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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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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필요(飜譯必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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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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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나라 글을 그대로 읽지 못하는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의 글로 번역을 한다든지, 이 땅의 글을 그대로 읽지 못하는 남의 나라 사람을 위하여 그 나라 글로 번역한다든지, 이러한 통속적 의미에서의 번역의 의미를 나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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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라면 대개 읽을 수 없는 글, 읽기 어려운 글이란 용기(容器)에 담겨있는 내용을 읽을 수 있는 글이란 나에게 편리한 용기에 옮겨 담는다 생각하고 그 필요를 인정하기들은 하나, 언어의 상위(相違)로부터 오는 가능성의 여부 내지 그 한계성이 논란되기는 문필(文筆)에 유의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많이 되어 있지만, 내가 말하는 번역의 필요성이란 이러한 문제 테 밖에서 생각하고 있는 중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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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이 피들러(K. A. Fiedler)의 예술론(藝術論)에서 이러한 것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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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적(論議的) 사유란 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동시에 사유는 음성(音聲)에는 매여 있지 않다. 즉 사람은 말로써 생각은 하나, 말하지 않고서 쓰지 않고서도 생각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을 한다든지 쓴다든지 하는 일의 전기원(全起源)은 ‘말을 한다’는 사실 속에 존재하여 있다. 말해진 말이란 것이 제일(第一)되는 것으로, 말로써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란 말소리·몸짓으로부터 발전한다. 그러므로, 말하는 능력이 처음부터 없다면, 말로써 생각한다는 일도 발전될 수 없다. 말이란 결코 그에 상용되는 사상적 (思想的) 소산이 음성적(音聲的) 표출을 요구함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요, 아직 형성 되지 못한 것이 그 최고의 발전형식까지 진전된 그곳에 말이 있게 되고 말이 성립케 된다. 말로써 표현되는 것은, 말 이외로서는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인간정신 안에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말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요, 말로써 비로소 성립한다는 것이다.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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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사고(思考)란 언어로써 되는 것이요, 언어의 실재(實在)란 말해지는 곳에 비로소 있는 것이니까, 사고라는 것이 비록 언표(言表)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날 것이 임시 억압되어 있을 뿐이요, 내면적으로 사고의 진행이 말이 말해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이란 사고가 끝난 곳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요, 사고의 출발에 언어가 있는 것이요, 사고의 진행 형식이 곧 언표의 형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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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우리의 사고라는 것이 우리가 말로써 말하는 과정형식(過程形式) 그대로 진행되는 것이요, 그 이외에 달리 사고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진행될 수 없는 것인 까닭에, 말이 말해진다는 것이 곧 사고되는 소이(所以)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알기는 아나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언표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것보다도 사고가 불충분해서 그런 것이다. 즉 덜 알아 그런 것이다. 원래, 우리가 잘 생각한 것은 그대로 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외부적으로 어떤 영향을 기피(忌避)해서 의식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과는 달라〕 잘 생각되지 아니한 까닭이다. 이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언어 그자신이 불충분해서 말할 수 없는 수는 있다. 이런 경우에는 내 말은 불충분하나 남의 나라 말엔 적당한 것이 있어 그것을 빌려다 발표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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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적 용어뿐 아니라 일상용어에서도 남의 말을 섞어 쓰는 것은 우리가 항상 보고 아는 바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내 피로서의 말이 아닌 만큼, 그 사고라는 것도 결국 내 피가 되어 주지 않는다. 가령 ‘피육(皮肉, ヒニク)’이란 말을 쓴다 하면, ‘피육’이란 생각이 있어 쓰기는 하나 ‘ヒニク’란 언어로써 발표되고 생각되는 ‘피육’이란 사고는 내 피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사고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곳에 번역이란 것은 어떤 나라 말, 예컨대 독일어면 독일어로 발표된 독일어적 사고를 내 말로 내 말적 사고로 하여 내 피를 만드는 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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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칸트(I. Kant)의『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을 원문대로 읽는다면, 읽는 동안에 우리말로, 우리말이 언표되는 형식대로 다시 엮어지지 아니하면 그것은 곧 나 자신의 피로써 사고를 형성치 못하는 것이다. 우리말로서 충분히 엮어짐으로 해서 칸트의 『판단력비판』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나 자신의 『판단력비판』이 되는 것이다. 번역이란 결국 이 뜻에서 필요한 것이다. 다양한 남의 생각이 다수히 번역되는 대로 내 자신의, 내 피로서의 사고가 풍요해지는 것이다. 물론 허튼 번역이란 아무 의미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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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가지 문제는 말의 한계성(限界性)이란 것이다. 피들러는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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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말이란 한번 성립되면 그대로 영속적인 한 재산이 되어 전달되는 법이니, 사람이 소리를 내어 쓰든 말든 실제에 있어선 그것을 쓰면서 있다. 말해진 말에는 확실히 그와 동등의 어떤 정신적 내용이 조응(照應)되고 있나니, 그러므로 생각되어 있건, 쓰여져 있건, 말해져 있건, 그 말은 언제나 동일체이다. 말이 한번 존립케 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정신적 활동이란 필요적으로 이 언어란 재료에 얽매이게 되나니, 그러므로 더 높은 것을 표현할 때 자유롭고 해방적으로 보였던 것이 한 개의 제한적인 것이 되어 정신은 이 제한 속에서 걷게 된다. 이리하여 능재(能才)·천재(天才)들은 언어의 표출능력을 확인하려고 애를 쓴다.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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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언어의 새로운 용법, 새로운 발견의 동기가 숨어 있건만, 이 문제는 장황하겠으므로 그만두겠다. 하여간 번역이란 여러 가지 의미에서(그 가능의 한도는 별문제로 하고) 필요한 것인데, 조선서는 이 방면의 활동이 매우 적으니, 이것은 요컨대 섭취능력의 미약(微弱)을 말함이라. 즉 생활력의 미약의 징조이니, 유감(遺憾)된 바의 하나라 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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