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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모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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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2월
양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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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모순
 
 
2
새벽 다 밝을 임시에 어수선 산란한 꿈을 꾸고 이내 깨어 자리 속에서 뒤치적거리다가 일어나면서부터 머리가 들 수 없이 무거워 무엇이 위에서 내리누르는 것 같아서 심기가 슷치 못한 나는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 서재(즉 침방)에 꾹 들어앉은 채로 멀거니 서안(書案)을 대하고 앉았다. 이즘 애독하던 『虐[학]げられし人[인]々(학대받는 사람들)』이라는 소설도 그 앞에 놓여 있건마는 아주 볼 생각도 없어 돌연히 연속하여 오륙본이나 아사히(朝日[조일])를 피웠다. 하자 어느덧 그 푸른 연기가 용트림을 하여 몽몽하게 방중에 자욱하여 점점 더 머리를 내리누르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 잠깐 일어서서 창틈으로 밖에를 내어다보니 청랑(晴朗)한 하늘이 보인다. 다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서편 벽에 걸려 있는 초상함 ── 노동복을 입은 노국(露國) 문호 막심 고르끼의 반신상이 눈에 번뜻 뜨인다. 나는 별안간 정신이 아뜩하여 푹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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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자 오포(午砲) 가 텅 하며 점심상 보아놓았다고 어머니께서 미닫이를 여시고 얼굴을 내어놓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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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점심이에요? 아직 밥 생각 없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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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무뚝하게 대답을 하고 방 안을 다만 무의식하게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한즉 어머니께서는 웃으시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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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그 얘야, 오늘은 아침밥을 다른 날보다도 일께스리 뜨는 둥 마는둥 하구두 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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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며 훌쭉하게 살이 빠지신 자안(慈顔)에 미소를 띠시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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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뚱하고 성낸 얼굴을 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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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니 먹으려느냐? 아주 한술 더 뜨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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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며 자상스러이 또 이렇게 말씀하시다가 잠잠하고 있는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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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안 먹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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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며 다지는 듯이 말씀을 하시고 미닫이를 닫으시고 나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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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난다. 또 서안을 의지하고 앉아서 이번에는 아무 까닭도 없이 공연히 생각해본다. 한즉 제일 먼저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집안 식구와 나와 취미가 아주 다른 것이다. 이는 참 재미없는 일이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약한 나의 불평의 소리, 그리고 현재의 생활이 무의미한 것, 이러한 것이 실마리를 잃은 실과 같이 서로 엉클어져서 가슴을 치받치고 뭉게뭉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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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마음이 다만 갑갑증이 나서 들어앉았었을 수 없다. 그래 새삼스럽게 바깥 출입할 생각이 나서 옷도 입은 대로 두루마기를 입고 모자를 떼어 쓰고 마당으로 내려서니 어머니는 방문을 열고 내다보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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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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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며 의아하여하시는데 나는 무의식으로 대답 없이 집 밖에를 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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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랭한 이월의 이른 봄바람은 길의 흙먼지를 불어다가 용서 없이 얼굴을 갈겨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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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일기도 괴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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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목적이 있어서 나오지는 아니하였다. 다만 발 가는 대로 설렁설렁 성 밑 길로 이 마장을 나아갔다. 어느덧 전차 정류장에 나왔다. 마침 오는 광희문(光熙門) 행의 전차에 뛰어올랐다. 타기는 탔으나 어디로 갈 생각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래 외양으로는 태연히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고 걸어 앉아서 한번 차 속을 둘러보았다. 