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十一月一日。赴新羅人王長文請。到彼宅裏喫齋。齋後共數僧等。到寺院莊宿一宵。
7
11월 1일, 신라인 왕장문(王長文)의 초청이 있어 그 집에 가서 재를 들었다. 재를 마친 후 승려 몇 명과 함께 사원의 장원(莊園)註 283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8
註) 283 당대에는 왕후와 귀족뿐만 아니라 사원도 교외에 장원을 소유하고 그것을 자신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말하는 사원의 장원은 곧 적산 법화원이 소유하고 있던 장원이다.
12
[11월] 2일, 註 284저녁 무렵에 산원에 돌아왔다.
13
註) 284 원문에는 “十二日”로 되어 있으나 다음에 9일이 나오는 점으로 보아 “二日”일의 오기로 보인다.
17
[11월] 9일, 동짓날註 285이다. 여러 승려들이 서로 예를 나누었다. 오전 8시경註 286에 법당 앞에서 예불했다.
18
註) 285 개성 4년 11월 9일 정해(丁亥)이다. 역법의 계산도 확실히 동지에 해당한다(平岡武夫 編, 《唐代の曆》, 275쪽). (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38쪽).
19
註) 286 오전 8시 전후이다. 6시의 이른 아침에 해당하는데, 사원에서 오전의 법회는 오직 이 시간에 열린다는 것을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여러 예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38쪽).
22
十六日。山院起首講法花經。限來年正月十五日。為其期。十方眾僧。及有緣施主。皆來會見。就中聖琳和尚。是講經法主。更有論義二人。僧頓證。僧常寂。男女道俗。同集院裏。白日聽講。夜頭禮懺聽經及次第。僧等其數卌來人也。其講經禮懺。皆據新羅風俗。但黃昏寅朝二時禮懺。且依唐風。自餘并依新羅語音。其集會道俗。老少尊卑。惣是新羅人。但三僧。及行者一人。日本國人耳。
23
[11월] 16일, 註 287산원에서는 이 날부터 《법화경(法花經)》을 강설한다. 내년 정월 15일까지를 그 기간으로 삼는다. 여러 곳에서 온 많은 승려와 인연 있는 시주가 모두 와서 모인다. 그 가운데 성림화상(聖琳和尙)이 이 강경의 법주(法主)註 288이다. 또 논의(論義)註 289 두 사람이 있는데, 승려 돈증(頓證)과 승려 상적(常寂)註 290이 바로 그들이다. 남녀 도속(道俗) 모두 절에 모여 낮에는 강경을 듣고 밤에는 예불 참회註 291하고 청경하며 차례차례로 이어간다. 승려 등註 292은 그 수가 40여 명이다. 그 강경과 예참(禮懺)註 293 註 294 방법은 모두 신라 풍속에 의거하였다. 다만 오후 8시경과 새벽 4시경 두 차례의 예참은 당나라 풍속에 의거하였다. 그 밖의 것은 모두 신라 말로 행하였다. 그 집회에 참석한 승려, 속인, 노인, 젊은이, 귀한 사람,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신라인이었다. 단지 3명의 승려와 행자 1명만이 일본국 사람이었다.
24
註) 287 16일을 11월에 배치해야 할지 12월로 해야 할지 문제가 있다. 법화원의 강경이 여름·겨울 2번 행해졌던 것은, 말하자면 여름·겨울의 안거(安居)와 관련해 해석해야만 한다. 인도에서는 안거가 우기(雨期)에 행해지는데, 서역지방에서는 겨울에 행해진 예도 있다. 일본에서도 동안거(冬安居) 기록이 있다. 당에서는 거의 없으며, 도충(道忠)의 《범강경(梵綱經)》에 보인다. 동안거는 송(宋)대에는 북방의 승려 사이에서 행해졌다. 법화원에서는 이미 이와 같은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이에 따라 법화경의 강의 등이 행해졌다. 신자에 따라서도 편의한 시기에 행해졌는데, 이것이 과연 11월부터 정월까지 2개월간에 해당하는지 혹은 12월부터 1개월간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판단할 수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39~140쪽).
25
註) 288 여기에서 법주(法主)는 경전을 강의하는 좌주(座主)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40~141쪽).
26
註) 289 다음의 강경의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강경 때에는 문답이 행해지는데, 論議는 바로 강경 내용에 대하여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27
註) 290 적산 법화원 근처의 유촌(劉村)에 있던 신라 승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29쪽).
