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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정조 6, 1782) 2월 28일, 아침밥을 일찍 먹고 출발하여 거창(居昌)으로 가는데, 40리 떨어진 무촌(茂村)에 가서 점심을 먹고, 40리를 가서 가조촌(加祚村)에서 말을 먹였으며, 여기서 30리 되는 합천 해인사(海印寺)에서 유숙하였다. 무촌은 바로 김천에 딸린 역이다. 10리쯤 떨어진 거창 읍내를 지나 저녁때에 가조창(加祚倉)에 도착하니 여기는 옛 가조현(加祚縣)으로 차츰 기와집이 있기 시작하였다. 5리쯤 갔는데 이곳의 이름은 용산(龍山)으로 가야산에 들어가는 길 어귀이다. 동쪽 언덕에는 구일서재(九日書齋)가 있으며 돌은 우뚝 서 있고 냇물은 흐르니 꽤 아늑한 기운이 있었다.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니 돌은 모두 마아석(馬牙石 돌의 일종으로 지금의 편마석(片麻石)이다)이다. 나무꾼이 연달아 내려오는데 놀란 사슴이나 도망치는 노루같이 빠르다. 나무 끝에 저녁놀이 불그레한데 수십 집이 절벽에 매달려 있어서 말정촌(末丁村)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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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리쯤 가니 사람은 공중에서 말하고 말 울음소리는 구름밖에서 들렸다. 비로소 고개 하나를 넘으니 지형이 낮아졌다. 해가 지자 썰렁하게 춥다. 2~3리를 가니 해인사 중 서너 명이 동네 아이 6~7명을 데리고 가마를 메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마를 타고 2~3리를 가니 다시 마을 하나가 있는데 여기도 말정촌이라 하였다. 4~5명이 횃불을 들어 길을 인도한다. 가마를 멘 사람들은 시내를 건너뛰고 돌길을 가는데 원숭이보다도 민첩하다. 별빛은 나무 사이에 비치고 물소리는 산골짜기를 울린다. 10리쯤 가니 절에서 중 15~16명이 횃불을 들고 마중나오는데 멀어서 반딧불 같았다. 절에 도착하여 궁현당(窮玄堂)에서 쉬는데 중이 꿀물과 산자(饊子)와 대추ㆍ감 따위를 내왔으며 다시 저녁밥을 주었다. 밥상에는 석이버섯ㆍ도라지ㆍ아욱ㆍ녹각채(鹿角菜)가 있는데 모두 맛이 있었다. 촛불을 켜들고 대적광전(大寂光殿)을 구경하였으며, 중이 학식이 있고 지혜로워 이야기할 만하였다. 사지(寺志 해인사에 대한 사적을 적은 책)를 구하여 보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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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밤에 비가 내렸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성주(星州)로 가는데, 40리 되는 양정촌(楊亭村)에서 점심을 먹고, 30리를 가서 성주 읍내에서 유숙하였다. 이 절은 불당(佛堂)이 모두 9개이고 승료(僧寮 중들이 거처하는 숙사)가 모두 12채였는데 옛날부터 불이 자주 났으며, 경자년(정조 4, 1780) 정월에 다시 화재로 불당 3채와 승료 9채를 태웠는데, 근래에야 비로소 승료는 건축하였으나 불당은 짓지 못하였다. 대적광전은 바로 옛날의 비로전(毗盧殿)인데,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때에 지금의 이름인 대적광전으로 사명(賜名)한 것이다. 중은 '이 절이 신라(新羅) 때에 건립한 것이다.' 하는데, 사지(寺志)를 상고하여보니 바로 세조(世祖)가 감사(監司)에게 유시하여 개축(改築)하였으나 얼마 못 되어 쓰러진 것을 인수대비(仁粹大妃 성종(成宗)의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가 명하여 다시 건립한 것이니 임사홍(任士洪)의 기록이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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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은 모두 20층이며 법당은 46칸으로 매우 크고 웅장하다. 앉아 있는 비로불(毗盧佛)은 2장(丈)쯤 되며 좌우에 있는 불상은 이보다 조금 작다. 향로(香爐) 2개가 놓여 있는데 오동(烏銅)에 은으로 꽃무늬를 놓고 범(梵)자를 상감(象嵌)하여 번질번질 윤이 나고 기교(奇巧)하니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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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面)이 하나만 있는 북이 있는데 북통에는 일본에서 나온 주사(硃砂)를 칠하였다. 중은 '이것이 애장왕(哀莊王) 때에 악어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쇠가죽이 분명하다. 천장(天將)의 삿갓을 찾으니, 중은 궁현당 화재 때에 불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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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의 북쪽에는 보안당(普眼堂)이 있는데 바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보관한 곳으로 남북의 두 각(閣)은 다 같이 15칸씩이고 너비가 각각 3칸으로 모두 90칸이다. 