 것이 아니고 선생은 선생대로 상당한 파쟁들을 하여 이판에 승부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학생들 제각기 공부들을 맹렬히 하였고 또 한편 선생들에게서도 도리어 용돈도 얻어쓰고 학비도 보조를 받고 심한 친구는 술값도 타기도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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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학생들이라는 것은 지금 같이 ‘하이칼라’ 는 구경하려고 찾아 보아도 한 사람도 없고 모두들 긴 머리를 여러 달 감지를 않아서 냄새가 무륵무륵들 나며 또는 일부러라도 잔초 공원 근방까지 가서 야시나 고물상을 뒤져 가지고 구녁이 다 난 고화(古靴)짝을 신되 양○(洋○)은 으레 신지 않는 법인지라 호주머니 속에다 가지고들 다니는 패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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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에다가 제대로 한두 개씩 장기가 있었으니 그 예를 들어 본다면 백주에 등불을 켜 가지고 드나드는 사람도 있었는지라 허허실실로 등불은 웬일이냐고 물을진대 그 대답이 ‘세상이 어두워서’ 라고 하며 또 어떤 친구는 건뜻하면 나체 무용을 하는데 그야말로 사내들끼리 보아도 해괴망칙한 것이라 제발 그만두라고 청을 하나 뻔뻔한 친구는 불란서 직수입이라고 지긋지긋한 박자를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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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둥지둥 세월을 보내기는 하나 마음의 한 쪽에는 늘 궁금하고 꺼림칙한 것이 있었나니 그것은 톨스토이 이후부터 내려오는 ‘예술이란 무엇이냐?’ ‘인생을 위한 예술이냐? 예술을 위한 예술이냐?’ 라는 묵은 숙제의 긴급한 해결을 어찌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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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로 하여서 때로는 선생에게 질문도 하여 보았으나 실기가인 선생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꾸 ‘모델’과 싸우며 ‘점토’와 싸우면 자연 알아지느니라고 할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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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조각가, 화가, 음악가들은 일반 상식은 아주 결여되다시피 된 사람들이라, 이 선생님도 가끔 동문서답을 하시는데 일이 잘 되려고 그랬는지 어느 날 선생이 내 작품평을 할 때 화가 머리 끝까지 솟아 올라서 그 자리에서 두드려 부수고 아무 인사도 하지 않고 모자를 집어 쓰고는 홱 하고 나와 버리었습니다. 그 때의 내 생각에는 ‘예술과 인생’의 명석한 개념의 파악이 당면문제라고 자처하고 있을 판인데 구구하게도 실기의 세말을 비평받는다니 도무지 꼬락서니가 아니라고 생각되었을 뿐더러 집에 가서 톨스토이나 보고 생애를 보내는 것이 옳지나 않을까 톨스토이는 내 머리 속에 늘 살아 있어서 톨스토이 이전에 예술가가 없었고 톨스토이 이후에 또한 예술가랄 사람이 없다고 극진한 정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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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톨스토이를 배울까 그대로 조각을 계속할까 한 달 동안이나 긴 시간을 가지고 머리를 앓고 있을 판에 뜻밖에 선생이 자택으로 오라고 함으로 어느 날 밤에 찾아 갔더니 5~6시간을 두고 자기의 일생을 이야기하며 군도 지금의 위기를 벗어나야지만 전문의 길을 밟을 것이나 그러나 그 시기가 너무 속히 왔으니 해결은 장래에 맡기고 꾸준히 공부를 하여 달라고 합디다. 그리고 자기의 문하 중에서 소위 사천왕의 하나로 추켜대며 차비로 돈20원을 주십디다. 그래서 나도 간단히 이것을 약속하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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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연이라는 것은 묘한 물건입디다. 이 선생과 이런 일이 있은 이후로 돈 교섭이 빈번하게 되었고 조선 신극 운동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토월회 제1회 공연 준비금 2백원도 바로 이 선생님의 호주머니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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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나 내나 간에 연극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니 말이외다마는 정말 연같이 젊은 사람들에게 ‘멋’을 알리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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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과거 사진장첩을 펴놓고서는 옛 청춘을 그리워 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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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월회는 박승희 형(명치학원) 연학년 형(상과대학) 이서구 형(일본대학) 박승목 형(제국대학) 임노월 형과 김명순 씨 이제창 형(미술학교) 아우 팔봉(입교대학)과 내가 매주 토요일 석양에 반드시 ‘카페 윤돈(倫敦)’ 2층에 모여가지고 제각기 1주일 동안 연구하고 제작한 작품을 진열하여 우리들도 서울에 가서 무슨 짓이든지 한바탕 해보자는 의견이 팔봉의 선창으로서 의결되었지요. 그리하여 궁리하던 끝에 연극이 종합예술이니 우리들의 포부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급한 대로 우선 이름을 짓기로 하여서 ‘토월회‘로 하자고 역시 팔봉이 제의한 것이 반대 없이 가결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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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토월회’라는 명칭으로 하여서 나중에 수수께끼가 하나 생기었지요. 