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七月十日。十一日。海裏無風。波浪猛騰。徹底涌沸。浪聲如雷。舶船漂振。驚恠不少。
7
7월 10일, 11일 해상에 바람은 없었으나 파도가 거칠게 일어, 바다 밑바닥 것까지 용솟음쳐 올라왔다. 파도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 같았고 배는 떠다나며 흔들려 놀람과 두려움이 적지 않았다.
10
十四日。辰時辭山院。到泊船處。在岸頭。共戒明法師及粟錄事和錄事辭別。往真莊村天門院。相看法空闍梨。此師曾至本國。歸來二十年。夜宿其院。
11
[7월] 14일, 오전 8시경 적산원(赤山院)註 115을 떠나 배가 정박한 곳에 이르렀다. 해안에서 계명법사, 속전(粟田) 녹사, 화기(和氣) 녹사와 작별하고 진장촌(眞莊村)註 116 천문원(天門院)註 117 註 118으로 가서 법공(法空)스님을 만나 보았다. 이 법사는 일찍이 본국에 왔었는데, 돌아온 지 20년이 되었다. 밤에 그 원에서 숙박했다.
12
註) 115 적산 법화원을 말한다. 법화원은 적산원, 신라원, 적산 신라원, 적산 신라사원, 적산 사원, 山院 등 여러 가지로 불렸다.
13
註) 116 진장촌(眞莊村)은 지금 보이지 않지만, 진장(眞莊)이라고 하는 장원을 중심으로 촌이 그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과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용어 예에서 추측해 일본국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법공(法空)은 20년 이전, 즉 홍인(弘仁) 10년(819)경 바다를 건너갔던 것이 된다. 《일본후기(日本後記)》 일문(逸文)에 의하면 홍인 7년·8년·9년·11년에 신라인이 일본으로 귀화한 것 또는 진헌(進獻)의 기사가 있으며, 홍인 10년 6월조에는 당인(唐人)을 태운 신라인의 상선(商船)이 내항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같은 배에 법공이 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지는 않지만 우연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법화원의 승려 신혜(信惠)가 표류하여 도착한 것은 같은 해 6년이고, 장보고가 일본에 간 것은 천장(天長) 원년(824)인데, 이것들을 통해서 신라와 일본의 국제관계는 원활하지 않았다 해도, 사적인 교통이 꽤 있었다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65~66쪽).
14
註) 117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입당구법순례행기》 권2 개성 4년 11월 17일조에서 “절에서 나와 남산 법공스님의 절에 갔다. 적산원의 강유가 서신을 급히 보내 돌아오기를 청하며 南院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라 한 점으로 보아 적산 남쪽 해변에 있는 天門山 부근에 있던 사원으로 추정된다.
15
註) 118 천문원(天門院)은 적산 남쪽에 해당하며, 해변 근처 천문산(天門山)이 있다. 또한 개성(開成) 4년 11월 17일조에 “절에서 나와 남산 법공스님의 절에 갔다. 적산원의 강유(綱維)가 서신을 급히 보내 돌아오기를 청하며 남원(南院)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에 의하면 법공(法空)이 주지로 있던 절을 남원(南院)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즉 천문원은 남원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남천문(南天門)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65~66쪽).
19
[7월] 15일, 산원(山院)註 119에서 재를 들었다. 즉 햇곡식註 120으로 만든 밥이었다.
20
註) 119 여기서의 산원은 진장촌 천문원을 가리킨다.
21
註) 120 햇곡식은 음력 7월에서부터 빨리 익은 곡식을 말한다. 이미 새로운 곡식이 수확되어져 그곳에서 이 곡식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66~67쪽).
24
十六日早朝。從山院下。在路聞人噵。舶船昨日發去。到泊船處。覓船不見。暫住岸頭。赤山院眾僧。共來慰問。俱登赤山院喫飯。便見州使四人。先來在院。運日本國朝貢使粮七十石米着。今於當村。緣朝貢使已發。不得領過。便報縣家去。院裏老少。深恠被拋却。慰問慇懃。
25
[7월] 16일, 이른 아침에 산원註 121에서 내려왔다. 길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배가 어제 떠났다고 한다.註 122 배가 정박해 있던 곳에 이르러 배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잠시 해안에 머무르니,적산원의 여러 승려들이 함께 와서 위문하였다. 같이 적산원에 올라가 밥을 먹었다. 문득 보니 주의 사인(使人) 4명이 적산원에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은 일본국 조공사의 양식인 쌀 70석을 운송하여註 123 지금 이 마을에 도착했으나, 조공사는 이미 출발했기 때문에 넘겨줄註 124 수가 없었다. 그런 즉 현의 관아註 125에 보고하러 떠났다.적산원의 늙은 사람 젊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우리가 버려진 것註 126을 괴이하게 여기며 정성껏 위로했다.
26
註) 121 여기에서는 적산 법화원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68쪽).
