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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사(壯士)의 한(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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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7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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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사(壯士)의 한(恨)
 
 

1. 李浣[이완]의 生長[생장]

 
3
선조( 宣祖) 임진의 겪은 전고미문의 국난 때문에, 삼천리 강토가 한 덩어리 재로 화하고 국력이 극도로 쇠약하고, 파루폐옥만 덩더렇게 늘어 있는 참담한 형태를 이룬 지 수년.
 
4
선조대왕 승하하고, 그 아드님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는 이 용감한 청년왕은 무엇보다도 국도 부흥에 전력을 다하였다.
 
5
피폐된 국민의 힘으로는 좀 당하기 어렵기는 어려웠지만, 이 임금 치정 십사 년간에 이전 임진 때에 한 더미 재로 화하였던 국도는 다시 고루 거각이 즐비하게 되고 아름다운 서울로 부활하였다.
 
6
그러나 이 임금은 국도 부흥에 전력을 쓰느라고, 부왕시대부터 재상들 새에 차차 왕성하여 가는 당쟁(黨爭)을 종언하고 억압할 겨를이 없었다.
 
7
그 결과로서 재위 겨우 십사 년 뒤에, 재상들의 당쟁의 틈에 끼어서 용상에서 쫓겨나 배소(配所)의 달을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빠졌다.
 
8
그 왕의 뒤를 이어서 등극한 임금- 인조대왕-은 당쟁의 여파에 밀려서 등 극한 분이니만치, 당쟁을 철저히 탄압을 할 수가 없었다.
 
9
임진 국난의 뒤를 이어서 광해주 십사 년간의 거대한 토목사업 등으로 극도로 피폐한 이 강토는 영주(英主)의 출현을 기다리고 글겼지만, 이 임금도 또한 영주는 못 되는 분으로서, 정부는 밤낮 당쟁으로 울그락불그락 하고, 백성들은 그 아래 치어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10
이러한 시절에 서울서 팔십 리 되는 여주(驪州) 어떤 선비의 집에서 한 소년이 고이고이 자라고 있었다.
 
 
11
삭풍이 몸을 베는 겨울날. 사람들이 두꺼운 솜옷에 감겨서 방안에 꾹 박혀서도 춥다고 몸을 떠는 이 날. 이 집 뜰에서 발가숭이 도련님이 뜰에서 맨발로 뛰어다니면서 좋아라고 야단하고 있었다.
 
12
추운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 춥기보다 오히려 그 소년의 몸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에는 약간 땀까지 내배어 있었다.
 
13
이 도련님이 한창 뜰에서 장난이 심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이 뜰에 등장 하였다.
 
14
떠꺼머리 총각이었다. 나이가 삼십이 넘었음직한 건강한 머슴총각이었다.
 
15
머슴총각은 뜰에 나오다가 도련님이 벌거벗고 날뛰는 것을 보고 어른다 이 소년을 제지하였다-.
 
16
"아, 도련님, 이게 뭐요."
 
17
소년은 힐끗 머슴을 쳐다본 뿐 거기 개의치 않고 다시 뛰엄뛰기를 시작 하려 하였다. 그것을 보고 머슴은 한 걸음 나서면서 도련님의 손을 꽉 잡았다-.
 
18
"아 들어가세요."
 
19
"왜 이래?"
 
20
소년은 홱 손을 뿌리쳤다. 팔구 세 난 소년이 뿌리치는 바람에 삼십 총각이 몸을 비츨하였다.
 
21
머슴은 의외인 모양이었다. 한 번 비츨한 뒤에 다시 양팔을 펴서 도련님을 안으려 하였다.
 
22
그 안으려는 가슴을 소년은 떠밀었다. 소년의 힘이랄 수 없는 놀라운 힘 이었다. 머슴은 한 번 비츨은 뒤에, 덜썩 하니 주저앉았다.
 
23
그것을 보고 소년은 좋아라고 손뼉을 두드리며 웃었다.
 
 
24
방안에 앉아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은 소년의 아버지 이수일( 李守一) 이었다.
 
25
자기의 어린 아들이 여간 몸이 튼튼치 않은 것은 모르는 바도 아니었으되, 아직 겨우 팔구 세 된 어린 소년이 한 번 밀칠 때에 머슴이 덜컥 주저앉 은꼴을 보고, 수일의 얼굴에는 한순간 경탄의 표정이 흘렀다.
 
26
그러나 그 다음 순간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27
상한의 집안 자식이 힘깨나 쓴다면 장래 막벌이로라도 입에 풀칠 하기에는 걱정이 없겠는지라, 개의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있어서 양반의 집안에 힘깨나 쓰는 자식이 생겨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문제였다.
 
28
태조 건국 이래 이백 년, 그 새 변동된 몇 개의 왕위계승 문제에 있어서 힘 깨나 쓰는 양반들의 음모 때문에 여러번의 분규가 있었다. 태조 때에 벌써 방번 방석의 변이 생겼고, 그 뒤를 이어 정종 선위 사건이 있었고, 또그 뒤에 단종 퇴위 사건이 있었고, 중종 반정이 있었고, 또한 지금도 선왕 광해군을 내보내고 정통 아닌 임금이 지존의 자리에 있지 않은가. 그러한 변동이 있을 때마다, 꽤 힘깨나 있는 선비며 힘깨나 있는 선비들이 그 주 동자가 되었다.
 
29
그런지라, 정부에서는 선비의 집안에 힘깨나 있는 자제가 있는 것을 매우 꺼리었다. 거탓하면 역모라 하여 잡아 죽이고 하였다.
 
30
그런 시절이니만치 이수일은 자기의 아들의 힘이 너무도 센 것을, 도리어 내심 근심하였다.
 
31
그로부터 수일 후, 이 소년은 아버지의 엄명으로,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어떤 이인(異人)에게 공부를 하러 갔다.
 
32
말하자면 첫째로 힘깨나 있는 점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요, 둘째로는, 이 소년답지 않은 놀라운 힘을 선도(善導)하여, 장차 큰 사람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33
보통 아이들로 말하자면 아직 응석이나 부리고 떼거리나 쓸 어린 몸으로서,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속리산 이인의 문하에 수학하기 수년, 그가 다시 부모에게로 돌아올 때는 열다섯이라는 아주 완숙한 소년이 된 때였다.
 
34
소년의 이름은 이완(李浣)이었다.
 
 
35
속리산 이인에게서 손오병법과 무술 등을 충분히 배우고 돌아온 이완을, 아버지는 다시 감금하다시피 하고 집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36
그러나, 소년의 방분한 심경은 집에 박혀서 글이나 읽고 있기에는 너무도 자유 방분하였다.
 
37
그는 아버지의 눈을 기어서 나날이 활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서 사냥을 하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다시 다른 산으로, 달음박질하며 바위를 굴리며 시내를 뛰어넘으며 속에 넘치는 힘을 삭이고 있었다.
 
38
어떤날- 그것은 만물이 무거운 겨울 꿈에서 다시 소생하려는 아름다운 봄날 이었다. 완은 아질아질한 심사를 삭일 바이 없어서 또한 활을 둘러 메 고집에서 뛰쳐나섰다.
 
39
사냥을 하고자 함이었다.
 
40
산골로 등성이로, 눈을 두리번거리며 어디 날랜 짐승이나 없는가고 돌아다니 기는 하지만, 그의 최종의 목적은 사냥을 하는 데 있지 않았다. 사냥은 둘째요 사냥을 하느라고 따라다니는 그 호기로운 취미가 그의 목적이었다. 그런지라 웬만한 늙은 짐승깨는 만날지라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 가버렸다.
 
41
이리하여 아침에 떠난 그가, 산골짜기 산등성이를 편답하다가 한 마리 큼직한 사슴을 얻어 만난 것은 오정도 좀 지나서였다.
 