한가운데에 3층으로 칸막이를 하고 대장경 경판(經版)을 즐비하게 꽂아 놓았는데, 참으로 장관이었다. 판(版)의 길이는 주척(周尺)으로 1척 반쯤 되고 너비는 2척쯤 된다. 다만 가에 굵은 칸만이 있을 뿐 검은 행간(行間)의 선(線)이 없으며 한 판에 12줄이고 한 행에 14자이다. 글자가 바둑알처럼 되어 비록 해정(楷正)하긴 하지만 본받을 만하지는 못하다. 판은 모두 까맣게 칠하였는데 그리 빛나거나 윤택하지는 않으며 네 귀퉁이에는 얇은 구리로 못을 박아 놓았다. 고적지(古蹟志)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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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장왕 시절에 합천의 마을 아전이었던 이거인(李居仁)이 명부(冥府)에 들어가서 눈이 셋 달린 왕을 만나 소원을 말하고 돌아와서 애장왕에게 고하니 왕이 명하여 거제도(巨濟島)에서 판을 새겨 해인사로 옮겨 보관하였다." [주D-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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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는데 황당(荒唐)하여 믿을 수 없다. 비로불 왼편에 세조 때에 찍어낸 경권(經卷)ㆍ시첩(試帖) 2권이 놓여 있는데, 책 끝장에 하나는 계묘년에 대장도감(大藏都監 대장경을 조각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했던 관청)이 칙명(勅命)을 받들어 조각해 만든 것이라 새겼고 하나는 갑진년이라 새겼으나, 고지(古志)를 상고해보면 '애장왕 정묘년에 조각한 것이다.' 하였으니 서로 모순된다. 또 애장왕은 당 덕종(唐德宗) 16년 경진(800년)에 왕이 되어 10년째인 당 헌종(唐憲宗) 원화(元和) 4년 기축(809년)에 헌덕왕(憲德王)에게 시해(弑害)되었으니, 원래 정묘년이 없다. 고려(高麗)에는 계묘년과 갑진년이 8번 있었으니, 여조(麗朝)에서 조각한 듯한데 어느 시대인지 모르겠다. 만일 내가 경판을 모두 검토해 본다면 반드시 그 시대와 연유를 알 수 있을 것인데 하지 못하였다. 판의 끝 모서리 칸에 모두 글자를 새겼는데 순서를 천자문(千字文)의 글자 번호대로 아무 경(經) 몇째 권 몇째 장(張)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장(張)자를 장(丈)자로 쓰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아조(我朝)에서 보충하여 새긴 것일 것이다. 대개 중국의 모씨(毛氏) 급고각(汲古閣) [주D-002] 서적의 판본과 대등하다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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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는 '이 판각(版閣)에는 벌레와 새가 감히 깃들지 못하고 먼지가 끼지 않는다.' 하였으나, 북쪽 불당 앞 동쪽 첫째 기둥은 누른 느릅나무로 크기가 세 아름이나 되는데 여기에 구멍이 뚫려 벌이 집을 지었으며, 내가 시험삼아 판 한두 개를 잡아 보니 먼지와 그을음이 손에 묻는다. 사람들이 이처럼 황당한 말 하기를 좋아한다. 북쪽의 불당 1칸에도 부처 하나를 모셨으며 불당의 서쪽에 진상전(眞常殿)이 있으니,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연간에 건축한 것이다. 뒷벽에는 천불(千佛)을 직조(織組)한 비단 휘장을 드리웠는데, 부처가 새끼손가락만큼씩 하며 모두 해져서 나비 날개와 같다. 중은 '이것은 월지국(月支國) [주D-003]에서 만든 물건이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그러냐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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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당 안의 좌우에 우뚝 솟은 탑을 돌로 조각하고 금으로 칠하였는데 오른편의 것은 33층이고 왼편의 것은 20층이었다. 오른편 북쪽 벽 아래에는 나무로 조각해 만든 신라말의 희랑 선사(希朗禪師)의 상(像)을 모셔 놓았는데, 얼굴과 손을 모두 까맣게 칠하였고 힘줄과 뼈가 울퉁불퉁 나왔으며 옷섶을 헤쳐 가슴을 드러냈는데 양쪽 유방 사이에 앵두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으니 아마도 그가 생존시에 중완(中脘)에다 쑥뜸한 흉터를 형상한 것이거나 어쩌면 조각한 지가 오래되어 썩고 좀먹어 구멍이 생긴 것일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를 천흉국(穿胸國) [주D-004]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보니 천흉국의 귀인(貴人)들은 반드시 긴 장대로 구멍을 꿰어가지고 두 사람이 가마를 멘 것과 같았는데 지금 여기에 있는 희랑 선사의 구멍은 겨우 붓대롱 하나가 들어갈 만하니, 가령 천흉국의 큰 귀인이라 하더라도 꿰어서 메게 되면 붓대롱만한 막대기로는 꺾어져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다. 참으로 전설과 같다면 거무패(巨無霸)는 용백국(龍伯國) [주D-005] 사람일 것이다. 