28
註) 291 스스로 범한 죄를 뉘우쳐 용서를 비는 일. 불교 도덕을 실천하는 데 중요한 한 행사. 참회는 그 방법과 성질에 따라서 포살(布薩)·자자(自恣)·삼종참법(三鐘懺法)·삼품참회(三品懺悔) 등의 종류가 있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30쪽).
29
예불과 참회를 말한다. 그 행법을 예참의(禮懺儀)라 한다. 시방불(十方佛)을 예배하고 자신의 죄과를 참회하는 것이다.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에 의거하여 법화참법을 닦는다. 적산 법화원에서는 이 참법으로 신라 방식에 의하여 수행하였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08쪽).
30
註) 292 원문은 僧等인데, 俗자가 탈락되어 僧俗等이라 해야 한다. 40인이라고 하는 것은 승려의 수가 아니라 모인 사람들의 수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41쪽).
31
註) 293 시방불(十方佛)을 향하여 예배하고 자기의 죄과를 참회하는 불교의식으로, 반야경, 열반경, 금광명경 등의 여러 경전에 의거하는 행법이다.
32
註) 294 예참(禮懺)은 예불참회(禮佛懺悔) 또는 예찬참회(禮讚懺悔)의 약칭으로, 상세하게는 “六時禮佛, 懺悔勸請”이라 한다. 그 작법(作法)을 예참의(禮懺儀)라고도 하는데, 십방불(十方佛)을 향하여 예배하고, 자신의 죄과를 참회하는 불교의식이다. 참회는 회과라고도 하는데, 《반야경》·《열반경》·《금광명경》 등의 여러 경전에 의거하는 행법으로, 일본에서도 吉祥會과 十日面會 등이 행해지는데,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에 의거해서 법화참법을 수행한다. 포살(布薩) 또는 자자(自恣)와 같이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것도 있는데, 행의(行儀)도 증인을 사용하는 것·자서형식에 근거를 둔 것 등이 있다. 또 불법승 이외 대중을 향해서 행하는 것, 혹은 자신 스스로 5회(懺悔, 勸請, 隨喜, 廻向, 發願)를 행하는 것이 있다. 법화원에서도 법화회를 수행하는데 신라식 차법을 행했던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41쪽).
35
十七日。齋前由當院講起□。且出寺。往南山法空闍梨院。赤山院綱維。馳書請歸。不許住南院更修狀請十五日暇綱維([□@考]維下東本更有綱恐衍)僅許。
36
[11월] 17일, 재를 들기 전에 이 절의 강경이 시작되기 때문에 서둘러 절에서 나와 남산(南山) 법공스님의 절註 295에 갔다. 적산원의 강유註 296가 서신을 급히 보내 돌아오기를 청하며 남원(南院)註 297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서장을 써서 15일간의 휴가를 청하니 강유가 겨우 허락하였다.
37
註) 295 적산 법화원의 근처인 진장촌(眞莊村)에 있던 신라 승원인 천문원(天門院)을 가리킨다. 법공(法空)스님이 이 절에 있었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30쪽).
38
註) 296 강유(綱維)는 사원의 사무를 맡은 삼강(三綱), 즉 사주(寺主)·상좌(上座)·유나(維那)를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6~87쪽).
39
註) 297 남원(南院)은 진장촌 천문원을 가리킨다. 천문원은 적산 남쪽에 해당하며, 해변 근처 천문산(天門山)이 존재한다. 또한 개성(開成) 4년 11월 17일조에 “절에서 나와 남산 법공스님의 절에 갔다. 적산원의 강유(綱維)가 서신을 급히 보내 돌아오기를 청하며 남원(南院)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에 의하면 법공(法空)이 주지로 있던 절을 남원(南院)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즉 천문원(天門院)은 남원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남천문(南天門)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42~143쪽).
43
赤山院講經儀式。辰時。打講經鍾。打驚眾。鍾訖。良久之會。大眾上堂。方定眾鍾([□@考]鍾池本作了)講師上堂。登高座間。大眾同音。稱嘆佛名。音曲一依新羅。不似唐音。講師登座訖。稱佛名便停。時有下座一僧作梵。一據唐風。即云何於此經等一行偈矣。至願佛開微密句。大眾同音唱云戒香定香解脫香等。頌梵唄訖。講師唱。經題目。便開題。分別三門。釋題目訖。維那師出來。於高座前。談申會興之由及施主別名。所施物色申訖。便以其狀。轉與講師。講師把麈尾。一一申舉施主名。獨自誓願。々々訖。論義者論端舉問。舉問之問。講師舉麈尾。聞問者語。舉問了。便傾麈尾。即還舉之。謝問便答。帖問帖答。與本國同。但難。儀式稍別。側手三下後。申解白前。卒爾指申難。聲如大瞋人盡音呼諍。講師家([□@考]家恐蒙)難。但答不返難。論義了。入文談經。講訖。大眾同音長音讚嘆。々々語中。有㢠向詞。講師下座。一僧唱處世界如虛空偈。音勢頗似本國。講師昇禮盤。一僧唱三禮了。講師大眾同音。出堂歸房。更有覆講師一人。在高座南。下座便談講師昨所講文。至如會義句。講師牒文釋義了。覆講亦讀。讀盡昨所講文了。講師即讀次文。每日如斯。
44
[11월] 22일, 일이 순조롭지 못했기 때문에 본래 사원으로 돌아왔다.
