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仲春漸暄。伏惟。押衙尊躰。動止萬福。即此圓仁蒙恩。忽奉翰墨示。及具承高情。恩勞厚深。凡在少僧不勝感荷。伏准縣報云。以申州候十數日間。州司有處分。方可東西者。微心斟酌。理灼然。但所期行李。萬有餘里。遠客私望。非此公務竊惟縣司申州。未必早急。若有遲怠空過。行節當入熱時。伏請。更垂恩謀。圓仁。雲程([□@考]程東本作▆似程字雲程見下文狀中)踰險。專心志道。偏貪早出。不慮嫌責。輕以少事。奉煩麾下。悚愧雖積。不能默止。斯乃為慕押衙庇蔭。伏望。重加催勸。早賜處分。然則。洪濟芳聲。遠振海外。求法善根。同結金蘭。不任勤仰之至。謹遣弟子惟正。奉狀代申。不宣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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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다시 서장 1통을 작성해 압아를 재촉하였다. 그 서장은 아래와 같다.
12
중춘(仲春)이라 날씨가 점점 따뜻해집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압아의 존체와 기거에 만복이 가득하십시오. 이 원인은 은혜를 입어 홀연히 회답 서신을 받았고 또 높으신 마음도 입었습니다. 그 은혜와 노고가 두텁고 깊어 무릇 소승(小僧)에게는 그 고마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현의 회신을 받들건대 ‘주에 알려야하므로 십여일 기다려라. 주사(州司)의 처분이 있으면 바로 동서 어디로든지 자유로이 가도 좋다.’라 하였습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 헤아려보아도 이치는 명확합니다. 다만 계획하는 여정은 1만여 리가 됩니다. 먼 곳에서 온 나그네의 사사로운 바람이지 이는 공무는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현사가 주에 보고하는 것을 반드시 서둘러 할 것 같지 않습니다. 만약 태만하고 지체하여 헛되이 시간을 보내면, 떠날 때는 날씨가 더운 계절에 들어가게 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다시 한번 은혜를 베풀어주기 청합니다. 원인은 먼 여정註 430의 험난한 길을 넘어 오로지 한 마음으로 불도에 뜻을 두고 있어, 일찍 출발하고자 욕심내었습니다. 염치와 책망을 돌아보지 않고 가벼이 사소한 일로 휘하(麾下)에게 걱정을 끼쳤습니다. 비록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이 쌓이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압아의 보살핌註 431을 흠모하기 때문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거듭 재촉하고 권하여 일찍 처분을 받게해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널리 구제한 꽃다운 명성이 멀리 해외에까지 떨쳐 구법을 도운 선행은 서로 우애의 정註 432을 맺을 것입니다. 앙모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삼가 제자 유정을 보내 대신 서장을 받들어 올립니다.이만 줄여 삼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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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구법승 원□이 서장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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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30 ‘雲程’은 먼 여정을 뜻한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25쪽).
16
註) 431 비음(庇蔭). 차양의 그늘로서, 보살핌의 뜻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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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32 원문의 ‘金蘭’은 우정의 두터움과 의기투합하는 마음을 말한다. 《역경》에서 온 말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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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押衙報云。更差使申。懇計不久即來。且願客無至憂屑。座主自到弊管止泊時。多少人終日區々(云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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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람을 보내 간절한 뜻을 아뢰었으니 오래지 않아 회답이 올 것입니다. 또 당신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 좌주註 433께서 나의 관할 지역에 와서 머물던 때부터 몇몇 사람들이 종일토록 힘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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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33 여기서는 일본 구법승 원인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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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상좌의 제자 사미 사경(師敬)註 434이 절을 나가 서쪽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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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34 개성 5년 정원 15일조에 소개한 법화원 승려의 명단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이다. 이는 혹시 師敎의 오기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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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日黃昏。寺主弟子沙彌詠賢。偷率上座小師師俊。兩人同心。暗出走去。院中老少。無人聞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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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해질 무렵에 사주의 제자 사미 영현(詠賢)이 몰래 상좌의 소사(小師)註 435 註 436인 사준(師俊)을 데리고, 두 사람이 공모해 어둠을 틈타 달아났다. 산원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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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35 인도에서는 受戒한 지 10년이 되지 않은 승려를 소사라 하였으나, 여기서는 단순히 젊은 승려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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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36 소사(小師)는 소승(小僧)이라고도 한다. 《석씨요람(釋氏要覽)》 권上에 “寄歸傳(권3 受戒軌則)에 말하는 鐸曷攞는 당의 소사라고 한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수계(受戒)한 지 10년이 되지 않은 승려를 소사라고 한다. 소사는 주위(住位)에 대응해 사용되는 젊은 승려를 부르는 말이다. 또 때때로 자신의 겸칭(謙稱)으로 사용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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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日依新羅僧常寂請。往[A9]劉村。到彼便見白石彌勒像躰上著土。問事由。答云。於此有新羅人王憲。夜夢有一僧。來語云。我是文殊師利。古佛堂墮壞。積年無人修緝。佛菩薩埋沒土中。見汝信志。故來告報。若欲知實。拙([□@考]拙恐掘字)家東南寶圖邊。便得見者。寤且驚恠。以夢中事。語諸道俗。遠赴古圖邊。鋤掘地。深至𦙄上。尋得佛[A10]菩薩像。今見掘得彌勒佛像一體。文[A11]殊師利[A12]菩薩一躰。普賢[A13]菩薩一軀。觀世音[A14]菩薩兩軀。大師子[A15]菩薩一躰。羅睺羅一軀。佛骨鐵閣廿斤已上。諸人見之。奇異不少。夜頭禮佛。道俗會集。施捨通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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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註 437신라승 상적(常寂)의 초청으로 유촌(劉村)註 438에 갔다. 그곳에 도착하여 곧 흰 돌로 만든 미륵상註 439을 보았는데, 그 몸체 위에 흙이 묻어 있었다.註 440 그 까닭을 물어보니 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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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신라인 왕헌(王憲)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밤에 꿈속에서 한 승려가 와서 말하기를 ‘나는 바로 문수사리註 441이다. 옛 불당이 허물어져 부셔진 채 여러 해가 지났으나 아무도 수리하는 사람이 없어 불보살이 땅에 묻혀버렸다. 너의 신심을 보았기에 와서 알려 준다. 만약 그것이 사실인지 알고자 한다면 집의 동남쪽에 있는 보도(寶圖)註 442 옆을 파보면 곧 볼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잠을 깨어 놀랍고 괴이하여 꿈속에서의 일을 여러 승려와 속인에게 말하고 마침내 고도(古圖)註 443 옆으로 가서 괭이로 땅을 파, 깊이가 가슴팍에 이르러 불보살상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 미륵보살 1구, 문수사리보살 1구註 444, 보현보살 1구, 관세음보살 2구,註 445 대사자보살(大師子菩薩)註 446 1구, 라후라(羅喉羅)註 447 1구, 부처의 뼈가 담긴 철각(鐵閣)註 448 20근 이상을 파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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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밤에 예불하고 승려와 속인이 모여 공양하며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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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37 본 내용은 鎌倉시대 동대사(東大寺) 학승(學僧)인 종성(宗性, 1202~1292)이 그 저작 《미륵감응초(彌勒感應抄)》 제5에 채록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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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38 유촌(劉村)은 적산채(赤山寨)의 동북쪽 약 8리에 떨어진 곳에 있는 留村이라는 지명이다. 劉와 留는 같은 음이기 때문에, 그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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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39 흰 돌은 백색의 석회암 또는 대리암일 것이다. 북조의 조각 재료는 초암을 이용한 경우도 있지만, 다수는 석회암이었는데, 양질의 것은 백옥(白玉)이라고도 불렸다. 미륵상은 도솔천에 상생하는 보살 형태와 하생해서 용화수 밑에서 설법하는 여래 형태를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는 후에 서술되는 문장에 따라 미륵하생을 나타내는 여래 형태의 부처임을 알 수 있다. 육조 시대의 조각의 모습은 입상(立像), 기상(倚像), 질좌상(跌座像)이 있다. 그리고 촉지인(觸地印)의 예가 많지만 반드시 일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반가사유(半跏思惟)의 모습을 하는 것도 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이래 밀교적인 모습으로써 질좌한 것, 혹은 손에 탑을 받치고 있는 입상도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98~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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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40 원래 착색된 것으로 보인다. 혹은 애초에 채색하는 것을 보시하여 위에 흙 등을 붙이고 있었다고도 해석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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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41 문수보살의 본 이름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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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42 浮圖 곧 浮屠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나오는 古圖 역시 같은 뜻이다.