42
그는 처음에는 활로 사슴을 쏘려 하였다. 그러나 활을 메우려다가 홱 하니 활을 동댕이쳐 버리고 부러 사슴에게 알리기 위하여 발을 한 번 구르고 벼락 같이 고함을 지르면서 사슴 쪽으로 달려갔다.
 
43
사슴은 이완이 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은 자기 편으로 오는 사람을 보고, 천천히 뛰었다. 그러나 이완이 사슴의 가까이 이르자, 사슴도 속력을 다 하여 달아났다.
 
44
따르는 이완과 뛰는 사슴.
 
45
골짜기, 등성이 바위 틈, 숲 새로 경주는 시작되었다.
 
46
'이 놈, 네 뛰면 얼마나 뛸꼬?’
 
47
그러나 워낙 기운센 사슴이라 좀체 잡을 수가 없었다. 오정쯤부터 시작 된이 경주는 황혼이 거의 되도록 그냥 계속되었다. 사슴도 놀란 모양이었다. 생전에 이렇게 기운세게 지독히 따라오는 사람은 처음 본 것이었다.
 
48
차차 피곤하여졌다. 사슴의 속력이 처음보다 썩 더디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이완도 피곤하여서 더 속력을 내지를 못하였다. 허덕허덕 달아나는 사슴을, 이완도 허덕허덕 따라가고 있었다.
 
49
이리하여 얼마나 뛰었는지 어디까지나 왔는지 산골짜기 뫼틈 숲 새로만 따라다니던 이완은 어떤 깊숙한 골짜기에서 사슴의 종적을 잃어버렸다.
 
50
'?’
 
51
어디로 갔을까. 사면을 살펴보았다. 오른쪽도 숲이요 왼쪽도 숲이요 전후가 다 숲인 이곳에서 일단 잃어버린 사슴은 찾을 가망이 없었다.
 
52
"그 놈 지독히도 기운세군."
 
53
허허 한 번 웃은 뒤에 도로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온종일 사슴을 따라왔으니까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짐작컨대 몇백 리는 넉넉히 따라왔을 테이지만 여기가 과연 어디일까?
 
54
시장증도 나고 갈증도 나는 위에, 방향조차 알 수가 없어서 이완은 사슴을 잃은 뒤에 망연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55
그때에 기괴한 소리가 이 산곡간에 들렸다.
 
56
달랑달랑
 
57
달랑달랑
 
58
만약 다른 곳에서면 정녕코 말방울 소리지만 이 무인심산에 말방울 소리가 날 리가 없고, 말방울 소리가 아닐진대 무슨 소린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59
하여간 자연성(自然聲)이 아니요 사람이 내는 소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60
시장하고 목마른 위에 방향을 몰라서 걱정이던 이완은 그 소리를 따라서 정체를 알아보고자 발을 떼려 하였다.
 
61
그때였다. 산 모퉁이에서 한 마리의 나귀가 나타났다. 소리는 나귀목에 단 방울에서 나는 것이었다.
 
62
달랑달랑. 달랑달랑.
 
63
그 나귀에는 한 계집이 타고 있는 것이었다. 나이는 이십팔이나 이십구, 이런 산골은커녕 서울에 갖다 놓을지라도 다시 구하기 힘들 미녀였다.
 
64
달랑달랑. 달랑달랑.
 
65
나귀가 산모퉁이에서 나타나서 자기 앞을 지나서 저편으로 가기까지, 이완은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66
때는 봄철, 장소는 그렇지 않아도 사람이 그리운 무인심산. 이완의 나이는 한창 소년. 잠시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러다가 계집이 저편 쪽으로 사라지게 된 뒤에야 펄떡 정신을 차렸다. 차리면서 보니 계집의 뒤에는 열 서너 살 났을 계집종 하나가, 따라가는 것이었다.
 
67
이완은 황급히 몸을 뒤지었다. 필낭을 꺼내었다. 그리고 종이를 뒤져내어, 한 귀 글을 썼다.
 
 
68
'魂隨紅裝去[혼수홍장거] (혼은 그대를 따라가고)
69
身獨倚山立[신독기산립] (빈 몸집만 산에 기대어 섰네)’
 
 
70
이것을 써 가지고는 걸음을 빨리하여, 나귀 뒤를 따르는 계집종을 쫓아갔다.
 
71
"아나, 아나."
 
72
"?"
 
73
"이것 너의 아씨 갖다 드려라."
 
74
"네네."
 
75
계집종은 나귀를 따라가서 그 종이를 제 상전에게 드렸다. 종이를 받아 읽어 본 계집은 한 번 힐끗 뒤를 돌아보고는, 자기도 빨리 지필을 꺼내어 무엇을 써서 종에게 준다.
 
76
계집종이 가지고 온 편지를 이완은 호기심으로 펴보았다.
 
 
77
'驢破疑我重[려파의아중](나귀가 절룩거리기에 내가 무거운 줄 여겼더니)
78
添騎一人魂[첨기일인혼]( 사람의 혼 하나이 더 타서 그랬구려)’
 
 
79
이 글을 보고 이완은 아연하게 다시금 계집을 바라보았다. 그때는 계집의 나귀는 연방 달랑달랑 소리를 내며 산모퉁이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80
그날 밤 이완과 그 계집은 술상을 마주하고 앉게 되었다.
 
81
이 산골서도 가장 험준한 곳에 대궐같이 커다랗고 찬란하게 꾸민 집에, 계집은 종 하나와 단 둘이 있는 것이었다.
 
82
첫째로는 계집에게 흥미를 느끼고 둘째로는 시장증도 좀 심하여 계집의 뒤 를 따라오니까 계집도 흔연히 맞아들인 것이었다.
 
83
"여보세요. 보아하니 매우 시장하신 듯하시기에 주안을 드리기는 하지만, 이 것만 잡숫고 밤이 깊기 전에 이 집을 피하세요."
 
84
계집은 술을 따르면서 이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85
"그게 무슨 말이오? 무인심산에 밤중에 가기를 어디를 간단 말이오?"
 
86
"그래두 가셔야 합니다. 이 집은 도적의 굴로서 낮에는 나가서 길목을 지키다가 밤에는 돌아오니까, 돌아오기 전에 피하시지 않았다는 욕을 보십니다."
 
87
"욕?"
 
88
이완은 계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청춘의 술 기운도 좀 든 이완의 마음은 아름다운 계집의 얼굴에 차차 녹아들어 갔다.
 
89
"욕? 사내로 나서 깊은 산 외딴 집에서 미녀와 만났다가, 보지도 못 하고 쫓겨 나가는 이상의 욕이 어디 있담. 자 그러지 말고 한 잔 받으시오."
 
90
손을 잡으려 하였다.
 
91
계집은 질겁을 하며 손을 빼치려 하였으나, 이완의 억센 손은 어느덧 계집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92
"자, 좀 가까이 와요. 주안상은 가로 치우고."
 
93
술상을 밀며 계집을 끌어당겼다.
 
94
"아, 여보세요."
 
95
"여보세요가 뭐야. 자, 한 잔 받우."
 
96
"받기는 받겠지만 이 허리를 놓으세요."
 
97
"놓기도 하겠지만 술을 먼저 받우."
 
98
"이러다가 적괴가 오면 어쩝니까?"
 
99
"여보. 아무려면 의심을 안 받을 줄 알우? 어차피 의심받을 이상에야, 왜죄 없이 의심을 받는담. 자 죄를 집시다."
 
100
"놓으세요."
 
101
"못 놓아."
 
 
102
밤 자정이 지나서, 고요한 이 집에 별안간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103
계집이 화닥닥 이완의 품에서 뛰어나갔다.
 
104
"이를 어쩝니까. 적괴가 옵니다."
 
105
"오면 왔지."
 
106
"얼른 벽장에 숨으세요."
 
107
"장부 벽장에 숨는 법은 없어."
 
108
"아. 여보."
 