소열제(昭烈帝)는 장비국(長臂國) [주D-006] 사람일 것이며, 상동왕(湘東王)은 일목국(一目國) [주D-007] 사람일 것이요, 왕덕용(王德用)은 곤륜국(昆崙國) [주D-008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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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랑 선사의 옆에 최고운(崔孤雲 고운은 최치원(崔致遠)의 자)의 화상이 있는데, 건(巾)과 도포는 비록 당(唐) 나라의 장식이지만 얼굴과 머리칼은 이처럼 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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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높은 언덕을 학사대(學士臺)라 하는데 이곳에 오르면 해인사의 경내(境內)를 다 볼 수가 있다. 산이 좌우로 감쌌으며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다. 시냇물은 앞으로 쏜살같이 흐르는데, 종이 만드는 갑문(閘門)과 곡식을 찧는 물방아가 물가를 따라 여기저기에 있다. 시내의 서쪽 높은 절벽에 또 깨끗한 절이 있는데 이름은 원당(願堂)이라 한다. 중이 '이곳은 애장왕이 머무른 곳이다.' 한다. 가마를 타고 홍하문(紅霞門)으로 나오니 뾰족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시냇물 양쪽에 서 있다. 홍류동(紅流洞)과 낙화담(落花潭)의 폭포는 하얗게 떨어지고 물에는 녹음이 잠겼으며 나무와 돌이 모두 성낸 듯하고 연하(煙霞)도 사람을 싫어하는 듯하다. 푸른 절벽에는 이름을 여기저기 새겨 놓아 사람의 흥취(興趣)를 깬다. 원중랑(袁中郞 명(明) 나라 원굉도(袁宏道)를 가리킨다)이 '푸른 산의 흰 돌이 죄없이 묵형(墨刑)을 받았네.' 한 말이 참으로 빈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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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으로 고개 몇을 넘어 10리쯤 가서야 비로소 말을 타고 성주로 향하니 검은 돌과 흰 돌이 수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간혹 백토(白土)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것으로 자기(磁器)를 구워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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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午時)쯤 성주의 양정촌(楊亭村)에 이르니 회연서원(檜淵書院)이 있다. 이 서원은 바로 정한강(鄭寒岡 한강은 정구(鄭逑)의 호)을 제사하는 곳으로 내일이 춘향일(春享日 봄철에 제사 지내는 날)이라고 한다. 원장(院長) 배흠조(裵欽祖)가 재임(齋任 서원에서 숙직하는 서생 중 재(齋)를 맡은 임원)을 시켜 안주와 술을 점사(店舍)로 가지고 와서 '재계하는 중이라서 손님을 만나 볼 수 없다.'고 전하여 말하기에 나 역시 '주인이 재계하고 계시므로 손이 감히 찾아가 뵐 수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10리쯤 가니 서천서원(西川書院)이 있다. 이곳은 바로 한강의 형인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곤수(崑壽)의 서원이다. 형제가 한 고을에서 함께 혈식(血食)을 받고 있으니 참으로 드문 일이다. 성주읍의 서쪽에 관후묘(關侯廟 한(漢) 나라 수정후(壽亭侯)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가 있다. 나는 들어가 참배하고서 점사(店舍)에 가서 유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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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비가 내렸다. 아침을 일찍 먹고 출발하여 점사로부터 40리 지점인 하빈(河濱)에서 점심을 먹고, 30리 지점인 대구(大丘 지금의 대구(大邱))에서 유숙하였다. 가랑비 속에 낙동강(洛東江)을 건너니 강물은 넘실넘실 흐르고 남쪽의 언덕은 우뚝 솟았는데 상수리나무와 떡갈나무가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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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는 옛날의 벽진(碧珍) 고을이다. 가야의 산천이 평평하고 멀며 맑게 흐르고 마을집과 숲의 나무가 모두 그림 그릴 만한 풍경이었다. 금호강(琴湖江)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 남쪽으로 펀펀한 들로 가니 허허벌판이 있는데 한번 바라보니 숫돌처럼 판판하다. 이곳은 대구이니 '대구는 의식(衣食)이 풍족한 지방'이란 말이 참으로 이 때문이었다. 대구의 부성(府城)은 견고하고 치밀한 것이 전주(全州)보다 나은데 성가퀴가 모두 무너졌다. 성의 서북쪽에 흙언덕이 있는데 무너진 토성과 같으며 푸른 소나무가 빽빽이 있으니 여기가 바로 달성(達城)이다. 