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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진만필(甲辰漫筆) 11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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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국형(尹國馨)
1
丙申七月初八日。忠淸道巡察御史李時發狀啓來到。其啓曰。定山縣監鄭天卿所報內。縣居僉知李廷揚進告。縣人尹天機趙忠乞來言。李夢鶴以先鋒將。聚兵於本縣雙方築。幾至六七百。將犯鴻山縣。尹趙亦入於其黨而脫逃者也。同夕時發之啓又至。初六曉。夢鶴入鴻山。捕得縣監尹英賢。仍向林川。又捕郡守朴振國。愚民爭附。徒衆漸盛云云。朝廷震動。始發宣傳官。往探形止。又以措捕事。監司兵使御史處。幷爲指揮。賊初七陷定山。其倅鄭天卿挺身走。初八陷靑陽。其倅尹承渚又逃。數日之間。衆至數千。村野士庶。逃匿山中。有如避倭時。凶焰極熾。初九陷大興。其倅李質粹又逃入山中。作牒送人。由新平大津達京。呈于備邊司。以大路已塞。不得通行之故也。備道賊據本縣。衆可三四千。持兵者。如軍官武士輩數百外。皆村氓赤手云。持牒人。命免賤爲司僕而遣之。初九賊將犯洪州。州官屬李希壽。申姓兩人告牧使洪可臣。吾等詐降。詳探賊形而來。俱往光時驛。路上跪言願屬。賊使於大興相見。到其縣。賊坐大廳踞交椅。李申入現。賊下椅。行再拜。賊言。今日尙早。欲往洪州。李申曰。洪州守城堅固。不可猝入。吾等先往。更觀虛實來報。然後可往。吾等亦當爲內應。賊仍留不發。翌日待其回報。回報。不來。晩乃發向。李申回告牧使。牧使聞變。已治城守之具。到此益加堅密。州居武將朴名賢。自初入城。牧使倚以爲重。朴素以勇悍著名。兩人協心。多聚武士之有名者。體察使從事官辛敬行。適到內浦。聞變而至。傳令隣邑守令。水使崔湖亦使來守。幷皆率兵而至。於凡百頭緖。未及措置者。始得完備。此李申行計緩賊之力也。賊行軍犯州境。朴名賢多遣武士邀賊。多有所捕。皆賊之先鋒者也。賊進陣州城之二三里許。凡五陣。陣各千餘名。臨夕。賊將數人。馳馬於城下呼之曰。天運如此。城中之人。何不出而應之。橫突爲輕侮之狀。夜城中放火炮。又放火箭。燒東門外近城人家。光焰燭天兵使李時彥。由溫陽直指洪州。已到禮山無限城。御史李時發。陣於維鳩驛。將向洪州。中軍李侃陣於靑陽。將向洪州。軍聲大振。十一曉。賊自潰遁走。朴名賢督率城中之兵。追逐至靑陽地。賊屯聚拒敵。崔湖及諸將之兵。又多來到者。賊之管下。金慶昌林億命太斤等三人。斬取李夢鶴頭納之。棄尸於道下。烏合之衆。一時散落。衆兵追逐。或捕或斬。不知其數。京居兼司僕韓絢。陰有逆謀。指授夢鶴。使之擧兵。而渠則退在沔川鄕庄。爲坐觀成敗之計。賊黨見捕者。多以絢爲謀首。捕絢鞫之。情狀畢露。乃正典刑。同謀表表者。盡爲逮捕伏誅。初逆報甚急。訓鍊都監大將趙儆。自請領所操京兵八百。往擊之。敬立時爲都監都廳。亦隨之。十一日發自京城。行至振威縣。賊之敗報至。命班師。黃海江原京畿兵馬皆徵之。至是皆停。金慶昌林億命。以賞特陞嘉善。太斤擢授六品實職。未幾。臺諫以慶昌爲次功。論降通政。尹天機趙忠乞幷除六品實職。李申等亦除六品實職。諸將則李時彥以首功陞嘉義。崔湖爲次而陞嘉善。李時發陞通政。洪可臣以守城功陞通政。皆出於上命也。朴名賢之功。皆以爲獨出等夷。而未得蒙賞。朝廷屢請。然後追陞嘉善。臺諫以李時彥李時發。爲無功論啓。請改其賞。而不允。時彗星犯紫微帝座甚急。而賊平便消。天變之應於上。有如此矣。
 

 
2
○ 병신년 7월 8일에 충청도 순찰어사(巡察御史) 이시발(李時發)의 장계가 도착했다. 그 장계에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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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현감(定山縣監) 정천경(鄭天卿)의 보고에 의하면, 현에 사는 첨지 이정양(李廷揚)의 고발에, “고을 사람 윤천기(尹天機)와 조충걸(趙忠乞)이 와서 말하기를, 「이몽학(李夢鶴)이 선봉장으로 본현의 쌍방축(雙方築)에서 군사를 모아 거의 6백~7백 명이나 되는데, 장차 홍산현(鴻山縣)을 침범하려 한다.」 하며, 윤천기와 조충걸 역시 그 당에 들어갔다가 도망쳐 나온 자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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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날 저녁에 시발의 장계가 또 왔는데, ‘6일 새벽에 몽학이 홍산에 쳐들어와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고, 임천(林川)으로 향하여 또 군수 박진국(朴振國)을 사로잡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여기에 붙어서 도당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내용이었다. 조정에서 크게 흔들리어 비로소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형편을 탐지하도록 하고, 또 적을 잡는 일로 감사ㆍ병사ㆍ어사에게 아울러 지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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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7일에 정산(定山)을 함락하니, 그 고을 수령 정천경(鄭天卿)이 뛰쳐 달아나고, 8일에는 청양(靑陽)을 함락하니 그 고을 수령 윤승저(尹承渚)가 또 도망을 하였다. 