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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의 일. 저자는 조(朝)·중(中)·일(日) 삼국 간의 왕년의 미술사적 교섭을 생각하고 있던 여말(餘沫)로서 일본 화승(畵僧) 철관(鐵關)과 중암(中庵)과의 일을 당시 동경미술연구소(東京美術硏究所) 발간인『화설(畵說)』에 발표한 일이 있었다. 철관의 회화는 이미 원(元)의 연도(燕都)에서 고려 충선왕대(忠宣王代)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거장(巨匠) 주덕윤(朱德潤)과 같이 품평을 가하고 있으나, 그 후 조선조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장화품(藏畵品) 중에도 수장될 만큼 명물이었고, 석(釋) 중암은 공민왕(恭愍王) 8년 이십오 세의 나이로서 고려에 들어와 개도(開都)의 산사(山寺)에 주(住)하여 고려 말 사인(士人) 간에 응수(應酬)도 많았고, 백의선(白依仙) 전신(傳神) 등을 가장 득의로 하였으며, 더욱이〈기우자도(騎牛子圖)〉를 남겨 영명(令名)이 있었고, 보법사(報法寺) 재선사(齋禪師) 수장(收藏)의『황벽록(黃蘗錄)』을 수각반포(手刻頒布)하는 등 가지가지의 활약이 있어서 저 일본 수묵화의 개조(開祖)로 일컫는 슈분(周文)의 내선(來鮮)에 앞서기 한 세기 전에 화사(畵事)로 인한 교섭이 있었음을 말한 일이 있다. 필요한 문헌을 거의 좌우에 갖지 못하고 문헌차람(文獻借覽)의 편의도 없는 시골 칩거(蟄居)의 몸으로서 이만한 발명에도 상당한 고심을 다한 것이었으나, 드디어 저 중암의 말절(末節)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전반조선사(全般朝鮮史)』를 펴서 조선 태조(太祖) 원년(元年)의 기록을 보고 있는 사이에 『선린국보(善隣國寶)』 권상(卷上)에 메이도쿠(明德) 3년, 젯카이 추신(絶海中津)의 찬(撰)으로 된 아시카가(足利) 정이장군부(征夷將軍府)의 조선에의 답신 중 승(僧) 수윤(壽允)이란 자가 있어 이 문서를 조선에 갖고 와서 왜구조치(倭寇措置)의 사실에 관한 구진(具陳)의 역(役)을 당하고 있음을 보니, 여기 다시 중암의 후일담을 철(綴)하게 될 성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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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고려 말의 이승인(李崇仁)·이집(李集) 등의 제자(諸子)의 문집에는 일본 승 중암을 전하고 있음에 불과하나, 중암을 위하여 많은 찬(讚)·서발(序跋)·문(文) 등을 남긴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에는 석(釋) 윤중암(允中庵)이라 있고, 권근(權近) 『양촌집(陽村集)』에는 다시 “중암(中庵)은 일본 석 중암”이라 하였고, 이능화(李能和)의『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잉용(仍用)된 『태고화상집(太古和尙集)』에는 석윤(釋允)을 수윤(壽允)에 의하고 있어 수(壽), 수(守) 어느 것이 옳은지는 소홀히 정할 수 없으나, 실은 동일의 중암(中庵)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암이 고려에 온 것은 공민왕 8년 이십오 세 때, 중암이 태고화상(太古和尙)에게 호(號)를 가지고 찬(讚)을 구한 것이 사십이 세 때, 메이도쿠(明德) 3년은 중암의 오십팔 세 때이고, 고려가 멸하고 조선조가 시작되던 바로 그 초년(初年)이었다. 즉 그는 여말(麗末)에 일단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조선 초 장군부(將軍府)의 문서를 갖고 내한한 것이다. 그가 고려에 머물러 있던 것은 대체로 이십여 년, 일본에 돌아가서의 수(壽)는 밝힐 수 없지만 다시 십수 년의 수(壽)를 보유하였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전(傳)이나 화적(畵跡)이 적어도 오산(五山)의 문중(門中)에는 어디인지 있을 법도 하지만 인삼(人蔘)만의 도시〔개성(開城)〕에서는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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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京都)의 쇼코쿠지(相國寺)에는 젯카이(絶海) 찬(讚)의 국보〈강산모설도(江山暮雪圖)〉가 있는데, 전문대가(專門大家) 등 사이에는 조선화(朝鮮畵)로 지목받고 있다. 찬(讚)에 연월(年月)을 결(缺)하고 있으나 젯카이는 오에이(應永) 13년에 죽었다. 메이도쿠 3년부터 십사년 뒤였다. 따라서 이 그림은 마땅히 오에이 13년 이전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과연 이것이 조선화라고 한다면, 고려 말이나 조선조의 아주 초기(오에이 13년은 조선왕조 개국 14년에 해당한다)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된다. 이만큼 연대가 오랜 수묵화는 조선에는 현존하지 않는다. 여기에 중암의 사적(事跡)은 조(朝)·일(日) 간의 미술교섭사상(美術交涉史上) 더 많은 비약(秘鑰)이 있을 것만 같이 생각된다. 명필(名筆)『프랑스 통신(フランス通信)』으로써 이름 높은 다키자와 게이치(瀧澤敬一) 씨는 이와나미(岩波)의 도서(圖書)에서「불국대학도서관의 에스오에스(佛國大學圖書館のS.O.S.」에 1819년 에른스트 르낭(Ernst Renan)의 연제(演題)라 하여 ‘지방에서도 공부할 수 있을까?(Peut-on travailer en province?)’라고 있던 것을 모두(冒頭)하고 있다. 연래(年來), 필자만이 문화의 도시집중주의(都市集中主義)를 원망한 듯이 느껴 오던 중, 다만 나 한 사람만이 아니고, 또 일본만의 현상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 하여 그런 동병(同病)의 존재가 스스로의 위로가 될 이유로도, 단념해 버릴 자료로도 될 수 없는 것이다. 한곳으로의 문화의 집중은, 과거는 모른다 하더라도 문화의 균등, 국가 실력의 균등한 발전을 필요로 하는 현재 및 장래에는 마땅히 국가정책 중의 중요한 한 과제로서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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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집중주의가 얼마나 많은 폐해를 가져오는 것인가는, 비근한 예이지만 오늘의 서울의 저 혼잡함이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말하여 준다고 할 것이다. 머리만 큰 개물생체(個物生體)의 존재를 탄(嘆)하기 전에 심장만이 팽창하여 이제라도 파멸할 두려움이 있는 사회 형태를 먼저 탄(嘆)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도자의 이름에 상치(相値)하는 바라고 하겠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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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포정(釋庖丁)하여 급양생(及養生)”한 셈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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