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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근대소설고(朝鮮近代小說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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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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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近代小說考[조선근대소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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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鬼[귀]의 聲[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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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과거의 소설은 어떠하였는지 문헌이 없으니 참고할 바가 없다. 현재에 남아 있는 것은 승려들의 손으로 된 몇 가지의 역사담과 奇談[기담] 외에 「춘향전」, 「심청전」 등이 있으되 모두 그 이야기의 주지를 전할뿐 正本[정본]은 구할 수가 없다. 그런지라 조선의 소설은 ‘역사’라는 것을 온전히 가지지 못하고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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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人稙[이인직]의 「귀의 성」 초판이 어느 연도에 출판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大同書舘[대동서관]이라 하는 册肆[책사]에 그 책이 있던 기억이 남아 있으니 적어도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 발행된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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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많은 소설 가운데 아직껏 그 이름이나마 나의 머리에 남아 있는 것은 「鬢上雪[빈상설]」과 「鴛鴦圖[원앙도]」다. 전자는 “군밤 사오, 설설 끓는 군밤 사오” 라 한 그 서두뿐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고 후자에는 어떤 군수의 지혜가 재미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저자가 누구이던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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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근대소설의 원조의 榮冠[영관]은 이인직의 「귀의 성」에 돌아갈 밖에는 없다. 당시의 많은 작가들이 모두 작중 주인공을 才子佳人[재자가인]으로 하고 사건을 善人被害[선인피해]에 두고 결말로 惡人必亡[악인필망]을 도모할 때에 이 작가뿐은 「귀의 성」으로서 학대받는 한 가련한 여성의 一代[일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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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 ‘춘천집’ 은 왜 피살을 당하였느냐. 이는 재래의 작자에게 보지 못하던 새로운 結構[결구]다. 주인공의 행복을 축수하려기에 소설의 존재할 가치가 있지 여주인공의 피살이라 하는 것은 ‘인생 사회’ 가 아닌 ‘소설’에는 있지 못할 잔혹한 일이었었다. 「귀의 성」을 읽던 필자의 어머니가, “이 책은 너무 참혹스럽다” 고 책을 덮치고 탄식한 것도 그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었다. 뿐만 아니라 작자는 끝까지 냉정한 태도로 이 여주인공의 죽음에도 조그만 동정을 가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이 「귀의 성」을 읽은 것이 열 두세 살 났을 때- 말하자면 인생 일대에 그 중 눈물 흘리기 쉬운 때였었지만 한 방울의 눈물은 없이 여주인공의 참살당하는 광경을 읽었다. 아 냉정한 붓끝이여! 천 번의 ‘아아’ 백 번의 ‘오호라’ 열 번의 ‘참혹할손’ 이 없이는 재래의 작가로서는 도저히 쓰지 못할 장면을 이 작자는 한 마디의 감탄사조차 없이 가려 버렸다. 자기를 총애하던 국왕의 임종을 스케치북을 들고 그리던 다빈치인들 예서 더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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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의 작가는 인성을 선과 악 두 가지로 구별하려 할 때에 이 작가는 사람의 성격이 각각 다른 것을 의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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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의 성」에 나오는 주요한 인물은 다섯 사람이다. ‘김 승지’ 와 그의 마누라와 종 ‘점순이’ , 첩 ‘춘천집’ , ‘춘천집’의 아버지 ‘강 동지’이 다섯 사람의 성격이 얼마나 뚜렷이 나타나 있나. 판관이요 그러면서도 호인이요 호인인고로 조그만 유혹에도 넘어가기 쉬운 김 승지, 무지와 시기와 발악의 덩어리인 김 승지 부인, 꾀 많고도 앞이 막힌 점순이, 인종과 자신의 ‘춘천집’ , 당시 조선 온갖 곳에서 볼 수 있는 時俗[시속] 巨人[거인] ‘강 동지’ -뿐만 아니라 잠깐잠깐 보이는 강 동지의 마누라, 침모, 박 참봉들에도 특수한 성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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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승지는 아침에 자기 마누라에게 “일본 가는 林[임] 公使[공사]를 전송가노라”고 속이고 춘천집에 가서 종일 있다가 밤에야 들어왔다. 이하 「귀의 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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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이 김 승지의 얼굴을 어찌 몹시 쳐다보던지 김 승지가 제풀에 당황한 기색이 있어 누가 묻지도 않는 말을 횡설수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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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승지〉“오늘은 불의출행이야 공연히 남에게 끌려서 이리저리 한참을 쏘댔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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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모인 곳에 가면 그런 일이 성가시어… 여보 마누라, 나는 이때까지 아침 밥도 아니 먹었소. 이애, 점순아, 너 어데 가지 말고 내 밥상 이리 가져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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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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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 뜨뜻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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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니 어깨를 으쓱으쓱 하면서 진저리를 치고…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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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한 대화 묘사다. 당시 다른 작가 가운데서 능히 이렇듯 짧은 대화의 한 마디로써 성격을 이만치 나타낼 사람이 있을까. 이 구절은 김 승지의 전인격과 전성격을 나타내는 동시에 마누라의 성격에 대한 암시까지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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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동지는 춘천집을 데리고 춘천서 경성을 향하여 올라왔다. 그리하여 다짜고짜로 교군을 김 승지 집으로 모셨다. 춘천집의 행차는 중문간으로 들여 보내고 강 동지는 김 승지 있는 사랑으로 들어갔다. 김 승지 부인이 이 기수를 채고 발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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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귀의 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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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아 사랑에 가서 영감 여쭈어라. 영감이 밤낮 기다리던 춘천집이 왔읍니다고 여쭈어라. 요 박살할 년, 우애 나가지 아니하고 알진알진 하느냐, 요년 이리 오너라. 내가 조년부터 죽여야 속이 시원하겠다. 옥령아, 점순아”하며 소리소리 지르는데 그 집이 큰 집이라 안 대청에서 목청 좋게 지르는 소리라도 사랑에는 잘 들리지 않는지라 강 동지는 영문도 모르고 김 승지 앞에 와서 길순이(춘천집)를 데리고 온 공치사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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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승지는 앉은 키보다 긴 담뱃대를 물고 거드름이 뚝뚝 더께 앉았던 사람이 깜짝 놀라는 모양으로 물었던 담뱃대를 쑥 빼들고 강 동지 앞으로 고개를 쓱 두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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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승지 ─ “응, 춘천집이 올라왔어. 그래 어데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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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동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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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아, 교군이 이 밖에 있나? 미리 통기나 있고 들어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것 참 아니 되었네. 기왕 그렇게 되었으니 자네가 이 길로 그 교군을 데리고 계동 박 참봉 집을 찾아가서 내 말로 춘천집을 좀 맡아 두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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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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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아따 아무 염려 말고 가서 내 말대로 하게. 그리고 (중략) 걱정 말게. 자네 내외 두 식구쯤이야 어떻게 못 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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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 한 마디에 강 동지가 일변 대답을 하며 밖으로 나가더라. 김 승지가 춘천집이 왔단 말을 들을 때에 겁에 띄운 마음에 제 말만 하느라고 강 동지에게 자세한 말은 묻지도 아니하였는데 춘천집의 교군이 대문 밖에 있는 줄만 알았던 강 동지를 보내면서 그 눈치를 부인에게 안 보일 작정으로 시치미를 뚝 떼고 안으로 들어가다가 사랑 중문 밖에 강 동지가 선 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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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 “왜 아니 가고 거기 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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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정신 없는 소리를 하는 중에 (중략) 안대청에서는 그 부인이 넋두리하는 소리가 들리고 교군 속에서는 춘천집이 모깃소리같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김 승지의 두루마기 자락이 울음소리 나는 교군을 스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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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나 지나갔으면 좋으련만 그 못생긴 김 승지가 웬 헷기침을 그리 하던지 내가 여기 지나간다 하는 통기하는 헷기침을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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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동지 내외는 밤중에 말다툼을 하였다. 강 동지 마누라의 주장은 길순이 ‘춘천집’ 을 김 승지의 첩으로 준 것이 액색하다 하는 것이요, 강 동지의 주장은 이제 돈이 된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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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 잔뜩 났던 마누라가 몸이 싸느랗게 식었는데 옷을 차려입느라고 부스럭부스럭 하더니 웃목에 가서 혼자 웅크리고 등걸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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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 “여보게 마누라, 마누라, 감기 들려고 웃목에서 등걸잠을 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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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는 숨소리도 없이 쥐죽은 듯이 누웠는데 강 동지는 그 꼴이 미워서 모른 체하고 혼잣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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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 “계집이란 것은 하릴없는 것이야. 그런 방정이 어데 있나. 김 승지 영감이 날더러 길순이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기별까지 하였는데 집안에서 그런 말을 하면 그 날 그 시로 아니 떠난다고 방정들을 떨 듯하여서 내가 잠자코 있었지.(필자 왈 이는 전혀 강 동지의 거짓말임) 내가 영웅이지 조 방정에 그 소릴 듣고 한 시를 참아? 웃목에서 등걸잠을 자다가 감기나 들어서 뒤여졌으면” 하더니, 담배를 탁탁 털고 이불 속으로 쑥 들어가니 마누라는 점점 추운 생각에 이불 속에로 들어가고 싶으나 강 동지가 부를 때에 들어가지 않고 지금 제풀에 들어가기도 열적은 일이라, 다시 부르기를 기다리나 부르지는 아니하고 제풀에 골이 나서 새로이 일어나더니 혼잣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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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 “이 원수같은 밤은 왜 밝지도 아니하누. 내가 감기나 들어서 거꾸러지기만 기다리는 그까짓 영감을 바라고 살 빌어먹을 년이 어디 있나. 날이나 밝거든 내 속으로 낳은 길순이까지 쳐죽여 버리고 내가 영감 앞에서 간수나 마시고 눈깔을 뒤-여쓰고 죽는 것을 뵈일 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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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죽거나 말거나 누가 죽으랬나. 공연히 제풀에 방정을 떨어. 죽거든 혼자나 죽지 애꿎은 길순이는 왜 쳐죽인다는지. 김 승지가 날마다 기다리고 있는 길순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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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싱거운 싸움 하는 소리가 단간 마루 건넌방에 혼자 누워 있는 길순의 귀에는 낱낱이 유심히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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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간단한 묘법으로 심리와 성격을 그려 나간 작자의 수완은 三歎[삼탄]할 가치가 있다. 당시의 모든 작가들이 下劣[하열]한 열정을 토할 동안에 이 작가뿐은 사실이라 하는 데 뿌리를 두고 참 사람의 일면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다른 작가들은 이상적 허수아비를 그리려 할 때에 이 작가는 현실적 사람의 일면을 그리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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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이 작가는 강조의 수단으로 ‘동일어 중복 사용’ 의 효능을 알았다. ‘점순’ 을 혐오할 때에 이 작가는 몇 번을 ‘눈웃음을 친다’ 는 어구를 사용하였다. 춘천집이나 김 승지 부인도 경우에 따라서는 눈웃음을 안 쳤으랴만 다른 사람들의 눈웃음은 무시하여 버리고 단지 ‘점순이’ 의 눈웃음뿐을 강조시킨 이 작가의 權謀[권모]는 확실히 성공하였다. 어렸을 때의 이 소설의 인상이 아직 남은 필자는 눈웃음치는 여인을 경계하는 일종의 제이 천성을 이루었으니 그 강조된 정도는 미루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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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귀의 성」에서 우리는 자연 배경의 활용을 보았다. 다른 작품들에도 자연 묘사가 없는 바는 아니다. 강 동지가 김 승지 부인을 죽이고 나올 때의 자연 묘사는 독자의 마음을 서늘케 한다. 물론 서양 문예가 人事[인사]를 노래한 데 반하여 동양 문예에는 많은 자연 찬미가 있었는지라 동양 소설에는 비교적 자연 묘사가 많았다 하나 그 모든 묘사(예컨대 ‘해는 서산으로 누엿누엿 넘어가려 하며 동해 바다의 운운’ 등)는 모두가 묘사를 위한 묘사이지 결코 이야기에는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이었었다. 그러나 이 작가는 자연과 인생의 관계 및 그 연락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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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귀의 성」을 읽은 전후하여 같은 작자의 「雪中梅[설중매]」( ?)를 읽었다. 그러나 지금 그 책은 절판이 되어 있으며 그때 읽은 기억은 잃었으니 비판할 수가 없다. 다만 日淸[일청]전쟁(日露[일로]던가)에 여주인공이 달아나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 다음에 열세 살인가 열네 살 적에 필자는 그 「설중매」의 속편으로 〈每日申報[매일신보]〉상에 몇 회 연재되다가 중단된 「血流[혈류]」( ? )를 본 기억이 있다. 