27
註) 122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같은 배가 개성(開成) 4년(839) 7월 15일에 적산포(赤山浦)를 출발했던 것이다. 그 후 승화(承和) 7년(840) 6월 18일에 오오스미[大隅]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조정에 전달되고 있기 때문에, 약 1년 가까운 세월을 필요로 했던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사이 항해가 대체적으로 쉬웠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적산포에서 출발해서 산동 연해 땅에 처음 도착할 때까지 여러 군데를 표류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68~69쪽).
28
註) 123 원문은 '粮七十石米着'이다. 米는 來의 오기로, 쌀 70석을 운송해 와 도착되었다고 읽어야 한다. 來着은 진행형을 나타내는 구어(口語)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69쪽).
29
註) 124 원문의 ‘領過’는 ‘받았다’라는 뜻이다. 과(過)는 료(了)와 같은 말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85쪽).
30
註) 125 적산포 일대를 관할하는 문등현 관아를 말한다.
31
註) 126 원문은 '拋却'이다. 拋却은 내버리다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남겨졌다는 것이다. 또한 却은 완료를 나타내는 구어의 접미어로써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7월 28일조에도 留却이라고 있다. 《돈황변문(敦煌變文)》에는 用却·使却·忘·却·說却·換却 등 그 용례가 많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69쪽).
34
廿一日。申時。本國相公已下九隻船來。泊[A3]此赤山浦。即遣惟正。起居相公。兼諮諸判官錄事等。相公差近江權博士粟田家繼。及射手左近衛丈部貞名等。慰問請益僧。兼令問第二舶逢危害之事。
35
[7월] 21일, 오후 4시경에 본국의 상공 이하가 탄 9척의 배가 와서 이 적산포에 정박했다. 곧 유정을 보내 상공에게 문안하고註 127 아울러 여러 판관과 녹사 등에게 안부를 물었다. 상공이 강권박사(江權博士)註 128 註 129 속전가계(粟田家繼)와 사수 좌근위(左近衛)註 130 註 131 장부정명(丈部貞名) 등을 보내 청익승을 위문하고 겸하여 제2선박이 조난당한 일을 물어보았다.
36
註) 127 원문은 '起居'이다. 이는 일상의 동작인 동정(動靜)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0쪽).
37
註) 128 원문은 '近江權博士'이다. 3월 23일의 기사로 보아 近은 불필요한 글자이거나 혹은 遣의 오기로 생각된다.
38
註) 129 초본(抄本)에는 近江權博士라고 기록되어 있어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강권박사(江權博士)라고 해야 하며 近은 연자(衍字)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0쪽).
39
註) 130 조정을 호위하는 근위부의 무사로, 大同 3년(808)의 格에 의하면 정원은 300명이었다고 한다. 《延喜式》 권45에 의하면 “擬近衛預擇定便習弓馬者”라 했듯이, 근위부 무사는 활을 잘 쏘는 사람으로 충당했다. 그래서 좌근위 丈部貞名이 견당사 사수로 선발된 것으로 보인다.
40
註) 131 정확하게는 좌근위부근위(左近衛府近衛)라고 읽어야 한다. 근위부의 이름은 천평신호(天平神護) 원년(765)에 처음으로 보이는데, 대동(大同) 2년(807)에 좌근위부(左近衛府)라고 개칭되었다. 조정을 호위하는 군사직으로, 대장 이하 군관이 두어져 그 소속된 병사를 근위(近衛)라고 했다. 대동 3년의 격(格)에 따르면 정원은 300명이라고 한다(《일본후기(日本後記)》 권17, 《유취삼대격(類聚三代格)》 권4) 이들의 자격은 빼어난 궁술과 말타기이다. 《연희식(延喜式)》 권45에도 “擬近衛 預擇定便習弓馬者”라고 하여 활쏘기에 능한 사람이 좌근위부위사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혹은 좌근위부에서 특별히 선발해서 견당사수(遣唐射手)에 임명되었던 것 같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0~71쪽).
44
[7월] 22일, 배들이 출발하지 않았다.