판관(判官) 홍원섭(洪元燮)이 나를 맞이하여 오랫동안 문예(文藝)를 말하다가 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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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흐리다가 늦게야 갰다. 50리 지점인 성주의 무계(茂溪)에서 점심을 먹고, 20리 지점인 고령(高靈)의 양전(良田)에서 유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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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나의 이번 길은, 순상(巡相 순찰사(巡察使)를 말한다)이 19일에 출발하여 우순(右巡)하여 성주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서였다.[주D-009 그리하여 해인사로 가는 길에 성주에서 연명(延命 봉명사신(奉命使臣)을 맞이하는 것)하려 했었는데, 성주에 도착해 보니 막연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대로 대구로 향하였던 것인데 어제는 해가 저물어 예를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날 아침에 흑단령(黑團領)을 갖추고 객사(客舍)에 도착하니, 전패(殿牌) 밑에 향안(香案)을 베풀어 놓았으며 뜰의 좌우에는 의장대(儀仗隊)를 죽 세워놓고 병방(兵房)ㆍ군관(軍官)이 군복차림으로 교서(敎書)와 절월(節鉞 왕이 순찰사에게 내리는 신표(信標)를 말함)을 받들어 왔다. 내가 중문(中門) 안 서쪽 뜰에서 몸을 굽혀 공경히 맞이하니 향교(鄕校)의 생도들이 교서를 받들어 책상 위에 갖다 놓고, 풍악소리가 울려퍼지는데 사배(四拜)하니 향로의 연기가 피어 올라간다. 다시 사배하여 예를 마친 다음 시복(時服 평상복)으로 영아(營衙)에 들어가 순상을 뵙고 그대로 객사에 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순상이 24일에 출발하여 우순하여 25일에 장차 의령(宜寧)의 신반창(新反倉)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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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여 10리쯤 가니 큰 연못이 있는데 이름은 상당(上塘)이라 한다. 연못에 사람이 뗏목을 타고서 대나무 상앗대를 가지고 마름을 채취하니 묘연(渺然)히 강호(江湖)의 그리움을 자아내게 한다. 성주의 무계진(茂溪津)을 건너니, 여기는 바로 낙동강 하류이다. 나루터에 있는 점사는 모두 움집이다. 계속 길을 가 양전(良田)에 이르니 큰 못 옆에 점사가 있는데, 저녁 공기가 썰렁하여 물새들이 너울너울 날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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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아침을 일찍 먹고 합천으로 가는데 60리 지점인 남정점(南亭店)에서 점심을 먹었으며, 삼가(三嘉)의 유린역(有麟驛)에서 유숙하였다. 지리령(支離嶺)을 넘으니 고갯길이 구불구불 우회하였으며 산이 첩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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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흰 모래 일대(一帶)가 바라보이는데 바로 합천 읍내이다. 합천 읍의 남쪽에 강이 있는데 강 언덕에 있는 고목과 연기 나는 마을이 강물에 비친다. 지난해 8월 초5일 술시(戌時)에 큰 바람 천둥 비에 산골짜기의 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 관사(官舍)가 침수되었었다. 군수 심흥영(沈興永)은 직인을 가지고 나무에 올라가서 겨우 목숨을 건졌으며 백성의 집들이 휩쓸려 남녀 80여 명이 일시에 떼죽음을 당하였는데 시체를 찾은 것은 겨우 50여 명뿐이었다. 겸하여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심후(沈侯)가 봉급을 털어 백성을 구호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도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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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몇 리쯤 가니 석벽(石壁)이 층층으로 쌓여 있는데 정자 하나가 나는 듯 남강(南江)을 굽어보고 있으니 이름은 함벽루(涵碧樓)이다. 고려의 안진(安震)이 기문을 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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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晉州)의 장원정(壯元亭)과 평양(平壤)의 부벽루(浮碧樓)가 이 함벽루와 같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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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안진은 충숙왕(忠肅王) 때 사람이다. 