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閏正月三日。當寺慶僧正入寺。屈諸寺老宿。於庫頭空㭟空飯。百種周足。兼設音聲。
7
[윤1월] 3일, 註 683이 절에서는 승정이 절에 온 것을 경축하여 여러 절의 노승을 초청해 식당에서 공손히 차註 684와 식사를 대접했다. 온갖 종류의 음식이 다 있어 두루 풍족했다. 겸하여 음악註 685도 연주했다.
8
註) 683 개성 4년 정원은 윤월달이다. (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5쪽).
9
註) 684 공(空)은 공손히 손을 올리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공손히 차를 대접하다는 뜻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5쪽).
10
註) 685 음악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의 사원 음악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5쪽).
13
四日依金正南([□@考]南東本作寄今從上文)請。為令修理所買船。令都匠番匠船工鍛工等卅六人。向楚州去。又([□@考]又東本作人今從池本)於當寺。請僧令乞雨。以七人為一番。以讀經。
14
[윤1월] 4일, 김정남의 청에 따라 구매한 배를 수리하기 위해 도장(都匠)註 686, 번장(番匠)註 687, 선공(船工)註 688, 단공(鍛工)註 689 등 36명으로 하여금 초주로 가게 했다. 사람들이 이 절에서 승려들이 비가 내리도록 빌기를 청했는데, 7명이 한 조가 되어 돌아가며 불경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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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686 모든 기술자를 감독하고 지휘하는 장인의 우두머리이다.
16
註) 687 노련한 기술자로서 大匠이라고도 한다.
17
註) 688 《연희식(延喜式)》 권30에 선공(船工), 단생(鍛生) 등의 이름이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5쪽).
18
註) 689 도장(都匠)은 공장(工匠)의 총감독, 번장(番匠)은 도장 아래의 대공(大工), 선공(船工)은 배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목공, 단공(鍛工)은 쇠붙이를 다루는 장인을 말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78쪽).
19
대장장이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04쪽).
22
五日([□@考]日下或脫雨字)下入夜雷鳴電光洪雨。似夏月雷雨。自後七箇日降雨。至望始晴。相公為修理開元寺瑞像閣。設講募緣。始自正月一日。至于今月八日講畢。以五百貫買木。曳置寺庭。且勾當令整削之。本國朝貢第一舶使下水手射手六十餘人。皆竝臥病辛苦。
23
[윤1월] 5일, 비가 내렸다. 밤이 되자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며 많은 비가 왔다. 여름철에 천둥치며 비 오는 것과 비슷했다. 이후 7일 동안 비가 내리다가 보름註 690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늘이 개었다. 상공 註 691이 개원사註 692 서상각을 수리하기 위해 강경 법회註 693를 열어 인연있는 사람을 모집하였는데, 정월 1일註 694에 시작하여 이달 8일에 강경을 마치기로 되어 있다. 500관의 돈으로 나무를 사서 끌어다가 절의 뜰에 놓아두고 또 담당자로 하여금 그것을 깎고 다듬게 했다. 본국 조공사 제1선의 우두머리 이하 수수, 사수 등 60여 명은 모두 병으로 누워 고생하고 있다.
24
註) 690 만월(滿月)하는 15일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25
註) 691 양주대도독부도독 이상공을 줄인 말이다. 이덕유를 말한다. 이곳에 부인하기 전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재직하였다. 개성 2년 5월에서 개성 5년 7월까지 양주도독 및 회남절도사를 맡고 있었다(《신당서》권 180)(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162쪽).
26
註) 692 당대의 관사(官寺)이다. 개원 26년(738) 칙령에 의하여 각 주의 치소마다 세우게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161쪽).
27
註) 693 《금강경》을 강론하였다. 정월 7일조를 참고(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7쪽).
28
註) 694 강경회가 시작된 날은 8일부터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05쪽).