109
야단일 적에 문이 덜컥 열렸다.
 
110
완은 쳐다보았다. 키가 구 척 같은 험상궂은 자가 문에 썩 들어서다가, 아랫목에 앉아 있는 이완을 보고 깜짝 놀란다.
 
111
"웬 놈이냐?"
 
112
"행객이오."
 
113
"행객? 행객이 남의 내실에서 더구나 의관은 왜 끌렀담."
 
114
적괴는 둘러보았다. 아직 옷도 잘 정제하지 못한 계집이 발치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는 것을 보고 벌써 눈치를 채었다.
 
115
"야, 저 연놈을 묶어라."
 
116
적괴는 호령 한 마디에 뒤에 섰던 도적 십여 명이 달려들어서 이완과 계집을 붙들었다. 그리고 굵은 바로 묶어서 들보에 달아 놓았다.
 
117
이완은 고요히 묶이어 달리었다.
 
118
"연놈은 차차 처치하려니와 어서 술과 안주를 들여라. 시장하다."
 
119
적괴도 상당한 뱃심을 가진 사람인 모양이었다. 눈앞에 이완과 계집을 달아 맨 채 부하들을 시켜서 술을 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잡아온 짐승을 앞에 갖다 놓고 저녁 잔치를 열었다.
 
120
적괴에서 시작하여 술이 한 순배 다 돌고 다시 적괴가 대작을 들으려 할 때에 문득 천정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121
"이놈들. 너희가 아무리 무지막지한 도적놈들이기로서니 손님이 이 곳에 있는데 너희끼리만 먹는단 말이냐?"
 
122
들보에 달린 이완의 하는 말이었다.
 
123
적괴는 이완을 쳐다보았다.
 
124
"너도 먹으련?"
 
125
"엑 이놈. 술이란 음식은 지나가는 거지라도 먹이는 법이야. 같은 방에서 너희들 끼리만 먹는 무지한 놈들."
 
126
적괴는 잠시를 더 쳐다보다가, 술대접을 들어서 이완의 입에 갖다 대었다. 이완은 벌컥벌컥 들보에 달린 채 들이켰다.
 
127
"흥. 제법인걸. 안주도 먹으련?"
 
128
"주려무나."
 
129
적괴는 칼로 안주 한 점을 썩 잘라서 칼에 뀐 채 이완의 입에 갖다 대었다. 그것을 이완은 턱 받아 먹었다.
 
130
그것까지 본 뒤에는 적괴는 그만 가슴이 송구하여진 모양이었다.
 
131
"야 너 저 어른을 얼른 끌러 내려드려라."
 
132
이리하여 끄른 뒤에 결박졌던 팔다리를 주무르려 할 때에 이완은 가볍게 거절 하였다.
 
133
"자 어서 술이나 먹세. 어 술맛 좋은걸."
 
134
태연히 나앉는 이완의 앞에 적괴는 한 걸음 물러앉으며 꿇어 엎드렸다.
 
135
"소인은 유광풍(柳狂風)이라는 도적 괴수올시다. 존함은 누구시온지?"
 
136
"나는 이완이라는 사람이오. 아직 등제도 못한 백면(白面)이요."
 
137
"알아뵙지 못하고 무례한 짓을 했읍니다."
 
138
"한데 왜 도적질을 하오? 보아하니 녹록치 않은 사람이, 하필 해먹을 것이 없어서 도적질을 한담?"
 
139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읍니다."
 
140
"그게 무슨 말이오? 국가 다난한 이때에 그만한 사람으로 왜 초야에 묻혀서, 더구나 도적질로 생애를 삼는담."
 
141
"근본이 상한이라 나라에서 써 주시지를 않습니다."
 
142
"안 써?"
 
143
"네. 안써줍니다. 그러나 아직껏 불의한 도적질은 하지 않았읍니다."
 
144
"허. 국가에 인물이 없어 쩔쩔매는 이때에, 써 주지 않단 무슨 말이오?"
 
145
"안 써 줍니다. 아직 연소하셔서 모르시는 모양이지만, 근본이 없으면 날고기는 재간이 있어도 쓸 곳이 없읍니다."
 
146
"알 수 없는 일이오."
 
147
그날 밤 계집까지 들보에서 내려놓고, 주객 간에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148
이튿날, 적괴의 간곡한 전별을 받으면서 거기서 나와서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이완은 어린 머리를 연방 기울이고 적괴의 하던 말을 속으로 되풀이 하여 보았다.
 
149
'근본이 없으면 날고 기는 재간이 있을지라도 나라에서 써 주지 않습니다.’
 
150
-옳다. 만약 내가 장차 다행히 등제를 하여 나라의 귀한 자리에 앉는 때가 있다면, 그때 이 악풍을 씻어 버리자. 유광풍! 유광풍! 보아하니 녹록치 않은 기품의 남아어늘, 어이 나라에서는 그를 받아 주지 않는가. 국가 다난한 이 때에 유용한 인물을 어찌하여 그냥 초야에 묻어 두는가.
 
151
이 이완은 그로부터 이 년 뒤에 아직 소년의 몸으로서 무과에 급제를 하였다.
 
 
 

2. 丙子亂後[병자란후]

 
153
임진년의 대곤란을 겪고 그 상처가 아직 낫지 않은 이 강토에, 임진년으로부터 사십 수년 후 병자년에 다시 놀라운 참변은 내렸다.
 
154
인조대왕 십사년 병자 섣달- 온 백성은 한창 설 차리기에 바쁜 이때에, 청태종의 이끈 군사 십삼만은 압록강을 건너서서 삽시간에 경성에까지 쳐 들어왔다.
 
155
조선의 군신들은, 이 세상에 명나라 하나만 있고 청나라의 존재는 오랑캐라 하여 인식치 않으렬 동안에, 어느덧 대성한 청나라는 조선을 복종케 하기 위하여 원정의 군사를 일으킨 것이었다.
 
156
임짐란을 겪은 지 사십사 년- 만약 이 땅의 군신이 좀 정신이 있었더면 무엇보다도 국력 배양에 힘썼을 것이어늘, 임진란을 겪고 난 뒤에는 인제는 다시 태평세월이라고 잠꼬대만 높을 때에 이 변란이 생겨난 것이었다.
 
157
청병 십삼만은 의주를 지나서 평영을 넘어서 평산 장단 등을 삽시간에 지나, 어느덧 경성에까지 이르렀다.
 
158
여기서 놀란 조선 군신들은 이를 막든가 싸우든가 할 수는 없이, 우선 세자와 왕자며 비빈 및 대신의 부인들은 강화로 피난을 보내고, 왕 이하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올라갔다.
 
159
그때의 생각으로는 강화는 상륙하기 힘든 섬이라 마음놓이고, 남한산은 깍아 세운 듯한 산이라 정병이 올라 못 오리라고, 그만하면 튼튼하다 하였다.
 
160
그러나 그것은 이 군신의 오계였다. 청병이 산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산을 에워싸고 산성의 내왕을 끊어 버려서 산성은 고립되어 버렸다. 그리고 상륙 치 못하리라 했던 강화에 청병은 어느덧 상륙하여, 세자와 봉림대군 이하를 모두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161
인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고립된 산성에는 식량도 차차 모자라는 위에 세자와 왕자와 뭇 대신의 처자들까지 모두 청병에게 사로잡히고 보니, 항복 할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162
이리하여 경축년 아직 겨울 바람이 쏘는 듯한데, 왕은 용포로 눈물을 씻으면서 산성에서 내려서 청진에 이르렀다.
 
163
청진에서, 등극한 이래 아직껏 남면(南面) 이외에는 앉아 본 일이 없는 이 왕이, 얼음장 같은 맨땅에 북면하고 꿇어앉아서 청국 태종을 절하여 보았다.
 
164
'일생 능양군으로 고이고이 보냈던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이 치욕 은숙( 叔- 광해군)께 맡기고….’
 
