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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강소요부(花江逍遙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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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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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소요부(花江逍遙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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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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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돋는 곳과 달 뜨는 곳이 다 같은 동편(東便)이지만, 그 기점(基點)이 이곳에서는 확연히 다릅니다. 게다가 요사이는 달과 해가 꼬리를 맞대고 쫓아다닙니다. 해가 산 너머로 기울기 전에 달은 고개 너머로 솟아옵니다. 그리하고 지새는 별은 항상 부지런히 둥근 달을 쫓아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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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 또 산이 생기고 그 위에 바위가 생기고 폭포(瀑布)가 솟치고, 그러다가는 사람도 되고 짐승도 되고 백설(白雪) 덩이가 되었다가 화염(火焰)이 터지고 하는 구름은 서편보다 동편에서 많이 났다 사라지는 저녁의 노을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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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에서 무심히 이러한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물결을 굽어보면 터너(J. M. W. Turner)의 풍경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흴랑 푸르랑하게 몰쳐 흘러가는 것은 눈앞에 놓인 물줄이지만, 멀리 산영(山影)이 잠긴 범범(泛泛)한 물 끝을 보면 백은(白銀)·황금(黃金)·남실(藍實)·주옥(朱玉)의 수파(水波)가 어른어른합니다. 그 중에도 외광파(外光派)의 유화(油畵)에서 보는 듯한 경치는 백양(白楊)의 그림자외다. 이 위로 까마귀가 소리도 없이 외로운 몸으로 지나칠 때는 참으로 부박(溥博)한 비원(秘苑)에 잠겨 신화(神話)·전설(傳說)의 속에 든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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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금(胸襟)이 활연(豁然)히 열릴 만하지는 못하지만 분타(渀沱)한 필치로 일획(一劃)한 평야를 고개(高嵦)에 올라 굽어보면, 높고 낮은 산들이 둘러싸였고 이름난 준령(峻嶺)과 심곡(深谷)이 있는 곳이라 운행(雲行)이 자조롭습니다. 취우(驟雨)가 걷히자 금구(金鳩)가 창명(蒼冥)에서 사라질 때 희둥근 옥토(玉免)는 별보다 먼저 나타납니다. 이때에 달 돋은 동쪽 고개에서 무지개 같은 구름다리의 푸른 줄기가 부채살같이 일어나서 해 드는 서산(西山)으로 한 점에서 합하여 쿡 박힙니다. 넓고 좁은 그 줄이, 많으면 열이 넘고 적으면 한둘까지도 줄어듭니다. 시시(時時)로 몇 줄이 한 줄로 합치기도 하고 한 줄이 몇 줄로 나뉘기도 합니다. 그러자 해가 아주 떨어지고 말면은 그 줄이 불현듯이 사라져 버립니다. 나이 적은 아해나 조금 지긋한 젊은이나 머리 흰 늙은이에게 “저것이 무엇입니까?” 물어보면, 주제넘은 이는 “무지개라오” 하고 아는 듯이 말하고, 제법한 사람은 “모릅니다” 하고 순순연(純純然)하게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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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말하는 내 고을 이름은 화강(花江)이요, 알기 쉽게 말하면, 군(郡)으로 는 평강(平康)에 속하나 가깝기는 철원(鐵原)과 김화(金化)의 경계이외다. 동명(洞名)이 정연(亭淵)이니 그리 크달 수 없어 삼사십 호(戶)에 불과하고 오직 민가(民家)만 있으나, 고요한 마을이 못 되고 제대어복(臍大於腹)으로 주막(酒幕)과 춘소부(春笑婦)가 많으므로 인하여 일백팔 인의 도배(徒輩)가 날로 늘어 감은 강개(慷慨)를 아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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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토착(土着)된 민속이야 온후(溫厚)하지만 그들의 철도(鐵道)가 부설된 이상엔 무회(無懷)·갈천씨(葛天氏)적 백성(百姓)만 고스란히 잔류될 수 없습니다. 초혜(草鞋)는 와라지(わらじ)로, 주의(周衣)는 인반전(印半纏)으로, ‘에헤이에-’는 ‘가레스스기’로 날로 변하여 갑니다. 지사연(志士然)하게 만국류(萬掬淚)를 흘린대도 부질없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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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 인사(人事)는 인사이고 자연(自然)은 자연이외다. 내 원래 만필(漫筆)을 들었나니 어찌 미숙된 강개(慷慨)로운 단어만을 진열(陳列)하리까. 차라리 미흡치 않고 용장(冗長)의 혐(嫌)이 없는 곳까지 흐르는 붓끝에 마음을 맡겨 자유로운 소요유(逍遙遊)를 하여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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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준령(峻嶺)을 두고 말하여 보면, 북방의 오성산(五聖山)과 남방의 금학산(金鶴山)이 비록 상거(相距) 육칠십 리로, 되보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먼저 그 이름을 알고자 하게 만드는 대치(對峙)된 명산(名山)일까 합니다. 그의 고하(高下)는 피차(彼此)를 말할 수 없으나, 운행(雲行)이야말로 진진(津津)한 재미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억지로 기어넘는 구름, 순순히 흘러넘는 구름, 훌쩍 높이 뜨는 구름, 헤매기만 하는 구름, 빙빙 산허리를 돌기만 하는 구름, 내리는 구름, 오르는 구름, 이런 구름 저런 구름이 한여름을 두고 쉬는 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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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천행건(天行健)이 아니라 운행건(雲行健)이올시다. 오성산의 구름을 짜내어 그 물을 금학산으로 몰아가는 냇물의 줄기는 임진강(臨津江) 원류가 된다 하나, 이 마을의 경계 안에서는 적벽(赤壁)이라 부릅니다. 절벽(絶壁)진 삭암(削岩)이 상하연긍(上下連亘) 칠십 리로, 기망(旣望)엔 정히 동파(東坡)의 적벽강 오유(敖遊)를 가상(可想)케 함이 적지 않습니다. 가다가 평면(平面)진 거암(巨岩)이 수중(水中)에 돌출되어 창태(蒼苔)가 어우러진 곳은 선유대(仙遊臺)로 불렸고, 제법 된 소구(小丘)는 백운봉(白雲奉)의 명의(名義)로 처세하고 있습니다. 청의인(靑衣人) 장발족(長髮族)이 코 찌르는 냄새가 오히려 성가시고 귀찮지만, 이 산중(山中)에 택리(擇里)한 후로는 웅위활달(雄偉活達)한 야인(野人)의 한담(閑談)이 적이 날로 하여금 작약(雀躍)함이 있도록 함이 뉘라고 정한 바 없이 감사하여 마지 않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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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을 위하여 다시 눈물겨운 말을 적어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현재로 만족하고 종교(宗敎)를 갖지 못하고 지식(知識)을 얻지 못한 진시(眞是) 가련한 여수(黎首)들이외다. 전설(傳說)다운 전설과 역사(歷史)다운 실적을 갖지 못하고 귀리밥과 강냉이죽으로 진취(進取) 없는 소극(消極)의 생활을 하는 그들, 과거와 미래가 없는 생활을 하는 그들, 환멸(幻滅)의 비애 속에 자포(自暴)된 그들, 이러한 그들을 조상(弔喪)치 않을 수가 없나이다. 구름이 비늘지면 바다 풍년(豊年)이나 든다고 하나 그들의 풍년은 무엇이 말할는지요. 