46
오전 8시경에 강경을 알리는 종을 친다. 대중들에게 알리는 타종을 마치고 얼마 지나면 대중이 법당에 들어온다. 그후 대중들이 좌정(坐定)하도록 알리는 종을 치고 이어서 강사(講師)註 299가 강당에 들어와 높은 좌석註 300에 오르는 동안 대중들은 같은 목소리로 부처의 이름을 찬탄한다. 음의 곡조가 한결같이 신라 곡조이고 당나라 것과는 다르다. 강사가 자리에 오르기를 마치면 부처의 이름을 찬탄하던 것을 곧 멈춘다. 이때 아랫자리에 있던 한 승려가 범패註 301를 부르는데, 이는 완전히 당나라 풍속에 의거한 것이다. 즉 ‘이 경전에서 무엇을 말하는가(云何於此經)’註 302라는 한 줄의 게송(偈頌)이었다. ‘원하옵건대 부처님께서 오묘한 참뜻을 열어주소서’라는 데 이르러서는 대중들이 같은 소리로 ‘계향註 303정향해탈향註 304(戒香定香解脫香)’ 등을 부른다. 범패를 마치면 강사가 경전의 제목을 큰 소리로 말해註 305 곧 대의(大義)를 밝히고註 306 삼문(三門)註 307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제목의 해석을 마치면 유나사(維那師)註 308가 나와 높은 좌석 앞에서 법회를 열게 된 연유와 시주의 각자 이름과 시주한 물품을 읽어 알린다. 그것을 마치면 곧 그 문서를 강사에게 전달해 준다. 강사는 주미(麈尾)註 309 註 310를 잡고 일일이 시주의 이름을 거명하며 몸소 서원(誓願)한다. 서원을 마치면 논의자註 311는 논의의 발단註 312과 질문을 한다. 질문을 하는 동안 강사는 주미를 들고 묻는 사람의 말을 듣는다. 물음의 제기가 끝나면 곧 주미를 기울였다가 다시 이를 들고 물음에 감사하고 곧이어 대답한다. 묻고 답하는 방식註 313 註 314은 일본과 같다. 다만 난의식(難儀式)은 조금 다르다. 손을 옆으로 세 번 내린 후註 315에 강사가 해답註 316을 말하기 전에 갑자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난(難)’이라 말한다. 그 소리는 마치 화난 사람이 목청껏 고함치며 싸우는 만큼이나 컸다. 강사가 ‘난(難)’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단지 그것에 답할 뿐이고 다시 논의를 하지 않는다. 논의가 끝나면 문장으로 들어가 경전을 읽고 강의한다. 강의가 끝나면 대중들은 같은 목소리로 음을 길게 빼며 찬탄한다. 찬탄하는 말 중에는 회향사(廻向詞)註 317가 들어 있다. 강사가 자리에서 내려오면 한 승려가 ‘세상에 처함이 허공과 같다(處世界如虛空)’註 318라는 게송을 큰 소리로 부른다. 음세는 본국과 거의 유사하다. 강사가 예반(禮盤)註 319에 오르면 한 승려가 삼례(三禮)註 320 註 321를 부르는데, 강사와 대중이 같은 목소리로 불렀다. 강사는 법당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갔다. 다시 복강사(覆講師)註 322 한 사람이 높은 좌석 남쪽 아랫자리에서 강사가 어제 강의한 경문을 읽는다. 중요한 교의를 함축한 구절 같은 것에 이르면 강사는 그 경문을 다시 읽고 뜻을 해석한다. 복강사 또한 재차 읽는다. 어제 강의한 문장을 모두 읽으면 강사는 다음 문장을 읽는다. 매일 이와 같이 하였다.