165
후일 신임하는 대신에게 이렇게 탄식하였으니만치, 이 날의 이 치욕은 왕의 가슴에 사모쳤다.
 
166
아직껏 추운 것을 모르고 지낸 왕이. 온종일 찬 땅에 꿇어 앉았다가 유시( 酉時)에 겨우 서울로 환가를 하였다. 통화문(通化門)으로 하여 창경궁으로 환가하여 보니, 그 새 달포를 청병이 다녀간 뒤라, 온 성안은 여지없이 약탈 되어 대신이며 하인배들까지도 대궐에서 그 밤을 지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167
이 굴욕적 화의를 끝내고 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병에게 볼모로 잡혀 심양으로 갔다.
 
168
그 뒤 십삼 년을 지나서 기축년에 왕은 한많은 일생을 끝막음하였다.
 
169
일찍이 시정에 배회하는 한낱 왕손으로 지내다가, 김류, 이귀(金瑬 李貴) 등의 추대한 바 되어 삼촌 광해를 귀양보내고 왕위에 올라서, 불안하고 고생 된 왕위를 누리기 이십칠 년- 일국의 지존의 몸으로서 딴 나라 사람의 앞에 맨땅에 꿇어앉아서 절하는 억분의 일까지 겪고 승하한 것이었다.
 
170
이 임금의 뒤를 당연히 이을 세자는, 볼모로 심양에 가 있는 동안 그 심로로 득병하여 세상떠나고, 그때 함께 심양에 잡혀 갔던 봉림대군이 부왕 승하의 뒤를 이어서 보위를 올랐다.
 
171
봉림대군-. 효종(孝宗)이라 일컫는 분이다.
 
172
일찌기 몸소 청군에 잡혀서 부왕이 맨땅에 꿇어 청태종을 절할 때에 흘리던 눈물을 보고, 뒤이어 또한 몸소 심양에까지 잡혀가서 갖은 후욕을 다 맛보고, 경애하던 형 세자까지 그 때문에 잃어버려서, 청국에 대하여 철천지한을 품은 봉림대군 인젠 변하여 삼천리 강토의 지존이었다.
 
 
173
이 왕이 등극한 지 도일 년 이 년 삼 년 오 년.
 
174
왕 즉위 초에 때의 거유(巨儒) 송시열(宋時烈)을 불러서 장령을 삼았다.
 
175
그러나 그뿐이었다.
 
176
청국에 대하여 철천지한을 품은 이가 임금이 되었으매, 즉시로 북벌( 北伐)을 시작할 줄로 누구든 보았다. 그랬는데 불고하고 왕은 즉위하여 북벌의 북 소리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송시열을 불러서 정치를 보좌케 하고, 일단 멈추었던 대동법(大同法)을 다시 시행하고 수차(水車)를 장려하여 농사 관개에 쓰게 하는 등, 내정 충실에만 힘을 썼다.
 
177
이리하여 무위히 세월이 흐르기를 오 년- 갑오년에 이르러서 웬만치 국고가 충실히 된 뒤에 비로소 삼남 각도에 오영장을 두었다.
 
178
그 어느날 왕은 야반에 갑자기 침전에서 무감을 불렀다.
 
179
야반에 급한 어명이라 황황히 무감이 달려서 뜰 아래 국궁하고 영을 기다릴 때에, 왕은 손짓으로 무감을 툇마루 가까이까지 불렀다. 그리고 몸소 몸 을 절반만치 문 밖으로 내밀고 무감의 귀에 무슨 분부를 내렸다.
 
180
그 밤 자정이 훨씬 지나서 대궐 별감 십여 명은 말을 달려서, 장안 각 무신( 武臣) 의 집으로 향하였다.
 
181
"지금 예궐하라시는 분부가 곕시오."
 
182
이 분부를 들은 무신들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 아닌밤중에 갑자기 대궐에서 부르는지라 황급히 옷을 입고 혹은 말로 혹은 가마로 대궐로 달려들어 왔다.
 
183
그러나 그들이 대궐에 들어서자마자, 사면에서 빗발치듯 살이 날아와서 들어서는 무신은 모두 이 불의의 살에 맞아서 거꾸러졌다. 살에 촉은 없었다.
 
184
이러한 가운데 단지 한 사람, 빗발치는 살도 모르는 듯이, 손을 앞으로 읍하고 국궁한 채로 정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185
그때 용상 아래 읍하고 섰던 한 내관의 소리가 울렸다-.
 
186
"누군가는 하문이 곕시오."
 
187
그 소리에 응 하여,
 
188
"삼도 도통사 이완으로 여쭈우."
 
189
우렁찬 대답은 마치 대궐이 드렁드렁 울릴 듯이 터져 나왔다.
 
190
"오오."
 
191
그것은 내관의 소리가 아니었다. 용상 위의 왕의 옥음이었다.
 
192
오오, 한 마디뿐 왕은 용상에서 내렸다. 부축하려는 내관을 떼밀었다. 몸소 옥보를 정전 밖으로 옮겼다.
 
193
"전하. 야밤의 급명, 어떤 사변이온지?"
 
194
"저 빗발치는 살은?"
 
195
"전하!"
 
196
이완은 의대 앞자락을 약간 들쳐보았다. 겉은 예사 의대나마 그 속에는 든든한 갑옷을 두른 것이었다.
 
197
"그 갑옷은?"
 
198
"네이. 야밤에 지급 예궐하랍시는 어명, 범상치 않은 일이옵기 총 망중 이오나 속에 무장을 하왔읍니다."
 
199
"오오. 국가의 동량."
 
200
왕은 몸소 이완을 붙들었다. 그리고 몸소 인도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201
그 날 왕은 이완과 단 둘이서, 멀리 내관을 번세우고 밀의로써 밤을 새웠다. 이튿날 이완은 특지로 훈련대장의 인부를 띠게 되었다.
 
202
그 새 오 년간을 왕이 마음속 깊이 감추고 오로지 그 준비행동으로서, 국력 충실에만 힘쓰던 궁극의 목적-북벌(北伐)은 드디어 공포되었다.
 
203
"그 새 오 년간을 두고 보아야 이 대임을 맡을 장신(將臣)은 대장 한 사람 밖에 없었소. 그 안식이 틀리지 않아 그날 밤 예궐할 때에 총 망중에도 몸단속을 잊지 않은 점은, 가히 대임을 넉넉히 맡을 만하니 나를 도와서 병자의 치욕을 씻어 주시오."
 
204
왕이 손을 잡고 간곡히 이렇게 당부할 때에, 이완은 눈물을 쫙쫙 흘리며 이 성지에 보답키로 맹세하였다.
 
205
왕과 이완이 의논한 결과, 전국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 육백 명을 모여들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술을 연습시키어서 장차 북벌의 웅지를 펼 때에 분대 지휘자로 삼고자 준비하였다.
 
206
그러는 동안 문득 이 대장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지금부터 약 이십 년 전 평안도 어떤 산골에서 만났던 유광풍이라는 도적의 일이었다.
 
207
그때에 녹록치 않던 그 인물이 아직 살아 있을까. 살아 있으면 지금 국가 다난하고 인재 부족한 이때에 그런 호걸을 얻어올리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랴. 나라가 제도가 고약하여, 아까운 재주를 품고도 근본이 초라하기 때문에 생을 진토에 묻혀서 지내야 할 그 호걸을 생각할 때에, 만약 유 광풍으로 아직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구하여 내어서 왕의 칙사를 받고 유용하게 쓰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208
그러한 어떤날 문득 평안감사에게서 한 장 장계가 올라왔다. 그것은 평안도 어떤 산골에서 살인 강도 흉한인 유광풍이라는 화적과, 그 부하 삼십 여명을 잡아서 그 죄상이 명백하니 효수를 하겠다는 것이다.
 
