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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840년 ◈
◇ 입당구법순례행기(840년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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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圓仁(엔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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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卷) 제(第) 2
2
 - 개성오년(開成五年)
 
 
 

840년 5월

 

5월 1일 (음)

5
- 죽림사를 순례하다
 
6
五月一日天晴。擬巡臺去。所將驢一頭。寄在停點院囑院主僧。勾當草料。從停點西行十七里。向北過高嶺十五里。行到竹林寺斷中。齋後巡禮寺舍。有般舟道場。曾有法照和尚於此堂念佛。有勑諡為大悟和上。遷化來二年([□@考]二下東本傍注有百歟二字池本作二百今案法照見宋僧二十一大曆年中在五臺山二年恐二十年誤)。今造影安置堂裏。又畫佛陀波利儀鳳元年來到臺山。見老人時之影。花嚴院堂中。有金剛界曼茶羅一鋪。
 
 
7
5월 1일, 하늘이 맑았다. 오대산 순례를 떠나려고 데리고 왔던 나귀註 972 1마리를 정점원에 맡기고 원주승에게 나귀를 먹이고 보살펴줄 것을 부탁했다. 정점원에서 서쪽으로 17리 정도를 가서 북쪽으로 높은 봉우리 하나를 넘고 또 15리註 973를 가서 죽림사(竹林寺)註 974 註 975에 도착해 단중註 976했다.여러 주에서 계(戒)를 받기 위해 온 사미 수십명이 이 절에서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재를 마친 후 절을 순례하였는데, 반주도량(般舟道場)註 977이 있었다. 일찍이 법조화상(法照和尙)註 978 註 979이라는 분이 이 당에서 염불삼매 註 980를 [수행하였다.] 조칙으로 시호를 내려 대오화상(大悟和尙)註 981이라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2년註 982이 된다. 지금 존영을 만들어 당 안에 안치해두었다. 또 불타파리(佛陀波利)註 983가 의봉(儀鳳) 원년에 오대산에 와서 한 노인註 984을 만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화엄원註 985 불당에는 금강계만다라註 986 1폭이 있었다.
 
 
8
註) 972 이 기사 이후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정점보통원에 기탁한 채로 장안으로 가는 여행에는 한 번도 이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29쪽).
9
註) 973 청수하(淸水河)는 황토저(黃土咀)에서 지류가 합쳐지기 때문에, 일행은 본류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지류를 따라 죽림사로 갔다. 태회진의 화장사에 이르지 않고, 다른 길인 죽림사에 최초로 간 것은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아마 그것은 양주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유정(惟正)·유효(惟曉)를 위해서 같은 절 계단에서 계를 받으려는 목적도 있기 때문인 것 같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29쪽).
10
註) 974 법조화상이 대력 12년(777)에서 정원 연간(785~804) 사이에 창건한 사찰이다. 오대산 정토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竹林이라는 절 이름은 인도 王舍城의 竹林精舍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국 각지에 동일한 절 이름이 있다.
11
註) 975 죽림사(竹林寺)는 태회진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 절은 법조(法照)가 창건했는데, 그 시기는 대력 12년(777) 이후 정원 연간(785~804)라고 생각된다. 법조가 오대산에 이른 것은 대력 5년인데, 이곳에서 재차 대성 죽림사를 감득(感得)했다. 현재 죽림사는 황폐해져 옛날의 모습은 없는데, 남아있는 약간의 가람도 근대에 중건한 것으로, 서쪽의 본전, 남북에 배전, 전방에 천왕전, 뒤에 8각 5층전탑이 있을 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29~430쪽).
12
註) 976 단중(斷中)에서 中은 낮 12시이다. 단중은 낮 12시경을 의미하는 구어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본 기록을 처음으로 하여 이후 약 70회나 나타나고 있다. 불교의 계율에서는 낮 12시를 넘겨서 식사를 하는 것을 비시(非時) 또는 비시식(非時食)라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단중은 낮 12시 이후에는 식사를 단절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적산에서 체류 중일 때 원인은 그 구어적 불여를 학습했다고 생각되고, 가끔씩 사용하였다. 체류 중 음(陰, 49기일)의 별칭으로 단칠(斷七)·종칠(終七)·진칠(盡七) 등을 사용하는데, 종중(終中)·진중(盡中)와 같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단칠과 단중은 같은 어법이다. 게다가 斷은 從·盡과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돈황변문(敦煌變文)의 《大目乾連冥間救母變》에 “단오(短午)”가 보이는데, 단중과 치환 가능하다. 단중은 중국의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구어이다(小野勝年, 「斷中の語義について」, 《東洋史硏究》17-4)(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215~216쪽).
13
註) 977 반주도량(般舟道場)은 법조가 세운 것으로, 반주삼매(般舟三昧)를 닦기 위한 도량이다. 반주삼매는 부처가 현재 자신의 전에 있음으로써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반주도량은 법조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승원사(承遠師)가 이미 남악에서 창시한 것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원인은 반주도량에서 감격적 인상을 받고, 또 장안에서도 자성사(資聖寺)에 머물면서 배울 기회가 있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0~431쪽).
14
註) 978 출신지와 생몰 연대는 미상이다. 廬山, 오대산, 장안 등을 유력하며 五會念佛法으로서 민중을 교화하였다.
15
註) 979 법조화상(法照和尙)은 태어난 곳이 명확하지 않다. 호남 사람이라는 설도 있는데, 스스로 양한사문(梁漢沙門)이라고 칭하는 점으로 보아 사천 사람이 유력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1~432쪽).
16
註) 980 여기에서의 염불삼매는 오회염불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2쪽).
17
註) 981 대오화상에 대해 권2에서는 “화상(和上)”이라 하고, 권3에서는 “화상(和尙)”이라 한다. 5월 16일조에도 또한 때때로 和尙이라고 하는데, 和上이라고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2~433쪽).
18
註) 982 권2는 “遷化來二年”이라 하여 따로 “白歟”를 기록하는데, 권3에서는 “遷化來近二年”이라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3쪽).
19
註) 983 罽賓國(카슈미르) 사람으로 儀鳳 원년(676)에 오대산을 순례할 때 한 노인이 나타나 이 나라의 여러 죄악을 없애려면 佛頂尊勝陀羅尼經을 가지고 오라고 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이 경전의 梵本을 가지고 재차 입당하였다. 이 경전은 日照三藏에 의하여 번역되었다. 후에 그는 범본을 가지고 다시 오대산에 들어가 금강굴에서 수행하며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20
註) 984 노인은 문수의 화신으로써, 불타파리에 존승다라니(尊勝陀羅尼)의 장래를 구해준 대성(大聖, 미륵) 노인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3쪽).
21
註) 985 원문은 화엄원(花嚴院)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화엄원(華嚴院)이다. 화엄원은 죽림사 6원 중 하나이며, 정토신앙의 사원이다. 화엄원에 만다라가 안치되어 있는 것은 기이한 것인데, 중당 시대의 대(大)사원은 통상적으로 각 종파가 한 데 모여져 있었다. 화엄원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3쪽).
22
註) 986 《金剛頂經》에 근거한 만다라로, 大日如來를 중심으로 여러 부처와 보살을 그린 그림이다.
 
 

 
 

5월 2일 (음)

24
- 정원계율원을 참례하다
 
25
二日入貞元戒律院。上樓禮國家功德七十二賢聖諸尊曼茶羅。綵畫精([□@考]精東本無)妙。次開萬聖戒壇。以玉石作。高三尺。八角底築填香泥。壇上敷一絲毯。闊狹與壇齊。棟樑椽([□@考]椽恐椂)柱。粧畫微妙。謁押壇老宿。法諱靈覺。生年一百歲。七十二夏貌骨非凡。是登壇大德。見客慇懃。見說。去年六月中天竺那蘭陀寺僧三人。來遊五臺。見五色雲圓光攝身光歸天竺去。竹林寺有六院。律院。庫院。花嚴院。法花院。閣院。佛殿院。一寺都有四十來僧。此寺不屬五臺。
 
 
26
[5월] 2일, 정원계율원(貞元戒律院)註 987 註 988에 들어가 누각에 올라 나라에 공덕註 989이 있는 72명의 현성(賢聖)註 990 註 991과 제존(諸尊)만다라註 992에 예배하였다. 채색 그림이 정묘하였다. 다음으로 만성계단(萬聖戒壇)을 열고 [둘러보았다.] [순전히 흰] 옥석註 993으로 만들었고 높이는 3척이며 8각이었다. [계단은] 향내 나는 진흙을 다져 넣어 쌓았다. 계단 위에는 1장의 채색 모포註 994를 깔았는데, [그것 또한 8각으로 만들었다.] 넓고 좁은 것이 단과 가지런하게 [꼭 같았다.] 대들보와 서까래를 장식한 단청은 미묘하였다. 계단을 관리하는 노승註 995을 찾아뵈었다. 법명은 영각(靈覺)이고 나이는 100세이며 승려가 된 지는 72년註 996이 되었다. 용모와 골격이 범상치 않았다. 이는 등단대덕(登壇大德)으로 객을 보고 친절하게 대했다. 듣건대
 
27
“지난해 6월 중 천축국 나란타사(那蘭陁寺)註 997 註 998의 승려註 999 3명이 오대산을 순례하고 오색 구름, 원광(圓光), 섭신불(攝身光)註 000 註 001을 보고 천축국으로 돌아갔다.”
 
28
고 한다. 이 죽림사는 6개의 원이 있는데, 율원(律院), 고원(庫院), 화엄원, 법화원, 각원(閣院), 불전원(佛殿院)이 그것이다. 한 절에는 도합 40여 명의 승려가 있다. 이 절은 오대에 속하지 않는다.註 002
 
 
29
註) 987 죽림사 6院 가운데 하나로, 貞元 연간(785-804)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30
註) 988 정원계율원(貞元戒律院)은 죽림사 6원 중 하나으로, 율원(律院)의 정식명칭이다. 율원의 설치도 또한 죽림사 창건 직후(정원 연간)였는데, 이로 인해 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원인은 양주에서 공인된 계단은 숭산과 오대산 계단뿐이라는 것을 들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5쪽).
31
註) 989 공덕(功德)은 범어로 guna이다. 덕(德)은 선행을 닦아서 얻는 것을 말한다. 공덕은 불교적 신앙을 실천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장려된 수단이었다. 수공덕(修功德)은 개인적으로도 단체로도 행해졌는데, 국가 공덕은 특히 조정이 닦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5~436쪽).
32
註) 990 국가에 공덕이 있는 고덕 72인의 현인과 성인이다. 72의 숫자는 12의 6배로, 72候, 72時, 72제자 등과 같이 중국에서 즐겨 사용되던 숫자이다.
33
註) 991 현성(賢聖)에서 현(賢)은 선(善)에 화하는 것을, 성(聖)은 바르게 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한현성(羅漢賢聖)이라고도 불리는데, 수업을 쌓고 깨달아 도달한 존자를 가리킨다. 72는 12의 6배로, 중국에서는 예부터 귀중한 수이다. 72후(候), 72시(時)를 비롯해 72제자 등의 말이 자주 사용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6쪽).
34
註) 992 제존만다라(諸尊曼多羅)에 대해 라이샤워는 the mandala of seventy-two sages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72현성상과 만다라는 별개이다. 여기에서는 양계 만다라 등과는 다른 각 존(尊)에 의해 만다라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6쪽).
35
註) 993 유백색의 대리암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6쪽).
36
註) 994 모포는 모직물로, 담자(毯子) 또는 융담(絨毯)이라고도 한다. 그 원산지는 시베리아 지방이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6쪽).
37
註) 995 노승은 기숙(耆宿)·상수(上首)·장로(長老)라고도 하는데, 나이가 많고 수계(受戒) 이후 지덕이 뛰어난 승려를 뜻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7쪽).
38
註) 996 원문은 七十二夏다. 하(夏)는 하안거의 뜻인데, 구족계를 받은 후의 연수(年數)이다. 20세에 구족계를 받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92세에 해당한다. 72는 실제의 수가 아니라 가수(佳數)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7쪽).
39
註) 997 중인도 王舍城 북방에 있는 大寺院으로, 5세기초 쿱타 왕조의 戒日王이 창건하였다. 7세기에 현장법사가 이 절을 방문할 이 절에는 승려가 1만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 온 선무외, 금강지, 반찰야 등 많은 승려가 이곳에서 공부하였고, 신라의 阿離耶跋摩도 나란타사에 머물며 불교의 律과 論을 익히고 여러 불경을 간추려 베꼈다.
40
註) 998 나란타사(那蘭陁寺)는 중인도 왕사성 북쪽, 현재 Rajgir 북쪽 약 7마일에 있는 Baragaon에 해당하는 고찰이다. 5세기 초, 굽타 왕조의 제일왕(帝日王, Sakraditya)이 창건하였는데, 역대의 군주들이 증수하여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나라 때 중국에 내조한 바라바밀다(波羅頗密多), 지바가라(地婆訶羅), 선무외(先無畏), 금강지(金剛智), 반자약(般刺若) 등도 나란타사에서 학습하였고, 현장(玄獎)과 의정(義淨)도 수학했던 곳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7~438쪽).
41
註) 999 2권에는 “승(僧)”이라 하였고, 3권에는 “삼장(三藏)”이라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8쪽).
42
註) 000 원광은 부처와 보살의 頭光이고, 섭신불은 부처와 보살의 전신을 감싸는 광배이다.
43
註) 001 오대산의 신이함에 대해서는 《고청양전》·《광청양전》·《속청양전》 등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금전누각이나 당탑가람이 홀연히 출현한다든지, 영묘한 향기가 난다든지, 종소리가 들려온다든지, 문수보살이 사람의 모습을 빌려 각각의 신이함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빛이나 구름이 나타나는 것도 그 중 하나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오색 구름, 원광(圓光), 섭신불(攝身光)과 같은 종류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38~440쪽).
44
註) 002 죽림사나 여러 절들이 오대산에 속하고 있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봐서 수긍하기 어렵다. 죽림사는 각지에 오직 2곳에만 있는 것처럼 계단을 지녀 칙건사원(勅建寺院)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대화엄사를 중심으로 하는 오대산의 여러 사원 외에 세워졌고, 마침 다른 성격의 본산(本山)으로써 자격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0쪽).
 
 

 
 

5월 5일 (음)

46
- 죽림사 재회에 참석하다
 
47
五月五日。寺中有七百五十僧齋。諸寺同設。竝是齊州靈巖寺供主所設。
 
 
48
[5월] 5일, 절에서 750명의 승려들에게 재를 베풀었는데 여러 절에서 같이 마련하였다. 아울러 이것은 제주(濟州)註 003 영암사(靈巖寺)註 004의 공양주註 005가 마련한 것이다.저녁 무렵에 기꺼이 참석했다.
 
 
49
註) 003 제주(濟州)는 헌재 산동성 제남시이다. 제주는 북위 황흥 3년(469) 산동성 역성현에 설치된 이래 북송 정화 6년(1126)까지 존속되었다. 당나라 때에는 역성을 비롯하여 우성현, 임읍현, 장구현 등 9현을 관할하였다. 예부터 제주는 산동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372쪽).
50
註) 004 영암사(靈巖寺)는 관 내의 장청현(長淸縣) 동남쪽에 있는 방산(옥부산) 산기슭에 있다. 북위 정광 연간(520~526)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불도징(佛圖澄, 233~348)의 전설과 관련된 땅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5쪽).
51
註) 005 이날은 단오에 해당한다. 단오와 불사를 연결한 예는 꽤 있는데, 가끔 순례(巡禮)의 목적으로 이날이 선택되는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5쪽).
 
 

 
 

5월 5일 (음)

53
- 죽림사 재회 예불식을 보다
 
54
竹林寺齋禮佛式。午時打鍾。眾僧入堂。大僧沙彌俗人童子女人。依次列坐了。表歎師打槌唱一切恭敬敬禮常住三寶一切普念。次寺中後生僧二人。手把金蓮打蠡鈸。三四人同音作梵。供主行香。不論僧俗男女。行香盡遍了。表歎先讀施主設供書。次表讚了。便唱一切普念。大僧同音唱摩訶般若波羅蜜。次唱佛[A32]菩薩名。大眾學詞。同禮釋迦牟尼佛。彌勒尊佛。文殊師利[A33]菩薩。大聖普賢[A34]菩薩。一萬[A35]菩薩。地藏[A36]菩薩。一切[A37]菩薩。摩訶薩。為廿八天釋梵王等。敬禮常住三寶。為聖化無窮。敬禮常往三寶。為今日供主眾善莊嚴。敬禮常往三寶。為師僧父母法界眾生。敬禮常住三寶。打槌唱云。施食呪願。上座僧呪願了。行飯食上下老少道俗男女平等供養也。眾僧等喫齋了。行水湯口。次打槌念佛。表歎師打槌云。為今日施主善莊嚴及法界眾生。念摩訶般若波羅蜜多。大眾同音。念釋迦牟尼佛。彌勒尊佛。大聖文殊師利[A38]菩薩。一萬[A39]菩薩。一切[A40]菩薩。摩訶薩(如次學詞同念)。念佛了。打槌隨意大眾散去。
 
 
55
죽림사 재회(齋會) 예불식註 006
 
56
낮 12시경에 종을 치면 여러 승려들이 당註 007에 들어간다. 대승(大僧),註 008 註 009 사미, 속인, 동자, 여인 등이 차례대로 줄지어 앉으면 표탄사(表歎師)註 010가 추註 011를 치며
 
57
“일체 공경하며 상주삼보께 예배하며 일체를 보념(普念)하라”
 
58
고 외친다. 다음에 절의 후생승(後生僧)註 012 두 사람이 손에 금빛 연꽃註 013을 들고 나발(蠡鈸)註 014을 두드리면 3, 4명이 같은 목소리로 범패註 015를 부른다. 공양주註 016가 행향註 017을 하는데 승려와 속인,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았다. 두루 행향을 마치면 표탄사가 먼저 시주가 재를 마련한 취지의 글을 읽는다.註 018그 다음에 부처를 찬탄註 019한 후 곧
 
59
“일체를 보념하라”
 
60
고 외친다. 그러면 대승은 같은 목소리로 마하반야바라밀다(摩訶般若波羅蜜多)註 020를 부른다. 다음에 불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대중들은 그 말을 따라서 같이 석가모니불, 미륵존불註 021, 문수사리보살, 대성보현보살, 일만보살(一萬菩薩),註 022 지장보살,註 023 일체보살마하살(一切菩薩摩訶薩)註 024 註 025을 부르며 예배한다. 또 28천(天)註 026 註 027의 제석(帝釋)註 028과 범왕(梵王)註 029 註 030 등을 위하여 상주註 031삼보(常住三寶)께 경건히 예를 올리고, 성스러운 교화가 무궁하기 위해 상주삼보께 경건히 예를 올린다. 오늘 공양주의 여러 선근(善根)과 공덕을 장엄하기 위해 상주삼보께 경건히 예를 올리고, 사승(師僧),註 032 부모, 법계註 033중생을 위해 상주삼보께 경건히 예를 올린다. 표탄사가 추를 치며
 
61
“음식을 보시한 공양주를 위해 축원하라註 034
 
62
고 외치면 상좌승註 035이 축원한다. 축원을 마치고 식사를 하는데, 상하, 노소, 도속, 남녀가 평등하게 공양한다. 여러 승려 등은 재를 마치고 물을 나누어 입을 행군다. 다음에 추를 치고 염불한다. 표탄사가 추를 치고 말하기를
 
63
“오늘 시주의 선과 공덕의 장엄함과 법계중생을 위하여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염송하라”
 
64
고 한다. 대중은 같은 소리로 석가모니불, 미륵존불, 대성문수사리보살, 일만보살, 일체보살마하살을차례대로 따라하며 염불한다.염불을 마치면 추를 치고 자기 마음대로 흩어져 갔다.
 
 
65
註) 006 행문의 내용은 식당에서 재를 행하는 의식 외에 각원에서 현성공양 순서의 두 번째 식이다. 이 의식의 기사는 권3에는 빠져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재회는 무차재(無遮齋)로, 오대산에서의 인연전설은 7월 2일조에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6쪽).
66
註) 007 여기에서 당(堂)은 식당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6쪽).
67
註) 008 小僧에 대비되는 말로, 구족계를 받은 정식 승려를 말한다. 한편 소승은 아직 구족계를 받지 않은 沙彌 곧 견습 승려라 할 수 있다.
68
註) 009 대승(大僧)은 소승(小僧)에 대비되는 말이다. 소승은 사미, 대승은 비구라 하는데, 구족계를 받은 승려이다. 대승으로 해석해도 의미가 통하지만, 여기서는 대중(大衆)의 오기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6쪽).
69
註) 010 표탄사(表歎師)는 법회 때 불보살을 향해 찬탄의 말을 하고, 여러 승려를 이끌어 선창하는 법사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 권1 개성 3년 12월 8일조의 창예사(唱禮師), 4년 정원 17일조의 작범법사(作梵法師) 등도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6쪽).
70
註) 011 추침(槌砧)·추정(槌静)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추(槌)라고 한다. 나무로 만든 타악기로, 기둥같이 생긴 모양과 널빤지 모양이 있다. 선사(禪寺)에서 사용하는 타판(打板)·목어(木魚)·방(梆)과 같은 것도 추(槌)의 변형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8쪽).
71
註) 012 후생승(後生僧)은 득도 연수가 작은 승려를 뜻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6쪽).
72
註) 013 보통 구리 제품이 많은데, 이것에 도금을 해서 만드는 연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6쪽).
73
註) 014 螺와 상통하는 글자이다. 나발은 소라 모양으로 된 원형의 악기로 두 개의 짝을 마주쳐서 소리를 낸다.
74
註) 015 범패(梵唄)는 성패(聲唄)·찬패(讚唄)·경패(經唄)이라고도 한다. 범어 즉 인도식의 음조를 가지고 하는 가패(歌唄)이지만 반드시 산스크리트어는 아니다. 《고승전》 제 13경사편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대체로 가영(歌詠)의 법음(法音)을 패(唄)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경문을 외우는 것을 전독(轉讀)이라고 하는데, 가찬(歌讚)만을 범패라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49~150쪽).
75
註) 016 절에서 죽·밥 등을 짓는 소하는 소임. 이에 대해 채소 등 부식을 마련하는 소임을 채두(菜豆) 도는 채공(菜供)이라 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1쪽).
76
註) 017 행향(行香)은 소향(燒香)의 다른 말로써 불렸는데, “나누어 주다”는 의미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7쪽).
77
註) 018 공양을 베풀면서 향찬(香讚)을 읽는다. 향찬이라 함은 ‘我今一片香 遍覆三千界 奉獻三寶前願垂哀納受’ 와 같은 축원문을 말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1쪽).
78
註) 019 여기에서는 재탄문(齋歎文)을 읽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창념삼보(唱念三寶)를 가리킨다고도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7쪽).
79
註) 020 마하반야바라밀다(摩訶般若波羅蜜多)는 제법의 실상을 연구한 보살인 대혜(大慧)이다. 이와 동일하게 개성 4년 12월 22일조에 기재되어 있는 신라 송경의식에도 마하반야제(摩訶般若題)를 외우고 있는데 주문풍에 경전의 제목을 외우는 것으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7쪽).
80
註) 021 미륵존불(彌勒尊佛)은 미륵불(彌勒佛), 당래불(當來佛)이라고도 한다.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 말세가 되자 여래가 되어 염부제(閻浮提)에 하생하였는데, 용화수 밑에서 설법을 하여 중생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미륵신앙에 근거하여, 보살형과 여래형이 조성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7~448쪽).
81
註) 022 문수보살이 거느리고 있는 1만 명의 권속을 지칭한다.
82
註) 023 석존의 교화를 받고 불멸 후 미륵이 출현할 때까지 몸을 6도(道)에 나타내어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의 중생을 교화하는 대자 대비한 보살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1쪽).
83
註) 024 摩訶薩埵 또는 菩提薩埵라고도 한다. 여러 가지 지혜를 닦아 장래에 여래가 될 보살이다.
84
註) 025 일체보살마하살(一切菩薩摩訶薩)은 마하살타(摩訶薩埵) 또는 보리살타(菩提薩埵)라고도 한다. 여러 가지 지혜를 닦아 장래에 여래가 될 보살의 총칭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8쪽).
85
註) 026 삼계의 28천으로, 8欲界 6천, 色界 18천, 無色界 4천을 합한 28천을 말한다.
86
註) 027 28천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제천을 합한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8쪽).
87
註) 028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忉利天)의 임금이다. 선견성(善見城)에 있으면서 사천왕과 32천(天)을 통솔하며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중생을 보호하며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는 하늘의 임금을 말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1쪽).
88
註) 029 제석과 천왕은 28천의 여러 天界 가운데 으뜸가는 천부의 신이다. 이들은 모두 고대 인도에서 신봉되던 신들인데 후에 불교에서 호법신으로 받아들였다.
89
註) 030 제석(帝釋)과 범천(梵天)은 여러 천계(天界) 가운데 대표적인 천부의 신이다. 천부는 고대 인도에서 신봉되던 신인데, 만물의 근원을 신격화했던 것이라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8쪽).
90
註) 031 상주(常住)는 생멸(生滅) 변천(變遷)이 없는 것을 말한다. 후에 사원 등의 항구재산(恒久財産)이나 정주승려(定住僧侶)를 의미로도 바뀌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9쪽).
91
註) 032 자기의 스승 또는 추앙하는 스님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1쪽).
92
註) 033 부처님의 세계, 또는 진여(眞如)의 세계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1쪽).
93
註) 034 보시한 음식에 공양주를 위해 승려가 행하는 주원(呪願)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49쪽).
94
註) 035 상좌(上座)는 삼강(三綱) 중 한 사람으로, 절에서 덕망이 있고 절을 대표하기에 충분한 사람에게 맡긴다. 다만 여기에서는 반드시 직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수좌(首座) 등과 동일한 것으로, 하나의 존칭으로써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0쪽).
 
