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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충렬묘비(統營 忠烈廟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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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1년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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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묘비(忠烈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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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임진년에 남쪽 오랑캐인 왜구가 배를 타고 떼지어서 쳐들어와 바다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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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에서 호남으로 가는 곳에 가로놓인 곳은 한산도요. 그 경계는 노량이며 그 좁은 곳은 명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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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한산도를 잃고 노량을 지키지 못하면 곧 명량이 위축되어 서울지방의 마음이 흔들릴 것이니 누구를 써야 능히 이 세 곳의 위험을 막겠는가? 곧 원후 통제사 이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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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임금님께서 직접 나에게 명하여 군사를 살피게 하시고는 출발할 임시에 하교하여 말씀하기를 ‘통제사 이순신은 나라에 충성하여 우리 남쪽지방을 호위하여 막았는데 우리가 복이 없어 불행히도 전사하였다. 내 사랑하고 가상하게 여기나 사당을 세우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충성을 권장할 수 없으니 그대가 가서 나의 명을 시행하라’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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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명을 받고 물러나와 여러 가지 제사 예전을 상고해 보니 ‘죽음으로 충성을 다했으면 제사를 모시고, 능히 큰 환란을 막았으면 제사를 모시니, 이것은 정절을 지킴이 있음이다.’ 라고 옛날 부서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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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어 생각하니 전란의 처음에는 공의 직책이 호남에 예속되어 벼슬아치로서 수비함이 한계가 있었는데, 나라의 위해를 깊은 수치로 여기고 이웃의 재난을 자기의 근심으로 여겨 남해를 넘어서까지 왜구의 진지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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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해전과 노량해전, 당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해전, 안골포해전에서 적의 전선 이백이십 여 척을 불살랐고, 머리를 벤 것이 오백 수십여 명이요, 물에 빠져 죽은 것은 또한 그 수를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공이 한산도에 진을 치고 있던 병신년까지는 적이 감히 공의 진지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원균의 패전으로 한산도가 패몰하자 수군의 장수는 패배하여 병졸들은 도망치니 남쪽의 백성들이 슬피 탄식하며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이통제사가 있었다면 어찌 적들로 하여금 호남땅 한걸음이라도 엿보게 하였으리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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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 급하게 밤에 공을 찾아서 다시 전직에 재임시키니 공이 홀로 말을 타고 와 군사들을 불러모아 명량으로 행군해 가다가 갑자기 밤에 습격을 당하여 약간의 군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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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척의 전함을 새로 모아 바다를 덮은 수만의 왜구와 싸워 적의 배 30척을 부수고 용기를 얻어 진격하니 적이 드디어 물러나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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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1598)에 명나라에서 크게 군사를 내어 와서 구원하니, 수군 제독 진린이 공과 진영을 합하였는데, 공의 전술을 기이하게 여겨 반드시 이야(李爺 어르신)라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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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늦은 겨울에 적군이 합세하여 대 함대가 노량에 진격하니, 공이 스스로 민첩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선봉에 서서 싸웠다. 또한 명나라 군사와 함께 협공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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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닭이 울 무렵 왜구가 어쩔 수 없이 길을 여니 풍신이 위세를 거두어 사방이 고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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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중앙을 벗어나 두 군영이 일제히 일어나니 일천 척의 적선이 날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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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먼저 뛰어들어 예리하게 무찌르니, 적이 이에 개미떼처럼 무너져 죽음을 구함에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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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북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도 장수의 별이 광채를 감추었으니, 공이 새벽녘에 적의 탄환에 맞아 넘어지면서 오히려 군중에 경계하여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우리 군사의 사기를 꺾지 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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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 진린이 이 소식을 듣고 뱃전에 자기 몸을 세 번이나 부딪치며 말하길 “이제는 가히 더불어 일할 사람이 없구나.” 