양생송사(養生送死)를 언제나 한(恨) 없이 하게 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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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성을 붙잡고 향토(鄕土)를 예찬(禮讚)합니다. 속요(俗謠)를 묻고 전설(傳說)을 캡니다. 그러나 돌재돌재(咄哉咄哉)인저. 그들은 망하지 않느냐. 망하여 가는 사람이 아니냐. 그들은 주린 사람이 아니냐. 그들은 헐벗은 사람이 아니냐. 그들의 소구(所求)는 나의 소멱(所覓)과 경정(逕庭)의 차쇄(差殺)를 이루고 있지 않느냐. 너는 둔마(鈍馬)니라, 백치(白痴)니라 하고 자책(自責)하고 자탄(自歎)함이 한두 번이 아니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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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과거는 모두 민멸(泯滅)되고 있습니다.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청구고민(靑邱古民)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마는, 오히려 선유(仙遊)하던 기국(基局)은 고려심산(高麗深山)에도 있고, 소동파(蘇東坡)가 조선 고허(古墟)에 하관(何關)이 있겠습니까마는 접역황천(鰈域荒川)에 오히려 적벽(赤壁)이란 이름이 있습니다. 옛적과 다름없는 지석(支石, dolmen)은 땅바닥에서 헤매 있고 주석(柱石, menhir)은 허천(虛天)에서 울어 있지만, 그리하고 팰러시즘(Phalecism)이 잔형(殘形)을 고집하고 있지만, 옛적과 달라진 그들은 다만 창천(蒼天)을 우러러 무토(無土)를 원소(怨訴)하고 있습니다. 민(民)은 이식위천(以食爲天)이외다. 의식족이지예절(衣食足而知禮節)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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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 나 홀로 자연을 찾고 있습니다. 벗하고 있습니다. 산악(山岳)에 조양(朝陽)이 떠오르고 유곡(幽谷)에 백무(白露)가 일 제, 야수(野獸)의 울음소리를 청전(靑田)에서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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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방울을 굴려 가며 밭 속으로 걷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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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넘는 풀과 발 아래 풀이 고스란히 나를 세례(洗禮)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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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귀는 뭇새 아직도 숲속에서 떠나지 못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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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의 소리 기운찰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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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봇장 위에 조각달은 희어 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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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새벽별! 그는 벌써 얼음같이 푸른 면사(面紗)로 가리워졌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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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는 하늘과 땅에서 세 빛을 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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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칠채(七彩)가 청초한 조양(朝陽)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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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백무(白霧)로 띠하고 섰는 검푸른 산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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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으로 하나는 모래와 시내가 닿는 가름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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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열(法悅) 속에 자차(咨嗟)하고 섰는 백의(白衣)의 일존재(一存在)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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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그는 이 악몽(惡夢)에서 소스라쳐 존재(存在)된 일백의(一白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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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궤짝 속에서 몸부림하고 울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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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는 영화(靈化)된 조양(朝陽)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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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결을 멀리 가리키고 섰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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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었던 배 속과 가슴 속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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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기운이 청상(淸爽)하게 넘쳐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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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더욱이 구슬 같은 소리로 넘나는 한 마리 새를 창공(蒼空)에서 봄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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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田園)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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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아직도 검고 골은 아직도 흐리고 내는 아직도 희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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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검음은 땅으로 