그때에 그 작가는 서언으로서 ‘이 「血流[혈류]」( ? )는 「설중매」( ? )의 속편으로 쓴 것이지만 독립한 소설로 보아도 괜찮다’는 뜻을 발표하였다. 필자는 그 때가 때인지라 ‘독립’이란 글자가 신통하여 아직 그 서문의 뜻을 기억한다. 그리고 내용으로는 여주인공이 못에 비친 자기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여러가지로 생각하던 그 심리 묘사의 일 장면뿐이 기억에 남았을 뿐 그 밖에는 다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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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雉岳山[치악산]」도 이 작가의 작이지만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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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하튼 이 「귀의 성」뿐으로도 이 작가를 조선 근대소설 작가의 祖[조]라고 서슴지 않고 명언할 수가 있다. 더구나 우리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서양의 아무런 주의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귀의 성」에 나타난 사조는 조선 사조다. 감정은 조선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귀의 성」에 그려진 사회는 당시의 조선 사회다. 거기 나타난 몇 가지의 성격은 조선 사람 특유의 성격이다. 누가 이 「귀의 성」을 가리켜서 외국의 영향을 받았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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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자의 문헌이 없으니 알 수는 없으되 선구자로서의 고통과 고적과 번민은 짐작할 수 있다. 본받을 선배가 없으니 그는 온갖 방면에 모두 스스로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하여 주는 사회가 없으니 그는 홀로 건투할 수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衣鉢[의발]을 물려줄 門人[문인]조차 없었으니 그의 고독은 얼마나 하였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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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선배를 못 가진 것과 같이 또한 후진도 못 가졌다. 그의 대는 그에게서 끊어졌다. 조선 사람이 가질 소설에 대하여 커다란 암시를 보여줄 뿐… 이 조선 문예계의 선구는 종적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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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그 첫소리를 낸 조선 소설은 다른 유모에게로 건너갔다. 새로운 문예적 소양과 새로운 교양과 다분의 감상의 기분과 구 할의 (도덕에 대한) 반역성과 역시 구 할의 인도주의적 경향을 가진 춘원이 둘째 유모로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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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園[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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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설가 가운데서 그 지식의 풍부함과 그 경험의 광범함과 그 교양의 많음과 정력의 絶倫[절륜]함과 筆才[필재]의 원만함이 춘원을 따를 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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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에 사회에 던진 문자는 반역적 선언이었었다. 실로 용감한 돈키호테였다. 그는 불교와 예수교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는 父老[부노]들에게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는 결혼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온갖 도덕, 온갖 제도, 온갖 법칙, 온갖 예의- 이 용감한 돈키호테는 재래의 ‘옳다’고 생각한 온갖 것에게 반역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반역적 사조는 당시의 전 조선 청년의 일치되는 감정으로 다만 衆人[중인]은 차마 이를 발설치를 못하여 침묵을 지키던 것이었다. 중인(청년 계급)은 아직껏 남아 있는 도덕성의 뿌리 때문에 혹은 부모 때문에 혹은 예의 때문에 이를 발설치 못하고 있을 때에 춘원의 반역적 기치는 높이 들리었다. 청년들은 모두 그 기치 앞에 모여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도 가능하다. 이런 반역적 행사도 가능하다고 깨달을 때에 조선의 온 청년은 將位[장위]를 다투려는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춘원의 막하에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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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우리는 그때에 얼마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를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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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이 이 모든 반역적 사조를 완전한 의식 하에 그의 작품에 집어 넣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의식’ 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우리는 좀 연구하여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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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사조를 선포하기 위하여?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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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시 청년계에 환영받을 사조가 포함된 소설을 발표하여 그들로 하여금 소설에 대한 취미를 느끼게 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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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문은 뒤로 밀고 제2문으로 볼 때에 우리는 춘원의 密謀[밀모]의 완전한 성공을 볼 수 있다. 당시의 청년들은 1년에 한두 번씩 발행되는 〈靑春[청춘]〉을 얼마나 기다렸으며 거기 실은 춘원의 소설을 얼마나 애독하였을까. 조선의 사면에서 이혼 문제가 일어났다. 자유 연애에 희생된 소녀들이 신문 3면을 흥성스럽게 하였다. 동시에 해방된( ? ) 여성들의 拒婚同盟[거혼동맹]이 각처에 있었다. 不敬父老[불경부노]와 종교맹신 배척이 없는 곳이 없었다. 〈청춘〉에 춘원의 역설이 실리지 않은 호는 그 팔리는 부수가 적었다. 그들은 소설 그것을 읽기보다 자기네들의 사상이 역력히 나타나 있는 춘원의 소설에 공명의 눈물을 흘리고서 읽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청년 간에는 소설은 ‘읽어야만 될 것’ 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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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의 거장 이인직이 끝끝내 일부 부호 노파들 밖에는 知己[지기]가 없이 몰락된 데 반하여 춘원은 청년과 학생 계급에 일대 세력이 되었다. 동시에 소설과 청년 계급의 밀접한 관계도 이에 맺어졌다. 춘원이 만약 필자가 지적한 바 그 제이의 의미로서 그런 소설을 썼다 하면 이는 과연 세계 문학 사상에 특필할 일대 예언의 空前[공전]의 성공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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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일의 의미로서 썼다 할 때에는 우리는 몇 가지의 불평을 말하지 아니치 못할지니 其一[기일]은 종래의 권선징악과 춘원의 권악징선(당시의 도덕안에 비추어)의 사이에는 오십보 백보의 차 밖에 없다는 점이다. 종래의 습관이며 풍속의 불비된 점을 독자에게 보여 주는 것은 옳은 일이되 개선 방책을 지시하는 것은 소설의 타락을 뜻함이니 소설자는 인생의 회화는 될지언정 그 범위를 넘어서서 사회교화 기관(직접적 의미의)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 범위를 넘어설 때에는 한 우화는 될지언정 소설로서의 가치는 없어진다. ‘소설은 인생의 회화이라’ - 이는 만년 불변의 진리이다. 소설은 인생의 ‘벤취’ 이어도 안 될 것이요, ‘스케치’ 여도 안 될 것이요, 표본화이어도 안 될 것이요, 엄정한 의미의 인생의 회화라야 소설로서의 가치가 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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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域[고역]을 홀로 지킨 이인직의 뒤를 이어 역시 홀로 지키고 있던 춘원은 여기 몇 사람의 동지를 만났다. 그때에 유명한 3․1운동은 일어났다. 동경 유학생 선언서를 草[초]한 그는 상해로 망명을 하였다. 그리하여 몇 해를 지나서 귀국하였을 때에는 조선에는 빈약하나마 문단이라 하는 것이 형성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설의 형식이며 표현 방식이며 취급 내용이 춘원의 독무대 때와는 온전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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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거기서 조선에는 돈키호테보다 햄릿이 필요한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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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는 물러갈 시기가 이름을 깨달았다. 그러면 왜 춘원은 햄릿이 되지 않았느냐. 필자는 이를 檢究[검구]키 위해 전에 춘원의 그때에 취한 방법을 述[술]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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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은 「再生[재생]」을 썼다. 「春香傳[춘향전]」을 썼다. 「許生傳[허생전]」을 썼다. 「端宗哀史[단종애사]」를 쓴다. 그는 자기의 나아갈 새 길로서 講譚[강담]을 발견하였다. 초기에 청년들에게 소설과 접근할 길을 지도한 춘원은 여기서 중년 及[급] 노년들을 소설과 접근케 하려는 운동에 온 힘을 썼다. 아직껏 그 운동의 도중에 있으매 결과는 미리 말할 수가 없으되 상당한 효과를 예측할 수는 있다. 이 일대의 才子[재자]요, 일대의 욕심꾸러기인 현명한 춘원은 조선 전 민중과 문예와의 접근의 영예를 독점하려 한다. 그리고 거기 대한 경쟁자는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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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춘원은 왜 이 길로 나섰나. 순전한 문예의 길을 버리고 왜 이 길로 나섰나. 이 길의 필요함은 잊을 수는 없으나, 그 자신이 왜 이 길로 나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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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아직껏 소설도와 춘원에 대하여만 논하였지 춘원과 그의 작품에는 한 마디도 언급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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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에게 상반된 두 가지의 욕구가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美[미]’ 를 동경하는 마음과 ‘善[선]’ 을 좇으려는 바람이다. 이 두 가지의 상반된 욕구의 갈등! 악귀와 신의 경쟁! 춘원에게 在[재]하여 있는 악마적 미에의 욕구와 의식적으로(오히려 억지로)환기시키는 선에 대한 동경, 이 두 가지의 갈등을 우리는 그의 온갖 작품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악마의 부하다. 그는 미의 동경자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의 본질인 미에 대한 동경을 감추고 거기다가 선의 도금을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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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적 번민! 그의 작품에서 미에 대한 동경뿐을 발견할 때에는 우리는 언제든 동시에 예술의 진수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가 정신을 차리고 그 위에 선의 도금을 할 때에는 거기 남는 것은 모순과 자가당착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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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情[무정]」에서 형식으로 하여금 영채를 버리고 선형에게 가게 한 것도 춘원의 그 위선적 성격의산물이다. 그만치 형식을 그려 하던 영채가 마지막에 형식을 무시하여 버린 것은 이 때문이다. 「開拓者[개척자]」에 나타난 그 모든 피상적 갈등도 그 때문이다. 그의 모든 작품의 하나도 심각한 인상을 독자에게 남기지 못하는 것은 모두 작자의 이원적 성격의 탓이다. 문체? 필치? 묘사? 그 어느 것이든 다른 작가들보다 동떨어지게 탁월한 그의 작품이 하나도 박진력이 없는 ‘한낱 재미있는 이야기에 지나지 못하는 것’ 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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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는 당시 청년 신흥 계급에 생긴 사회 개조라는 명목하의 데카당스 풍조를 들지 않을 수가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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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째로는 문학청년들 及[급] 사회계 소설에 대한 오해를 일으키게 한 것이니 도덕적 표준이 엄한 노인들은 소설을 가리켜 청소년을 타락케 하는 연애 戱文[희문]이라 하였고 문학청년들은 ‘소설이란 사회 개조(특히 연애 해방)’ 를 표준삼고 ‘연애물어’ 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도 또한 춘원의 초기의 모든 작품의 영향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뒤에 우후죽순과 같이 무수히 생겨난 많은 (일시적) 소설 작자의 그 많은 소설의 九割九分[구할구분]이 자유 연애를 주장한 것이 아니면 신구 도덕 갈등을 주지로 한 것으로 볼지라도 그 영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춘원에게도 전환기- 아니 오히려 自省期[자성기]가 이르렀다. 1919년에 필자와 늘봄과 요한의 몇 사람으로 시작된 〈創造[창조]〉의 문예 운동이 일어났으니 신흥 소년들의 실력은 부족하나마 熱[열]로 충일된 운동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보여 주려 한 것은 결코 신구 도덕이나 연애 자유를 주장하는 이러한 소국부의 것이 아니고 인생의 문제와 번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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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때때로 온전히 자기게 내재하여 있는 ‘미’를 떼어 버리려 하였다. 「어떤 아침」에서, 몇 가지의 시조에서 또는 몇 가지의 논문에서, 아 - 그러나 하늘에서 타고난 그의 성품은 고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나타난 작품은 한낱 인도주의를 과장시킨 문자의 유희에 멈췄을 뿐 아무러한 감동도 독자에게 주지 못하였다. 그러면 그는 왜 그 반대로 ‘위선적 가면’을 벗어 버리려 노력하지 않았나. 노력? 오히려 그는 비상한 노력의 끝에 겨우 위선적 탈을 썼으니깐 그 ‘노력’ 만 없이하여 버리면 저절로 떨어질 ‘위선’을 벗어 버리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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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으로서의 춘원을 볼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약함을 아는 동시에 때때로는 자기가 강하다고도 생각하여 보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선의 가면을 그냥 쓰고도 넉넉히 행세할 것같이도 생각하는 동시에 또한 그 반대로 자기가 완전한 소설가가 되려면 그 선의 탈을 벗어 버리고 미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나아가야 할 줄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온전히 선의 탈을 벗어 버리지 못하니 거기는 세 가지의 이유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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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은 자기의 약한 성격을 미루어 온전히 선이라 하는 가면을 벗어 버리면 잘못하다가는 데카당스 사조에 빠져 버릴까 염려함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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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는 자신의 아무 줏대가 생기기 전에 톨스토이 등에게서 받은 영향을 그대로 신조로 삼아 오던 것을 이제 갑자기 벗어 버리기가 時期過晩[시기과만]의 감이 있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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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으로 그리고 가장 중한 이유로 사회에서 춘원을 인도주의적 사상을 만든 이때에 主義[주의]의 표변은 도저히 못할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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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유 아래서 그는 한때는 선과 미의 합치점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다가 마침내(일어로 말하자면)아타라즈사하라즈(當[당]らずさはらず-조심조심하는 모양)의 강담으로 달려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순문예를 위하여보다 오히려 문예와 민중의 악수를 위하여 일하는 귀중한 일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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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풍부한 지식과 다대한 교양과 광범한 경험은 장차 민중과 문예의 친근에 얼마만한 공헌을 하려는지 그것은 시대뿐이 증명할 배니 말할 수는 없지만 청년 계급과 소설이라는 것을 이렇듯 친근케 하여놓은 점은 죄 그의 힘에서 나온 것으로써 조선문학사 가운데 가장 귀중한 페이지를 차지할 춘원의 공로는 잊을 수 없다.
 
