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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彭年字仁叟。世宗朝登第。宣德壬子。生員。甲寅親試。正統丁卯重試。與成三問等嘗任集賢殿。見重於上。乙亥。光廟受禪。彭年知王事終不濟。臨慶會樓池欲自隕。三問固止之曰。方今神器雖移。而尙有上王。我輩不死。猶且後圖。圖而不成。死亦未晩。今日之死。無益於國家。彭年從之。無何。出爲忠淸道觀察使。啓事於朝。不稱臣。但書曰某官某。朝廷不之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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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 자 인수(仁叟), 세종조 등과(登科) 1432년 생원, 1434년 친시(親試:임금이 주관)에 합격했다. 1447년 중시에 합격해 성삼문 등과 함께 일찍이 집현전에 임명되었으며 임금이 아꼈다. 1455년 세조(光廟)가 선위(禪位)를 받자, 팽년은 끝까지 단종을 모시는 것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울며 경회루 연못에 스스로 뛰어들고자 했다. 삼문이 극구 만류하며 말하기를 “지금 신기(神器:왕위)는 비록 바뀌었으나 아직(尙今) 단종이 상왕으로 계시니 우리 동지들이 죽음을 마다 하고 마땅히 장차 후일을 도모(圖謀)해야 한다. (후일) 도모가 성공하지 못할 때 죽어도 늦지 않다. 오늘 죽는 것은 국가에 무익하다.” 팽년은 의문 없이 따르며,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조정에 계사(啓事;보고)할 땐, 신을 칭하지 않고 다만 무슨 벼슬 누구라 썼다. 조정에서는 이를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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翌年。入爲刑曹參判。與三問及三問父勝,兪應孚,河緯地,李塏,柳誠源,金礩,權自愼等。謀復上王。時天使來。光廟欲同上王請宴於昌德宮。彭年等謀曰。以勝及兪應孚爲別雲劍。當宴擧事。閉城門除羽翼。復立上王。謀已定。適於其日。上命罷雲劍。世子亦以疾不從。應孚猶欲擧事。彭年,三問固止之曰。今世子在本宮。公之雲劍不用。天也。若擧事於此。而倘世子聞變。從景福宮動兵。則成敗未可知。不如俟他日。應孚曰。事貴神速。若遲恐泄。今世子雖不來。羽翼皆在此。今日若盡誅之。衛上王號令。千載一時。不可失也。彭年。三問固不可曰。非萬全計也。遂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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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형조참판이 됐다. 삼문과 더불어 삼문의 부(父) 승(勝)과 유응부·하위지·이개·유성원·김질·권자신 등과 상왕의 복위를 모의(謀議)하는데 참여했다. 명(明)의 사신이 왔을 때, 세조는 창덕궁에서 상왕을 모시고(同) 연회(宴會)를 베풀고자(請) 했다. 팽년 등은 모의하기로 한 날, 성승과 유응부로 별운검(別雲劍:왕이 행차할 때 운검을 차고 호위)을 세워 그 연회 때 거사하고 성문을 닫고 (세조) 우익을 제거하여 상왕을 다시 세우려 했다. 계획(謀)은 이미 정해져 거사 일을 맞았지만 세조가 운검을 파(罷)하라 명했고, 세자도 신병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도) 유응부는 마땅히 거사를 단행하려 했으나. 팽년과 삼문이 극구 만류하며 말하길, “지금 세자가 동궁(本宮)에 있고, 공의 운검을 쓰지 못하니, 하늘의 뜻이다. 만약 이곳에서 거사를 일으켜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성패를 가히 알 수 없으니 후일(他日)을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 응부가 말하길, “거사는 신속해야 좋은 것이다. 만약 지체 되면 누설이 염려된다. 지금 세자는 비록 오지 않았으나 우익들이 다 이곳에 있다. 금일 만약 그들을 다 베어 상왕을 호위해 호령한다면 천재일우(千載一時)의 기회인데, 놓치는 것은 옳지 않다” 팽년과 삼문이 절대 불가하다며 말하길, “완전한 계책이 아니다.” 마침내 중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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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礩知事不成。馳與其妻父鄭昌孫謀曰。今世子不隨駕。特除雲劍。天也。不如先發告。僥倖得生。昌孫卽與礩馳。詣闕上變告曰。臣實不知 礩獨與焉。礩罪當萬死。上特赦礩,昌孫。收彭年等。辭服。上愛其才。密諭曰。汝能歸我。而諱初謀則得生。彭年笑而不答。稱上。必曰進賜。上令齪其口曰。汝旣稱臣於我。今雖不稱。無益也。對曰。我是上王臣。豈爲進賜臣也。曾爲忠淸監司一年。凡於狀牘。未嘗稱臣。使人校其啓目。果無一臣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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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질은 거사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장인인 정창손에게 달려가 모의에 대해 말하길, “지금 세자가 수가(隨駕:임금을 수행)하지 않고 특히 운검을 제하니 하늘의 뜻이다. 