47
註) 298 법회의 상세한 기술로써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수록된 것은 약 8회인데, 재회(齋會)를 주로 했던 것, 강경논의를 주로 했던 것, 강경염불찬가를 주로 했던 것 등 구별이 가능하다. 이 날의 기사는 신라풍의 장기 강경의식, 1일 강경의식, 송경의식이다. 법회는 승려와 신자가 모여서 이뤄지는데, 모인 사람들과 역승(役僧)에 따라 구성되어 법회 전의 준비, 보시(布施) 및 회장의 장엄(莊嚴)을 행하고, 삼례(三禮)의 시작으로 범패(梵唄), 산화(散花), 찬탄(讚嘆), 불보살의 강림을 기원, 주원(呪願), 표백(表白), 회향(廻向), 참회(懺悔), 발원(發願)으로 이뤄진다. 여러 법회의 기본적 순서는 정해져 있어서 적절한 목적에 대응해서 중점적 작법(作法)이 강조된다(小野勝年, 《圓仁見唐佛敎儀禮》, 慈覺大師硏究所) (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48~149쪽).
48
註) 299 강사(講師)는 불경을 강의하는 승려이다. 뒷 서술의 1일 강경의식에도 “講師·讀師, 入堂之會云云”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강사의 지위는 기본적으로 높은데, 천평 13년(741) 國分寺 창건과 관련해, 각 나라에 독사와 같이 강사 1인을 두었다. 헤이안 시대도 연속되어, 승화 초기에는 천태종·진언종에서도 강사·독사가 보임되고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강사는 이와 같은 특수한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승직으로써 강사와 독사가 없었고, 또 일반적으로는 강사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법사(法師)·법주(法主)·좌주(座主)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원인은 일본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16일조에는 명백히 법주라고 기록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49쪽).
49
註) 300 강사(講師)·도사(導師) 또는 계사(戒師) 등을 위하여 한층 높게 마련한 자리. 또는 그들에 대한 존칭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30쪽).
50
註) 301 범패(梵唄)는 성패(聲唄)·찬패(讚唄)·경패(經唄)이라고도 한다. 범어 즉 인도식의 음조를 가지고 하는 가패(歌唄)이지만 반드시 산스크리트어는 아니다. 《고승전》 제13 경사편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대체로 가영(歌詠)의 법음(法音)을 패(唄)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경문을 외우는 것을 전독(轉讀)이라고 하는데, 가찬(歌讚)만을 범패라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49~150쪽).
51
註) 302 보통은 云何梵 또는 云何唄라고 한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권3, 壽命品 중의 게문(偈文)을 취하여 범패로 부르는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0쪽).
52
註) 303 계(戒)를 잘 지키면 덕이 저절로 갖춰져, 향기가 사방에 퍼지는 것과 같이 남의 마음에 공경심을 일으키게 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31쪽).
53
註) 304 마음에 속박이 없고, 선악의 구별을 생각하지 않으며 자유자재 하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31쪽).
54
註) 305 경전의 제목을 부른다는 의미로, 여기에서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5자를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0쪽).
55
註) 306 경의 대의를 밝힌다는 뜻이다. 개제의 방편은 3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즉 삼문분별(三門分別)이 그것이다. 처음에 경전의 대강을 밝히고 다음에 제자(題字)를 분석하고 명자(名字)의 뜻을 설명하고 끝으로 경문의 뜻을 분석 설명하는 것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10쪽).
56
註) 307 開題는 경전의 大義, 제목의 의의, 文意의 해석이라는 삼단으로 나누어 행해지는데 그것을 삼문분별이라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1쪽).
57
註) 308 유나사(維那師)는 유나(維那) 또는 도유나(都維那)이다. 원래는 여러 승려들을 통솔하는 역할이다. 잡다한 업무를 담당하며, 신자와 교섭도 하고, 시물(施物)의 분급도 담당하였다. 말하자면 사원의 집사이다. 那는 범어로 Karma-dana의 약칭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1쪽).
58
註) 309 승려가 강설할 때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휴대하는 佛具로, 짐승의 털이나 麻를 묶어서 자루에 부착한 모양이다. 麈는 큰 사슴으로, 사슴 무리는 큰 사슴의 꼬리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麈尾는 곧 청중을 지휘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59
註) 310 주미(麈尾)는 주미선(麈尾扇)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주미(朱尾)라고도 쓴다. 6조 시대에는 승려뿐만 아니라 도사(道士)·사인(士人) 사이에서도 유행했던 것으로, 승려가 강설할 때 권위를 지키기 위해 휴대하는 물건이다. 문수와 문답하는 유마거사가 이것을 들고 있었던 모습은 육조와 당의 조각회화에서 자주 발견된다. 부채를 만들 때 짐승의 꼬리 또는 깃털을 사용한 점으로부터 이것을 주(麈)와 녹(鹿)에 비유되어 설명된 것인데, 다소 부회가 있다고 보인다. 일본에서도 고승들이 사용한 불구들이 나라시대의 사원 자재장(資財帳)에 그 품목이 보이는 점으로부터 알 수 있는데, 현재 정창원과 구 법륭사(法隆寺) 보물 중에 실물이 남아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1~152쪽).
