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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충사비문 (酬忠祠碑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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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이병모 / 서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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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충사비문 (酬忠祠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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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有明朝鮮) 사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 부종수교(扶宗樹敎) 보제등계존자(普濟登階尊者) 서산(西山) 청허당(淸虗堂) 휴정대사(休靜大師) 수충사비명(酬忠祠碑銘) 서문을 병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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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헌대부(資憲大夫) 행 평안도관찰사(行平安道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都使) 도순찰사(都巡察使) 관향사(管餉使) 평양부윤(平壤府尹) 이병모(李秉模)가 찬술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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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영변대도호부사(行寧邊大都護府使) 영변진병마첨절제사(寧邊鎭兵馬僉節制使) 서영보(徐榮輔)가 글씨를 썼고 아울러 전액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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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莊周)가 이르기를, “자식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은 명(命)이니 마음속에서 해이하게 할 수 없는 것이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의(義)이니 하늘과 땅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피할 곳이 없다.”고 한 것은 곧 어느 곳에서든 이 의(義)가 없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이 의에는 고금귀천(古今貴賤)의 구별도 없고 유가(儒家) · 묵가(墨家) · 명가(名家) · 법가(法家) · 도가 · 불가의 구별도 없으니 없는 곳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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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釋氏)는 군신도 무시하고 천하국가도 도외시하였다. 그 법이 그러하지만 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법은 사람에게서 나오고 이치는 하늘에 근원하고 있으므로 사람은 하늘을 이길 수가 없고 법은 이치를 이길 수 없으니 거스르고 따르는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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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지(夷之)는 묵자이면서도 그 부모를 후장(厚葬)하였고, 진량(陳良)은 초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주공(周公)과 중니(仲尼)의 도를 즐거워하였다. 또 몽장씨(蒙莊氏)가 성인의 지혜를 멸절시키고자 하였지만 인의는 미루어 제시하였으니 올바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이와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의해 불가의 법도 이치가 이겨서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서산대사의 일에서 단연코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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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서산은 그 애초에는 역시 자기 학문에 종사하여 구름과 물을 자기 집으로 삼았고 병과 바리때를 가풍(家風)으로 삼고서 당시의 다스려짐과 혼란, 얻음과 잃음을 아득히 먼 곳에 일어나는 것으로 담담히 바라보며 자기 마음을 움직일만한 것이 못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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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임진년 왜구가 노략질하여 임금이 서쪽으로 몽진하시는 데 미쳐서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물었을 때 도망할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스님은 마침내 칼을 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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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용만(龍灣) 가로 쫓아가서 임금을 알현하고서 흐느껴 울며 줄줄 눈물을 흘렸다. 그가 흘린 눈물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비 때문도 아니었다. 충성이 마음속에서 발동하고 의리(義理)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요 그 천성이 드러났던 것뿐이다. 이때를 당하여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칠 군사들이 아직 모이지 않았고 요수를 건너는 선봉군에 먼저 탕진되어서 숙위가 홀로 비어 있어서 큰 적이 주위에서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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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스님만이 능히 먼저 용기를 독려하여 의병을 거느리고서 바삐 선후를 아뢰게 하였다. 군사들은 이익에 붙은 것도 아니고 병사들이 이익을 꾀한 것도 아니다. 공문(空門)의 겨우 얼기설기 엮은 무리들을 몰았는데 그 인원이 싸움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날로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오히려 참수한 적의 목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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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꺾여 도망한 적이 없으니 삼도가 회복될 수 있었다. 이는 스님과 공이 있는 사람들은 다만 의의 소리를 듣고 그것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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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일이 바로 당시에 병기를 가지고도 조회하지 않고 성을 버리고 살기를 보존하는 자가 또한 있었다. 