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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가장 슬프고 또 아름다웠던 작가 김유정군이 죽은 지 어언 3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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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고의 군을 구원코자 나 초라한 힘으로 문단을 격하여 금품을 모으기에 이 한 몸을 바쳤던 그 시절의 기억이 어제 같은데 벌써 나는 두 달 전에 고 군의 2주기를 제사하는 눈물겨운 하룻밤을 나 혼자의 여숙에서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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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의 그때의 조선과 오늘의 조선! 불과 3년간 조선의 역사는 1세기를 거친 관이 있구나. 이 3년간 동안의 질서가 어떻게 뒤바뀌고 세계의 풍운이 바야흐로 인류의 문화사를 어떻게 재편찬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영원의 나그네로 떠나간 군은 — 그러기에 그는 벌써 하나의 고전이 아니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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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화한 그 김유정군에게는 실인즉 말못하게도 참혹하고 또한 거룩한 숨은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여성”사에서 나를 잡아 거듭 거듭 부탁하기를 이 연애를 공개하여 만천하 여성에게 교훈적인 비판을 해달라는 것이다. 하고보니 비록 시대는 이같이 어지럽게 뒤바뀌어졌을지라도 그의 인간적 존재가 이미 고전으로 등록되었다면, 그의 숨은 사랑을 이제 새로이 한번 들추어 풀어 보는 것도 결코 의의없는 주문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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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래 나는 연애의 경험도 견식도 없는 한 젊은 사나이이기 때문에 교훈적인 비판은 커녕 내 개인의 감상을 공개할 자격조차 없음을 알고 이리 저리 회피했으나 편집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어차피 한 마디 중얼대지 않고는 면할 도리가 없게끔 된 것이다. 그러니까 독자 제자는 이 글을 연애 교과서의 일절로 보지 말고 차(茶) 시간의 한 토막 잡담으로 알고 읽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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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뜻하지 않고 죽은 지 3년 밖에 안되는 김유정군을 역사상의 고전적 인물로 받들어 올렸지마는 군의 연애는 그야말로 에누리 없는 하나의 고전으로 보지 않고는 해석할 수 없을 만큼 그만큼 시대를 초월한 영원의 그 무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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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여러분 주에도 도대체 김유정이라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알고 싶어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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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히 아름다운 여인으로서의 김유정 또는 김유정의 그 아름다운 문학에 관해서는 과거 여러번 문단계의 지상에서 논평한 일이 있기도 하니 두고 그의 사회적 위인 자태에 대해서 한 마디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군은 강원도 춘천서 손꼽히는 명문호가에서 태어난 미남자로서 어려서 부모와 재산을 잃고 탕자요 부랑자인 그 형 밑에서 고생 고생으로 여기 저기 전문학교까지 몇 달씩 다녀 보았으나 나중에는 다 집어치우고 천애의 고아가 되어 오랫동안 원한의 청춘을 방랑하다가 타고난 문학적 천분을 속이지 못해서 드디어 혜성의 형용이 부족다 싶어 문명을 일세에 높이다가 폐병을 얻어 삼십을 일기로 애처롭게도 요절한 조선문학사상의 지보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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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이 많되 김유정만한 사람은 드물고,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많되 유정만큼 불쌍한 사람도 드물었다. 군과 반면 밖에 더 사귀지 못한 내 지식으로써라도 그의 인간애사를 기록하다면 족히 3, 4편의 장편소설을 이룰 지경이니 이 짧은 원고 토막에서나 어찌 군의 그 슬프고 억울하고 또한 성스러운 인생의 만분 일인들을 전할 수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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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명창 박녹주(朴綠珠)가 옛날 무명 시대의 김유정군의 사랑의 대상이었다면 아마도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년전 나는 대구 모 요정에서 그때 마침 명창대회로 내연한 박녹주를 초청해서 하룻밤 호유한 일이 있었다. 