그것은 조선에 와서인데 서울사람들이 우리들은 꿈도 꾸지 못한 것을 이상스럽게 해석을 하여서 ‘토월회’이니 또 무슨 사상을 암시하는 것이거니 하여서 시비를 들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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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토월회’라는 간판을 가지고 각본 선택을 시작하였고 한편 자금 운동과 동시에 여배우 채택 등 손아귀에 넘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박승희 형이 연극을 전공하니 각본을 도맡기로 하고 나와 팔봉과 그외 여러 사람이 부서를 정하여 가지고서 개미떼 같이 일을 하는데 이 판에 먼저 말한 선생님에게서 2백원이라는 돈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팔봉은 출발대로서 경성에 와서 여배우를 비롯하여 극장 교섭 등의 사업을 보게 되었고 나는 동경에 있어서 배경과 의상을 준비하기로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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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 있는 팔봉은 여배우로서는 고 이월화 양과 현재 만주국 육군중좌 이량 형의 종매 이정수 양을 발견하게 되고 나는 동창생 중에서 안본량일(安本亮一 현재 동경 조일신문사 만화반 기자)와 삼포등사랑(衫浦藤四郞) (문전무감사*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 양형의 원조로써 책임을 다하여 가지고 6월 하순에 경성에 도착하였더랍니다. 도착을 하여 보니 서울의 여름은 성해질 판인데다가 매사가 처음 생각한 것과는 딴판일 뿐더러 제각기 집안에서 맹렬한 반대가 생기어 가지고 한둘씩 탈출을 하게 되니 이 일을 걷잡을 수 없는지라 진정 당황하게 지내노라니 천운이 아직도 우리들을 버리지 않았던지 백조사의 제형 홍사용, 박월탄, 박영희, 안석영, 원세하와 이승만, 이백수, 이소연 형의 찬조로써 조선극장에서 첫 무대를 밟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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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란 것처럼 인생을 생활하는 것은 없느니라’ 는 말을 저는 말하여 보았지요. 요동안의 극단의 사정은 알지 못하나 그러나 나로서는 지레 짐작으로 그저 오십보 백보가 아닌가 하여서 고협(高協)의 송영 형을 만날 때마다 쓸데 없는 염려를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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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일 같이 이월화와 이정수를 중심으로 하여 연애합전이 발발하지 않으면 동경파와 경성파의 권세 놀음이 끊일 새 없어서 고 연학년 군과 내가 거중 조정에 분골을 하여 가지고 겨우 겨우 막을 열어 보니 가지가지의 신통한 병신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 역시 아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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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연극쟁이가 별안간 벙어리가 되기도 하고 사지가 멀쩡하였던 친구가 웬일인지 벌별 떨면서 뒷걸음질을 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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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지금으로 부터 17~8년 전입니다. 암만 생각하여 보아도 호랑이 담배 먹을 때라는 것이 바로 이 때이었다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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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고 하니 조선 극장에 즐비하게 앉은 관중이 동경당 학생이라는 문벌파 신극이라는 간판 때문에 꼼짝하지 않고 이 알뜰한 연극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알 수 없고 수상한 것은 그저 자기의 무식한 탓이라고 돌리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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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가 길면 붙잡힌다고 이 노릇도 정도가 있는 것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하여 놓으니 암만 무식한 관중들도 비로소 ‘자각‘을 하여 가지고 조전극장 사상 잊을 수 없는 대소동이 필경에는 생기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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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 이 동경당학생놈들! 돈물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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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등의 별별 욕설이 다 나오면서 고함을 치 고 벌먹 일어나서 야료가 시작되는데 본래 겁장이들인데다가 뒤가 꿀리는지라 말대꾸 한 마디 할 줄 몰라 악옥(樂屋*분장실)에 모여 벌벌 떨고만 있으니 장내는 문자 그대로 수라장이 되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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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토월회 제 1 회 공연의 수확이고 이것으로 하여서 제 2회 공연을 목하여서 설욕을 하자는 결의를 갖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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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동경에는 대지진이 일어나고 보니 속히 동경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하니 ‘예라! 