아무 얼굴을 보아도 모두 바쁜 듯한 모양이 그 보는 눈에도 역연히 보이니 나와 같은 한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구나 생각한즉 현실계에서 별안간 천장만장 깊은 곳으로 떨어진 듯하여 야릇이 고독의 적막을 통절하게 느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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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에 전차는 종로에 왔다. 같이 탔던 사람의 대부분은 여기서 내린다. 차 속이 별안간 비어지고 남은 사람은 나와 두서너 사람뿐이다. 어쩐지 낙오된 듯한 생각이 나서 홀지에 외로운 마음이 난다. 나도 그 뒤를 따라 내리었다. 내리고 보니 또 목적지가 없다. 한참 생각하다가 아무렇든지 또 타기로 하고 이번에는 동대문행의 전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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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오개 근처에는 2,3의 친구가 있어 무뜩 그 사람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난 까닭이다. 한데 타고 앉아 가만히 생각한즉 찾아볼 데가 전차에 내려서도 한참이요 또 마음에도 그리 탐탁히 갈 마음이 내키지 아니하여 ‘그만두자’고 마음에 먹었다. 동시에 ‘내가 왜 이러나’하며 내가 책망하는 마음이 일어나며 화가 벌컥 난다. 겨우 사동(寺洞) 병문(屛門)에 와서 도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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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몇 걸음 떼어놓자 지금 탔던 전차가 굉연히 응, 앙 하며 바람을 차고 달아난다. 그 바람 차고 질주하는 차체와 그 소란한 종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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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님 보아라, 변변치 못한 낙오자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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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마치 나의 어리석음을 조소하는 듯하여 일층 불쾌한 생각이 일어난다. 하니 골은 점점 더 나서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모두 불평하여 견디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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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문으로 들어서 그리 보기도 싫은 좌우의 상점을 둘러보면서 큰길을 일직선으로 안동(安洞)을 향하고 가는데 마치 그편으로서 상궁(尙宮) 같은 나이 근 쉰이나 되는 비만한 부인이 그 뚱뚱한 기름 흐르는 얼굴에 분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새아씨 볼 줴지르게 바르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색주단으로 전신을 감고 아주 점잖이 내려오나 그 몸집과 그 의복과 그 색채! 참 보기도 싫게 조화도 못되었다. 그 눈 ── 젊은 계집같이 윤태가 있는 그 눈은 늘 육냄새에 기갈 들린 증거다. 이러한 계집쳐놓고 모두 비밀히 자식뻘 되는 남첩을 두고 밖에 나와서는 점잔을 빼는 것들이었다. 어, 망측한 것! 옆으로 지나갈 때에 침을 뱉었다. 궐녀는 여전히 점잔을 빼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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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경은 더욱이 과민하게 되어 조그마한 아이놈이 저만한 지게에 제 힘에 과한 짐을 지고 오는 것을 보면 열이 나고 인력거부가 주머니에서 칼표 꺼내는 것을 보면 열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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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는 늘 술로 잊어버린다. 어데 가서 한잔 마시면 좋겠다. 술이다, 술 하니 뱃속에서 자꾸 재촉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때껏 혼자 술집에 가본 적이 없다. 해서 급작스레 발이 내키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더욱이 마음이 불평하면서 묵묵히 그대로 간다. 왜 이렇게 어디까지 변변치 못하게 생기었는지 알 수 없다. 이때 무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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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은 약자는 대낮에 이러한 활동의 천지를 남과 같이 내로라하고 다닐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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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각이 난다. 그러니까 길에서 노는 아이들도 나보다는 이상의 강한 힘과 공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듯이 생각되어 이 길로 이렇게 지나가는 나는 다시금 부끄럽기도 하고 또 무정스럽기도 하였다. 그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막연하게 약자에 대한 강자의 압박이라 하는 것을 깊이 통절히 느끼어서 불안과 공포한 생각이 무렁무렁 머리를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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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이 생각에서 벗어나자고 하여보았으나 구루마 소리, 인력거부의 사람 치는 소리, 신발 소리, 떠드는 소리가 혼잡이 되어 귓속으로 들어올 뿐이다. 벗어나기는 고사하고 점점 고통만 더할 뿐이다. 암만하여도 참을 수가 없어 나중에는 지각을 잃어버린 듯이 그저 기계적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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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으로 나왔다. 순사 파출소에는 사람이 잔뜩 모여 있다. 순사보는 나와서 사람을 연하여 쫓는다. 그 순사보는 안모라고 우리 동네에 사는 사람인데 구년묵이 순사보로 나만 보기에도 열대여섯 해나 다니었다. 아마 순사보로는 원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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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사보가 쫓는 대로 사람들은 이리로 쫓기어갔다, 저기로 쫓기어갔다, 헤어졌다, 다시 모여들었다 한다. 나도 이 사람들 틈에 끼여서 다른 사람 하는 대로 하였다. 그 순사보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하는 수 없던지 한 번 둘러보고 파출소 안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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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는 막벌이꾼들이 망세간지갑자(忘世間之甲子)로 술이 잔뜩 취하여 이마에 피를 흘리고 박승을 지고 구석에 박혀 앉았다. 그 순사보는 의자에 걸어앉아 수첩을 내어들고 그자들을 흘겨보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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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아, 어느 집 행랑에 들어들 있니? 