47
廿三日。早朝。山頭望見泊舶處。九隻船并不見。便知夜頭同發。西北風吹。赤山東北隔海去百許里。遙見山。喚為青山。三峯竝連。遙不炳然。此乃秦始皇於海上修橋之處。始皇又於此山。向東見蓬萊山。瀛山。胡山。便於此死。其時麻鞋今見在矣。見舊老說。便得知之。三僧為向天台。忘歸國之意。留在赤山院。每問行李。向南去道路絕遠。聞噵向北巡禮。有五臺山。去此二千餘里計。南遠北近。又聞有天台宗和尚。法號志遠。文鑒座主竝天台玄素座主之弟子。今在五臺山。修法花三昧。傳天台教迹北臺在宋谷蘭若。先修法花三昧得道。近代有進禪師。楚州龍興寺僧也。持涅槃經一千部。入臺山志遠禪師邊。受法花三昧。入道場求普賢。在院行道。得見大聖。如今廿年來也。依新羅僧聖林([□@考]林池本作琳)和尚口說記之。此僧入五臺及長安。遊行得廿年。來此山院語話之次。常聞臺山聖跡甚有奇特。深喜近於聖境暫休向天台之議。更發入五臺之意。仍改先意便擬山院過冬到春遊行巡禮臺山。
48
[7월] 23일, 이른 아침에 산에서 배가 정박해 있던 곳을 멀리 바라보니 9척의 배가 모두 보이지 않았다. 이에 밤중에 모두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註 132 서북풍이 불었다. 적산 동북쪽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 100여 리 떨어진 곳에 멀리 산이 보였는데, 사람들은 청산(靑山)註 133 註 134이라 불렀다. 세 봉우리가 나란히 이어져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명확하지 않다. 이는 곧 진 시황이 바다에 다리를 만들었던 곳이다.註 135 註 136 진시황은 또 이 산에서 동쪽을 향해 봉래산(蓬萊山), 영산(瀛山), 호산(胡山)註 137 註 138을 보았고, 이 산에서 죽었다. 그때 신었던 삼으로 만든 신발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옛 노인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
49
우리 세 승려는 천태산(天台山)으로 가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갈 마음을 잊고 적산원에 머물고 있다. 매번 여정(旅程)註 139을 물을 때마다
50
“남쪽으로 가는 것은 길이 너무 멀다.”
52
“북쪽을 향해 순례하려면 오대산(五臺山)註 141이 있는데, 여기서 2천여 리 떨어져 있다”
53
고 한다. 헤아려보건대 남쪽은 멀고 북쪽은 가깝다. 또 들으니
54
“그곳에 천태종 스님으로 법호가 지원(志遠)註 142 註 143인 스님과 문감좌주(文鑒座主)註 144 註 145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천태의 현소좌주(玄素座主)註 146의 제자들이다. 지금 오대산에서 법화삼매註 147를 닦고 천태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북대(北臺)의 송곡난야(松谷蘭若)註 148에 있으면서 일찍이 법화삼매를 닦아 득도하였다.註 149 근년에는 진선사(進禪師)가 있었는데 그는 초주 용흥사(龍興寺) 승려이다. 《열반경》註 150 1천 부를 가지고 오대산에 들어가 지원선사 곁에서 법화 삼매를 받았다. 그리고 도량(道場)에 들어가 보현註 151보살을 구하고 사원에서는 수도하여 대성여래(大聖如來)註 152를 볼 수 있었다. 그러한 것은 지금부터 20년 전의 일이다”
55
하였다. 신라 승려 성림화상(聖林和尙)註 153의 이야기에 의거해 이것을 적었다. 이 승려는 오대산과 장안에 들어가 두루 돌아보고 이적산원에 온 지가 20년이 되었다.註 154 그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늘 오대산의 성스러운 유적에 대해 들었고 특히 매우 빼어나다註 155고 했다. 성스러운 땅이 가까이 있어 매우 기뻤다.註 156 그래서 천태산으로 가려던 논의를 잠시 그만두고 다시 오대산으로 들어갈 마음이 생겼다. 이에 이전의 마음을 바꾸어 이 적산원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면 오대산을 순례하려고 한다.
56
註) 132 당에 파견된 지 제1선과 제4선 때 당에 간 사람들이 나누어 탔던 신라 배는 개성(開成) 4년(839) 7월 22일 밤에 적산포(赤山浦)를 출발했다. 그 후 히젠[肥前]의 생속도(生屬島)에 도착했던 것이 승화(承和) 6년(839) 8월 19일 이전의 일이니까, 그 사이 약 1개월 가까이 일수(日數)가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3쪽).
57
註) 133 문등현 동북쪽 150여 리에 있는성산으로, 지금의 산동성 영성시 관내에 있다. 이곳에는 진시황 관련 전설이 전해진다.
58
註) 134 청산(靑山)은 문등현 동북쪽 150리에 있는 성산(成山)이다. 산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섬이고, 지금은 산동성 영성현의 관내에 속한다. 청(靑)과 성(成)은 발음이 비슷하다. 적산은 동쪽의 산 이름으로써 청산이라고 했던 것 같다. 현재 적산의 동북쪽 해상에는 작은 섬들(龍山·茂山·寒山)이 있다. 이들과 함께 청산(靑山)의 이름도 보이는데,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청산과는 다른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3~75쪽).
59
註) 135 《太平寰宇記》 권20에 의하면, 진시황이 해가 뜨는 곳을 보고자 石橋를 만들었는데 海神이 돌을 끌어와 다리 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영성시의 成山頭에 秦皇石橋 유적이 남아 있다.