 

 
 

5월 5일 (음)

96
- 72현성의 공양법회에 참석하다
 
97
暮際雷鳴雹雨。閣院鋪嚴道場。供養七十二賢聖。院主僧常欽。有書。巡報諸院知。同請日本僧。便赴請入道場看禮念法事。堂中傍壁。次第安列七十二賢聖畫像。寶幡寶珠。盡世妙綵。張施鋪列。雜色氈毯。敷洽地上。花燈名香茶藥食供養賢聖。黃昏之後。大僧集會。一僧登禮座。先打蠡鈸。次說法事之興由。一一唱舉供主名及施物色。為施主念佛[A41]菩薩。次奉請七十二賢聖一一稱名。每稱名竟。皆唱唯願慈悲哀愍我等降臨道場受我供養之言。立禮七十二遍。方始下座。更有法師登座。表歎念佛。勸請諸佛[A42]菩薩云。一心奉請大師釋迦牟尼佛。一心奉請當來下生彌勒尊佛。十二上願藥師瑠璃光佛。大聖文殊師利[A43]菩薩。大聖普賢[A44]菩薩。一萬[A45]菩薩。首皆云一心奉請。次同音唱散花供養之文。音曲數般。次有尼法師。又表歎等。一如僧法師。次僧法師與諸僧。同音唱讚了。便打蠡鈸。同音念阿彌陀佛。便休。次尼眾贊([□@考]贊恐替字)僧。亦如前。如是相替([□@考]替東本作贊)讚歎佛。直到半夜事畢。俱出道場歸散。其奉請及讚文。寫取在別。
 
 
98
해질 무렵에 천둥이 치고 우박과 비가 내렸다. 각원(閣院)에서는 도량을 장엄하게 설치하고 72명의 현성을 공양하였다. 원주승 상흠(常欽)이 글을 써서 여러 원(院)을 두루 돌며 알렸다. 일본승도 함께 초청하였다. 곧 초청에 따라 도량에 들어가 예불법회를 보았다. 당 안의 벽을 따라 72현성의 화상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었다. 보번(寶幡)과 보주(寶珠)는 세상의 미묘한 색채를 다하여 펼쳐 늘어져 있고, 여러 색깔의 담요가 땅위에 두루 깔려 있었다. 꽃모양의 등(燈), 유명한 향, 차와 약식을 현성에게 공양하였다. 황혼註 036이 지난 후註 037 대승이 모였다. 한 승려가 예좌(禮座)에 올라가 먼저 나발을 쳤다. 그 다음에 법회를 열게 된 연유를 말하고 공양주의 이름과 시주한 물품을 일일이 열거하며 외쳤으며 시주를 위해 불보살을 염송했다. 다음에 72현성을 받들어 청해 그 이름을 일일이 불렀다. 매번 이름을 부르고 나면 모두
 
99
“오로지 바라건대 자비로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도량에 강림하시어 우리의 공양을 받으십시오.”
 
100
라는 말을 외쳤다. 일어서서 72현성에게 두루 예를 올리고 비로소 좌석에서 내려온다. 다시 한 법사가 예좌에 올라가 찬탄하고 염불하며 여러 불보살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101
“한 마음으로 큰 스승註 038이신 석가모니불께 받들어 청하오며, 한 마음으로 이 땅에 내려와 하생(下生)하실 미륵존불께 받들어 청합니다.”
 
102
라 하였다. 십이상원註 039 약사유리광불, 대성문수사리보살, 대성보현보살, 일만보살에게도 처음에 모두
 
103
“한 마음으로 받들어 청합니다.”
 
104
라 하였다. 다음에 같은 목소리로 산화공양문(散花供養文)註 040을 부르는데, 음곡(音曲)은 몇 차례 반복된다. 다음에 어떤 비구니 법사가 또 공덕을 찬탄하는 등 비구승 법사와 똑같이 하였다. 다음에 비구승 법사가 여러 승려와 함께 같은 목소리로 찬탄하고 나면 곧 나발을 치고 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註 041을 염송註 042한다.註 043 문득 그것이 그치면 다음에 비구니들이 비구승과 번갈아가며 또한 앞과 같이 하였다. 이와 같이 서로 바꾸어가며 부처를 찬탄한다. 바로 야반(夜半)註 044에 이르러서 법회가 끝나면 모두 도량을 나가 흩어져 돌아간다. 그 받들어 청하는 글과 찬문註 045은 별지에 베껴 놓았다.
 
 
105
註) 036 원래는 오후 8시를 전후로 한 시간이다. 불교에서는 하루를 6시로 나누어 수행 시간으로 정한다. 최초의 초야·갑야를 말한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299쪽).
106
註) 037 황혼(黃昏)은 보통 오후 8시를 중심으로 한 전후 1시간을' 가리키는데, 갑야(甲夜), 초야(初夜), 술극(戌剋) 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6시 이후 초야에 해당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0쪽).
107
註) 038 부처님의 존칭. 대도사(大導師)라는 뜻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2쪽).
108
註) 039 약사유리광불(十二上願藥師瑠璃灮佛), 또는 십이상원으로서 약사여래불이 수행하던 때 세운 열두 가지 원(願)을 말했다. ①광명보조원(光明普照願) ②수의성판원(隨意成辦願) ③시무진물원(施無盡物願) ④안립대승원(安立大乘願) ⑤구계청정원(具戒淸淨願) ⑥제근구족원(諸根具足願) ⑦제병안악원(除病安樂願) ⑧전녀득불원(轉女得佛願) ⑨안립정견원(安立正見願) ⑩제난해탈원(諸難解脫願) ⑪포식안악원(飽食安樂願) ⑫미의만족원(美衣滿足願) 등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3쪽).
 
 
109
十二上願은 약사여래가 보살행을 닦을 때 발원한 12가지의 大願을 말한다.
 
110
십이상원(十二上願)은 약사여래가 보살행을 닦을 때 발원하였다고 하는 12가지의 대원(大願)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1쪽).
 
 
111
註) 040 연꽃 등을 뿌리며 부처를 공양할 때 곡조를 붙여서 唱하는 글이다.
 
 
112
산화공양문(散花供養文)은 연꽃 등을 뿌리며 부처를 공양할 때 창을 하는 글이다. 여기에서 산화공양문은 오회염불법(五會念佛法)의 장엄문과 산화악문(散華樂文)의 장엄문을 합한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1쪽).
 
 
113
註) 041 대승불교의 중요한 부처님. 줄여서 미타(彌陀)라고 하며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3쪽).
114
註) 042 원문 '同音念阿弥陀佛'은 법조가 창안한 오회염불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오음(五音)에 맞춘 미묘한 음악적 염불이다. 칭명염불 그 자체가 아니고 관상염불(觀想念佛)인 것이다. 그런데 법조의 이러한 염불법은 이미 그의 출신지라고 생각되는 사천의 땅에서 그것도 신라승 무상(無相, 684~762)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었던 인성염불(引聲念佛)이 그 시원이란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00쪽).
115
註) 043 법조류(法照流)의 오회염불(五會念佛)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1~454쪽).
116
註) 044 야반(夜半)은 반야(半夜)와 같은 말로, 12시 전후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4쪽).
117
註) 045 《입당신구성교목록(入唐新求聖敎目錄)》에 ‘請賢聖儀文竝諸雜讚文 一卷’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3쪽).
 
 

 
 

5월 7일 (음)

119
- 각원에서 재를 마련하다
 
120
七日。閣院有施主。設七日僧齋。齋時法用。略同昨日但行香時。道場供養音聲。表歎師不唱一切恭敬等。但立表嘆。更有別僧打槌作。餘法事飲食如法。
 
 
121
[5월] 7일, 각원(閣院)에 시주가 있어 7일 동안 승려들에게 재註 046를 마련하였다. 재를 들 때의 법식은 대략 어제와 같았다. 다만 행향할 때 도량 공양의 음성註 047만 있고 표탄사가
 
122
“일체 공경하라”
 
123
등은 외치지 않고 일어서서 표탄(表歎)만 했다. 또한 별도의 승려가 추註 048를 쳐서 나머지 법회를 하고 식사는 법식대로 했다.註 049
 
 
124
註) 046 라이샤워는 5일조에 “750명의 승려들에게 재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을 근거로, 이것은 700승재(僧齋)의 오기로 보았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승려들에게 재를 베풀었다고 해야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7쪽).
125
註) 047 행향 때 부르는 도량 공양의 게(偈)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7쪽).
126
註) 048 추침(槌砧)·추정(槌静)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추(槌)라고 한다. 나무로 만든 타악기로, 기둥같이 생긴 모양과 널빤지 모양이 있다. 선사(禪寺)에서 사용하는 타판(打板)·목어(木魚)·방(梆)과 같은 것도 추(槌)의 변형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8쪽).
127
註) 049 7일 기사는 권3에 빠져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7쪽).
 
 

 
 

5월 14일 (음)

129
- 유정가 유효가 구족계를 받다
 
130
([□@考]十四日以下凡三十行再出第三卷兩文相異以線示之)十四日。夜惟正。惟曉。共數十遠來沙彌。於白玉壇受具足戒。
 
 
131
[5월] 14일, 밤에 유정과 유효 註 050가 멀리서 온 수십명의 사미註 051와 함께 백옥단(白玉壇) 위註 052에서 구족계(具足戒)註 053 註 054를 받았다.
 
 
132
註) 050 본문에는 “효(曉)”라고만 되어 있는데, 권3에 따라 “유효(惟曉)”라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8쪽).
133
註) 051 권3에서는 “수십인(數十人)”이라고 되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8쪽).
134
註) 052 권3에 따라 “상(上, 위)”를 보충한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8쪽).
135
註) 053 새로 출가한 사람이 최고 단계의 승려 위계인 비구 또는 비구니가 되고자 할 때 반드시 받아 지녀야 하는 불교 계율이다. 사미 또는 사미니가 받는 10계와 비교하여 계품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뜻에서 구족계라고 한다. 수계법에 의하면, 구족계를 수지한 자는 곧바로 비구 또는 비구니의 자격을 가지게 된다.
136
註) 054 구족계(具足戒)는 범어로 Upa-sampanna 또는 Upa-sampada이다. 비구나 비구니가 되기 위해서 받는 것으로, 계율의 조목도 높고, 250계(비구)·348계(비구니)라고도 한다. 구족은 “완전만족”이라는 뜻인데, 10계(사미)를 받은 후, 만 20세가 되어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58~460쪽).
 
 

 
 

5월 16일 (음)

138
- 《마하지관》 강의를 듣다
 
139
十六日早朝。出竹林寺。尋谷東行十里。向東北行十里。到大花嚴寺。入庫院住。齋後入涅槃院。見賢座主。彌高閣殿裏。講摩訶止觀。有四十餘僧。列坐聽講。便見天台座主志遠和上在講筵。聽止觀。堂內莊嚴精妙難名。座主云。講第四卷畢。侍下講到志遠和上房禮拜。和上慰問慇懃。法堅座主從西京新來。文鑒座主久住此山。及聽講眾四十餘人。竝是天台宗。同集相慰喜遇講𨓍。志遠和上自說云。日本㝡澄三藏。貞元廿年。入天台求法。台州刺史陸公。自出紙及書手。寫數百卷。與澄三藏。々々得疏却歸本國(云々)。便問日本天台興隆之事。粗陳南岳大師生日本之事。大眾歡喜不少。遠座主聽說南岳師生日本弘法之事極喜。大花嚴寺十五院僧。皆以遠座主為其首座。不受施利。日唯一食。六時禮懺不闕。常修法花三昧。一心三觀為其心腑。寺內老僧宿盡致敬重。喫茶之後。入涅槃道場。禮拜涅槃相。於雙林樹下右脇而臥。一丈六尺之容。摩耶悶絕倒地之像。四王八部龍神。及諸聖眾。或舉手悲哭之形。或閉目觀念之貌。盡經所說之事。皆模為像也。
 
 
140
[5월] 16일, 이른 아침에 죽림사를 나와 골짜기를 따라 동쪽으로 10리를 가고 동북쪽으로 10리를 가서 대화엄사(大花嚴寺)註 055 註 056에 도착해 고원(庫院)에 들어가 머물렀다. 재를 마친 후 열반원에 들어가법현註 057좌주(法賢座主)註 058가 높은 전각에서 《마하지관(摩訶止觀)》註 059 註 060을 강의하는 것을 보았다. 40여 명의 승려가 줄을 지어 앉아 강의를 듣고 있었다. 문득 천태좌주 지원화상(志遠和尙)註 061이 강석에서 《마하지관》 강의를 듣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당 안은 장엄하고 정묘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좌주가 말하기를
 
141
“제4권을 마치고자 한다”
 
142
고 하였다. 강의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지원화상의 방에 가서 예배하였다. 화상은 친절하게 위문하였다. 법현좌주는 서경(西京)註 062 註 063에서 새로 왔고, 문감좌주(文鑒座主)註 064는 오랫동안 이 산에 머물며 일찍이 《마하지관》과 《법화경》을 수차례 강의하였다.註 065 강의를 듣는 무리는 40여 명에 이르는데, 모두 천태종 승려들이다. 같이 모여 서로 위로하며 강석에서 만난 것을 기뻐하였다. 지원화상이 스스로 말하기를
 
143
“일본국 최징삼장(㝡澄三藏)註 066은 정원 20년에 천태산에 들어와 불법을 구했다.태주자사 육공(陸公)註 067 註 068은 스스로 종이와 묵(墨)을 내고 필사생을 시켜 불경 수백 권을 베껴 최징삼장에게 주었다. 삼장은 불경의 주석을 얻고 [아울러 허가증을 얻어註 069] 본국으로 돌아갔다.”
 
144
고 운운하였다. 문득 일본 천태종이 융성하게 된 일에 관하여 물었으므로, 남악대사(南岳大師)註 070 註 071가 일본에서 출생하여 [불법을 홍포한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대중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지원좌주는 남악대사가 일본에 태어나 불법을 홍포한 일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대화엄사註 072의 15개 원(院)註 073에는 승려들이 [매우 많은데] 모두 지원좌주를 그들의 수좌(首座)로 삼고 있다. [화상은] 자기에게 이로운 보시물을 받지 않으며, 하루에 오로지 한 끼만을 먹고 여섯 번의 예참 註 074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항상 법화삼매註 075를 수행한다. 일심삼관(一心三觀)註 076을 마음의 근본으로 삼고, [뜻은 세속을 초월註 077하여 전 산의] 여러 절의 노숙승들은 모두 극진하게 공경하고 존중한다. [그의 깊은 뜻은 일생 동안 보현보살을 만나 법화삼매의 경지를 입증하려는 것이다.] 차를 마신 후 열반도량으로 들어가 열반상註 078 註 079에 절하며 예를 올렸다. 쌍림수(雙林樹)註 080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누워 있는 1장 6척 되는 모양, 마야부인 註 081이 기절해 땅에 쓰러져 있는 상, 사왕,註 082팔부,註 083 용신[천인] 및 여러 성중(聖衆)들이 손을 들고 슬피 우는 형상 혹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등 모두 경전에서 설법하는 사실을 본떠서 형상화한 것이다.
 
 
145
註) 055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은 후한 明帝 때 처음으로 大孚靈鷲寺가 오대산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믿을 수 없고, 《古淸凉傳》에서 북위 효문제(471-499) 때 건립되었다는 大孚圖寺가 대화엄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이 절은 大花園寺가 되었다가 당 측천무후 때 대화엄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대에는 현재의 顯通寺를 중심으로 하여 菩薩頂으로부터 大塔院까지를 포괄하는 광대한 경역을 차지했다.
146
註) 056 대화엄사(大花嚴寺)는 당나라 때 절로, 현재 현통사(顯通寺)를 중심으로 하여 보살정에서 대탑원까지를 포함하는 매우 큰 절이다. 전설에 의하면 후한 명제 때 처음으로 대부영취사(大孚靈鷲寺)가 오대산에 세워졌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65~468쪽).
147
註) 057 법견(法堅) 등으로 전후가 같지 않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4쪽).
148
註) 058 초본(抄本)에서는 法座主라 하고, 뒷 서술에서는 法堅이라 한다. 법현(法賢)에 대한 전기는 알 수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68쪽).
149
註) 059 천태대사 智凱가 강설한 것을 그의 제자 灌頂이 받아 적은 것으로 20권으로 되어 있다. 이는 《天台止觀》의 구체적인 실천서로, 《법화현의》 《법화문구》와 함께 법화 3대부의 하나가 된다.
150
註) 060 마하지관(摩訶止觀)는 천태대사 지의(智顗)가 강설한 것을 그의 제자 관정(灌頂)이 받아 적은 것으로 20권이다. 예부터 법화 3대부의 하나로써 알려져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68쪽).
151
註) 061 지원화상(志遠和尙, 764~844)의 성은 송(宋)씨이다. 여양(하남성 여남현) 사람으로, 오대산에서 천태종으로 이름난 승려이다. 그의 전기는 《광청양전(廣淸凉傳)》·《송고승전(宋高僧傳)》권7·《불조통기(佛祖通記)》 권25·《석문정통(釋門正統)》 권3 등에 실려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69쪽).
152
註) 062 東都 혹은 동경인 洛陽과 대비해 서쪽의 장안은 西京·西都·上都 등이라 하였다.
153
註) 063 당의 서경은 장안이다. 동도 낙양에 대비해서 사용되었는데, 천보 원년(742)부터 지덕 2년(757)까지 16년 동안 불리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69쪽).
154
註) 064 개성 4년 7월 23일조에 의하면 문감(文鑒)은 지원(志遠)과 함께 현소(玄素)의 제자라고 한다. 《자각대사전(慈覺大師傳)》에 의하면 문감은 현감(玄鑑)이라고도 하는데, 지원과 똑같이 80여 세였다고 한다. 따라서 현감과 문감은 동일인으로, 현감은 문감의 오기인 듯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69쪽).
155
註) 065 권2에는 없는 내용으로, 권3에 따라 보충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69쪽).
156
註) 066 3장(三藏)은 경(經)·율(律)·논(論)에 통달한 법사를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최징(㝡澄)의 존칭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0쪽).
157
註) 067 강소성 소주 출신으로 자는 元沖이다. 春秋學의 대가로 국자박사, 給事中 등을 역임하고 만년에 태주자사가 되었다. 그가 태주자사로 있을 때 㝡澄에게 공험을 발급해 준 적이 있다. 그의 저서로는 《春秋集注》·《弁疑》·《微旨》 등이 있다.
158
註) 068 육공(陸公)은 육순(陸淳, ?~805)이다. 그의 자는 원충(元沖)인데, 헌종의 휘(처음엔 淳, 후에는 純)를 피해 질(質)로 개칭하였다. 오군(강소성 소주) 사람이다. 태주자사()로 재임하였다. 그는 조광(趙匡)·담조(啖助)와 친하였고, 중당(中唐) 시대 춘추학의 대가로서, 《춘추집주(春秋集注)》·《변의(弁疑)》·《미지(微旨)》 등의 저서가 유명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1~472쪽).
159
註) 069 인장이 날인된 증명서로, 보증 등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2쪽).
160
註) 070 남북조시대의 고승으로 천태 지개의 스승인 慧思禪師이다. 《속고승전》 권17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161
註) 071 여기에서 남악대사(南岳大師)는 혜사(慧思, 515~577)이다. 혜사는 남북조시대의 고승으로, 천태 지개의 스승이다. 그의 전기는 《속고승전(續高僧傳)》 권17에 실려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3쪽).
162
註) 072 판본에 따라서 대화엄사(大花嚴寺), 대장엄사(大莊嚴寺) 등으로 같지 않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5쪽).
163
註) 073 권3에서는 12개의 원(院)이라 하고 있는데, 이것이 정확한 것 같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3쪽).
164
註) 074 낮밤 6시를 지나서 불보살에게 예배하는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3쪽).
165
註) 075 법화삼매(法華三昧)는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 법화참법(法華懺法)이라고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3~474쪽).
166
註) 076 일심삼관(一心三觀)은 마음 중의 공(空), 가(假), 중(中)의 3관(三觀)을 닦는 것으로, 도(道)와 이(理)를 명백히 하는 것을 뜻한다. 원융삼관(圓融三觀), 불가사의삼관(不可思議三觀)이라고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5쪽).
167
註) 077 원문은 “물외(物外)”이다. 이는 세속과 떨어진 곳으로, 세속적 이해를 잊는 것이다. 진외(塵外)와 같은 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5쪽).
168
註) 078 석가모니의 入滅 과정을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涅槃變 또는 涅槃變相이라고도 한다. 인도에서는 일찍부터 제작되었으나 중국에서는 육조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조각이나 화화로 만들어졌다.
169
註) 079 열반변(涅槃變), 열반변상(涅槃變相), 멸도변상(滅度變相)이라고도 한다. 협의로는 석가의 열반 때 모습을 중심으로 나타낸 것이고, 광의로는 입멸(入滅)부터 다비(茶毘, 화장)를 하는 불사리를 탑 중심에 안치·공양하는 것까지의 경과를 패널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인도에서는 일찍이 제작되었으나 중국에서는 6조 시대 이래로 조각이나 회화로 만들어졌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6쪽).
170
註) 080 쌍림수(雙林樹)에서 쌍림은 한 쌍의 사라수(沙羅樹)를 뜻한다. 석가모니가 쌍림수 아래에서 옆으로 누워 열반했다고 전해진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6~477쪽).
171
註) 081 마야부인(摩耶夫人)은 마하마야(摩訶摩耶)라고도 하는데, 정반왕의 부인이자 석가의 어머니이다. 태자(석가)를 낳은 지 7일 만에 타계하였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7쪽).
172
註) 082 4왕(四王)은 사천왕(四天王)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7쪽).
173
註) 083 8부(八部)는 천(天), 용(龍), 야차(夜叉), 건달바(乾闥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喉羅伽)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7쪽).
 
 

 
 

5월 16일 (음)

175
- 반야원에서 대혜화상 존영에 예배하다
 
176
次入般若院。禮拜文鑒座主。天台宗曾講止觀數遍。兼畫天台大師影長供養。談話慰問甚慇懃。更見大[尸@鞋]和尚影。曾在此山修行。巡五臺五十遍。於中臺頂冬夏不下住三年也。遂得大聖加被。著得大[尸@鞋][尸@鞋]高一尺。長一尺五寸。大一量廿五斤。小一量十斤。現著影前。和上曾作一萬五千具衣帔施與萬五千僧。設七萬五千供。令作影於高閣上安置供養。
 
 
177
다음에 반야원(般若院)에 들어가 문감좌주에게 절하고 예를 표했다. 천태종 승려로, 일찍이 《마하지관》을 여러 차례 강의하였다. 아울러 천태대사(天台大師)의 존영을 그려놓고 오랫동안 공양하였다. 이야기를 하면서 매우 친절하게 위문하였다. [이에 말하기를
 
178
“이 절에서는 2개의 강좌를 열어천태교를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 먼 나라의 승려가 천태교를 구하러 이곳까지 온 것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심히 감응이 있을 것입니다.”
 