60
註) 311 논의는 宗義 및 法門 등의 시비와 의리를 질문자와 답변자 사이에서 논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논의자는 질문자 또는 난자(難者)를 가리키며, 도강(都講)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법화원에서는 돈증(頓證)과 상적(常寂)이 해당한다. 논의는 강론(講論)·법문(法問)·문답(問答)·논란(論難)·수의(竪義)라고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2~153쪽).
61
註) 312 논의를 시작한다는 뜻이다. 묻는 사람이 논의의 제목을 제시하면 이에 따라 강사는 회답을 한다. ‘擧問’에서 ‘거’는 제시한다는 뜻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10쪽).
62
註) 313 일본에서는 논의를 할 때에 주기(注記)라는 기록계가 있어 물음과 답을 기술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묻는 사람이나 답하는 사람이 그 상대방이 주장하는 논점을 복창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질문과 해답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이다. 첩문첩답(牒問牒答)이 옳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11쪽).
63
註) 314 강사의 답변에 대하여 거듭 질문하여 보다 자세한 답을 구하는 방식이다.
64
註) 315 원문은 三下이다. 三은 3번을 뜻하고, 下는 접미어이다. 어록(語錄)과 청규(淸規) 등에서 상용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4쪽).
65
註) 316 원문은 解白으로, 해답과 같은 뜻이다. 해백은 개백(開白)과 음이 통하고, 개백은 표백(表白)을 가리키는데 의미는 다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4쪽).
66
註) 317 회향사(廻向詞)는 회향(回向)이라고도 한다. 자기가 행한 공덕을 돌려서 보리(菩提)로 향하고, 중생에게 베푸는 것을 말한다. 《법화경》 권3 化城喩品의 회향게가 유명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4쪽).
67
註) 318 상세하게는 “處世界如虛空 若蓮華不著水 心淸淨超於彼 稽首禮無上尊”(《초일명삼매경(初日明三昧經)》, 晋의 聶承遠 역)에 보이는 普明菩薩이 讚한 佛偈이다. 이것은 운하패(云何唄)를 법회 처음에 부르는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법회의 마지막에 부르기 때문에 후패(後唄)라고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4~155쪽).
68
註) 319 예반(禮盤)은 불보살을 향해 예배하기 위해 사용되는 상좌(牀座)이다. 너비 3척 높이 1척쯤의 대좌로, 오늘날에도 또한 일본의 사원에서 사용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5쪽).
69
註) 320 불, 법, 승의 3寶에 귀의하고 경례하는 것으로, 이때 주로 三自歸依文과 歸依三寶文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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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21 삼례(三禮)는 삼보례(三寶禮) 또는 삼례사작법(三禮師作法)이라고 불린다. 승려가 불보살을 향해 행하는 정중한 예법이다. 그 때 부르는 게(偈)는 불법승에 귀의해 경례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삼례문(三禮文)·삼자귀의문(三自歸依文)·귀의삼보문(歸依三寶文)·공경문(恭敬文)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육십화엄의 제6淨行品에 수록되어 있는 게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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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22 복강사(覆講師)는 복강사(複講師)고도 한다. 경론 강의를 할 때, 강사가 말한 바를 복습해 부연하는 승려이다. 《송고승전》 권2 도인(道因)전에 도인이 팽성의 숭법사(崇法師)를 위해 섭론(攝論)을 복강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5~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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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一日講儀式 辰時打鍾。長打擬了。講師都講二人入堂。大眾先入列坐。講師讀師入堂之會。大眾同音。稱嘆佛名長引。其講師登北座。都講登南座了。讚佛便止。時有下座一僧作梵。云何於此經等一行偈也。作梵了。南座唱經題目。所謂唱經長引。音多有屈曲唱經之會。大眾三遍散花。每散花時。各有所頌。唱經了。更短音唱題目。講師開經目。三門分別。述經大意。釋經題目竟。有維那師。披讀申事興所由。其狀中。具載无常道理。亡者功能。亡逝日數。知登州刺史姓烏名角。時人喚烏使君。有三諱字。明綺給也。明日即噵來日。青州節度使姓壽。時人喚壽尚書。無諱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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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경에 종을 친다. 오랫동안 타종하는 것을 마치면 강사와 도강(都講)註 323 註 324 두 사람이 법당에 들어온다. 대중은 먼저 들어와 줄지어 앉아 있다가 강사와 독사(讀師)註 325가 들어올 때 대중은 같은 목소리로 부처의 이름을 길게 빼며 찬탄한다. 그 강사는 북쪽의 높은 좌석에 오르고 도강은 남쪽의 높은 좌석註 326에 오르면註 327 찬불은 곧 그친다. 이때 아래 좌석에 있던 한 승려가 범패를 부르는데 ‘이 경전에서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한 줄의 게송(偈頌)이었다. 범패를 마치면 남쪽 좌석에서 경전의 제목註 328을 큰 소리로 외친다. 이른바 창경(唱經)은 길게 빼서 부르며 음에 굴곡이 많았다. 