60
註) 136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20 문등현조에 의하면 “진시황이 해가 뜨는 곳을 보고자 석교(石橋)를 만들었는데, 해신(海神)이 돌을 끌어와 다리 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전설은 송(宋)대 뿐만 아니라 당(唐)대에도 유명했는데,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 권11 문등현조에도 “북해(北海)에 시황제의 석교가 있는데, 지금 바다에서 보면 기둥의 형상과 비슷한 돌이 세워져있다”고 하였다. 이를 전해 들었던 원인이 그곳에 닿았던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5쪽).
61
註) 137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이른바 三神山이다. 《사기》 권28 封禪書에 봉래산, 方丈山, 瀛洲山을 삼신산이라 하였는데, 여기서의 瀛山은 영주산이고 호산은 일명 方壺山으로 방장산을 가리킨다.
62
註) 138 《사기(史記)》 권28 봉선서(封禪書)에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을 삼신산(三神山)이라고 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영산(瀛山)은 영주산(瀛洲山)의 약칭이고, 호산(胡山)은 방호산(方壺山)에 해당하는데 호(壺)를 호(胡)라고 썼다고 생각된다. 즉 방장산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5~76쪽).
63
註) 139 원문은 行李이다. 行李는 여행할 때 휴대하는 물건 혹은 그것을 실은 용기를 가리킨다. 옛날에는 사인(使人)과 사자(使者)의 차림에 사용되었는데, 행리(行理)라고도 했다(顧炎武, 《일지록(日知錄)》 권32)(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6~77쪽).
64
註) 140 원문은 聞噵이다. 噵는 말하다와 같은 뜻이다. 여기에서는 듣건대라는 뜻이 아니다. 당시의 일본어에 있어서 知道·說道·言道·信道·覺道·猜道 등 서로 비슷한 용어의 예가 돈황의 변문에도 보인다(入矢義高, 《敦煌變文集口語語彙索引》) 道는 접미어이다. 道에 口부수를 붙인 글자는 《강희자전(康熙字典)》 등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궁파자유초(伊呂波字類抄)》·《유취명의초(類聚名義抄)》에서는 “말하다”는 뜻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7쪽).
65
註) 141 중국 山西省 북동부에 있는 불교의 聖山으로 높이는 3,040m이다. 해발 2,500m에서 3,000m에 이르는 테이블 모양의 봉우리가 솟아 있는 것에 연유하여 오대산이라고 하였다. 산중에 1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북위·당·송·원·명·청 등 중국의 6개 왕조를 거치면서 조성된 53개의 사찰이 있고 산기슭의 臺懷鎭에도 많은 사찰이 집중되어 있다. 중국 북부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나무가 없는 깎아지른 듯한 다섯 봉우리가 묘한 형태를 하고 있다. 2009년 6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66
註) 142 하남성 汝南縣 사람으로 오대산에서 천태종을 공부한 고승이다. 그의 저술로는 《法華經疏》 10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그의 전기는 《廣淸凉傳》, 《宋高僧傳》 권7, 《佛祖通記》 권25 등에 실려 있다.
67
註) 143 지원(志遠,768~844) 성은 송(宋)씨이다. 여양(하남성 여남현) 사람으로, 오대산에서 천태종으로 이름난 승려이다. 그의 전기는 |《광청량전(廣淸凉傳)》·《송고승전(宋高僧傳)》 권7, 《불조통기(佛祖通記)》 권25, 《석문정통(釋門正統)》 권3 등에 실려 있다. 본 내용은 원인이 새롭게 접하고 있는 것으로, 만년의 지원에 대해서는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재가 가장 믿을 만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7쪽).
68
註) 144 문감에 관한 전기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하면 오대산에 오래 머물며 《마하지관》과 《법화경》을 강술했다고 한다.
69
註) 145 문감(文鑒)에 대해서는 개성(開成) 5년 5월 16일조에만 보이며, 전기가 명확하지 않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지원(志遠)의 부전(附傳)에 보이는 원감(元堪)은 문감(文堪)의 오기인데, 여기서의 문감(文堪)은 문감(文鑑)과 동일한 인물로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7쪽).
70
註) 146 《송고승전》에 의하면 현소는 江寧 長壽寺에서 출가하여 만년에 幽棲寺에 거주했다고 한다.
71
註) 147 법화삼매는 지의(智顗, 538~597)가 강설했던 행법(行法)이다. 《법화경》을 외우고,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비는 수행법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7~78쪽).
72
註) 148 난야(蘭若)는 범어 Aranya인데, 속세와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精舍·庵子 등의 의미이다. 송곡(松谷)에 대해서는 《광청양전(廣淸凉傳)》 권상(上)에 “북대의 북쪽 골짜기에 송곡사(松谷寺)와 보적사(寶積寺)가 있으며, 또 동북쪽에 보산사(寶山寺)가 있다”고 한다. 북대의 북면에 위치하는 송곡사는 그 골짜기 이름과 연관된 고찰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8쪽).