 
76
東仁[동인]․늘봄․想涉[상섭]․憑虛[빙허]․稻香[도향]․曙海[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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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2월에 필자와 요한과 늘봄 기타 수인의 손으로 잡지 〈창조〉가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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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직의 시대를 지나서 춘원의 독점 시대까지 1人[인] 즉 全文壇[전문단]이던 것은 이 〈창조〉의 문예 운동으로 처음 깨어져 나갔다. 이 〈창조〉가 조선 문예 잡지의 효시인 동시에 구체적 문예 운동의 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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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조금 눈이 뜬 우리들은 춘원의 작품이며 사상에 대하여 많은 불만과 많은 부족감을 가졌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일종의 부러움과 시기도 섞였다고 자백치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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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만과 부족감은 ‘춘원’ 의 조목에도 말한 바와 같이 춘원의 작품의 주제가 너무 소국부적 문제요, 그의 작풍이 너무 감상적이며 그의 작의 영향이 너무 데카당스적 풍조를 청년 사회에 흘렸으며 그의 작품 그것이 당시의 소설 작가 지원 청년들에게 소설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줌에 대하여서다.
81
당시의 우리의 주장은 〈창조〉의 編輯餘言[편집여언]을 보아도 넉넉히 알지니,
82
△(상략) 너는 어째 죽음만 쓰느냐 하실 이가 있을 듯하나 무슨 비관적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만 인생 그것을 그대로 표현해 보느라고 하였읍니다.(하략)-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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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紙上[지상]에 흐르는 글자를 보시지 말고 한층 더 깊이 종이 아래 감추인 글자(중략)를 찾아 보셔야 합니다.(중략) 엘리자베트로 대표된 현대 사람의 약점(중략)에 머리를 써 주십시오.(하략)-동인
 