멫 번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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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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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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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 웨 대답이 없어? 이놈들아 비싼 밥을 먹고 이게 일이야, 아모쪼록 벌어서 남과 같이 지낼 생각은 아니하고…… 이놈, 너희놈들은 저러니까 평생에 병문꾼(屛門軍) 을 면치 못하지. 이놈, 그 꼴에 남의 집 시간 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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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한 놈의 뺨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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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 얻어맞은 자가 몽롱한 취안(醉眼)을 들어 한 번 그 순사를 훑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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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님! 저희들이 무엇을 잘못하얐에요? 저희는 내외술집에 가서 술 못 사 먹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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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사보가 뺨을 한 번 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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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아 누가 못 간댔니? 이놈들아, 아모쪼록 벌어서 병문꾼 노릇을 말고 남과 같이 의관을 반반히 하고 나서면 기생집을 못 갈까! 어데를 못 갈꼬! 이놈 내외술집에 다니며 작폐하고 …… 이놈들아, 병문꾼 노릇을 면할 생각을 해! 밤낮 술만 처들으지를 생각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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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이번에는 발로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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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쿠쿠쿠 나리마님, 살려줍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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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그 차인 자가 애걸한다. 구경꾼도 또 일제히 웃는다. 그 순사보는 밖에를 내어다보더니 발을 한 번 딱 구르며 소리를 버럭 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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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 무슨 구경들이오? 헐 일이 이렇게도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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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구경꾼들이 이 소리에 쫙 헤어진다. 나도 이 바람에 발길을 돌리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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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들이 가며 이야기하는 말을 종합하여보니 그 막벌이꾼이 술김에 하이칼라 있는 술집에를 들어갔더니 그 집에서 그 헙수룩하고 끄레발한 노동자임을 보고 무슨 핑계를 하고 술이 없다 하였더니 지긋 소설(所說) 팔라 하다가 욕설에 분이 나서 툇마루에 놓였던 개수통을 들어 방 안에다 던져 의(衣)걸이장을 파손하였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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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픽 웃고 생각하였다. 조선사람의 향상심(向上心) 과 자각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병문꾼 대 순사보가 자각이 없고 향상심이 없어 그 지위에 만족함은 다 일반이다. 그 사이에 별로이 큰 차등(差等)을 발견하기 어렵다. 다만 관복을 입고 칼을 찬 까닭에 순사보는 막벌이꾼을 징계하는 권리와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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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도 이쯤 되면 심하다. 참으로 기묘한 대조다. 그러나 나도 생활의 압박으로 나의 진실성과 모순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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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생활의 광야에 서서 본즉 내가 지금까지 꾸던 꿈은 시시각각으로 깨어져감을 볼 수 있다. 그저 다만 이상만 그리던 숫보기 마음은 냉랭한 현실의 장벽에 다닥쳐 부서져 비참한 잔해만 남았다. 속일 줄 모르며 아유(阿諛)할 줄 모르고 조금도 나를 굴하여본 일 없던 마음은 한 이전 꿈에 지나지 못하였다. 지금 여기 가는 나의 모양을 보건대 무정하게 어느덧 허위의 옷을 두르고 방편(方便) 의 낙인이 박혀 있음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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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활은 슬프고도 더러운 것이다. 나는 나의 유일무이한 진실성이 이와 같이 점점 깎이어가고 모순이 됨을 충심으로 슬퍼하는 터이다. 이러한 생각 들이기를 시작하며 다시 아까 그 불안과 고통이 일어나서 한참은 몽환경에 방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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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마님 인력거 안 타시렵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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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다본즉 어느덧 나는 송현(松峴) 입구 인력거장 앞에서 서 있다. 내가 인력거를 타려고 선 줄 안 모양이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인력거부도 내 얼굴을 보고 인력거를 끌고 나온다. 