73
註) 149 법화삼매를 닦아 득도하였다는 내용 앞에 “한 승려”를 주어로 보충한다. “한 승려”는 후에 주석하는 것처럼, 《법화삼매영험기(法華三昧靈驗記)》의 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라이샤워는 지원(志遠)과 문감(文鑒)이 송곡난야(松谷蘭若)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배웠던 것처럼 해석하고 있지만, 글에서 주어가 탈락된 것이라고 해야만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8쪽).
74
註) 150 《열반경(涅槃經)》은 동아시아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경전 중 하나이다. 그 번역본으로 동진(東晋) 법현(法顯)이 번역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6권과 북량(北涼)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40권, 그 외 법현이 번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권 등이있다. 첫 번째 6권이 열반경이라고도 불리는데, 일반적으로 열반경이라고 하면 두 번째의 40권 경전을 가리킨다. 세 번째 경전은 《방등열반경(方等涅槃經)》이라고도 하는데, 앞의 것들이 대승경(大乘經)인 것에 반해, 이것은 소승경(小乘經)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8쪽).
75
註) 151 보현경계(普賢境界)의 준말. 널리 원융(圓融)한 교(敎)를 신수(信受)하는 이가 깨닫는 경지(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21쪽).
76
註) 152 대성여래(大聖如來)는 불보살 혹은 대성문(大聲文) 등의 경칭(敬稱)이다. 대성세존(大聖世尊)이라고도 하고, 대성문수(大聖文殊)라고도 한다. 여기에서는 문수보살보다는 대성보현보살의 약칭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8쪽).
77
註) 153 적산 법화원의 講經法主로, 20여 년 동안 오대산과 장안을 순례한 고승이다. 후문에서는 聖琳으로 적기도 하였다.
78
註) 154 원문은 '得卄年來此山院'이다. 在자를 넣어 '得卄年來(在)此山院'라고 하면 4자구(句)이다. 원문에는 在자가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9쪽).
79
註) 155 원문은 奇特이다. 기특(奇特)은 특히 빼어나다는 말로, 비길 데 없이 진기한 것이다. 《송서(宋書)》 무제기(武帝紀)에도 “신장은 7척 6촌이고, 풍채가 기특(奇特)하다”고 한다. 기특은 기득(奇得)이라고도 한다. 기득은 범어로 Ascarya 또는 Adbhuta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9쪽).
80
註) 156 당나라로 가기 이전에, 원인이 과연 어느 정도 오대산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입당구법성교목록》에 의하면 양주(揚州) 항해 중에 《청량산약전(淸涼山略傳)》·《함통전(咸通傳)》 1권·《법화삼매영험전(法華三昧靈驗傳)》 2권을 얻었다고 한다.《청량산약전》은 오대산지(五臺山志)에서 서원(書願)에 의해 어느 정도는 추측이 가능했다. 이외 《함통전》·《법화삼매영험전》의 내용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오대산의 영험에 대해서는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원인은 그 성지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법화원에서 다시 신라승으로부터 체험담을 들은 것으로 인해 한층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었고, 여기에 오대산의 영험함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9쪽).
83
廿八日。申時。縣使竇文至等兩人。將縣帖來。其狀偁。
86
右撿案內得前件板頭狀報。其船今月十五日發訖。拋却三人。見在赤山新羅寺院。其報如前者。依撿前件人。既船上拋却。即合村保板頭當日狀報。何得經今十五日。然始狀報。又不見拋劫人姓名兼有何行李衣物。并勘赤山寺院綱維知事僧等。有外國人在。都不申報。事須帖鄉專老人。勘事由。限帖到當日。具分折狀上。如勘到一事不同。及妄有拒注。并追上勘責。如違限勘事不子細元勘事人。必重科決者。
91
日本國僧一人。從小師二人。行者一人。留在山院事由
92
右僧等。為求佛法。涉海遠來。雖到唐境。未遂宿願。辭鄉本意。欲巡聖國。尋師學法。緣朝貢使早歸。不能相隨歸國。遂住此山院。已後便擬巡禮名山。訪道修行。但隨身物。鐵鉢一口。銅鐃二具。銅瓶一口。文書廿餘卷。遮寒衣裳等。更無別物。今蒙縣司勘問。具事由如前。牒件狀如前。謹牒
97
青寧鄉赤山院狀上勘日本國僧人船上不歸事由等狀
98
右日本國僧圓仁。小師惟正。惟曉。行者。計四人。口云。遠聞重花興流佛教。故來投學聖教擬次尋名山聖跡。巡禮諸方。緣時熱。且在山院避熱。待時凉即便行。遂不早([□@考]早字或得字歟)縣司狀([□@考]狀下一字缺。恐脫者字)。惟悉察其僧等緣身衣鉢。更無別物。如通狀後不子細。法清等虛妄之過。謹具狀上。事由如前。
100
[7월] 28일, 오후 4시경 문등현에서 보낸 두문지(竇文至) 등 2명註 157이 현의 첩문註 158을 가져왔다. 첩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2
판두(板頭)註 159 註 160 두문지의 보고를 받았는데, 일본국의 배에서 버려진 3명에 관한 것이었다. 앞서 말한 판두의 보고서를 살펴보니, 그 배는 이달 15일에 이미 출발했고 버려진 3명은 현재 적산 신라사원에 있다고 하였다. 그 보고서는 위와 같다. 앞의 사람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미 배에서 버려진 즉 촌보(村保)註 161와 판두註 162는 당일에 보고서를 올려야 합당한데 어찌 15일이 지난 지금 비로소 보고할 수 있는가? 또 버려진 사람의 성명과 어떤 휴대품과 의복을 가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적산 사원의 강유(綱維)註 163와 지사승(知事僧)註 164 註 165은 외국 승려가 있음에도 전혀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조사하라. 이 일은 모름지기 향의 전노인(專老人)註 166 註 167에게 통첩하여 사유를 알아보게 하라. 첩문이 도착한 당일에 한하여 구체적으로 분석해 첩정을 올려라. 만약 조사한 사실이 한 가지라도 같지 않거나 함부로 조사를 거부하면 모두 더하여 문책할 것이다.註 168 또 만약 기한을 어기거나 조사가 상세하지 못하면 조사를 담당한 사람은 반드시 무거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104
전(典)註 169 왕좌(王佐)가 첩(帖)한다.