84
이렇듯 우리는 소설의 取材[취재]를 구구한 조선 사회 풍속 개량에 두지 않고 ‘인생’ 이라 하는 문제와 살아 가는 고통을 그려 보려 하였다. 권선징악에서 조선 사회 문제 제시로- 다시 일전하여 조선 사회 교화로- 이러한 도정을 밟으 조선 소설은 마침내 인생 문제 제시라는 소설의 본무대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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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동안에 〈창조〉 제2호 발행과 동시에 3․1운동이 일어났다. 편집을 맡았던 요한의 上海[상해] 피신과 出資[출자]의 대부분을 맡았던 필자의 入獄[입옥] 등으로 〈창조〉는 임시 휴간이었다. 그해 가을에 출옥한 필자는 다시 동인들을 모아 가지고 속간을 하게 되었다. 春園[춘원]․天園[천원]․東園[동원]의 三園[삼원]도 동인에 가입하였다. 그때에 想涉[상섭]과 南宮璧[남궁벽] 등 수개 인으로 잡지 〈廢墟[폐허]〉가 발행 되었지만 소설에 대하여는 한 사람의 작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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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日報[동아일보]가 발간되었다. 그러나 소설 작가의 출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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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우리 문단에 사건이 하나 생겼으니 그것은 상섭과 필자의 사이에 생긴 논전이었다. 문예상 견해에 약한 논전의 그 첫소리로도 기억할만하지만 혼돈한 문예계에 어떠한 암시를 주었다 하는 것으로도 확실히 기억하여 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비평’ 에 대한 견해의 상이로써 생긴 논전이니 상섭의 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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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는 재판관과 같으니 비평가의 태도는 범죄를 탐구하는 재판관과 같이 작품 위에 임할 것이요, 작품 그것뿐 아니라 그 작품을 제작케 된 작가의 동기까지도 探詰[탐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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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이요, 필자의 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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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비평가는 활동사진에 변사와 같으니 관중과 같은 독자에게 그 작품의 조화 정도를 설명하여 줄 뿐 작품이나 작가에 대하여 아무 권리도 없다. 작품이 한 개의 존재인 이상에는 비평으로 그 본질적 가치가 좌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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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었다. 생각컨대 상섭은 당시에 비평가로서 자임하고 있었지 이후에 소설 작가로 출세할 자기를 예상치 않았기에 이런 비평가 만세적 비평론을 주장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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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던 상섭이 1922년 말에 〈開闢[개벽]〉 지상에 「標本室[표본실]의 靑[청]개구리」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 사람이 소설을 썼다. 이러한 마음으로 나는 그 작품을 보았다. 그러나 연속물의 제1회를 볼 때에 벌써 필자의 마음에는 큰 불안을 느꼈다. 강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直覺[직각]하였다. 이인직의 독무대를 지나서 춘원의 독무대 그 뒤 2,3년은 필자의 독무대에 다름없었다.
93
늘봄은 아직껏 여기저기서 받은 영향을 그대로 토로하는 데 지나지 못하다가 마침내 침묵하여 버렸다. 그리고 그가 자기의 마땅히 걸어 나아갈 길을 발견하고 재기한 것은 1925년 〈朝鮮文壇[조선문단]〉이 발행될 때였다. 과도기의 청년이 받는 불안과 공포와 번민-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나타난 것은 그것이었다. 필자는 상섭의 출현에 몹시 불안을 느끼면서도 이 새로운 햄릿의 출현에 통쾌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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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전후하여 빙허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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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뒤에 도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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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조선의 소설계는 鼎立狀態[정립장태]가 되었다. 여기 상섭의 작품의 변화는 몹시 재미있다. 처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로서 그만치 침울하고 그만치 多恨[다한]한 작풍과 사상을 보여 준 그가 제2작, 제3작을 발표함에 따라 그 침울 그 多悶多恨[다민다한]은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다만 그의 작풍에서 그냥 남은 것은 ‘疼痛[동통]과 같은 무게’다. 필자가 그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선망과 경이의 눈을 던진 것은 그의 그 침울과 多悶[다민]이었다. 원래 역사적으로 많은 학대와 냉시 앞에 고통을 겪어 온 조선 사람은 생활이나 생에 대한 번민을 그다지 느끼지는 않는다. 모든 탓을 팔자라 하는 무형물에게 넘겨 버리고 명일의 朝飯[조반]을 준비한다. 이러한 조선 사람의 산출한 소설이 햄릿식 다민다한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필자는 이를 의심치 않았다. 굵은 선과 침울과 다민은 노서아문학 길이라 하여 침범할 생각도 안하였다. 점잖음과 다분의 유모어와 열정에 대한 조소적 태도, 이를 영문학이라 하였다. 다정과 奇智[기지]와 연애와 情史[정사], 이를 불문학이라 하였다. 혼의 존재를 잊어버린 괴기와 스피드와 세력, 이를 신흥 미문학이라 하였다. 그리고 조선문학의 윤곽으로서 생활에 대한 단념적 인종과 정열과 연애에 대한 반항적 무시를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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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결코 ‘이렇게 짓겠다’ 는 노력 아래에 될 것이 아니고 저절로 여기 도달할 것이라 하였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露[로]문학의 윤곽을 쓴 것이었다. 필자의 선망과 경이가 여기 있다. 그러나 조선인 상섭은 곧 조선 문학을 발견하였다. 침울과 번민은 그의 작풍에서 없어졌다. ‘전진하기 위하여 도달할 곳’ 에 도달하였다. 그는 그곳에 도달하면서 조선문학의 윤곽 가운데서 상섭 개인의 길까지 발견하였다. 類性[류성] 가운데 개성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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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僞卑[위비] 내지 위악적 성격은 그의 작의 주인공의 공통성인 정열이 없는 이지적 여자를 그의 온갖 작중 여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일견 漫然[만연]한 생활 기록과 그 만연한 기록 아래에 감추여 있는 인생의 동적 일면 - 이것이 그의 작 전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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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그의 작을 가리켜 일견 만연한 생활 기록이라 하였다. 그의 묘사법은 너무 산만적이다. 한 방안에 갑․을․병 세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세 사람의 동작 심리는커녕 앉은 장소며 심지어는 그들의 그림자가 방바닥에 비친 위치며 ‘그의 그림자와 햇빛의 경계선에 걸쳐 놓인 재떨이’까지도 묘사하지 않고는 두지 않는다. 한 장면의 大點[대점]과 主點[주점]을 파악하여 가지고 불필요한 자는 전부 약하여 버리는 調理的[조리적] 재능이 그에게는 결핍하다. 뿐만 아니라 작 전체로 말할지라도 불필요한 장면이 많다. 이것이 그의 작으로써 일견 산만한 생활 기록기와 같이 보이게 하는 것이다. 어떤 평객이 그의 작을 가리켜 무내용 무의미라 하고 소극적 은둔적이라(〈文藝公論[문예공론]〉3호)한 것도 예서 나온 것이다.
100
그러나 그 평객은 그릇된 평단을 내리었다. 우리는 상섭의 모든 작품 - 그 일견 산만한 생활 기록과 같은 작품 아래서 문학자로서 상섭의 우리에게 보여 주려 한 동적 인생의 일면을 결코 몰각할 수 없다. 산만하고 무의미한듯한 그의 작품도 일독한 후에 무거운 동통과 같은 것이 머리에 걸려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무기교, 산만, 방심 이러한 아래도 인생의 일면은 넉넉히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그 산만한 묘사 방식 때문에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뿐… 그렇다고 우리는 그의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부인할 수 없으며 우리의 문학적 양심이 ‘不注意[부주의]의 도스토예프스키-’ 며 ‘기교의 둔재 대커리’ 의 작품을 용인하는 시대가 없어지지 않는 한에서 우리는 같은 의미로서 상섭의 작품을 또한 용인하지 않을 수 없다.
101
그에 반하여 우리는 비상한 기교의 천재로 빙허를 들 수 있다. 몹시도 아름다운(도덕적 의미의) 경치를 보는 느낌을 우리는 빙허의 전 작품에서 느낀다. 조화의 극치 묘사의 絶美[절미]- 과연 기교의 절정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읽은 뒤에 머리에 남는 一物[일물]도 없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102
그는 인생의 사진사다. 가령 사진사라 하는 것이 어폐가 있다면 그는 정물 화가다. 그는 ‘사람’ 을 보고 ‘사건’ 을 보았지만 ‘인생’ 을 못 보고 ‘생활’ 을 못 보았다.
103
그는 유동하는 인생을 그리려 하지 못하고 일개 정적 사건과 정적 인물을 그리려 하였다. 그의 인물에는 성격의 발달이 없다. 사람으로서의 감정의 흥분이 없다. 그의 인물은 일 개 사람이지 결코 인생의 일 분자가 아니다. 인생과는 아무 연락이 없는 ‘사람’ 이나 ‘타락자’ 에 나타난 것은 ‘어떤 개인’ 과 ‘그의 안해’ 이지 결코 인생의 일 분자가 아니다. 「지새는 안개」에 나타난 것은 ‘몇 개의 남학생’ 과 ‘몇 개의 여학생’ 이지 결코 생명의 약동하는 사람은 아니다. 여기 빙허의 파탄이 있다. 동적 인생을 그리려 하지 않고 정적 사람을 사진 찍으려 내지는 스케치하려 한 데에 빙허의 비상한 기교 밖에는 발견할 수 없는 공허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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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죽은 도향은 가장 촉망할 소설가였었다. 그는 사상도 미성품이었다. 필치도 미성품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열이 있었다. 힘이 있었다. 예각적으로 파악된 ‘인생’ 이 지면 위에 약동하였다. 미숙한 기교 아래는 그래도 인생의 일면을 붙든 긍지가 있었다. 아직 소년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도향이었으매 그의 작품에서 다분의 센티멘탈리즘을 발견하는 것은 아까운 가운데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 센티멘탈리즘에 지배받지 않을 만한 침착도 그에게 있었다. 소년 도향의 작품에 다른 작품의 영향이 많이 섞인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그 아래는 자기 개인의 색채를 내어비출 만한 준비도 있었다. 아직 미성품대로 죽어 버린 도향인지라 그의 사상이며 작품에 대한 비판은 가할 수가 없으되 左[좌]의 一文[일문]은 그의 긍지를 넉넉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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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몇 사람 안 되는 글쓰는 가운데서 나 한 사람의 창작이면 창작, 감상문이면 감상문을 바라고 믿는 잡지 경영자들의 생각을 모르면 모르거니와 알고 나서는 그대로 있지 못할 일이다.(하략)
 