이 역시 천하의 명창인 오태석(吳太石)이 동도한지라 그날밤 동 요정 객실에 불려온 기생 30여명은 일제히 내 방으로 몰리어 왔으니 박녹주 덕에 나도 평생 큰 놀임을 한번 해 본 것이 아니라 사실인즉 김유정 덕에 30명 기생을 무료로 한 방에 모아 본 셈이다. 라고 하는 것은 군이 죽은 즉후의 모일 나는 군의 친우인 모군으로부터 유정이 녹주를 연애했다는 기문을 듣고 기회 있으면 한번 녹주를 찾아가든지 해서 그 진상을 좀 이야기 듣고자 했던 것인데 마침 내가 대구서 어떤 돈을 쥐었던 그 때에 녹주가 왔다기에 천재일우라 나는 요정 주인과 특약하고 곧 교섭을 시작한 결과 하루 저녁 그를 독점하기에 성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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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명 개평기생은 오태석의 가야금병창에 맡기고 나는 대(大) 박녹주 여사를 구석으로 모셔 와서 한 잔 먹은 기세로 대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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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김유정이란 소설 작가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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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물었다. 하니까 약간 얼굴에 미소로운 긴장을 띄우면서 답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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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조에서 벌써 나는 여사를 초청한 것이 허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기뻐하는 동시에 초면의 박녹주가 조선서는 제일류의 여류 교양인인 것을 직감하였다. 혹 그는 “소리”외에는 한글도 모르는 무식자인지 아닌지 내 알 바 못된다.…… 그 말 한 마디에 윤색된 무형의 화성학적 감정에서 나는 이 여자가 인간으로서 제일류의 교양을 선천적으로 쌓은 사람인 것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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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 때의 녹주가 “그까짓 자식 나는 모른다”는 기색을 저도 모르게 언어의 어느 일면에 비추었더라면 나는 유정을 위하여 크게 슬퍼했을 것이다. “군아! 어쩌면 이런 악녀를 사모했던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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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녹주의 “그이가 죽었다지요.”라는 그 한 마디의 표현 감정과 언어 분위기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느껴 얻을 수가 있었다. 즉 나는 (녹주) 조카뻘 밖에 안되는 유정이란 그 때의 소년을 잘 모른다. 그러나 유정은 지극히 순정스러이 나를 사모한 것 같았다. 자꾸 편지질을 하기에 한편 귀엽기도 했고 너무 엉터리가 있어서 다소 귀찮기도 했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퍽 원망스러웠으나 그만큼이라도 문명을 날리고 갔으니 그것만이라도 고맙고 느껴운 일이다. 아, 인생이 일장춘몽일진대 이 자리의 내몸, 어찌 굼 아님을 보장하리. 그래 보아하니 그대는 유정씨의 친구이시구려. 이제서 원망한들 무삼하리오. 한 잔 술로써 인생된 불행이나 한탄 합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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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나는 이만한 감정을 그 한 마디 말의 음율에서 인상해 냈다. 나는 별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가서 캐기가 싫었다. 기다리고 있으리려니까 과연 여사의 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한 마디가 저절로 울리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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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번씩 편지를 받은 일이 있어요.” 나는 길게 숨을 뽀아 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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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과 30명의 군화(群花)로써 입추의 여지도 없는 그 방 한 구석에서 외로이 나는 고군의 고독을 자작으로써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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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고독지옥을 헤매고 다녔던 군은 자연 보통 이상으로 사랑을 추구하였다. 죽을 때까지 군은 순차로 꽤 여러 여성을 사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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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여히 군의 연애는 신성했고 정신적이었다. 