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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唐) 무종(武宗) 회창삼년(會昌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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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제법규에 포함되는 승려를 환속시키도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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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日。功德使帖諸寺。僧尼入條疏內。竝令還俗。此資聖寺卅七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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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17일, 공덕사가 여러 절에 첩문을 보내,註 894 승니로서 규제 법규에 포함되면 모두 환속시키도록 하였다. 이 자성사註 895에는 37명이 해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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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94 이것은 회창 2년 10월 9일조에 “去年十月七日(勅)"이라고 한 조칙과 관계가 있는데, 실은 정월 16일에 발포되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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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95 자성사는 원인(圓仁)이 장안에 있으면서 시종 머물렀던 사원이다. 좌가의 숭인방(崇仁坊)에 있던 거찰(巨刹)로, 본래 장손무기(長孫無忌, ?-659)의 저택이었다가 용삭 3년(663)에 자매였던 문덕황후(文德皇后, 태종의 황후, 장손씨)의 추복을 위해 승니 사원이 되었고, 함형 4년(673)에 승사(僧寺)가 되었다. 장안 3년(703) 화재가 있었으나 기진(寄進)이 많아 곧 부흥되었다. 절 안에는 정토원(淨土院), 단탑원(團塔院), 관음원(觀音院), 서원(西院) 등이 있었다. 단탑원의 북당(北堂)에는 3장 정도의 철관음이 있었고, 단탑 안에는 1,000부의 《법화경》이 보관되었다. 원인(圓仁)의 《입당신구성교목록》에 《자성사관음원벽상남악천태등진영찬(資聖寺觀音院壁上南嶽天台等眞影讚)》 1권이 있으며, 원진(圓珍)은 친히 이 그림을 모사해 가지고 왔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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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日早朝。還俗訖左街還俗僧尼共。一千二百卅二人。右街還俗僧尼共。二千二百五十九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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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8일, 이른 아침에 환속이 끝났다. 좌가에서 환속한 승니는 모두 1,232명이며, 우가에서 환속된 승니는 모두 2,259명이었다.註 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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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96 회창 2년 10월 9일조의 기사와 대응하는 것이다. 약 100일간을 지나 다시 정월 16일에 조칙이 발포되자, 이에 의해 17일에 좌우가공덕사가 첩문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날 장안 좌우가 소속 승니 중 나이든 사람 및 계행을 바로 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 환속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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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관군용사에서 공문이 와서 좌가 여러 절에 있는 외국 승려를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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廿八日早朝入軍裏。青龍寺南天竺三藏寶月等五人。興善寺北天竺三藏難陁一人。慈恩寺師子國僧一人。資聖寺日本國僧三人。諸寺新羅僧等。更有龜[A60]茲國僧。不得其名也。都計廿一人。同集左神筞軍。軍容衙院喫茶。後見軍容。軍容親慰安存。當日各歸本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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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이른 아침에 관군용사 아문(衙門)에 들어 들어갔다. 청룡사註 897에서는 남천축의 삼장 보월 등 5명, 흥선사(興善寺)는 북천축 삼장 난타(難陁) 1명, 자은사(慈恩寺)에서는 사자국(師子國)註 898 승려 1명, 자성사註 899에서는 일본국 승려 3명, 여러 절의 신라승註 900 등과 또 구자국(龜玆國)註 901의 승려註 902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알 수 없다. 모두 21명이 함께 좌신책군 군용(軍容)의 아문에 모였다. 차를 마신 후에 관군용사를 만났다. 군용사가 친히 우리를 위로하고 안심시켜 주었다. 그날 각기 본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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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97 청룡사는 좌가의 신창방(新昌坊) 남문의 동쪽에 있었다. 《장안지》 권9에 따르면 수 개황 2년(587)에 건립되었던 영감사(靈感寺)의 후신으로, 예종 경운 2년(711)에 청룡사가 되었다고 한다. 회창배불(會昌排佛) 이후, 선종 즉위 초기에 일시 호국사(護國寺)로 개칭되기도 하였다(《구당서》 권18) 그곳은 북쪽은 고원을 괴고 있고, 남쪽은 고조(高操)의 땅을 바라보는 조망가량(眺望佳良)의 지역이었다고 형용되고 있다. 그 고지를 桑原隲藏 박사는 서안 교외의 제대촌(祭臺村) 석불사(石佛寺)에 비정하였으나, 이에 대한 반대설도 있다. 중국학자에 의해 최근 유지의 부분적 발굴이 시도되었으나, 그 전모는 불명이다(《考古》 1964-7호) 일찍이 절 안에는 오도현(吳道玄)의 불화가 있었고, 헌종도 이곳에 행행하였다(《양경성방고(兩京城坊考)》 권3) 경내의 산림원(山林院) 및 동탑원(東塔院)에는 일체경장(一切經藏) 등도 있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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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98 Ceylon. 범명을 Simhala-dvipa(僧伽羅 또는 僧訶羅)라고 한다. 