209
이 소식에 이 대장은 깜짝 뛰었다. 즉시로 대궐로 달려 들어갔다.
 
210
"전하. 법을 굽힐 수는 없읍지만 형률(刑律)을 연기할 수는 있는 법. 연기 하여 그동안 그 죄인이 국가에 훈공이 생기면 전죄를 용서할 수도 있을것이옵니다. 국가 다난하고 인재 부족한 이때에 한 인물인들 허수이 없이하리까? 형률을 연기하시도록 처분하시면 장차 국가에 어떤 공로를 나타낼지도 모르겠사오니, 신을 보셔서 수년간 형을 연기해 주십사."
 
211
이전 산골서 만났던 때의 일을 모두 아뢰고, 왕께 간청하여 형의 연기를 받고 유광풍을 서울로 불러올렸다.
 
212
적굴에 있을 때는 한낱 적괴에 지나지 못하였지만, 큰 소임을 맡기고 보니지 인 용이 겸비한 쉽잖은 명장이었다.
 
213
영주의 아래서 이 대장은 유광풍이며 박택이라는 떠꺼머리 총각 출신의 장사며 를 좌우에 두고, 금군 육백 명을 주야를 불문하고 훈련하여, 장차 훈련 끝나는 날에는 병자년 원수를 갚으려 그 준비에 망살하였다.
 
214
무신에게는 군사훈련을 시키는 일방, 임금은 또한 정치에 몰두하고 장차 북벌 할 때라도 그 군량이 부족하거나 국력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기 위 하여 각 방면으로 노심하였다.
 
215
갑오년에 드디어 전제(錢制)를 시행하였다. 이전까지는 베로써 서로 바꾸어서 물물교환을 하던 것을 장차 웅지를 갖고 있는 왕은 이런 불편한 제도를 그냥 두었다가는 큰 일을 할 때에 지장이 되겠으므로 당전(唐錢) 십 오 만문( 文)을 사다가 먼저 평양 안주 등에 사용케 하여 보고, 그 결과가 양호 하므로 훈련도감에 명하여 돈을 만들어 퍼뜨렸다. 돈으로써 바꿀 물가( 物價) 를 작정하여 그 낯선 쇳덩이가 퍼지기 편토록 하였다.
 
216
옷제도가 너무도 거추장스럽다 하여 경편하여 가볍도록 개량케 하였다. 말 하자면 풍속제도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세밀히 관찰하여 개량하였다. 그 개량이라는 것은 장차 북벌시에 유리토록 하자는 복선에서 나온 것이었다.
 
217
전국에 금은광을 장려하여 거기서 나는 금은을 모두 거두어 올리어, 바둑돌 모양으로 지워 두어서 이도 장래 군용금을 쓰려 하였다(소위 금 바둑 쇠라는 것으로서 대원군 집정초까지 그냥 곱다랗게 보관되어 있다가 경복궁 대궐 영조에 쓰이었다).
 
218
이렇듯 일에서 십까지 모두 왕의 마음에 있는 바는 북벌뿐이요, 무슨 일이든 모두가 북벌에 이용하자는 복선에서 나온 것이었다. 진실로 한 개 복수의 덩어리로 화하였다. 자나깨나 누우나 앉으나 생각하는 바 단 한 가지는 북벌이요, 어떻게 하면 북벌에 성공을 하여 저 거대한 청국을 꺼꾸러뜨리 고조선의 광휘를 천하에 나타내나 하는 점이었다.
 
 
219
이 임금의 아래서 이완 대장이 지휘하는 금군 육백 명.
 
220
그 육백 명 중에 그중 힘이며 무술이 빼나서 초관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박성 쓰는 사람이 있었다.
 
 
 

3. 壯士[장사]의 恨[한]

 
222
박 초관의 집은 남한산 위에 있었다.
 
223
금군 육백 명에서 뽑혀서 교관이 되니만치 무술에도 능하였거니와, 그 힘이 또한 장사였다. 다른 금군들은 조련장 근처에 거처하였으나 박 초관은 꼭 남한산 꼭대기 제 집에서 다녔다.
 
224
아침 일찌기 들어와서 진일 조련을 하다가 조련을 끝내고 남한산으로 돌아가면 아직도 햇발이 그냥 남아 있도록, 걸음도 빠르고 기운도 센 사람 이었다. 그 박 초관이 웬 셈인지 한 칠팔 일간을 조련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225
매일 몸소 혹은 박 초관을 시켜서 금군들을 조련시키던 이 대장은 수 일간 박 초관이 보이지 않으므로 몸에 탈이나 났나 하고 근심되어 사람을 보내 서남 한산 꼭대기 박 초관의 집에 가서 알아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그 집에서 의외의 소식이 왔다.
 
226
일전 웬 사람이 하나가 홀연히 박 초관을 찾아와서 빚어 둔 술 한 독을 다 먹고, 싱싱한 소 한 마리 죽여 먹고, 그 밤으로 함께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 다 하는 것이었다.
 
227
"웬일일까?"
 
228
근심도 되고 염려도 되어 이 대장도 얼마 마음을 쓰고 있었는데, 그 박 초관이 실종된 지 여드레가 지나서야 초연히 돌아왔다.
 
229
돌아와서는 즉시로 이 대장께 조용히 좀 뵙겠다고 청하였다.
 
230
궁금하던 차이라 대장도 사람들을 물리치고 박 초관과 조용히 만났다.
 
231
그 박 초관의 말에 의지하건대 그의 실종되었던 전말은 이러하였다.
 
 
232
그 날(실종된 날) 박 초관은 좀 일찌기 집으로 돌아가서 어제 갈다가 남은 밭을 갈고 있었다.
 
233
"이랴! 이랴!"
 
234
소를 몰아서 밭을 갈다가 박 초관은 무심히 눈을 구을려서 저편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235
"?"
 
236
웬 패랭이를 젖혀 쓴 장정 하나이 터벅터벅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것 이었다. 박 초관이 놀란 것은 그 장정의 걸음이 지독히도 빠른 것이었다.
 
237
그다지 바삐 걷는 듯싶지 않게 터벅터벅 걷는 모양이나 휙휙 마치 나는 듯 하였다.
 
238
박 초관 자기도 어지간히 걸음이 빠른 사람이었으나, 산 아래 길가는 그 장정에 비기건대 아무것도 아니었다.
 
239
휙휙 하더니 어느덧 저편 산모퉁이에서 남한산 아래 다다랐다. 거기서 잠깐 안 보이는 듯하더니, 별안간 이십 리의 남한산 꼭대기에 썩 올라서는 것 이었다. 올라서서는 두리번거리다가 박 초관이 밭가는 것을 보고 이리로 왔다.
 
240
"여보슈. 여보슈."
 
241
"네?"
 
242
"이 근처에 박 초관이라는 이가 삽니까?"
 
243
무시무시하였다. 그래서 박 초관은 어름어름 하여 버렸다.
 
244
"네. 삽니다."
 
245
"어디 사오?"
 
246
"네. 저기 살지만 오늘은 번에 들어가서 아직 안 나왔소이다."
 
247
"안 나왔어요? 음. 일껏 만나러 왔더니 늦더라도 오늘철로 나오기를 하겠지요."
 
248
"글쎄요."
 
249
"에 거 안됐구. 그럼 기다리지."
 
250
덜컥 거기 걸어앉고 만다. 보기에 좀체 박 초관을 만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251
여기서 박 초관은 정면으로 부딪쳐 보기로 하였다-.
 
252
"여보시우."
 
253
"네?"
 
254
"그-저."
 
255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256
"저 헤헤, 그 박 초관은 왜 만나시려고 그러우?"
 
257
"아니 좀 만나서 의논할 일도 있구."
 
258
"헤헤, 그 내가 그 박 초관인데요."
 
259
장정은 눈을 번쩍 들었다. 한 번 세 번 초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260
그런 뒤에 입을 열었다-.
 