육체 일원주의요, 물질만능주의인 오늘의 세태에 처한 청년으로서 군은 확실히 하나의 기적적인 연애의 실천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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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사한 것만 해도 군은 그의 젊은 일생을 통하여 5, 6인의 짝사랑의 대상을 남기었으나 그 중에도 전기 박녹주의 사랑은 군의 소년 시대의 대표적 연애이며 다음에 말할 박○○에의 짝사랑은 드디어 군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을만큼 군의 일생을 통해서 대표적 연애였다. 내가 “여성” 독자에게 비판적으로 소개코자 하는 바는 보다 더 후자에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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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인공 ○○는 지금도 아이의 어머니가 된 현숙한 처이지마는 그 당시는 모 여전을 나와서 오랫동안 어떤 정신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순량한 노처녀였다. 이 여성을 어느 잡지 기사에서 알고 우리의 가엷은 김유정은 크게 느낀 바 있어 드디어 그에게 사랑을 구하는 운명을 지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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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나 고독한 처지에 있었던 유정은 미모는 아니나마 지상에서 본 이 소박한 여성을 하늘이 정해준 자기 인생의 구세주로 믿고 이에 생령을 다 기울여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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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단식하고 목욕하여 몸과 마음을 한없이 깨끗게 해서 미지의 그 처녀에게 보낼 글월을 장만하였다. 그는 하얀 도화지로써 제 손으로 봉투를 만들고 종이로써 편지를 만들어선 글자 한 자에 5분간씩 기산을 들여 활자보다 더 정묘한 서법으로 피땀을 흘려가면서 때로는 철야 수일하여 겨우 편지 한 장을 창보해 낸다. 유정의 이 구애서한이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그의 생명의 조각이 아니면 아닌 것이다. 천하무쌍의 러브레터를 찾는다면 나는 주저치 않고 유정의 편지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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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어떠냐 하면 거기는 “아이 러브 유”하는 류의 문구는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지극히 순박하고 성스럽고 또한 평범한 그것이었다. 군은 미견의 그 사랑의 대상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반드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저 자신을 가장 겸허한 위치에 두고 마치 소녀가 성모마리아에 대하듯이 지성과 존경을 다하여 맑고 높은 정열의 최선을 경주한 것이다. 이리하여 한 장 편지를 쓰고 나면 으레히 군의 체중은 몇 백 그람씩 줄어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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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편지를 몇 달에 걸쳐 선후 31통을 써서 그 중 30통이 발송되었다는 것이 그의 사후 비장의 그의 일기장에서 알리어졌다. (보내지 않고 둔 한 통은 내가 지금 보물과 같이 보관하고 있다.) 군은 이 30통의 자기서간문을 횅하게 다 외우고 있었다. 어느 달 어느 날치는 이러 이러 — 하고 어느날 밤에 띄운 것은 이러 이러하다는 것을 첫 자부터 끝 자까지 다 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하의 기연인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그는 그의 성모마리아 박○○선생을 소중하게 느꼈다. 31통 편지 전문에는 물론 여하한 종류의 불순과 불결의 요소도 없었다. 거의 30세가 된 현대 청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만큼 성동의 모습을 오로지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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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성에 대해서 상대 성처녀로부터 돌아온 반향은 무엇일까? 놀라지 말지어다. 오직 “무(無)” 그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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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절 편지를 한 번이라도 했었는지 안 했었는지 그것조차 알 길이 없었다. 석불한테 전보친 것과 마찬가지로 어떻다는 소식이 전혀 없었으니 간장 탈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무교육한 구습 가정의 규중소녀라면 모르거니와 신교육을 받을대로 받고도 매일 종로 네거리를 활동하고 다니는 30 노처녀, 아무리 남자한테 무관심하다 할지라도 그에게 날아들어온 편지가 일개 불량 소년의 발작적 작난이 아닌 것쯤은 일견해서 모를 바 아니었을 것이다. 하물며, 직업상 신문 잡지를 늘 살피었을 그가 봉투 이면에 당당히 적힌 바 모정 모번지 김유정 재배란 이 소설가 김유정의 이름을 몰랐을 리 만무했음에랴. 