연극이나 아주 하여 버리자’ 고 나선 사람이 박승희 형이고 박형은 이래서 가정과 등지고 줄창 예도로 나갔으나 그에게는 간난(難難)만 중첩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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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월회 이야기가 장황하였으나 그러나 토월회로 말미암아 나는 중요한 자기 교육을 한 것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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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단체 생활을 경험한 거지요. 사람의 문제를 짐작하게 되고 사람과 일의 관계도 몽롱하나마 폼으로써 배운 것입니다. 이후 나는 소위 통수학(統帥學)이라고 할까를 연구하여야 되겠다고 하여서 육군(陸軍)을 계속하였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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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공연을 박수갈채 속에서 막을 닫고서 10월 하순 나는 동경으로 향하였습니다. 몹시 그립던 동경이라고 와 보니 한 없는 벌판에는 이곳 저곳 산더미 같은 갯더미만 있어 처참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인심도 왈칸 변하여서 쓸쓸한 마음이 돌이킬 수 없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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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책과 의복과 금침을 찾았으나 한 몸 둘 곳이 없어서 거리와 공원에서 방황하다가 어느 날인가 고 우소해(禹笑海 *연극인) 형을 만나서 그의 집으로 가서는 우선 안심하게 되었으나 공부에는 조금도 마음이 가지 않고 그저 먹자 놀자는 판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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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람이라는 것은 그저 먹고 놀고만 하면서 견딜 수 없는 것인지 아직까지도 알 수 없으나 그러나 놀고만 있자니 사지가 비틀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 머리 속은 무척 초조해지는지라 우소해 형과 상의 끝에 바로 포전투영소(浦田投影所) 근방으로 이사를 하여 놓고 ‘뎀부라(天歸羅 *튀김)‘ 장사를 시작하게 하고 나는 이 기회에 활동사진을 연구하여 보기로 하지를 않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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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조석으로 촬영소 출입을 하면서 모형과 세트를 제작하는 구경도 하고 지내노라니 학교의 일은 까맣게 잊을 수밖에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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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인가 급보가 왔습니다. 금년 가을 전람회에 출품 준비를 하라는 선생의 명령인지라 이건 또 무슨 영문인가 하여서 학교를 가서 보니 과연 맹렬한 백병전(白兵戰)이 전개되었는데 학생 간의 싸움이 선생 간의 싸움으로 되고 또 학부형 간의 싸움으로까지 되어서 심지어 구주 탄광의 노가다까지 성군 작당(成群作黨)하여 가지고 오게끔 되었으니 나로서도 일시 젊은피가 부쩍 올라오는지라 ‘에라-’ 하고 덤뻑 뛰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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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학비라고는 영화연구 합네 하고서 다 써 놓았으니 급한 대로 모델 비용부터 주선하여야 하겠고 또 다른 사람들은 시작을 한 지가 일개월 이전인지라 돌연 마음만 졸이다가 급기야 일을 벌이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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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인가. ‘모델 좌담회’ 에서 형과 더불어 이야기한 바 같이 모델 조작법은 별별 신통한 짓이 다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 미술원우인 백정(白井) 모는 백주에 학교 정원에서 원앙의 노래를 합주하다가 정원사에게 발각되어 일주일 정학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만은 그 반대로 나는 몹시 모델을 학대하는 편이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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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하여 보십시오. 나 같이 조선 놈이면서 키는 ‘짱고로’ 같이 긴데다가 바짝 마르고 겸쳐서 얼굴은 만수산 석가산의 괴석같이 되고 돈은 없고 구변조차 없는 인물이 모델들에게 덤비었자 별수 없이 뺨은 아니 맞는다 치더라도 소문거리는 확실히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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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일찍부터 변태로 나아가서 잔인한 학대를 하여 보자는 것이며, 성욕학(이 당시 성욕학이라는 것이 학계 · 논단 · 예술계에서 심하게 떠들었습니다. 벽초 선생께서 여러 해 전에 말씀하신 것이 기억나는데 성욕학이라는 것같이 연구하기 쉬운 것이 없었노라고. 