창경하는 동안 대중은 세 번 꽃을 뿌린다.註 329 매번 꽃을 뿌릴 때마다 각기 소원하는 바를 염송했다. 창경이 끝나면 다시 짧은 소리로 제목을 외친다. 강사는 경의 제목을 해설하고 삼문으로 나누어 경전의 대의를 강술한다. 경전 제목의 해설이 끝나면, 유나사가 이 강경법회를 열게 된 사유를 적은 문서를 펼쳐서 읽어 알린다. 그 문서 중에는 무상(無常)의 도리와 죽은 사람의 선행과 공덕註 330, 죽은 날짜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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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등주자사(知登州刺史)의 성은 오(烏)이고 이름은 각(角)인데, 당시 사람들은 오사군(烏使君)이라 불렀다. 기휘(忌諱)할 글자가 3자 있는데 명(明), 기(綺), 급(級)이 그것이다. 그래서 명일을 내일이라 한다. 청주 절도사의 성은 위(韋)註 331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위상서(韋尙書)라 불렀다.註 332 註 333 기휘할 글자는 없다.註 334 註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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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23 강사가 강경할 때 질문을 던지거나 강사의 해설을 구하는 등 강경법회를 돕고 이끄는 승려로, 대개 강사의 후배나 제자가 이 일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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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24 도강(都講)은 법사의 조교이다. 강사가 강경할 때 높은 자리에 올라 법사(法師)와 상대해 경문을 읽고, 때때로 질문을 던지는 승려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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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25 경(經)·논(論)을 강설하는 법회에 강사와 상대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 경(經)의 제목을 읽는 등의 일을 맡은 직책을 말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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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26 의식(儀式)이나 강경을 위한 높은 좌석인데, 남도(南都)의 여러 큰 절에서는 현재 사용되고 있다. 강당 일대에 설치되어 법사(法師)와 도강(都講)이 이것에 올라간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6~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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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27 북좌(北座)와 남좌(南座)는 의식이나 강경을 위하여 설치한 고좌이다. 강당에 한 쌍이 설치되고 강경법사와 도강이 여기에 앉는다. 남북 양좌(南北兩座)를 강좌(講座)·창경좌(唱經座)라고도 한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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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28 여기에서는 《법화경》의 제목이다. 도강(都講)이 경제(經題)를 부르는 역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돈황 출토 팔상압좌문(八相押座文)에도 보인다. 이에 따르면 열반회(涅槃會) 때 경전의 제목을 도강이 불렀다는 것이다. 돈황의 유마경압좌문(維摩經押座文)에도 그 내용이 보이는데, 《열반경》·《유마경》·《온실경》 등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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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29 법요(法要) 중에서 꽃을 뿌려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 꽃이 피면 부처님이 와서 앉으므로 하계(下界)에서는 꽃으로써 정토(淨土)한다. 또 귀신은 이 향내를 맡고, 빛 보기를 싫어하므로 악귀를 쫓고 부처님을 청하는 뜻으로 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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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 거행된 일일강의식의 해법 내용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 역시 여기에 나오는 적산 법화원의 ‘신라 일일강의식’이다. 이 법화에서는 강경의식 때에 찾아볼 수 없었던 산화행법이 새로 발견된다. 산화는 산화(散華)라고도 하며 사개법요(四箇法要) 가운데 하나이다. 권청(勸請) 또는 찬탄을 위하여 꽃바구니에 넣은 생화 또는 오색의 종이로 된 연꽃을 불전에다 뿌리는 행법을 말한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이 산화행법 때 불렀던 송사(頌辭)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돈황곡(敦煌曲) 가운데 발견되는 많은 불교 관계의 가곡에는 산화악(散花樂)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뿐만 아니라 법조의 《정토오회념불략법사관행의(淨土五會念佛略法事觀行儀)》〔《대정신대장경(大正新大藏經)》권47〕에서나 펠리오(Pelliot) 장래본 돈황문서(제3,216호)의 《정토오회념불송경관행의》 가운데에도 산화악문이 발견된다.