31
十九日天台山禪林僧敬文來相見。書云。敬文住天台山禪林寺。隨師在此山中。出家廿一。受學四分律南山鈔。學天台法花經止觀。去年十月初三日。離寺至浙。至西蘇州。知日本國有使進獻。有大和尚相從。故此尋訪。敬文又於童年時。隨和尚行滿。見㝡澄闍梨來。取天台教門。爾後計已卅年。未得消息。適聞知。澄大德已靈變。道門哀喪。當須奈何。先許。滿和尚却來入天台山。滿和尚已亡化。經十六年。敬文忽聞二大德在。故此尋訪。受請益僧書。爰圓仁是前入唐澄和尚之弟子。為尋天台遺迹來到此間([□@考]間東本作聞恐非也)。緣勅未下。暫住此寺。不得進發。請照之。敬文書云。㝡澄和尚。貞元廿一年。入天台。後歸本國。深喜得達。所將天台教法。彼土機緣多少。彼國當時儲君云是南岳示生。今後事宜不委。今既是澄和尚弟子。勑未下前。何不且入天台待。忽住此經久勑下來。使即發還本國。如何更得從容(云々)。請益僧問。未審彼天台國清寺幾僧幾座主在。敬文答云。國清寺常有一百五十僧久住。夏節有三百已上人泊。禪林寺常有四十人住。夏節([□@考]節東本作即)七十餘人。國清寺有維蠲座主。每講止觀。廣修座主下成業。禪林寺即是廣修座主長講法花經止觀玄義。冬夏不闕。後學座主亦有數人(云々)。多有語話。如今任住當州惠照寺禪林院。到暮歸去。
32
[윤1월] 19일, 천태산 선림사(禪林寺)註 695 註 696의 승려 경문(敬文)이 왔으므로 만나보았다. 글로 써서 말하기를
33
“저 경문은 천태산 선림사에 거주한다. 스승을 따라 이 산중에 있는데, 출가한지 21년註 697이 되었다. 《사분률남산초(四分律南山鈔)》註 698와 《천태법화경지관(天台法花經止觀)》註 699 註 700을 배웠다. 지난해 10월 3일에 절을 떠나 절서(浙西)지방의 소주(蘇州)에 이르렀더니註 701 註 702 마침 일본국 사절이 진헌(進獻)하고 큰 스님께서 그들을 따라 온 것을 알았다. 그런 까닭에 이렇게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행만(行滿)註 703 註 704스님을 따랐는데, 최징(㝡澄)註 705스님이 와서 천태 교문(敎門)에서 배우는 것을 보았다. 그 이후를 헤아려보니 이미 30년이 되었다.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마침 최징스님이 이미 입적했다는 말을 들어서 알게 되었다. 도문(道門)을 잃은 슬픔을 마땅히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 일에 앞서 저는행만스님에게서 물러나와 천태산으로 들어갔는데, 행만스님이 돌아가신 지도 이미 16년이 지났다. 문득 두 스님이 와 있다는 것을 듣고서 이곳을 방문하였다.”
34
고 하였다. 청익승이 글로 써서 말하기를
35
“저 원인은 곧 앞서 당나라에 들어온 최징스님의 제자이다. 천태의 유적을 찾아보기 위해 이곳에 왔으나 조칙이 아직 내려오지 않아 잠시 이 절에 머물러천태로 가지 못하고 있다. 청컨대 이런 사정을 헤아려 달라.”
37
“최징스님은 정원(貞元) 21년에 천태에 들어갔다가 후에 본국에 되돌아갔다. 스님은 그곳에서 가르침을 터득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그가 가지고 간 천태교법은 그 땅에서 얼마만큼의 인연을 맺게 하였는가? 당시 그 나라에서는 태자註 706를 남악이 환생註 707한 것이라 말한다고 하는데 그 이후의 일은 지금 자세히 모르겠다. 스님은 이미 최징스님의 제자이다. 조칙이 내려오기 전에라도 잠깐 천태산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하여 조칙만을 기다리는가? 문득 이곳에 머무르며 시간을 지체한 후에 조칙이 내려오면, 그때는 사절단이 이곳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어찌 그렇게 조용히만 있는가?”