105
주부판위(主簿判位)註 170 註 171 호군직(胡君直)
106
섭령(攝令)註 172 註 173 척선원(戚宣員)
107
구법승 등은 문득 서장을 작성해 떨어져 남게 된 사유를 보고했다. 그 서장은 다음과 같다.
108
일본국 승려 1명, 종소사(從小師)註 174 註 175 2명, 행자註 176 1명이 산원에 머물러 있게 된 사유입니다.
109
위의 승려 등은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멀리까지 왔습니다. 비록당나라 땅에 도착했으나 아직 숙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고향을 작별하고 떠나온 본래의 뜻은 성스러운 나라를 순례하며 스승을 찾아 불법을 배우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공사가 일찍 돌아가므로 그들을 따라 귀국할 수가 없게 되어, 마침내 이 산원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곧 명산을 순례하고 불도를 찾아 수행하려고 합니다.
110
개인 휴대품은 다만 쇠 바리때 1구(口), 구리 주발註 177 2구(具), 구리 물병註 178 1구, 문서 20여 권, 추위를 막아 줄 의복 등입니다. 그 밖의 다른 물건은 없습니다. 지금 현사(縣司)의 조사와 심문은 받고 앞에서와 같이 사유를 갖추어 적었습니다. 첩문에 관해서는 앞과 같습니다. 삼가 첩문을 올립니다.
112
일본국 승려원인(圓仁)이 첩장을 작성해 올립니다.
113
종자승(從者僧) 유정, 유효, 행자 정웅만 삼가 첩문을 올립니다.註 179
115
일본국 승려 등이 배로 돌아가지 못한 사유 등을 조사한 첩장
116
위의 일본국 승려 원인과 소사(小師)註 180 유정, 유효, 행자 등 합계 4명은 그들의 입으로 말하기를 ‘중화(重花)註 181 註 182에 불교가 융성하게 발전했다는 것을 멀리서 듣고 성스러운 가르침을 배우러 왔다. 명산의 성스러운 유적을 찾아 여러 지방을 순례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침 때가 더운 계절이어서 잠시 이 산원(山院)에서 더위를 피하고 시원해지는 때를 기다려 곧 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찍 현사에 서장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잘 살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승려는 옷가지와 그릇 외에 별다른 물건이 없습니다. 만약 서장을 올린 후 그 내용이 자세하지 않다면 법청(法淸) 등은 거짓말을 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삼가 서장을 갖추어 올립니다. 사유는 앞의 내용과 같습니다.
119
註) 157 원문은 '縣使竇文至兩人'이다. 여기에서 현은 문등현(文登縣)인데, 문등현 관청에서 청녕향(靑寧鄕)으로 공문을 함께 보낸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4쪽).
120
註) 158 원문은 牒인데, 초본(抄本)에는 帖으로 되어 있다. 牒으로 고쳐야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4쪽).
121
註) 159 마을 안의 경찰 임무와 호구의 이동 등을 맡아보는 職任이다.
122
註) 160 판두(板頭)에 대해 9월 3일조에 현에서 청녕향에 보내는 공문 중 “海口所由 當村板頭”라는 기록이 있고, “村保板頭 海口所由”라는 기록도 있다. 이에 따르면 해구의 소유(所由)에 대해 대구적(對句的)으로 해당 촌의 판두 또는 촌보(村保)의 판두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판두라는 것은 보두(保頭) 내지 단두(團頭)와 같은 성격의 직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판두의 용례는 이 외에 보이지 않는다. 판두는 마을 안의 경찰 임무와 호구의 이동 등을 맡아보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4~85쪽).