미리 고발 하는 것이 요행(僥倖)히 살아 남는 길이다. 창손과 질은 바로 달려가, 예궐(詣闕:입궐)해 세조한테 변고를 고하며, “신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질이 홀로 참여했으니, 질의 죄는 마땅히 죽을 죄입니다.” 세조가 특별히 질과 창손을 용서했다. 팽년 등을 거두려고 의복을 내리며 (세조가 그 재능을 아꼈다) 은밀히 타이르며 말하길 “네가 능히 내게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처음부터 모의에 (가담한 사실을) 숨기면 곧 살아날 수 있을 거다.” 팽년은 웃으며 답하지 않았다. 임금(稱上)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진사(進賜)라 말했다. 세조가 그 입을 다물게 하라며 말하길 “너는 이미 내게 신을 칭하더니, 이제와 비록 칭하지 않는다 해도 무익(無益)하다.” 대답하기를, “나는 무릇 상왕의 신하지 어찌 진사의 신하냐? 일찍이 충청감사로 있던 일년 동안에도 모든 장계(狀啓)와 서찰에 항상 신(臣)을 칭하지 않았다.” 관졸(使人)들이 계목을 살펴보니 과연 신(臣)자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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弟大年子憲皆死。妻爲官婢。守節終身。憲中生員。亦正直。臨刑。顧謂人曰。毋以我爲亂臣。金命重時爲禁府郞。私謂彭年曰。公何以致有此禍。嘆曰。中心不平。不得不爾。彭年性沈潛寡默。以小學律身。終日端坐。衣冠不解。令人起敬。文章沖澹。筆法慕鍾,王云。光廟爲領議政。宴於府中。彭年有詩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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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 모두 처형됐다. 妻(玉今)는 관비가 되었으나, 끝까지 수절했다. 헌은 생원시험 준비 중이었으며 정직했다. 형을 당할 때, 다만 사람들에게 이르길, “나를 난신이라 생각하지 마라” 금부랑(禁府郞) 김명중(金命重)이 곁에서 지켜보다 사사로이 팽년에 이르길, “공께선 어찌 치군(致君:임금께 충성을 다함)하여 이런 화를 당하나?” 탄식하면 말하길, “소신이 그것과 다르니(中心不平)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不得不爾)” 박팽년의 성품은 깊고 차분하며 과묵(寡默)했다. 소학(小學:초학자들의 수양서)으로 자신을 단속했고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 의관을 풀어 해치지 않았다.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심을 일으켰다. 문장은 조촐하며 깔끔했다, 필법은 종요(鍾繇:위(魏)나라의 서예가(151~230)) 와 왕희지(王羲之:진(晉)나라 의 서예가(307~365))를 본 받았다. 세조가 영의정으로서 부중(府中)에서 연회를 열 때 팽년이 지은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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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당 깊은 곳에서 음악소리 구슬프게 흘러 나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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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은 푸르르고 동풍은 살랑살랑 불어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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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지 않겠는가 어찌 길이 기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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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가(賡歌)하고 취하고 배부르니 태평성대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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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즐기며 칭찬하길 “현판에 새겨 부중(府中) 모든 벽에 걸어라” 하고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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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三問字謹甫。世宗朝登第。 宣德乙卯。生員。戊午式年。丁卯重試。壯元。恒侍經幄。啓沃弘多。英廟晩年有宿疾。屢幸溫泉。常令三問及朴彭年,申叔舟,崔恒,李塏等。便服在駕前。備顧問。一時榮之。癸酉。