106
그의 죽음은 조선 소설계의 가장 큰 손실의 하나이다.
107
도향의 죽기 1년 반쯤 前[전]하여 늘봄이 탄생하였다. 자연주의, 낭만주의, 상징주의 심지어는 다다이즘에까지 추파를 던져 보다가 마침내 실패하고 침묵 몇 해 후에 그는 마침내 자기의 길을 발견하여 가지고 일어섰다. 「사진」, 「흰닭」, 「바람부는 저녁」, 「화수분」, 그의 작품은 〈조선문단〉과 〈靈臺[영대]〉에 연하여 나타났다. 체홉에는 비할 만한 기지와 간결한 묘법이 ‘인도주의’라 하는 커다란 盆[분] 위에 담겨져 나왔다. 누가 아직껏 그만치 예각적으로 인생을 보았던가. 그리고 누가 예각적으로 본 인생관을 인도주의에 연결하려 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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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주의와 연결하여 보려기는 춘원이 먼저 착수하였다. 그러나 춘원은 너무나 위선적 茶氣[다기]가 많고 美[미]에 대한 욕구적 감각이 너무 많았다. 그는 인도주의를 선전키 위하여 작중 주인공을 ‘선자’ 나 위인이나 강자(! )로 하였다. 그러므로 거기 나타난 것은 과장된 영웅숭배적 戱文[희문]이나 아무 열이 없는 선전문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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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은 주인공을 약자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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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비도덕적 의미의)으로 하였다. 그러기에 그가 보이려 한 선이 명료히 보였다. 춘원은 흰 면 위에 흰 선을 그으려 한 데 반하여 늘봄은 흑면 위에 백선을 그으려 하였다. 춘원은 抜劍[발검]하고 위협하여 사람에게 선을 행케 하려 함에 반하여 늘봄은 악의 더러운 면을 보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선을 행토록 깨닫게 하였다. 춘원은 ‘바울’ 임에 반하여 늘봄은 ‘베드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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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의 소생의 곧 뒤를 이어서 소설단에 뛰쳐들어온 괴한이 있었다. 曙海[서해]의 출현은 혜성과 같았다. 그의 작중 이물은 모두 貧人[빈인]이다. 그리고 그 상대자로서 富人[부인]이 있었다. 그리고 결말로서는 살인이나 방화를 집어넣었다. 초기 춘원의 작품이 천편일률의 신도덕 수립과 자유 연애를 주제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로 서해의 초기의 작품은 모두 빈자와 부자의 (표면적) 갈등과 학대받은 빈인의 복수로 끝났다. 그리고 초기 춘원의 작품이 당시 많은 소설가 지원자들에게 악영향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서해의 초기의 작품이 당시 프로 작가 지원자들 사이에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 방화, 살인 소설이 우후죽순과 같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영향이 미쳐서 마지막에는 살인이나 방화로 끝이 나지 않으면 프로의 작품이 아니라는 괴상한 관념까지 그들에게 생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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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뿐으로 우리는 서해의 優點[우점]을 몰각하지 못할지니 많은 방랑과 많은 빈곤과 많은 고생의 체험의 산물인 그의 작품은 당시 독서계에 많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의 우리들의 작품은 대개 유산유식 계급이나 무산유식 계급을 취급한 데 반하여 그는 무산무식 계급을 제재로 하였다. 물론 그의 작품의 결점도 적지 않았다. 설교적 강박력도 결점의 하나이다. 무지하고 둔감하여야 할 인물이 때때로 철학자와 같은 경구를 토하는 것도 결점이다.
113
작자가 먼저 흥분하기 때문에 클라이막스의 박진력이 부족한 것도 결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본질적의 결점이 아니요, 조그만 주의로 넉넉히 개량될 결점이다. 무기교를 주장하는 군소 프로 작가들이 그를 대장으로 모실 때에 그는 그 권내에서도 태연히 그 논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였다. “자기는 작가이지 결코 프로 작가가 아니다. 자기의 체험이 방랑과 빈곤뿐이었으니 자기의 작품의 주제가 그 방면으로 될 것은 무론이나 자기는 결코 프로 작가라는 의식아래서 창작치를 않는다” 이것이 서해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 주장은 가장 정당한 주장이었다.
114
이 밖에 春海[춘해]가 있다. 星海[성해]가 있다. 浪雲[랑운]이 있다. 그러나 아직 자기의 작풍조차 파악치 못한 미성품이매 어떻다고 비판을 내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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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는 동안에 조선문학의 윤곽이라 하는 것은 마침내 형성되었다. 영문학, 불문학, 노문학 그 어떠한 자에든지 전통을 물려받지 않은 조선문학의 윤곽- 그것은 정열과 연애에 대한 반항적 무시와 생활에 대한 단념적 인종이라고 형용할 수 있는 윤곽이었다. 근대 문예 운동이 있은 지 50년이 넘은 일본에 아직 일본문학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윤곽이 생기기 전에 문예 운동이 시작된 지 10년(필자는 1919년 〈창조〉 발행으로서 엄정한 의미의 조선문학 활동의 시초라 함)에 벌서 조선문학의 윤곽이 형성되었다.
 
