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짐정나라 짐정국은 윗녘에 살고 임정나라 임정국은 아랫녘에 살 적에, 임정국은 천하 거부이고 짐정국은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둘은 이웃간에 서로 의좋게 살았다. 하루는 둘이서 바둑 장기를 두며 놀다가 임정국이 짐정국한테 말했다.
3
“우리가 나이 삼십이 되도록 한 점 혈육이 없으니 영검한 산에 가서 수륙 불공을 드려 자식이나 봅시다.”
4
“나는 돈이 없으니 정성 드리러 갈 수가 없습니다.”
5
“그러지 말고 정성 드리는 동안 먹을 양식이나 맡으면 불공 채비는 내가 감당하리다.”
7
그날부터 먹을 양식을 장만해서 두 사람은 함께 산으로 수륙 불공을 드리러 갔다. 석달 열흘 불공을 드리고 돌아올 적에 임정국이 말했다.
8
“우리가 한날한시에 함께 불공을 드리고 왔으니 아들딸로 자식을 낳거든 서로 짝을 맺어 줍시다.”
10
집에 돌아온 뒤 짐정국과 임정국이 한마음을 먹고 살아가는데 두 집에 태기가 있어 아홉 달 열 달이 차자 아기를 낳았다. 아기를 낳고 보니 짐정국은 남의 채비로 공을 들였고 임정국은 남의 채비까지 공을 들였거늘 짐정국 아이는 아들이고 임정국 아이는 딸이었다. 짐정국은 아들 이름을 사라도령이라 하고 임정국은 딸 이름을 원강아미라고 지었다.
11
아이들이 커서 열다섯이 되자 짐정국은 임정국한테 혼사 얘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자기는 돈이 없고 임정국은 부자인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임정국한테 갔다가 말이 나오지 않아서 도로 오고, 또 갔다가 말이 안 나와서 도로 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임정국 따님 원강아미가 아버지한테 말했다.
12
“짐정국 어른님은 어찌하여 아버지한테 무슨 말씀을 할 듯 말 듯하다가 그냥 가십니까?”
13
“설운 애기야, 네가 들을 말이 아니다.”
14
“아버님아. 죽으나 사나 자식이라곤 저 하나뿐인데, 아버님이 죽을 일이 있으나 살 일이 있으나 못 들을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15
“설운 애기야, 그런 게 아니다. 나도 자식이 없고 짐정국도 자식이 없어서 한날한시에 함께 수륙 불공 드리고 돌아올 적에 아들딸 낳으면 혼사를 맺기로 약속을 했구나. 이제 너희가 크니까 혼사를 하자고 말하고 싶지만 말을 못 꺼내는 것 같다.”
16
“점잖은 어른이 말씀을 못하고 가시니 오죽 속이 상하겠습니까? 딸자식 하나 안 낳은 셈 치고서 혼인을 허락하십시오.”
18
임정국은 또 다시 짐정국이 찾아오자 딸이 말한 대로 옛날에 약속했던 혼사를 치르자고 했다.
20
사라도령과 원강이미가 날짜를 받아서 혼례를 치르고 살아갈 적에 원강아미가 첫 자식을 배었다. 그런데 서천꽃밭에서 짐정국 아들 사라도령한테 서천꽃밭으로 와서 꽃을 지키라고 하는 연락이 왔다. 다시 연락이 오고 또 오고 삼세번을 왔지만 사라도령은 가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때 원강아미가 물을 길러 삼도전 거리에 나가는데 서천꽃밭에서 삼차사가 내려오며 말을 걸었다.
21
“말 물읍시다. 이 고을에 사라도령이 어디쯤 삽니까?”
22
“아이고, 거기를 가려면 멉니다. 저 아래로 가야 합니다.”
23
원강아미가 삼차사를 멀리 보내놓고는 물도 안 긷고 집으로 돌아와서 사라도령한테 말했다.
24
“아이고 사라도령님아. 서천꽃밭에서 삼차사가 도령님 잡으러 왔습니다. 저리로 가야 한다고 아랫녘으로 멀리 보내었습니다.”
25
“왜 아니 데려고 왔습니까? 아무리 한들 안 갈 수가 있겠습니까?”