스며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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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은 동천(東天)에서 솟아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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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에서 흘러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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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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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의 울음소리 넓은 들 위에서 세상을 흔들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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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상(淸爽)한 공기로 가슴에 가스를 불어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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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찬 바위 틈 흐름에서 네 몸을 재계(齋戒)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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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고 팔아름 속에 검은 흙을 움켜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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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醴泉)다운 향내를 기껏 양껏 마셔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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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와 괭이가 하늘 땅으로 들어나르는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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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벼, 기장, 곡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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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에 뿌리박고 하늘에서 춤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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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을 물속에 보며 명상(冥想)의 연화보(蓮花步)를 헛뿌려 갈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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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낙을 떨쳐든 마을 사람을 벗은 채로 별빛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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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절후(節候)가 빠른 산중의 바람은 옷깃을 가만히 쥐어짜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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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끝으로 이슬이 굴러 오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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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를 밟아 가며 거닐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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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하나, 별 셋, 별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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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하늘 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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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소리 없이 둥그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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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산이 무겁게 깔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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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소리에 가슴은 소름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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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우(牽牛)와 직녀성(織女星)이 보이랴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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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끝에 걸리는 바람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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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러지 울음을 먼저 듣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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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悠然)히 과거를 회상(回想)하고 미래를 추량(推量)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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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날과 밤을 이어 보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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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移鄕) 후의 첫 인상(印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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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8월 26일
【원문】화강소요부(花江逍遙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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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4년 07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