 
116
나와 小說[소설]
 
117
이러는 가운데도 우리는 얼마나 머리를 썩혔을까. 우리는 박해는 안 받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수모를 받았다. 완전한 무시- 이것이 우리의 그 노력에 대한 사회의 응답이었다. 박해보다도 더한 고통이었다. 박해가 있었으나 모멸적 무시에는 대항책도 없었다. 이러한 무시 아래서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헛들지 않고 걸었다. 개척자의 마땅히 맛보는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받았을까. 조선문학의 나아갈 길은? 작풍은? 문체는? 수없는 ‘?’가 우리 앞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에까지 우리는 두통을 하였다.
118
첫째 문체였었다. 구어체 사용은 무론이었지만 그 구어체의 정도는? 우리가 〈창조〉를 발행하기 전 해에 춘원의 발표한 글의 한 구절을 이하에 예를 들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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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소주는 압록강을 건너오기 때문에 서북 지방에 먼저 퍼지고 맥주는 동해를 건너오기 때문에 영호남 지방에 먼저 퍼진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지리 관계의 재미를 깨닫겠더라.(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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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깨닫겠더라’ 의 ‘더라’ 는 구어에도 사용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양심은 ‘깨닫겠다’ 라 하여 철저히 하여 놓지 않으면 용인치를 못하였다. 당시의 춘원의 작품은 구어체라 하여도 아직 많은 문법체의 흔적이 있었다. ‘이러라’ , ‘이라’ , ‘하는데’ , ‘말삼’ 등을 그의 작품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불철저한 것은 모두 배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He와 She도 조선말에 없는 바였다. 춘원의 작에 ‘그’ 라고 한 곳이 두세 군데 있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춘원은 지금의 ‘그’ 라고 슬 곳을 대개 이름(固有名詞[고유명사])으로 하여버렸다. He와 She 들을 몰몰아 ‘그’ 라고 하여 보편적으로 사용하여 버린 그때의 용기는 지금 생각하여도 장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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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사와 명사의 부족도 곤란이었다. 지금 보통으로 쓰는 형용사 가운데도 당시의 개척자의 땀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 이런 말 혹은 이런 형용사는 너무 상스럽지나 않은지 야비하지나 않은지 ‘그’ 라는 대명사가 과연 적당한지- 필자의 당시의 기억을 보면 몇 번을 읽어 보고 난 뒤에 자기 스스로가 암송하여져서 그 ‘야비됨’ 과 그 ‘상스럼’ 을 모르게 된 뒤에야 발표할 용기가 생겼다. 그러나 이러한 땀과 쓰라림 아래서도 우리는 개척자로서의 긍지를 충분히 느꼈다. 일보 일보 전인미답의 광야에 ‘길’을 만들어 나아가는 그 유쾌함과 자랑스러움은 형용할 길이 없다. 사회의 완전한 무시 아래서도 이러한 기쁨으로 스스로 위로하면서 둘쨋 걸음은 첫쨋 걸음보다 더 굳세게 내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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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堂[육당]이 시작하여 춘원이(불철저하나마) 노력하던 길은 우리의 손으로 마침내 완성되었다. 아직 많이 남아 있던 문법체 문장은 우리의 손으로 마침내 전혀 구어체로 변하였다. ‘그’ 라 하는 대명사는 He와 She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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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변의 광야 처녀지에 막연하나마 자기의 개척하여 놓은 ‘길의 암시’를 돌아볼 때에 그 만족함은 무엇으로 형용할까. 사회의 무시? 모멸? 그런 것은 문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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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 구어체에서 철저적 구어체로- 동시에 가장 귀하고 우리가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것은 서사문체에 대한 일대 개혁이다.
 
125
(상략) 나중에 “실연이 아닐까요” 한다. 俊元[준원]은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글쎄요” 하면서 이층 光浩[광호]의 방에 들어갔다. 광호는 (중략) 떨리는 손으로 강제하듯이 준원에게 술을 권한다. 준원은 사양치 않고 두어 잔 마셨다. 그리고 말없이 광호의 얼굴을 본다.
126
이런 말을 하면 P가 “나도 그대를 사랑하오” 하지는 아니하더라도 따뜻이 동정하는 말이라도 하려니 하였던 것이 이러한 냉대를 당하니 광호는 당장에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다. 그래서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였다.
127
P는 물끄러미 광호를 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128
“네? 무슨 말씀이예요” 한다. 광호의 몸에서는 이 추운 날에 땀이 흐른다. 광호는 다시 말할 용기가 없어서 “안녕히 갑시오” 하고 학교에 가기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왔다.
129
(이상 1918년 春園[춘원] 작, 「尹光浩[윤광호]」에서)
 
130
혼인 날이 왔다. 소를 잡고 떡을 치고 사람들이 다 술이 취하여 즐겁게 웃고 이야기한다(24자 略[약]) 분주히 왔다갔다한다(16자 약) 내빈을 접대한다(14자 약) 근심이 보이다(11자 略[약]) 바쳐쓰고 분주하다.
131
(1917년 춘원 작, 「少年[소년]의 悲哀[비애]」에서)
 
132
이러한 많은 ‘한다’ ‘이라’ ‘-인다’ 등의 현재법 서사체는 근대인의 날카로운 심리와 정서를 표현할 수 없는 바를 깨달았다. 현재법을 사용하면 주와 객체의 구별의 명료치 못함을 깨달았다. 우리는 감연히 이들을 척하였다.
 