26
“도령님아. 오면 점심식사나 해서 놓아야 할 거 아닙니까? 점심쌀 꾸어올 시간 버느라고 다른 데로 보냈습니다. 어머니한테 가서 쌀이나 꾸어오십시오..”
27
사라도령이 쌀을 꾸러 갔다가 어머니한테도 쌀이 없어서 그냥 돌아오더니만,
28
“내가 부인님이랑 살고 싶지만 서천꽃밭에서 나를 잡으러 차사님이 오는데 아니 갈 수 있습니까. 내가 가겠습니다.”
29
“아이고,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나만 있으면 살 수 없습니다.”
30
“아기를 가졌으니 갈 수 없습니다. 남아서 사십시오.”
31
“아닙니다. 나는 죽으나 사나 같이 가겠습니다.”
32
사라도령이 막지 못하고 둘이 함께 행장을 차려서 삼도전 거리에 나서자 차사님이 이르렀다.
33
“말 물읍시다. 이 고을에 사라도령이 어디쯤 삽니까?”
34
“내가 그 사람입니다. 차사님이 나오는데 같이 가려고 나왔습니다.”
36
“이놈, 괘씸한 놈. 우리 가면 밥 한 상 차려놓아질까 해서 미리 나왔구나.”
37
쇠몽둥이로 사라도령 어깨를 덜컥 내갈기니 사라도령이 풀썩 꺼꾸러지며 아망지망 정신을 잃어갔다. 원강아미가 나서면서,
38
“아이고 차사님아, 살려주옵소서. 우리가 가난하기 한이 없어서 집에 가도 밥 한 상 내놓지 못할 형편이라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40
원강아미가 사라도령 입을 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하고 차사랑 함께 서천꽃밭으로 가는데 무정한 차사들이 앞에 나서서 훌쩍 가버렸다. 사라도령이 부인하고 둘이 길을 가는데 길이 멀고도 험했다. 가다 가다가 해가 떨어지자 길가에 억새 한 아름 있는 곳에 들어가 억새에 기대에서 밤을 샜다. 억새가 둥그렇게 부푼 모양을 보고서 원강아미가 말을 하되,
42
이러면서 억새 포기에 앉아 밤을 꼬박 새울 적에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나고 개 짖는 소리가 났다.
43
“저건 누구 집 닭이고 누구 집 개입니까?
44
“천년장자집 닭이고 천년장자집 개입니다.”
45
“그렇다면 그 집에 가서 나를 종으로 팔아 두고 가십시오.”
46
“이게 무슨 말입니까? 어찌 종으로 팝니까?”
47
“아무리 해도 나는 길이 겨워서 갈 수가 없습니다. 발이 부르터서 걷지를 못합니다. 동이 트거든 내 이름을 원강댁이로 바꿔서 천년장자한테 파십시오.”
48
먼동이 터서 두 사람이 천년장자 집 문간에 들어가니까 개가 쿵쿵 짖었다. 사라도령이 들어가서 아내가 알려준 대로 말을 했다.
49
“앞이마에 햇님이고 뒷이마에 달님이고 두 어깨에 별님이 오송송 그린 듯한 종이나 사십시오.”
50
천년장자가 세 딸을 보내서 마음에 드는지 보고 오라고 하니, 큰딸이 나와서 보고 그 종을 사면 집안이 망할 거라고 했다. 둘째 딸이 나와서 보고 똑 같은 말을 했다. 다음에 셋째 딸이 나가서 보고 들어오더니,
51
“아버님, 사주십시오. 종은 종이라도 집안을 다스림직합니다.”
52
천년장자가 셋째 딸을 시켜 부부를 불러들이더만,
54
“뱃속의 아기는 삼백 냥을 주고 어미는 백 냥만 주십시오.”
55
천년장자가 사백냥을 내어주니 사라도령과 원강아미는 하릴없이 갈라서게 되었다. 천년장자가 밥상을 낼 적에 사라도령한테는 좋은 밥상에 아홉 가지 반찬을 차리고 원강아미한테는 바가지에 험한 밥을 담아주고 조개껍질로 떠먹으라고 했다. 원강댁이가 홍수 지듯 비새 울듯 눈물을 흘리면서,
56
“이 집 법은 어떻든지 우리집 법은 종을 팔아 갈라서려 하면 한상에 법을 차려 마주 앉아서 먹습니다.”