48
註) 443 여기에서 고도(古圖)는 오래된 부도(浮圖)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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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44 보살상을 세는 단위로써 초본에서는 躰라고 하였는데, 이 보살상만 그러하다. 그 외에는 세는 단위로 軀라 하기 때문에 軀라 고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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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45 종성(宗性)의 채록에 따라 “音樂菩薩兩軀”를 보충한다. 낙천(樂天)을 말하는 것 같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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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46 관세음보살과 함께 보장여래(寶藏如來) 밑에서 발원(發願)하여 장래의 성불을 약속받은 사자향보살(獅子香菩薩)을 의미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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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여래(寶藏如來) 아래에서 관세음보살과 함께 발원하여 성불의 약속을 받았던 사자향보살(師子香菩薩)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28쪽).
53
註) 447 라후라(羅喉羅)는 석가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라호라(羅護羅) 또는 라후라(羅吼羅)라고도 한다. 석가가 출가하기 이전에 낳은 아들로, 왕비 야수타라(耶輸陀羅)가 낳았다. 운강석굴 제19동에는 석가의 발 아래에 무릎 꿇어앉은 그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와 대면해 출가해 아라한(阿羅漢)이 되겠다고 약속하고,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단 여기에서 발굴된 여러 조각상은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문수·보현·쌍관음보살, 아한·가섭성문, 게다가 낙천·사자 등을 1조로 한 군상(群像)이다. 라후라는 원인의 해석이고, 실은 아난상(阿難像)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7존 내지 5존군상 형식은 동위·북제에서 유행했는데, 북조의 폐불 때 묻혀진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99~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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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48 철합(鐵閤), 즉 철로 만든 감(龕)을 의미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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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으로부터 공험 발급에 관한 소식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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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日齋不限人數。便見張押衙。得押衙報。云。西行之事。少人尋時差人上州。別取處分。三五日。留心相侍。如要懇急。此即專令所由奉送至縣。邐迤向前亦得。十五日間。崔押衙船從楊州來。在乳山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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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註 449재(齋)를 마련했는데,註 450 사람의 수는 제한하지 않았다. 문득 장압아를 만나보았다. 장압아의 회답을 받았는데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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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가는 일은 소인이 찾아갔을 때, 사람을 주에 올려 보내 별도의 처분을 받아야 하니 수일간註 451 유념하여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만약 간절하고 급하면 담당자로 하여금 현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연이어註 452 앞에서와 같이 해도 15일은 되어야 처분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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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였다. 듣건대 최압아 註 453가 배를 타고 양주에서 와서 유산포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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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49 열반일(涅槃日)에 해당한다. 유촌(劉村)의 소사원에서 하루 묵었던 원인은 그곳에서 가끔 열반회를 겸해서 출토한 제불(諸佛)의 공양회(供養會)를 거행하였다. 다만 법화원에 돌아온 것은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날 마련된 재(齋)는 같은 사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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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50 2월15일은 佛忌日 곧 석가모니가 열반한 날이다. 이 날은 열반법회를 열어 공양하는데, 유촌에서도 이 때문에 재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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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51 원문은 三五日이다. 구어로는 수일간을 의미하는데, 3~4일을 의미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문어적 표현으로 “15일간”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1쪽).
64
註) 452 원문의 ‘邐迤’는 연이어진 모양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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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53 최훈(崔暈, 제13랑)을 가리킨다. 개성 4년 6월 28일조에는 “최 병마사”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압아”라 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1쪽).
67
- 최훈과 장보고에게 보낼 서신을 맡겨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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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日為與崔押衙。留狀一封。囑者([□@考]者與這字同)院家。兼以書一封。同贈張大使。其狀如左。
69
披展改歲。德音希聞。勤積增深。春景已暄。伏惟。押衙尊體康裕。即此圓仁蒙恩隔以雲程。不獲覲謁。瞻囑日深。欽詠何喻。圓仁留住山院。多幸過年。厚蒙眾僧仁德。殊慰旅情([□@考]旅東本作張恐非也)。斯乃押衙慈造矣。庇蔭廣遠。豈以微身。能酬答乎。深銘心骨。但增感媿。先蒙芳旨。開春從縺水([□@考]縺恐漣字)。專使賜船。送達維南者。近聞臺山靈跡。不任追慕。圓仁本意。專尋釋教。幸聞聖境。何得不赴。緣有此願。先向臺岳。既違誠約。言事不諧。深愧高情。還恐。所遣使人。空致劬勞。莫賜恠責。求法已後。却歸赤山。從清海鎮。轉向本國。伏望。參張大使。具陳事情。圓仁却[A16]廻。略計明年秋月。若有彼方人船往來。請垂高命。特令尋看。僧等歸鄉。專憑鴻救。不任勤仰之至。謹留空狀代申。不宣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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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國求法請益傳燈法師位圓仁([□@考]仁下池本有狀上二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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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判官。尊體萬福。雖未接拳。先已蒙知聞。宛如面覲。伏惟。照悉事情同前。請莫厭辨緣。懷無紙不別書狀。垂恕幸甚。謹空
74
生年未祇奉。久承高風。伏增欽仰。仲春已暄。伏惟。大使尊躰。動止萬福。即此圓仁。遙蒙仁德。无任勤仰。圓仁。為果舊情。淹滯唐境。微身多幸。留遊大使本願之地。感慶之外。難以喻言。圓仁。辭鄉之時。伏蒙筑前大守寄書一封。轉獻大使。忽遇船沈淺海漂失資物。所付書札隨波沈落。悵恨之情。無日不積。伏[比/異]莫賜恠責。祇奉未期。但增馳結不情。謹奉狀起居。不宣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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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최압아에게 전할 서찰 1통을 적산원에 맡겨놓고 부탁하였다. 아울러 장대사 註 454 註 455에게 전할 편지 1통을 같이 주었다. 서장은 아래와 같다.
79
해가 바뀜을 진심으로 인사드립니다. 소식을 자주 듣지 못하여, 부지런히 쌓이는 정이 깊어갑니다. 봄 햇살은 이미 따뜻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압아의 존체가 강유(康裕)하리라 믿습니다. 저 원인은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우러러 의지하는 마음이 날로 깊고 흠모하는 정을 어디에 비유하겠습니까? 원인은 산원에 머물며 다행히 해를 넘겼습니다. 많은 승려들의 인덕을 두텁게 입었고 특히 여정을 위로받았습니다. 이는 곧 압아의 자비로움 덕분입니다. 보살펴 주심이 넓고 먼데 어찌 이 미천한 몸으로 능히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깊이 마음 뼈 속에 새겨두겠습니다. 다만 부끄러운 생각이 더할 뿐입니다.