179
라 하였다.] 다시 대혜화상(大鞋和尙)의 존영을 보았다. 일찍이 이 산에서 수행하며 오대산을 50차례나 순례하였다. 중대(中臺) 산정에서 겨울과 여름에도 내려오지 않고 3년을 머물러 마침내 대성의 가호를 입어註 084 큰 신발을 얻을 수 있었다. 신발의 높이는 1척이고 길이는 1척 5촌이었다. 큰 것 하나의 무게는 25근이고 작은 것 하나는 10근이었다. 지금 존영 앞에 놓여 있다. 화상은 일찍이 1만 5천 개의 옷을 만들어 1만 5천 명의 승려에게 주었고, 7만 5천 명의 공양을 마련하였다. 지금 존영을 만들어 높은 누각 위에 안치하고 공양한다.
 
 
180
註) 084 가피(加被).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들에게 힘을 주는 일이다. 중생의 입장에서는 보살핌을 받는 것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05쪽).
 
 

 
 

5월 16일 (음)

182
- 오대산에서는 모두가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보이다
 
183
此清凉山。五月之夜極寒。尋常著綿襖子。嶺上谷裏樹木端長。無一曲戾之木入大聖境地之時。見極賤之人。亦不敢作輕蔑之心。若逢驢畜。亦起疑心。恐是文殊化現歟。舉目所見。皆起文殊所化之想。聖靈之地。使人自然對境起崇重之心也。
 
 
184
이 청량산은 5월의 밤에도 매우 추워 보통 때에도 솜을 넣은 웃옷을 입는다. 산마루와 골짜기의 수목들은 곧게 자라, 굽거나 꼬인 나무가 하나도 없다. 대성(大聖)註 085이 사는 땅에 들어오게 되면 매우 천한 사람을 보아도 또한 감히 경멸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나귀를 만나더라도 이것이 혹시 문수보상의 화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일어난다. 눈을 들어 보는 모든 것이 문수보살의 화신이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령의 땅 이곳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성령을 숭상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185
註) 085 문수보살을 지칭한다.
 
 

 
186
권(卷) 제(第) 3
187
 - 개성오년(開成五年)
 
 

5월 17일 (음)

189
- 보살당원을 참배하다
 
190
十七日將延曆寺未決三十條。呈上志遠和上。請決釋。遠和上云。見說。天台山已決此疑。不合更決。不肯通矣。晚際。與數僧。上[A2]菩薩堂院。見持念和上。年七十。適見可卌來也。人云。年高色壯。得持念之力。開堂聖禮拜大文殊[A3]菩薩像。容貌顒然。端嚴无比。騎師子像。滿五間殿在。其師子精靈。生骨儼然。有動步之勢。口生潤氣。良久視([□@考]東本作觀傍注視)之。恰似運動矣。老宿云。初造此[A4]菩薩時。作了便裂。六遍柤作。六遍頹裂。其博士惆悵而云。吾此一才。天下共知。而皆許孤秀矣。一生來柤作佛像。不曾見裂損之。今時作此像。齋戒至心。盡自工巧之妙。欲使天下人瞻禮。特為發心之境。今既六遍造。六遍皆摧裂。的應不稱大聖之心。若實然者。伏願。大聖文殊[A5]菩薩。為我親現真容。親覩金顏。即倣与而造。纔發願了。開眼見。文殊[A6]菩薩騎金色師子。現其人前。良久乘五色雲。騰空飛去。博士得見真容。歡喜悲泣。方知先所作不是也。便改本樣。長短大小。容貌髣髴([□@考]髴東本無)。取所現之相。第七遍柤作此像。更不裂損。每事易為。所要者皆應矣。其人造此像了。安置此殿。露光眼中注淚。乃云。大奇。曾來未曾見者。今得見也。願劫劫生生常為文殊師利弟子。言竟身亡。向後。此像時時放光頻現靈瑞。每有相時。具錄聞奏。勅施袈裟。今見披在[A7]菩薩體上者。是其一也。因此每年勅使送百領袈裟。表賜山僧。每年勅使別勅送香花。寶蓋。真珠幡蓋。珮玉。寶珠。七寶寶冠。金鏤香鑪。大小明鏡。花毯。白㲲。珍假花菓等。積漸已多。堂裏鋪列。不盡之。餘者惣在庫。貯積見在。自餘諸道州府官私施主。每年送者不可勝數。今五臺諸寺。造文殊[A8]菩薩像。皆此聖([□@考]此聖東本倒置)像之樣。然皆百中只得一分也(云々)。其堂內外。七寶傘蓋。當[A9]菩薩頂上懸之。珍彩花幡。奇異珠鬘等。滿殿鋪列。寶裝之鏡。大小未知其數矣。
 
 
191
개성 5년(840) 5월 17일註 001 연력사에서 해결하지 못한 30개 조항註 002의 의문註 003을 지원화상에게 올려 해석을 청하였다. 지원화상이 말하기를
 
192
“듣건대 천태산에서 이미 이 의문을 해결했다고 하니 다시 해답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193
고 하며 수긍하지 않았다.
 
194
저녁 무렵에 여러 명의 승려와 함께 보살당원(菩薩堂院)註 004에 올라가 지념(持念)하는 화상을 보았다. 나이가 70세였으나 겨우 40세 정도로 보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195
“나이가 많은데도 얼굴이 장년(壯年)처럼 보이는 것은 지념의 힘註 005을 얻어서 그렇다.”
 
196
고 하였다. 당(堂)을 열고 대성문수보살상에 절하고 예를 올렸다. 그 용모는 엄숙하고註 006 단엄(端嚴)함이 비길 데 없었다. 사자를 타고 있는 상으로 5칸의 전각에 가득 찼다. 그 사자에는 영혼이 들어 있는 듯했고註 007 몸체는 근엄하여註 008 걸어 움직이는 것과 같은 기세였으며 입에는 윤기가 흘렀다. 그것을 오래 보고 있으면 마치 움직이는 것 같았다. 노승이 말하기를
 
197
“처음 이 보살상을 만들 때 만들자마자 곧 깨어졌다. 여섯 번을 만들었으나註 009 여섯 번 다 깨어졌다. 그 박사(博士)註 010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의 재주는 천하가 다 알아, 홀로 빼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한평생 동안 불상을 만들었으나 일찍이 깨어지고 파손된 적이 없었다. 이번에 이 상을 만드는 데는 지극한 마음으로 재계하고 기술의 오묘함을 다하여,註 011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 예배하게 하며 특히 발심註 012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고자 했다. 그런데 지금 이미 여섯 번을 만들어 여섯 번 모두 부셔졌다. 이는 대성(大聖)의 마음에 합치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진실로 그러하다면 엎드려 바라건대 대성문수보살께서 저를 위하여 친히 그 참 모습을 나타내 달라. 직접 금빛 얼굴을 목도하고 곧 그 모습대로 만들겠다.’라 하였다. 잠깐 동안 발원을 마치고 눈을 뜨니 문수보살이 금빛 사자를 타고 그 사람 앞에 나타났다. 오랜 후에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날아갔다. 박사는 참모습을 볼 수 있어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앞서 만들었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곧 본래 모양을 고쳐 길고 짧고 크고 작은 모습을 현신했던 형상註 013과 아주 흡사하게 하여註 014 일곱 번째로 이 상을 만들었더니 다시는 파손되지 않고 모든 일이 쉬워져 하고자 하는 대로 잘 이루어졌다. 그 사람이 이 상을 만들어 이 전각에 안치했더니 눈에서 빛이 났다.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참으로 기이하다. 지금까지 일찍이註 015 보지 못한 것을 지금에야 볼 수 있게 되었다. 바라건대 영원토록註 016 문수사리의 제자가 되겠다.’라는 말을 마치고 죽었다. 그후 이 상은 때때로 빛을 발하여 신령한 상서(祥瑞)를 자주 나타내었다.註 017 그러한 현상이 있을 때마다 갖추어 기록해 천자께 아뢰었더니 조칙을 내려 가사를 시주하였다. 지금 현재註 018 보살의 몸 위에 걸치고 있는註 019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일로 매년 칙사가 100벌의 가사를 보내와 산의 승려들에게 하사한다. 매년 칙사는 별도로 향화(香花), 보개(寶蓋),註 020 진주(眞珠), 번개(幡蓋), 패옥(佩玉)註 021, 보주(寶珠), 칠보보관(七寶寶冠), 금루향로(金鏤香鑪)註 022, 크고 작은 거울, 꽃무늬 모포註 023, 흰 모직물註 024, 진귀한 조화와 과일 등을 보내주었다. 그것은 점점 쌓여 이미 많아져, 당 안에 줄지어 깔아도 다할 수 없어 나머지는 모두 현재 창고에 쌓아 저장하고 있다. 그 밖에도 여러 도 주부(州府)의 관청과 개인 시주들이 매년 보내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지금 오대산의 여러 절에서 문수보살상을 만들 때 모두 이 성상(聖像)의 모양을 본떠 만드나 모두 100개 중에 하나를 겨우 얻을 수 있다.”
 
198
운운하였다. 그 당 안에는註 025 칠보로 장식한 산개(傘蓋)가 이 보살의 머리 위에 걸려 있다. 진귀한 색깔의 꽃무늬 깃발과 기이한 구슬註 026로 장식한 장엄구 등이 전각 가득히 널려 있었고, 보석으로 장식한 크고 작은 거울註 027은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199
註) 001 4월 28일부터 5월 16일까지는 기사가 2권과 중복되어 있다. 그에 대한 이문(異文)은 2권에 주기 또는 증보하였으므로, 권3에서는 생략하고 여기서는 5월 17일부터 시작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9쪽).
200
註) 002 일본 천태종 본산 엔랴쿠샤[延曆寺]가 그들이 모르던 천태종 교의 30조를 입당승에게 가지고 가게 하여 당나라 천태종 대덕에게 해답을 얻고자 한 문안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13쪽).
201
註) 003 최징(最澄)이 입당하였을 때, 대주(台州)의 용흥사(龍興寺)에서 천태좌주(天台座主)인 도수(道邃)에게 10개조에 걸친 의문의 해결을 얻었다. 이것이 천태종 미결(未決)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원인(圓仁)도 자신의 의문뿐만 아니라 예산(叡山)의 여러 의문을 가지고 그곳에 가서 그 해답을 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권1 개성(開成) 3년 8월 4일조에 “환학승 원인(圓仁), 위의 사람은 태주 국청사에 가기를 청합니다. 거기서 스승을 찾아 불법상의 의문점을 풀려고 합니다. 만일 태주 국청사에 스승이 없으면 다시 여러 주를 통과하여 장안으로 가고자 합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다음해 4년 2월 27일에 초주(楚州)에 있던 원재(圓載)에 의탁하였던 사가(寺家)의 미결과 수선원(修禪院)의 미결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의 연력사(延曆寺) 미결이라는 것은 그중 사가 미결에 해당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9쪽).
202
註) 004 진용보살원(眞容菩薩院), 보살정진용원(菩薩頂眞容院), 진용원(眞容院) 등이라고도 한다. 오대산 중대(中台)의 끝이 동남으로 뻗다가 그 끝부분이 조금 높아지는 곳에 위치하는데, 곧 《광청량전(廣淸凉傳)》에서 강만특기(岡巒特起)하는 고대(高台)와 비슷한 모습을 했다고 한 곳으로, 오대산 문수신앙의 중심을 이루었다. 여기에 처음으로 불당이 만들어지고 문수상이 안치되었던 것은 당 예종(睿宗) 경운(景雲) 연간(710)으로, 이때 이것을 진용원이라고 명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보이는 보살당원(菩薩堂院)은 당시에 이미 진용원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진용원이라는 이름이 북송(北宋)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는 조연(奝然, 옹희 2년 8월 입송구법순례기) 및 성심(成尋, 「참천태오대산기」) 등의 일본 입송승(入宋僧) 기록에도 명확히 보이는데, 즉 전자는 “대화엄사(大華嚴寺) 보살진용원(菩薩眞容院)”, 후자는 “대화엄사(大華嚴寺) 진용보살원(眞容菩薩院)”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보살원 또는 진용원은 정확히는 진용보살원이라고 해야한다고 생각되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호칭은 당시의 통칭이었다. 이곳에는 불당 외에 승당(僧堂) 등도 생겨 점차 규모가 커졌으니, 성심에 따르면 “文殊閣, 四重莊嚴, 堂內七寶供具, 不可記盡. 次四重閣, 丈六釋迦彌陀彌勒. 次第三閣, 銀等身佛四體四方佛云云. 文殊閣名瑞相之殿, 第二閣名化相之殿”(《참천태오대산기(參天台五臺山記)》라고 하였다. 당과 오대의 폐불(廢佛)에도 불구하고 부흥하여 성대하게 되었던 것이니, 성심의 기술에 다소 애매모호한 점이 있으나, 신종(神宗) 시대(1067-1085)에는 원의 경내에 전전(前殿, 문수각=서상전), 제2전(화상전) 및 제3전(집성각)이라는 큰 건조물이 있었을 정도였다. 《광청량전(廣淸凉傳)》 중권 안생소진용보살(安生塑眞容菩薩)조에 따르면, 이보다 먼저인 경덕(景德) 4년(1007)에 2층 13칸의 대각(大閣)을 건축하여 진용보살을 안치하고 봉진각(奉眞閣)이라고 명명하였고, 나아가 인종 황우(皇祐) 3년(1051) 이후 그 북쪽에 승 수법(守法)이 대각을 건축하였는데 이 또한 2층 13칸이었으며 보장각(寶章閣)이라고 명명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수각(서상전)과 봉진각은 동일한 전각이라 하겠다. 단, 앞에서는 4층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2층이라고 하였다. 보장각은 칙건(勅建)에 의한 것이었는데, 성심은 여기에 있는 인종 어서(御書)의 보장각이라는 제액(題額)을 본 것도 서술하였다. 이들에 따라 보장각이 화상전으로 제2전이고, 집성각이 제3전이라고 할 수 있다. 돈황의 오대산도(五臺山圖)에는 2층과 4층의 누각이 나란히 그려져 있다. 이 2층 누각이 대성문수진신전(大文殊聖眞身殿)이고, 4층 누각이 아마도 보장각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벽화가 그려졌던 당시는 아직 집성각이 건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에 따라 북송시대 보살진용원의 규모는 성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5칸의 불당이 있다고만 되어 있어, 이와 같은 성대한 규모를 추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회창(會昌) 이전에는 성심이 참례하였던 때 정도의 대규모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원대(元代)의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명대에는 이곳이 대문수사(大文殊寺)라고도 칭해졌고, 청대에는 오대산의 라마교 본산이 되어 장인찰살극(掌印札薩克)이 거주하였으며 현통사(顯通寺)와는 전혀 다른 계파의 사원이 되었다. 근래의 가람은 강희(康熙) 연간에 중건되었고, 산문(山門), 고루(鼓樓), 종루(鐘樓), 천왕전(天王殿), 전전(前殿), 문수전(文殊殿) 등이 있으며 모두 황녹색의 기와를 수즙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9쪽).
203
註) 005 불교에 대한 실천면에서 기초적 덕목이 되는 다섯 가지, 곧 신력(信力)·진력(進力)·염력(念力)·정력(定力)·혜력(慧力) 가운데 하나. 사상을 바로 가지고 사특한 생각을 버리는 것. 또는 한 가지 일을 전심으로 생각하며 모든 마장(魔障)을 물리치고 산란하지 않는 힘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8쪽).
204
註) 006 원문에 옹연(顒然)이라 하였는데 엄정(嚴正)하다는 뜻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쪽).
205
註) 007 원문에 정령(精靈)이라 하였다. 혼령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쪽).
206
註) 008 원문에 생골(生骨)이라 하였다. 힘차게 생동하는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쪽).
207
註) 009 원문에 열작(揑作)이라 하였다. 초본(抄本)에는 단작(担作)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일단 고쳐서 열작(揑作)이라고 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쪽).
208
註) 010 여기서는 전문 기술자의 존칭으로 쓰였다. 박사는 진한(秦漢) 이래 관직명으로 쓰였는데, 당대에 이르러 국자감에 국사감(國士監), 오경(五經), 태학(太學), 광문관(廣文館), 사문관(四文館) 등 여러 박사가 생겼고, 기타 율학(律學), 산학(算學) 등의 박사도 있었다. 또한 사천대(司天臺)의 천문박사(天文博士), 액정국(掖庭局)의 궁교박사(宮敎博士), 태의서(太醫署)의 의박사(醫博士), 침박사(針博士), 안마박사(按摩博士), 주금박사(呪禁博士) 등도 있었다. 지방에도 경학박사(經學博士), 의학박사(醫學博士) 등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박사가 반드시 이러한 관직명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봉연(封演)의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에는 전다박사(煎茶博士)가 보이고, 돈황문서에도 각종 기술자를 박사라고 부른 예가 있다. 예를 들면 정섭박사(釘鍱博士), 조종루박사(造鐘樓博士), 조상박사(造床博士), 조화로박사(造火爐博士), 니장박사(泥匠博士) 등이다. 이들 박사는 기술자의 일반적인 존칭이었다. 또한 일본에서도 당제에 의해 학습된 관직으로서 박사가 정해졌다. 다만 백제에서 건너온 노반박사(鑪盤博士)나 와박사(瓦博士)(《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은 오히려 후자와 같이 기술자의 존칭으로 쓰여진 것으로, 원인(圓仁)도 또한 화사(畵師) 속전가계(粟田家繼)를 혜박사(惠博士)라고 칭했던 것은 이미 주기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 개성 4년 3월 23일조 참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쪽).
209
註) 011 원문에 “盡自巧工之妙”라고 하였다. “自”는 자기의 의미로도 해석되지만, 어법상 “盡自”로서 “자신을 이용하여” 또는 “자신을 사용하여”라고 훈독된다. “自”는 또한 “爾”와도 음이 통하여,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생각할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쪽).
210
註) 012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줄임말. 본래 위없는 깨달음[無上菩提]을 얻고자 구하는 마음을 내는 것을 뜻했으나, 뒤에는 속(俗)에서 수승(殊勝)한 마음을 내는 것도 발심이라 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9쪽).
211
註) 013 원문에 용모(容貌)라고 하였는데, 초본(抄本)에는 “貌”자의 방(傍)을 “艮”으로 고쳐 썼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쪽).
212
註) 014 원문에 방(髣)이라 하였는데 방불(彷佛)과 같은 말이다. 모습이 매우 비슷하다는 의미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쪽).
213
註) 015 원문에 증래(曾來)라 하였다. 이래(爾來), 기래(旣來), 후래(後來), 금래(今來) 등과 비슷한 단어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쪽).
214
註) 016 원문에 겁생(劫生)이라 하였다. 겁은 범어 Kalpa의 음역으로 여기서는 영겁(永劫) 즉 장구한 시간이라는 의미로 쓰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쪽).
215
註) 017 《광청량전(廣淸凉傳)》 중권에 문수 진용의 소상에 관한 기사가 있다. 위에서는 박사라고 하였으나, 《광청량전》에서는 안생(安生)이라고 하였다. 안생의 “生”에도 또한 선생이라는 존칭의 의미가 있으므로 박사와 통한다고 하겠다. 게다가 여기서는 당의 경운(景雲) 연간(710-711) 승 법운(法雲)의 발심(發心)에 의한 사업이라고 하였다. 또한 전자가 전설적인 것인데 비해, 《광청량전》은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인 기술 형태로 추측해보면, 이와 같은 구체적 표현이 없어진 것이 후대에 성립된 것이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쪽).
216
註) 018 원문의 “現”은 초본(抄本)에 “見”으로 되어 있다. “見”에는 북경음으로도 jian과 xian의 두 가지 음이 있는데, 후자는 “現”과 같아서 “見在”는 “現在”와 같고 의미도 또한 통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쪽).
217
註) 019 원문에는 “披”라고 했는데 “被”와 통용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쪽).
218
註) 020 보옥(寶玉)으로 장식한 차일(遮日)로서 부처님이나 강사(講師)·독사(讀師)의 좌석 위에 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89쪽).
219
註) 021 패(珮)는 패(佩)와 같다. 몸에 걸쳐 장식하였던 옥제품으로, 요패(腰佩) 외에 환천(環釧, 팔찌), 영락(瓔珞, 구슬 목걸이) 등의 종류를 포함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쪽).
220
註) 022 금루(金鏤)는 동과 철을 선각하여 여기에 황금을 상감하는 기법이다. 중국의 상안법(象眼法)은 처음에 은대(殷代)에 시작되었는데, 황금을 상감하는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공예품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기법이다. 금착(金錯)이라고도 한다. 다만 《동대사헌물장(東大寺獻物帳)》에 따르면 말금루(末金鏤)가 있는데, 이것은 후세의 금시회(金蒔會) 기법을 의미하는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쪽).
221
註) 023 원문에 화담(花毯)이라고 하였다. 꽃무늬 등을 나타낸 모직의 깔개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쪽).
222
註) 024 원문에 백첩(白㲲)이라고 하였다. 백첩(白畳), 백첩(帛畳), 백설(白緤) 등과 같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쪽).
223
註) 025 초본(抄本)에는 “其堂內外七寶傘蓋”라고 하여 그 당의 “내외”에 칠보로 장식한 산개(傘蓋)가 있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으로 볼 때 밖에는 칠보산개가 없으므로 본문의 “外”를 “以”로 고쳐 아래의 “七寶傘蓋”에 이어지도록 볼 수 있다. 여기서는 “外”를 “以”로 고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쪽).
224
註) 026 원문에는 주만(珠鬘)이라고 하였다. 구슬류를 아로새긴 불당의 장엄구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쪽).
225
註) 027 원문에는 보장지경(寶裝之鏡)이라고 하였다. 백동을 이용해 거울을 주조하고 그 이면(裏面)에 문양을 나타내기 위해 도금, 칠보, 첩금(貼金), 평탈(平脫, 금·은·동 등의 얇은 판을 오려 붙이는 기법), 누세(螻細), 보세(寶細) 등의 기법을 사용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쪽).
 
 

 
 

5월 17일 (음)

227
- 보살당 앞에서 오대를 바라보다
 
228
出到殿北。望見北臺東臺。圓頂高聳。絕无樹木。短草含彩。遙望觀之。夏中秋色。却到堂前。遙望南臺。亦无樹木。臺頂獨秀。與碧天接連。超然出於眾峯之外。西臺隔中臺。望不見也。於[A10]菩薩堂前。臨涯有三間亭子。地上敷板。四面高欄。亭下便是千仞之岸嶮峻。老宿云。昔者日本國靈仙三藏。於此亭子。奉見一萬[A11]菩薩。
 
 
229
나와서 전각의 북쪽에 이르러 북대(北臺)와 동대(東臺)를 멀리 바라보니 둥근 정상은 높이 솟았고 나무가 전혀 없었으며 키 작은 풀이 색깔을 머금고 있었다. 멀리서 그곳을 바라보니 여름이 한창인데도 가을빛이었다. 되돌아 나와 당 앞에 이르러 남대를 멀리 바라보니 역시 나무가 없고 남대 정상이 우뚝 빼어나 푸른 하늘과 이어져 뭇 봉우리 밖으로 초연히 돌출해 있었다. 서대는 중대(中臺)에 가려 바라다 보이지 않았다.註 028 보살당 앞의 벼랑註 029 가까이에는 3칸의 정자가 있는데, 땅 위에 널빤지를 깔고 사방에는 높은 난간이 있다. 정자 아래는 곧 천길 낭떠러지로 험준하다. 노승이 말하기를
 
230
“옛날에 일본국 영선삼장(靈仙三藏)이 이 정자에서 일만보살(一萬菩薩)註 030을 받들어 알현했다.”
 
231
고 하였다.
 