나는 이러한 고통과 불안에 마치 동정자같이 보여 값도 정치 아니하고 그저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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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부가 얼른 앞에 켓또(블랭킷 즉 모포)를 둘러주고 채를 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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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데로 모시랍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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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그 검붉은 얼굴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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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조개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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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중 나는 나오는 대로 이렇게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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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동시에 인력거부는 수송동(壽松洞) 골목으로 향하여 달아난다. 청진동(淸進洞)으로 빠져나가 종로통으로 황토현(黃土峴)을 지나 야조현(夜照峴) 병문까지 와서는 인력거부가 딱 멈추고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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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데로 가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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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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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만 이렇게 대답하고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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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놓게! 놓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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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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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려서 삯으로 이십 전짜리 은화 한 푼을 집히는 대로 주고 도로 발을 돌리어 차츰차츰 김영환(金永煥)이를 찾아보려고 동편으로 내려가다가 남편으로 꺾여 체골을 향하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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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기도 열없어 아무나 가까운 데 사람을 찾아보고 가자는 생각이 난 때문이다. 막 황토현 천변(川邊)으로 들어서서 가려니까 뒤에서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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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어데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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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돌아다보니 마침 그 영환이다. 나는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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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일세그려. 그런데 자네는 또 어데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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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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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남문 밖 운송점에 무엇 부치러 가랴고 나왔든 길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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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어서 가게. 나는 오래간만에 자네나 좀 보랴고 가는 길일세마는 여기서 만났으니 고만 헤어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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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안되얐네그려! 그러면 집의 사랑으로 줌 들어가 있게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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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럴 것 없어. 일간 다시 만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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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발길을 돌리어놓으니 영환이는 미안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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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얐네! 그러면 일간 한 번 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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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두어 발걸음 떼놓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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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보게, 자네 혹시 그사이 백화(白化) 만나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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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딱 서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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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만났어. 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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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내가 돌아서서 영환이 얼굴을 본즉 별안간 수색(愁色)이 만면 하여지며
 