80
일찍이 호의를 입어 새 봄에 연수(漣水)註 456 註 457에서 특별히 사람을 보내 배를 내어 회남(淮南)註 458까지 보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오대산의 신령스러운 유적을 듣고 추모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원인의 본래 의도는 오로지 부처의 가르침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성스러운 당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소원이 있어 먼저 오대산으로 갑니다. 이미 정성스러운 약속을 어겼고 말과 행동이 같지 않아 베푸신 온정에 깊이 부끄럽습니다. 오히려 보낸 사인(使人)을 헛되이 수고롭게 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괴이하게 여겨 책망하지 마십시오. 구법을 마친 후 적산(赤山)으로 돌아와 청해진(淸海鎭)註 459 註 460으로부터 방향을 바꾸어 본국으로 향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장대사를 찾아뵙고 사정을 상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원인이 돌아가는 것은 대략 내년 가을쯤이 될 것입니다. 만일 그 지방으로 사람과 배가 왕래하는 것이 있으면, 청하건대 고명(高命)을 내려 특별히 찾아보도록해주십시오. 저희 승려 등의 귀향은 오로지 압아의 크나큰 도움에 의지할 뿐입니다. 우러러보는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서장註 461을 올려 말을 대신합니다. 이만 줄이고, 삼가 서장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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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구법승 전등법사위(傳燈法師位)註 462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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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체 만복하시기를 빕니다. 비록 아직 직접 만나 인사는 못했으나, 일찍이 들어서 이미 알고 있어 마치 얼굴을 뵌 분 같이 느껴집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사정이 앞과 같다는 것을 잘 살펴서 혐오하며 버리지 마십시오. 품은 생각을 모두 적을 종이가 없어 서장을 나누어 쓰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머리를 조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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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이래로 아직 삼가 만나 뵙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높은 풍격(風格)을 들었는지라 엎드려 흠모하고 우러르는 마음이 더합니다. 중춘(仲春)이어서 날씨가 이미 따뜻해졌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대사의 존체와 거동에 만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원인은 멀리서 인자한 덕을 입어 우러러 받드는 마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원인은 옛날부터 품었던 생각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 땅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미천한 이 몸은 다행스럽게도 대사께서 발원한 곳註 464에 머물러 있습니다. 고맙고 즐겁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 비길 말이 없습니다. 원인이 고향을 떠날 때 엎드려 축전註 465태수(筑前太守)註 466의 서신 1통을 부탁받아 대사께 전해 올리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배가 얕은 바다에 가라앉음으로 인해 물건들은 떠내려가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부탁받은 그 서찰도 파도를 따라 흘러가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슬프고 한스러운 마음이 날로 쌓이지 않음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괴이하게 여겨 책망하지 마십시오. 언제 뵐지 기약할 수 없으나 다만 경모(敬慕)하는 정註 467은 더해갑니다. 삼가 글을 올려 안부를 여쭙습니다. 다 적지 못하고 삼가 서장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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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구법승 전등법사위원인이 서장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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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 대사 휘하(麾下)註 468에 삼가 조아립니다. 註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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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54 여기서는 청해진 대사 張保皐를 말한다. 이 책에서는 장 대사라는 용어가 모두 9차례 등장한다. 그 중에 장보고를 지칭한 것이 3차례이고 장영을 지칭한 것이 6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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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55 여기에서는 장보고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6쪽). 장보고는 신라인으로, 궁복(弓福)이라고도 한다. 장보고에 관한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전하고 있다. 앞의 한국측 사료에는 궁파(弓巴)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와 중국측 자료에서는 장보고(張保皐)로 나타나고 있다. 장보고의 본래 출신은 청해진이다. 당에 건너가 30세에 무녕군절도사(武寧軍節度使)의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828년 청해진 대사가 되어 황해, 동남중국해, 일본 연해안과 무역을 하였다. 신무왕의 등극에 공이 있어 감의군사가 되었고 뒤이어 문성왕때는 진해장군이 되었다. 그 뒤 중앙정부의 정쟁에 말려 염장에 의해 살해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一卷, 鈴木學術財團,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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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56 사주 연수현으로, 지금의 강소성 회음현 동북쪽 있던 현이다.
93
註) 457 연수(漣水)는 현명(縣名)으로, 강소성 회음현 동북쪽에 있다. 원인도 귀환할 때 이곳을 지나갔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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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58 회남(淮南)은 회수(淮水)의 이남으로 양주(揚洲) 지방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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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59 신라 흥덕왕대에 당에서 귀국한 장보고가 서남해안에 출몰하던 당의 해적 활동을 근절시킬 목적으로 청해에 군사를 주둔시킬 것을 주청하여 허락을 받아 지금의 전남 완도에 설치한 군진이다. 그는 청해진을 근거지로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에는 遣唐賣物使, 일본에는 廻易使를 보내는 등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했다. 청해진은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에 위치한 일종의 해상왕국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청해진이 설치된 곳은 완도 본도에서 170m 정도 떨어진 將島인데 섬 둘레를 외성과 내성으로 축성한 흔적과 경사가 완만한 섬의 남서쪽에는 木冊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사적 제308호 '장도청해진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96
註) 460 청해진(淸海鎭)은 전라남도 해내군 완도(莞島)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조에 “청해진은 완도에 있다. 신라 때 설치되었는데, 궁복(弓福, 장보고)이 대사(大師)였다. 문성왕文聖王) 때 궁복이 반란을 일으켜 진(鎭)을 파하였다.”라 하였다. 또 같은 책 해남현(海南縣)조에도 “완도는 해남현 남서쪽 10리에 있다. 둘레는 290리인데, 청해진이다.”고 한다. 완도는 당시 당과 신라의 교통의 요충지였다. 청해진에는 항해무역상으로 인해, 혹은 몰래 노략질하여 당에 팔려지는 노예를 감시하기 위해 경비대를 주둔시켰다. 이러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장보고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7쪽).
97
註) 461 원문은 謹留空狀代申이다. 空은 空首拜의 약칭으로, 勤空·空茶·空飯 등의 空도 모두 같은 형용사구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7쪽).
98
註) 462 전등법사위(傳燈法師位)는 승려의 위계이다. 천평보자(天平寶字) 4년(760) 제정한 승위(僧位)로(《속일본기(續日本記)》 권23), 제4위에 해당한다. 전등은 법맥(法脈)을 전해서 끊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승려의 위계에는 전등법사위 위에 傳燈大法師位가 있고, 그 아래에는 전등만위(傳燈滿位), 주위(住位), 입위(入位)가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8쪽).
99
註) 463 청해진에 소속으로, 병마사 崔暈의 명을 받고 원인을 데리러 온 사람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보아 청해진은 대사-병마사-판관의 직제로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100
註) 464 적산 법화원을 가리킨다. 이 사원은 본래 장보고 등이 건립한 곳이다(개성 4년 6월 7일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7쪽).
101
註) 465 일본 북큐슈[北九州]의 후쿠오카[福岡] 일대의 옛 지명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43쪽).
102
註) 466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권6에 의하면 승화 4년(837)경에 小野末嗣가 축전권수(筑前權守)에 임명되었다가 승화 7년에 안예권수(安藝權守)로 옮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재임은 약 3년간임을 알 수 있다. 승화 7년 정월에 小野末嗣를 대신해서 기조신(紀朝臣) 綱麻呂가 축전태수에 임명되고 있는데, 견당선이 출발할 때에는 小野末嗣가 재임 중이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일본에서 태수(太守)라는 칭호가 정식으로 사용된 것은 천장(天長) 3년(826)인데, 특히 상총(上總)·상륙(常陸)·상야(上野)의 국수(國守)는 왕이 친히 임명하고, 국수를 대신해서 그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정해졌다(《유취삼대격(類聚三代格)》 권5) 이것에 대해서 중국에서는 한 경제 때 군의 장관명으로써 사용되었던 것이 시작이었는데, 이후 자사(刺史)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7쪽).
103
註) 467 원문은 馳結之情이다. 초본에서는 馳結不情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편지의 용어로서 “拜觀未由, 伏增馳結” 혹은 “唯增馳結”등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7~208쪽).
104
註) 468 麾는 장군의 깃발로 휘하는 곧 그 부하를 뜻한다. 여기서는 상대방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105
註) 469 초본(抄本)에서는 이 장보고의 편지 다음에 개성 5년 3월 3일의 원인이 공험을 발급 신청 내용 및 시물(施物)에 대한 감사장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지전본(池田本)에는 원인의 공험 신청 내용의 235자가 없는데, 시물에 대한 감사글에는 그 말미에 “日本國求法僧傳燈法師位圓仁狀上”이라는 15자를 더하고 있다. 이 문서는 내용과 내용 그 외의 것들로부터 추측했을 때 등주자사(登州刺史)의 것이 확실한데, 가끔씩 문서가 고본 속에 섞여 들어가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 글(초본 권2의 77~80쪽).을 빼고, 고쳐서 개성 5년 3월 3일조에 부기하고, 3월 5일조에 주석을 덧붙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08쪽).