〔김문경, 《당 고구려유민과 신라교민》, 일신사, 서울, 1986, 134~145쪽〕 그래서 당대의 산화악사는 초당(初唐)의 선도(善導, 613~681)와 중당(中唐)의 법조에 의하여 작사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적산법화원의 일일강의식에서 송찬된 산화사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산화사의 대분이 선도, 특히 법조의 소작이니만큼, 이 사원에서 찬송된 산화악사도 그들의 소작 가운데 하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12~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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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30 범어로 Samartha이다. 삼대에 통하는 공용능력(功用能力)을 말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과보(果報)를 낳는 선행이라는 뜻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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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31 평로치청절도사를 가리킨다. 치소가 청주였으므로 일반적으로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이때의 청주절도사에는 수(壽)란 성을 가진 절도사는 없다. 아마도 위(韋)의 잘못인 듯하다. 《구당서》 권17 문종본기에 의하면 개성 4년(839) 7월에 하남윤(河南尹)으로 있던 위장(韋長)이 평로군절도사로 부임하고 있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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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32 청주절도사는 평로치청절도사를 말한다. 치소가 청주였으므로 편의상 그렇게 불렀다. 한편 《구당서》 권17에 의하면, 개성 4년(839) 7월에 하남윤 韋長을 평로절도사로 임명했다고 하는데 韋長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위상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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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33 청주절도사는 치청평로절도사의 통칭이고 상서는 절도사의 존칭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상서(韋尙書)는 위장(韋長)이다. 《구당서》 권17 문종본기에 “개성 4년 7월 임인에, 하남윤 위장을 평로군절도사로 임명하였다”고 하였다. 위장의 경력은 상세하지 않지만, 이 해에 진군상(陳君賞)을 대신해 청주에 내임했다. 이것에 따라 초본 권3 개성 5년 8월 24일 내용의 첩문에 “수상서(壽尙書)”라고 한 것은 “위상서(韋尙書)”의 오기이다. 상서는 본래 상서성 6부의 장관인데, 위장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가 이전에 이 관직에 임했다던지 혹은 검교관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상서는 정3품관이고, 하남윤은 종3품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장이 절도사에 임명된 것은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간 것으로, 정3품관으로서 상서를 얻었던 것이다. 양주절도사인 이덕유(李德裕)를 상공(相公)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그가 재상이었던 것에 의해서인데, 이는 이례적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상서라고 칭해진 예는 위장밖에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7~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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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34 지등주자사(知登州刺史) 이하의 문장은 강경의식과 무관한 내용이므로 이 부분은 잘못 삽입된 내용으로 보인다. 그러나 혹시 강경 중에 기휘하는 글자가 나왔기 때문에 특별히 附記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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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35 오사군(烏使君)과 위상서(韋尙書)의 기사는 강경의식과는 전혀 무관하다. 따라서 이 부분은 잘못 삽입되거나 순서가 잘못된 듯하다. 혹은 원 저작의 퇴고가 아직 완성하지 못했던 것을 보이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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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誦經儀式。大唐喚作念經。打鍾定眾了。下座一僧。起打槌唱一切恭敬敬禮常住三寶。次一僧作梵。如來妙色身等兩行偈。音韻共唐一般。作梵之會。一人擎香盃。歷行眾座之前。急行々便休。大眾同音。誦摩訶般若題數十遍也。有一師。陳申誦經來由了。大眾同音誦經。或時行經本。或時不行經本。念經了。導師獨唱歸依佛。歸依法。歸依僧。次稱佛菩薩號。導師唱云。南無十二大願。大眾云。藥師瑠璃光佛。導師云南無藥師也。大眾同音云。瑠璃光佛。導師云南無大慈悲也。大眾同音云。觀世音菩薩。餘皆如此。禮佛了。導師獨結願[A6]廻向。々々稍長。[A7]廻向之後。導師云。發心。大眾同音亦云。發心。次導師唱發願已竟。頂禮三寶。次施主擎施物坐。導師與呪願便散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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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에서는 염송(念誦)이라 부른다. 