그것은 책이라 몇 권 없었으니 말이고 또 젊은사람은 누구나 읽기 쉬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라는 책을 모조리 보고 있을 때라 이런 지혜쯤은 알 수 있는 판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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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지방에서 근친 결혼 문제로 도망을 왔다는 여자를 구하여다가 로댕의 <이브>를 본떠 제작을 시작하였지요. 일기는 맹렬히 더워서 숨이 막힐 동안인 데다가 오전 오후 줄곧 일을 하니 제아무리 건강하더라도 견디기 어려울 터인데 우리 같은 약질이야 별수 없이 골수에 사무치게 되었는지라 이후론 아주 딴 사람이 되다시피 되었고 몸만 아니라 이 제작 때문에 생애를 통하여 중대한 두뇌의 부담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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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에 이르러 보니 작품이라는 것도 거의 거의 다 되고 하여 어느 날 모처럼 목욕을 가지 않았겠습니까. 목욕간에 가서 비로소 나는 각기병이 심한 것을 발견하고 허둥지둥 병원으로 가 보니 의사 말이 절대 안정하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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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도 동경의 길을 잘 알겠으나 포전(蒲田)에서 대삼, 품천(大森, 品川)을 거쳐서 상야공원까지 도보를 하면 약 5시간 걸리지요. 학비라는 것은 식비 20원 내놓고 모델값 60원을 주고 하면 도리어 15원 부족이 생기는 판이니 전차표도 사지 못하고 걸어서 다니기도 하고 또는 저녁에는 포전까지 돌아가기가 싫어서 학교 교실에서 도적잠을 자는데 모기가 어떻게도 많던지 신문지로써 얼굴을 가리며 자다가 천둥 바람에 의자에서 떨어져서 학교 수위에게 발각도 되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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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런 모험 비슷한 벼락 공부를 하였으니 각기는 그만두고서라도 무슨 병은 안 나겠습니까. 그리하여 전람회에 출품 수속을 동창에게 일임하고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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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인가는 기억 못하나 ‘사람이 두서너 번쯤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나지 않은 사람하고는 이야기도 건넬 수 없느니‘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점으로만 본다면 나는 훌륭한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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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의 경지에 서 보기도 한두 번 하였고 어느 때는 자살 미수까지 하였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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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론하고 동경 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도 근방까지 오니 숨은 목구멍까지 막혀서 통하지 않을 뿐더러 다리는 어찌나 부었는지 양복바지가 찢어질 지경입디다. 눈은 아물다물 하여지고 귀는 울리는데 속칭 저승소리가 시끄러워 견디다 못하여 맥주를 한 병 먹고 실컷 취해 버리자 그래서 취한 중에서 죽어 버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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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겨우 하관(下關)에 와서 덮어놓고 기선을 타기에는 어려운지라 정거장 앞 병원을 찾아가서 머리가 반백이나 된 의사가 제법 자신 있게 아무 일 없으니 배를 타라고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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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의사의 말을 신용하고 배를 탔더니 별안간 현기가 나며 몹시 가슴이 괴로와서 이것을 잊어 보자고 신문을 하나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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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펴보자마자 맨 처음으로 눈에 띈 것은 일본 수평사(水平社) 간부 누가 충심증(衝心症) 각기로 급사하였다는 기사였습니다. ‘어허!’ 나도 오늘 이 배에서 죽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여 보니 천감만래입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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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24, 장가도 못 가고 자식도 없는 등의 슬픔보다 그 때도 ‘인생이라는 것은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고 어렴풋하나마 생각하던 시절이라 아무러한 자취도 없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하는 것이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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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배는 떠났고 선실의 공기는 무거워지는데 벽에 걸린 시계는 자극자극 소리가 나니 어천지 눈물이 내리며 ‘천국이 가까이 왔다’ 는 느낌이 나더군요. 