106
([□@考]日本以下界線內十八行再出下文故今削之(四八 四九)頁)
108
請蒙賜公驗往赴五臺等名山及諸方巡禮聖跡尋師學法僧圓仁弟子惟正惟曉行者丁雄滿緣身衣鉢等
109
右圓仁等大([□@考]大下文作本)心志慕釋教修行佛道遠聞中花五臺等諸處佛法之根源大聖之化處西天高僧踰險遠投漢([□@考]漢下文作唐)國名賢([□@考]賢下文作德)遊[A17]茲得道圓仁等不任([□@考]不任下文作舊有)欽羨涉海訪尋未遂宿願去開成四年六月內到文登縣青寧鄉赤山新羅院隔生緣於滄溟忘懷土於海岸幸蒙放任東西遊([□@考]遊下文作得)到君仁境今欲往詣諸方禮謁聖跡尋師學法恐所在州縣戍城門街([□@考]戍以下四字下文無)關津鋪村([□@考]鋪村下文作口鋪及三字)寺舍等不練行由伏望([□@考]望下下文有使君仁造四字)賜給([□@考]賜給下文作特賜)公驗將([□@考]將下文作以)為憑鏡([□@考]鏡下文作據)謹具如前([□@考]謹以下四字下文無)伏請處分牒([□@考]牒下下文有件)狀如前謹牒
111
日本國求法僧傳燈法師位([□@考]傳以下五字下文作圓仁狀上)
112
日本國求法圓仁。伏蒙惠賜公物若干。專在微身。不勝感荷。圓仁。是外蕃庸僧。何敢當斯重施。實難銷謝。但增悚愧。伏惟。使君忠正膺天心。榮貴列干城清風高標。仁化遐敷。軍府晏然。緇素欽仰。圓仁。為求佛教。感德遠來。留遊貴境。幸沐仁德。凡在下情。无任感慶
114
日本國求法僧傳燈法師位圓仁狀上([□@考]日本以下十五字東本無。今從池本)
117
十九日([□@考]十九日東本無。今從池本)齋後出赤山新羅院入縣。院主僧法清。相送到勾當新羅使張押衙宅。押衙相見云。適來得縣牒。擬差人報去。和上自來赴到此。誠知行李甚有感應。深以相慶。便見縣牒。
120
牒。檢案內被([□@考]被恐彼字歟)帖稱。前件客僧等。先在赤山院住。全([□@考]全東本作舍)為春暖欲往諸處巡禮。恐不練事由。今欲放東西。未㝡([□@考]㝡恐敢字)專擅狀上者。奉帖准狀放去者。未有准帖。牒勾當新羅張押衙所。請處分者。准狀牃張押衙者。謹牒
126
19일, 註 470재를 마친 후 적산 신라원을 나와 현에 들어갔다. 원주승(院主僧)註 471 법청이 구당신라사 장압아의 집에까지 바래다주었다. 압아가 우리를 만나자 말하기를
127
“마침 현의 공문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시켜 알리려는 참이었는데 스님이 스스로 이곳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이번 여행은 감응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깊이 경하합니다.”
128
라 했다. 곧 현의 첩문을 보여주었다.
129
문등현에서 구당신라소압아소(勾當新羅押衙所)에 보는 첩문註 472
130
본 현이 앞서 말했던 일본국 선상의 객승 원인 등 4명에 관한 일
131
통첩한다. 조사서를 보니 그 첩문에 이르기를
132
“앞에서 말한 객승 등은 일찍이적산원에 머물고 있다가, 완연한 봄이 되어 따뜻해졌으므로 여러 곳을 순례하고 하는데, 거쳐 가는 곳의 관리가 사정을 잘 모를까 두려워합니다.註 473 지금 동서 어느 쪽으로든 마음대로 보내고자 하나, 아직 감히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서장을 올립니다.”
133
라고 하였다. 첩문을 받들어 서장의 내용에 의거하여 떠나보내려고 하지만 아직 의거할 첩문註 474이 없다. 그래서 구당신라소에 장압아 처소에서 첩문을 내리는 것이다. 서장에 준하여註 475 장압에게 통첩한다. 삼가 첩문을 보낸다.
135
전(典)註 477 왕좌(王佐)가 첩한다.
137
현의 압인(押印)註 479이 세 곳 찍혀 있다.註 480 註 481
139
註) 470 초본(抄本)에서는 2월 17일조에 공험 발급 신청의 내용 및 시물(施物)에 대한 감사글을 담고 있다. 원인의 공험 신청 내용은 3월 3일이다. 그리고 시물에 대한 감사글 말미에는 “開成五年二月十九日”라고 있는데, 이것은 다음 기사에 연이어 기재되어 있다. 지전본(池田本)에서는 19일 다음에 초본(抄本)에 보이지 않는 “日本國求法僧傳燈法師位圓仁狀上十九日”이라는 18자가 부가되어 있다. 이것은 합리적인 것으로, 실제로 원본이 그쯤에서는 읽기 어려워 이러한 18자를 보충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문서 그것이 불완전하다던가 혹은 개성 5년과 2월 19일 사이에 탈자(脫字)가 있었다고 보인다. 라이샤워는 유방전본(遊方傳本)에 따라 19일의 기사를 독립된 것으로 보지 않았는데, 여기에서는 19일의 기사를 분리해서 보겠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1쪽).
140
註) 471 사주(寺主). 감사(監寺)의 옛 이름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44쪽).
141
註) 472 하위의 관청에 해당하는 경우는 해당 이름을 다음에, 상사로의 신고는 해당 곳을 전에 기록한다. 예를 들어 문등현이 압아소에 보내는 경우 “文登縣牒 勾當新羅押衙所”라 쓰고, 문등현이 도독부에 보내는 경우 “登州都督府 文登縣牒”이라고 쓰는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1쪽).
142
註) 473 원문은 恐不練事由이다. 恐 뒤로 “所在州縣關律鋪村”과 같은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1쪽).
143
註) 474 허가서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1쪽).
144
註) 475 서장은 원인이 원하는 것을 제출한 것이다. 이것은 먼저 법화원에 제출되었고, 구당신라소에도 제출되었는데, 그곳에서 현(縣)에 전달된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2쪽).
145
註) 476 지전본(池田本)에는 20일이라고 한다. 이 공문의 발행은 19일 이전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초본(抄本)에 10일이라는 것이 옳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2쪽).
146
註) 477 전(典)은 주사(主事)의 별칭이다. 관문의 직원에 전사(典事)가 있는 것 외에, 당나라 제도에서는 현·주·도독부 등에 “전”이라고 하는 직명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속칭으로써는 일본에서 “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개성 5년 3월 11일 내용을 보면, 등주도독부에서 압양번사(押兩蕃使)에게 보내 공문에도 전의 광종제(匡從制)가 있다. 이외에도 사(史)의 광종제가 있는데, 사와 전은 동일하게 쓰여지고 있다. 사는 도독부 서기관의 호칭이다(《신당서》 제49 백관지)(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2쪽).
147
註) 478 부위(副尉)의 오기(誤記)일 수도 있다. 839년 9월 3일자 일기 참조(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45쪽).
148
註) 479 압인을 뜻한다. 지면(城面)에 어떤 것으로 표시한다는 뜻이다. 옛날 공문·서찰을 봉할 때 점토에 압인하여 개봉을 금지한 데서 온 것이라 한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33쪽).
149
註) 480 이 첩문 뒤에 2월 23일자로 된 문등현에서 등주도독부로 올린 첩이 수록되어 있으나, 내용과 날짜에 의하여 이 첩문을 2월 24일조로 옮겼다.
150
註) 481 이 문등현의 편지 다음에는 문등현에서 등주도독부에 올린 공험(公驗)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내용이 개성 5년 2월 23일의 것이다. 내용을 보았을 때 여기에 있어야 하지 않으므로, 2월 24일 기사 뒤에 삽입시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4쪽).
152
- 문등현에 도착해 극락사리원에서 숙박하다
153
廿日押衙牒付圓仁等。送縣司。令出公驗。兼差所由。李明才相送入縣。便辭別押衙。及共赤山院主僧法清等。相別了。向北行廿里。到望海村王家斷中。齋後北行五十里。夜到文登縣。入惠海寺極樂闍梨院宿。
154
[2월] 20일, 압아가 원인 등에게 첩문을 주어 현사에 보내 공험註 482을 내어주도록 했다. 겸하여 담당자註 483인 이명재(李明才)를 뽑아 현까지 바래다주도록 했다. 곧 압아와 작별하고 아울러 적산원 원주 법청과도 작별했다. 북쪽을 향해 20리를 가서 망해촌(望海村)註 484에 도착해 왕씨 집에서 단중(斷中)註 485 註 486하였다. 재를 마친 후 북쪽으로 50리를 가서 밤에 문등현에 도착했다. 혜해사(惠海寺)에 들어가 극락사리원에서 숙박했다.
155
註) 482 여기에서 공험(公驗)은 여행의 증명서이다. 공험(公驗)은 관청에서 발급하는 것으로 공적인 증명서를 말한다. 공빙(公憑)이라고도 부른다. 빙(憑)은 증거를 뜻하고, 험(驗)은 증명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공험은 넓게는 공적 증명서의 총칭이며, 여행에 있어서 관청의 증명을 필요로 한 점에서 좁게는 오로지 여행(교통) 증명서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28쪽).