58
둘이 마주앉아서 밥을 먹자 한즉 사라도령도 기가 막혀 밥을 먹지 못하고 다리 밑에 물 쏟아지듯 파초잎에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밥상이 눈물로 넘쳐났다. 사라도령이 밥을 먹을 수 없어 돈도 안 가지고서 빈손으로 휙 나가니까 원강댁이가 문간으로 따라 나와서 말했다.
59
“사라도령님아, 밴 아기를 낳으면 뭐라고 이름을 짓습니까?”
60
“사내를 낳거든 신산만산 할락궁이로 이름을 짓고 여자를 낳거든 할락댁이라고 이름을 지으십시오.”
62
사라도령이 주머니를 풀고서 얼레빗 하나를 꺼내어 가운데를 뚝 꺾어서 주고 참실 한 묶음을 반으로 갈라서 주면서 말했다.
64
그때 원강아미는 안으로 들어오고 사라도령은 서천꽃밭으로 길을 갈 적에 사라도령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면 두 발자국이 뒤로 물러서면서 허청허청 길을 가는 것이었다.
65
원강아미가 울타리 밖에 종의 집을 짓고서 살 적에, 하루는 천년장자가 문간에 나서서 보니까 원강아미가 불을 밝히고 바느질을 하는데 하도 얼굴이 고와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지팡이를 짚고서 툇마루에 절컥 올라서니까 원강아미가 몽둥이로 확 내어갈기면서,
66
“이놈의 개. 지난밤도 조반쌀 먹더니 오늘 또 먹으러 왔구나!”
67
“아이고, 나는 개가 아니고 천년장자로다. 문간에 서고 보니 네가 하도 고와서 불등잔이나 벗하자고 왔노라.”
68
“아이고 상전님아, 이 집 법은 어떻든지 우리집 법은 뱃속의 아기를 낳아서 기고 놀아야 남녀구별법을 합니다.”
70
원강아미가 아홉 달 열 달이 차서 아기를 낳으니 아들이었다. 이름을 신산만산 할락궁이라 지었더니 날이 가자 기면서 놀기 시작했다. 천년장자가 다시 지팡이를 짚고 툇마루에 올라서서 재촉을 하니까 원강아미가 말하기를,
71
“상전님아, 상전님아. 우리 집 법은 이 아기가 커서 공부를 다녀야 남녀구별법을 합니다.”
72
원강아미 얼굴이 하도 고와서 억지로 잡으면 달아날까 싶은지라,
74
할락궁이가 예닐곱살 되어서 공부를 다니니까 천년장자가 다시 지팡이를 짚고 툇마루에 왈칵 올라서서 재촉을 했다.
75
“아이고 상전님아. 우리집 법은 이 애기가 쟁기를 가지고서 밭을 갈러 다녀야 남녀구별법이 있습니다.”
77
“에이, 이년, 괘씸한 년! 사람을 속여 넘기기로만 하니 죽여 버리겠다. 앞밭에 장검 걸고 뒷밭에 형틀 걸어라. 목 자를 놈 불러라.”
78
원강아미를 죽이려고 할 적에 천년장자 셋째 딸이 나서서 말을 했다.
79
“아버님아, 어쩐 일입니까. 자기 종이라도 죽이면 역적이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벌역(罰役)이나 시키십시오. 할락궁이는 낮이면 나무 쉰 바리 해오라 하고 밤에는 새끼 쉰 동 꼬라 하십시오. 할락궁이 엄마는 낮이면 물명지 닷 동을 매라 하고 밤이면 물명주 두 동을 짜라고 하십시오.”
80
“네 말 듣고 보니 그도 그러하다. 어서 그리 하자.”