집사자(執師子), 사자윤(師子胤), 사자국(師子國) 등으로 번역한다. 사자국이라는 이름은 일찍이 《법현전(法顯傳)》에 기록되었고, 당 두환(杜環)의 《경행기(徑行記)》에는 “신단국(新檀國)”이라고 보인다. 송 이후 세란국(細蘭國), 실란(悉蘭), 서란(西蘭), 석란(錫蘭)으로 기록하였다 이들은 아라비아 사람 Seren-dib에 의거한 것이라고 한다. 사자에 대해서는 그 개국전설의 유래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11에 의해 널리 중국에 소개되었다. 《통전》에 “師子國東晋通焉”(권193)이라고 하였듯이 중국과의 교섭은 늦어도 동진시대까지 소급된다(《고승전》 권6 도융전, 권13 혜력전, 《양서》 권48) 원가 5년(428)에 국왕 찰리마가남(刹利摩訶南)이 사도인이백의(四道人二白衣)를 유송에 보냈고, 불아, 불상 등을 보내거나 계속해서 방물을 헌납하였다. 또한 승려가 내조하여 혹은 역경에 관여한 일도 보인다(《송서》 권97 만이전, 권5 본기, 《비구니전(比丘尼傳)》 권2, 《고승전》 권3 구나발마전, 《개원석교록》권5) 이 마가남은 실론사에 보이는 왕 Mahasena(334-362)에 해당한다고 한다. 법현은 410년부터 약 2년간 이곳에 머물렀고, 현장은 이곳에 가지 못했으나 무행(無行), 명원(明遠), 의랑(義朗), 규충(窺沖), 혜염(慧琰) 등이 이곳에 갔던 일이 전해진다(《대당서역구법고승전》)(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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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899 자성사는 원인(圓仁)이 장안에 있으면서 시종 머물렀던 사원이다. 좌가의 숭인방(崇仁坊)에 있던 거찰(巨刹)로, 본래 장손무기(長孫無忌, ?-659)의 저택이었다가 용삭 3년(663)에 자매였던 문덕황후(文德皇后, 태종의 황후, 장손씨)의 추복을 위해 승니 사원이 되었고, 함형 4년(673)에 승사(僧寺)가 되었다. 장안 3년(703) 화재가 있었으나 기진(寄進)이 많아 곧 부흥되었다. 절 안에는 정토원(淨土院), 단탑원(團塔院), 관음원(觀音院), 서원(西院) 등이 있었다. 단탑원의 북당(北堂)에는 3장 정도의 철관음이 있었고, 단탑 안에는 1,000부의 《법화경》이 보관되었다. 원인(圓仁)의 《입당신구성교목록》에 《자성사관음원벽상남악천태등진영찬(資聖寺觀音院壁上南嶽天台等眞影讚)》 1권이 있으며, 원진(圓珍)은 친히 이 그림을 모사해 가지고 왔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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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00 이날 좌신책군 군용아문에 모인 외국승은 모두 21명이다. 이 가운데 신라 스님은 10명이나 된다. 이 수는 좌가에 주석하는 스님만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우가의 스님 수는 알 수가 없다. 다른 외국승에 비하여 신라 스님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엔닌이 이름을 기록하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4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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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01 중국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신강성(新彊省)의 북쪽(타림분지의 북부지방)에 있던 나라이다. 지금의 고차(庫車)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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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ei 또는 Kucha이다. 중국에서는 굴지(屈支)·굴자(屈玆)·구자(丘玆)라고도 표기한다. 지금의 신강성 Kucha(庫車)를 중심으로 한 왕국으로 그 이름은 벌써 《전한서》 권6 서역전에 보인다. 구차는 코단(于闐)과 함께 동서 문화 교류 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음악과 미술을 비롯하여 불교 등은 중국 문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4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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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02 구자는 Kuci, 범어로는 Kuci 또는 Kucina라고 한다. 중국 이름으로는 그의 대역으로 구자(丘玆), 굴자(屈玆, 《신당서 권221 서역전)라고 한다. 또는 굴지(屈支)라고도 쓴다(《대당서역기》 권1) 현재 신강성 고차(庫車, Kuche)를 중심으로 한 왕국으로 그 이름은 일찍이 《전한서》 권66 서역전에 보인다. 당 초의 국정에 대해서는 《대당서역기》 권1에 그 개요가 있으며, 《구당서》 서역전, 《신당서》 서역전 등도 국정 및 당과의 관계를 약술하였다. 구자는 오아시스의 나라로서 우전과 함께 동서교류 혹은 문화교류의 중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이곳에 거주했던 민족은 아리야 인종으로, 예부터 백(白) 또는 백(帛)의 성을 가진 왕가가 통치하였다. 또한 중국에 왕래하는 서역인 중 백씨 성을 가진 사람 중에 구자국을 조국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다. 불교가 신봉되었던 연대는 적어도 중국보다 오래되어, 삼국시대에는 그곳의 승려가 중국에 와서 역경 및 포교를 하여 불교계에 큰 공헌을 남겼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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廿九日楚州新羅人客來。得楚州譯語[A61]劉慎言([□@考]言東本無)書一道。順昌阿闍梨([□@考]梨東國本作利)書一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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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 초주의 신라인 손님이 왔다. 초주에 있는 역어(譯語) 유신언의 서신 1통과 순창(順昌)스님註 903의 서신 1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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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03 원재(圓載)의 제자이다. 《속일본후기》 권13 승화 10년(843) 12월조에 “癸亥(9일) 入唐留學天台宗僧圓載之弟子仁好順昌 與新羅人張公靖等二十六人 來着於長門國”이라고 보인다. 이 서신은 순창이 귀국에 앞서 보냈던 것이다. 다음해 인호는 조정으로부터 원인(圓仁), 원재(圓載)에게 내리는 200금을 지니고 다시 바다를 건넜다. 순창도 또한 그 길을 함께 했다고 이해되나(《속일본후기》 권14 승화 11년 7월), 그 후의 소식은 불명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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