156
註) 483 서리(胥吏)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쪽).
157
註) 484 적산진 서북쪽 20리, 문등현 동남쪽 30리에 “망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망해촌(望海村)은 이 마을의 근처일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쪽).
158
註) 485 낮 12시경에 먹는 齋食이다. 불교계율에 의하면, 오시(낮12시경)를 넘겨서 식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단중은 곧 오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159
註) 486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사용 한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이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
161
- 결재가 나지 않아 공험을 얻지 못하다
162
廿一日早朝。入惠聚寺權覓住處。北院安置。齋時赴惠海寺極樂闍梨院斷中。李明才。早朝入縣衙。時過押衙牒長官未判。未得公驗。唐國風法。官人政理。一日兩衙。朝衙晚衙。須聽鼓聲。方如坐衙。公私賓客候衙時。即得見官人也。
163
[2월] 21일, 이른 아침에 혜취사(海聚寺)에 가서 임시로 머물 곳을 찾았더니 북원(北院)에 안치했다. 재를 들 시간에 혜해사 극락사리원에 가서 단중했다. 이명재가 이른 아침에 현 관아에 들어갔다. 집무시간이 지났는데도 압아의 첩문에 장관이 결재를 하지 않아 공험註 487을 얻지 못했다. 당나라 법속에 관리는 하루에 집무 시간을 아침과 저녁 둘註 488로 나누어 정무를 본다. 모름지기 북소리를 듣고서 바야흐로 집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공사 빈객(賓客)들은 집무시간을 기다려 곧 관인을 만날 수 있다.
164
註) 487 공험(公驗)은 관청에서 발급하는 것으로 공적인 증명서를 말한다. 공빙(公憑)이라고도 부른다. 빙(憑)은 증거를 뜻하고, 험(驗)은 증명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공험은 넓게는 공적 증명서의 총칭이며, 여행에 있어서 관청의 증명을 필요로 한 점에서 좁게는 오로지 여행(교통)증명서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28쪽).
165
註) 488 양아(兩衙). 아시(衛時)는 관공서의 집무시간을 말한다. 아(衙)는 아(牙)를 가리키며 줄을 지어 참여한다는 뜻으로 군인이 아기(牙旗) 아래에서 정렬 점호하는 데에서 온 말이다. 장관이 관리를 만나 정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오전 오후 두 차례 있었으므로 양아라 한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35쪽).
168
廿二日於當寺喫粥飯。緣長官請暇不出。未得公驗。又聞。開成天子。今年正月三日崩。天下三日舉哀著服。又聞。新天子上位。城中𭣦却四千餘人。先帝時承恩者也。
169
[2월] 22일, 이 절에서 죽을 먹었다. 장관이 휴가 중註 489이어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공험註 490을 얻을 수 없었다. 또 듣건대
170
“개성(開成) 천자註 491가 금년 정월 3일註 492에 돌아갔다. 전국에서 3일註 493 동안 애도하고 상복을 입었다 .註 494”
172
“새로운 천자註 495 註 496가 즉위하여 성안에서 4천註 497명을 죽였는데, 그들은 앞 천자 때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다.”
174
註) 489 원문은 淸暇이다. 유취본(遊聚本)에는 淸暇, 지전본(池田本)·유방전본(遊方傳本)에는 請暇라 한다. 淸과 請은 음이 통하는데, 請暇는 휴식이나 병, 그 외 다른 일로 인한 휴가를 청원하는 것으로 의미가 약간 다르다. 게다가 이 날의 휴가는 한식절의 전일에 해당하는 것에 따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9쪽).
175
註) 490 공험(公驗)은 관청에서 발급하는 것으로 공적인 증명서를 말한다. 공빙(公憑)이라고도 부른다. 빙(憑)은 증거를 뜻하고, 험(驗)은 증명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공험은 넓게는 공적 증명서의 총칭이며, 여행에 있어서 관청의 증명을 필요로 한 점에서 좁게는 오로지 여행(교통)증명서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28쪽).
176
註) 491 문종을 가리킨다. 《구당서》 문종본기(하)에 의하면, 정월 4일 大明宮 太和殿에서 죽었다 하였고, 같은 책 무종본기에는 정월 2일에 문종이 갑자기 죽었다[暴卒]고 하였다.
177
註) 492 문종의 붕어는 《구당서》·《신당서》 모두 신사(辛巳) 즉 4일의 일이라고 한다. 《입당구법순례행기》도 또한 권3 개성 6년 정월 4일조에 “나라의 제삿날이다. 선황제(先皇帝)를 받들기 위해 조칙을 내려 천복사(薦福寺)에서 행향하게 하고, 1천 명의 승려를 초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당서》 문종본기에는 정월 2일 문종 갑자기 죽었다고 하고,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도 문종이 2일에 붕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문종의 붕어는 2일이 정확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원인이 4일이라고 하지 않고 3일이라고 기록한 것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 원인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다. 이는 문등현에서의 소문을 충실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9쪽).
178
註) 493 《신당서》와 《구당서》 문종본기에는 모두 문종의 서거일을 4일이라 하고 있다.《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도 뒤에 보면(권3 개성 6년 정월 4일조) 4일을 국기일로 적고 있다. 그런데 《구당서》 무종본기에는 정월 2일에 문종이 갑자기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35~236쪽).
179
註) 494 죽음을 두려워하여 곡소리를 내고, 상복을 입었다는 의미이다. 천자의 붕어에 관해서는 신하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여러 책들에 전해져 있지 않다. 천자 스스로가 신하를 위해 행하는 거애(擧哀)에 대해서는, 황제가 옷을 다르게 입어서 곡을 하고, 후에 재위하고 있는 백관 내외들이 곡을 하고, 15번쯤 음을 내 곡을 하고 그친다고 기록하고 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사는 간략한 것으로, 궁벽하고 외진 땅에서 천자 붕어 애도의 의미를 전했던 중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9쪽).
180
註) 495 무종을 가리킨다. 무종은 穆宗의 다섯째 아들로 문종의 아우이다. 개성 6년 정월 4일에 환관 仇士良가 魚弘志 등에 의하여 옹립되어 즉위하였다.
181
註) 496 새로운 천자는 목종의 5번째 아들로, 문종의 아우인 무종이다. 원화 9년(814) 6월 12일에 탄생하였다. 이름은 전(瀍)이었는데 후에 염(炎)으로 고쳤다(회창 6년 3월 12일 무종 개명 詔) 장경 원년(821) 3월 영왕(穎王)에 봉해졌고 개성 5년 정월 2일에 황태제가 되었다. 환관인 구사량(九士良)과 어홍지(魚弘志) 등에 의해 옹립되어져 즉위하였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구사량 등은 감로의 변(甘露之變, 835)으로 문종을 원망하고, 문종이 총애했던 악공과 내시 등을 계속 주살하였다. 이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배이직(裵夷直)은 문종의 근신을 상당수 살해했던 것을 비난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0쪽).
182
註) 497 4천은 4십의 오기인 듯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0쪽).
185
廿三日寒食節。三日斷火。齋後縣令胡主簿鄭主簿等。共數十人入寺來。相看慰問。具說遠來留住之本意。文登縣者。渤澥之西根。唐國之東境。秦皇御宇。駕幸此地遊賞。因立佛寺。號之惠聚。今在縣南。
186
[2월] 23일, 한식절註 498이다. 3일간 불을 사용하지 않는다. 재를 마친 후에 현령이 호주부(胡主簿), 정주부(鄭主簿) 등이 수십명과 함께 절에 와서 서로 만나 위문하였다. 먼 곳에서 와 머물고 있는 본 뜻을 자세히 말하였다. 문등현은 발해(渤澥)註 499의 서쪽 끝이고 당나라의 동쪽 땅이다. 진시황註 500이 나라를 다스릴 때註 501 말을 타고 이곳을 두루 순행하며 즐겼다.註 502 그로 인하여 사찰을 세워 혜취사라 하였다.註 503 지금 현의 남쪽에 있다.
187
註) 498 개성 4년 2월 14·15·16일조, 회창 2년 2월 17일, 회창 5년 정월 3일조에 기사가 있다. 한식(寒食)은 3일 동안이었다. 이때에는 단화(斷火) 즉 화기를 없애고 냉식(冷食)을 취했는데, 청명(淸明)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온식(溫食)을 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구주력(具注曆)에 의하면 2월 26일이 때마침 청명이다. 따라서 한식은 23일부터 25일까지인데, 이 내용과 서로 일치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1쪽).