123
註) 161 《통전》이나 《구당서》에 의하면, 4家를 隣으로 하고 5家를 保로 하여 인보 조직을 만들어서 상호 감찰과 연대 책임을 맡겼다고 한다. 여기서의 촌보는 곧 마을 인보 조직의 책임자를 말한다.
124
촌보(村保)는 이웃 조직을 말한다. 당나라 때의 인보 제도는 율령으로 규정된 것인데 《육전(六典)》권3 호부·《구당서(舊唐書 )》 권48 식화지에는 “4가(家)를 인(隣)으로 하고, 5가(家)를 보(保)로 한다”라 하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0에는 “4인(隣)을 보(保)로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두가지 기술은 종래 보에 대한 의견을 착복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宮崎市定의 해석에 의하면, 린(隣)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근린관계의 가족들에게 연대책임을 지우는 것이고, 보는 인위적으로 5가(家)를 조합해 연대책임을 받는 것으로 구분이 된다고 하였다. 인보는 주민이 연대보장을 받아야 하는 최하부조직이다. 보가 연대책임을 가진 것으로부터 머지않아 책무 등의 돈을 빌려주고 갚는 것에 대해서도 공동관계가 적용되었는데, 이로 인해 연보(連保)·상보(相保)·공보(共保)·동보(同保) 등의 말도 생겨났다. 또한 촌보판두(村保板頭)를 ‘촌보의 판두’라고 읽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되는데, 여기서의 판두는 보두(保頭)의 별칭이라고도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5~86쪽).
125
註) 162 당 무덕령(武德令)이나〔《구당서》 권48 食貨(상), 《通典》권3 食貨〕향당 등에 의하면 “100호(戶)를 이(里)로 삼고” “5가(家)를 보(保)로 삼으며… 읍(邑)에 사는 자는 방(坊), 전야(田野)에 사는 자는 촌(村)”이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에는 이정(里正), 읍에는 방정(坊正, 坊頭), 촌락에는 촌정(村正, 村保)을 두었다. 인보제도(隣保制度)하에서는 보(保)가 상호 감찰과 연대책임의 기본 단위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촌보·판두는 분명히 보 또는 촌락의 장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방정을 방두나 판두로도 불렀다는 설에 대하여는 이론도 있다. 판두를 호적을 관장하는 관리로 보기도 하고, 또는 촌락 내의 경비나 호구의 이동 등을 관리한 조직의 우두머리로 보기도 하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2, 鈴木學術財團, 1964~69, 1989복간, 85쪽), 반두(班頭, Group Leader)로 보는 사람〔E. O. Reischauer, 《Enin's Diary》, New York:The Ronald Press Co., 1955, 101쪽〕도 있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90쪽).
126
註) 163 여기에서 강유(綱維)는 사원의 사무를 맡은 삼강(三綱), 즉 사주(寺主)·상좌(上座)·유나(維那)를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6~87쪽).
127
註) 164 삼강 곧 寺主, 上座, 維那를 포함하여 사원 직역을 맡은 승려로 典座나 直歲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선종에서는 都寺, 監寺, 副寺, 維那, 典座, 直歲를 6知事라 하였다.
128
註) 165 지사(知事)는 절의 삼강(三綱), 즉 사주(寺主)·상좌(上座)·유나(維那) 중 하나이다. 여기에서 지사승(知事僧)은 삼강 외의 직책을 맡은 승려로, 이를테면 전좌(典座)·직세(直歲)·고사(庫司)와 같은 일을 포괄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7~88쪽).
129
註) 166 老를 差의 오기로 보아 “오로지 사람을 보내”로 해석하기도 하고(少野勝年,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연구》2, 88쪽), 專은 耆로 보아 ‘耆老人’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E. O. Reischauer, 《Enin's Diary》, New York:The Ronald Press Co., 1955, 139쪽).
130
註) 167 원문은 牒鄕專老人이다. 라이샤워는 牒 다음을 끊어 해석함으로서, 鄕專老人을 한 구절로 보았다. 그리고 專老人은 耆老人의 오기라 하였다(E.D. p.139) 그러나 실은 老가 아니라 “ ”라고 보아야 하며, ‘향에 편지를 가진 무리를 보내’라고 해석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8쪽).
131
註) 168 원문은 並進上勘責이며, “모두 더하여 상(上)에게 나아가 문책당하게 할 것이다”고 해석한다. 이는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을 일컫는다. 상(上)은 본래 임금 또는 천자를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8쪽).
132
註) 169 전(典)은 장(掌)과 같은 뜻으로 담당하다는 뜻이다. 명·청 시대 관청에서 기안 등을 담당하는 서리를 전사(典使) 또는 전리(典吏)라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백관지(百官志)에는 현(縣)의 직원으로 전사(典事)라는 칭호가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8쪽).
