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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채만식 씨 소설의 애독자의 한 사람이다. 채씨를 안 지는 10년이 가까웠지만 그때부터 애독자였던 것은 아니다. 씨는 개벽사에 있을 때에 많은 단편을 썼었고 그 뒤「인형의 집을 나와서」같은 장편도 썼으나 그 때도 나는 씨의 소설의 독자는 아니었따. 씨는 그 때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내가 소속해 있던 단체 사람들과 곧잘 논쟁을 하였고 시비를 걸었다. 설왕설래하는 논설의 주지는 어찌 되었건 물론 나의 감정도 그리 순평(順平)치는 못하였다. 그러다가「탁류」가 신문에 연재되는 것을 읽기 시작하였다. 처음은 어떻게 쓰나 보자고 읽기 시작했던 것이 그만 꽉 붙들고 버렸고 사실 인즉슨 그 때부터 나는 채만식 문학의 애독자의 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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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가 연재될 때에 나는 한창 자기 고발 문학이라고 내성 세계에 빠져서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나는 ‘풍속’을 내걸고 나의 문학의 타개책을 꿈꾸었는데 그 때는 「탁류」가 반 이상 게재되어 버린 뒤었다. 미처 소설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나는 곧 어떤 잡지에 문학 비평으로「세태, 풍속, 모랄」이란 제목을 걸고「탁류」에 대한 소감을 발표하였다. 이것과 비슷비슷한 시기에 다른 평론가의 한 사람이 또 이 소설을 박태원 씨의 것과 함께 합쳐서 세태소설, 외향소설 등으로 문제하였고 이어서 세태소설의 배격의 결론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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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 개인으로서는 세태소설이나 외향소설을 하나의 그릇된 조류라고 밀어 버릴 수도 도저히 없었다. 나의 자기고발문학이 내성적이고 체험적인 것인 바에는 그것을 질식시키지 않을 길이란 이것과 외향과의 통일에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최초의 장편소설을 쓰기 전후하여 표방한 로만개조론은 세태를 풍속에까지 높여서 사실의 가운데서‘모랄’을 살리자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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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계로 해서 나는 「탁류」에 대해서 실로 내 자신의 소설에 대하여 운위한 양의 십여 배를 수작질하였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주장을 밑받치는 하나의 구체적 자료가 되었다. 채씨가 본시 좀 깔끔한 친구여서 가끔 개성서 삽상(颯爽)한 맵시를 하고 상경하면“여보, 남의 작품을 그렇게 썰고 지지고 볶고…… 그래 그런 법이 있단 말이요?”하고, 그러면서도 의(誼)좋게 커피를 마시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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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지금 신문소설이라고 쓰고 있지만 우리 동료들로서 신문소설로 적당히 성공하면서 그래도 통속소설로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작품이 몇 편 있다면 「탁류」 같은 것이 그 대표는 아닌가 생각한다. 저라도 사투리를 간간이 섞어가면서 묘미 있는 설화체를 가지고 사회 세태를 그려나가는 채씨의 재주란 나 같은 자도 가끔 부러워 마지않지만 그러나 아무도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천하일품이다. 그러면서 건강하고 명랑한 작가의 주관은 탁하지 않은 흐름으로서 힘차게 이 소설을 관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남승재라는 구수한 청년을 보라! 그리고 또 계봉이라는 처녀의 명랑하게 까불어샀는 그 건강한 조자(調子)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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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나는 내 자신이 이 소설에서 얻은 바가 큰 만큼 이러니 저러니 이론을 따질 것 없이 이 한 책을 영구히 나의 옆에다 두고 사랑하려 한다. 신문에 났던 것을 다시 고쳐 쓰고, 그러노라고 여간 정성을 쓰지 않았다. 책도 당당 7백여 혈(頁)로 장정은 정현웅 씨 것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리만큼 잘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이토록 사랑하니까 널리 강호 제씨의 일독을 권하여도 남부끄럽지 않고 꿀리지 않으리라 믿어서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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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 종로 2정목 박문서관판 정가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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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40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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