 
232
註) 028 북대는 협두봉(叶斗峯), 동대는 망해봉(望海峯) 또는 설봉산(雪峰山), 서대는 괘월봉(掛月峯), 남대는 금수봉(錦繡峯), 중대는 취암봉(翠巖峯)이다. 동·북의 2대가 가장 높아서 대략 해발 3,140m에 달한다. 혜상의 《고청량전(古淸凉傳)》에 따르면, 동대와 서대는 예부터 전해지는 위치에 변화가 없으나, 북·남·중의 3대는 변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남대가 지금의 중대에서 먼 현재의 위치로 이동되었다. 원인(圓仁)은 보살정(菩薩頂)에 서서 주위를 조망하여 먼저 북면(北面)하고 북·동 2대를 바라보고 다음으로 남쪽으로 아득한 남대를 배(拜)하였으나, 서대만은 중대에 가려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게다가 그는 오대산을 지날 당시, 금각사(金閣寺)로부터 남대에 올랐다. 여기에 보이는 남대는 현재의 것과 동일하다. 그런데 이것은 혜상(慧祥)의 시대, 즉 초당(初唐) 때에도 또한 같았다. 혜상의 오대산 유력(遊歷)은 건봉(建封) 2년(679) 경에 있었으므로, 《고청량전》에서 “고도(古圖)”를 인용하고 있는 것에 따르면 구(舊) 오대는 이보다 이른 시대의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이는 이를테면 같은 산계(山系)의 정상에 연이어진 자연적 지형에 의거한 오봉(五峯)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비해 후대의 오대 즉 현재의 오대는 오히려 보살정을 중심으로 정해졌던 다소 편의적, 관념적인 오정(五頂)이었다. 그렇다면 후자의 성립은 보살정이 있던 대회(臺懷)가 오대산 불교 신앙의 중심지가 되고, 이것을 기준으로 하게 되었던 때에 시작되었다는 견해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다만 그 성립이 초당 이전의 어느 시대에까지 소급되는지를 추측해야 하는데, 결국 북위(北魏)시대였을 개연성이 많다. 또한 오대는 고정된 지형에 기초했던 것이었으나, 후대에는 오계문수(五髻文殊) 및 오지여래(五智如來)와 관련하여 설명되었다(《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쪽).
233
註) 029 원문에 애(崕)라고 하였다. 여러 본은 모두 “涯”라고 썼다. 뒤의 문장에서도 “崖”라고 쓰면 일단 “崕”로 고친다. 끝, 가장자리, 낭떠러지의 뜻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쪽).
234
註) 030 문수보살의 권속 수(《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보살주처품) 일만보살이 오대산에 화현(化現)했다는 전설은 꽤 많다. 예를 들면, 《광청량전(廣淸凉傳)》 중권 무저화상(無著和尙)조에는 큰 사자를 탄 문수에게 만성(萬聖)이 익종(翼從)했다고 하였고 이외 같은 책 천녀삼매고(天女三昧姑)조 또는 법조화상(法照和尙)조에도 그러한 내용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쪽).
 
 

 
 

5월 17일 (음)

236
- 각원에서 현량좌주를 만나보다
 
237
遍禮訖。到閣院見玄亮座主。從四月始講法花經。兼天台疏。聽眾卌餘人。惣是遠和上門下。朝座閣院講法花經。晚座涅槃院講止觀。兩院之眾。互往來聽。從諸院來聽者甚多。當寺上座僧洪基。共遠和上同議。請二座主。開此二講。實可謂五臺山大華嚴寺是天台之流也。共眾僧上閣。禮拜功德。閣之內外莊嚴。所有寶物。與[A12]菩薩堂相似也。見辟支佛頂骨。其色白黯色。狀似本國輕石。骨內堅實。大二升梡許大。見是額已上之骨。上生白髮。長五分許。似剃來更生矣。西國僧貞觀年中將來者也。兼有梵夾法花經。又佛舍利。置之於瑠璃瓶裏。金字法花。小字法花。精妙極也。閣前有塔。二層八角。莊嚴珠麗。底下安置阿育王塔。埋藏地下。不許人見。是阿育王所造八萬四千塔之一數也。次入善住閣院隨喜。有禪僧五十餘人。盡是毳衲錫杖。各從諸方來巡者([□@考]者下東本更有者字。上者恐看)也。勅置鎮國道場。有天台宗僧。講四分律。亦是遠和上門下。
 
 
238
두루 다니며 예배를 마치고 각원(閣院)에 이르러 현량註 031좌주(玄亮座主)註 032를 만나보았다. 4월부터 시작하여 《법화경》과 《천태소》註 033를 강의하였는데, 청중은 40여 명으로 모두 지원화상의 문하이다. 아침 강좌는 각원에서 《법화경》을 강의하고 저녁 강좌는 열반원에서 《마하지관》을 강의한다. 이 두 원의 청중들은 서로 왕래하며 강의를 듣는다. 여러 원으로부터 와서 듣는 사람이 매우註 034 많았다. 이 절의 상좌승 홍기(洪基)는 지원화상과 함께 의논하여 두 좌주를 청하여 이 두 강좌를 개설하였다. 실로 오대산의 대화엄사는 천태의 흐름註 035을 이어받았다고 이를 만하다.
 
239
많은 승려들과 함께 각원에 올라가 공덕에 예배하였다. 각원의 안팎은 장엄하였고 가지고 있는 보물은 보살당註 036의 것과 비슷했다. 벽지불(辟支佛)註 037의 머리뼈를 보았는데, 그 색깔은 백암색으로 본국의 경석(輕石)과 비슷했다. 뼈의 내부는 단단하고 크기는 두 되들이 그릇만큼 컸다. 보아하니 이것은 이마 위 부분의 두개골로, 그 위에 흰 머리카락이 나 있었다. 길이는 5푼(分) 남짓하여 흡사 깎은 뒤에 다시 생겨난 것 같았다. 이것은 서국(西國)의 승려가 정관(貞觀)註 038 연중에 가지고 온 것이다. 아울러 범협(梵夾)註 039의 《법화경》이 있고 또 부처의 사리註 040가 유리병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금으로 글씨를 쓴 《법화경》註 041과 조그만 글씨로 쓴 《법화경》은 극히 정묘하였다. 전각 앞에 8각으로 된 2층탑이 있는데 장엄하고註 042 구슬로 장식해註 043 아름다웠다. 탑 아래에는 아육왕 註 044탑(阿育王塔)註 045을 안치하여 지하에 매장해두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아육왕이 만든 8만 4천 개의 탑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에 선주각원(善主閣院)註 046에 들어가 참배하고 귀의하였다. 선종 승려 50여 명이 있었는데, 모두 털로 짠 옷註 047과 석장(錫杖)註 048을 가지고 있었다. 각기 여러 지방에서 온 순례자들註 049이다. 조칙으로 설치한 진국도량(鎭國道場)에서는 어떤 천태종 승려가 《사분율(四分律)》註 050을 강의하는데, 역시 지원화상의 문인이다.
 
 
240
註) 031 전하는 기록이 없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그가 대화엄사의 각원과 열반원에서 강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천태종 학승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천태산이나 장안에서 초빙된 고승인 듯하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16쪽).
241
註) 032 현량의 전(傳)은 전하지 않는다. 대화엄사(大華嚴寺)의 각원(閣院)과 열반원(涅槃院)에 아침과 저녁 2좌가 개강되었는데,(《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개성 5년 5월 17일, 18일조) 그 좌주(座主)는 현량(玄亮)과 법현(法賢)이었다. 현량은 장안에서 특별히 이곳으로 초빙된 천태종의 학승(學僧)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열반원에는 문감좌주(文鑒座主)도 있었는데, 그도 일찍이 《법화경》 및 《마하지관(摩訶止觀)》을 강의했던 적이 있으나, 원인(圓仁)이 순례했을 때에는 오로지 현량이 강의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쪽).
242
註) 033 천태는 지자대사(智者大師) 지의(智顗, 538-597)가 세운 종파이다. 소(疏)는 또한 의소(義疏)라고도 하는데, 경전의 문의(文義)를 서술하여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지의에게는 《묘법연화경현의(妙法蓮華經玄義)》 20권 또는 《묘법연화경문구(妙法蓮華經文句)》 20권 등이 있는데, 여기에 보이는 《마하지관(摩訶止觀)》과 함께 이름이 높다. 7월 1일조에는 “講天台止觀文句二座主”라고 하였으므로, 천태소라는 것은 《묘법연화경문구》에 해당된다고 하겠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쪽).
243
註) 034 “매우”의 뜻에 해당하는 원문은 “甚”인데, 초본(抄本)에는 “其”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甚”이라고 고쳐서 해석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쪽).)
244
註) 035 두 좌주인 법현(法賢)과 현량(玄亮), 선학(先學)인 지원(志遠)과 문감(文鑒) 등은 모두 천태의 학승이었다. 오대산에 천태교학이 유입되었던 시기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으나, 천보(天寶) 7년(747)에 양귀비의 형 양섬(楊銛)이 현종(玄宗)을 위해 일체경(一切經) 5,048권 및 그외 반야4교를 천태의 소론(疏論)류와 합하여 약 2천 권을 청량사(淸凉寺)에 기진하였다. 또한 천태의 중흥조라고 여겨지는 담연(湛然)이 강회의 승 등을 동반하여 오대에 올라, 불공(不空) 문하의 함광(含光)과 천태의 법문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일 등도 떠오른다. 그러나 본래 강남에서 번성했던 천태종이 오대에서 특히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것은 지원의 활동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쪽).)
245
註) 036 보살당은 보살당원(菩薩堂院)의 약칭으로, 지금의 진용원(眞容院)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쪽).)
246
註) 037 범어 Pratyeka-buddha의 음역으로, 벽문가라(辟文迦羅)라고도 쓴다. 연각(緣覺) 혹은 독각(獨覺)으로 의역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람의 유언에 따라 두개골을 배형(杯形)으로 잘라 불기(佛器)로 삼는 것이다. 갈발라(葛鉢羅, kapala)는 급파라(笈播羅) 또는 겁파배(劫波杯)라고 한다. 즉 촉루배(髑髏杯, 顱器)로서, 현재 라마 묘 등에서 자주 보인다. 또한 두개골을 잘라 한 면에 가죽을 붙이고 이러한 것 2개를 중간에서 접합하여 북으로 만들기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8쪽).
247
註) 038 당 태종의 연호(627~649)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91쪽).
248
註) 039 일명 패다라(貝多羅)[葉]라고도 한다. 인도 및 남해 방면에서 종이를 대신하여 패다라수(貝多羅樹)의 잎을 장방형으로 잘라 여기에 범문(梵文)을 적고 2개 또는 1개의 구멍을 뚫어서 여러 겹으로 꿰어 만든 서책이다. 일본에도 나라, 헤이안시대에 전래되어 6~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지는 범협(梵夾)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해룡왕사(海龍王寺), 사천왕사(四天王寺), 고귀사(高貴寺), 동사(東寺), 지은사(智恩寺), 청량사(淸凉寺), 성중래영사(聖衆來迎寺) 등과 그 외 법륭사(法隆寺)에 전래되는 것도 있다(山田龍城, 《梵語佛典の諸文獻》)(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8쪽).
249
註) 040 사리는 범어 Sarira의 음역으로, 태도(駄都, dhatu)라고도 한다. 유해를 화장한 뒤에 얻어지는 유골이다. 불사리라는 것은 석가를 화장한 뒤 얻어진 유골이다. 다비(茶毘) 직후 사리는 8국에 분배되어 탑파를 건조하고 각기 공양되었다. 불사리를 신앙하는 것은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을 건쳐 일본에도 퍼져서, 감진(鑒眞)은 내조(來朝)했을 때 불사리 3천 랍을 가져왔고, 입당 8가(家) 중 공해(空海), 원행(圓行), 종예(宗叡) 등도 각각 다수의 불사리를 가지고 왔다. 원인(圓仁)도 또한 유리 소병에 든 보살사리, 백랍제 소상자에 든 벽지불사리(僻支佛舍利) 등을 가져왔다(「승화5년입당구법목록(承和五年入唐求法目錄)》)(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8쪽).
250
註) 041 금니(金泥)를 사용하여 감지(紺紙) 또는 자지(紫紙)에 서사한 《법화경》을 가리킨다. 당대(唐代)의 여러 문헌에 종종 보이는데, 예를 들면 《불공표제집(不空表制集)》 권5에는 환관 이헌성이 대종(代宗)에게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진헌하였다. 또한 일본에는 나라시대에 전문 사경생(寫經生)이 있었고, 특히 천평(天平) 연간에는 금자경소(金字經所)가 설치되었다. 당시의 유품도 조금 남아있는데, 그 전통은 겸창(鎌倉) 초기까지도 이어져서 금자의 일체경(一切經) 서사 같은 대규모 사업이 행해졌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0쪽).
251
註) 042 원문에 장교(莊校)라고 하였는데, 장엄교식(莊嚴校飾)의 줄임말이다. 불전(佛典) 등에 자주 사용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1쪽).
252
註) 043 원문에 주려(珠麗)라고 하였는데, 구슬을 아로새겨 장식하는 것이다. “珠”는 “殊”와 통용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1쪽).
253
註) 044 아쇼카(Asoka)의 왕으로서 기원전 3세기경에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를 보호한 왕. 젊은 날에는 매우 난폭했으나 한 사문(沙門)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여 8만 4천 곳의 절과 8만 4천 개의 탑을 세우고 부처님의 유적을 순례했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268~232년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91쪽).
254
註) 045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를 믿고 보호했던 아육왕(Asoka)이 자신이 이르렀던 곳에 사원을 건립하고 탑 안에 불사리를 봉안했던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이 불사리는 석가의 사후에 8왕에 의해 분장(分葬)되어 탑의 안에 모셔졌는데, 그 7기(基)를 발굴하여 새로이 8만 4천의 불탑에 분납하였다고 전해진다. 8만 4천이라는 것은 번뇌의 수와도 통하니, 다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육왕탑에 대해서는 《선견율(善見律)》 비파사(毘婆沙) 제1을 시작으로 《법현경》,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8 등에 보이는데, 이 탑은 일찍이 중국에서 건립되었다고 전해져서, 《법원주림(法苑珠琳)》 권40에는 21개소까지 늘어났다고 하였다. 산서성에 속한 것으로서는 포주(蒲州), 병주(幷州), 진주(晋州), 대주(代州) 등 여러 개가 있으나, 오대산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오대산은 대주의 관내에 있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1쪽).
255
註) 046 《광청량전(廣淸凉傳)》 중권 우운화상(牛雲和尙)전에 따르면, 화상이 개원(開元) 초에 건립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권의 징관(澄觀)전에는 선주각원에 징관을 초청하였던 현립(賢林)이 있었는데, 화엄사의 사주(寺主)로 임명되었다. 징관도 대부분은 반야원(般若院)을 주방으로 삼았지만, 한때 이곳에도 기거하였었다.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2 당오대산선주각원무염(唐五臺山善住閣院無染)전에 따르면, 이 원은 오대산 10사도검교(十寺都檢校)였던 승 지군(智頵)이 주지하였고, 정원(貞元 ) 7년(791)에 무염도 또한 이곳에 머물렀다. 《광청량전(廣淸凉傳)》 권하의 주기(註記)에는 이 원이 수(隋)의 동도량(東道場)이었다고 하였다. 사원을 도량이라고 칭했던 것은 수 양제(煬帝) 때부터 이것을 동사(東寺)라고 불렸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도 선주각원에 황제가 내린 진국도량(鎭國道場)이 있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 진국도량은 국가 진호의 수법장(修法場)이었으니, 그 설치는 불공(不空)과 관계가 있다. 이 도량을 법화행법(法華行法)의 장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인왕경》, 《밀엄경》의 전독(轉讀)도 행해졌으므로 아마 본래는 천태의 행법 도량이었던 것 같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도 여기서 《사분율(四分律)》의 강(講)이 이루어졌다고 하였고, 가끔 50여 명의 선승(禪僧)도 주숙(住宿)하였다고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3쪽).
256
註) 047 원문에서는 취납(毳納)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모로 만든 승려의 옷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4쪽).
257
註) 048 승려가 쓰는 지팡이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91쪽).
258
註) 049 초본(抄本)에는 “來巡者者”라고 되어 있다. 혹은 “來巡看者”라고 하여 이를 진행형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연문으로 보아 “者” 한 글자를 뺐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4쪽).
259
註) 050 《사분율》은 담무덕(曇無德, Dharmagupta)이 채집했던 계율(Virnaya)의 성전(聖典)이다. 승(僧, 250계)과 니(尼, 348계)의 계율을 넷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는데, 요진(姚秦)의 홍시(弘始) 14년(412)에 라집(羅什)의 스승이었던 불타야사(佛陀耶舍, Buddha-yassa)가 번역하였다. 총 60권으로, 율종(律宗)의 성전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며, 이에 의거하여 당에서는 법려(法礪, 569-635)가 상부(相部), 도선(道宣, 596-667)이 남산종(南山宗), 회소(懷素, 634-707)가 동탑종(東塔宗)을 개창하였다. 감진(鑑眞)이 일본에 전한 것은 주로 상부와 남산 양계의 사분율종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4쪽).
 
 

 
 

5월 18일 (음)

261
- 국청사에서 보내온 문서를 열람하다
 
262
十八日赴善住閣院主請。到彼斷中。仍見從台州國清寺將來書。先於楚州。付留學僧圓載上人。送天台山延曆寺未決卅條。國清寺修座主。已通決之。便請台州印信。刺史押印已了。修禪寺敬文座主具寫。送臺山。弘天台諸德。兼日本國无行和上送天台書。天台修座王通決已畢。請州印信之書。台州刺史批判。與印信之詞。具寫付來。
 
 
263
[5월] 18일, 선주각원 원주의 초청을 받고 그곳에 가서 단중註 051했다. 거기서 태주 국청사에서 가지고 온 문서를 보았는데, 일찍이 초주에서 유학승 원재상인(圓載上人)에게 부탁해 천태산에 보낸註 052 연력사의 미해결 의문점 30조항은 국청사수좌주(首座主)註 053가 이미 그것을 해결했고 곧 태주의 확인 도장註 054을 청하여 자사가 이미 압인했다는 것이었다.註 055 수선사 경문좌주 註 056가 상세히 적어 오대산에 보내어 천태의 여러 고승들에게 홍포하였다. 아울러 일본국 무행화상(无行和尙)註 057이 천태산에 보낸 서신과 천태수좌주가 의문점을 이미 해결하고 주에 확인 도장을 요청한 문서, 태주자사가 결재하여註 058 확인 도장을 찍고 적은 글을 상세히 적어 부쳐왔다.
 
 
264
註) 051 단중(斷中)에 대해서는 《입당구법순례행기》 권2 개성 5년 2월 20일조의 주 참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6쪽).
265
註) 052 초주(楚州)에 있었던 원인(圓仁)이 원재(圓載)에게 천태산으로 보내는 편지와 사가미결(寺家未決), 수선원미결(修禪院未決) 등을 부탁했던 일은 《입당구법순례행기》 권1 개성 4년 2월 27일조에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6쪽).
266
註) 053 선림사(禪林寺)의 광수(廣修)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국청사라고 한 것은 마땅히 선림사라고 썼어야 한다. 광수는 천태 제7대조 지행법사(至行法師)로, 이에 대해서는 개성 4년 윤정월 19일조에 있다. 사가미결 30조의 해결에 대해서는 개성 4년 윤정월 17일조에 주석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6쪽).
267
註) 054 스승이 전법한 증표로 제자에게 주는 증명이다. 여기서는 관아에서 발행한 증명을 가리킨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19쪽).
268
註) 055 확인 도장은 원문에 인신(印信)이라 하였다. 일반적으로는 스승이 전법(傳法)하였다는 증명으로 제자에게 수여하는 것이다. 순요(順曉)가 최징(最澄)에게 주었던 인신 등이 현존하고 있다. 여기서는 공적인 곳에서 나온 증명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6쪽).
269
註) 056 원인(圓仁)과 양주(揚州)에 있을 때 알았고, 또 뒤따라 초주에 도착하여 이별을 애석해하였다. 이들의 관계는 개성 4년 윤정월 19일 및 3월 2~4일조에 기록되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7쪽).
270
註) 057 최징(最澄)의 고족제자(高足弟子) 중 한 사람이다. 원진(圓珍)의 「전교대사행업기(傳敎大師行業記)」에도 기록되어 있는 승려이다. 단, 《산문기(山門記)》에는 원인(圓仁)의 제자로 되어 있다. 원성사(園城寺) 소장 《삼취정계첩(三聚淨戒牒)에 천태법화종십선사전등대법사위무행(天台法華宗十禪師傳燈大法師位無行)과 자서(自署)도 있어서, 일찍이 예산(叡山)의 전계사(傳戒師)로 임명되었던 것도 엿볼 수 있지만, 그 전기는 남아 있지 않다. 무행(无行)이 원인(圓仁)에게 주었던 천태좌주에게 보내는 신물은 앞서 경문(敬文)에게 기탁했었으니(《입당구법순례행기》 권1 개성 4년 3월 4일조), 여기서는 그에게 부탁했던 서장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7쪽).
271
註) 058 원문에서 비판(批判)이라 하였다. 하급 관직이 상관에게, 또는 백성이 관청에 신청하는 경우, 거기에 대해 내리는 가부 및 증명 내지는 이와 같은 서류 등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7쪽).
 
 

 
 

5월 20일 (음)

273
- 중대를 순례하다
 
274
廿日始巡臺去。從華嚴寺向西。上坂行七里許。到王子寺喫茶。向西上坂行六七里。至王花寺。更向西上坂十餘里。到中臺。臺南面。有求雨院。從院上行半里許。到臺頂。々上近南。有三鐵塔。竝無層級相輪等也。其體。一似覆鍾。周圓四抱許。中間一塔四角。高一丈許。在兩邊者團圓。竝高八尺許。武婆天子。鎮五臺所建也。武婆者。則天皇是也。鐵塔北邊。有四間堂。置文殊師利及佛像從此北一里半。是臺頂中心。有玉花池。四方各四丈許。名為龍池。池中心小嶋上有小堂。置文殊像時人呼之龍堂。池水清澄。深三尺來。在岸透見底砂。淨潔竝无塵草。臺頂平坦。周圍可百町餘。超然而孤起。猶如[A13]雙出。臺形圓聳。於此望見餘之四臺西臺。北臺。去中臺稍近。下中臺向北上坂。便是北臺之南崖([□@考]崖東本作涯)又下中臺([□@考]臺東本作堂)向西上坂。便是西臺之東崖也。三臺地勢近相連。東臺南臺。去中臺竝五十來里。中臺東脚。長嶺高低。屈曲[A14]邐迤。向南五十里。地便與南臺西北脚連。北臺東北脚。嶺下而復上。高低長嶺參差。向東四十餘里。便與東臺西脚連。然五臺高顯出眾嶺之上。五臺周圓五百里。外便有高峯重々。隔谷高起。遶其五臺而成墻壁之勢。其峰參差。樹木欝茂。唯五頂半腹向上。竝无樹木。然中臺([□@考]臺東本作堂)者。四臺中心也。遍臺水湧地上。軟草長者一寸餘。茸々稠密。覆地而生。蹋之即伏。舉脚還起。步々水濕。其冷如氷。處々小窪。皆水滿中矣。遍臺砂石。間錯石塔无數。細軟之草間莓苔而蔓生。雖地水濕。而無滷泥。緣莓苔軟草布根稠密故。遂不令遊人汙其鞋脚。奇花異色。滿山西開。從谷至頂。四面皆花。猶如鋪錦。香氣芬馥。薰人衣裳。人云。今此五月猶寒。花開未盛。六七月間。花開更繁(云々)。看其花色。人間未有者也。
 
 
275
[5월] 20일, 비로소 오대산 순례를 떠났다. 화엄사에서 서쪽을 향해 산비탈을 올라 7리 정도 가서 왕자사(王子寺)註 059에 도착해 차를 마셨다. 서쪽으로 산비탈을 올라 6, 7리 정도 가서 옥화사(玉花寺)註 060에 이르렀다. 다시 서쪽으로 산비탈을 10여 리 올라가서 중대 註 061에 도착했다. 중대의 남쪽 면에는 구우원(求雨院)이 있다. 그 원에서 반 리 남짓 올라가서 중대의 정상에 도착했다. 정산의 남쪽 가까이에 3개의 철탑(鐵塔)이 있는데, 모두 층급(層級)이나 상륜註 062 등이 없었다. 그 모양은 오로지 종을 엎어놓은 것 같았으며 원(圓)의 둘레는 4아름 정도였다. 중간의 한 탑은 4각으로, 높이가 1장 정도였고 양쪽 옆에 있는 것은 둥근 모양으로 모두 8척 정도였다. 이는 무파천자(武婆天子)註 063가 오대산을 진호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무파는 곧 측천황태후 註 064이다. 철탑 북쪽 옆에 4칸의 당이 있어, 문수사리와 부처의 상을 안치하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1리 반 되는 곳이 중대의 정상이며 그 중심에 옥화지(玉花池)註 065가 있다. 사방은 각각 4장 정도 되었으며 이름을 용지(龍池)라 한다. 연못 가운데의 작은 섬 위에 조그만 당이 있어 거기에 문수상을 안치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용당(龍堂)이라 불렀다. 연못의 물은 맑고 깨끗하며 깊이는 3척 정도이다. 연못가에서 바닥의 모래가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정결하여 티끌이나 풀이 전혀 없었다. 대의 정상은 평탄하고 둘레는 100여 정(町)이 되었다. 초연히 홀로 솟아올라 마치 쇠정註 066과 같았다. 대의 형상은 불쑥 솟은 둥근 모양인데 이곳에서 나머지 네 곳의 대(臺)가 멀리 바라보인다. 서대와 북대는 거리가 중대와 다소 가깝다.
 