188
註) 499 발해(渤澥)는 발해(渤海)를 말한다. 《문선(文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도 渤澥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황해(黃海)의 별칭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1~222쪽).
189
註) 500 원문의 ‘衘宇(어후)’는 천하의 통치자 또는 그 재위기간을 말한다. 《사기》 권6 시황본기 28년(기원전 219)조에 산동을 순행한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이때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증거는 없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36쪽).
190
註) 501 천하를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며, 통치자 또는 재위 기간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2쪽).
191
註) 502 《사기》 권6 진황본기 28년조에 의하면, 진시황이 발해의 동쪽 지역을 병합하고, 산동을 순행했던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29년조에도 발해의 동쪽을 순행하면서 지부(之罘)에 올랐다고 전한다. 황현(黃縣)은 산동성 볼내현 서남쪽으로 수(腄)는 문등현 서쪽 70리에 옛 치소가 있었다고 전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2쪽).
192
註) 503 진시황의 재위 기간(기원전 246~210)은 인도의 아육왕 시대에 해당하므로 이때 이미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혜취사의 창건을 진시황의 순행과 관련시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195
廿四日早朝。得縣公牒。文如別所由。李明才勾當公驗畢。歸張押衙所。
198
僧圓仁弟子僧惟正惟曉行者丁雄萬竝隨身衣鉢等
199
牒。檢案內得前件僧狀。去開成四年六月。因隨本國朝貢船。到文登縣青寧鄉赤山新羅院寄住。今蒙放任東西。今欲往諸處巡禮。恐所在州縣關津口鋪路次。不練行由。伏乞。賜公驗為憑。請處分者。依檢前客僧未有准狀。給公驗。請處分者准前狀。給公驗為憑者。謹牒
202
([□@考]胡君直三字東本在主簿判尉主今從池本)
203
[2월] 24일, 이른 아침에 현의 공문을 얻었다. 첩문註 504은 별지와 같다. 담당관인 이명재는 공험註 505을 처리하는 일을 마치고 장압아 처소로 돌아갔다.
204
등주도독부(登州都督府)註 506 註 507 문등현이 일본국 객승(客僧) 원인 등 4명에 내리는 첩문註 508
205
승려 원인, 제자승 유정과 유효, 행자 정웅만과 휴대한 의복과 주발 등에 관한 일
206
통첩한다. 조사서를 살펴본 결과 앞에서 거론한 승려의 서장을 얻었다. 그들은 지난 개성 4년 6월에 일본국 조공선을 따라와서 문등현 청녕향 적산 신라원에 이르러 기거하고 이었다. 지금 동서 어디로든지 갈 수 있도록 허락받아 여러 곳으로 가서 순례하고자 하였으나, 이르는 주현(州縣)의 관진(關津)과 구포(口鋪) 등의 행로에서 여행 사유를 이해하지 못할까 두려워, 엎드려 공험註 509을 내려주어 증빙으로 삼고자 하여 처분을 청한다고 했다. 조사에 의하면 앞의 객승註 510은 아직 서장에 준하여 공험을 받지 못하였으니 처분을 청한다 하였다. 앞의 서장에 의거하여 공험을 발급해 증빙으로 삼도록 한다. 삼가 통첩한다.
210
註) 504 문등현에서 등주도독부에게 보내는 공험(公驗)이다. 초본에서는 이 공험이 2월 19일조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과 이 24일의 기사에 현의 공험을 얻었다고 명기하는 점으로부터 당연히 이곳에 삽입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어, 고쳐 삽입하였다. 또한 이 첩문은 문등현에서 상사(上司)인 등주도독부로 보내는 것인데, 종래는 잘못되어서 등주도독부 관하의 문등현이 여행자인 원인 일행에게 준 것처럼 해석한 경우가 많았다(仁井田陞, 《唐宋法律文書の硏究》, 852쪽)(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4~225쪽).
211
註) 505 공험은 여행자 자신이 휴대하는 증명서이다. 공험의 형식은 해당 사람에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발행 관청에서 목적지의 관청 및 길의 경로의 여러 곳에 대해 휴대자의 신분과 목적, 휴대품 등의 증명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험은 목적지 내지 길 경로의 관청에 의해 문서의 수취인으로서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만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5쪽).
212
註) 506 大曆 9년(774)에 등주에 도독부가 설치되어 봉래현, 문등현, 황현, 모평현 등 4현을 관할하였다.
213
註) 507 당에서는 국초 천하의 요지에 총관부(總管府)를 설치하였는데, 무덕 7년(624)에 도독부(都督府)라고 개칭하였다. 당시 도독부는 관청의 현수와 중요도에 따라 대·상·중·하의 등급으로 구분되었고, 맡은 주된 일은 관내의 병마갑계, 성황진수, 양식 등의 일과 관련되었다. 경운 2년(711)에는 천하에 24도독을 설치하고, 안사의 난 이후에도 증설하였다. 게다가 영휘·대력·정원 연간에 각도의 대주(大州)를 도독부로 승격시켰다(《당회요》 권70) 등주도독부(登州都督府)는 대력 9년(774)에 등주에 도독부가 설치되어 봉래현, 문등현, 황현, 모평현 등 4현을 관할하였다. 이 당시의 도독부는 군정상으로는 절도사 관하에 있었고, 도독의 권한 같은 것도 주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즉 주 자사가 도독을 겸임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5~226쪽).
214
註) 508 이 공문은 원래 2월 19일조 말미에 수록되었으나 날짜와 내용에 의거하여 이곳으로 옮겼다.
215
註) 509 공험(公驗)은 관청에서 발급하는 것으로 공적인 증명서를 말한다. 공빙(公憑)이라고도 부른다. 빙(憑)은 증거를 뜻하고, 험(驗)은 증명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공험은 넓게는 공적 증명서의 총칭이며, 여행에 있어서 관청의 증명을 필요로 한 점에서 좁게는 오로지 여행(교통)증명서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28쪽).
216
註) 510 앞의 객승은 원문 상 원래 “前件客僧”인데 件 글자가 탈락되었다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6쪽).
217
註) 511 초본(抄本)에서는 호군직(胡君直)을 주부판위(主簿判尉) 전에 기재한 것을 고쳐서 다음에 기록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6쪽).
220
廿五日巳時。入縣辭長官却入寺。齋後發。綱維典座等。到縣西野中辭別。縣([□@考]縣下恐脫西字)行卅里。到招賢館宿。知館人高怒([□@考]怒恐恕字)。在館中住。作主人慇懃。
221
[2월] 25일, 오전 10시경 현 관아로 들어가 장관에게 작별하고 물러나 절로 왔다. 재를 마친 후 출발했다. 강유註 512와 전좌註 513 등이 현의 서쪽 들판까지 따라와 작별했다. 현에서 30리를 가서註 514 초현관(招賢館)註 515에 도착해 묵었다. 초현관註 516을 관리하는 고노(高怒)라는 사람은 객관에 거주하였는데, 주인으로서 친절했다.
222
註) 512 여기에서는 도유나(都維那)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7쪽). 유나사(維那師)는 원래는 여러 승려들을 통솔하는 역할이다. 잡다한 업무를 담당하며, 신자와 교섭도 하고, 시물(施物)의 분급도 담당하였다. 말하자면 사원의 집사이다. 那는 범어로 Karma-dana의 약칭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1쪽).
223
註) 513 9사(事)는 상좌(牀座), 강회(講會), 방사(房舍), 의물(衣物), 화향(花香), 과라(果蓏), 난수(煖水), 잡병식(雜餠食), 감사인(堪事人)이다(《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권6) 이러한 일들을 맡은 것이 전좌(典座)이다. 상좌를 전지(典知)한다는 뜻에 근거하는데, 선종에서는 특히 그 역할을 중시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81쪽).
224
註) 514 원문은 縣行卅里다. 縣이라는 글자 전에 從 혹은 自가 있어야 하는데,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7쪽).
225
註) 515 초현관(招賢館)은 역관의 이름이다. 소재지는 문등현·모평현 사이에 있는데, 거리가 30리라는 점으로부터 현재 30리에 있는 포촌(舖村) 근처로 비정된다. 관(館)은 숙사(宿舍) 혹은 소규모의 역(驛)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7쪽).
