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젊을 때에 무오년 순회세자(順懷世子) 책봉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 태감(太監) 중국 사신 두 명이 나와 오직 팔고 사는 일만 했을 뿐, 지나친 정도까지에는 이르지 않았고, 또한 오래 머무르지도 않았다. 그 후에 태감 중국 사신이 나온 숫자가 얼마인지 알 수는 없을 정도였으나 토색질을 심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년에 금상(今上 현재의 임금, 즉 광해군)의 책봉 때에 태감 중국 사신 유용(劉用)이 처음으로 은을 몹시 요구하여 5만 냥이나 뜯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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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세자 책봉 때엔 태감 염등(冉登)이 은을 요구함이 유용보다 배나 더하여 5~6만여 냥을 뜯어갔다. 앞으로 나오는 사람은 반드시 이를 본받아 더 뜯어 가려 할 것이니, 국가가 장차 어떻게 지탱해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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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토산물이 아니다. 중국에 바치기는 고려 말기부터인데, 몇 만 냥에 이르므로 정포은(鄭圃隱)이 힘을 다해 주선하여 중지시켰고, 우리 나라에서도 토산물을 바치는 데 그쳤다. 임진란 이후 중국 장수들이 계속 나오자 은의 사용이 점차로 광범위해져서 중강(中江)에 시장을 개설하니, 우리 백성들로 제 이익만을 꾀하는 자도 많았다. 시장에서 매매하는 데에도 그대로 사용되자, 중국 사신의 요구가 있으면 벼슬을 팔아 모아 들이기도 하고, 혹 모집하고 혹은 사들여서 계속 긁어 모으므로, 드디어 무궁한 폐단이 되었으니, 아주 작은 걱정이 아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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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부산(釜山)에서는 왜인의 접대를 허락하여 은의 판로를 금하지 않는데, 중국 사신의 요구하는 은도 여기에 의지하여 구해서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