133
속에서 나오는 태우는 듯한 더움과, 밖에서 찌르는 무르녹이는 듯한 더위와, 사-늘쩍한 부챗바람이 합하여 엘리자베트의 몸에 쪼르륵 소름이 돋게하였다.(재래의 표현법으로는 ‘한다’ 하였겠음. 이하 괄호 내에는 재래의 문체의 예)소름 돋을 때와 부채의 시원한 바람의 쾌미는 그에게 졸음이 오게 하였다(한다). 그는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맛으로 잠과 깸의 가운데서 떠돌고 있었다(있다). 몇 시간을 지났는지 몰랐다(모른다). 무르녹이기만 하던 날은 소낙비로 부어 내린다. 그리 덥던 날은 비가 오면서는 서-늘하여졌다(진다).
134
방 안은 습기로 찼다. 구팡에 내려져서 튀어나는 물방울들은 안개비와 같이 되면서 방 안에 몰려 들어온다.
135
그는 눈을 번쩍 떴다(뜬다). 어느덧 역한 내음새 나는 모기장이 그를 덮었고 그의 곁에는 오촌모가 번뜻 누워서 답답한 코를 구르고 있었다(있다). 위에는 불씨를 잔뜩 앉히고 그 아래서 숨찬 듯이 할닥할닥 하는 석유 램프는 모기장 밖에서 반딧불같이 반짝거리며 할닥거리고 있었다(있다). “가-는 목숨으로라도 살아지는껏 살아라!” 그 램프는 소군거리는 것 같다.
136
(1919년 東仁[동인]작, 「약한 者[자]의 슬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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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여기서 철저히 ‘그’ 라는 대명사로 변한 것을 보는 동시에 또한 재래의 현재사를 쓰던 곳이 완전히 과거사로 변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괄호 안에 기입한 재래법과 신법을 비교할 때에 전자에서는 ‘엘리자베트’ 이라 하는 주체와 四圍[사위]라는 객체의 혼동 무질서를 들 수 있으나 후자에서는 완전한 합치적 구분을 들 수 있다.
138
사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그 당시에 있어서 ‘적은 일’ 일까. 상기한 예뿐 아니라 지금에 당연한 일과 같이 생각하고 써 나가는 온갖 문체(때문에 정서가 약동하고 때문에 표현이 정확하게 된)도 그 산출할 때의 괴로움은 얼마나 하였을까. 양자를 병서하여 놓고 심독 음독을 몇 번이나 하였던가. 껍질을 깨뜨린다 하는 일은 과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무모한 계획이 결코 誤計[오계]가 아니었던 것을 발견할 때의 기쁨은 한량이 없었다. 일본서는 아직도 시다(した-했다)와 스루(すゐ-한다)가 철저히 구획되지 않았는데.
139
필자의 처녀작은 「약한 자의 슬픔」이다. 표제와 같이 약자의 비애를 취급한 것으로서 약한 성격의 주인인 엘리자베트라는 여성의 반생을 그린 것이었다. 세상의 온갖 죄악은 약함에서 생기나니 사람의 성격이 강하기만 하면 세상에서는 저절로 온갖 죄악이 없어진다. ‘강함’은 즉 ‘사랑’이다.
140
이것이 대개의 주지이다. 그리고 필자는 결말로서 여주인공의 자살을 집어넣으려 한 것이었다. 묘사는 일원묘사였다. 그러나 그 작의 결말은 뜻밖으로 필자는 그 여주인공을 죽이지를 못하였다. 제2작 「마음이 옅은 자여」에서도 결말로서 주인공 K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 마침내 죽이지 못하였다.
 
141
엘리자베트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앞에 끝없는 넓은 세계가 벌여 있었다. 누리에 눌리어 살던 그는 지금은 그 위에 올라섰다.
142
그의 입에는 온 우주를 쳐누른 기쁨의 웃음이 떠올랐다.
143
(「약한 者[자]의 슬픔」의 결말)
 
144
며칠 뒤에 K는 서울 C에게 하는 편지 가운데 이런 말을 썼다-.
145
“나는 인제부터는 참 삶을 살려 합니다.”
146
중략
147
“마음이 옅은 자는 나의 안해도 무론 아니고 또 R도 아니고 그실로는 이나- K외다.”
148
(「마음이 옅은 者[자]여」의 결말)
 