40
“그 천태산의 국청사註 708 註 709에는 몇 명의 승려와 몇 명의 좌주가 있는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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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청사에는 150명의 승려가 상주하고 있다. 여름철에는 300명 이상이 머문다. 선림사註 710에는 40명의 승려가 상주하고, 여름철註 711에는 70여 명이 거주한다. 국청사에는 유견(維蠲)註 712좌주 註 713가 있는데, 매일 지관을 강설한다. 그는 광수(廣修)註 714좌주 註 715 아래에서 학업을 이루었다. 선림사에는 이 광수좌주가 오랫동안 《법화경지관》과 《법화경현의(法花經玄義)》를 강설해 왔는데 겨울과 여름에도 쉬지 않는다. 후학의 좌주도 몇 명이 더 있다”
43
는 등등 많은 말을 하였다. 경문은 현재 이 주의 혜조사 선림원에 거주하고 있다. 저녁이 되어 돌아갔다.
44
註) 695 천태산 佛隴峰에 있는 사찰로서, 처음에는 修禪寺라 하였다가 정원 4년(788)에 선림사로 개칭하였다.
45
註) 696 절강성 태주 천태현의 국청사에서 10여리 떨어진 불롱(佛隴)에 있다. 국청사와 함께 천태산의 명찰이다. 천태종의 개조 지이는 처음 입산하여 이 절을 불롱도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태건 10년(578) 수선사의 사액이 내렸다. 국청사가 건립되자 다시 수선도량이 되었다가 정원 4년(788) 선림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2쪽).
46
註) 697 출가하여 수계를 받고 하안거를 21번 보냈다는 의미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3쪽).
47
註) 698 남산율종의 개조 도선(道宣)이 찬술한 사분율산번보궐행사초(四分律刪繁補闕行事鈔)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3쪽).
48
註) 699 전체 10권으로 구성된 摩訶止觀을 말한다. 《법화현의》 《법화문구》와 함께 법화 3대부라 일컬어지는데, 모두 智者가 찬술한 것이다.
49
註) 700 《법화경(法華經)》과 《마하지관》을 말하는지 《마하지관》만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마하지관》은 《법화현의》, 《법화문구》와 함께 지자의 찬술로 법화 삼대부라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4쪽).
50
註) 701 원문에는 “至浙至西蘇州”라 하여 “절강에 이르렀다가 다시 서쪽의 소주에 이르렀다”로 해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少野勝年의 견해를 따라 浙 다음의 至가 잘못 들어간 오기로 보고 “절서의 소주에 이르렀다”로 해석하였다.
51
註) 702 절(浙) 다음의 지(至)가 잘못 들어간 오기이다. 절서의 소주에 이르렀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4쪽).
52
註) 703 蘇州 사람으로 20세에 출가하여 처음에는 律宗을 배웠고, 후에 堪然으로부터 《마하지관》과 《열반경소》 등을 배웠다. 그 뒤에, 스승을 따라 천태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송고승전》 권22와 《불조통기》 권10 등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53
註) 704 소주 사람으로 20세에 출가하여 2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감연 아래에서 《마하지관》, 《열반경소》등을 수학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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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05 일본 천태종의 개조이다. 강주(江州) 지하(志賀) 출신이다. 13세에 출가하여 국분사(國分寺)에서 대국사 행표화상(行表和尙)의 가르침을 받았다. 서기 804년 전교대사 공해(空海)와 더불어 입당하여 수선사(修禪寺) 좌주(座主) 도수선사(道邃禪師), 천태산 불롱정사(佛隴精舍) 행만대덕(行滿大德)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2년의 수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감무(桓武) 천황의 총애를 받으며 천태종을 일으킨 뒤 중도원(中道院)에서 입적하였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79쪽).
55
註) 706 황태자를 말한다. 여기서는 성덕태자(聖德太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6쪽).
56
註) 707 성덕태자(聖德太子)가 남악혜사(南岳慧思)의 환생이라는 전설이다. 이런 내용은 일본 불교 관계에 수차례 나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6쪽).
57
註) 708 개황 18년에 수 양제가 智凱의 유지를 이어 건립한 천태종의 근본 도량이다. 지금의 강소성 천태현 佛隴山에 있다.
58
註) 709 절강성(浙江省) 태주(台州) 천태현(天台縣)에 위치한 천태종의 근본 도량이다. 수 양제가 지이를 위하여 개황 18년(598)에 건립하였다. 처음에는 천태사(天台寺)라 하다가 대업 원년(605)에 국청(國淸)이란 사액이 내려졌다. 회창폐불(會昌廢佛) 이후는 천태 교학보다 선종이 융성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7쪽).