光廟誅金宗瑞。竝賜集賢諸臣靖難功臣號。三問恥之。諸功臣輪設宴。三問獨不設。乙亥。光廟受禪。三問以禮房承旨。抱國璽慟哭。光廟方俯伏謙讓。擧首諦視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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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자 근보(謹甫) 세종조 등과(登科) 1435년 생원 1438년 식년(子,卯,午,酉의 干支가 든 해에 보는 시험) 1447년 중시에 장원을 했다. 항상 경악(經筵:경연)을 받들었고, 계옥(啓沃:충언을 임금께 아룀)할 때는 그 (도량이) 넓고 (학식이) 풍부했다. 세종이 말년에 숙질(宿疾)이 있어서 여러 차례 온천에 가곤 했는데, 항상 삼문과 박팽년·신숙주·최항·이개 등에게 편복(便服)을 하고 임금을 앞에서 수행하며, 고문(顧問:질문)에 대비하게 했다. 당시엔 큰 영광이었다. 1453년, 세조가 김종서를 죽이고, 집현전의 모든 신하들을 정난공신의 호(號)를 내리고 회유하려(竝) 하였다. 삼문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모든 공신이 돌아가며 잔치를 베풀 때, 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다. 1455년 세조가 선위를 받자, 예방승지였던 삼문은 국새를 안고 통곡(慟哭)했다. 바야흐로 세조가 부복(俯伏)하고 겸양했으나, 머리는 들어서 그것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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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年丙子。與其父勝及朴彭年等。謀復上王。期以詔使請宴日擧事。會議於集賢殿。三問曰。申叔舟吾所善。然罪重不可不誅。皆曰然。使武士各主所殺。刑曹正郞尹鈴孫主申叔舟。會其日罷雲劍。謀中止。而鈴孫不之知。方叔舟就便房沐髮。鈴孫按劍而前。三問目止之。及事覺被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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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병자년에 부친(父親)인 승(勝)과 박팽년 등과 더불어 상왕 복위를 모의에 참여했다. 조사(詔使:조서를 가지고 온 사신)의 연회를 청한 날을 거사일로 하고 집현전에서 회의를 했다. 삼문이 말하길 “신숙주는 나와 친하다 하지만 죄가 중하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 모두 그렇다고 했다. 무사들로 하여금 각기 주로 처단할 사람들 정했는데, 형조정랑 윤영손(尹鈴孫)이 신숙주를 처단키로 했다. 기약 일이 왔으나 운검을 파(罷)하라 하니 모의가 중지 됐다. 윤영손이 이를 모르고, 숙주가 변방(便房:화장실)으로 나가는 방향에서 머리를 베려고 영손이 검을 빼기 위해 칼자루에 손을 대려 할 때, 삼문이 눈짓으로 중지됨을 알리자, 이내 사실을 깨닫고 품으로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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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廟親鞫問叱之曰。若等何爲反我。三問抗聲曰。欲復故主耳。天下誰有不愛其君者乎。我之心。國人皆知之。何謂反耶。進賜平日。動引周公。周公亦有是否。三問之爲此者。天無二日。民無二王故也。光廟頓足曰。受禪之初。曷不沮之。而乃依我。今背我乎。三問曰。勢不能也。吾固知進不能禁。退有一死。然徒死無益。忍而至此者。欲圖後效耳。光廟曰。汝不食我祿乎。食祿而背。反覆人也。名爲復上王。而實欲自爲也。三問曰。上王在。進賜何以臣我哉。且不食進賜祿耳。如不信。籍我家而計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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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친국(親鞫)할 때 꾸짖어 물었다 “너희들이 어찌 내게 모반을 하는가?” 삼문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옛 주인(故主)를 복위시키려 했을 뿐이다. 천하에 누가 그 임금을 그리워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나의 마음을, 백성이 다 알고 있는데 어찌 모반이라 이를 수 있나? 진사께서 평상시 주공(周公)이라 하시는데, 주공 또한 옭고 그름이 있지 않은가?” 삼문이 계속 세조(此者)께 말하길 “하늘에 해는 둘이 아니고 백성은 예로부터 왕이 둘이 아니다” 세조가 돈족(頓足:발을 구름)하며 말하길, “선위(禪位)된 초기에 어째서 막지 않고 줄곧 나를 따르다가 이제 와서 나를 등지려 하나?” 삼문이 말하길 “형세가 능히 할 수 없었다. 나는 대항(進)해도 능히 막지 못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번은 죽으나 헛된 죽음은 무익하였기에, 뒤로 미뤘던 것이고, 참아서 여기까지 이른 것은 후일을 도모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세조가 말하길 “네가 나의 녹을 먹지 않았다 하고, 녹을 먹는 것은 등지는 것이라 하니, 반복(反覆:이랬다 저랬다 함)인이란 말이냐? 