261
"노형이 박 초관? 금군에 초관으로 있는 이 말이외다."
 
262
"네. 그렇소이다."
 
263
"노형이 그 힘깨나 쓴다는 사람이오?"
 
264
"좀 그 네 조끔."
 
265
"힘이 얼마나 하우? 저."
 
266
장정은 밭 갈다 서 있는 소를 가리켰다-.
 
267
"저 쇠꼬리를 잡고 몇 번이나 휘두르겠소?"
 
268
무얼? 끔찍한 주문이었다. 박 초관은 이 무시무시한 장정을 그냥 어름거려 돌려 보내려 하였다.
 
269
"에이 여보. 그게 무슨 말이오? 농담도 분수가 있지?"
 
270
"농?"
 
271
장정은 눈을 불끈하였다.
 
272
"농이란 무엇이오? 내가 농을 하러 부러 대구서 여기까지 온단 말이오?"
 
273
"대구서 왔소? 언제 대구서 떠났소."
 
274
"언제란, 칠백 리 될까말까 하는 길을 며칠씩 다니겠소? 자, 어디 그 쇠 꼬리를 잡고 한번 둘러보오."
 
275
강압적이었다. 슬그머니 눈을 들어 보니 이 명령에 복종치 않았다가는 시비라도 걸 모양이었다. 장정의 주먹을 몰래 보니, 마치 고목등걸과 같은 것이 그 주먹으로 한 번 부시면 쇠라도 부서질 듯하였다.
 
276
피할 수도 없고 그러니 또한 쇠꼬리를 잡고 소가 둘러질는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안 하다가는 시비를 받을 모양이요, 또한 생각해 보면 자기도 힘 깨나 쓰노라는 인물이라, 아직 시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될 듯 싶기도 하였다. 더우기 눈치로 보아서 저 녀석 자기는 못할 노릇을 박 초관에 시켜서 등떠보려는 듯싶기도 하여서 한번 둘러보아 둘러지면 저 놈의 간담을 서늘케 하리라는 생각도 들고, 또한 피할 수 없고 하여 드디어 박 초관은 이 자신 없는 노릇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277
박 초관은 소에게로 가까이 갔다. 그리고 파리를 쫓느라고 연방 내 두르는 쇠 꼬리를 잡아서 손에 힘껏 감아 쥐었다. 그런 뒤에 한 번 고함지르며 휙 오른 팔을 높이 둘렀다.
 
278
박 초관은 어떻게 되었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좌우간 한 번 소가 머리 위로 넘기는 넘었다. 소가 머리 위를 넘어서 쾅하니 다시 땅으로 내려질 때에 박 초관은 장한 듯이 장정을 향하여 돌아섰다.
 
279
"자. 둘렀소. 그래 그만 것을 못 두른담. 그 놈의 소 요즈음 잘 먹지를 않더니 거쁜하군."
 
280
마치 늘 소의 중량을 보는 듯이 말하였다. 장정이 이것을 보고,
 
281
"한 번만 하고 그만두우?" 하고 물었다.
 
282
"한 번 한 일을 두 번이라구 못할라구. 어디 노형 한번 둘러보오."
 
283
"그럽시다."
 
284
장정은 소에게 갔다. 꼬리를 잡았다. 장정이 꼬리를 잡고 둘를 때에 소는 마치 바람개비와 같이 홱홱 공중에 둥그러미를 그리면서 돌아갔다. 그러다가 장정이 꼬리를 놓아 주다가 그냥 그 자리에 내려져서 한 번 발버둥이 치고 죽어 버렸다.
 
285
박초관은 가슴이 떨렸다. 소 죽은 것이 아깝다든가 그런 생각을 할 여 지도 없었다. 그 장정의 경악할 만한 괴력에 얼이 빠진 것이었다.
 
286
가슴이 떨리게 된 박 초관은 그 장정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장정을 데리 고집으로 돌아와서 빚어둔 술 한 독을 그 죽은 소고기를 안주삼아 다 먹었다.
 
287
속으로는 전전긍긍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체하고 어서 술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 시간만 고대하는 데 술이 끝나고 자리의 준비를 하려 할 때에 장정 은 박 초관을 찾았다-.
 
288
"여보시우."
 
289
"어? 왜 그러우."
 
290
"나허구 어디 잠깐 다녀옵시다."
 
291
"어 취해. 밝아서 갑시다. 나는 자야겠는걸."
 
292
"가자면 어서 가기나 합시다."
 
293
탁 내어던지는 이 말에 더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 놈의 힘을 짐작 하는지라 말을 거스르기가 무서웠다. 무시무시한 것을 박 초관은 주섬주섬 패랭이를 뒤집어쓰고 장정의 뒤를 따라 나섰다.
 
294
"여보."
 
295
"네."
 
296
부를 적마다 가슴이 뜨끔뜨끔 하였다. 금방 주먹이 칵 나오는 듯하였다.
 
297
"좀 빨리 가야겠는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내 발자국을 잃지 말고 따라오시우."
 
298
"앞서 가시우."
 
299
"발자국을 잃었다는 안 됩니다. 자 따라오시오."
 
300
한 마디 내어 던지고는 휘죽휘죽 걷기 시작하였다.
 
301
장정은 보통 조금 빠른 걸음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자칫하면 뒤를 잃을 듯싶었다. 박 초관은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이 벌겋게 되어 그 발자국을 놓치지 않으려 따라갔다. 한 번만 눈깜빡하면 발자국을 잃을 모양이요 잃었다는 그 장정에게 어떤 욕을 볼지 몰라서,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 써서 따라갔다. 씽씽 귓가로 달아나는 바람소리로 보아서 얼마나 빨리 가는지 스스로 혀를 챌 지경이었다.
 
302
이리하여 언덕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서 따라가기를 수식경, 앞서가는 장정이 멈칫 발을 멈출 때에 뒤따르던 박 초관은 기진맥진하여 탁 장정의 가슴에 쓰러져 안겼다.
 
303
"여보시우."
 
304
"어? 인젠 다 왔소."
 
305
"다 왔소."
 
306
"여기가 어디요?"
 
307
"대구 감영이오."
 
308
무얼? 칠백 리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씽씽 귓가로 지나던 바람은 경기 충청을 꿈결같이 지나서 어느덧 대구 감영까지 이른 것이었다.
 
309
이 거짓말 같은 사실 앞에 박 초관이 망연히 서 있을 동안에 장정은 지고 온 괴나리 봇짐을 부석부석 풀었다. 그리고 거기서 쇠몽치 두 개를 꺼내어하나는 자기가 가지고 하나는 박 초관에게 맡겼다.
 
310
"여보슈. 박 초관. 이 쇠몽치를 가지고 여기 가만 지켜서 있다가 한참 뒤에 안에서 내가 박 초관 하고 부르면 이 담을 후더덕 뛰어넘어 들어오시오. 그러면 그때 나는 웬 늙은이 하나와 싸움을 하고 있을 테니까 뒤로 돌아가서 그 늙은이의 벗어진 대가리를 힘껏 이 쇠몽치로 때리시오."
 
311
까닭을 재쳐 물을 겨를도 없이 장정은 그 앞의 담을 후더덕 뛰어넘어 들어갔다.
 
312
이제나 저제나 박 초관은 담 벽에 서서 부르는 소리만 기다리고 있었다. 도망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으나, 뛰다가는 뒤에서 장정놈이 쇠몽치로 제 대가리를 부술 것 같아서 뛰지도 못하고 눈이 멀진멀진 기다리고 있었다.
 
313
한 각- 두 각- 먼 데 닭은 첫해를 울고 둘쨋홰를 울고- 밤을 깊을 대로 깊었다가 인젠 차차 먼동이 터오려는 데도 불구하고 부르는 소리는 그냥 나지 않았다.
 