149
이 작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유 행동을 한 두 가지의 결말은 필자로써 생각케 하였다. 나의 작품이다. 나의 자유로운 의사 아래 써 내려가던 소설이다. 그것이 어찌하여 나의 의사에 반하여 주인공이 자살치를 않았나. 나를 지배할 자는 나의 의사 밖에는 없다. 나의 의사조차 변경시킨 그 ‘강한 의사’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나는 나의 의사 밖에 다른 의사에게는 절대로 지배를 안 받을 만한 준비도 있고 의지도 있다. 그 주인공들은 왜 자살치를 못하였나.
150
나는 여기서 나의 이원적 성격을 의식하였다. 주인공을 자살케 하려한 것도 내 의사다. 그러나 또한 자실시키지 못한 것도 내 의사다. 두 의사의 갈등- 이원적 성격, 이를 의식하였다. 악마적 포악과 신과 같은 사랑의 갈등이었다. 美[미]에 대한 광포적 동경과 善[선]에 대한 광포적 동경이다. 작품상에 나타난 불철저, 모순, 당착은 모두 상반되는 이 두 가지의 성격상 동경의 불합치에서 생겨난 것이다.
151
춘원에게는 내재적 미 동경과 의식적 선 욕구가 있었다. 그런고로 의식적 욕구(선)만 포기하면은 그는 미의 예술가가 될 만한 소질이 있었다. 그는 (반대로) 선의식을 보존하고 미관념을 버리려 하였다. 가능한 자를 버리고 불가능한 자를 보유하려 하였다. 여기 그의 파탄이 있다.
152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은 그와 성질이 달랐다. 양자가 같이 내재적이었다. 미를 버리랴? 이는 예술의 멸망을 뜻함이다. 선을 버리랴? 천성의 위에 생장과 교양으로 더욱 굳세이 박힌 이 뿌리를 뽑을 수 없었다. 이때에 나는 번민하였다. 상해에 있는 요한에게 문인으로서의 부적당함을 말하고 문예도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몇 번을 거듭하여 편지한 것도 이때였다. 요한은 당시의 나의 유일한 벗이요, 동지요, 이해자였었다. 그러나 요한에게서도 냉랭한 회답이 이르렀다.
153
이때에 나를 구한 자는 나의 오만한 성격과 자존심과 자부심이었다. 이 나의 오만한 성격의 산물의 자부심은 그때의 나의 파탄을 구하였고 그로부터 7년 뒤(재작년)에 또한 나로서 성격상 파산의 구렁텅이에서 솟아나게 하였다.
154
나는 선과 미, 이 상반된 양자의 사이의 합치점을 발견하려 하였다. 나는 온갖 것을 ‘미’의 아래 잡아넣으려 하였다. 나의 욕구는 모두 다 미다. 미는 미다. 미의 반대의 것도 미다. 사랑도 미이다. 미움도 또한 미다. 선도 미인 동시에 악도 또한 미다. 가령 이런 광범한 의미의 미의 법칙에까지 위반되는 자가 있다 하면 그것은 무가치적 존재다. 이러한 악마적 사상이 움돋기 시작하였다.
155
나의 광포한 사상과 그 사상의 반향인 광포한 생활 양식이 이에 시작되었다.
156
지위 있고 재산 있고 명예 있는 청년이었다. 시간을 약속하면 2,3분의 차이가 있어도 얼굴을 붉히던, 신용을 중히 여기는 신사였었다. 단정한 의복과 단정한 행동의 주인이었었다. 이러하던 나의 의외의 광포한 생활에 평양 시민은 경이의 눈을 던졌다.
157
나의 행동은 미다. 왜 그러냐 하면 나의 욕구에서 나왔으니깐… 이리하여 나의 광포한 방탕은 시작되었다. 아직껏 동경은 하였지만 체면 때문에 혹은 도덕 관념 때문에 더럽다 하던 무수한 광포적 행동이 시작되었다. 「배따라기」를 발표하고,〈창조〉도 발간하였다.〈창조〉의 던져 놓은 커단 渦汶[와문]은 몰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체적 신문예 운동의 시초였다. 신시와 신소설의 初提示[초제시]였다. 궁체 문장의 완성이었다. 새로운 표현 방식의 수립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의 영향으로 혹은 반동으로 조선문학 만년의 기초는 닦아졌다.
158
그러는 동안에 나의 광포성은 날로 더하였다. 평양, 진남포, 경성, 대구, 경주, 동경, 안동현, 나의 광포적 방탕의 발은 널리 퍼졌다. 이리하여 一物[일물]을 觀[관]치 못하고 一作[일작]을 발표치 못하는 새에 1년여가 지났다. 나는 방탕에 피곤한 몸을 가정에 쉬었다. 쉬면서 〈개벽〉에 「눈을 겨우 뜰 때」의 서편을 썼다. 이듬해 봄에 「거치른 터」를 썼다.
159
이러는 동안에도 오만하고 자아가 센 나는 이대로 만족치를 못하였다. 물론 동인에게는 동인의 작풍이 있고 상섭에게는 상섭의 작풍이 있어서 비록 작자의 이름을 기입치 않을지라도 전작을 독파한 뒤에는 동인의 작을 상섭의 작으로 오인할 사람이 없을지요, 상섭의 작을 동인의 작으로 오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뿐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全作[전작]의 임의의 1행을 읽고라도 ‘이는 동인의 작이며 동인만의 작’ 이라고 인식할 수 있을 만한 강렬한 東仁味[동인미]가 있는 독특한 문체와 표현 방식을 발명치 않고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것을? 어디서? 어떻게? 이 많은 ‘?’ 를 어떻게 하나.
160
1924년 8월에 이전 〈창조〉의 잔당들이 모여서 〈영대〉를 발행하였다. 거기 「遺書[유서]」를 썼다. 처음에는 무의식하게 써 나아가던 나는 어떤 때에 우연히 그 「유서」 가운데서 강렬한 동인미를 발견하였다.
161
지금 보기 싫은 작품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계획하는 일이 무의식중에 발아 생장한 의미로 「유서」는 결코 내게는 잊지 못할 작품이다.
162
나는 마침내 동인만의 문체 표현 방식을 발명하였다. 그리고 거기 대한 환전한 긍지와 의식 하에 「明文[명문]」과 「감자」를 발표하였다.
163
그 뒤에 「정희」를 썼다. 「정희」는 〈조선문단〉 폐간으로 말미암아 중도에 끊어진 작품이지만 완성시켜 보고 싶은 작품이다.
164
그러나 2,3년간의 휴양은 다시 나로 하여금 광포성을 발케 하였다. 방탕은 다시 시작되었다. 정오쯤은 요리집에 출근하여 제1차 회, 제2차 회, 3차 회가 어떤 때는 4차까지 끝난 뒤에 새벽 네시쯤에 돌아와서는 한잠 자고는 정오쯤 다시 요리집으로 출근하고 이러한 광포한 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가정은 다만 수면을 위하여서지 나의 생활은 요리집과 요리배에서 광포성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165
그러나 이러한 생활 아래서도 나는 나의 재산의 차차 적어져 가는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1926년 정월에 계산한 바에 의지하여 나의 전재산이 동산 부동산을 합하여 일만오천 원 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 때의 상세한 모든 일은 이 뒤에 나의 생활 기옥으로서 다시 쓸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水利[수리]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천성의 위에 교양과 경우로서 더욱 오만한 성질이 增長[증장]된 나는 어떤 때에 조사 나온 관리의 무례를 책망하여 돌려보낸 것이 원인으로 사업도 실패에 돌아갔다.
166
태산과 같은 借金[차금]이었다. 이것을 갚기 위하여는 남아 있는 내 전재산을 방매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유쾌와 자신의 열락을 위하여서 사용하는 금전은 아깝지 않으나 사업의 실패의 차금 때문에는 차마 父祖[부조]의 유산을 내 손으로 처분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온갖 일을 안해에게 맡기고 서울로 올라갔다.
167
이듬해 여름에 평양에 다시 돌아온 때는 정리 후에 남은 2,3천 원이라는 현금과 두 소생 밖에 남는 것이 없었다.
168
‘貧人[빈인]’
169
나는 때때로 뜰에서 喜喜[희희]히 노는 어린애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였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밥을 먹다가도 젓가락을 던지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낚시질을 시작하였다.
170
마가을이 되었다. 그냥 낚시질을 끊치지 않고 돌아다니던 나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배에서 내려서 집에 돌아와서 처의 출분을 발견하였다. 최후의 수천 원이라는 현금을 죄 가지고….
171
이때의 기록을 쓸 기회가 언제나 이를까.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아직 새로운 상처는 조그만 충동으로 다시 발할 염려가 있다. 그 뒤 1년간 나는 나의 타락하려는 품성과 파산하려는 성격을 억제키에 온 힘을 썼다. 재산은 잃었다. 처도 잃었다. 그러나 나의 그 고귀한 혼과 순일한 품성과 오만한 성격뿐은 결코 잃고 싶지 않았다. 세상이 아무리 말을 하든 문학자로 거의 冷情眼[냉정안]을 가지고 있는 나는 자기의 결점은 남보다 명확히 아는 동시에 자기의 優點[우점]도 잘 의식하고 있다.
172
‘白雉社[백치사]’ 의 洪[홍]이 몇 번을 원고를 부탁하여 왔다. 그러나 한 글자를 쓰지를 못하였다. 나는 그때 사람을 피하였다. 사색을 피하였다. 사랑을 피하였다. 광인을 피하는 동시에 富人[부인]을 피하였다.
173
그리하여 1년 뒤 나는 나의 이전의 성격을 그대로 보유하여 가지고 다시 원상에 회복하였다.
174
무서운 정점이었다. 좌일보와 우일보로써 장래의 운명이 결정되는 정점이 었었다. 더구나 風勢[풍세]까지 불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 나쁜 풍세에 거슬려서 자기의 성격과 품성을 보유하여야겠다는 냉정한 자기비판을 내게 주신 신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때에 더 쓰고 싶은 많은 말을 가지고 있다. 사업 실패의 도정은? 처의 출분은? 其後[기후]는? 아이들은? 해주, 선천, 정주 등지의 표랑은? 지금의 생활은?
175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시 기회를 기다리고 다만 외로운 몸이 두 아이를 데리고 나의 어머니의 품안에 들어와서 다시 문예의 전선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하는 것으로 끊치겠다.
 
176
結末[결말]
 
177
1919년 2월 구체적 신소설 운동이 비롯된 지 만 10년 수개월, 많은 변천과 이동 뒤에 많은 무시와 모멸 아래서 그래도 끊임없는 운동을 계속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조선 소설의 윤곽도 형성되었다. 기초공사도 끝났다. 그러나 아직 건설이라 하는 大工[대공]이 남아 있다.
178
이러한 대공을 앞두고 가장 통절히 느끼는 바는 인재의 불출이다. 서해를 최후로 1인의 소설 작가도 산출치 못한 현상이다. 이러한 때에 생각나는 것은 2,3개의 작품으로 비상한 천분을 보여 줄 뿐 실종한 ‘요섭’ 과, 자기의 작풍이라 하는 것을 파악한 흔적이 보이던 ‘白州[백주]’ 의 두 사람이다. 또 한 사람, 이전 〈白雉[백치]〉에서 재미있는 한두 가지를 보여 준 ‘柳坊[유방]’ 과, 〈文藝公論[문예공론]〉 2호에서 「답사리」를 보여 준 柳池生[류지생]이다. 유방과 유지생 각 타인이라 하면 아직 X이지만 동일인이라 하면 그의 장래를 촉망할 수 있다.
179
인재의 출현! 이리하여 좀 흥성스런 소설단이 되기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성경에 기다리는 자는 성공함을 보리라 하였으니 그 말을 믿고 將來[장래]할 기꺼운 날을 기다리면서 이 붓을 놓을까.
 
180
1929년 7월말.
 
181
(朝鮮日報[조선일보], 1929.7.28~8.16)
【원문】조선근대소설고(朝鮮近代小說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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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