상왕을 복위하려 했다고 하나, 이는 실로 너를 위한 것이 아니냐?” 삼문이 말하길, “상왕께서 계신대, 진사께서 어찌 나를 신하라 하십니까. 또한 진사의 녹은 먹지 않았소이다. 못 믿겠다면, 내 가산을 적몰(籍沒)해서 헤아려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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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廟怒甚。令武士灼鐵穿其脚斷其肱。而顏色不變。徐曰。進賜之刑慘矣。時申叔舟在上前。三問叱之曰。吾與汝在集賢時。世宗日抱王孫。逍遙散步。謂諸儒臣曰。寡人千秋萬歲後。卿等須護此兒。言猶在耳。汝獨忘之耶。不意汝之惡至於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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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심히 노해서, 무사로 하여금 달군 쇠로 다리를 지지고 팔뚝을 부러 트려도 안색이 변하지 않으며, 천천히 말하길, “진사의 형(刑)이 참혹하구려” 그때 신숙주가 세조 앞에 있었다. 삼문이 꾸짖어 말하기를, “ 나와 더불어 네가 집현전에 있을 당시 세종께서 매일 왕손(단종)을 안고, 천천히 거닐어 산보(散步)하시며 모든 유신들에게 이르길, '과인이 천추만세(千秋萬歲)후 경(卿) 등은 모름지기 이 아이를 보호하라' 는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거늘 너 혼자 이를 잊었던 말이냐? 네가 흉악해져 이렇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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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學姜希顏辭連。栲訊不服。上問曰。希顏與謀乎。三問曰。實不知之。進賜盡殺名士。宜留此用之。希顏由是得免。三問車載出門。顏色自若。顧左右曰。若輩佐賢主致太平。三問歸見故主於地下。笑謂監刑官金命重曰。此何事耶。旣死。籍其家。自乙亥以後祿俸。別置一室。書曰某月之祿。家無所餘。寢房惟有苫薦而已。有子五人。長曰元。妻爲官婢全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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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提學) 강희안(姜希顏)의 관련됨을 물었으나, 고신(拷訊:고문)에 불복했다. 세조가 묻기를, “강희안도 모반에 참여했느냐?” 삼문이 답하기를, “실로 모르는 일이다 진사가 이름난 선비(名士)는 다 죽이려는 구나, 마땅히 살아남아 국가에 쓰여져야 한다.” 이로 말미암아 희안은 처벌을 면했다. 삼문은 수레에 실려 문을 나설 때도, 안색이 자약(自若:큰일에도 침착함)했다. 다만 좌우에 말하길,”너희들은 현명한 군주를 도와 태평(太平)에 이르거라 삼문은 돌아가 지하에서 옛 주인을 보겠노라” 감형관(監刑官) 김명중에게 웃으며 이르기를 “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죽고 난 후, 가산을 적몰해 보니 을해년 이후부터의 녹봉은 별도 한 방에 두고 모월의 녹이라 써놨다. 가산으로 남은 것은 없었고, 침방(寢房)에는 오직 거적자리만 있을 뿐이었다. 자식은 5명이고 長曰元:장남이 가로되 으뜸이었고?, 처(次山)는 관비가 되 전절(全節)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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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光廟之受禪也。勝以都總管入直。聞禪位事。送奴政院數問。三問不答。久之。三問起如廁。仰天太息曰。事畢矣。奴以白勝。勝亦太息。促馬歸家。奴竊仰視之。逬淚如泉。卽告病。臥一室不起。家人亦不得見面。惟三問來。辟左右與語。三問爲人。詼諧放浪。喜談謔。坐臥無節。外若無持守。內操堅確。有不可奪之志云。有詩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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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을 때는 승(勝:삼문의 父)이 도총관으로 입직(入直)하고 있었다. 선위사실을 듣고, 노비를 승정원에 보내 꾀를 물었다. 삼문은 오래도록 대답하지 않았다. 삼문은 다시 뒷간에 갔다. 하늘을 우러러 크게 한숨 쉬며 말하길, “섬기길 다하자” 노비가 승에게 아뢰자 승 또한 크게 한숨을 쉬곤, 말을 재촉해 귀가했다. 노비가 몰래 앙시(仰視)하니 눈물이 샘 같았다. 곧 병을 고하고 내실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가인(家人)들 또한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오직 삼문이 왔을 때 벽좌우(辟左右:밀담)하여 말했다. 삼문이 사람됨이 회해(詼諧:해학)적이고 방랑(放浪)을 좋아하고 가벼운 농담을 좋아 하므로, 좌와(坐臥)같이 절의가 없어 보여 외적으로 이와 같이 절개를 가지지 않은 듯 하나, 안으로는 굳고 확실한 지조가 있어 범할 수 없는 절개가 있었다. 