314
기다리다가 궁금증이 난 박 초관은 자기도 후더덕 담을 넘어 들어가서 어된 영문인지 알아보려 하였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깜깜하고 텡빈 집은 다만 한없이 고요할 뿐이었다.
 
315
아까 분명히 이 안에 장정이 들어갔는지라, 어디든 있기는 있을 것이다. 박 초관은 집 뒤에 후당으로 돌아갔다.
 
316
후원에 자그마한 정자가 있었다. 그 안에 화광이 깜틀거리고 있었다. 박초관은 발소리를 감추어 가지고 그 정자 가까이 갔다. 그러매 그 안에서 새 어나 오는 소리.
 
317
"고얀 놈도 있지. 그래 그 놈이 쇠몽치를 가지고 살기가 등등해서 내게 덤벼든 담. 해괴한 일도 다 있군."
 
318
무얼? 그 말로 듣자면 장정이 쇠몽치를 가지고 예까지 들어왔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그러면 쇠몽치를 가지고 들어왔던 장정은 어디 갔나. 살기가 등등해서 쇠몽치를 가지고 장정이 달려들었는데도 도리어 장정이 없어지고 그냥 남아 있는 이 방안의 주인은 어떤 인물인가. 너무도 치가 떨리는 방안의 소리에 박 초관은 그만 질겁을 하여 그 자리를 도망하려 하였다.
 
319
그러나 도망하려고 주춤할 때에 그 기척이 안에 들린 모양이었다. 벼락같이 장짓문이 열렸다. 그리고 거기서는 육십이 훨씬 넘었을 노인이 머리를 쑥 내밀며 산천이 울리는 소리로,
 
320
"거기 누가 있느냐." 고 호령을 하였다.
 
321
이 호령에 박 초관은 전신이 마비되었다. 쇠몽치는 그냥 든 채 그 자리에 엉거주춤하여 버렸다. 그 꼴이 안에서 비치는 화광 앞에 폭로되었다.
 
322
"웬 놈이냐. 너도 쇠몽치를 가지었구나."
 
323
"네…."
 
324
"네. 서울 사는 박 아무개올시다."
 
325
"서울 사는 박 모라! 무얼하러 왔으며 쇠몽치는 무에냐."
 
326
"네…저…."
 
327
여기서 박 초관은 노인의 앞에 지난 일을 죄 이야기하였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노인은 옆에 있는 한 젊은 계집을 한 번 돌아보고,
 
328
"참 고약한 놈도 있지. 너 저기를 보아라." 하고 가리키는 곳을 보매 거기는 아까의 장정이 허리가 부러져서 넘어져 있는 것이었다.
 
329
노인은 박 초관에게 그 장정의 내력을 설명하였다.
 
330
그 장정은 쇠돌이라는 사람으로서, 술과 색과 투전으로 세월을 보내는 불량한 사람이었다. 그 위에 힘깨나 있노라고 행패가 자심하고, 술집에 예쁜 계집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못살게 구는 인물인데 마침 어느 술집의 어떤 계집에게 반하여, 만날 못살게 시달렸지만 계집은 쇠돌을 싫어하여 피하다 못 해 마지막에는 이 노인에게 와서 보호를 청하였다.
 
331
노인의 날개 아래 들어와 숨은 계집을, 쇠돌은 그냥 연방 성화시켰으나 노인은 쇠돌의 인물보다도 그 완력을 아껴서 늘 단지 준절히 꾸중만 하여 돌려 보내고 하였다. 그랬더니 오늘은 그가 아주 얼굴에 살기가 등등하여 쇠몽치를 들고 밤중에 다짜고짜로 노인에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인도 불의의 일이라 뜻않고 한 번 밀쳤더니 그냥 허리가 부러져서 그 자리에 즉사를 하였다 하는 것이었다.
 
332
이 말을 듣고 박 초관은 어안이 벙벙하여 말할 용기를 잃었다.
 
333
그날 밤은 노인의 집에서 묵고 이튿날 노인에게서 노잣냥까지 얻어 가지고 내려갈 때는 삽시간에 간 대구를 올라올 때는 이레를 걸려서야 올라왔다.
 
334
올라오면서 생각하였다. 지금 이 대장은 어명을 받들고 국중의 이인을 죄 모아 들이는데, 그런 노인은 과연 큰 재목이 안 될까. 이리하여 박 초관은 서울로 올라오는 참 제 집에도 들지 않고 곧 이 대장을 찾아온 것이다.
 
335
대구 노인의 이름은 홍석(洪奭)이었다.
 
 
336
이 박 초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이완 대장은 고요히 머리를 끄덕였다.
 
337
"산천리가 비록 좁지만 그래도 뒤지면 아직도 이인이 있기는 있구나."
 
338
대장은 즉시 어전에 뵙고 수간의 수유를 얻어 가지고 박 초관을 앞세우고 대구 감영으로 홍석 노인을 만나보러 내려갔다.
 
339
대구로 내려간 이 대장과 박 초관은 성 밖에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서, 어 두운 뒤에 홍석 노인의 집으로 찾아갔다.
 
340
찾아가면서도 먼저 홍석 노인의 역량을 보고자 이 대장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리고 박 초관의 가리키는 후당을 찾아 돌아가 보매 과연 그 안에는 사람이 있는 모양을 창 안의 불이 깜틀거리고 있다.
 
341
대장은 그 불을 보면서 신을 뜰에 벗어버렸다. 그리고 칼을 뽑아들고 발 소리를 감추고 가지고 후당 문 앞까지 이르렀다.
 
342
거기서 대장은 안의 동정을 엿들었다. 죽은 듯이 고요한 가운데 간간 책장 뒤는 소리가 겨우 침묵을 깨뜨는 것을 보면 아마 노인은 글을 읽고 있는 모양 이었다.
 
343
그 책장 뒤는 소리로써 노인의 앉은 방향을 짐작한 대장은 뽑았던 칼을 높이 머리 위로 들었다. 그리고 방안으로 뛰쳐들을 준비를 하였다.
 
344
그때였다. 안에서 문득 책을 접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345
"검기가 비치니 웬일이냐. 얘, 밖에 손님 왔구나. 내다보아라." 하는 노인의 음성과 함께 장짓문이 고요히 열렸다.
 
346
인제는 더 주저할 바가 아니었다. 열리는 문틈으로 대장은 발을 굴며 뛰 쳐 들어 노인을 향하여 칼을 내리쳤다.
 
347
그러나 칼은 노인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하였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노인이 약간 몸을 움직일 때에, 대장의 양손에 굳게 잡히었던 칼은 쟁그렁 소리를 내며 방바닥에 내려지고 말았다.
 
348
"이게 웬 광객인고."
 
349
"노인 용서하십쇼."
 
350
홍석 노인과 이 대장의 이 말이 동시에 나왔다. 그리고 대장은 넓적 노인과 앞에 엎드렸다.
 
351
"웬 사람인고?"
 
352
"훈련대장 이완이올시다."
 
353
"으. 이 대장이시오? 검기(劍氣)가 범상치 않더니. 과연 대장가 음 이외다."
 
354
"과히 조롱치 마십시오."
 
355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듯 오셨소?"
 
356
여기 대하여 이 대장은 자기가 여기까지 오게 된 연유를 다 설명하였다. 그리고 노인에게도 이 국난에 일비의 힘이라도 도와주기를 재삼 간청 하였 다.
 
357
"노인. 이 대장의 인부는 성상께 받은 것이라, 사사로이 노인께 전 하지못 하나 함께 진두에 서서, 위로는 성상과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전 병자년에 맛본 치욕을 갚는 커다란 사업에 노인 같은 분이 도와 주신다면 얼마나 든든하리까. 도와주시오. 도와주시오."
 
358
이렇듯 청하고 또 청할 때에 노인도 드디어 승낙하였다-.
 