133
註) 170 주부는 현의 사무를 담당하는 실무관으로 품계는 정9품하부터 종9품하까지에 걸친다. 그리고 판위 역시 같은 품계로, 경찰임무를 맡았다. 여기서는 胡君直이 주부와 판위를 겸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34
註) 171 초본(抄本)에서는 副尉라 한다. 같은 해 8월 13일의 첩문에도 부위(副尉)라 하는데, 5년 2월 10일·23일 내용의 첩문에는 판위(判尉)라고 하기 때문에, 판위로 고쳐야 한다. 현(縣) 직원으로서 주부(主簿)는 사무주임이고, 그 품계는 정9품하부터 종9품상까지에 걸친다. 위(尉)도 주부와 동일하게 이미 한(漢)대부터 군현의 직원이었는데, 이를테면 경찰부장이다. 당에서는 그 품계가 주부보다 낮았다. 여기에서 판위는 겸직으로, 주부가 위(尉)의 직을 겸임하고 있는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8쪽).
135
註) 172 당나라 관리 임용에는 종종 領, 兼, 知, 行, 守, 攝, 試, 判, 檢校 등을 붙여 임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攝은 대리로 맡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서의 攝令은 대리로 맡은 현령이라는 뜻이다.
136
註) 173 섭령(攝令)은 대리로 맡은 현령이라는 뜻이다. 문등현에는 당시 정식의 현령이 없었다. 당대의 관리임용에는 자주 領·兼·知·行·守·攝·試·判·檢校 등을 붙여 임명한다. 이와 같은 임용의 예에 대해 살펴보면 (1)직무는 실제로 하지만 정식 임명이 아닌 경우, (2) 관명만 있고 실무는 종사하지 않는 경우, (3)품계가 관직에 대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8~89쪽).
137
註) 174 스승을 따라 다니며 수행하는 젊은 승려로, 受戒한지 10년이 지나지 않은 승려를 보통 小師라 하였다. 여기서는 원인의 제자승인 유정(惟正)과 유효(惟曉)를 가리킨다.
138
註) 175 종소사(從小師)는 따라 다니며 시중드는 젊은 승려를 의미한다. 소사(小師)는 나이가 작은 승려로, 소승(小僧)이라고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9쪽).
139
註) 176 행자(行者)는 본래는 수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후에는 출가하지 않고 수도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도 수도자를 행자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관행자·수행자의 약칭이다. 범어로는 yogin인데, 수행하는 사람을 뜻한다. 법화행자·염불행자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행자는 종복인 정웅만(丁雄滿)을 가리킨다. 그가 특별히 행자로서 동행했던 것은 적양(的良)·물충종(物忠宗)·대전길(·大全吉)의 무리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행자는 요컨대 속세에 있는 종자 또는 종복의 의미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9~90쪽).
140
註) 177 원문은 銅鋎이다. 鋎은 鋺과 같다. 구리로 만든 주발이다. 초본(抄本)의 자획과 관련하여 다른 판본은 모두 鐃라고 하지만, 鐃의 글자 모양과 비교했을 때 따르기 어렵다. 또 《입당구법순례행기》 권1 개성(開成) 4년 4월 5일조에 鋎鋺라 하고 있고, 전후 문구를 봐도 이곳에 銅鐃라는 악기를 넣는 것은 부자연스럽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90~91쪽).
141
註) 178 구리로 만든 물병이다. 호수병(胡水甁)이라고도 하는데 범어로 Kundika이다. 일반적인 호형은 구별이 된다. 관음을 가진 물병은 이 종류에 속하는데, 이를테면 목 부분이 특히 길며, 입 앞에 탄구(呑口)를 붙이고 배 부분에 주구(注口)를 붙인다. 이는 인도에서의 정용(淨用)과 촉용(觸用)의 엄격한 법칙에 바탕을 둔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91쪽).
142
註) 179 민간에서 관청에 보내는 공문은 본래 문서를 작성하는 양식에 따라야 한다. 《사마씨서의(司馬氏書儀)》에 문서 작성 형식이 수록되어 있다. 법화원이 올린 문서는 장신(狀申) 대신에 장상(狀上)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원인은 문서 작성 양식에 따르지 않고 편지 형식에 따랐는데, 이것은 본래 관청 간 서로 쓴 글이다. 원인의 경우는 개인이 작성한 문서이기 때문에 양식에 따라야 했었다고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수록된 공문은 모두 편지 형식을 사용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91~92쪽).
143
註) 180 소승(小僧)과 같은 뜻이다. 때로는 자기를 겸손하게 말할 때도 쓰인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92쪽).
144
註) 181 重花와 中華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145
註) 182 중화(重花)는 증화(中華)의 가차(假借)이다. 重과 中은 발음이 같다. 또한 개성(開成) 5년 3월 3일의 문서에서는 중화(中華)라 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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