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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포리스멘(Aphorism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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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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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스멘(Aphoris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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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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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扶桑) 석(釋) 표재(瓢齋)『속인어록(俗人語錄)』서문 일절에 “어제는 지났고 내일은 모르오니 세상사는 오늘뿐인가 하노라” 하는 뜻의 일구(一句)가 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인데, 한편 소극적 방면에서 본다면 찰나적 향락주의를 읊은 것이라 하겠고, 달리 적극적 방면에서 본다면 ‘영원의 현금(現今)’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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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현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면, 이는 곧 방편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경치(境致)이다. 내일을 위하여 오늘이 있는 것이 아니요, 오늘을 위하여 어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목적과 방편이 다 같이 ‘오늘’의 성격이다. 목적은 자태(姿態)요 방편은 거동(擧動)이다. 완성은 오늘에 있고, 내일에 없다. 지금에 있고, 다음에 없다. 한 걸음이 ‘영원의 현금’의 ‘찰나의 완성’이지 앞을 위하여의 준비가 아니며, 어제가 만든, 즉 지남이 만든 결과가 아니다. 그러므로, 고전(古典)은 항상 ‘영원의 현금’이 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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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바위옷같이 시간의 누적에서 생겨나는 곰팡내 나는 구질구질한 것이 아니요, ‘영원의 현금’이 찰나 찰나로 산출시켜 가는 ‘영원의 새것’이다. 그러므로 ‘고전은 항상 신생(新生)되는 것이라야 한다.’ 가장 새로운 ‘영원의 현금’ 의 우리가 우리와 같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이미 고전이 아니다. 그러나 ‘영원의 현금’의 ‘가장 새로운 우리’가, 우리보다도 더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 이미 우리는 또다시 새로워졌고, 우리들을 새롭게 한 그것은 실로 고전의 진면목을 갖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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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제공하는 사람은 내일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오늘도 잃고 말 것이다. 어제를 동경하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오늘을 희생코 말 것이다. 찰나 찰나의 완성의 연결은 탄발적(彈發的) 진행을 같은 천행(天行)이요, 찰나의 목적, 찰나의 완성이 없는 작용의 누적은 괴훼(壞毁)요 사태(沙汰)다. 찰나의 완성의 연결은 같은 ‘미완성’이요, 괴훼의 연결은 완성·미완성으로써 말할 것이 아니라, 도대고(都大高) ‘혼돈’이다. ‘오늘의 현금’에서 ‘어제의 현금’의 완성이 실패로 보일 제 ‘오늘의 현금’은 완성된 것이요, ‘오늘의 현금’ 에서 ‘어제의 현금’이 완성으로 보일 때 오늘은 실패된 것이다. 찰나의 완성에 찰나의 완성을 불러들이어 완성의 둘레가 커 가는 것을 건실한 행(行)이라 하겠고, 따라서 다 빈치(L. da Vinci)적 미완성이 있는 것이요, 찰나 찰나를 다음에 오는 찰나를 위한 찰나로 볼 때 영원한 허무만이 있을 것이다. 찰나가 찰나 그대로 목적이요 인격일 때 씩씩한 생(生)은 있고, 찰나가 찰나의 수단일 때 뜻없는 세월만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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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완성의 찰나가 누적되므로 영원의 미완성을 깨닫게 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것이 진부한 말이나, 이러한 경우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다. 다시 또 진부한 말이나, 실패를 무서워하는 사람에겐 성공도 없다. 남의 진지(眞摯)로운 실패를 웃는 자, 반드시 성공의 비결이 있는 까닭이 아니요, 자기의 실패를 숨기려 하는 자, 행(行)에 반드시 진지로운 자 아니다. 전자는 같지 않은 조(操)만 빼고 남을 괴방(壞妨)하기 좋아하는 협량(狹量)의 인물에 많고, 후자는 자기 자신을 위만(僞滿)하되 불안을 느끼지 않는 성격에 흔한 일이다. 남의 진지로운 실패를 동정하고 귀감(龜鑑) 삼아 자기의 실패를 충실히 고백하는 성격이 가장 바라고 싶은 성격이다. 