그리하여 비몽사몽간에 ‘아이고 죽겠다’ 고 고함을 친 모양이어서 의사가 오고 선원들이 모여서 연방 주사 놓고 얼음찜질도 하고 호령도 하고 사지도 주물러 주고 이튿날 아침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법석을 피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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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부근 산, 초가집, 흰옷 입은 사람들, 그리고 맑은 하늘을 보니 그저 몸부림을 치면서 이 속에 안기고 싶었습니다. 이전이나 이후에도 부산을 보고 부산을 지나기를 하나 그 때의 그 감격을 갖지 못하오니 이건 야속한 나의 정이라고 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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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는다느니 예술을 한다느니 하는 것이 요즈음 와서는 점점 도대체 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 같습디다. 그런데 이 말은 요새 말이고 그 당시 연락선 안에서는 무척 죽기 싫었고 또 겁도 납디다. 사실로 24세를 일기로 하고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너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많이 있었는데 젊은 혈관 속에는 허 영과 장담과 위대한 장래가 날뛰고 줄달음질 치니 어찌 종용(從容)한 처신을 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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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갖은 발광을 하여가지고 집에라고 와서는 6개월 이상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에 제전에 입선이 되었다고 하여 동경에 있는 신문이나 경성에 있는 신문에서 쓸데없는 광고를 내어 주니 아주 무슨 장원급제나 한 것처럼 뽐내 보기도 하며 자랑도 하자고 하여서 겨우 병상에서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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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통에 두 가지 숨길 수 없는 화제가 있는데 하나는 『매일신보』 사회면에다가 ‘6세 모의 초입선’ 이라는 표제(*‘궁색한 환경에서 시종이 여일했다.-사형 김기진 담‘의 오기)의 기사 중에 아우 기진이를 형으로 만들어 놓고 ‘그 아이가 입선을 하였다니 참 반갑습니다’ 하는 담화가 발표되어서 우리 아버지가 대노해서 신문사로 항의 비슷한 것을 하였더니 당시의 부장 이기세 씨가 장문을 보냈고 이것이 기연(機緣)이 되어서 그 당시의 책임자였던 정인익 형과 알게 되었는데 정말이지 일보 형, 우리 형제야말로 바꿀 수만 있다면 내가 아우가 되고 기진이가 형이 되어서 형제를 다시 정하는 놀라운 생각을 훨씬 그 전부터 하여 왔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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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까닭은 누가 보든지 간에 외양부터 나보다 나이가 들어 보일 뿐더러 언행도 훨씬 나보다 동양적이라 둔중한 편이었던 것입니다. 철이 나서부터 내가 형노릇을 하여 보자니 어디 영이라고 서지 않으며 영(令)이 서지 아니하니 그 따위 허울 좋은 직무는 애초에 벗어 버리는 것이 우선 어깨가 무거워지지 아니 하잖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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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느 날인가 상야공원 뒤에서 형제가 싸우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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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 폐일언 하고 네가 형 노릇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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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말았지요. 그러니 나는 신문에 발표된 것을 보고 ‘옛다, 차라리 잘 됐다‘ 하였으나 우리 아버지는 가장 상속권을 문란시킬 수 없었던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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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소학교 시대의 은사 박창화 선생의 추억인데 이 박 선생은 횡보 염상섭 형과도 친근한 사이입니다. 나는 이 선생에게서 역사라는 것과 문화라는 것과 정서라는 것을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선생의 초탈한 처세 속에서 큰 자신을 찾을 줄도 알게 되었고 선생의 극도의 절제 속에서 개세하는 탄식도 할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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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 선생에게 나는 심취하였고 선생도 나를 꽤 귀여워 해주는지라 철모르는 나도 이런 선생의 앞날을 염려하는 나머지 ‘선생님은 서른 전까지 만 사십시오. 이 이상 세상에 사신다면 자칫하면 꼴불견이 되시리다’ 라고 말을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랬더니 박선생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보다가 웃어 버리고 마십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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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선생님은 이 말을 잊어버리지 않고서 그 후로 나를 만날 때마다 ‘복진이는 꼭 서른에 죽을 터인가. 