81
그날부터 원강아미가 낮에는 물명주 닷 동을 매고 밤에는 물명주 두 동을 짜는데 물명주 석 동을 매면 두 동이 저절로 매어지고 밤에는 물명주 두 동이 저절로 짜졌다. 할락궁이가 낮에 나무를 가서 한 바리를 하면 마흔아홉 바리는 저절로 하여지고 밤에 새끼 한 동을 꼬면 마흔아홉 동이 저절로 싹싹 꼬아졌다.
82
하루는 비가 오는 날에 원강아미는 헌 옷을 깁고 할락궁이는 신을 삼을 적에 할락궁이가 안 하던 말을 했다.
83
“어머니, 맛이나 보게 콩이나 볶으십시오.”
85
“장자집 콩깍지를 털어 보십시오. 콩 한 섬이 없겠습니까.”
86
원강아미가 콩깍지를 털고 보니 콩 한 섬이 수북이 나왔다. 서너 되 가져다가 솥에 넣고 볶을 적에 할락궁이가 콩 볶는 젓개를 슬쩍 숨겨두고서 어머니를 재촉했다.
87
“어머님, 콩이 탑니다. 어서 저으십시오.”
89
“그럼 손으로라도 어서 저으십시오. 콩이 탑니다.”
90
원강아미가 급한 길에 손으로 저으려고 하니까 할락궁이가 달려들어 어머니 손을 꾹 누르면서,
93
“천년장자가 아버지면 나한테 왜 이처럼 힘든 일을 시킵니까. 우리 아버지 찾아주십시오.”
95
“정주목이 내 아버지라면 왜 내가 울면서 나가고 울면서 들어와도 너 울지 말라는 소리를 아니 합니까. 우리 아버지 찾아주십시오.”
96
그제야 원강아미가 바른 대로 말을 하되,
97
“너의 조부는 짐정나라 짐정국이시고 너희 할아버지는 임정나라 임정국이시다. 너희 아버지는 저승 꽃감관 사라도령이시다.”
98
“그러면 우리 아버지 증표나 있습니까?”
100
원강아미가 얼레빗 한 짝과 참실 반 묶음을 내어주자 할락궁이가 받아들고서 말을 했다.
101
“어머님아, 저는 이제 우리 아버지를 찾아가겠습니다. 메밀을 갈아서 메밀가루 닷 되에 소금 닷 되를 넣어서 범벅 떡을 해주십시오. 콩도 서너 되 볶아주십시오. 가면서 먹겠습니다.”
102
콩을 볶아 놓고 메밀범벅 해놓으니까 할락궁이가 가지고 나가면서,
103
“어머니, 내가 가버리면 어머니는 죽습니다. 죽어지더라도 나 간 곳을 말하지 마십시오.”
104
하직하고 나아가니 조금 있다가 천년장자가 할락궁이를 불렀다.
105
“할락궁이야. 말과 소에 풀을 주어라.”
106
“할락궁이가 일찍 소 풀 주러 나갔습니다.”
107
원강아미가 거듭 둘러대자 천년장자가 화를 내어 원강아미를 잡아내서 형틀에 묶고서 죽이기로 다짐을 받고서 소리쳤다.
109
“소용없습니다. 말해도 그 말입니다.”
110
두 번 주리를 틀고 세 번 틀어도 말을 하지 않자 천년장자는 원강아미 목을 드는 칼로 뎅겅 잘라서 청대밭에 던져버렸다. 천년장자가 천년통이 개를 내더니,
111
“천리통아, 신산만산 할락궁이를 물어오너라. 죽여버리리라.”
112
그때 할락궁이가 발등에 닿는 물이 있어 건너려 할 적에 개가 쫓아왔다.
113
“아이고, 천리통이 왔구나. 범벅이나 먹어라.”
114
천리통이가 범벅을 먹고서 하도 짜서 물을 먹으러 간 사이에 한락궁이는 물을 건너서 길을 갔다. 천리통이가 집에 돌아오자 천년장자는 다시 만리통이 개를 보냈다. 할락궁이는 또 다시 메밀범벅을 던져주고서 만리통이가 물 먹으러 간 사이에 무릎까지 차는 물을 건너갔다.