그도 한 두 번으로 끝났다면 그만일지 모르나 피를 토해 가면서 1년을 하루같이 성의로써 그같이 존귀하게 그를 모셔 올린 데 대하여 만약 자기에게는 그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주관적 또는 객관적 사정이 있었으면 한번쯤은 그의 오빠를 통해서라도 한 마디 거절의 인사를 보내는 것이 인정이 아니며 숙녀의 예의가 아니었을까? 하물며 그 오빠는 유정과 인사는 없었을망정 문단에 이름을 둔 시인의 한 사람이었음에 있어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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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의 얼굴을 한 번 보지도 못하고 그같이 열렬히 사랑하다가 죽고 만 김유정도 보통 사내는 아니거니와 그를 죽이기까지 무구무신경했다는 근 30의 신 여성 박○○도 보통 처녀는 아닌 것 같다. 이를테면 둘이 다 고전적인 인간이면서도 이 두 고전간에 상이(相異)는 전자 김군이 희대의 가련한 성동인 데 대해서 후자 박양은 적어도 유정에 관한 한 그는 백지에 가까운 희세의 순녀란 판단을 면할 수 없다. 30통의 편지를 받았으니 마음에 없으면 응당 귀찮기도 했을 것이다. 보통같으면 그 편지 받기가 귀찮아서라도 한 마디 호의는 고마우나 사정이 불허하니 단념해 달라. 라는 뜻을 전달해서 자기의 입장을 명시했을 것이다. 열장, 스무장 해도 답이 오지 않으니 유정은 점점 더 낭만적으로 상대자를 그리게 되어 “옳지, 마음으로는 완전히 내 사랑을 받으면서도 원체 수줍고 심각한 처녀의 위인과 입장이라 감히 답을 못하는 가보다!” 하고 그의 정열과 번민은 높아갈 뿐이었으니 이는 피차간에 비극이요. 또한 희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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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은 김유정! 만약 군이 한번이라도 ○○란 노처녀의 얼굴을 보았더라면 군은 그 자리에서 환멸을 느끼고 그를 단념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신은 끝까지 유정에게 잔인하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실물을 못 보고 죽은 유정이 혹은 행복이었을지도 모르나 하여튼 군은 환상상에서 연애를 창작한 것이다. 실재 인간을 떠나서 그는 하나의 성스러운 여인을 그렸던 것이다. 허나 결국 이 연애로 말미암아 죽은 것을 보면 그의 성녀 창작은 결코 유희가 아니었던 것만 증명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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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서는 아직까지도 김유정을 단순히 폐병으로 죽은 줄 알고 있다. 죽기까지는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부고를 받은 수일 후 우연히 나는 춘원 선생댁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아네 유정의 죽음에 숨은 로맨스가 엉키어 있었음을 직감하였다. 선생은 결코 저만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직감은 군의 로맨스의 상대자가 누군가까지를 지적해 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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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군과의 약혼을 어느 잡지 소식란에서 안 유정은 그날부터 공중에 쌓은 연애를 일조에 파괴하는 동시에 생명을 조각한 예의 그 편지를 중지했다 함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한 가지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은 진실로 중지한 그날부터 유정은 술로써 이내 청춘을 불사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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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 고통! 불면, 자조, 허무, 허무 — 적빈의 군은 피를 짜서 팔아서라도 막걸리를 사 마시었다. 친구를 만나면 반드시 술을 강요하였다. 나도 군의 이면사정은 전연 모르고 몇 번 없이 술을 받아댔다. 당연 건강은 날로 날로 좀먹어 들어갔다. 박○○양과 모군과의 결혼식이 시내 모 예배당에서 거행되던 날 낙백의 예술가 김유정군은 결핵성 치질을 겸한 폐병 제3기의 중환을 충신정 어느 셋방에 혼자 앓고 있었다. 결핵균이 충만한 이 좁은 방에는 거만의 재산을 낭비하고 행방불명이 된 지 오랜 군의 형의 부인과 부인의 소산인 두 조카와 전부 네 식구가 비통한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그 때의 유정의 방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구원을 구하는 유정의 서신을 받고 비로소 나는 오래 소식이 없던 군을 충신정으로 찾았었다. 내가 문단을 총동원시켜 금품을 모집했다는 것은 처음으로 찾아간 이날부터 약 20일 간에 전개된 — 나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눈물겨운 그 시절의 일이다. 나는 수백원의 돈을 군에게 전달할 수가 있었으나 구더기 끓듯 끓는 채귀들 앞에는 탄 들에 물방울 떨어뜨리기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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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병쟁이 송장치기가 싫다고 나중에도 집주인으로부터 쫓겨난 김유정은 제4기적 중환태의 몸을 버스에 실어서 가난한 먼 일가를 찾아 광주로 내려갔다. 