나는 어차피 죽지를 못하였으니 복진이만은 지저분한 꼴 되기 전에 죽어 주게‘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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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일찌기 죽을 만한 일을 하고 죽을 자리를 만들어야만 하겠다고 늘 궁리도 하여 왔지만 이 박선생에게서 졸릴 때마다 정말 몸서리가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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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왕 신문 광고도 나고 한 판에 특종 기사나 만들라고 어슬렁어슬렁 상경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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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발을 들여 놓으니 첫밥이 석영(*안석주)이 표현파 활동사진 ‘카리카리 박사‘ 라고 놀립디다. 바짝 마른데다가 긴 머리에 검정 중절모라는 분장이 그렇게 보이었던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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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술학교라고 졸업은 하였으나 조각이라고는 원래 알아주지 않으니 그것을 하여 먹을 수 없고 그 외에는 내 쪽에서 팔아먹을 것도 없어서 거리로 빙빙 돌아다니다가 5년 전에 어거지로 졸업을 한 배재학교에 도화 교원이 되었더랍니다. 이에 연달아 청년학관 경성여자상업학교에 관계를 가지고 한 시간에 1원 50전씩 계산하여 받는 직업인이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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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나는 중학교나 여학교의 선생이라기보다 꼭 그대로의 한 명의 직업인이라고 자처하였지요. 그 까닭은 나이는 겨우 25세에다가 얼굴은 여드름 천지이며 아무 포부도 없고 재간도 없는 인물이 사람의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바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참말로 할 수 있을 법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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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어떤 학생에게든지 공연히 선언을 미리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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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분들보다 팔자를 잘 타고 나서 우선 몇 해 일찍 배재학교를 다녔고 또 동경을 가게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지식을 도매로 가지고 와서 지금 여러분에게 두고두고 산매를 시작한 것인데 나는 이런 장사를 앞으로 그리 오래 하지 않을 작정이니 그 동안 많이 사 달라‘고도 하였으며 또는 나는 ‘이런 장사꾼이니 내가 매매하는 이 장사 이외의 것을 내게 구하지도 말고 알려 고도 하지 말아 달라‘ 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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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로서 늘 생각하는 것 은 20대나 30대 의 인물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 과연 실수 없는 일일까 하는 것이니 그 때만 하더라도 강단에 서서 공맹의 도를 말해야 누가 보든지 간에 성인 비슷한 선생들의 사생활이라는 것보다도 교문 밖에서의 생활은 불량 학생 이상의 품행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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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이러하면서 학생을 감독하며 징벌하며 시험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 애당초부터 나는 장사꾼이라고 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교원 노릇은 이렇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총독부 미술전람회에 출품작이라고 1년에 한 번씩을 하는데 청전 이상범 씨와 묵로 이용우 씨 등의 동연사나 춘곡 고희동 씨가 주재하는 서화협회나 이당 김은호 씨 외 제씨의 고려미술원을 골고루 찾아다니며 폐를 끼쳐 드리고 사람 대가리인지 개대가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제작하면서도 잠시나마 분위기를 만들어 보았고 그 분위기에 직접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율동이나마 감촉하여서 자위하다가 청년학관과 공영으로 미술연구소를 가장 근대적 설비(?)로서 시작하였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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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부의 책임자는 동료 김창섭 형이었고 조각부는 내가 담당하여서 연구생이 시세 좋을 때는 30명이었지요. 