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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드니 모종(暮鍾)이 때마침 울려 옵니다. 땡땡 우는듯, 호소하는듯, 그 구슬픈 종소리! 나는 붓을 놓고 다시 명상에 빠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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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왜 살까요? 저 종소리를 성스럽다는 신도도 있겠지만 내 귀에는 그저 비명으로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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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한(恨) 피가 되어 저 장미를 물드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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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님 못 올것을 종은 뭐라 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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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에 지어 두었던 이 시를 다시금 읽어 봅니다. 몸이 병상에 있고보니 만사가 슬프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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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兄[형]! 주신 존함을 다시금 뜯어보며 똑같은 처지에 있는 형아의 경우를 몇 번이나 생각해 보았지요. 돈! 그렇습니다. 이 돈이란 뭐하는 것인가요. 돈이 있는 자에게는 쓸곳이 없고, 좀 재미있게 써보려는 자에게는 이렇게 군색하구려 그까짓 놈의 돈! 우리는 돈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 봅시다. 괴로워 하시고 낙담할것 뭐 있읍니까? R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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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누구의 시인가요. 하늘을 주름잡고 서천에 홍운을 헤치려는 높은 이상은, 이상이 아니고 결국은 공상이 되고 말았읍니다. 死[사]의 승리!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볼때가 있으나 그것은 승리가 아니요. 결국은 패배겠지요. 훤소(喧騒)의 도시에서 공연히 시골로 오게되니, 숲속에서 고요히 찌찌거리는 벌레소리 조차 도리어 정다운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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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가(俗歌)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살면 몇 만년이나 살겠읍니까? 인생 오십년 ── 이 젊은 시간에 되는대로 살아 봅시다. 그런데 신문 원고가 안나왔다구요. 퍽 가깝합니다. 그리고 유성사 인쇄비는 가급적 속히 변통하여 보지요. 그리고 실례이지만, 요즈음 영자(影子)를 좀 만나보십니까? 고년이 밉고도 귀엽거던요. 이렇게 시골에서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게 되니, 전에 즐겁던 기억이 이따금 머리에 떠오릅니다. 한강에서 소리도 하고 잡담도 하던 그날 그때! 그때의 영자가 생각나는구려. 형도 웃으시겠지만 저도 생각하면 우습읍니다. 과거는 모두 즐거운 추억의 하나 이지요. 가슴 속에 모이는 진주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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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횡설수설하여 미안 합니다. 그럼 월말에 상경하겠읍니다. 내내 안녕하시기만 빕니다. 敬 具[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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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서간집 「나의 화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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