226
註) 516 역관의 이름이다. 관은 숙사를 말한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여기에는 음식을 마련해둔 곳도 있었던 것 같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38쪽).
229
廿六日開明。早朝出招賢館。行卅里。到龍泉村斜山舘斷中。知館人梁公度。在館裏住。不惡不好。緣脚痛。不得發行。便於館宿。
230
[2월] 26일, 날이 밝아註 517 오는 이른 아침에 초현관을 나와 30리를 가서 용천촌(龍泉村)註 518 사산관(斜山館)註 519에 도착해 단중註 520했다. 객관을 관리하는 양공도(梁公度)라는 사람은 객관 안에 거주했는데, 악하지도 않고 좋지도 않았다. 다리에 통증이 있어 출발할 수가 없어 문득 객관에 묵었다.
231
註) 517 원문은 開明早朝이다. 개명(開明)은 원래 태양이 떠서 밝아지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는 이른 아침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8쪽).
232
註) 518 30리 포(鋪)에서 서북쪽으로 약 30리에 용천탕(龍泉湯)이라는 지명이 있다. 옛날에 용천촌(龍泉村)이 있었고, 사산관(斜山館)이 이 마을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천탕의 서쪽은 산과 언덕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8쪽).
233
註) 519 사산(斜山)은 지금 어딘지 알 수 없는데, 용천촌(龍泉村)의 한 산이라고 생각된다. 관(館)은 이것과 관련된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8쪽).
234
註) 520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
237
廿七日早朝。發到軬車村采([□@考]采或宋字歟)日成宅斷中。乞醬酢鹽菜。專無一色。湯飯喫不得。西北傍海行七里。到牟平縣城東去半里。有廬山寺。未時。入寺宿。只有三綱。典座。直歲五人。更無僧人。佛殿破壞。僧房皆安置俗人。變為俗人([□@考]人字東本削之)家。縣城東西一里半。南北二里已上。
238
[2월] 27일, 이른 아침에 출발해 분거촌(軬車村)註 521 송일성(宋日成)의 집에 이르러 단중註 522했다. 간장, 식초, 소금, 채소를 청했으나 전혀 한 가지도 없어 국과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서북쪽으로 바다를 끼고 7리를 가서 모평현(牟平縣)註 523 註 524에 도착했다. 성의 동쪽으로 반리를 가니여산사(廬山寺)註 525가 있었다. 오후 2시경에 절로 들어가 묵었다. 절에는 단지 삼강, 전좌註 526, 직세註 527 등 5명만 있고 다른 승려는 없었다. 불전(佛殿)은 파괴되었고 승방에는 모두 속인들이 거주하여 속인들의 집註 528으로 변해 있었다. 현의 성(城)은 동서가 1리 반이고 남북이 2리 이상 되었다.
239
註) 521 분거촌(軬車村)은 현재 어딘지 알 수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9쪽).
240
註) 522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241
註) 523 당 麟德 2년(665)에 처음으로 설치된 현으로, 지금의 산동성 煙台市 모평현이다.
242
註) 524 모평현(牟平縣)은 청(淸)대의 등주부(登州府) 영해주치(寧海州治)이다. 당 인덕 2년(665) 처음으로 설치된 현이고, 지의 원년(692)부터 신룡 3년(707)까지 주치였다. 영해라는 지명은 금(金) 천회 2년(1124)에 유모(劉矛)가 영해라는 군을 설치했던 것에 근거한다. 민국시대에 모평이라는 옛 이름이 복구되었고, 1985년 전태시(畑台市)의 범위로 들어갔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9쪽).
243
註) 525 모평현(牟平縣) 동쪽 약10리에 노산(蘆山)이 있는데, 노산 북쪽에는 거성(莒城)이라는 지명도 보인다. 廬·蘆·莒는 서로 음이 통한다. 라이샤워는 현지(縣志)에 따르면 모평현 서쪽에 여산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단 현지에 기재된 지도는 갖추고 있지 않으며, 그 소재지는 동쪽에 해당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9쪽).
244
註) 526 9사(事)는 상좌(牀座), 강회(講會), 방사(房舍), 의물(衣物), 화향(花香), 과라(果蓏), 난수(煖水), 잡병식(雜餠食), 감사인(堪事人)이다(《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권6) 이러한 일들을 맡은 것이 전좌(典座)이다. 상좌를 전지(典知)한다는 뜻에 근거하는데, 선종에서는 특히 그 역할을 중시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81쪽).
245
註) 527 직세(直歲)에서 직(直)은 당직을 의미하는데, 말하자면 연 당번·월 당번이다. 회계를 맡아보는 직책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81쪽).
246
註) 528 원문은 俗家이다. 초본(抄本) 및 여러 판본에 俗人家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人은 연자(衍字)이다.
248
- 여산사에서 등주자사를 위한 재를 베풀다
249
廿八日廬山寺設登州刺史烏君齋。當寺僧二人。寺主僧一行。直歲僧常表。日本三僧。都有五人。村人廿有餘。各於自宅。隨力所辨。修理飯食擎將來。寺主僧一行表歎。村人於堂前同齋各自所。將飯食各自喫。不分與人。各割自食分。以供僧也。
250
[2월] 28일, 여산사註 529에서 등주자사 오사군(烏使君)註 530 註 531을 위한 재註 532를 베풀었다. 이 절의 승려는 2명인데, 사주승 일행(一行)과 직세승註 533 상표(常表)이다. 여기에 일본승 3명을 합쳐 5명이다. 마을 사람은 20여 명이었데, 각자 자기 집에서 힘닿는 대로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왔다.註 534 사주승 일행이 공양의 말씀을 하고 찬탄註 535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불당 앞에서 함께 재를 드는데, 각자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각자가 먹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각자 자기의 음식을 나누어 승려를 공양하였다.
251
註) 529 모평현(牟平縣) 동쪽 약10리에 노산(蘆山)이 있는데, 노산 북쪽에는 거성(莒城)이라는 지명도 보인다. 廬·蘆·莒는 서로 음이 통한다. 라이샤워는 현지(縣志)에 따르면 모평현 서쪽에 여산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단 현지에 기재된 지도는 갖추고 있지 않으며, 그 소재지는 동쪽에 해당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29쪽).
252
註) 530 《입당구법순례행기》 권2 개성 4년 11월 22일조에 의하면, 당시 등주자사는 烏角이이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등주자사 오사군은 烏角일 것이다.
253
註) 531 오사군(烏使君)은 등주의 자사이다. 개성 4년 12월 22일조에 의하면, 당시 등주자사를 오각(烏角)이라 하였다. 사군(使君)은 원래 조정의 명령을 받아서 지방에 온 사신의 존칭이다. 그런데 후에는 주군의 장관을 가리켰다. 오사군의 재는 그의 탄생일과 같은 것을 축하해서 공양되어진 재회라고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31쪽).
254
註) 532 오사군(烏使君)의 재(齋)는 그의 탄생일을 축하해 공양되어진 재회(齋會)라고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55
註) 533 직세승(直歲僧)은 절의 역승(役僧)이다. 직세(直歲)에서 직(直)은 당직을 의미하는데, 말하자면 연 당번·월 당번이다. 회계를 맡아보는 직책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81쪽).
256
註) 534 원문에는 이 부분 이하가 29일로 곧바로 이어지나 錯簡이다. 여기서는 이를 바로잡아 해석하였다.
257
註) 535 원문의 ‘表歎’은 표백탄불(表白歎佛)의 뜻인 것 같다. 공양의 말씀을 한 뒤 부처의 이름이나 경전을 창하는 일이다. 찬탄(讚歎)이라고도 한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40쪽).