수일 동안에 무리가 수천에 이르고 시골의 서민들은 산중에 도망가 숨으니 마치 왜란을 피할 때와 같았고, 흉도들의 기세는 대단히 치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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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에는 대흥(大興)을 함락하니, 그 고을 수령 이질수(李質粹)가 또 산중으로 도망가 첩보(牒報)를 써서 사람을 보내되, 신평(新平)과 대진(大津)을 거쳐 서울에 이르러서 비변사에 바쳤으니, 큰 일이 이미 막혀서 통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보고에 의하면, 적이 본현을 점거하였는데, 무리는 3~4천 명쯤 되고, 병기를 가진 군관과 무사들 수백 명 이외에는 모두가 맨손인 촌 백성이라는 것이었다. 첩보를 가지고 온 사람은 면천시켜 주고, 사복(司僕)으로 삼아 내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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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에는 적장이 홍주를 침범하니 주의 관속 이희수(李希壽)와 신씨(申氏) 성을 가진 두 사람이 목사 홍가신(洪可臣)에게 고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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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거짓 항복하고 상세히 적의 형편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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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함께 광시역(光時驛)에 가서 노상에 꿇어앉아 그들에게 붙기를 원한다고 말하니, 적은 대흥(大興)에서 서로 만나자고 하였다. 그 고을에 이르니, 적은 대청의 교의에 걸터앉아 있었다. 이희수와 신씨가 들어와 뵈니, 적이 교의에서 내려와 재배를 하고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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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직 이르니 홍주로 쳐들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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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이희수와 신씨가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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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는 성을 굳건히 지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가서 허실(虛實)을 다시 살펴보고 와서 보고한 뒤에야 갈 수 있으며, 우리도 내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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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적이 그대로 머물고 출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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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회보를 기다렸으나 회보가 오지 않아 늦게야 출동하였다. 이희수와 신씨가 돌아와 목사에게 보고하니, 목사는 변란을 듣고 성을 지킬 방비를 한데다가 이 보고를 듣고 더욱 방비를 치밀하게 하였다. 주(州)에 사는 무장 박명현(朴名賢)이 처음부터 성에 들어왔으므로 목사가 그를 중히 여겼는데, 박명현은 본디 용맹스럽기로 유명하였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이름 있는 무사들을 많이 모았다. 체찰사(體察使)의 종사관(從事官) 신경행(辛敬行)이 마침 내포(內浦)에 왔다가 변을 듣고 달려와서 이웃 고을 수령들에게 영을 전달하고, 수사(水使) 최호(崔湖)도 와서 지키게 하니,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 그래서 미처 조치하지 못했던 모든 일이 비로소 완비되게 되었으니, 이는 이희수와 신씨가 적을 늦추게 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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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행군이 주의 경계를 침범하자, 박명현은 무사를 많이 보내서 맞아 싸워 포로를 많이 잡으니, 모두가 적의 선봉(先鋒)이었다. 적이 주(州)의 성 2~3리 되는 곳에 주둔하니, 모두 다섯 진이고, 한 진에는 각기 천여 명씩이었다. 