115
할락궁이가 또 길을 갈 적에 자개미까지 차는 물이 있어 건넜더니 까마귀가 앉아서 까옥까옥 울었다. 다시 길을 가서 잔등까지 차는 물을 건넜더니 하얗게 차린 여자 하나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117
두번 세번 말을 물어도 아무 대답이 없어 그대로 넘어가는 데 목까지 차는 물이 나타났다. 물을 건널 적에 가운데에 배나무 하나가 있었다. 할락궁이는 배나무에 올라앉더니 참실로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내어 배 잎에 글을 써서 물에다 띄웠다.
118
그때 꽃감관은 저 위에서 꽃을 지키며 섰고 두세살 난 애기들은 꽃장난을 하며 놀고 예닐곱살 여나믄살 아이들은 물을 길어서 꽃에다 주는데 꽃이 자꾸 시들어만 갔다.
119
“여봐라. 꽃에 물을 주어도 어찌해서 꽃이 자꾸 시들어 가느냐?”
120
“귀신인지 생인인지 어떤 도령이 배나무 위에 앉아서 이상한 조화를 부리고 있습니다.”
121
“가서 귀신인지 생인인지 물어보고 생인이거든 데려오너라.”
122
아이가 도령한테 가서 귀신인지 생인인지 물으니까 할락궁이가 말했다.
123
“귀신이 어찌 이러한 곳에 올 수 있겠느냐. 생인이 옳다.”
124
아이가 할락궁이를 데리고 꽃감관한테로 가자 꽃감관이 말했다.
125
“여봐라. 넌 어떠한 아이가 되느냐? 친가는 어디고 외가는 어디냐?”
126
“우리 조부는 짐정나라 짐정국이고 조부는 임정나라 임정국이며 우리 아버지는 서천꽃밭 꽃감관 사라도령입니다. 어머니는 임정국 원강아미인데 천년장자 집의 원강댁이가 됩니다. 나는 신산만산 할락궁이입니다. 부친을 찾아온 길입니다.”
128
할락궁이가 얼레빗 한 짝과 참실 반 묶음을 꺼내어서 꽃감관이 가진 것과 맞춰보니 바짝 붙어서 딱 맞았다.
131
“여봐라. 내 자식이 왔으니 나 먹듯이 밥상을 차려와라.”
132
“아버님아 아버님아. 밥상을 차려온들 내가 아버지 무릎에 한번 앉아보지도 못했는데 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134
할락궁이가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오줌 누는 모양 똥 누는 모양 갖은 어리광을 다 해두고서 밥상을 받을 적에 사라도령이 물었다.
135
“네가 이리 올 적에 웬 물이 발등에 뜨지 않더냐?”
137
“그게 네 어머니 첫다짐 받던 눈물이로다. 또 오다 보니 뽀얀 물이 무릎에 뜨지 않더냐?”
139
“그건 재다짐 받을 적에 네 어머니가 흘린 눈물이로다. 또 오다 보니 노란 물이 자개미에 뜨지 않더냐?”
141
“그건 너의 어머니 삼다짐 받으며 흘린 눈물이로다. 또 오다 보니 빨간 물이 잔등에 뜨지 않더냐?”
143
“그것은 네 어머니 목을 가를 때 흐른 피로다. 또 오다 보니 까마귀가 까옥까옥 아니하더냐?”
145
“그것은 네 어머니 잡아간 차사로다. 또 오다 보니 하얗게 차린 여자가 빨래를 하지 않더냐?”
148
“어머니 혼령이라면 왜 말을 물어도 대답을 아니 합니까?”
149
“인간이 목숨이 떨어져서 혼신이 되어가면 말을 하지 못하는 법이다.”
151
“네가 일을 할 적에 나무 한 바리를 하면 마흔아홉 바리가 하여지고 새끼를 한 동 꼬는 새에 마흔아홉 동이 절로 꼬아지지 않더냐?”
153
“그건 내가 세상에 머슴을 보내서 나무를 한 것이고 내가 새끼를 꼬아 준 것이다. 너희 어머니 명주 석 동을 매고 두 동을 짠 것도 내 신력으로 그리 한 것이다.”
155
“지금 너의 어머니가 죽어서 뼈만 앙상하다. 가서 너의 어머니 뼈를 찾아와라.”