276
중대를 내려와 북쪽을 향해 비탈길을 오르면 곧 이곳이 북대의 남단이다. 또 중대를 내려와 서쪽으로 비탈길을 올라가면 곧 이곳이 서대의 동쪽 언저리이다. 세 곳의 대(臺)의 지세는 서로 가까이 이어져 있다. 동대와 남대는 중대로부터 50여 리 떨어져 있다. 중대의 동쪽 기슭은 긴 등성이가 높거나 낮거나 하며 굴곡을 이루며 비스듬히 이어지고, 남쪽을 향해 50리를 뻗어 땅은 곧 남대의 서북쪽 기슭과 이어진다. 북대의 동북쪽 기슭은 등성이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 높고 낮은 긴 등성이가 들쑥날쑥하며 동쪽을 향해 40리를 뻗어 곧 동대의 서쪽 기슭과 이어진다. 그리하여 오대는 여러 봉우리들 위로 우뚝 두드러지게 높이 솟아 있다. 오대의 둘레는 500리인데, 그 밖에도 높은 봉우리들이 중첩하여 계곡을 멀리 사이에 두고 높이 솟아 올라 그 오대를 둘러싸 담장을 이루는 형세이다. 그 봉우리들은 높고 낮음이 고르지 않아 들쑥날쑥하고 수목은 울창하다. 오직 오대의 정상만은 산중턱 위쪽으로註 067 모두 나무가 없다.註 068 그리하여 중대註 069는 오대의 중심이다. 두루 물이 솟아 땅 위의 부드러운 풀은 길이가 1촌 정도이고 빽빽하게註 070 우거져 땅을 덮고 생장하였다. 그것을 밟으면 곧 누웠다가 발을 들면 다시 일어난다. 걸음걸음에 물이 스며들어 얼음처럼 차가웠다. 곳곳의 작게 패인 곳에는 모두 물이 가득했다. 중대에는 두루 사석(沙石)이 어지럽게 늘려 있고 석탑이 무수히 많았다. 가늘고 연한 풀註 071 사이에 이끼註 072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비록 땅은 물기가 있어 습하나 소금기가 섞인 흙註 073은 없다. 이끼와 연한 풀이 뿌리를 빽빽이 내리고 있기 때문에 순례하는 사람들의 신발을 젖게 하지 않는다. 기이한 색깔을 한 꽃들이 산에 가득 피어 있어註 074, 골짜기에서 산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사방이 모두 꽃이어서 마치 비단을 깔아놓은 듯하고 향기가 그윽하게 피어 사람의 옷을 향기롭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277
“지금 5월은 아직 추워서 꽃이 활짝 피지 못했지만 6, 7월에는 꽃이 더욱 만발한다.”
 
278
운운하였다. 그 꽃을 색깔을 보니 인간 세계에는 아직 있지도 않은 것이었다.
 
 
279
註) 059 왕자소신사(王子燒身寺)라고도 한다. 《고청량전(古淸凉傳)》상권에 “大孚寺北四里 有王子燒身寺 其處先有育王古塔 至北齊初年 第三王子於此求文殊師利 竟不得見 乃於塔前 燒身供養 因此置寺焉”이라고 하였다. 이미 앞서 5월 17일조의 주에서 보았듯이, 왕자사는 육왕고탑의 땅에 근거했던 것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 땅은 실제로 대부사(大孚寺)였던 것으로, 육왕탑은 대부사 경내에 세워졌다. 왕자사는 북제(北齊) 왕자의 유해를 공양하기 위해 세워졌던 별도의 사원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청량전》에 따르면 왕자의 가신(家臣)이었던 환관 유겸지(劉謙之)가 여기에 입도(入道)하여 《화엄론(華嚴論)》 600권을 저술하였다. 이 전설은 징관(澄觀)의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 권15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왕자의 소신(燒身)은 북제의 태화(太和) 연간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북제에는 태화라는 연호가 없다. 다만 법장(法藏)의 《화엄전기(華嚴傳記)》 권1에 따르면 대부사에는 아육왕탑, 왕자사에는 왕자의 공양탑이 각각 있었다고 전한다. 도선(道宣)의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5 석명은전(釋明隱傳)에도 관련 내용이 보이고, 혜영(慧英)의 《화엄경감응전(華嚴經感應傳)》에도 또한 유사한 기록이 보인다. 더욱이 도선에 따르면, 당 용삭(龍朔) 연간, 고종은 장안 회창사(會昌寺)의 회색(會賾)으로 하여금 오대산을 중수하게 했던 적이 있는데, 이 때 왕자사의 탑도 보수했다고 전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33쪽).
280
註) 060 초본(抄本)에는 왕화사(王花寺)라고 쓰고 옥화사(玉花寺, 玉華寺)라고 고쳤다. 불공의 《표제집(表制集)》 권2 청사의동수옥화사제일수(請捨衣同修玉華寺制一首)에는 “不空先請自捨衣鉢 以爲創首 伏望差當寺上座滿行 准金閣例 檢校宮造”라고 하여, 옥화사 조영에 불공이 스스로 의발을 기진(寄進)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대력(大曆) 원년(766) 11월의 일이지만, 동년 5월의 《환수금각사제(環修金閣寺制)》에는 오대의 오액사(五額寺, 즉 청량사, 화엄사, 불광사, 옥화사, 금각사) 중 금각사를 제외하고는 이미 중수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다음 2년에는 금각, 청량, 화엄, 오마자(吳摩子, 大曆法華) 외에 옥화사에도 행인(行人), 동인(童人), 도행승(道行僧)이 각각 21인이 두어졌고, 항상 《인왕호국경(仁王護國經)》, 《밀엄경(密嚴經)》 또는 《법화경》 등에 전념하였다. 이들 호국 경전을 전념하는 도량이 원인(圓仁)이 말하는 소위 “호국도량(護國道場)”이다. 불공이 옥화사에 대해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졌는지는 그 유서(遺書, 권3)에서 그가 가진 금은전을 금각사와 함께 옥화사에 기진하여 공업을 닦는데 충당하게 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광청량전(廣淸凉傳)》 상권에 따르면 옥화사는 수십년간에 걸쳐 많은 승려들의 수행지가 되었으나, 북송 초기에 이르러 이미 폐사되었다. 폐사된 이유는 아마도 특수 사원으로서 조정 등의 보호가 두터웠으나 그 때문에 회창 연간의 폐불 등의 때에 파괴를 입었고 이로 인해 자력 부흥이 어려웠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전폐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 후 재건되어 명대에는 만수사(萬壽寺)라고 개칭되었다《청량산지(淸凉山志)》 권2에는 현재 2층 정전 및 중전이 있고, 명대에 만든 철제석가상, 나한상도 안치되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35쪽).
281
註) 061 취암봉(翠巖峯)이라고도 한다.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 《고청량전(古淸凉傳)》 권상(券上) 봉역리수(封域里數)조에 따르면 그 정상은 평평하고 정상의 서북변에 대화천(大華泉)이 있으며, 대정(臺頂) 부근은 수목이 거의 없고 오직 세초(細草)만 자란다고 하였다. 또한 법장이 찬한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권1에 따르면 태화지(太華池) 부근에 정사(精舍)와 석탑이 건립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 오대경계(五臺境界)조에도 중대의 태화지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는 태화지의 주위가 2리라고 하여, 《고청량전》에서 38보라고 한 것에 비해 매우 과장되어 있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49 오대현(五臺縣)조에도 중대의 산정은 사방 3리이고, 태화지는 그 서북 모서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주위가 2리였다는 기록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원인(圓仁)은 태화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술도 남기지 않았고, 다만 정상에 습원(濕原)이 있었다는 것을 주의하는데 머물렀다. 또한 정상에 있었던 정사나 보탑(寶塔) 등에 관해서는 《고청량전》 고금승적(古今勝蹟)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중대 정상의 석정사(石精舍)는 북위의 최진(崔震)이 만든 것이며, 그외 수십 기의 소석탑(小石塔)이 있었으나 모두 붕괴되었고, 또한 동서로 늘어선 석실이 있고 그 안에 문수와 미륵 석불과 공양구가 있었는데 이것들은 당 함형(咸亨) 4년(673) 자은대사 규기(窺基)가 500인의 신도와 함께 중건했던 것이며, 그외 철탑과 석비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에 실린 대정(臺頂)의 연교사(演敎寺)는 아무래도 그 후신인 것 같다. 현재의 건물은 명 홍치(弘治) 연간에 중건되었는데, 전전(前殿), 중전(中殿), 본전(本殿)이 모두 돌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보이는 소석탑은 《고청량전》에서 언급한 소석탑 수십매와 대응되는 것이 아닐까.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 청량산득명소인(淸凉山得名所因)조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이것은 실은 도선의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 권하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또한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5 석명은전(釋明隱傳)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는 송대의 정황을 말한다기보다 오히려 당대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에 따르면 소석탑도(小石塔圖)의 수는 천에도 미친다고 하고, 혹은 백천(百千)에 이른다고도 하였다. 10이 1,000으로 되거나, 혹은 백천이 되었던 것은 그 수가 많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북위 효문제(孝文帝;471~499)가 조성하였고 또한 석상(石上)에는 그때에 찍힌 인마(人馬)의 흔적도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원인(圓仁)은 정상에는 3기의 철탑이 있고, 게다가 그것이 무후(武后) 시대의 것이라고 하였다. 철탑은 《고청량전》에도 보이고, 또한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도 중대에는 보대철탑(寶台鐵塔)이 있다는 것과 그 공덕이 매우 많았음을 기술하였다. 보대와 철탑이라는 것은 중대 정상에 있던 석조, 철주 등 각종 탑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인(圓仁)은 이 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3기의 철탑에 대해서 접하였고, 게다가 그 철탑을 측천무후가 세운 것이라고 기록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36쪽).
282
註) 062 불탑 꼭대기의 수연(水煙) 바로 밑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아홉 층의 원륜(圓輪)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92쪽).
283
註) 063 측천무후(則天武后;623~705)의 이름은 조(照)이다. 병주(幷州) 문수현(文水縣) 출신이다. 아버지 무사확(武士彠)은 고조(高祖)에게 출사하였는데, 그 딸이 미모가 뛰어나다 하여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태종이 죽은 후 비구니가 되었다가 우연히 고종의 눈에 띄어 드디어 그 총애를 받게 되었고, 이윽고 황후에 올라 병든 고종을 대신하여 권력을 잡았다. 상원(上元) 원년(674)에 천후(天后)가 되었고, 영창(永昌) 원년(689)에 이름을 (明+空, 照와 같음)으로 고치고 재초(載初) 원년(690)에 혁명을 단행하여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성신황제(聖神皇帝)라고 불렀다. 이때 나이가 67세였다. 신룡(神龍) 원년(705)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는 존칭을 받았고, 그해 말에 죽었다. 관명을 바꾸고 새로운 글자를 만들고 밀고 정치를 행했던 일대의 여걸이라 하겠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불사에 대해 매우 보호하였다. 특히 미륵의 재생(再生)을 믿어, 스스로 금륜성제(金輪聖帝)라고 칭하였다. 재위는 16년이다(《구당서(舊唐書 )》 권6 본기, 《신당서(新唐書)》 권76 후비전)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 따르면 장안(長安) 2년(702) 건안왕(建安王)의 주상이 있었는데, 이에 기초하여 다음해에 후지일(侯知一), 위원충(魏元忠) 등으로 하여금 오대산에 탑을 건립하고 공양하도록 했다고 한다. 중대의 철탑도 이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또한 무파(武婆)의 파는 노모(老母) 또는 고(姑, 시어머니)를 말한다. 당시는 구어로서 파(婆) 또는 아파(阿婆)를 사용하였다. 야(爺), 아야(阿爺), 노야(老爺)가 존칭으로서 근래까지 사용되었던 데 비해, 전자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으며, 후자와 대응되는 것으로서는 태태(太太) 또는 노태태(老太太)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파라고 한 것을 보면, 옛날에는 존칭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38쪽).
284
註) 064 본문에 측천황(則天皇)이라고 되어 있으나 측천후(則天后)의 잘못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39쪽).
285
註) 065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는 용지(龍池)라고도 불렀다. 살펴보니, 《고청량전(古淸凉傳)》의 태화지(太華池)에 해당되는데 태화지는 일명 태화천(太華泉)이라고 한다. 《수경주(水經注)》 일문(《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소인)에도 중대의 서북쪽에 한 샘이 있는데 이것을 태화천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옥화사(玉華寺) 부근에도 용천(湧泉)이 있었고 이것을 옥화지(玉花池)라고 불렀다. 옥화사(玉華寺)를 이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또한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에도 “玉花池 臺東南麓 昔有五百梵僧 於此過夏 白蓮生池 堅瑩若玉”이라고 하여 남대의 동남록에 옥화지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옥화지와 태화지는 서로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옥화지라고 한 것이 태화지를 가리키는 이상, 그 호칭이 잘못된 것인지도 의문이 된다. 그러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옥화지를 모두 반드시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돈황본 《오대산성경찬(五臺山聖境讚)》에서 “中臺頂上玉花池 寶殿行廊䢔匝圍 四面香花如遍色 巡禮之人皆發心”이라 하여 중대의 정상에 옥화지가 있었다는 영시(詠詩)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당오대산곡자(大唐五臺山曲子)」에 보이는 중대의 옥원지(玉苑池)도 같은 곳을 지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때는 태화(太華), 어떤 때는 옥화(玉華)라고 불렀던 것이 아닐까. 통틀어서 모두 오류라고 보기는 어렵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39쪽).
286
註) 066 원문에 “雔+乃”라고 하였다. 음은 전(箋)과 같은데, 찬루(鑽鏤)의 의미이다. 송곳으로 새겨 넣는 것을 가리키나, 중대를 형용하는 말로는 적당하지 않다. 또는 준(俊, 크다)의 의미를 가진 전(隽) 혹은 준(雋)의 잘못일지도 모르겠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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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67 원문에는 향상(向上)이라고 하였는데 구어의 이상(以上)과 같은 말이다. 이러한 종류의 용어로서, 향하(向下, 以下), 향전(向前, 以前), 향후(向後, 以後), 향래(向來, 爾來)와 같은 것이 있다. 다만 여기서는 직역하여 위로 향한다고 풀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0쪽).
288
註) 068 《고청량전(古淸凉傳)》 권상 봉역리수(封域里數)조에도 “臺頂四畔 各二里 絶無有草 例皆准此”라고 하였고, 《신주삼보감통록(神州三寶感通錄)》 권하에도 “有五高臺 上不生草木 松栢茂林 森於谷底”라고 하여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기술과 부합한다. 이 외 근세에 편집된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에도 “五臺不産百嘉 半麓已上 並無林木 唯生香草 細輭如系”라고 보이는데, 특히 현재에는 이미 중복(中腹) 이하에도 수목이 없고 겨우 있는 것도 대부분 조림한 것들이며 종류도 송백유류(松栢楡柳) 등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0쪽).
289
註) 069 초본(抄本)에는 중당(中堂)이라고 하였으나 의미에 의해 중대로 고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1쪽).
290
註) 070 원문에 용용(茸茸)이라고 하였다. 음은 “ジョウ”이다. 풀이 무성한 모습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有美君家菜 鋪田綠茸茸”라는 구절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0쪽).
291
註) 071 원문에 세연지초(細軟之草)라고 하였다. 연초(軟草)의 구체적인 이름은 자세하지 않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0쪽).
292
註) 072 원문에 매태(莓笞)라고 하였다. 매와 태는 모두 이끼라는 뜻이다. 그러나 반드시 선태류(蘚笞類)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매태(莓笞)와 연초(軟草)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말하자면 산정(山頂)의 형용에 쓰이는 상용어로, 《대당오대곡자(大唐五臺曲子)》에도 북대에 “編地莓笞異軟草” 등의 영시(詠詩)가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1쪽).
293
註) 073 북중국 지방에 많은 알칼리성 토양에서 나는 니토(泥土)이다. 심해지면 마치 소금이 나오는 것처럼 하얗게 되어 불모지가 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1쪽).
294
註) 074 원문에 “奇花異色滿山而開”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而”를 초본(抄本)에서는 “西”라고 썼으나 의미에 의해 “而”로 고친다. 지본(池本) 또한 “而”라고 썼다. 「속속군서유취(續續群書類聚)」본은 “四”라고 해석하고 “四開 ”라고 읽었으나 맞지 않는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1쪽).
 
 

 
 

5월 20일 (음)

296
- 서대를 순례하다
 
297
從臺頂東。下坂半里許。有[A15]菩薩寺。夏有粥飯。秪供巡臺僧俗。從鐵塔前向西漸下路。行十餘里。下峻坂二里許。更上坂向西半里許。到西臺供養院。於院後有三大巖峰。嶮峻直秀。三鋒竝起。名曰香山。昔天竺僧來。見此三峰乃云。我在西國久住香山。今到此間再見香山。早出現此乎。從供養院。向西上坂五六里。到西臺頂。々々平坦。周圍十町許。臺躰南北狹。東西闊東西相望。東狹西闊臺頂中心。亦有龍池。四方各可五丈許。池之中心。有四間龍堂置文殊像。於池東南。有則天䥫塔一基。圓形无級。高五尺許。周二丈許。莓苔軟草槃石。石塔奇異。花草不異於中臺。地上水湧。潛停於草下。窪處水停。三方崕([□@考]崖東本作涯)峻。而東岸邐迤漸下與中臺脚根連。從臺西下坂行五六里。近谷有文殊與維摩對談處兩箇大巖相對高起。一南一北。高各三丈許。巖上皆平。皆有大石座。相傳云。文殊師利[A16]菩薩。共維摩相見對談之處。其兩座中間於下石上有師子蹄跡。蹋入石面。深一寸許。巖前有六間樓。面向東造。南頭置文殊像。騎雙師子。東頭置維摩像。坐四角座老人之白。頂髮雙結。慬([□@考]僅或慬字)色素白。而向前覆。如戴蓮荷。著黃丹衣及白裙於衣上襲披皮裘。毛色斑駮而赤白黑。兩手不入皮袖右膝屈之。著於座上。竪其左膝。而踏座上。右肘在案([□@考]案東本作𭢀)[A17]几之上。仰掌以申五指。左手把麈尾。以腕押左膝之上。開口顯齒。似語㗛之相。近於座前。西邊有一天女。東邊有一[A18]菩薩。手擎鉢滿盛飯而立。又於此樓前。更有六間樓相對矣。人云。見化現時之樣而造之矣。樓東行百許步。有八功德池。水從大巖底湧。巡看至夜。却到供養院宿。
 
 
298
중대 정상에서 동쪽으로 비탈길을 반 리 가량 내려가니 보살사(菩薩寺)가 있었다. 여름에는 죽과 밥을 마련해 오대를 순례하는 승려와 속인들에게 공손히 공양한다. 철탑 앞에서 서쪽을 향해 길을 따라 점차적으로 10여 리 내려가서 가파른 비탈길을 2리 정도 내려갔다가 다시 비탈길을 올라 서쪽으로 반리 정도 가서 서대 공양원(供養院)註 075에 도착했다. 공양원 뒤쪽에 3개의 큰 바위봉우리가 있다. 험준하며 곧게 솟은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향산(香山)註 076이라 한다. 옛날에 천축국 승려가 와서 이 봉우리를 보고 말하기를
 
299
“나는 서국(西國)에서 오랫동안 향산에 살았는데, 지금 이곳에 이르러 다시 향산을 보게 되니 어떻게 하여 향산이 이곳에 나타났는가?”
 
300
라 하였다. 공양원에서 서쪽을 향해 비탈길을 5, 6리 올라가 서대의 정상에 도착했다. 서대의 정상註 077은 평탄하고 주위(周圍)는 10정 정도 되었다. 대의 모양은 남북은 좁고 동서는 넓다. 동서쪽을 서로 바라보니 동쪽은 좁고 서쪽은 넓다. 서대의 정상 가운데에도 역시 용지가 있는데, 사방은 각기 5장 정도였다. 연못 중심에는 4칸의 용당이 있어 문수상을 안치하였다. 연못의 동남쪽에는 측천무후의 철탑註 078 1개가 있다. 둥근 모양으로 층은 없고 높이는 5척 정도이고 둘레는 2장 정도이다. 이끼와 부드러운 풀, 반석註 079과 석탑, 기이한 화초 등은 중대와 다르지 않았다. 땅 위로 물이 솟아나 풀 밑으로 스며들어 패인 웅덩이에 고여 있다. 세 방향은 험준한 낭떠러지註 080이고 동쪽은 밋밋하게 점차 내려가 중대의 기슭과 이어진다. 대의 서쪽으로부터 비탈길을 5, 6리 정도 내려가 계곡 가까이에 문수와 유마(維摩)註 081가 대담한 곳註 082이 있다. 두 개의 큰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높이 솟아 있는데, 하나는 남쪽 하나는 북쪽에 서 있다. 높이는 각각 3장 남짓하고 바위 위는 모두 평평하며 커다란 돌 좌석이 있다. 전해오기를
 
301
“문수사리보살과 유마가 서로 만나 대담한 곳이다.”註 083
 
302
라 한다. 그 양 좌석 중간 아랫돌註 084 위에 사자 발자국이 있다. 돌 표면에 밟아 들어간 깊이가 1촌 정도 되었다. 바위 앞에는 6칸의 누각이 있는데, 동쪽으로 향해 지어졌다. 그 당의 남쪽에는 문수상을 모셨는데 두 마리의 사자를 타고 있다. 동쪽에는 유마상註 085을 모셨는데, 4각의 대좌에 앉아 있다.註 086 유마는 노인의 모습으로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묶고 흰 색의 두건註 087을 썼는데, 앞을 향해 씌워져 있어 마치 연꽃을 머리에 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적황색(赤黃色)의 옷과 흰 치마註 088를 입고 옷 위에는 가죽 상의註 089를 겹쳐 입었다. 털 색깔은 붉은 색, 흰색, 검정색 등의 얼룩반점註 090이 있다. 두 팔은 가죽 소매에 넣지 않고 오른쪽 무릎은 굽혀 자리 위에 두고 그 왼쪽 무릎은 세워 자리 위를 밟고 있다. 오른쪽 팔꿈치는 책상 위에 두고 손바닥을 위로 보게 하고서 다섯 손가락을 펴고 있다. 왼손은 주미(麈尾)를 잡고 팔로 왼쪽 무릎 위를 누르고 있다. 입을 벌리고 있어 이가 드러나 보여 흡사 이야기하며 웃는 형상이었다. 좌석 앞 가까이 서쪽에는 천녀상(天女像)註 091 하나가 있고 동쪽에는 보살상註 092 하나가 있다. 손에는 밥이 가득 든 바리때를 들고 서 있다. 또 이 누각 앞에는 다시 6칸의 누각이 마주보고 서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303
“현화註 093했을 때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만들었다.”
 
304
고 한다. 누각 동쪽으로 100보 정도 가면 팔공덕지(八功德池)註 094가 있다. 물은 큰 바위 밑에서 솟아오른다. 순례하며 둘러보다가 밤이 되어서야 공덕사로 돌아와 숙박했다.
 