59
註) 710 절강성 태주 천태현의 국청사에서 10여 리 떨어진 불롱(佛隴)에 있다. 국청사와 함께 천태산의 명찰이다. 천태종의 개조 지의는 처음 입산하여 이 절을 불롱도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태건 10년(578) 수선사의 사액이 내렸다. 국청사가 건립되자 다시 수선도량이 되었다가 정원 4년(788) 선림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2쪽).
60
註) 711 승려들이 하안거를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8쪽).
61
註) 712 광수의 제자로서,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62
註) 713 광수(廣修)의 제자이다. 일본 천태종 연력사(延曆寺)에서 문의하러 간 교학상의 의심스러운 점을 해답해준 학문승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9쪽).
63
註) 714 절강 東陽人으로, 속성은 유씨(劉氏)이고 道邃의 제자이다. 《송고승전》 권30과 《불조통기》 권8 등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는데, 선림사에 거주하면서 《법화경》, 《유마경》, 《금광명경》, 《범망경》과 《사분율》을 독송하였으며 천태종의 8대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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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15 천태 제11대조 지고존자(至高尊者)를 말한다. 절강 금화현(金華縣) 출신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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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아로부터 《금강계제존의궤》를 빌려 베끼다
67
廿一日敬文又亦來。筆言通情。已後相續來語話。就嵩山院持念和尚全雅。借寫金剛界諸尊儀軌等數十卷。此全和尚。現有胎藏金剛兩部曼㭟羅。兼解作壇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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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1월] 21일, 경문이 또 왔으므로 글로 써서 서로의 생각을 소통했다. 그후에도 계속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숭산원(嵩山院)註 716의 지념註 717 화상인 전아(全雅)註 718 註 719에게 가서 《금강계註 720제존의궤 註 721(金剛界諸尊儀軌)》 등 수십권註 722을 빌려서 베꼈다. 전아스님은 현재 태장계註 723와 금강계 양계만다라를 가지고 있다. 아울러 계단(戒壇)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
69
註) 716 양주성내 동궤방(同軌坊)에 위치하고 있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0쪽).
70
註) 717 정법을 받아 간직하고 항상 염송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밀교 경전을 독송하고 다라니를 염송하며 만다라를 염지하는 것 등의 밀교 수행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1쪽).
71
註) 718 惠果의 문하인 弁弘의 제자이다. 덕이 높았으며 키가 6척으로 梵書를 능해 읽고 해석할 수 있었다고 한다.
72
註) 719 불공삼장의 4대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원인은 양주에서 이 승려로부터 수계할 때 정수리에 물을 붓는 관정(灌頂)의 의식을 받고 금강계의 비법을 비롯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1쪽).
73
註) 720 밀교에서 근본 양부(兩部)의 하나로서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지덕을 표시한 부분이다. 여래의 지덕은 모든 유혹을 깨뜨리고 그 힘이 예리하기가 금강과 같다는 데서 유해한다. 대일여래는 진언종(眞言宗)의 본존으로서 대우주를 밝히는 대일륜(大日輪)을 의미하며 모든 세상의 만물을 기르는 자모(慈母)와 같은 이지(理智)의 본체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80쪽).
74
註) 721 밀교의 근본 경전에 말한 불(佛)·보살(普薩)·제천(諸天)·신(神)을 염송하고 공양하는 의식궤칙(儀式軌則)을 말한 것이다. 변하여 이러한 의식궤칙을 귀록한 일부의 경전도 의궤라고 말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80쪽).
75
의궤(儀軌)는 밀교 경전에 강설하고 있는 불·보살·제천·신 등의 염송과 공양에 관한 의식의 궤칙을 말한다. 또 이것들을 기술한 전적도 의궤라 한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08쪽).
76
註) 722 의궤(儀軌)는 밀교 강설하고 불, 보살, 제천, 신 등의 염송과 공양에 관한 의식의 궤칙을 말한다. 또한 이것을 기술한 전적도 의궤라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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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723 대일여래의 자비한 면을 표현하는 밀교의 법문으로서 연화(蓮華)를 그 표상으로 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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