156
사라도령은 아들 할락궁이를 데리고 서천꽃밭 꽃구경을 시켜주면서 꽃을 따 주었다.
157
“이건 뼈오를꽃이고 이건 살오를꽃이며 이건 오장육부 간담 만들 꽃이다. 이건 웃음웃을꽃이고 이건 말가를꽃이며 이건 시들꽃이고 이건 생불꽃이다. 이건 불붙을꽃이고 이건 멸망꽃이며 이건 악심꽃이다.”
158
가리키는 대로 할락궁이가 꽃을 모두 따니까 마지막에 꽃감관은 때죽나무 회초리를 꺾어 주면서 말했다.
159
“이걸 가지고 어머니한테 가라. 네 어머니 시체를 찾아서 살려내라.”
160
할락궁이가 아버지 가르침대로 서천꽃밭 꽃들을 가지고 돌아올 적에 천년장자한테 가기 전에 청태국 마귀할망 집으로 들어갔다.
161
“네가 왜 왔느냐? 천년장자가 너를 찾아 죽이려 한다. 어서 달아나라.”
162
“그건 그렇지만 천년장자 셋째 딸을 이리 불러주십시오.”
163
천년장자 셋째 딸이 와서 할락궁이를 보더니만,
164
“아이고, 네가 무엇하러 왔느냐? 우리 아버지가 널 죽이려 한다. 너희 어머니도 아버지가 죽여버렸다.”
165
“그렇지만 내가 은공 보답을 하려고 돈을 많이 벌어서 왔습니다.”
166
할락궁이가 셋째 딸을 따라서 집으로 들어가자 천년장자가 소리를 쳤다.
167
“이놈, 어디 갔다가 왔느냐? 앞밭에 장검 걸고 뒷밭에 형틀 걸어라. 목 자를 놈 불러라.”
168
바로 죽이려고 들 적에 할락궁이가 나서서 말을 했다.
169
“상전님아, 상전님아. 죽일 땐 죽이더라도 내가 은공 보답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싣고 왔으니 돈이나 받아놓고서 날 죽이십시오. 일가친척을 모여 앉히면 돈구경을 시키겠습니다.”
170
천년장자 일가친척이 모여앉았을 적에 할락궁이가 웃음웃을꽃을 내어놓자 일가족이 해삭해삭 웃어서 창자가 끊어지도록 그치지 않았다. 다시 할락궁이가 멸망꽃을 내어놓자 천년장자 일가친척이 차례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때 천년장자 첫째 딸과 둘째 딸이 나선즉 할락궁이이 불붙을꽃을 내어놓자 불이 붙어서 죽었다.
172
“할락궁이 상전님아, 나를 살려주십시오.”
174
셋째 딸이 가리키는 데를 가보니까 뼈만 앙상하게 남고 머리 위에 머구나무가 울창하고 손앞으로 왕대가 울창했다. 할락궁이는 은장도로 나무를 깨끗이 베어낸 뒤 뼈를 차곡차곡 모은 다음 뼈오를꽃, 살오를꽃, 말가를꽃, 숨쉴꽃, 오장육부만들꽃을 차례로 문질렀다. 뼈가 살아나고 살이 살아나고 오장육부가 살아날 적에 때죽나무 회초리로 어머니 몸을 삼세번을 때렸다. 원강아미가 부시시 일어나면서,
175
“아이고, 설운 애기야. 봄잠을 너무 잤구나.”
177
할락궁이가 어머니를 모시고 천년장자 셋째딸아기를 데리고서 서천꽃밭을 들어갔다. 서천꽃밭 어린 아이들이 이리저리 고생하며 울 적에 원강아미가 아이들 밥을 주고 물을 주며 거느리게 되었다. 그렇게 저승 어멍이 되고 사라도령은 저승 아방이 되었다. 천년장자 셋째 딸은 하녀 심부름꾼이 되었다. 그리고 할락궁이는 아버지 앉던 방석에 올라앉아 서천꽃밭 꽃감관이 되었다. 그 법으로 이 세상에는 할아버지 살던 데 아버지가 살고 아버지 살던 곳을 아들이 물려받아서 대대손손 이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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