260
後發西北行十五里。路邊有王府君墓。石上鐫誌。久經歲月。誌石倒地。傍北海浦。行廿餘里。到壹([□@考]壹或臺字壹臺屢誤)村法雲寺宿。知舘人了事。臺舘本是佛寺。向後為舘。時人喚之為件臺館。舘前有二塔。一高二丈五層。鐫石構作。一高一丈。鑄鐵作之。有七層。其碑文云。王行則者。奉勅征件東蕃沒落。同船一百餘人。俱被賊擒。送之倭國。一身迯竄。有遇還歸。麟德二年九月十([□@考]十池本作廿)五日。造此寶塔(云々)。
261
재註 536를 마친 후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15리를 가니 길옆에 왕부군묘(王府君墓)註 537가 있었다. 돌에 묘지(墓誌)가 새겨져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지석은 땅에 넘어져 있었다. 북쪽 바닷가 포구註 538를 따라 20여 리를 가서 오대촌(仵臺村)註 539 법운사(法雲寺)에 이르러 숙박했다. 지관인(知館人)註 540이 대관(臺館)을 맡아 관리하였다. 이 객관은 본래 불교 사찰이었는데 후에 관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오대관이라 불렀다. 객관 앞에 탑이 2기 있다. 한 탑의 높이는 2장이고 5층이며 돌을 다듬어 짜서 만들었다. 또 하나는 높이가 1장으로 철을 주조해 만든 7층탑이었다. 그 비문에 말하기를
262
“왕행칙(王行則)註 541이란 사람은 조칙을 받들어 동번(東蕃)註 542 註 543을 정벌하다 패하여 같은 배에 타고 있던 100여 명註 544과 함께 적에게 사로잡혀 왜국(倭國)註 545에 보내졌다.註 546 그 한 몸만이 도망쳐 숨었다가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인덕(麟德)註 547 2년註 548 9월 15일에 이 보탑을 세웠다.”
264
註) 536 점심을 마친 후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원문에는 “재(齋)”라는 글자가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여기에서는 “재(齋)”를 보충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32쪽).
265
註) 537 한(漢)대에는 태수(太守)를 부군(府君)이라고 불렀다. 후에는 변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존칭으로 사용되어다. 이미 사망한 경우는 선부군(先府君)이라고도 불렀다. 왕부군(王府君)은 다음에 나오는 왕행측(王行則)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33쪽).
266
註) 538 모평현(牟平縣)에서 지부(芝罘)에 이르는 해안선을 가리킨다. 도로는 해안선을 따라 서북쪽으로 나아간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33쪽).
267
註) 539 초본(抄本)에서는 대촌(臺村)이라 하는데, 태촌(台村)이라고 해야 한다. 이 땅은 지금의 오태집(午台集, 흔히 午台集이라고 한다)에 해당한다. 뒷 서술의 오태관(仵台館) 또한 초본에서는 伐台館이라고 하는데, “벌(伐)”은 “오(仵)”의 오기이다. 오(仵)는 오(午)·오(五)와 음이 통한다. 이 땅은 현재 복산현 동남쪽 약 30리에 해당한다. 岡田正之(岡田正之, 「入唐紀行について」, 《東洋學報》13)와 今西龍(今西龍, 《新羅史硏究》, 293~295쪽)이 그 위치를 내주(萊州)의 서북쪽 지점에 비정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태촌 내지 오태촌은 2월 28일의 숙박지이기 때문에, 따라서 3월 14일조에 두어서는 안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33쪽).
269
註) 541 岡田正之는 피휘법을 근거로 해서, 왕행칙(王行則)과 왕문도(王文度)와 동일인이라고 하였다(岡田正之, 「入唐紀行について」, 《東洋學報》13) 중국에서는 예부터 피휘를 할 때 서로 관계가 있는 문자를 선택하는 것이 통칙인데, 행칙(行則)과 문도(文度)는 서로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33쪽).
271
註) 543 정확하게는 동번(東藩)이다. 중국이 3국을 번속(藩屬)의 국가로 봤는데, 여기에서는 특히 백제를 가리키고 있다. 《구당서》 권199 백제전에 수록된 당 태종이 백제왕에게 사여한 글 중에도 “(백제)왕은 대를 이은 군장으로서 동번(東藩)을 위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33쪽).
272
註) 544 《일본서기》제명기 6년(660)에 “겨울 10월에 백제 좌평 귀실복신(鬼室福信)이 좌평(佐平) 귀지(貴智) 등을 보내어 당 포로 100여 인을 바치게 하였다”고 한다. 좌평은 백제의 1품관이다. 귀실은 성씨이고, 복신은 무왕(600~640) 때 사람이다. 이 해는 때마침 의자왕이 잡히고, 왕문도(王文度)가 죽은 해에 해당한다.《일본서기》 7년조의 세주에도 “일본세기에 의하면 11월 복신이 당나라 사람 적수언(績守言) 등을 사로잡아 축자(筑紫)에 이르렀다. 혹은 신유(661) 백제 좌평 복신이 당 포로 106인을 바쳤는데, 근처 강에서 밭을 개간하여 살았다고 한다. 경신년(660) 이전에 복신이 당 포로를 바쳤는데, 지금 살고 있다”고 한다. 적수언은 속수언(續守言)의 오기인데, 후에 조정의 음박사(音博士)가 되었다(《일본서기》 천지 2년, 지통 3년, 지통 5년조 참조). 연도에 문제가 있다 해도 당의 포로 100여명이 일본에 간 사실은 일치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34쪽).
273
註) 545 왜국(倭國)에서 왜(倭)는 중국의 기록에 보이는 일본국 내지 일본인의 호칭이다. 왜(倭)는 왜(委)라고도 쓴다. 이 용어는 《산해경(山海經)》에 처음 보이는데, 《한서》 지리지에서 확실한 기록이 있고, 《위지》왜인전에서 상세한 내용이 보인다. 일본이라는 국호는 대외적 내지는 중국풍인 표현을 필요로 했던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삼국도 일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뒤이어 당나라에서도 공인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34~235쪽).
274
註) 546 《日本書紀》 齊明天皇 6년(660) 10월에 백제의 좌평 鬼室福信이 좌평 貴智 등을 보내 당나라 포로 100여명을 바쳤다고 한 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王行則과 관련된 내용일 것으로 보인다.
275
註) 547 당 고종대의 연호로, 인덕 2년은 신라 문무왕 5년 곧 665년이다.
276
註) 548 인덕(麟德)은 당 제3대 고종의 연호로, 일본에서는 천지 4년, 신라에서는 문무왕 5년 즉 665년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35~241쪽).
279
([□@考]廿九日以下界線內二十三行東池兩本錯簡在下文(五二 五三)頁今正之)
280
廿九日早發。西北行卅里。至芝陽館斷中。齋後行廿里。到牟城村高安宅宿。主人不惡。
281
[2월] 29일, 註 549일찍 출발하였다. 서북쪽으로 30리를 가서 지양관(芝陽館)註 550에 이르러 단중註 551했다. 재를 마친 후 20리를 가서 모성촌(牟城村)註 552 註 553 고안(高安)의 집에서 묵었다. 주인은 악한 이가 아니었다.
282
註) 549 2월은 작은 달이기 때문에 이날(병자)이 가장 마지막 날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42쪽).
283
註) 550 산동성 복산현 남쪽 1리 정도에 지양촌(芝陽村)이 있다. 지양(芝陽)은 지부산(芝罘山)의 남쪽이라는 의미와도 관련있다. 지양촌 근처에는 별도로 지양산이라는 산 이름도 있는데, 오히려 이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현재의 복산현은 금 천회 연간(1123~1137) 제(齊)나라 유모(劉矛)가 처음으로 설치했던 곳인데, 그 현치(縣治)는 양수진(兩水鎭)이라고 불렀다(《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권137 등주부) 1958년 이후 연태시(烟台市)의 관할이 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42쪽).
284
註) 551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285
註) 552 춘추전국시대에 牟國이 있던 곳으로, 牟城은 그 중심지였다.
286
註) 553 촌명은 모성(牟城)에서 따온 것이다. 모성(牟城)에 대해서는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권137에는 “모성은 복산현 서북쪽에 있다. 응소(應昭)의 《풍속통의(風俗通義)》에 의하면 모자국은 축융(祝融)의 후예라고 한다. 《위서》 지형지에 따르면 동모군 모평현은 모성에 있다고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의하면 모성은 복산현 서북쪽 30리에 있다고 한다”라 기록하고 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모성촌(牟城村)의 위치는 지양관(芝陽館) 서북쪽 20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으로부터 추측하면 《대청일통지》와 약 10리가 차이난다. 하지만 둘 다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춘추》 환공 15년조에는 모인(牟人)이 조정에 왔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같은 책 희공 5년조에도 공손현이 모(牟)에 갔다고 한다. 모인은 모이(牟夷)라고도 하는데, 그들이 근거했던 나라가 모자국(牟子國)이다. 춘추시대에는 상당한 세력이 있었던 것 같다. 모성은 그 중심지로, 촌명은 이를 근거로 한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42~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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