 
305
註) 075 공양원(供養院)은 서대 외에 동대, 남대 및 금강굴(金剛窟)에 있었다. 원인(圓仁)은 그 중 서대, 동대, 남대의 공양원에서 숙박하였다. 공양원이라는 것은 아마도 순례자를 위해 만들어 숙박과 식사 시설을 설치해 놓았던 정사(精舍)였던 것 같다. 이는 또한 보통원(普通院)과 같은 성격이었는데, 후자가 순례자 등의 왕래가 비교적 많은 대로(大路) 곁에 위치했던데 비해 이것은 성적(聖蹟)의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성지 예배의 편의를 중시하여 그 명칭을 다르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양자는 비슷한 성질의 것이었다. 당시 여러 차례 보통공양(普通供養)이라고 하는 숙어가 사용되었으나 이것이 하나는 보통원, 하나는 공양원으로 되어 차이가 생겼다. 또한 “여름에는 죽이 있으니, 즉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공양한다”라고 서술되어 있는 중대 보살사(菩薩寺)와 같은 것은 “寺”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 규모가 큰 것이지만 결국 같은 성질의 시설이었다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1쪽).
306
註) 076 향취산(香酔山), 향수산(香水山), 향적산(香積山)이라고도 한다. 범어의 “Gandhamadana(犍陀摩羅)”이다. 설산(雪山, Himalaya)의 북쪽에 있는 산이라고 하는데(《구사론(俱舍論)》 제11) 항상 노래와 악기 소리가 들리고, 또 각종 향기를 풍기는 나무가 있는데 이를 맡으면 취한다고 한다(《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권1) 일설에는 히말라야 산맥 중 카일라사(Kailasa)산을 가리킨다고도 전해지는데, 이 산은 예부터 불교 신도뿐만 아니라 바라문(婆羅門) 교도 혹은 넓게는 인도 사람들에게도 숭신되었다. 《광청량전(廣淸凉傳)》에 보이는 서대의 기이한 자취 중에 향산이 있고, 또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 서대조에도 “향산은 중대와 서대 사이이다”라고 하고 인도의 영산(靈山) 이름을 취하여 여기에 명명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한편에서는 화엄봉(華嚴峯)이라고 했다는 내용은《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만 전해지는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1쪽).
307
註) 077 서대는 일명 괘월봉(掛月峯)이라고 한다(《청량산지(淸凉山志)》 권2) 《고청량전(古淸凉傳)》 권상 봉역리수(封域里數)조에도 “西臺 高三十五里 頂上地平 周廻二里 有水 東去太華泉四里”라고 하여, 정상은 평탄하고 주위는 2리이며, 용수(湧水)가 있고 또 동쪽으로 태화천과 4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고청량전》의 봉역리수는 모두 중대의 태화천을 기준으로 그것과의 거리를 기술하였는데, 동대는 42리, 남대는 80리, 북대는 12리, 서대는 4리라고 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거리에 따르면 중대-10여리-2리-반리-5·6리-서대라고 되어 있어, 중대와 서대의 거리가 약 20리가 된다. 그런데 태화천은 중대의 정상에 있었으니, 4리라고 한 것은 조금 잘못된 것으로 숫자에 탈락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저자인 혜상(慧祥)은 서대에 대해서는 “略無可述”(「고금승적(古今勝蹟)」)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에 대해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의 서대 소속 성적(聖蹟)에는 향산을 시작으로 사자종(師子蹤), 팔덕지(八德池) 및 이성대담처(二聖對談處) 등이 보인다. 또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용지(龍池), 용당(龍堂), 측천철탑(則天鐵塔), 문수유마대담석좌(文殊維摩對談石座), 사자제적(師子蹄蹟), 육간루(六間樓), 팔공덕수(八功德水) 등이 있는데, 이들은 합치되는 것이 많다. 그런데 《고청량전》 에서는 대부분의 명적(名蹟)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혜상이 서대를 순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와 같은 명적의 출현이 성당(盛唐) 이후에 시작되었기 때문인지는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중대와 서대 사이가 4리라는 기술도 믿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이 명확하다. 또한 백환채(白煥采)씨에 따르면 서대의 정상에는 사지가 있었는데, 이것을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의 “法雷寺 西臺 唐建 明法聚重修”라고 한 법뢰사에 비정하고 있다(「오대산문물(五臺山文物)」) 그렇다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보이는 용당의 후신일지도 모르겠으나, 법뢰사라는 것도 알 수가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2쪽).
308
註) 078 당 고종 총장(總章) 2년(669) 4월에 혜상(慧祥)이 사리함을 철부도(鐵浮圖) 안에 안치하였다고 한다.〔《고청량전(古淸凉傳)》 권하〕 이 철부도가 측천의 철답인 듯하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22쪽).
309
註) 079 원문에는 반석(磐石)이라고 하였다. 초본(抄本)에는 반석(磐石)의 “磐”을 “槃”이라고 썼는데, 의미에 따라 고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3쪽).
310
註) 080 원문에는 애준(崕峻)이라고 하였다. 초본(抄本)에는 “涯峻”이라고 하였는데, “崕峻”이라고 고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3쪽).
311
註) 081 부처님이 살아계실 적에 살던 곤야리성(昆耶離城)의 거사로서 속가에 몸을 맡기고 석가모니의 교화를 도왔다는 법신의 대사를 말한다. 《유마경(維摩經)》을 남겼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94쪽).
312
註) 082 문수여유마대담처(文殊與維摩對談處)의 설화는 《고청량전(古淸凉傳)》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말(唐末) 이후는 이 전설이 크게 유포되었다. 《광청량전(廣淸凉傳)》에는 ‘二聖對譚石’의 이야기와 유마거사·보현보살·문수사리 등이 공중에서 용출하였다는 이야기 등도 보인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22쪽).
313
註) 083 오대산에서 문수와 유마가 대담한 일은 《고청량전(古淸凉傳)》에 보이지 않으나, 당말 이후 널리 퍼졌다. 《대당오대곡자(大唐五臺曲子)》와 《오대산성경찬(五臺山聖境讚)》 등에도 보이고 《광청량전(廣淸凉傳)》에는 이성대담처(二聖對談處) 가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같은 책 하권 금광화상(金光和尙)조에는 서대에 있었던 유마거사(維摩居士), 보현보살(普賢菩薩), 문수사리(文殊師利) 등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는 일도 보인다. 그러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기술이 가장 상세하고 또한 오래되었다.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 서대조에는 “唐法林見緇白二叟坐談石上 近之則失 因爲名 宣公子覩異 於上建樓”라고 하여, 당의 법림이라는 승려가 보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신비한 이적으로 인하여 선공자가 누각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선공자는 도선(道宣)을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서대에 있었던 이러한 전설은 아마도 성당 이후에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문수와 유마의 대담은 《유마경(維摩經)》에 나오며 중국에서는 매우 보편적이었으나, 오대산에서는 문수와 유마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거의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3쪽).
314
註) 084 원문에 하석(下石)이라 하였는데 초본(抄本)에는 의한다. 지본(池本)도 또한 “下石”이라고 하였다. 다만 혹은 대석(大石)이라고도 했으나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일단 의문을 남겨 둔다. 또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사자 발자국(師子蹄蹟)이라는 것은 문수가 탔던 사자의 것인데, 《광청량전(廣淸凉傳)》의 사자종(師子蹤)에 해당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3쪽).
315
註) 085 남두치문수상(南頭置文殊像)·동두치유마상(東頭置維摩像)은 두 사람의 문답상이다. 병석에 누워 있는 유마를 병문안 온 문수가 유마와 대좌하여 문답하는 상을 말한다.〔《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23쪽).
316
註) 086 문수와 유마의 문답상으로, 병이 들어 침상에 있었던 유마와 이를 문병하기 위해 온 문수가 마주 앉고 둘이 문답했던 이른바 불이법문(不二法門)에 이르기 위한 방법을 주제로 했던 것이다. 이 문답을 말한 경전으로는 지겸(支謙)이 번역한 《불설유마힐경(佛說維摩詰經)》, 구마라즙(鳩摩羅什)이 번역한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및 현장(玄獎)이 번역한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등 여러 경전이 알려져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은 구마라즙의 번역본이다. 원인(圓仁)이 가져왔던 《정명경집해관중소(淨名經集解關中疏)》, 《정명경관중소석미(淨名經關中疏釋微)》, 《정명경기(淨名經記)》, 《정명경소과목(淨名經疏科目)》 등은 모두 이 경의 주소(註疏)류이다. 이 경에 의거하여 육조(六朝) 이후 뛰어난 조각과 회화가 나오게 되는데, 북위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운강 5동 석굴의 부조가 있다. 이 부조는 여전히 표현이 간소하지만, 회화에서는 이미 매우 뛰어난 작품이 있었으니, 특히 고개지(顧愷之)가 그린 강령(江寧, 남경) 와관사(瓦棺寺)의 그림은 유명하였다(《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권5) 이 그림은 당대(唐代)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서, 황원지(黃元之, 예종 때 사람)가 윤주(潤州) 강령현(江寧縣) 와관사(瓦棺寺 유마힐화상비문(維摩詰畵像碑文)을 찬하기도 하였다(《문원영화(文苑英華)》 권875) 즉 유마힐(Vimalakirti)은 정명(淨名) 또는 백의거사(白衣居士)라고도 하였는데, 속세의 몸으로 있으면서 대승(大乘)의 불법을 체득하였던 사람이었다. 또 고개지의 그림에 대해서도 이 비문에 기록이 있는데, 조금 추상적인 기술이기는 하나, 중국 전통의 수법과 서역의 변상도(變相圖)를 병용하여 그 예술성을 발휘했던 것으로, 그림의 경지가 매우 높았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이렇듯 가장 빼어났던 그림의 흔적은 지금 볼 수 없지만, 돈황에는 다행히 약 40점이 남아 있고, 게다가 수, 당, 송의 각 시대에 걸쳐져 있다(謝椎柳, 《돈황예술서록》) 그림에 비해 조각은 좋은 작품이 적으나, 일본에서는 법륭사(法隆寺) 5층탑 안에 있는 2자 대담의 소상이 떠오른다. 대담의 모습은 문수는 사자좌의 위에서 결가부좌하고, 유마는 장막을 두른 상좌(牀座) 위에서 기댄 자세로 있으며, 문수가 손에 여의(如意)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 유마는 주미(麈尾)를 가지고 서로 좌우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원인(圓仁)의 기록은 동쪽으로 향한 누각 안에 남과 동으로 상대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쪽의 유마상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아마도 북쪽이라고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쌍사자에 탄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문수가 사자에 타고 권속을 따르게 해 병자인 유마를 방문하는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다수는 사자좌에 앉아 문답하는 형식이 많다. 여기서 쌍사자 즉 2두(頭)에 탔다고 하였는데, 다른 곳에 비슷한 예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대좌의 아래에 2두의 사자를 특별히 크게 표현했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3쪽).
317
註) 087 원문에는 복색(幞色)이라고 하였다. 초본(抄本)에는 “幞”을 “幙”이라고 썼는데, 유방전본(遊方傳本)은 이것을 “幞”이라고 추측하였다. 아니면 “幎”이었을까(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5쪽).
318
註) 088 원문에는 백군(白裙)이라고 하였는데 흰색의 옷을 말한다. 남자는 예장(禮裝)으로 사용하였고 여자는 평상시에도 입었다. 한국 여자의 요폐(腰蔽), 일본의 ハカマ 같은 종류인데, 군(裙)은 일반적으로는 여자의 옷을 부르는 말이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6쪽).
319
註) 089 원문에는 피구(皮裘)라고 하였다. 가죽으로 된 상의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6쪽).
320
註) 090 원문에는 반박(斑駮)이라고 하였다. 반문(斑文)과 같은 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6쪽).
321
註) 091 서쪽에는 천녀상 하나가 있고 동쪽에는 보살상 하나가 있는데, 여기서 동서(東西)라고 한 것은 좌우(左右)의 잘못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동향하고 있는 전각의 배치와 합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천녀는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의 관중생품(觀衆生品)에 보이는데, 여기서 천녀는 사리불과 문답을 나누고, 그 신통력에 의해 사리불의 모습이 되고 또한 사리불은 변하여 천녀의 모습이 되었으며 다시 각자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이때 유마힐이 사리불에게 “是天女 已曾供養九十二億佛已 能遊戱菩薩神通 所願具足 得無生忍 住不退轉 以本願故 隨意能現 敎化衆生”이라고 매듭지었다. 라이샤워는 이 천녀를 욕계천(欲界天)의 여성이라고 하였으나, 그 이유를 상술하지는 않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6쪽).
322
註) 092 동쪽에서 바리때를 공양하고 있는 보살상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의 향적불품(香積佛品)에 보이는 화보살(化菩薩)이다. 이는 유마가 만들어냈던 보살로, 중향국(衆香國)으로 가다가 향적불에게 향반(香飯)을 받고 참회한 사람들에게 널리 음식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향기를 맡은 장자(長者) 월개(月蓋) 이하 8만 4천명과 그 외 지신(地神), 허공신(虛空神) 및 욕계(欲界)의 여러 천(天)들이 모여와서 밥을 먹고 기뻐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른바 향반내입(香飯來入)의 장면인데, 돈황벽화 등에 자주 묘사되어 있다(松本榮, 《敦煌畵の硏究》 維摩經變相)(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6쪽).
323
註) 093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23쪽).
324
註) 094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 사명성적(寺名聖蹟) 서대(西臺)조에는 팔공덕수(八功德水)가 있다. 그 위치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에는 대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대서(臺西)를 내려와 5~6리, 문수유마대담석에서 동쪽을 향하여 100보를 더 간 곳이라고 기록하여 차이가 있다. 팔공덕수는 본래 극락에 있는 연못인데, 또는 수미산과 칠금산(七金山)의 내해(內海)에 가득찬 물이라고도 하며, 《무량수경(無量壽經)》과 《칭찬정토경(稱讚淨土經)》에는 청정감미(淸淨甘美)하고 만약 이것을 마시면 제근(諸根)을 장양(長養)하고 사대(四大)를 증익(增益)한다고 설명되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47쪽).
 
 

 
 

5월 21일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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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대를 순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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廿一日齋後。却到中臺[A19]菩薩寺喫茶。向東北遙望。谷底深處數十町地。見白銀之色。人云。是千年凍凌。年々雪不消。積為凍凌。谷深而背陰被前巖遮日光不曾照著。所以自古已來。雪无一點消融之時矣。谷之前嶺。便是中臺之東脚也。從[A20]菩薩寺向北傍中臺之東岸。邐迤下坂十里來。又更上坂行十餘里。到北臺。々頂周圓六町許。臺躰團圓。臺頂([□@考]頂下東本更有頂字)南頭有龍堂。々內有池。其水深黑。滿堂澄潭。分其一堂為三隔。中間是龍王宮。臨池水上置龍王像。池上造橋。過至龍王座前。此乃五臺。五百毒龍之王。每臺各有一百毒龍。皆以此龍王。為君主。此龍王及民。被文殊降伏。歸依不敢行惡(云々)。龍宮左右。隔板墻。置文殊像。於龍堂前。有供養院。見有一僧。三年不飯。日唯一食。食泥土便齋。發願三年。不下臺頂。有數箇弟子院。前院俯臨深谷。臺崕嵯峨。而可千刃。此谷是文殊曾化現金鍾寶樓之處。今呼為鍾樓谷。々之西源。是中臺東岸之底。谷南便是高嶺。々之北岸極嶮。而深至谷底千年凍凌。在幽底而皓暉。又向東南。望見大花嚴寺。臺頭中心。有則天鐵塔。多有石塔圍遶。軟草莓苔。遍敷地上。隔三四步。皆有小井池無數。名為龍池。水涌沙底而清淺。正北正東岸峻高。臨深谷。北谷名之宋([□@考]宋池本作榮)谷。曾有一僧依天台智者。法花三昧。行法禮懺。得見普賢[A21]菩薩及多寶塔之處。南面雖嶮路。而有路可攀躡。西北岸漸下成帷。終為深谷。臺頂東頭有高垖。名羅漢臺。遍臺亦无樹木。從羅漢臺。向東南下。路邊多有燋石滿地。方圓有石墻之勢。其中燋石積滿。是化地獄之處。昔者。代州刺史。性暴。不信因果。聞有地獄不信。因遊賞巡臺觀望。到此處。忿然見猛火。焚燒巖石。黑烟衝天而起。焚石火炭赫奕。而成圍廊。獄卒現前忿慟。刺史驚怕。歸命大聖文殊師利。猛火即滅矣。其迹今見在。燋石壘為垣。周五丈許。中滿黑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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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재를 마친 후 중대 보살원으로 돌아와 차를 마셨다. 동북쪽을 향해 멀리 골짜기 깊은 곳을 바라보니 수십 정(町)의 땅이 흰 은색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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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천 년 동안 얼어붙은 얼음註 095으로, 매년 눈이 내려 녹지 않고 쌓여 얼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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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한다. 골짜기는 깊어 뒤쪽은 음지가 되고 앞쪽은 바위가 햇빛을 가려 일찍이 햇볕을 쬔 적이 없다. 그러므로 예부터 오늘날까지 눈이 한 점註 096도 녹을 겨를이 없었다. 골짜기 앞 등성이는 바로 중대의 동쪽 기슭이다. 보살사에서 북쪽으로 중대의 동쪽 언덕을 끼고 비스듬히註 097 비탈길을 10리 정도 내려갔다가 다시 비탈길을 10정도 올라가서 북대에 도착했다. 북대의 정상註 098은 주위가 6정 정도였다. 대의 형태는 둥글었으며, 대 정상의 남쪽에 용당註 099이 있다. 용당 안쪽에 연못이 있는데, 그 물은 깊고 검으며 용당에 가득하여 맑은 연못으로 되어 있다. 그 당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중간의 것은 용왕궁이며 연못물 위에 용왕상을 안치하였다. 연못 위에는 다리를 만들어 용왕이 모셔진 자리 앞에까지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곧오대의 오백독룡(五百毒龍)의 왕이다. 대마다 각각 1백 마리의 독용이 있는데, 모두 이 용왕을 군주로 삼는다. 이 용왕과 그의 백성은 문수보살에게 항복하고 귀의해 감히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용궁 좌우에는 판자로 막아 문수보살을 안치하였다. 용당 앞에는 공양원註 100이 있다. 현재 한 승려가 있는데, 3년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오직 하루에 한 끼를 먹을 뿐인데註 101 진흙을 먹는다.註 102 3년을 발원하여 대의 정상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몇 개의 제자원(弟子院)註 103이 있는데, 이 원은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는 곳에 임하여 있다. 대의 벼랑註 104은 우뚝 솟아 험준하여註 105 천 길註 106이나 되었다. 이 계곡은 곧 일찍이 문수보살이 금으로 만든 종과 보석으로 장식한 누각을 나타내 보인 곳으로 지금은 종루곡(鐘樓谷)註 107이라 부른다. 계곡의 서쪽 언덕은 중대의 동쪽 언덕의 아래 부분이며 계곡 남쪽은 곧 높은 산등성이이다. 산등성이 북쪽은 매우 험준하고 깊어 계곡 바닥에 천 년 동안 얼어붙은 얼음은 어두컴컴한 밑바닥에서 하얗게 반짝인다. 또 동남쪽註 108으로 멀리 대화엄사가 보인다. 대 정산의 중심에는 측천무후의 철탑註 109이 있고, 많은 석탑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부드러운 풀과 이끼가 땅 위에 넓게 깔려 있고, 3, 4보 간격으로 조그만 우물이 무수히 있는데 이름하여 용지(龍池)라 한다. 물은 모래 밑에서 솟아올라 맑고 얕다. 정북쪽과 정동쪽은註 110 험준하고 높으며 깊은 계곡에 면해 있다. 북쪽 계곡을 이름하여 송곡(宋谷)註 111이라 한다. 일찍이 한 승려註 112가 천태 지자대사(智者大師)註 113의 법화삼매 수행법에 따라 예참註 114하여 보현보살과 다보탑註 115을 볼 수 있었던 곳이다. 남쪽 면은 비록 험한 길이기는 하나 달라붙듯이 하여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다. 서북쪽을 점차 내려가면 불룩한 구릉註 116이 되었다가 끝내는 깊은 계곡이 된다. 대 정상의 동쪽註 117에는 나한대(羅漢臺)註 118라 부르는 높은 언덕註 119이 있다. 나한대 주변에도 역시 수목이 없다. 나한대에서 동남쪽을 향해 내려가면 길가에 불에 그을린 돌註 120이 땅에 가득하다. 네모난 것과 둥근 것註 121이 돌담과 같이 모양을 이루고, 그 가운데 불에 그을린 돌이 가득 쌓여 있다. 이곳은 지옥으로 화현(化現)한 곳註 122이다. 옛날 대주(代州)註 123자사가 성격이 난폭하여 인과응보를 믿지 않고 지옥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유람註 124하기 위해 오대(五臺)를 돌아 관망하며 이곳에 이르렀다. 갑자기註 125 맹렬한 불길이 암석을 태우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불타는 돌과 석탄이 빨갛게 번쩍이면서 주위를 둘러싸고 옥졸(獄卒)註 126이 그 앞에 나타나 성을 내고註 127 슬퍼하였다. 자사는 놀라고 두려워 대성문수사리께 귀의註 128하니 맹렬하던 불이 곧 사그러들었다. 그 흔적이 지금 남아 볼 수 있는데, 불에 그슬린 돌들이 쌓여 담장을 이루고 둘레는 5장 정도 되었으며 가운데에 검은 돌이 가득하였다.
 