종을 쳐서 대중을 좌정시키기를 마치면 아랫자리의 한 승려가 일어나 추(槌)註 336를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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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외친다. 다음에 한 승려가 범패를 불렀는데 ‘여래묘색신(如來妙色身)’ 등 2행의 게송이었다. 음운은 당나라와 같다. 범패를 부르는 동안 한 사람이 향합(香盒)을 들고 대중이 앉아 있는 자리로 두루 다니며 총총히 행향하고 쉬었다. 대중은 같은 목소리로 《마하반야경》註 337의 제목을 수십 번 낭송했다. 한 스님이 송경의식의 연유를 진술한 후 대중은 같은 소리로 송경했다. 어떤 때는 경본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경본을 돌리지 않기도 한다. 염경을 마치면 도사(導師)註 338 註 339가 혼자서 ‘귀의불(歸依佛) 귀의법(歸依法) 귀의승(歸依僧)’을 부르고 이어서 불보살의 이름을 부른다. 도사가 ‘남무십이대원(南無十二大願)’註 340 註 341이라 외치면 대중은 ‘약사유리광불(藥師琉璃光佛)’註 342이라 하고, 도사가 ‘남무약사(南無藥師)’라 하면 대중은 같은 소리로 ‘유리광불’이라 한다. 창도사가 ‘남무대자비(南無大慈悲)’라 하면 역시 대중은 같은 소리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 한다. 나머지는 모두 이와 같다. 예불을 마치면 창도사는 혼자서 결원문과 회향문을 읽는데, 회향은 다소 길었다. 회향 후에 창도사가 ‘발심(發心)’註 343이라 하면 대중도 같은 목소리로 역시 ‘발심’註 344이라 한다. 다음에 창도사가 ‘발원이 이미 끝났으니 삼보에 정례하라’고 외친다. 다음에 시주가 보시물을 가지고 앉으면 창도사는 주문을 외며 기원한다.註 345 그런 후 흩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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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36 추침(槌砧)·추정(槌静)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추(槌)라고 한다. 나무로 만든 타악기로, 기둥같이 생긴 모양과 널빤지 모양이 있다. 선사(禪寺)에서 사용하는 타판(打板)·목어(木魚)·방(梆)과 같은 것도 추(槌)의 변형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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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337 《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은 구마라즙이 번역하였다. 예부터 널리 염송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법화경의 제목과 동일한 형태의 경제(經題)만을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梁)의 무제는 중대통 5년(533) 동태사에 행차해 4부의 대회를 열고 스스로 높은 좌석에 올라 金字의 마하열반경의 경제를 독송한 것이 7일에 미쳤다고 한다(《양서》 권3 무제본기) 《광홍명집(廣弘明集)》권19에는 그때 도강(都講)의 법표(法彪)가 맨 처음으로 《마하열반열나밀경(摩訶般若般羅密經)》라고 칭했고, 그 후 황제가 스스로 개제(開題)했다고 한다. 또 당의 의종도 함통 3년(862) 궁궐 안에 강좌를 설치해, 스스로 그 경제를 부르고, 범문(梵文)을 수록했다고 보인다(《불조통기(佛祖統紀)》 권43) (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8~159쪽).
101
註) 338 唱禮하는 말을 선도하는 승려로 唱導師라고도 한다.
102
註) 339 도사(導師)는 범어로 Nayaka pramukha이다. 중생을 인도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후에는 법회에 원문(願文) 표백(表白)을 말하고, 좌석을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대송승사략(大宋僧史略)》 권中) (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9쪽).
103
註) 340 12上願이라고도 하는데, 악사여래가 발원했다는 12항목의 기원이다. 十二大願의 내용은 《藥師如來本願經》에 소개되어 있다.
104
註) 341 남무십이대원(南無十二大願)은 12상원(上願)이라고도 하는데, 악사여래가 발원했다는 12항목의 기원이다.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에 그 내용이 보인다. 당시의 행법에는 16願이라고 해서 화엄경에 의거한 기원문도 행해졌다(《집제경예참의(集諸經禮懺儀)》 권上) (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9쪽).
105
註) 342 동방정류리국(東方淨瑠璃國)의 교주(敎主)로서 십이서원(十二誓願)을 발하여 중생의 병원(病源)을 구하고 무명(無名)의 고질(痼疾)을 치료했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33쪽).
106
註) 343 발심(發心)은 무상의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는 것을 뜻하는데, 도심(道心)이라고도 한다. 이 글은 발심 뒤에 발심 두 글자 외에 어느 정도의 글자가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9쪽).
107
註) 344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약어. 보리를 얻고자 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34쪽).
108
註) 345 여기에서 주문을 외우며 기원하는 것은, 시물시식(施物施食) 등을 받을 때 승려가 시주의 원하는 바에 따라 게어(偈語)를 불러서 기원한 것이다(《마가승기율(摩訶僧祈律》 제34 明威儀法) 주문을 외우며 기원하는 글은 반드시 같은 형태는 아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9~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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