저녁이 되어 적장 몇 명이 성 아래로 달려와서 호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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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天運)이 이와 같은데 성중 사람들은 어찌 나와서 호응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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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좌충우돌 날뛰며 업신여기는 듯하였다. 밤에 성중에서는 화포를 쏘고 또 불화살을 쏘아서 동문 밖 성 근처의 인가(人家)를 불태우니, 화염이 하늘을 밝혔다. 병사(兵使) 이시언(李時彦)은 온양(溫陽)에서 곧장 홍주로 향하여 이미 예산(禮山) 무한성(無限城)에 이르렀고, 어사(御史) 이시발(李時發)은 유구역(維鳩驛)에 진을 치고 장차 홍주로 향하려 하고, 중군(中軍) 이간(李侃)은 청양에 진을 치고 홍주로 향할 차비를 하니, 사기가 크게 떨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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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새벽에 적은 스스로 붕괴되어 달아나니, 박명현은 성중의 병사를 독려하여 거느리고 청양까지 추격하였다. 적이 주둔하고서 항거하고 대적하는데, 최호와 여러 장수의 군사가 또 많이 도착하였다. 적의 휘하 김경창(金慶昌)ㆍ임억명(林億命)ㆍ태근(太斤) 등 세 명이 이몽학(李夢鶴)의 머리를 베어 바치므로, 길 아래에서 기시(棄尸)하니, 오합지졸의 무리가 일시에 흩어졌다. 많은 군사들이 추격하여 혹은 체포하고 혹은 참수한 것이 부지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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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겸사복(兼司僕) 한현(韓絢)이 몰래 역모(逆謀)를 꾀하여 몽학에게 지시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하고, 자기는 면천(沔川) 농장에 가 있으면서 성패(成敗)를 좌시하고 있던 것이었다. 붙잡힌 적당(賊黨) 중 많은 사람들이 한현이 역모의 주모자라 하였다. 한현을 체포하여 국문하니 정상이 다 밝혀져서 곧 처형되었고, 함께 모의함이 뚜렷한 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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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역모의 보고가 매우 급하자 훈련도감 대장(訓鍊都監大將) 조경(趙儆)이 자기 휘하의 경병(京兵) 8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치기를 자청하였다. 경립(敬立 저자(著者) 윤국형의 아들)이 그때 훈련도감 도청(都廳)으로 있었는데, 또한 따라갔다. 11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진위현(振威縣)에 이르자 적이 패했다는 소식이 이르렀으므로 왕명에 의해 회군하였고, 황해(黃海)ㆍ강원(江原)ㆍ경기(京畿)의 병마를 모두 징발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모두 정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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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창과 임억명은 상으로 가선대부에 특진되었고, 태근은 6품의 실직(實職)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못 가서 대간(臺諫)이 경창은 두 번째 가는 공이 된다고 하여 통정대부로 강등되고, 윤천기와 조충걸은 모두 6품의 실직에 제수되었으며, 이희수와 신씨 등도 6품의 실직에 제수되었다. 제장(諸將)들로 말하면 이시언이 첫 번째 공으로 가의대부에 오르고, 최호가 다음으로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이시발은 통정대부로, 홍가신(洪可臣)은 성을 지킨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으니, 모두 성상의 명에 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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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현의 공은 모두들 특출하다고 여겼으나 상을 받지 못하다가, 조정에서 여러 번 청한 뒤에 가선대부에 추승(追陞)되었다. 대간이 이시언과 이시발은 공이 없다고 논계하여 상을 고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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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혜성(彗星)이 자미성(紫微星)의 황제 자리에 매우 위급하게 범하였으나, 적이 평정되고는 바로 없어졌으니, 천변(天變)이 위에서 응함이 이와 같은 것이었다.
【원문】갑진만필(甲辰漫筆)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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