 
331
註) 095 원문에 천년동릉(千年凍凌)이라 하였는데 “凌”은 쌓여 있는 얼음을 말한다.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의 중대 영적(靈蹟)조에는 천년빙굴(千年氷窟)이 보이고,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 중대조에도 “萬年冰 臺東麓 有冰數丈 九夏不消 地多靜居”라고 하였다. 아마도 같은 고을을 가리킬 것이다. 북대의 종루곡(鐘樓谷, 樓觀谷)에도 또한 천년동릉이 있는데, 같은 모양으로 서술하였다. 징관(澄觀)의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권47 제보살주처품(諸菩薩主處品)에는 “淸凉山者 卽代州雁門郡五臺山也 以歲積竪氷 夏乃飛雪 曾無炎暑 故曰淸凉”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수소연의초(隨疏演義抄)》 권76에도 “雖積雪夏凝 而名花萬品 寒風勁烈 而瑞草千般”이라고 하여 오대산의 얼음에 대해 과장되게 기술하고 있으나, 이와 같은 묘사는상투적인 문구로서 한여름에는 이 같은 적설이 없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1쪽).
332
註) 096 원문에 일점(一点)이라 하였다. “조금도”라는 의미이다. 현재 일본의 구어체로는 “一点兒”를 사용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2쪽).
333
註) 097 원문에 이이(邐迤)라고 하였다. 《문선(文選)》 권42 오계중(吳季重)의 답동아왕서(答東阿王書)에 “夫登東岳者 然後知衆山之邐迤也[註 邐迤 小而相連貌]”라고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2쪽).
334
註) 098 가두봉(加斗峯)이라고도 한다(《청량산지(淸凉山志)》 권2). 《광청량전(廣淸凉傳)》권상에 “據古圖所載 今北臺 卽古中臺 中臺卽南臺 大黃尖卽北臺”라고 하였고, 그 세주에 “北臺와 中臺는 옛날과 달라졌으며, 동대와 서대는 예와 지금이 같다”라고 하였다. 옛 북대는 대황첨(大黃尖)이고, 지금의 북대는 옛날의 중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고도(古圖)라는 것이 과언 어느 시대의 것인지를 알 수 있을까. 현행본 《수경주(水經注)》에는 없으나, 《태평어람(太平御覽)》 권45 지부(地部)에 인용되어 있는 일문에 따르면, “其北臺之山 冬夏常氷雪 不可居 卽文殊師利 常鎭毒龍之所”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옛 북대(대황첨)과 북대(옛 중대) 중 어느것을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고청량전(古淸凉傳)》 권상에는 북대는 높이 37리이고 정상은 평편하며, 주위는 2리이고 물이 없다고 하였다. 또 남쪽으로는 태화천(太華泉)과 12리 떨어졌다고 하였다. 정상에는 가끔 돌무더기와 총석(叢石) 사이에 계곡물이 있으나 열수(冽水)는 흐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중대는 높이가 40리이고 그 정상은 평편하고 주위는 6리 200보이며 약간 서북쪽으로 가까이 태화천이 있는데 또한 태화지(太華池)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태화천에 대해서는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수록된 일문에도 중대의 서북쪽에서부터 흐르는 샘물이라고 하였다) 이 책에 보이는 다른 3대의 높이는, 동대가 38리, 서대가 35리, 남대가 37리이므로, 40리라고 하는 중대가 가장 높았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 북대와 동대는 해발 3,140m 이상인데 비해 중대는 3,020m, 서대는 아마도 3,000m 전후, 남대는 2,630m를 넘지 않는다(小野·日比野, 「五臺山」, 136-137쪽). 따라서 현재 중대가 반드시 가장 높다고 말할 이유는 없다. 이미 이에 대해서는 《청량산지(淸凉山志)》의 저자도 또한 주의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즉 “北臺 高四十里[舊云 三十八里 中臺四十里 今登中臺 不見北臺地面 登北臺 則見中臺地] 是知北臺高于中臺 故易之”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저자인 진징(鎭澄)은 그 높이를 변경하였던 것이지만 이것도 다소 독단적인 것이어서, 《고청량전》의 중대와 북대에 관한 높이 기술이 과연 진징이 말한 것과 같이 바뀌어야 되는지의 여부는 확증할 방법이 없다. 혜상(慧祥)이 말한 중대는 높이로 추측해 볼 때 오늘날의 북대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원인(圓仁)이 올랐던 북대는 분명 현재의 북대로, 그가 순례했던 정상의 용당 및 연못은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도 “北臺頂上 有天井 下有龍宮泉池相連”이라 하여 천정과 용궁이 있다고 하였고, 또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 북대조에도 “黑龍池 臺上 亦名金井池 側有龍王祠 四方民禱雨輒應”이라 하여 흑룡지(금정지) 및 용왕사가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기술은 오히려 매우 상세하여, 믿을 수가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2쪽).
335
註) 099 돈황본 《오대산성경찬(五臺山聖境讚)》에도 “北臺頂上有龍宮 雷聲曲震烈山林 裟竭羅龍宮裏坐 小龍王護法使風雷”라고 하였고, 또한 돈황의 「오대산도(五臺山圖)」에도 오백독룡(五百毒龍)이 있는데, “大毒龍二百五十雲”, “毒龍二百五十降” 등의 주기가 적혀 있다. 아마도 독룡이 이렇게 높은 산 정상에 해악을 미친다는 생각이 이미 일찍부터 있었을 것이다. 《법현전(法顯傳)》 총령(葱嶺)조에도 “葱嶺冬夏有雪 又有毒龍 若失其意則吐毒風雨雪 飛砂礫石 遇此難者 萬無一全 彼土人人卽名爲雪山也”라고 보인다. 산 위의 심한 풍설과 용신에 대한 신앙이 결합되었던 것이다. 문수의 별명을 용종상존왕(龍種上尊王)이라고 하고 혹은 무량(無量)의 용·천(天)을 위해서 설법하거나 또는 용궁에 이르러 용녀를 비롯해 용신과 중생을 교화했다는 것은 《법화경(法華經)》 권4 제파달다품(提婆達多品) 등 여러 경에 보이고 문수가 이와 같이 독룡의 진압을 했다는 전설도 쉽게 생겨났을 것이지만, 불공의 「칙치천하사문수원표(勅置天下寺文殊院表)」의 대종(代宗) 비기(批記)에도 “大聖文殊久登正覺極生人於三界 鎭毒龍於五峯”(《표제집(表制集)》 권3)라고 한 것처럼 오대산 독룡은 당송시대에 특히 신봉되었고, 이것이 또한 산정의 용수(湧水)와 관련되면서 여기에 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이해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3쪽).
336
註) 100 공양원에 대해서는 이미 주를 달았다. 명나라 융경(隆慶) 연간 초(1567)에 승려 원광(圓廣)이 정상에 건립하였던 영응사(靈應寺,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는 송대 사원의 옛 터에 중건하였던 것으로, 그 동남쪽에 흑룡지(黑龍池)와 용왕사(龍王祠)도 있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앞에 있었다고 하고, 어떤 기록에는 동남쪽에 있었다고 하였으나. 그 곳이 즉 원인(圓仁)이 말한 이른바 공양원의 후신이 아닐까(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4쪽).
337
註) 101 원문에 “日中一食”이라고 하였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도 “佛言 去世資材 乞求取足 日中一食 樹下一食”이라고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4쪽).
338
註) 102 진흙을 먹어 재계(齋戒)하였다는 전설은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도 보인다. 이에 따르면 어떤 승려가 서대 근처에서 그 동북쪽 계곡에 거주하면서 진흙을 점심으로 먹으니 사람들이 석니화상(石泥和尙, 泥齋和尙)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 승려에 대해서는 자세히 추측할 수 없고 또한 그 끝마친 곳도 알 수가 없다. 郄濟川은 이를 과거의 전설적 인물이라고 하였다. 또한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0 석담운(釋曇韻)전에는 그가 두루 오대를 돌아다니다가 북대의 목과사(木瓜寺)에서 머무른지 20여 년, 몸에는 폐의(弊衣)를 걸치고 땅에는 풀로 만든 깔개를 깔고 “食惟一受 味不兼余”했다고 보인다. 담운은 실재했던 인물로 전하는데 원인(圓仁)도 그러한 승려를 직접 본 것처럼 기록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4쪽).
339
註) 103 공양원에 속한 자원(子院)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96쪽).
340
여기서는 공양원에 속하는 자원인지 또는 제자승들을 위한 승원인지 확실치 않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26쪽).
341
註) 104 원문에 대애(臺崕)라고 하였다. 초본(抄本)에는 “臺涯”라고 하였으나 일단 “崕”로 고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5쪽).
342
註) 105 원문에 차아(嵯峨)라고 하였다. 높이가 있어서 험준한 모습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5쪽).
343
註) 106 원문에 천인(千仞)이라고 하였는데, 초본(抄本)에는 “千刃”이라고 하였다. “刃”과 “仞”은 같은 음으로, “仞”은 한 길(약 6척)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5쪽).
344
註) 107 현재의 누관곡(樓觀谷)에 해당된다. 누관곡은 《광청량전(廣淸凉傳)》 권하 영이류목(靈異蘽木)조에 “華嚴寺東北有樓觀谷 谷內有金剛窟”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북송 이래로 그 이름이 쓰였다. 금강굴은 계곡 안의 왼쪽 벼랑에 있는데, 예부터 많은 화현(化現) 전설이 있었으며, 동종의 일도 그 하나로 알려져 있다. 원인(圓仁)은 여기에서 금종과 보루(寶樓)가 화현하였고, 또한 당시에는 종루곡이라고 불렸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5쪽).
345
註) 108 서남쪽이라고 해야 한다. 대화엄사는 북대의 남남서 방향에 해당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5쪽).
346
註) 109 《고청량전(古淸凉傳)》 권하에 기록된 북대철부도(北臺鐵浮圖)와 같은 것이다. 법장(法藏)이 찬한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권1에도 “北臺上有鐵浮圖二幷舍利 及文殊像”이라고 하였다. 또한 《고청량전(古淸凉傳)》에 따르면 “余便往定州恒陽縣黃山 造玉石舍利函三枚 大者高一尺七寸 擬安中臺塔內 小者二 高九寸 擬安北臺鐵浮圖內 並作蓮色道 異獸像 亦盡一方之妙焉”이라고 하였다. 혜상(慧祥)이 황산의 대리석으로 만든 사리함을 안치하였던 것은 고종 총장(總章) 2년(669) 4월의 일이었다. 2함을 안치했던 철부도를, 과연 무후가 기진(寄進)했던 것이라고 본다면, 황후가 된지 14년이 되던 해이다. 이보다 먼저 용삭 연간(661-664)에는 칙명으로 산중의 사탑을 중수하였는데, 아마도 무후가 관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5쪽).
347
註) 110 원문에는 “正北正東岸”이라고 하였는데 “岸”은 “崖”의 잘못인 듯하다. 다만 일단 초본(抄本)에 따라 “岸”으로 둔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5쪽).
348
註) 111 개성 4년 7월 22일조에도 “北臺在宋谷蘭若”라고 보이는데, 초주(楚州) 용흥사(龍興寺)의 승려 진(進)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北臺北谷內 有宋谷寺寶積寺 又東北有寶山寺 並居谷內 院宇幽奇 樓臺壯麗 卽今現存”이라고 하였다. 이 중 보산사는 금익사(今益寺)이고, 나머지 두 절은 북대 옛 8사에 속한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말한 북곡(송곡)의 사원은 송곡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5쪽).
349
註) 112 《재당송진록(在唐送進錄)》에 「법화삼매영험기(法華三昧靈驗記)」 상하에 청량사송곡사문술(淸凉寺宋谷寺門述)이라는 것이 있으니 여기의 송곡사 사문과 동일인일까. 또한 개성 4년 7월 23일조에는 “北臺有宋谷蘭若 曾有一僧 先修法花三昧得道”라고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6쪽).
350
註) 113 천태대사 지의(智顗)를 가리킨다. 지자대사〔太師〕는 591년에 그가 진왕(晉王) 양광(楊廣, 뒤의 隋의 焬帝)에게 보살계를 주고 받은 호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96쪽).
351
註) 114 창례참회(唱禮懺悔)의 줄임말이다. 법화삼매법에서 중요시되는 행법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6쪽).
352
註) 115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에 기록되어 있는 칠보의 탑이다. 가운데 다보여래가 앉아 있는데 석가가 《법화경》을 설법할 때 땅에서 솟아서 석가가 문을 열면 다보가 자리를 내주어 2불이 병좌(並坐)하였다. 《법화경》 신앙의 표징으로서 육조 이래 성행하여 회화로 그려지고 조각도 만들어졌다. 그 탑도 다양한데, 일본에서는 헤이안 이래 복발형의 탑신에 1층 내지 2층의 지붕을 덮은 형식으로 대략 일정하게 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5쪽).
353
註) 116 원문에는 퇴(堆)라고 되어 있다. 초본(抄本)에는 “惟”라고 하였는데 의미에 따라 고쳤다. 두두룩하게 높은 곳이라는 의미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5쪽).
354
註) 117 원문에는 동두(東頭)라고 하였는데 동(東) 또는 동쪽과 같은 뜻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6쪽).
355
註) 118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는 “북대영적(北臺靈蹟)”에 들어가 있고,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3에는 “羅漢臺 臺之次東 一級平臺 唐十六梵僧 至此同化去”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돈황본 《대당오대곡자(大唐五臺曲子)》에는 “羅漢臺頭觀㴎河 不得久停 唯有神龍操”라고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6쪽).
356
註) 119 초본(抄本)에는 “垖”라고 하였으나 “埠”로 고쳤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6쪽).
357
註) 120 화산에 그을린 돌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97쪽).
358
註) 121 원문에는 방원(方圓)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주위라는 말과 같다. 또한 당대에는 구어로서 여러번 공부(工夫), 공면(工面), 조달(調達) 혹은 각종 수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岩波文庫本 역주, 《구당서》 식화지, 28쪽 참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7쪽).
359
註) 122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는 북대의 영적(靈蹟)으로 생지옥(生地獄)을 들고, 북대의 동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난석(亂石)이 번갈아 우뚝 솟아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옛날에 장선화(張善和)라는 사람이 흰 토끼를 쫓아 여기에 이르렀다가 안으로 빠져들어 지옥을 보았는데, 경장(經藏)이 있었기 때문에 내부를 소제(掃除)하여 그 공덕으로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 생함지옥(生陷地獄)조에는 수나라 번치현(繁畤縣) 사람인 장애(張愛)라는 자가 용지(龍池)의 돈을 도적질하여 돌아가다가 폭풍이 일어나 이곳으로 떨어져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자 문수의 이름을 불렀는데, 다음날 흰토끼가 길잡이를 하여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7쪽).
360
註) 123 대(代)는 산서 북부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수대에 안문군(雁門郡)을 고쳐 대주라고 이름하였고, 그 치소는 산서성 대현(代縣)에 있었다. 당대에는 중도독(中都督)이 두어졌고, 안문현을 곽하(郭下)로 하고 오대(五臺), 번치(繁畤), 곽(崞), 당림(唐林)의 5현을 관할하였다(《신당서(新唐書)》 지리지 권39) 대현이라는 이름은 민국 이래 사용되기 시작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7쪽).
361
註) 124 원문 ‘遊賞’은 유람과 같은 뜻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27쪽).
362
註) 125 원문에는 홀연(忽然)이라고 하였는데, 초본(抄本)에는 “急然”으로 되어 있다. “忽”과 “急”은 글자의 형태가 유사하다. 일단 “忽”로 고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7쪽).
363
註) 126 원문에는 옥솔(玉率)로 되어 있다. 초본(抄本)에는 “獄卛”, 지본(池本)에는 “獄卒”로 되어 있다. “卛”은 해서체가 아니라 “率”의 옛 글자이다. “率”은 음이 シツ 또는 スイ이고 세간에서는 ンシ라고 한다. 거느린다는 의미가 있으나, 솔연(率然), 솔선(率先) 등과 같이 ンシ라고 읽어 “卒”과 통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獄卒”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라이샤워도 “卒”이라고 단정하였는데, 혹은 “獄帥”라고도 해석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7쪽).
364
註) 127 원문에는 분통(忿慟)이라고 하였다. 초본(抄本)에는 忄+勃과 비슷하지만 忄+勃자는 아니고, 유방전본(遊方傳本)은 “慟”으로 고쳤다. “慟”은 즉 통곡으로 슬퍼한다는 뜻이다. 음은 “恫”과 통하며, 상심하고 부르짖었다고 고쳐 해석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57쪽).
365
註) 128 불보살(佛菩薩)이나 법(法)에 대하여 귀의(歸依)·경례(敬禮)·신순(信順) 하는 것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97쪽).
 
 

 
 

5월 22일 (음)

367
- 동대를 순례하다
 
368
廿二日。粥後傍北臺東腹向東北邐迤下坂。尋嶺東行廿里許。到上米普通院。在堂裏忽見五道光明。直入堂中照。忽然不現矣。惟正。惟曉等。同在堂。皆云。不見物。奇之不已。齋後。尋嶺向東。漸上坂廿里。來到東臺。々東頭有供養院。入院喫茶。向南上坂二里詐。到臺頂。有三間堂。壘石為墻。四方各五丈許。高一丈許。堂中安置文殊師利像。近堂西北有則天鐵塔三基。躰共諸臺者同也。臺頂无龍池。地上亦无水。生草稍深。臺頂周圓。四方各可十丈許。臺躰南北漸長。東西狹。北根長一里許。臺南有嶺。高低長連三里許。然臺頂㝡高顯。而无樹木。從臺頂向東直下半里地。於峻崖上有窟。名為那羅延窟。人云。昔者那羅延佛。於此窟行道。後向西去。窟內濕潤。而水滴戶。闊六尺。窟內黑暗。宜有龍潛藏矣。日晚。却到供養院宿。時欲黃昏。天色忽陰。於東谷底。白雲靉靆。忽赤忽白而飛揚。雷聲霹靂。在深谷紛閾。人在高頂低頭而視。風雨共雹亂墜。夜深而息。
 
 
369
[5월] 22일, 죽을 먹은 후註 129 북대의 동쪽 산허리를 따라 동북쪽을 향해 비스듬히 비탈길을 내려갔다. 산등성이를 좇아 동쪽으로 20리 정도 가서 상미보통원(上米普通院)註 130에 도착했다. 당 안에서 갑자기 다섯 줄기의 밝은 빛이 곧바로 당에 들어가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홀연히 빛은 보이지 않았다. 유정과 유효 등도 함께 당에 있었으나 모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기이하기 그지없다. 재를 마친 후 산등성이를 따라 동쪽을 향해 점차적으로 비탈길 20리를 올라가서 동대 註 131에 도착했다. 대의 동쪽에 공양원이 있어, 원에 들어가 차를 마셨다. 남쪽을 향해 비탈길을 2리 정도 올라가 대의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3칸의 당이 있고 돌을 쌓아 담장을 만들었는데, 사방은 각각 5장 남짓 하였고 높이는 1장 정도였다. 당 안에는 문수사리상을 안치하였다. 당의 서북쪽 가까이에 측천무후의 철탑 3기가 있는데, 그 모양은 다른 여러 대의 것과 같았다. 대의 정산에는 용지(龍池)가 없고 땅 위에도 역시 물이 없었으나 자라는 풀은 제법 무성하다. 대 정상의 주위는 사방이 각각 10장 정도 되었다. 대의 모양은 남북이 약간 길고 동서는 좁다. 북쪽 기슭의 길이는 1장 정도였다. 대의 남쪽에는 높고 낮은 등성이가 3리 정도 길게 이어져 있다. 이 동대의 정상은 그중에서 가장 높게 솟은 곳이며, 수목은 없다. 대의 정상에서 동쪽으로 곧바로 반리 정도 내려오면 험준한 절벽에 동굴이 있는데 이름하여 나라연굴(那羅延窟)註 132이라 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370
“옛날 나라연불(那羅延佛)註 133이 이 동굴에서 도를 닦고 후에 서쪽을 향해 떠났다.”
 
371
고 한다. 동굴 안은 축축하게 습기가 차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동굴 입구는 넓이가 6척이고 동굴 안은 어두워 용이 숨어 있을만하였다. 날이 저물어 공양원으로 되돌아와 숙박했다. 황혼註 134이 될 무렵에 하늘빛이 갑자기 음울해지고 동쪽 계곡 아래에 흰 구름이 짙게 끼었다. 구름이 갑자기 붉어졌다가 갑자기 하얗게 되어 높이 날아올랐고 뇌성벽력이 깊은 계곡에서 어지럽게 싸웠다. 사람들은 높은 정상에서 머리를 숙이고 바라보았다. 비바람이 우박과 함께 어지럽게 떨어졌다. 밤이 되어서야 멈추었다.
 
 
372
註) 129 전날 밤 북대의 공양원에서 숙박하였던 원인(圓仁) 일행은 아침 일찍 동대로 향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60쪽).
373
註) 130 화엄령(華嚴嶺) 부근에 있었던 보통원(普通院)이다. 백환채(白煥采)의 《오대산문물(五臺山文物)》에는 “法云寺 距大塔北二十五里 在枝岩村山頂上 一名華嚴嶺 原有的石建寺院 頂部雖已塌毁 墻基依然存在 因爲它的位置 在東臺北之間 距兩臺各十五里 凡來往兩臺的人 到此必休息 幷爲之俯仰流連”이라고 기록하였다. 영(嶺)의 거리는 양정(兩頂)에서 각각 15리라고 하였는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각각 20리라고 하여 5리의 차이가 있으나, 2대(臺)의 사이에 위치한다는 점은 일치한다. 따라서 이른바 상미보통원은 대략 법운사지에 있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중 천녀삼매고(天女三昧姑)조에는 삼매고가 화엄령에 서 정사(精舍)를 짓자 많은 신자들이 기진(寄進)을 하여 오대를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공양하였다는 내용이 보이고, 《오대산성경찬(五臺山聖境讚)》에도 북대의 동각(東脚)에 있다고 하고, “有一天女名三昧 積米如山供聖賢”이라는 영시를 붙였다. 《광청량전(廣淸凉傳)》에는 그녀가 정원(貞元) 3년(787)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 연월을 믿어도 된다면, 원인(圓仁)이 순례하기 약 50년 전이 된다. 다만 《광청량전(廣淸凉傳)》에서는 아직까지 절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다. 나아가 북송 희령(熙寧) 5년 11월 이곳을 통과하였던 성심(成尋)이 화엄령의 소당(小堂)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마도 같은 사원이었던 듯하다.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에도 명대의 법운사가 삼매고에 의해 개창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상미보통원을 일단 이곳으로 추측해 둔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60쪽).
374
註) 131 《고청량전(古淸凉傳)》 권상 봉역리수(封域里數)조에는 “東臺 高三十八里 頂上地平 周廻三里 〮〮… 頂上無水 惟有亂石 小柏谷水 出此臺下”라고 하였고,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는 “東臺 舊名雪峯 山麓有硏伽羅山 臺上遙見 滄瀛諸州 日出時 下視大海 猶陂澤焉”이라고 하였다. 창(滄)은 하북성 창현 지방이고 영(瀛)은 하북성 하간 지방이며, 동대의 이름은 설봉이라고 하였고 여기에서 대해(大海)가 보이기 때문에 망해봉(望海峯)이라는 별명이 있었다(《청량산지(淸凉山志)》 권2).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말한 동대 정상의 사원은 현재 망해사의 전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에는 이 절이 원대(元代)에 건립되어 명의 가정(嘉靖) 연간 중수되었다고 하였다(권2) 이에 비해, 《광청량전(廣淸凉傳)》 권하에서는 동대의 정상에 화현당(化現堂)이 있었다고 하였다. 망해사와 화현당이 혹 같은 사원인지는 알 수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60쪽).
375
註) 132 나라연불(那羅延佛, Narayana)이 머물렀던 굴이다. 나라연불은 나라연천(那羅延天)이라고도 하는데, 생본(生本), 인생본(人生本)이라고 번역한다. 일설에서는 비뉴천(毘紐天, Visnu)의 권화(權化)라고도 하고 그 별명이라고도 하며 또한 범천(梵天, Brahma)의 분신이라는 설도 있다. 본래 우주의 힘이 광대하다는 것을 상징하였던 인도의 신이다. 혜림(慧琳)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제26에서는 나라연을 역사(力士)라고 하고, 혹은 인중역사(人中力士),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도 하였으며, 견고역사(堅固力士)라고 한 것도 보인다. 사문의 좌우에 배치되었던 인왕으로 하나는 밀적금강(密迹金剛), 다른 하나는 나라연천이었다. 밀교적인 도상에서는 가루라(伽樓羅)를 타고 오른쪽 다리를 내렸으며, 3면이었는데 가운데가 보살상, 좌우가 코끼리 및 흑돼지였다.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 동대 영적(靈蹟) 중에도 나라연의 굴이 있고, 또한 속유(續遺)에도 나라연의 동굴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산중에 있었던 금강굴과 함께 대성이 거처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에도 “臺東畔 其內風氣凛然 盛夏有冰 吐納雲霞 或燈光時出 華嚴云 是菩薩住處 亦是神龍所居”라고 보이는데, 이 기록에서는 보살이 거처한 곳이라고 하는 동시에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같이 신룡이 거처했던 곳이라고도 하였다. 생각건대, 이 굴의 이름은 《구역화엄경(舊譯華嚴經)》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서 “진단국(眞旦國)에 보살의 주처가 있으니 나라연산이라고 이름하였다. 과거 제보살이 항상 그 안에 살았다”라고 한데서 나왔을 것이다. 60화엄에는 나라연산이라고 되어 있으나, 80화엄에는 “震旦國有一住處 名那羅延窟 從昔已來 諸菩薩衆於中止住”라고 하여 나라연굴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명적(名蹟)이 나온 것은 신역 이후였다고 추측된다. 《고청량전(古淸凉傳)》에 없는 것 또한 아마도 이러한 이유였던 것이 아닐까. 단, 나라연굴은 오대산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하북성 안양현 보산(寶山)의 대주성굴(大住聖窟)이 이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즉 금강성력주지나라연굴(金剛性力住持那羅延窟)로, 이것은 무정(武定) 4년(546) 도빙(道憑)이 창건하여 제자 영유(靈裕)가 개황(開皇) 9년(589)에 완성하였고, 굴문의 오른쪽에 가비라신(迦毘羅神), 왼쪽에 나라연상(那羅延像)을 조각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굴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이 반드시 신역 화엄 이후에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62쪽).
376
註) 133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인도의 옛 신. 제석천의 권속으로서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서 집금강(執金剛)의 하나이며 밀적(密迹)과 함께 이천(二天)이라고 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98쪽).
377
註) 134 《입당구법순례행기》 권2 개성 5년 2월 11일조의 주 참조. 본래는 오후 8시 전후를 말한다. 단 여기서는 백운(白雲)이 길게 뻗어 있었다고 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저녁 무렵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63쪽).
 