그 중에 조선미술전람회의 성적으로 본다면 특선급으로 구본웅 형이 있었고, 다음으로 장기남, 양희문 등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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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이곳 태생으로 조각을 처음으로 조선에 수입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나보다 4~5년 전에 김진국(金鎭國 *金鎭奭의 오기)이라는 이가 있었다가 이는 불행하게도 연구 도중에 요절하고, 그 뒤를 내가 밟았고, 그 다음으로는 진남포(鎭南浦)의 곽윤모(郭亂模) 형이 생기었다가 애처롭게 병사하니, 당시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의 김두일 형을 통계하여 불과 4~5명, 이게 전부였고 문자 그대로 간난(難難)과 싸우던 시절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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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때를 가리켜 태생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김진국은 요절하고, 곽윤모는 어떤 사정으로 천명을 줄이고, 김두일은 극도의 정신쇠약이 우금(于今)껏 쾌유하지 못하고 구본웅은 본래부터 건강치 못하였고, 장기남, 양희문은 가정의 곡절로 재기하지 못할 사정이며, 나는 나대로 10여 년 명암의 길을 밟게 되어서 이 동안은 아우 팔봉의 편지조차 자주 볼 길 없었고, 팔봉 역시 편지를 써야 보지 못하는 나를 슬퍼하여서, <파람에 부치는 편지>라는 산문시를 잡지에 게재하여 회포를 풀고 지냈으니 조각계의 태생기는 다른 부분의 예술보다는 훨씬 쓰라린 바 많았다고 말할 수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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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동시에 미술비평이 조선 ․ 동아 ․ 시대의 세 신문과 『개벽』․『현대평론』․『조선지광』등의 잡지에 게재하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머리에서 비지땀이 날 일이나 좌우간 석영 안석주와 같이 서와 화의 분류, 남화와 동양화의 신해석, 미술의 사회성 · 시대성 적발 등의 제문제를 해명하다가 기성 화단인의 생활근거(?)를 위협하는 부작용이 커져서 선배와 동호(同好) 에게서 투서와 봉변을 골고루 당하는 판에 나는 나대로 신천지로 줄달음치고, 석영은 또한 신문사로 잡지사로 몸을 바쳐서 큰 욕을 면하였으나, 그러나 미술도 미술전문가 내지 감상자로서 비평을 할 수 있고, 또 자기의 의견을 공개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만은 알려졌고, 이 바람에 미술인들이 저들대로는 내심 전전(戰戰)하여 소위 상아탑의 문을 열어부치고 세상을 보려고 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는 동안에 한편으로는 죄도 많았고, 조금 공도 있었을 것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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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이던가, 나혜석 여사에게 욕을 먹었을 때에는 평생 욕을 하여 보지 않았고 주먹놀음 하여보지 못한 나로서도 분이 끝까지 나서 무던히 속을 태웠더랍니다. 상대가 여자이고, 또 장소가 선전(鮮展 * 조선미전) 출품 작가 간담회 석상이며, 논리보다 욕이 앞서 덤비는 여사의 말문을 막기 위하여 한참 고생하던 것이 지금도 눈이 선하며, 관재(貴藉) 이도영 선생이나 춘곡(春谷) 고희동 씨나 정재(鼎蘭) 최우석 씨나 김창섭 씨에게 폭언을 올려서 시비를 들었고, 그 시비 끝에 절교 비슷, 봉변 비슷, 또는 담 너머에서 물도 날아오고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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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이것은 실기가(實技家) 이외에서도 가령 문사들 가운데에서도 하여주었으면 하고 또 개성박물관장 고유섭 씨 같은 분이 일부라도 맡아주었으면 하는데, 그 까닭은 실기가들이 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오해의 이삭이나 줍는 것외에 별 수확이 없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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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십이삼 년 전부터 고유섭 씨의 문장을 애독하는 사람인데, 씨와 같은 인물이 현대미술을 지도하는 역할도 맡으면 벽이나 다행한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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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요동안의 생각이 아니고 상당히 연조가 오래임으로 엉뚱하나마 한마디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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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직업이라는 것과 사업이라는 것을 분별합니다. 직업이 그대로 사업이 될 경우는 있어도 사업이 그대로 직업이 되지 않는 경우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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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고 하니, 직업이라는 것은 사람이 그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사업이라는 것은 이런 따위의 것이 아니고 일생의 고락을 계산하지 않고 또는 성불성(成不成)도 과히 문제되지 않는 노력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중에서 예술이나 과학의 길을 걷는 사람은 복을 많이 타고난 하느님의 선민(選民)인 동시에, 이런 시퍼런 양반임으로 하여서 세상 일에 어둡고 약삭빠르지 못하여 갖은 고생살이를 하는 것은 조상 때부터 타고난 건 피할 수 없는 팔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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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남 유다르게 직업과 사업이 혼일(渾一) 한 복을 가졌고 한편, 이 복 때문에 고초를 당하게 되었으니, 할 일은 할 것뿐이고 당할 신고(辛苦)는 또한 그대로 달게 받을 게 아니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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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하고 싶지 않고 비평 (욕)은 당하고 싶지 않고 하여서 복잡 · 기괴한 파문이 먼저 말한 바와 같이 도처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이 집단화하여서 여러 단체가 생겼다 망했다 하는 동안 신인은 배출하고 시세는 제대로 달음질쳐서 눈 깜빡할 사이에 자기의 알몸만이 세상 밖에 뒤떨어져 짐짓 고영처참(孤影凄慘)한 ‘작일(昨日)의 미술가’ 가 생겨나는 이것을 구하는 방법은 오직 애무가 아니고 비평과 지도일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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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인 중에서 미술비평을 감히 해보라고 하여주지 않겠소? 