359
"내가 가진 재간이란 것은 필부의 용에 지나지 못하나마, 이것이 국가에 추호라도 유용히 쓰인다면 어찌 사양하리까. 자 그럼 밝은 날 사또를 모시고 상경하여 성상 어전에 뵈사이다."
 
360
이리하여 이튿날 이 대장은 홍석 노인을 데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361
이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모아서 전국에서 모은 장사 여덟 사람.
 
362
그 위에 금군 육백 명의 조련도 인제는 다 되었다.
 
363
둘러보면 각 창고에는 모두 그득이 곡식과 재물이 차 있었다.
 
364
이리하여 을미 병신 정유 무술을 지나서 기해년에는, 국력과 군력이 아울러 충실하여 인제는'거사’라는 단 한 가지의 과정이 남아 있게 되었다.
 
365
기 무르익고 힘 찬 뒤에 드디어 출사(出師)의 날을 택하였다.
 
366
왕의 십년 기해 오월 오일.
 
367
요동 평원을 향하여 북벌의 대병이 진군을 한다.
 
368
드디어 이 최후의 결정까지 끝났다.
 
369
그해 봄에 왕은 이황 이이 김린 송린수 이항복 김장생(李滉 李珥 金麟 宋麟壽 李恒福 金長生) 등의 서원에 사액(賜額)을 하였다. 지금 바야흐로 북벌의 대군을 떠나보냄에 국내의 말썽 많은 유생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썽을 부리다가 다시 당쟁이 일어나면 대사를 그르치겠으므로, 그들은 회유키 위 하여 선유(先儒)의 서원에 사액을 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 둔 것이었다.
 
370
삼월에서 사월- 사월도 초승에서 중순으로 하순으로 내려가면서부터는 그 준비 때문에 온 나라가 뒤끓었다.
 
371
이렇게 사월달도 휙하니 지나가고 오월 초하루.
 
 
372
"인제 나흘이로다."
 
373
손꼽아 기다리는 출사일을 다시 꼽아 보면서, 이 대장은 엄중히 갑옷으로 몸을 싼 채로 잠깐 자려고 안석에 기대었다.
 
374
안석에 기대는 참 무슨 지독히도 불길한 꿈을 걸핏 꾸면서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귀에 울리는 것은 누군지 대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였다.
 
375
대궐에서 급사가 달려온 것이었다. 지금 입내하라는 분부였다.
 
376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슴이 철석 내려앉은 이 대장은 까닭없이 저절로 떨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여 등대하는 말께 올라서 직선으로 대궐로 달려 들어갔다.
 
377
들어가니까 기다리고 있던 승전빗이 곧 대장을 인도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내전뜰 아래 국궁하고 서 있으려니까 전으로 오르라는 것이었다.
 
378
대장은 국궁하고 황급히 전에 올라서 동온돌 문 밖에서 승후하였다.
 
379
"이완 참내하였읍니다."
 
380
"들- 들어."
 
381
가슴이 서늘하였다. 옥음(玉音)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 우 렁 차던 임금의 음성으로는 들을 수가 없었다. 분부의 의지하여 동온돌 안에 들어서면서 힐끗 보매 용안이 선독같이 검붉게 되고, 온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는것이었다.
 
382
"전하!"
 
383
대장은 넓적 엎드렸다.
 
384
"대장. 내 몸이 편찮아."
 
385
아래윗 이가 떡떡 마주치기 때문에 분명치 못한 옥음으로 왕은 이렇게 말 하였다.
 
386
"전하!"
 
387
"좀 가까이."
 
388
대장은 무릎걸음으로 나아갔다.
 
389
"손을."
 
390
왕은 연하여 떨리는 손을 내밀어서 힘있게 대장의 손을 잡았다.
 
391
"대장. 오월 단오- 오월 단오."
 
392
"네이. 출사가 인제 겨우 나흘 남았읍니다."
 
393
"내가 불행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기어코 북벌은 대장께 맡기오."
 
394
"전하. 그게 무슨 하교시온지. 전하! 전하!"
 
395
그러나 왕은 인젠 기운이 없는지 그 자리에 모로 눕고 말았다.
 
 
396
그날 밤 대장은 내전 뜰에 서서 밝혔다. 천 가지 만 가지의 생각이 걷 잡을새 없이 대장의 머리에 오락가락 하였다.
 
397
무론 성상께 불행이 있으리라던 그런 생각은 꿈에도 못하였다. 그러나 출사 하기로 결정된 날이 인제 겨우 나흘이 남았고, 그 날이 이 용감한 북벌군을 왕은 몸소 모악원까지 배웅을 하기로 내정이 되고, 그 준비조차 다 되었 거늘 갑자기 옥체 미령하니 이 일을 장차 어쩌나. 그 날까지 쾌차 되시면 여니와 그렇지 못하면 쾌차까지 출사를 연기하여야 할 것이다.
 
398
"하늘. 우리 성상의 환후를 날이 밝기 전에 쾌차케 해주시오."
 
399
대장은 밤새도록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400
그렇듯 심축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튿날은 환후 더욱 침중하였다.
 
401
이리하여 이틀 사흘 나흘- 오월 초나흗날(출사키로 작정한 그 전날) 마흔 하나 이리라는 한창 장년으로서 평생의 웅지를 펴보지 못하고 황천의 길을 밟았다.
 
402
북벌은 돈좌되었다. 내일이면 웅도를 밟겠다고 모두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 전날 북벌의 주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403
한때 돈좌는 되었다.
 
404
그러나 북벌이라는 것은 한 임금의 일이 아니요 국가의 대사이니만치 임금을 잃었을지라도 북벌까지 중지할 바는 아니었다.
 
405
북벌 준비군의 용사들은 애통 가운데서도 어서 인산이 지나서 정국이 안돈 되어 북벌의 장도에 오른 날을 다시금 기다리게 되었다.
 
406
그러나 결과는 그들의 상상 외였다. 영주의 아래서인지라 그 새 십 년간은 선비들 새에 당쟁이 가라앉아 안온한 듯이 보였지만, 영주 저 세상으로 가자 승하한 이튿날부터 벌써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407
즉 승하한 대행왕의 복을 입는 데 대하여 대왕대비는 몇 해를 입어야 하고 왕대비는 몇 해를 입어야 하고 신왕은 몇 해를 입어야 한다는 이 견해 해석의 상위로써 싸움이 시작되어 서인과 남인은 다시 쪽 갈라져서 서로 저편 쪽을 깍아 버리려고 야단하는 바람에 국가의 대사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아니 그들에게는 북벌 등등의 무력 행사보다도 복제(服制)등의 예의 토론 이 더욱 귀하고 중한 문제로 보였다.
 
 
408
북벌은 인젠 문제도 되지 않게 되었다. 북벌을 주재할 영주가 없고 이를지 휘할 정부도 없는 북벌은, 인젠 영구히 삭아 버릴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새 십 년간을 대행왕 일대의 정을 다 들여 쌓았던 국부(國富)와 무비( 武備) 도 인제는 쓸 곳이 없었다. 그 어느날 이완 이 대장의 집에는 이완 홍 석유 광풍 박택 이하의 장사가 다 모였다.
 
409
"하늘! 하늘이 있거든 들으시오. 하늘이 우리 같은 장사를 한 시대( 時代)에 이 좁다란 강산 안에 낸 이상에는, 쓰지 않고 그저 썩히는 것은 무슨 심사 오니까?"
 
410
땅을 두드리며 통곡하면서 대완을 들어서 그들은 작별의 술을 나누었다. 그리고 거기서 시대의 불우를 탄식하면서 작별을 하고 동서남북으로 각각 헤어졌다.
 
411
그 뒤에는 그들은 어떤 생애를 하다가 어떤 최후를 보았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이 그것은 마치 대기 가운데 헤어지는 한 점 구름과 같이 고요히 사라져 없어졌다.
 
 
412
(〈野談〉[야담], 1936.7)
【원문】장사(壯士)의 한(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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