 

 
 

5월 23일 (음)

379
- 금강굴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380
廿三日齋後下臺。却到上米普通院。便向南直下坂。行十八里許入谷。更向東南行三四里。更向西谷行一里許。到金剛窟。々在谷邊。西國僧佛陁波利空手。來到山門。文殊現者([□@考]者恐老字之誤上文一百▆記事▆之)人身不許入山。更教往西國取佛頂尊勝陀羅尼經。其僧却到西天。取經來到此山。文殊接引。同入此窟。波利纔入。窟門自合。于今不開。窟巖堅密帶黃色當窟戶有高樓。崛門在樓下。人不得見。於樓東頭。有供養院。窟戶樓上。有轉輪藏。六角造之。見于窟記。窟內多有西天聖迹維衛佛時。香山摩利大仙。造三千種七寶樂器。其佛滅後。文殊師利將來。取([□@考]取或收字)此窟中。拘留秦佛時。兜率天王造鍾。盛一百廿石。聞聲者。或得四果。或得初地等。佛滅。文殊師利。將此鍾來。置此窟中。迦葉佛時。造銀箜𥱌。有八萬四千曲調。八萬四千曲調。各治一煩惱。佛滅度後。文殊師利。將此箜𥱌來。收入窟中。星宿劫第二佛全身寶塔一千三百級。文殊[A22]菩薩將此塔來。收入此窟。振旦國銀紙金書。及百億四天下文字。文殊[A23]菩薩。收入此窟(云々)。從窟上坂百步許。有文殊堂。普賢堂。此乃大超和上。見金色世界之處也。日晚。却到大花嚴綱維寺。引涅槃院安置閣下一房。此則講法花經。座主玄亮上人房。座主因講。權居閣院遠和上及文鑒座主院。天台教迹文書備足。
 
381
廿三日始寫天台文書日本國未有者。
 
 
382
[5월] 23일, 재를 마친 후 대를 내려와 상미보통원으로 되돌아 왔다. 곧 남쪽을 향해 똑바로 비탈길을 내려와 18리 정도를 가서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다시 동남쪽을 향해 3, 4리를 가서 다시 서쪽 골짜기를 향해 1리 정도 가서 금강굴(金剛窟)註 135에 도착했다. 굴은 계곡 옆에 있었다. 서국의 승려 불타파리(佛陁波利)註 136가 빈손으로 산문(山門)에 왔는데, 문수보살이 노인으로 변신해 나타나 산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시 서국으로 가서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註 137을 가져오라고 교시하였다. 그 승려는 서천(西天)으로 되돌아가 경전을 가지고 이 산에 이르렀다. 문수는 그를 맞이하고 인도해 이 굴로 들어갔다. 불타파리가 들어가자 동굴 문註 138이 저절로 닫혀 지금까지 열리지 않았다. 굴의 바위는 단단하고 누른색을 띠고 있다. 동굴 입구에 해당하는 곳에 누각이 있고 동굴 문은 누각 아래쪽에 있어 사람들은 볼 수가 없다. 누각의 동쪽쯤에 공양원에 있다. 동굴 입구의 누각 위에 6각으로 만든 전륜장(轉輪藏)註 139이 있다. 굴에 관한 기록註 140을 보니
 
383
“굴 안에는 서천의 성스러운 유물이 많이 있다. 유위불(維衛佛)註 141 시대에 향산의 마리대선(摩利大仙)註 142이 3천 종의 칠보 악기를 만들었다. 그 부처가 죽은 후 문수사리가 가지고 와 이 굴 안에 수장(收藏)해두었다. 구류진불(拘留秦佛)註 143 시대에 도솔천왕이 120석을 담을 수 있는 종을 만들었다. 그 종소리를 듣는 사람은 사과(四果)註 144를 얻고 혹은 초지(初地)註 145 등을 얻을 수 있다. 부처가 입멸하자 문수사리가 이 종을 가지고 와서 이 굴 안에 안치하였다. 가섭불(迦葉佛)註 146 시대에는 은으로 공후(箜篌)註 147를 만들어 8만 4천 가지의 곡조가 있었다. 8만 4천의 곡조는 각각 한 곡이 하나의 번뇌註 148를 씻어준다. 부처가 돌아가신 후 문수사리가 이 공후를 가지고 와 굴 안에 수장하였다. 성수겁(星宿劫)註 149 제2불의 전신보탑(全身寶塔)註 150은 1,300층인데, 문수보살이 이 탑을 가지고 와 이 굴 안에 수장하였다. 진단국(振旦國)註 151의 은종이에 금으로 쓴 경전註 152과 백억의 사천하(四天下)註 153 문자를 문수보살이 이 굴에 수장하였다.”
 
384
운운하였다.
 
385
굴에서 비탈길을 100보 정도 올라가면 문수당과 보현당(普賢堂)이 있다. 이곳은 대초화상(大超和尙)註 154이 금색 세계를 본 곳이다. 해가 저물어 대화엄사로 되돌아왔다. 강유註 155 등이 열반원으로 인도하여 각(閣) 아래의 한 방에 안치하였다. 이곳은 곧 《법화경》을 강의하는 좌주인 현량상인(玄亮上人)의 방이다. 좌주는 강의 때문에 임시로 각원에 거주하고 있다. 지원화상과 문감좌주의 원(院)에는 천태의 가르침을 적은 문서가 두루 갖추어져 있다. 23일註 156부터 아직 일본에 없는 천태 문서를 베끼기 시작했다.
 
 
386
註) 135 누관곡(樓觀谷) 즉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이른바 종루곡(鐘樓谷) 좌애(左崖) 부근에 위치하였다. 계곡에 있는 사원을 난야(蘭若)라고 하는데, 굴은 그 일부분에 해당한다. 현재 높은 기단 위에 건립되어 서향하고 있는 중충의 누각이 있고 기단의 중앙부에는 아치형의 입구가 있는데, 금강굴이라는 것은 그 심오함을 말하는 것이다. 성심(成尋)도 “禮金剛窟文殊菩薩宅 禮窟穴 人燃松入穴 取土了 燒香禮拜 穴前有井 名文殊井 窟上有等身文殊像 眷屬圍繞”(《참천태오대산기(參天台五臺山記)》 권5)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고청량전(古淸凉傳)》 권상에도 금강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사위성(舍衛城)의 기원(祇園)에 칠보로 만든 악기 1구가 있었는데 이는 능가산(楞伽山)에 살던 귀왕(鬼王)이 만든 것으로, 일찍이 문수가 청량산의 금강굴에 두었던 것이며 그 외 은제 하프와 금은지에 쓴 율서경전(律書經傳)도 여기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책에는 북제 때 대부사(大浮寺)의 승 상운(祥雲)이 금강굴에 거주하던 산신에게 이끌려 등선(登仙)의 환약(丸藥)을 얻었다는 전설도 보인다. 또한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는 승 혜징(惠澄)이 동종사(銅鍾寺)의 범종을 찾아냈는데 우연히 이인(異人)을 만나 이에 대해 문답하고는 스스로 명(銘)을 짓고 이름을 새겼다고 기록하였다. 이들 기록에 의해 금강굴과 관계된 문수와 산신의 전설을 살펴볼 수 있으며, 또한 같은 책 권중에는 불타파리(佛陀波利)가 금강굴에 들어간 일과 무저좌상(無著和尙)의 화반야사(化般若寺)에 대한 일도 기록되어 있다. 무저는 대력(大曆) 2년(767) 정월에 오대산 화엄사에 유석(流錫)하다가 영이(靈異)를 얻어 금강굴에 도착했는데 꿈에서 노인을 만나 그에게 이끌려 화반야사와 문수보살의 화현을 볼 수 있었으며, 이를 기록하여 사람들에 이야기하는 동시에 사원을 조영하여 그에 대해 공양했다고 한다.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에 따르면 “般若寺 在樓觀谷 唐無著嘗入化般若寺 因建寺名焉 成化間 立禪和尙道行聞晉王 重建”이라고 하여 반야사의 창건자가 무저이고 성화 연간에 입선(立禪)이 중건한 것이 지금의 사원임을 추측할 수 있다. 금각사(도의), 죽림사(법조), 법화원(신영)의 창건에 관련된 인연전설과 상통하는데, 반야사(무저)의 이러한 이야기도 예부터 유명했으나, 무저의 발원은 실제로 금강굴에서 있었던 화현(化現)의 신이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또한 원인(圓仁)도 「사문무염입성반야사기(沙門無著入聖般若寺記)」 1권(《입당신구성교목록(入唐新求聖敎目錄)》)을 가져왔다(다만 전하지 않는다) 무저는 복건의 온주(溫州) 영가(永嘉) 사람이다. 혜충(慧忠)의 제자로, 징관(澄觀)과도 교우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66쪽).
387
註) 136 Buddhapali(ta)의 음역으로, 그 전기는 그가 번역한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의 서문 및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권9,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중,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 등에 수록되어 있다. 북인도의 계빈(罽賓, 카슈미르) 사람이다. 오대산의 영험을 듣고 고종 의봉(儀鳳) 원년(676)에 내조하여, 오대현 호양령에 이르렀다. 이때 문수가 화신(化身)한 노인이 나타나 중생의 악업을 깨끗이 하는 존승다라니(尊勝陀羅尼)를 가져와 한토(漢土)에 널리 퍼뜨리라고 명했다. 이에 곧장 서국으로 돌아갔다가 영순(永淳) 2년(683) 다시 중국에 왔다. 장안에 도착해 다라니를 가져왔다고 상주하니, 고종이 일조삼장(日照三藏), 두행의(杜行顗) 등에게 명하여 이를 번역하도록 하였다. 한편 불타파리도 또한 서명사(西明寺)의 순정(順貞)에게 의탁하여 함께 번역하였다. 후에 스스로 범본(梵本)을 가리고 오대산에 올라 마침에 금강굴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7월 6일조 참조) 이 전설에 대해서는 또한 문제가 있으나, 존승다라니의 유전과 오대산 및 다라니 신앙의 유행에 대한 인과관계를 이야기한 기록으로서는 매우 유명하다. 특히 불공(不空)과 같은 이도 대력 11년에 천하의 승니로 하여금 매일 21편의 다라니를 암송하게 하도록 상주하여 이를 더 널리 퍼뜨리는데 힘썼다(《표제집(表制集)》 권5 「칙천하승니송존승진언제(勅天下僧尼誦尊勝眞言制」)(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68쪽).
388
註) 137 Arya-sarva-durgati-parisodhani-usni-sarvaijaya-nama-dharani의 음역이다. 이 경전은 여러 종류의 이본(異本)이 있는데(범본 및 한역, 장역, 화역) 현재 대장경(大藏經)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범본(梵本) 3종, 한역(漢譯) 18종에 이른다. 그외 전존하는 것이 무릇 35종 이상 된다. 이 중 가장 유행했던 것은 불다파리(佛陁波利)가 번역한 것이다. 석가가 기원정사(祇園精舍)에 있었을 때 7일 후에 사망한다고 선고받았던 선주천자(善住天子)가 제석천과 함께 석가 앞으로 나아가 연명을 애원하였을 때 주었던 것이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였다. 선주천자는 가르침대로 이를 지켰더니 7일이 되어도 무사하였다. 그리고나서 제석과 함께 석가에게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더욱 살이 붙었으나, 그 요체는 세존에게 귀명하여 일체를 깨끗이하고 재앙을 없애고 수명을 전환하여 신체로 하여금 금강처럼 튼튼히 하여 일체의 유정(有情)을 청정하도록 기원하는 다라니이다.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의 당대(唐代) 번역본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가 있다. 두행의(杜行顗)의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의봉 4년), 지파가라(地婆訶羅)의 《불정최승다라니경(佛頂最勝陀羅尼經)》(영순 원년), 불다파리(佛陁波利)의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영순 2년), 지파가라(地婆訶羅)의 《최승불정다라니정업장주경(最勝佛頂陀羅尼障咒經)》, 의정(義淨)의 《불설불정존승다라니경(佛說佛頂尊勝陀羅尼經)》(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68쪽).
389
註) 138 원문에 굴문(窟門)이라고 하였다. 초본(抄本)에는 “崛門”이라고 하였는데 의미에 따라 고친다. 또한 그 기록은 현재와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0쪽).
390
註) 139 윤장(輪藏) 또는 윤관경장(輪關經藏)이라고도 한다. 윤회하는 구조의 일체경(一切經)을 받아들인 경장으로, 6각 또는 8각의 기둥 모양을 만들고 그 각각의 면에 장을 만들어 여기에 경전을 넣어둔 것이다. 송대에도 전륜장을 많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존하는 예로는 오대산 대탑원사(大塔院寺)의 것 등을 몇 개가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0쪽).
391
註) 140 《입당신구성교목록(入唐新求聖敎目錄)》에 보이는 「오대산금강굴수오공덕기(五臺山金剛窟収五功德記)」 1권이다. 5공덕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따르면 첫째 마리대선(摩利大仙)의 종(鍾), 둘째 도솔천왕(兜率天王의 종, 셋째 가섭불(迦葉佛)의 은공후(銀箜篌), 넷째 성수겁제2불(星宿劫第二佛)의 전신보탑(全身寶塔), 다섯째 진단국(振旦國)의 은지금서(銀紙金書)로 나와 있다. 《고청량전(古淸凉傳)》에도 《영적기(靈蹟記)》를 인용하여 거의 같게 기술하였는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내용만큼 상세하지는 않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1쪽).
392
註) 141 《고청량전(古淸凉傳)》에는 금강굴에는 3세 제불(諸佛)의 공양구가 모여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제불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3세불로, 유위(維衛)와 구류진(拘留秦), 가섭(迦葉)의 3불은 과거 7불에 포함된다. 유위불은 비바시불(毘婆尸佛, Vipasyin-Buddha)로 과거7불 중 첫 번째 부처이며 과거 장엄겁(莊嚴劫)에 출현하여 많은 것을 제도하였다고 한다. 구류진불(拘留秦佛, Kurakucchandha-Buddha)은 일명 구류진(鳩留秦), 구류손(拘留孫)이라고도 하는데, 네 번째 부처이다. 가섭불(Kasyapa-Buddha)은 여섯번째 부처이다. 그런데 구류진불과 가섭불은 현재 현겁(賢劫) 천불에도 포함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1쪽).
393
註) 142 대선(大仙)은 “Maha-rsi”을 번역한 말로, 본래는 부처의 경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또한 외도(外道) 중에도 칠대선(七大仙), 십대선(十大仙) 등의 호칭이 있다. 마리(摩利)는 마리지(摩利支, Marici)를 축약한 말로, 양광(陽光, 따뜻한 햇빛) 또는 양염(陽炎, 아지랑이)의 뜻이다. 마리지천(摩利支天)은 풍신(風神)이라고도 하는데, 화성(火星) 또는 범천(梵天)의 아들로 칠대선의 하나였던 가섭파선(迦葉波仙)의 아버지라고 한다. 옛 인도의 민간에서 신앙되었는데 후에 불교에 혼입되었고, 항상 장애를 제거하고 이익을 베풀었으므로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또한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는 “樂比摩利天仙 曲同維衛佛國 往飛金剛窟內 今出靈鷲寺中”이라 하여, 대선 대신 천선(天仙)이라고 되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1쪽).
394
註) 143 과거 7불 중에서 제4불(第四佛)을 말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99쪽).
395
도솔(兜率)은 범어 “Tusita”로, 도사다(都史多)라고도 쓰며, 지족(知足), 묘족(妙足) 또는 희락(喜樂) 등으로 번역한다. 욕계(欲界) 6천 가운데 제4천(天)으로 그 주인이 도솔타천왕(兜率陀天王, Samtusita-devaraja)이다. 그 천은 석가가 욕계에 탄강하기 이전에 이르렀던 곳이며, 또한 미륵불이 상생하는 천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5백만억의 천자(天子)가 있고, 또한 뇌도발제(牢度跋提, Raudbdaddiya)가 있어서 미륵보살을 위해 선법당(善法堂)을 짓고 천자(devaraja), 천녀(天女), 연화(蓮花), 악기(樂器) 등을 화작(化作)하였다(《관미륵상생도솔천경(觀彌勒上生兜率天經)》) 《화엄경(華嚴經)》의 칠소구회(七所九會) 중 3회가 천궁(天宮)의 회합인데, 그 하나에 도솔천궁회가 있어서 그 회합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여기에는 노사나보살(盧舍那菩薩)이 있고, 하늘에서 가애악(可愛樂)이라는 묘음(妙音)을 내는데 이를 들은 지옥의 중생들은 천자 옆으로 승천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노사나불이 계속 보살로 있는 것은 성도(成道) 이전의 석가, 즉 불타가 아직 보살로서 수업하던 시대의 이상화된 세계를 생각하게 한다. 또한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茶羅)에는 도솔천을 보살형으로 의인화한 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요컨대 불교에서 말하는 하나의 청정한 천계이다. 천(天)이라는 것은 어떤 곳의 신격(神格)을 표현하며 또한 그곳 수호신이 거처하는 곳이기도 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2쪽).
396
註) 144 성문(聲聞)이 수업하는 4단계로, 이것을 사계(四階)의 과위(果位) 즉 사과(四果)라고 부른다. 수타원과(須陀洹果), 수타함과(須陀含果), 사타함과(斯陀含果), 아라한과(阿羅漢果)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2쪽).
397
註) 145 성문(聲聞)·연각(緣覺) 및 보살 등이 나아가는 단계를 십지(十地)라고 하는데, 초지(初地)는 그 1단계이다. 성문의 경우에는 초지를 수삼귀지(受三歸地)라고 하고, 연각은 고행구족지(苦行具足地), 보살은 환희지(歡喜地)라고 부른다. 십지에 대해서는 《십지경(十地經)》에 자세한 설명이 있는데, 화엄사상에서는 보살도를 수업하는 단계로 중시되며, 초지는 불법을 이해하는 제1단계라고 설명되어 있다.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다음에 십지가 있고, 등각(等覺), 묘각(妙覺)을 거쳐 성위(聖位)에 이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2쪽).
398
註) 146 과거 7불 가운데 하나로, 인수(人壽) 2만 세(歲)에 나신 부처님을 말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99쪽).
399
註) 147 공후(空侯), 감후(坎侯)라고도 한다. 수공후(竪箜篌), 봉수공후(鳳首箜篌), 와공후(臥箜篌)의 3종이 있는데, 앞의 2개는 서방에서 기원한 것으로 서역을 거쳐 중국에 전래되었다. 수공후는 이른바 하프로, 중국에서는 남북조부터 당대에까지 유행하였고, 정창원(正倉院)에 세계에서 유일한 옛 유품이 전존한다. 봉수공후는 인도에서 기원한 것으로, 남북조시대에 인도 음악과 함께 전래되었으며 불화 등에도 종종 묘사되어 있다. 이에 비해 와공후는 가로로 연주하는 금(琴)으로 금슬(琴瑟)과 비슷하며 남방 특유의 악기였다고 한다(後藤守一, 「箜篌について」, 《考古學雜誌》20-5·7 | 筒井俊英, 「佛敎音樂と箜篌」, 《寧樂》 15호 | P.Pelliot, 「Le K'ong-heou et le qobuz」, 《內藤博士還曆祝賀記念支那學論叢》)(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3쪽).
400
註) 148 마음의 괴로움을 말한다. 그 수가 많은 것을 형용하여 108번뇌, 8만 4천 번뇌 혹은 8만 4천의 진노(塵勞) 등이라고도 한다. 논종(論宗)에서는 그 근원으로서 탐진치(貪瞋痴, 三惑)를 들고, 여기에 기말(技末, 所屬的) 번뇌가 더해진다고 설명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3쪽).)
401
註) 149 성수겁(星宿劫)은 즉 미래세(未來世)로, 여기에도 또한 천불이 있는데, 《미래성수겁천불명경(未來星宿劫千佛名經)》에 그 부처의 이름이 보인다. 명장(明藏)에는 일광불(日光佛), 용위불(龍威佛), 화엄불(華嚴佛) 이하 천불이 있다고 한데 비해, 고려장(高麗藏)에는 일광불이 빠지고 용위불부터 시작되며, 화엄불이 제2불로 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제2불이라는 것은 용위불 또는 화엄불에 해당한다. 그러나 13층탑의 백배가 되는 보탑을 건설했다는 것은 전거 미상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3쪽).
402
註) 150 석가의 장례에 따른 유골사리를 보관한 탑이다. 현응(玄應)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권6에는 “사리는 설리라(設利羅, sarira)라고 하며, 한역하여 신골(身骨)이라고 한다. 사리에는 전신(全身)도 있고 쇄신(碎身)도 있다”라고 보이고, 《법화경(法華經)》 권5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에도 “이때 천왕불은 석가가 열반한 후 정법 세상에 있은 지 20중겁으로, 전신의 사리를 가지고 7보의 탑을 일으켰다. 높이는 60유순, 너비는 40유순이었다”라고 하였으며, 범문(梵文)의 《법화경》에서는 전신사리에 대해 구성 요소에 따라 분해되지 않고 한덩어리가 된 유골이라고 설명하였다. 화장하여 생긴 쇄골(碎骨)과 대비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3쪽
403
註) 151 범어로 Cina-sthana라고 한다. 지나(支那, 至那), 진단(眞旦, 眞丹, 振旦), 지난(指難) 등으로도 쓴다. 구역(舊譯) 《화엄경(華嚴經)》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는 진단국(眞丹國) 나라연산(那羅延山)에 문수의 주처(住處)가 있다고 하였고, 《문수사리보장다라니경(文殊師利寶藏陀尼經)》에는 “贍部洲東北方大振那國五頂山”이라고 하였다. 현장(玄獎)이 계일왕(戒日王)을 만났을 때 왕이 대당국(大唐國)은 어느 곳에 있는지를 물으니 현장이 대답하기를 “여기에서 동북으로 수만여 리에 있는 곳이니, 인도가 이른바 마가지나국(摩訶至那國)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라고 하였다(《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5) 《혜원음의(慧苑音義)》 권하에는 “진단국(震旦國)은 혹은 지나(支那)라고도 하고 또 진단(眞丹)이라고도 한다. … 즉 지금의 한국(漢國)이다”라고 하였다. シナ라는 호칭의 기원은 시황제의 천하통일 이후 국위가 사방으로 확장되자 진(秦)이라는 이름이 와전되어 シナ가 된 것이니, 인도에서 이러한 말이 처음 사용되었던 것은 빠르면 기원전 2세기 후반 이후였다고 한다(P.Pelliot, 「Lórigine du nom de 《Chine》 Tóung Pao」| 宋本文三郞, 「佛典に顯る振旦の語について」, 《史林》12-1·2) 중국에서는 스스로를 하화(夏華), 중화(中華)라고 하며, 또한 중국(中國)이라고 하였고, 일본에서는 한(漢)이나 당(唐)이라 하였으며, 남방에 대해서는 오(吳)라고 하였다. 이는 마치 서양에서 거란이라는 말에서 나온 Cathay를 북지(北支)를 부르는 말로 사용한 것과 유사하다. Cathay는 대개 Taughas(唐家), China(秦)과 같이 중국의 범칭으로도 되어, 성립의 공통성을 보여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3쪽).
404
註) 152 《고청량전(古淸凉傳)》에 인용된 《영이기(靈異記)》에는 금지은서(金紙銀書)의 비나야장(毘那耶藏), 은지금서(銀紙金書)의 수다라장(修多羅藏)이 있고, 율(律, Vinaya)과 경(經, Sutra)의 2장(藏)이라고 되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4쪽).
405
註) 153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로 사주(四洲), 사대주(四大洲), 수미사주(須彌四洲)라고도 한다. 즉 동승신주(東勝身洲), 남염부주(南贍部洲), 서오화주(西午貨洲), 북구로주(北俱盧洲)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나뉘어 있으며, 또한 불바제(弗婆提), 염부제(閻浮提), 구다니(瞿陀尼), 울단월(鬱單越)이라고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4쪽).
406
註) 154 미상이다. 그러나 무저화상(無著和尙)의 전기에도 또한 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만성(萬聖)을 이끌고 나타난 일이 기록되어 있고, 그 외에도 명승이 이러한 종류의 영이를 체험했다는 전설이 적지 않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4쪽).
407
註) 155 사원의 역승(役僧)을 말한다. 불교전서본(佛敎全書本)을 비롯한 여러 간본은 “大華嚴綱維寺”라고 썼고 라이샤워도 또한 이를 따랐으나, 초본(抄本)에는 교정할 때 고친 부호가 있으므로, 대화엄사에서 끊고 강유를 아래 문장에 연결해 읽을 수 있다. 지전본(池田本)에서 “却到大華嚴寺 綱維等引”이라고 한 것이 옳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4쪽).
408
註) 156 아침에 상미보통원(上米普通院)을 출발, 저녁에 대화엄사(大華嚴寺) 열반원(涅槃院)에 도착하여 이때부터 바로 경문(經文)의 서사에 임했으니, 정력적인 원인(圓仁)으로서도 어떠했을까. 다만 만약 이날부터 친다면 대중(臺中)에 있으면서 37일에 걸쳐 서사를 한 것이 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74쪽).
【원문】입당구법순례행기(84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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