유시(有詩)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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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음식을 먹고 임금의 옷을 입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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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뜻이 평생 동안 어긋나지 않기를 바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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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塏字淸甫。 一字伯高 牧隱之曾孫。種善之孫也。生而能文。有祖父風。 正統丙辰親試。丁卯重試。與丙子之謀事覺就鞫。方彭年, 三問繫闕庭灼刑。塏徐曰。此何等刑也。爲人瘦弱。嚴刑之下。顏色不變。人皆壯之。與三問同日死。臨車載。有詩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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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개 자 청보(淸甫) 혹은 백고 이다. 목은(牧隱)의 증손이고 종선의 손자다. 어려서 문장에 능했고 할아버지의 기질을 물려 받았다. 1436년 친시 1447년 중시에 합격했다. 병자년 모의에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자 국문을 받았다. 팽년, 삼문과 나란히 묶여 대궐에서 작형을 받을 때 이개가 조용히 말하기를 “이것 들이 어찌 형벌이라 하나?" 사람 됨은 여위고 약해 보였으나,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으니 모든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했다. 삼문과 더불어 같은 날 죽었다. 마차에 실려 갈 때 쓴 시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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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禹鼎)같이 무거울 때는 삶도 또한 큰 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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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모(鴻毛)처럼 가벼운 곳에서는 죽음이 도리어 빛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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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緯地字天章。 一字仲章世宗朝登第。 宣德乙卯。生員。正統戊午式年。壯元。爲人沈靜寡默。口無擇言。恭而有禮。過闕必下。雖雨潦。不曾避路。嘗在集賢。侍講經幄。多所補正。及魯山幼沖嗣位。八公子強盛。人心危疑。朴彭年嘗借蓑衣於緯地。以詩答寄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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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지 자 천장(天章) 혹은 중장 세종조 등과(登科)했다. 1435년 생원 1438년 식년시에서 장원을 했다. 위인 됨이 깊고 차분하며 과묵했다. 한 마디도 가려서 버릴 것이 없는 좋은 말을 했고, 공손함이 몸에 배었다.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록 비가와 물이 고인 곳이라도 전에 피했던 길로는 가지 않았다. 일찍이 집현전에 있을 때 경악에서 학문을 강의 하였고 부족한 것을 보태 바르게 한 것이 많았다. 어린 노산군이 사위(嗣位:임금의 자리를 이어 받음)하여 보위(沖)에 오르자. 팔공자(八公子)가 강성해져서 인심이 편치 않고 의심스러워 졌다. 박팽년이 일찍이 위지에게 도롱이(蓑衣)빌려주었다. 하위지는 시를 답해 보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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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다 준 도롱이도 마땅히 의미가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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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五湖)에 내리는 안개비에도 서로 찾기를 즐기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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蓋傷時也。