83
“허참, 그 원일이까? 백화가 집에서 나간 지 사흘이나 되얐다나. 그런데 나갈 때에 저의 아버지와 싸오고 밥도 안 먹고 그대로 뛰어나갔다는데, 그 사람이야 무슨 돈푼이 있나. 하 그예 저의 아버지가 그 사람을 잡는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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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한탄하는 소리를 한다.
 
85
나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새벽 꿈에 백화가 내게 와서 형님 나는 죽노라고 우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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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그 말 뉘게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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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아침에 문식(汶植)이가 와서 그리기에 비로소 알았네. 저녁때쯤 해서 내가 집으로 좀 알아보겠네.”
 
88
“그러면 부디 좀 알아보게. 나는 그 집에 발을 못 들여놓는 경우이니 갈 수 없고…… 그예 아마 무슨 일이 났나베! 나는 마음에 키는 일이 있네.”
 
89
“글쎄 나도 그러한 염려가 있네. 그러면 내일 좀 오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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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지!”
 
91
나는 영환이와 작별을 하고 발을 돌리려 할 때에는 정신이 착란하여 열에 뜬 사람 같았다. 집에 돌아오니 네 시 남짓하였다. 어머니가 내어다보시다가 나의 얼굴을 유심히 보시며
 
92
“너 웨 어데 몸이 아프냐?”
 
93
하시며 염려스러이 물으신다.
 
94
“네? 아모치도 않아요.”
 
95
나는 강작(强作)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고 안으로 들어오니 자꾸 내 얼굴을 쳐다보시며
 
96
“그래도 얼골빛이 아주 좋지 못한데 그리느냐.”
 
97
하신다.
 
98
나는 잠자코 그대로 서재로 건너갔다. 아주 전신이 느른하여 마치 전쟁에 피곤한 노병같이 그만 그 자리에 쓰러졌다.
 
99
나는 정신의 피로를 깨달았다.
 
100
어머니가 곧 뒤로 쫓아 건너오시며
 
101
“이애 밥상 차리랴?”
 
102
하며 물으시더니 문을 여시며
 
103
“그런데 이애 너 막 출입한 뒤에 우편부가 편지를 가져왔는데 우표 안 붙였다고 벌금을 달라고 하야 육 전을 빼앗어가더라!”
 
104
나는 고개를 간신히 들고
 
105
“편지요? 그래 그 편지를 얻다가 두셨에요?”
 
106
하였다.
 
107
“저 책상에 놓인 것 아니냐.”
 
108
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나는 고개를 돌리어 본즉 과연 거기 놓여 있다. 손을 들어 집어서 보니 백화에게서 온 것인데 ‘미납’이라는 우편 국인이 두어 군데 찍히고 용산(龍山) 소인이 맞았다. 나는 또 가슴이 내려앉았다.
 
109
나는 그 봉투머리를 뜯고 편지를 꺼내어 무릎 위에 펴놓았다. 어머니께서도 이상하시던지 나의 얼굴과 그 편지를 번갈아 보신다. 그 편지 내용은
 
 
110
형님! 나는 불행히 무식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19년 동안을 이 세상거친 물결에 빠져 헤적거리다가 원한을 머금고 지금 구천(九泉)으로 돌아가나이다.
111
형님!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날 때에 무식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날 것은 아닌가 하나이다. 나의 이렇게 죽게만 된 사정은 아마 형님도 짐작하실 듯 하옵니다. 사람은 부모가 되거든 자식을 가르쳐 사회에 나서게 만들고 자식이 되거든 부모의 교양을 받다가 사회에 나가거든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어 보내도록 활동할 것이올시다. 나는 이것을 부모 자식 간에 당연히 행할 의무인가 하나이다.
112
형님! 나는 형님이 다 아실 듯하여 말 아니하나이다. 그러나 다만 아버님이 야속한 것은, 아직도 기력이 강장이신 어른이 날마다 아무것도 아니하시며 나에게 집안 생활의 전부를 떠맡기시고 아침 저녁으로 안 벌어온다고 야단을 치십니다.
113
형님! 아버님이 나를 사회에 나서게 못 만드셨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7,8 년 야학에 다니어 나의 실력을 보충하려 하였나이다. 10년 동안 어린 몸으로 집안 살림을 하여가며 밤에 이것 하는 것도 못하게 하시며 역정만 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죽삽나이다.
114
형님! 그런데 나는 형님에게 나의 매자(妹姊) 동순(東淳)이를 드리옵니다. 요사이 집안 눈치를 본즉 동순을 모 귀족의 첩으로 주려고 주선하는 모양이외다. 그러나 당자 동순이는 이중(泥中)의 연화(蓮花)같이 한사하고 불응하더이다.
 
 
115
그 후 삼사일 후에 나는 영환이와 작반하여 백화의 집을 찾았다.
 
116
『반도시론(半島時論)』 11호(1918.2)
【원문】슬픈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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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건식(梁建植)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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