사녀(士女)들은 저 조야로 도망하여 왜적을 피하였다. 그러므로 스님과 같이 고요히 산림에서 세상 일하였던 적도 책임도 없던 자가 비록 도망하여 깊은 곳에 숨거나 엎드려 있더라도 그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인데 필시 눈물을 흘리거나 분주하거나 힘꺼 싸우고 나서야 이내 그 마음의 편안한 것을 얻으니 무엇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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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이른바 도망할 수 없는 의가 있고 풀 수 없는 사랑 때문이 아니겠는가. 세상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목릉(穆陵)이 일찍이 스님보다 덕이 있어서 얽어매어진 재앙을 벗어났으므로 스님이 감격하여 보답하고 한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본질적인 논의가 아니니 어찌 군신 간의 그만둘 수 없는 큰 윤리에 대하여 족히 더불어 논할만 한 것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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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 보건대, 스님은 본관이 안주(安州)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고 자호(自號)는 청허자(淸虛子)였고 서산(西山)은 그의 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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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西山)은 향산(香山)이다. 태어난 뒤에 신인( 神人)께서 그의 정수리를 어루만져 주셨고 조금 더 장성해서는 풍모가 영걸하고 빼어났다. 어려서도 지성(至性)이 있어서 부모님을 여윈 뒤에 부처님의 말씀에 감동한 바 있어서 드디어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서 국내의 이름난 산수를 두루 돌아다녔다. 일찍이 여립옥(汝立獄)이 있었으니 목능(穆陵)이 그 거짓을 살피고 출가하는 증거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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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고(詩稿)를 올리니 임금께서 어시(御詩)와 어화묵죽(御畵墨竹)를 하사하여 그것으로 그를 총애하고 가상히 여기는 매우 두텁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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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난이 일어났을 때 스님이 용만으로 나아가 상을 알현하자 상이 말하기를, “근심이 깊구나 어떻게 나를 도울 것인가”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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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흐느끼며 말하길, “나라 안의 승려들은 병이 들어 싸움에 참여할 수 있는 임무를 맡을 수 없을 것이니 있는 것에서 분향하며 기양제를 닦도록 하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그것을 허락하고 그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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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제자(弟子) 유정(惟政)이 관동(關東)에서 일어났고 처영(處英) 이 호남(湖南)에서 일어났다. 스님이 스스로 모집한 것과 문도들이 합세한 것이 5천 여명이 되었으니 순안(順安)의 법흥사(法興寺)에 모여서 천병(天兵)과 늘 경쟁적으로 넘어 들어가니 평양(平壤)이 드디어 수복되었다. 삼도(三都)에서 선비 100명을 뽑아서 호가(扈駕)하려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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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天將) 이제독(李提督) 이하로 첩을 보내지 않은 적이 없는데 삼가 군환을 위로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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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는 상에게 아뢰기를, “신은 늙었습니다. 진실로 근력이 없어 예를 행할 수조차 없습니다. 청컨대 군사를 유정(惟政) 등에게 맡기고 향산(香山)의 옛날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총섭인(摠攝印)을 바치고 물러나기를 더욱 힘껏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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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그의 늙음을 가련하게 여기고 또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리고 그를 예우하여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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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은 월사(月沙) 이상국(李相國)이 찬술한 비문(碑文)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여기서는 갖추어 논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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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연세가 85세였고 법납(法臘)은 67세였다. 가부좌를 하고 설법하면서 돌아가시니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으니 영험한 뼈 사리 신주의 응함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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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70여인인데, 그 중에서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이 가장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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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惟政)은 곧 세상 사람이 일컫는 바 송운대사(松雲大師)이다. 임진년 이후로 왜인은 화를 일으킨 것을 후회하고 외국과 잘 지낼 수 있도록 하여 옛날의 호의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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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海途)는 멀고 험하며 섬 오랑캐들은 교활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고자 하여도 뽑을 만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웠다. 그 적임자는 송운이니 이내 석장을 날려 만리를 항해하며 예측할 수 없는 못으로 달려들어가 위신을 보이니 왜인들이 크게 탄복하였다. 마침내 요령을 얻어서 돌아오니 조정에서는 그 노고를 기록하여 밀양(密陽)에 사우를 세우고 표충(表忠)이라 이름하였다.