그때 동행한 사람이 아마 군의 죽마고우인 안회남과 그리고 박○○에의 연정을 알린 유일무이의 심우 현덕(玄德)군(유정 사후에 신진작가로 등장한)과의 두 사람이 아니었을까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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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광주로 내려간 지 얼마 후에 유정은 시체가 되어 영구차로 서울로 돌아왔으나 머무를 곳이 없어서 그 길로 바로 화장장으로 몰아 갔다. 일대 청년예술가 김유정군은 한 웅큼의 뼈가 재로 변하였으나 이 뼛가루를 용납할 한 평의 토지를 세상은 군에게 허락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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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장에서 나온 골분의 김유정은 한강수 깊은 물에 둥둥 소리없이 떠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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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빈(貧)한 예술가가 많았지마는 죽어서 강물에 떠내려갔다는 예는 아직 듣지 못했다. 무덤없는 김유정! 한이 있기로서 이 위에 더한 한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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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지날 때마다 나는 여기에 김유정의 원혼이 떠돌거니 하고 부지중에 합장하는 수가 많다. 그는 연애만이 낭만적이 아니고 죽음까지도 낭만적이었다. 허나 그 어찌 뼈아픈 낭만이었으랴! 과연 이만큼 뼈 아픈 리얼리즘이 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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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녹주와 박○○, 일은 기생이요 일은 위지(謂之) 신여성이다. 한 기생이 말없이 소년 김유정의 예술혼을 북돋았는데 대해서 고등교육을 받은 한 신여성이 말없이 성장한 동군을 한강수 깊은 물속으로 몰아 넣었다 하면 교육의 의의가 어디 있으며 기생이 천하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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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아! 총각혼신 김유정군아! 노도 소리없이 언제까지나 구 강을 떠내려 가려무나. 한번은 녹주, ○○가 둥둥, 소리를 높이 하여 서쪽 바다 넓은 황해에서 너를 대하는 날이 있으리니. 그는 모지에 이런 글을 쓴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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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숙명적으로 사람을 싫어합니다. 사람을 무서워 한다는 거이 더 적절할는지도 모릅니다. 그 버릇이 결국에는 말 없는 우울을 낳았습니다. (중략) 그러면 다음에는 이 몸이 죽어 죽어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낙장송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 청청 하리라, 의 그 봉래산 제일봉이 어딜는지 그 위에 초가삼간 집을 짓고 살아보고 싶습니다. 많이도 싫습니다. 단 사흘만 깨끗이 살아보고 싶습니다. 단 사흘만 깨끗이 살아보고 싶습니다.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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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절을 보아도 군이 생전 얼마나 고적한 인간이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말해두거니와 유정은 최후의 그 실연으로써 폐병에 걸린 것은 아니고 “낙낙장송”의 이 노래를 쓸 적부터 벌써 상당한 객혈이 있기는 했던 것이다. 다만 그의 실연은 그로 하여금 그의 남은 생명을 몇 분지 일로 단축시킨 것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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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 이석훈, 고 이상군들도 유정의 친한 동무들이나 군이 죽은 후 이들 한 다스의 그의 우인들이 한결같이 내게 말하는 공통된 말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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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장가 못 보내고 죽인 것이 무엇보다 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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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나는 군이 장가 못 가고 죽은 것을 더 고귀하게 평가하며 공동묘지에 묻히지 않고 한강물에 떠내려간 그의 유골을 더 꽃다운 장례로 여기고 여기면서도 기실 두고 두고 운물 뿌린 나였다. 그러니 아마도 내 팔자가 그때 비로소 나는 눈물을 씻고 유정과 더불어 나 자신의 장래를 위하여 일장의 엄숙한 송경을 올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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