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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진만필(甲辰漫筆) 3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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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국형(尹國馨)
1
嚴萬兩差官之入我國也。自義州至碧蹄。人民擁道。頌殿下賢明。逆珒無狀。入都之日。近畿士民都中士大夫。下至韋布大小老少人民。無慮數萬。塡塞西郊。王子君亦具衰絰。立待路左。咸以先王定儲已久。屢奏請封。逆珒無復人理。又有心病。不堪負荷之意。號訴。就館之後。百官又具呈文。以達本國人心所在焉。三闕俱燼於兵火。大駕癸巳還都後以貞陵洞陽川都正家桂林君家。爲大內。沈義謙家。爲東宮。又以附近大小人家。爲闕內各司。至乙未丙申間。就路之東邊建門。西邊亦建門。東爲正門。西爲西門。前此四面無所遮障。用木條。作栅樣而圍之。名之曰時御所。桂林家東墻。連排韓蕙家。初爲備邊司。大內狹窄。出備邊司於闕外。通韓蕙家而入內。木柵極虛疎。李左相恒福爲兵判時。始築長墻。以成大闕模樣。至丙午間。爲改建廟闕計。就景福宮正基。將始役。前縣令李國弼上疏。極言景福宮不甚吉。宜先造昌德宮。朝廷從其議定之。八道民結。出木半疋。合若干同。水邊官則作米船運。以爲燔瓦償役等費。三公爲都提調。又出提調。若干員。都廳郞廳監造官。稱之爲廟闕營建都監。戶工判書例兼。
 

 
2
엄일괴(嚴一魁) 만애민(萬愛民) 두 차관(差官)이 우리 나라에 들어올 적에, 의주에서 벽제(碧蹄)까지 백성이 길을 메우고서 전하(殿下 광해군을 이름)의 현명함과 역적 임해군 이진(李珒)의 형편없음을 말하였다. 도성에 들어오는 날 경기(京畿) 근방의 사민(士民)이나 도성 안의 사대부에서 아래로 선비나 백성의 노소에 이르기까지 무려 수만 명이 서교(西郊)를 메우고, 왕자군(王子君) 역시 상복을 입고 길가에 서서 기다리며 모두들, ‘선왕이 세자로 정한 지 이미 오래되어 누차 봉해 주기를 주청하였으며, 역적 이진은 사람의 도리가 없고 또 심장병이 있어 중책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으로 호소하였다. 차관이 객관(客館)에 들어간 후에는 백관들이 또 정문(呈文)을 갖추어 본국 인심의 소재를 알렸다.
 
3
세 곳의 대궐이 모두 난리에 불타서 대가가 계사년 환도한 뒤에, 정릉동 양천도정(陽川都正)의 집과 계림군(桂林君)의 집을 대내(大內)로,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삼았으며, 또 부근의 대소 인가는 궐내의 각사(各司)로 썼다. 을미ㆍ병신년(1595~1596, 선조 28~29) 무렵에 이르러 길 동편에 문을 세우고 서편에도 문을 세웠으니, 동쪽은 정문(正門)이고, 서쪽은 서문(西門)이다.
 
4
이전에는 사면에 담장이 없어 나뭇가지로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이름을 시어소(時御所)라고 하였다. 계림군의 집 동쪽 담이 한혜(韓蕙)의 집과 나란히 있어 처음에 비변사로 썼는데, 대내가 협소하여 비변사는 궐외(闕外)로 내보내고 한혜의 집까지 통틀어 대내로 썼다. 목책(木柵)이 아주 허술하였는데, 좌상 이항복(李恒福)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비로소 긴 담을 쌓아 대궐의 모양이 되었다.
 
5
병오년 무렵에 이르러 종묘와 대궐을 다시 지을 계획으로 경복궁 터에 공사를 시작하려 하는데, 전 현령 이국필(李國弼)이 상소하여 경복궁이 그다지 좋지 못하니, 마땅히 창덕궁을 먼저 짓는 것이 좋다고 극언하므로 조정에서는 그 의론에 따라 결정하였다.
 
6
팔도의 백성에게 토지 한 목[結]에 무명 반 필씩 내도록 하여 합치니 약간의 동(同)이 되고, 바닷가 고을은 쌀로 만들어 배로 운반하여 기와 굽고 일하는 삯으로 삼았다.
 
7
삼공을 도제조로 삼고, 또 제조 약간 명과 도청(都廳)ㆍ낭청(郞廳)ㆍ감조관(監造官)을 내어 묘궐영건도감(廟闕營建都監)이라 불렀는데, 호조 판서와 공조 판서가 으레 겸임하였다.
 

 
8
戊申國喪山陵。己酉詔使接待。無以爲措。除出米布用之。宗廟戊申訖工。大闕則雖國喪不敢停役。至己酉冬畢役。宗廟則戊申初秋。奉神主而安之。大闕拘於年忌。時未移御。魂殿亦就昌慶宮通明殿舊基。新刱而設之。祔廟後將爲大妃殿移御之所。都監雖罷。仍設營建廳。又設提調一員都廳一員。戶工判書。例兼仍督之。造殿閣二所。小小堂室。及軍士入接處若干間。今方營造。提調一員加設。都廳監造官。亦加設若干員。
 

 
9
무신년(선조 41, 광해 즉위년인 1608. 선조가 승하한 해) 국상에 산릉 때나, 기유년 조사(詔使) 접대에는 마련할 길이 없어 쌀과 포목을 내어서 썼다. 종묘는 무신년에 공사가 끝났지만 대궐은 국상에도 공사를 쉬지 않고 하여 기유년 겨울에 공사를 마쳤다. 종묘에는 무신년 초가을에 신주(神主)를 받들어 안치하였고, 대궐은 연기(年忌)에 구애되어 아직도 옮기지 못하였다. 혼전(魂殿) 또한 창경궁 통명전(通明殿) 옛터에 새로 건설하고 부묘(祔廟) 후에 대비전이 옮겨가도록 하였다.
 
10
도감은 비록 없앴지만 영건청(營建廳)은 그대로 두고, 또 제조 1명, 도청(都廳) 1명을 두어 호조 판서와 공조 판서가 으레 겸하여 감독을 하였다. 전각(殿閣) 두 곳을 지었고, 소소한 당실(堂室)과 군사들이 머무를 곳 몇 칸은 지금 바야흐로 짓고 있는 중이다. 제조 1명을 더 두고, 도청 감조관(都廳監造官)도 약간의 인원을 증설하였다.
【원문】갑진만필(甲辰漫筆) 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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