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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치일의 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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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8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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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치일의 회고(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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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수로 3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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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그때 25세, 혈기왕성한 때였습니다. 누구나 그 나이를 경험해 보았겠지만 그 나이에 그러한 일을 당함에 실로 천지가 아득하고 주먹이 불끈 쥐여지며 땅을 치고 울어도 시원치 않고 펄펄 날뛰어도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때의 분노와 원한이란 어찌 다 필설로 그릴 수 있으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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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그때를 회고하니 어느덧 37년, 악착한 지나간 일이거니 가장 고통스런 악몽이라고나 할까, 악몽이라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현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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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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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조선을 위하여 불행한 날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 한걸음 더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를 교란할 씨를 뿌려놓은 날이었습니다. 그때의 소위 열강이 일본의 이러한 행동을 묵인한 죄로 이번 전쟁에서 받은 인과응보가 얼마나 컸고 파괴적이었나 하는 것을 깨달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엄숙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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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俄羅斯)가 패배하고 보호조약이 체결됨에 그때의 전 국민은 나라는 이미 기울었고 합병이라는 것도 이미 시간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천지는 물 끓듯 하였습니다. 그때의 조선 형편이란 개인에 비한다면 흡사 몸은 병들고 외부의 시달림은 심하였으나 병은 이미 골수에 사무치는지라 약효도 있을 리 없고, 또는 애를 써서 약을 써보려고 동정하는 동네사람조차 하나 없이 멍하니 운명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고나 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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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울고불고하는 것은 어린 아이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힘이 없었습니다. 땅을 치며 방성대곡하는 사람, 기가 막혀 껑충껑충 뛰는 사람, 나라를 구할 길이 없다 하여 자결하는 사람, 때는 늦었지만 의거하려고 의병을 모으는 이, 해외로 망명하는 이, 세상을 싫어하여 입산하는 이, 그야말로 형형색색의 눈물겹고 가슴 미어지는 정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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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5년전 보호조약시에 나는 내가 다니는 흥화학교의 교장으로 계시던 고 민영환 선생이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순절하시게 됨에 당년 스무 살의 젊은 몸은 전신이 의분으로 떨리게 되어 통곡하며 복수를 결심하고 경성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나의 제1차 결심이었습니다. 그때 나의 생각은 사립학교를 세워가지고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의병과 연락하여 때가 오게 되면 나라를 위하여 의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강원도 강릉으로 가서‘초당의숙’이라는 조그마한 학교를 만들어서 그야말로 열과 성과 의로 모든 고난과 싸우며 경영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경비가 넉넉지 못하였으나 열과 의로 뭉쳐진 사제(師弟)는 고난이 더하면 더할수록 더욱더 단단히 뭉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만 하여도 참으로 비장한 광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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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되는 바로 그해 하기휴가에는 오랫동안 연락 못하였던 동지들을 만나볼 겸 교사도 더 초빙하려는 여러 가지 포부를 가지고 귀향했다가 합병의 비보를 접했습니다.“올 것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구나”하는 탄식과 함께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새로 초빙한 교사 5인과 다시 강릉으로 가서 여전히 교육에 종사하며 서로 동지를 규합하여 장래를 도모하기로 하였으니, 이것이 재차의 결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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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목적을 달성코자 열심노력 중 이것이 당시 강릉서장이던 안등겸순(安藤兼純)이란 자에게 탐문된바 되어 그해 겨울 학교는 폐쇄되고 우리들은 강릉 밖으로 축출되어 경영하던 모든 일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에 뜻을 굳히고 국외로 나아가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고 우선 만주로 향하기로 하였으니, 이것이 제3차 결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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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가고 따뜻한 어느 봄날 혈기방장한 청년 3인이 술에 취한 듯 미친 듯 기뻐서 울고 어이없이 웃어가면서 금강산 계곡으로 다리를 끌었으니, 이것이 강릉을 쫓겨나 경성으로 향하던 우리 일행 3인의 정경이었답니다. 외국으로 가면 언제 고국에 돌아와 금강산을 보겠느냐고 금강산을 지나 춘천을 거쳐 경성으로 코스를 잡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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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찌나 인상 깊었던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만두 같은 달이건만 보는 이의 심경에 따라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격이라고 할는지요. 원체 감개 격분한 청년들이었으므로 산을 보아도 격하고 물을 보아도 울던 터인데다가, 유점사를 거쳐 내무재를 지나 만폭동으로 가던 도중에 매월당의 시를 보고는, 우리의 심경을 그리도 묘사해 놓은 것 같아서 세 놈이 서로 부둥켜안고 시를 읽다가 울고, 울다가 시를 읽고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시는 이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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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즐기고 물을 즐기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내 산에 올라 울고 물에 임하여 우니, 어찌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는 정이 없어서 그런 것이랴, 아,슬퍼 그러함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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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山樂水[낙산낙수] 人之常情[인지상정] 臨水而哭[임수이곡] 予登山而哭[여등산이곡] 豈無樂山樂水之情而然歟[기무낙산낙수지정이연여] 悲否[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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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조선을 경유하여 대륙침략을 꾀한 것은 멀리 임진왜란 때 일은 그만두고라도 명치유신 후의 소위 정한론이 적극적으로 진전되어 청일, 러일의 양 전쟁을 거쳐 보호조약에까지 발전되었다가 끝내 이 기막히는 민족적 대치욕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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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역사를 읽을 때에 그 연대, 인명, 사건의 나열만을 기억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한 국가의 흥망성쇠의 원인과 결과를 구명하여 국가운영에 산 교훈을 삼아야겠다는 것이 식자들이 주창하는 바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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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해부함으로써 현재 당면하고 있는 건국사업에 실제적으로 참고, 활용되는 바 있어야 되리라고 생각하며, 또는 이날을 회고하는 의의도 이점에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해방된 지도 이미 1년이 지나간 오늘, 완전 자주독립 정부가 수립되기까지는 아직도, 절대적인 노력이 요청되는 이때에 이 날을 회고함에 당하여 감상적 추억에만 흐르지 말고 산 역사로서 앞으로의 건설에 이바지함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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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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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지》,제1권7호,1946년 8월호)
【원문】국치일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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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呂運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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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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