실패의 고백이 곧 성공의 첫걸음이다. 그러므로 루소(J. J. Rouseau)는 ‘실패의 고백’으로써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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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가 찰나에서 완성된다는 것은 즉 사(死)가 생(生)을 탄생한다는 의미와 통한다. 사가 생을 탄생한다는 것은 유(有)가 무(無)에서 나온다는 것이 아니라, 꽃에서 ‘여름’이 열음하기까지는 꽃은 꽃으로서의 찰나의 생명이며, 꽃에서 ‘여름’이 열음될 때 ‘여름’은 신생(新生)이며, 꽃은 죽을 자요 죽은 자다. 사가 생의 성격적 일상면(一像面)인 동시에 생은 사의 근본적 특질이다. 이는 이미 노발리스(Novalis)의 단상에도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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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은 사(死)의 시초니라. 생은 사를 위하여 있나니라. 사는 종말인 동시에 시초니라. 사(死)를 통하여 환원은 완성되나니라.(『화분(花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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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노발리스를 한 걸음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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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금 찰나는 ‘영원의 현금(現今)’의 찰나는 항상 진지로운 완전이어야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윤리적으로, 너무나 고비(固鄙)된 윤리적 이돌라(idola)에서 해석될 것을 두려워한다. 나는 우리의 조상(祖上)이 한껏 자유로워야 할 생명을 너무나 윤리적인 편견으로 속박지어 고사(枯死)시켜 버린 것을 항상 원망하는 자이다. 우리는 윤리적이기 전에 먼저 생명적이어야 하겠다. 자유로운 그 자체에 약동(躍動)하고 싶다. 생명을 잃은 윤리는 절대 악(惡)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의 위대한 예술은 이 윤리를 무시한, 무시보다도 애초에 생각도 않던 자유인의 손에서 산출되었다. 진정한 예술은 진정한 생명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므로, 진정한 예술은 곧 진정한 생명 그 자체이다. 윤리는 항상 가식(假飾)과 위만(僞滿)을 곧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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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유희(遊戱)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냐. ‘유희’라는 말에 비록 ‘고상한 정신적’이란 형용사를 붙인다 하더라도 ‘유희’에 ‘잉여력(剩餘力)의 소비’라는 뜻이 내재하고 있다면, 예술을 위하여 용서할 수 없는 모욕적 정의라 할 수 있다. 예술은 가장 충실한 생명의 가장 충실한 생산이다. 건실한 생명력에 약동하는 영원한 청년심(靑年心)만이 산출할 수 있는 고귀하고 엄숙한 그런 것이다. 한 개의 예술을 낳기 위하여 천생(天生)의 대재(大才)가 백세(百世)의 위재(偉才)가 얼마나 쇄신각골(碎身刻骨)하고 발분망식(發憤忘食) 하는가를 돌이켜 생각한다면, 예술을 형용하여 ‘잉여력의 소비’같이, ‘고상한 유희’ 같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은 가장 진지로운 생명의 가장 엄숙한 표현체(表現體)가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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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서(聖書)’를 가리켜 ‘위대한 예술’이라 할 수 있을지언정 ‘고상한 유희’라고는 감히 못 할 것이다. 『로마법장(羅馬法章)』을 한 개의 ‘위대한 예술’ 이라고 형용한 사람은 있어도 ‘고상한 유희’라 형용한 사람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다. 신의 천지창조는 한 개의 ‘위대한 예술적 활동’이라 형용할 수 있지마는 ‘고상한 유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은 생명과 같이 장엄하다. 진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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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조선의 고미술(古美術)을 관조(觀照)하고 있다. 그것은 여유있던 이 땅의 생활력의 잉여잔재(剩餘殘滓)가 아니요, 누천년간(累千年間)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요, 창조요, 생산임을 깨닫고 있다. 그러함으로 해서 예술적 가치 견지에서 고하의 평가를 별문제하고서, 나는 가장 진지로운 태도와 엄숙한 경애(敬愛)와 심절(深切)한 동정을 가지고 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것이 한쪽의 ‘고상한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면, ‘장부(丈夫)의 일생’을 어찌 헛되이 그곳에 바치고 말 것이냐.
【원문】아포리스멘(Aphoris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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