나야말로 도적질만 하지 못하고서는 별별 직업을 칠팔 년 사이에 하여 보았습니다. 인쇄공장도 경영한다고도 하였고, 구루마(*손수레)도 끌어보고, 건축 · 장식 청부업도 하였고, 신문기자라도 하고 금속공장도 학교 설립도 하고 이러는 동안에 세속 일에는 정통하여지는 반면 전문적인 사업(?)은 위축하여졌으나, 일종의 정력으로 흙장난을 아주 버리지도 못하다가 4년 전 발광하다시피 생활체계 전부를 뒤집어 놓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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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앙카레의 과학개론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과학자는 체계를 조직하는 데 대담하여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체계를 파괴하는 데에도 용감하여야 한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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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확실한 명언입니다. 그래서 나도 다소의 생활안정이 되고 보니 모든 것이 형식화되는데, 가장 중요한 머리 속이 이것도 따라갑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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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이르러 나는 곰곰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이 생활을 이대로 하여 나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한 번 새로운 모험의 길을 스스로 구하여 볼 것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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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아래와 같은 말을 썩 잘하고 다닙니다. 그것은 ‘모험은 청춘이며, 청춘은 곧 생명이라‘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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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집을 똥값으로 팔고 세간살이를 이웃에 놓아 두고, 마누라는 진고개 여관으로 보내고 나는 동경으로 가버렸는데 이 소득으로는 목조 하나와 파산하였다는 풍평(風評)이었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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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한다는 것이 그다지 쓰라린 것도 아닐 것이나 여자로서는 아마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어서 지금도 가끔 그 때를 추억할 때마다 마누라가 늘 말한 답니다. ‘도무지 두 번은 당하고 싶지 않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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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럴 법합니다. 본래 내가 결혼이라고 할 때에 유산이라고는 숟가락 하나 없었고, 선배의 덕으로, 친구의 정으로 세간살이라고 만들어 놓았고, 그날 그날을 생활하여 가며 거의 자기 착취를 하다시피 하면서 화실을 건축하고, 이 집에서 천년 만년 자자손손 지낼 줄 알았는데, 천만 뜻밖에 하룻밤 사이에 집을 팔고 동경으로 가버리니, 여자의 마음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 쾌(快)할 바는 아닐 것이외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큰 결심(?)이 있었고, 거의 배수의 진을 쳐서 조각의 요령이라도 이번 길에 붙잡지 못하면 발광을 하든지 죽든지 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다소라도 흙냄새를 알게 된다면 이따위쯤은 회복하기 쉬운 것이 아닐까 이렇게 궁리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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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나는 모험의 길을 밟았습니다. 또 결과는 그리 비관하지 않도록 되었더랍니다. 노력을 하면 얼마쯤은 되는 일이라고 하는 진리를 알았지요. 허나, 평소에 나를 신뢰하고 또는 나를 구하여 주던 선배나 요우(僚友)에게는 아직도 석연하게 되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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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생에 여러 사람들한테서 많은 신세를 입어 왔으나, 그중에도 격별히 큰 폐를 끼치어 드린 분은 귀사 사장 선생과 벽초(碧初) 선생을 비롯하여 화가 박광진씨, 김은호씨 등과 홍기문 · 이갑섭 형 등인데 이 모든 분의 덕분으로 얻은 생활을 일조(一朝)에 부순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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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1940.3, 4, 6,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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