대개 신유년(충숙왕 8, 1321)에 낙성하였으며 이 누를 지은 사람은 여러 대 훈신(勳臣)이었던 상락군(上洛君)의 맏아들 김후(金侯)였다 한다. 아조에 와서 군수 유윤(柳綸)이 중수하고 강희맹(姜希孟)이 기문을 지었으며 숙종(肅宗) 신유년(1681년)에 군수 조지항(趙持恒)이 중수하고 우암(尤庵) 송 문정공(宋文正公 문정은 송시열(宋時烈)의 시호)이 기문을 지었다. 북쪽 바위에는 우암이 쓴 '함벽루(涵碧樓)'를 새겨 놓았으며, 누의 오른편 조금 북쪽에 주지승(住持僧)이 살고 있다. 이 다음부터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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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1] 애장왕에게……보관하였다 : 이 말은 본서 제1집 제3권 영처문고 1에 자세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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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2] 모씨(毛氏) 급고각(汲古閣) : 모씨는 명(明) 나라 모진(毛晉)을 말한다. 그는 장서(藏書)하기를 좋아하며 책 8만 4천여 권을 급고각이라는 집을 지어 수장(收藏)하였는데, 이 책들은 판본(板本)이 좋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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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3] 월지국(月支國) : 옛날 서역(西域)에 있었던 나라 이름으로 터키 계통 종족이며, 대월지(大月氐)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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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4] 천흉국(穿胸國) : 남만(南蠻)의 종속(種屬)인데, 이 나라 사람들은 가슴에 구멍이 있어 여기에 막대로 꿰어 양쪽에서 두 사람이 떠메고 다닌다 한다. 그러므로 천흉(穿胸) 또는 관흉(貫胸)이라 한다.《三才圖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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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5] 거무패(巨無霸)는 용백국(龍伯國) : 거무패는 전한(前漢) 말 왕망(王莽) 때의 거인(巨人)으로 키가 10척이나 되었다. 용백국은 옛날의 거인들이 사는 나라라 한다. 《列子 湯問》에 "용백국에 거인이 있는데 키가 30장이며 1만 8천 살까지 산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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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6] 소열제(昭烈帝)는 장비국(長臂國) : 소열제는 삼국 시대 유비(劉備)를 말한다. 그는 팔이 길어 무릎까지 내려왔다.《三國志 卷三十二 先主備》 장비국은 팔이 긴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서 물 속에서 고기를 잡는데 두 손에 각각 고기 한 마리씩 잡는다 한다.《山海經 海外南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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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7] 상동왕(湘東王)은 일목국(一目國) : 상동왕은 양 원제(梁元帝)인 소역(蕭繹)을 처음 봉했던 이름이다. 그는 처음 나서부터 눈병이 있었는데 잘못하여 마침내 애꾸눈이 되었다.《梁書 卷五 元帝本紀》 일목국에는 눈 하나만이 얼굴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 산다 한다.《山海經 海外北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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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8] 왕덕용(王德用)은 곤륜국(崑崙國) : 왕덕용은 송(宋) 나라 사람으로 자는 원보(元輔)인데 얼굴이 검고 목 이하는 희었다. 그리하여 흑왕상공(黑王相公)이라 하였다.《宋史 卷二百七十八 王德用傳》 곤륜국은 중세기 남해(南海)에 있던 나라로 이곳에 사는 사람은 검은 얼굴에 고수머리였다.《舊唐書 卷一百九十七 南蠻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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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9] 우순(右巡)하여……듣고서였다 : 우순은 우도(右道)를 순찰하는 것. 경상도는 좌우도로 나누는데 대개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서쪽이 우도이다. 성주에 수령들을 모아서 교서·유서를 선포한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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