及誅金宗瑞。光廟爲首相。盡賣朝服。以前司諫退居善山。光廟白上。以左司諫徵之。上書辭不就。乙亥。光廟受禪。敎書請致至勤。緯地就召。拜禮曹參判。而恥食祿。自乙亥以後別貯一室而不食。及丙子之變。灼刑三問等。次及緯地。曰。旣加我反逆之名。則厥罪應誅。夫復何問。上怒弛。不施灼刑。與三問等同日死。世宗培養人才。至文廟時方盛。論一時人物。推緯地爲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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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임금으로) 근심에 덮혀있을 때, 김종서를 죽인 세조가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다 팔아 전사간(前司諫)으로써 선산(善山)에 퇴거(退去)하였다. 세조가 왕께 아뢰어 좌사간(左司諫)으로 불렀으나, 상서(上書)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자 교서를 내려 지극하게 일을 청하자 하위지는 부름에 나아가 예조참판을 받았다. 녹봉 먹기를 부끄럽게 여겨 을해년 이후부터의 것은 별도로 한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병자년의 변에 이르러, 삼문등과 함께 작형(灼刑)을 받았다. 위지 차례가 되자, 말하기를 “이미 나를 반역자 명단에 더했으니 그 죄에 마땅한 참형을 받을 것이다.” 하면서 엎드려 아비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세조의 노여움이 떨어져 작형을 늦추지 않았다. 삼문 등과 더불어 동일 죽었다. 세종이 배양한 인재였다. 문묘 때 이르러 사방에서 성했다. 그때 인물로 논할 때 위지를 먼저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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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誠源字太初。世宗朝登第。正統甲子式年。丁卯重試。癸酉。百官上請褒世祖之功比周公。令集賢殿起詔草。諸學士皆亡去。獨誠源在。爲迫脅起草。出就家慟哭。家人莫知其故。及魯山爲上王。授成均司藝。預丙子之謀。事發拿三問去。誠源時在館。諸生以三問事告之。卽命駕還家。與妻酌酒訣飮。上祠堂久不下。往視之。不脫冠帶。拔佩刀自刎。救之已無及矣。然不知其所以。俄而吏來取屍去。磔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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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원 자 태초(太初) 세종조 등과 1444년 식년시 1447년 중시에 합격했다. 1453년 백관이 세조의 공을 주공(周公:주나라 정치가)에 비하며 기리자고 단종께 청하자, 집현전에서 조서(詔書)의 초안을 잡아 고하라고 명했다. 모든 학사들이 다 도망가 버렸으나, 홀로 유성원이 있었다. 협박에 못 이겨 초안을 잡아 고했다. 집으로 돌아와 통곡 하였다. 가인(家人)들은 그 연유를 알지 못했다. 노산군이 상왕이 되고 성균관 사예(司藝)를 제수 받았다. 1456년 모의에 참여하였으나, 일이 발각돼 삼문이 잡혀갈 때 유성원은 객사에 있었다. 주변 유생들이 삼문의 일을 알리니 곧 수레를 준비하라고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부인과 함께 술잔에 술을 따라 이별주를 마시고는 사당으로 올라가서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가서 보니 관복을 벗지 않은 채로 패도를 뽑아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구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집안에선 그렇게 자결한 까닭을 알지 못했는데 갑자기 관리들이 와서 시신을 빼앗아가서 거열(車裂)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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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應孚。武人也。雄勇善射。英廟文廟皆愛重之。位至二品。丙子事發。拿至闕庭。上問曰。汝欲何爲。對曰。當請宴日。欲以一尺劍廢足下復故主。不幸爲奸人所發。應孚復何爲哉。足下速殺我。光廟怒罵曰。汝托名上王。欲圖社稷。令武士剝膚而問情。不服。顧謂三問等曰。人謂書生不足與謀。果然。 曩者請宴之日。吾欲試劍。汝輩固止之曰。非萬全計。以致今日之禍。汝等人而無謀。何異畜生。白上曰。如欲聞情外事。問彼豎儒。卽閉口不答。上愈怒。命取灼鐵置腹下。油火竝煎。而顏色不變。徐待鐵冷。取鐵投地曰。此鐵冷。更灼來。終不服而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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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응부는 무인이다. 씩씩하고 용감했으며 활을 잘 쏘았다. 세종과 문종이 모두 아끼고 중히 여겼고, 지위는 종2품에 이르렀다. 병자년 발생한 사건으로 대궐에 붙잡혀왔다. 세조가 묻기를, “네가 무엇을 하려 했느냐?” 