하였고, 명나라 군사들도 고기를 물리치고 먹지 않았으며, 남쪽의 백성들은 분주하게 골목에서 울며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고, 늙은이나 젊은이나 길을 막고 울었으니 가는 곳마다 한결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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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공과 같은 이는 참으로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고 능히 큰 환란을 막은 사람이라고 말할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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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그 공훈은 원훈공신이 되고, 벼슬은 재상이 되고, 식읍도 봉하여 주고, 기린각(충신열사의 화상을 모신 곳)에 모습을 그려 모시고, 식록으로 보답함이 무궁하여야 하며, 또 후세의 영웅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분개의 눈물을 뿌리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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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진실로 천고에 기릴 만하거니와 하물며 나는 임금님의 명을 받아 직책으로 남쪽을 담당하였으니, 감히 잘 도모하지 않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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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통제사 이시언이 말을 듣고 감격하여 실로 이 일을 주장하였으니, 무릇 군중의 장교나 군졸들은 공의 덕을 입은 자들이라 임금님의 은택에 춤추고, 공의 죽음에 강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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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당 짓기를 시작하니, 이 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어 연장을 번개처럼 휘둘러 열흘이 못되어서 대목이 공사를 끝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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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십오 년 만인 갑인(1614)년에 해서 절도사 유형(제5대 통제사)이 편지를 보내와 전하기를 “노량대첩의 일을 공의 사적비에 기재하여 후세에 영원토록 전하기를 원한다.” 하니, 내 말하기를 “공의 덕이 남쪽의 백성들에게 있는 것은 구비가 없어지지 않았음이요. 공의 공적이 사직에 있음은 역사가가 기록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비를 세우리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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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가 집안일 처리함에 있어서는 외로운 조카를 사랑하고 어루만지길 자기 자식처럼 하는 사랑은 안으로서 순후함이요, 수년 동안 군문에 있으면서 크게 어장과 염전을 개간하고, 넓게 둔전을 베풀어서 군사들의 양식이 모자라고 떨어지지 않게 하고, 전공을 세워 얻은 포상은 남김없이 부하들에게 베푸니, 이것은 밖으로의 구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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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하고 평이한 덕, 뛰어난 재주, 형벌과 포상을 반드시 마땅하게 함과 용감한 사람을 만듦이 이와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충분히 영원토록 사람들에게 전할 만하나 공에 있어선 조그만 절의가 되니 가히 생략한다.(명의 해석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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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대왕이 위로 황제의 위엄에 기대고, 아래로 공의에 의지하여 그가 중흥한 위대한 업적이 이제 빛나고 있으니 옛 진원(晋元) 송고(宋高)도 칭송함에 미치지 못하리라 (이상은 이항복이 지은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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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돌아가시자 임금이 문충 이공에게 명하여 묘우를 건립하라 하시니 이공이 만력 갑인년(1614)에 비문을 지었는데 지금 통제사 민섬(제60대 통제사)이 비로소 돌에 글자를 새기고, 이수(뿔 없는 용이 새겨진 비머리)와 귀부(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도 갖추니 지난 갑인년으로부터 여섯 갑자를 한 바퀴 돌고도 또 7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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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통제사가 몇 번이나 바뀌고 이에 지금 그 일을 마치니 그 늦고 빠름은 운수가 있는 것이지만 아마 민 통제사의 의절을 사모함이 무궁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이에 미치리오. 자못 가히 숭상할 만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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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진나라 원제와 송나라 고종은 저 조예주(진나라 명장 조적)와 악무목(송나라 명장 악비)을 쓰지 못하여 마침내 천고의 한이 되었지만 우리 거룩하신 선조께서는 능히 공을 써서 공으로 하여금 탁월한 공로를 세우게 하였으니 공도 실상은 그리 불우했다고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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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충공이 없었던들 그 누가 능히 이같이 그를 드러낼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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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통제사도 역시 옛날부터 일러오는 소위 ‘좋은 짝패’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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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 신유(1681) 입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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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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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묘비는 현재 통영충렬사에 세워져 있음
【원문】통영 충렬묘비(統營 忠烈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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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宋時烈) [저자]
 
  이항복(李恒福)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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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4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