 
29
당저(當저) 기유(己酉)년에 휴정(休靜) 스님을 해남(海南)에서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국가(國家)에서 충을 장려하는 법도 점차 갖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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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香山)에서 스님이 걸어두었던 불자(拂子)는 주지(住持)가 있는 곳에 있고 병을 끌고서 베었던 수급도 이 고을의 경계에 있다. 어려서는 삭발하였고 늙어서는 돌아와 묶었다가 적멸하신 곳도 모두 이 산을 떠나지 않는데 오히려 한 사옥도 건립하지 못하였으니 비록 일의 손익이 아니라 하더라도 끝내 어쩔 수 없이 승과 속이 끊어지는 것은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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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癸丑)년에 관찰사(觀察使) 신(臣) 병모(秉模)가 行 部 至山 見 승도들이 사옥(祠屋)을 지어 옛날 내원에 있던 스님의 초상을 옮겨 거는 것을 보게 되어 이내 장계로 사액해 줄 것과 관에서 제수(祭需)를 줄 것과 아울러 유정(惟政)을 제사지내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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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께서 그것을 특별히 윤허하시고, 사액(賜額)하기를 수충(酬忠)이라 하고 신에게 비문을 찬술할 것을 명하시니 부처님 나신 날에 초상에 제사를 드리고 예관(禮官)이 겸사(兼史)로서 부근 산에 이르르니 수령이 모두 다 집사(執事) 선문(禪門)과 함께 자리를 메어 옹립하였으며 사부대중들이 손뼉 치며 반겼다. 그러므로 영과 읍이 힘을 모아서 역사를 도와서 규모가 크게 갖추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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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스님이 절개를 다하였던 것과 국가가 그 공에 보답하는 것이 둘 다 유감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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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가들이 장이(張耳)의 현명함을 일컬을 때 그의 빈객들과 하인들이 모두 빼어나고 걸출하여 천하의 장상이 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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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처영(處英)과 유정(惟政)도 마찬가지로 스님들 중 영웅이요 한 시대의 위인들인데도 종신토록 스님에게 복역하였으니 스님의 현명함은 어찌 물을 필요가 있을까. 아쉽구나. 괴기(魁琦)하여 남다른 자질로 일찍이 상문공고(桑門空苦)의 학을 일삼았다. 비록 한 때를 만나 한번 떨쳐 일어났으나 그 기이함을 대략 보더라도 세상에 어디에 쓰일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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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부처님 앞에 패(牌)를 두시고 성상의 장수를 늘 빌었으며 이를 향산의 스님들은 지금까지도 행하고 있으니 어떤 사람이 하나의 수기를 가지고 와서 밥 먹을 때마다 펼친다고 하니 적개심(敵愾心)을 잊지 않도록 보여주고자 하기 위한 것이니 대개 스님의 풍모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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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銘)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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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西嶽)이 하늘을 찌르고 금 같은 정기는 깊고 깊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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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모여 이인(異人)을 낳았으니 승도의 준걸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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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 학이 크게 퍼져 있고 팔표(八表)가 두루 한 순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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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산(蓬萊山)에선 저녁을 묵었고 방장산(方丈山)에는 아침에 도착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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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어보니 초에 절인 닭 꼴이로군 묵묵히 한번 씩 웃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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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마(薩摩) 고을 사람들이 창을 잡고 침범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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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강역을 밟고 우리의 노인과 젖먹이들 포로로 잡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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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이때 떨쳐 일어나 장검을 잡고 나아가 임금을 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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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만에서 뚝뚝뚝 눈물을 떨구고서 충성된 붉은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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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무리 불러 모아 우뢰처럼 재빠르고 번개처럼 신속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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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도피(稻피)를 벗고 갑옷을 입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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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버리고 병기를 잡아라. 너의 창날을 갈고 병기를 굳게 잡아라.
50
산과 계곡 다 울렸네. 법흥(法興)의 회전에서 모란 잎 같은 진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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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만나면 패주하니 크게 짓밟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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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구나. 삼도는 모두 다 소탕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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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같이 큰 경관이 이미 지어지니 임금의 수레는 문득 서울로 향하는 도다.
54
개선의 날에 홀연히 도장을 바치고 늙어서 물러나겠다고 간절히 바라네.
55
상도 측은히 여겼다네. 나가는 데에는 의롭게, 물러날 적에는 용기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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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마다 법도에 맞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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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송운이 있으니 고제의 어려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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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곳 왜국에 가서 풍모로서 위신을 보여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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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南蠻)이 조약을 맺어 영원히 국경 싸움을 끊으려하네.
60
스승과 제자 두 사람 모두 충성을 다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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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름답구나 성조(聖祖)께서 포장하시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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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임금께서도 감동받아 사전에 유감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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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海南)과 밀양(密陽) 사옥(祠屋)은 우뚝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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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치르는 이 곳에서의 의례는 경계에 나아가 더욱더 친근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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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패(梵唄)의 남은 음 풍모와 꾀는 다하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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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사액이여 영예는 겉옷을 입은 듯이 가리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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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긴 초상은 당에 있으니 늠름하기가 꽃과 같구나.
68
아아 이 서쪽 사람들이여 우러러 알아야 하네.
69
각각 너의 충성을 다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경건하고 신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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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보주와 같이 산문진(山門鎭)을 만드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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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병기은 다 없어졌어도 나라의 위엄은 더욱 떨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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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금(南金) 대패(大貝)는 우리 침신(琛신)으로 돌아오네.
73
우리에게 복을 주고 우리를 장수하게 해주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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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풍년이 들어 아 천만년 봄에 우리 요순(堯舜)을 빌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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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 20년 병진년(정조 20, 1796년) 4월 일에 비석을 세웠다.
【원문】수충사비문 (酬忠祠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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