답하기를, “연회를 청한 당일에 일척검(一尺劍)으로 족하(세조)를 폐하고 옛 주인을 복위하려 했으나, 불행히도 간인(奸人)이 발고(發告)를 하였으니, 응부가 다시 무엇을 이루겠는가? 족하(足下:동료에 대한 존칭)여 나를 빨리 죽여라.” 세조가 진노해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상왕의 이름에 의탁해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 했다” 무사들에게 명해 살갗을 찢으며 사실을 문초하나 죄를 고하지 않았다. 다만 삼문 등에게 이르길, 사람들이 서생과 함께 모의를 꾀하기는 부족하다 하더니. 과연 그렇다. 전에 저자가 연회를 청한 날에 내가 검을 사용하려 했으나, 너의 무리가 극구 만류하며 말하기를, 완전한 계책이 아니라더니. 금일의 화를 불러왔다. 너와 다른 사람들의 신중하지 못하고 꾀가 없음이. 어찌 짐승들과 다르다 하겠는가?” 세조에게 아뢰길, “네가 그 외의 사정을 알고 싶다면, 저 더벅머리 유생들에게 묻거라” 하며 입을 닫고 답하지 않았다. 세조가 더욱 진노해, 달군 쇠를 가져다 아랫배에 놓도록 했다. 기름이 나와 불타며 함께 끓었으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쇠가 식기를 천천히 기다려서, 쇠를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쇠가 식었다. 달군 쇠를 가져와 바꿔라. 끝내 죄를 실토하지 않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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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孚性至孝。凡可以慰母心者。無所不爲。與弟應信。俱以射獵名世。遇禽發無不中。家貧無甔石之儲。而養母之具。未嘗不贍。母嘗往抱川田莊。兄弟從行。於馬上翻身仰射。雁應弦而墮。母大喜。身長過人而容貌嚴壯。淸如於陵仲子。爲宰相。而苫席遮房戶。食無肉。有時絶糧。妻子怨罵。死之日。哭謂路人曰。生無所庇。死得大禍。 初擧謀時。衆中奮拳曰。誅權攬,韓明澮。此拳足矣。何用大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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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부 성품이 효(孝)가 깊어, 무릇 가히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다, 무소불위 위치에 있었으나, 아우 응신(應信)과 더불어 모두 사렵(射獵:활사냥)으로 유명해, 마주친 날짐승은 쏘아서 중심에 맞추지 못한 적이 없었다. 집은 가난해서 쌓아 놓을 곡식(甔石)은 없었으나, 부모를 봉양할 땐 넉넉치 않았음에도 일일이 갖추었다. 어머니가 항상 포천의 전장(田莊:개인 소유 논밭:莊土)를 오갔는데, 형제들이 모셨다, 말 위에서 몸을 돌려 위로 활을 쏘니, 기러기가 시위에 맞장구 치며 떨어졌다. 어머니가 크게 기뻐했다. 키는 커서 과인(過人:보통 사람 보다 뛰어남)했고 용모는 엄장(嚴壯:엄하고 장함)했다. 청렴하기는 오릉중자(於陵仲子)와 같았다. 재상이 된 후에도 거적으로 자리를 깔고 방과 집을 가렸다. 고기는 먹지 않았고, 양식이 떨어지면, 아내가 성나서 나무라곤 했다. 처형된 날, 곡하며 노상에서 사람들에게 이르길, 살아서 덮을 것도 없었는데, 죽어서 (영광스런 황천길이 아니고) 큰 화를 당하는구나. (원통하다) 처음 모의를 시작할 때, 많은 사람 중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奮拳) 말하길, “권람, 한명회를 제거하는데 이 주먹이면 족하지 않은가? 어찌 대검을 쓰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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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함길도절제사 시절의 유시(有詩)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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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이 절월(節鉞)가지고 변방 오랑캐를 진압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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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줏빛 보루(堡壘)엔 티끌도 없고 군사들은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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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어찌 그 기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들은 없고 딸이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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