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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사실과 판단과 사료에 대한 작자의 입장을 논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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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10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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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역사]와 事實[사실]과 判斷[판단]과 史料[사료]에 對[대]한 作者[작자]의 立場[입장]을 論[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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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몇몇 친구가 어떤 정자에 모여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는 가운데 화제가 우연히 ‘역사상 사실의 사실적 면’ 과 ‘그 판단적 면’ 에 급하였다. 그리고 그 예로서 春園[춘원]의 「端宗哀史[단종애사]」와 필자의 단편 史譚[사담] ‘首陽[수양]’ 이 화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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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좌석에는 「단종애사」의 작자인 춘원도 있었고, 그 밖에 月灘[월탄], 白華[백화], 岸曙[안서], 巴人[파인] 등등 數友[수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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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과 월탄은 그 당시 (문종-단종-세조)의 일을 역사상에 나타난 그대로 보는 것이 옳다는 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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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와 백화와 필자는 그 반대의 파였다. 역사상의 ‘사실’ 은 무론 후세인이 굽힐 수 없는 배다. 후세인은 전대의 일을 보지 못했으니 전대 사가의 기록을 신뢰할 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판단이라 하는 것까지 전대 사가에게 구속될 필요가 없다 하는 것이 반대의 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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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자면 단종 당시의 사실적 면(즉 문종이 어린 세자를 皇甫仁[황보인]이상 늙은 재상들에게 부탁한 일, 부탁받은 재상들이 새 임금 단종을 극진히 섬긴 일, 수양대군이 이 늙은 재상을 꺼리고 싫어하던 나머지에 종내 癸酉年[계유년] 變亂[변란]을 일으킨 일, 그런 뒤에는 스스로 군국의 최대 권위자가 된 일, 그 뒤 이태를 지나서 단종은 애착 많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드리고 당신은 퇴위한 일, 계유년 변란시에 해를 받지 않은 다른 顧命[고명] 遺臣[유신]들은 이 새 임금께 臣仕[신사]하고 하야치 않은 일, 明使[명사] 來朝時[내조시]에 상왕의 유신 〈現王[현왕]의 現臣[현신]〉들이 상왕을 옹호하고 반역 운동을 일으킨 일, 이 일이 미연에 발각되자 상왕은 魯山君[노산군]으로 降封[강봉]이 되고, 반역을 도모한 선비들은 친국을 당한 일, 왕은 당신을 배반한 그 역신들을 무척도 아껴서 누차 心降[심강]하기를 종용한 일, 그 뒤에 錦城大君[금성대군]의 사건이 생기며 강봉한 노산군에 賜死[사사]한 일. 이 왕의 일대는 이조 5백년사에 있어서 武備[무비]며 국토 확장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역사를 가진 일 등등)은 우리가 보지 못한 일이며 문헌에 의지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러나 사실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판단까지 고인에게 구속될 의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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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陵誌[장릉지]며 死六臣傳[사육신전]이며 그 他[타] 정사 야사 등에 기록된 것은 모두 단종이 追崇[추숭]되고 사육신의 절조가 찬가된 뒤에 된 기록이며, 그 판단이라는 類[류]로 보자면 단종과 사육신에게 동정을 가하는 곳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그런지라 그 기록에 의지하자면 세조의 한 일은 단지 사욕을 위한 簒位[찬위]며 세조(당시 수양대군)의 수하인물들은 모두 교활하고 잔인하고 음흉한 인물들이며 단종과 사육신들은 모두 천사같이 깨끗하고 일점의 흑심이 없으며, 절조 굳기가 철석 같으며, 仁[인]을 보면 버리지 못하며, 악을 보면 참지 못하는 열사로 되어 있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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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의 「단종애사」는 옛날의 사서에 나타난 ‘사실’ 과 ‘판단’ 을 보고 그냥 답습하여 현대어로 고쳐 놓은 데 불과하다. 거기는 춘원의 ‘판단’이 없고 춘원의 ‘주관’ 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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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실’ 과 ‘판단’ 과의 문제가 벌려지는 것이다. 옛날의 기록을 보아서 ‘모순성’ 을 발견할 때에는 우리는 우리의 ‘판단력’ 으로써 이 모순성을 제거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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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사기를 뒤적거려 볼 때에 우리는 安平大君[안평대군]의 등장을 묵과할 수 없다. 幼君[유군]의 삼촌으로서 수양의 동생으로서의 안평이 일변 선비를 모으며 무사들을 모아 들이는 등의 기괴한 행동을 한 것은 당시 사태에 있어서 묵과할 수 없는 수상한 일이다. 幼冲[유충]한 왕, 어른이 없기 때문에 질서가 어지러운 궁중 노물 재상들, 뒤이은 국상 때문에 돌보지 않은 政道[정도]― 이러한 시대에 이 왕숙 안평의 괴행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사가들은 이 괴행을 ‘수양을 대항키 위해서’라는 호의적 판단을 내리었지만 악의로 볼 때에는 반역의 예비 행동이라고 본단들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동정적 판단과 비동정적 판단이 여기서 이렇듯 벌써 벌려진다. 이러한 판단에서 출발한다면 史面[사면]에 나타난 사실은 모두가 한 번 뒤집히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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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이 먼저 손쓰지 않으면 도리어 안평에게 해를 받을 염려가 있다. 그 위에 수양 자기가 거사를 하면 자기의 정치적 수완에 자신도 있거니와 유군이자 조카님인 현왕으로 상왕으로 높여 둘 수가 있고 제 유신을 그냥 중용할 수가 있지만, 안평이 거사하면 뒤에 어떠한 참극이 생겨날는지 예측도 할 수 없다. 여기서 수양은 찬위라는 누명을 무릎쓰고라도 위로는 어리신 조카님의 일신을 안보키 위해서 아래로는 도탄의 경의 백성을 건지기 위하여 거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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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 문종에게 고명을 받은 신하들은 이때에 임하여 당연히 반대의 기세를 올려야 할 것이어늘 成三問[성삼문]의 哀聲[애성] 한 마디로 평온리에 양위 의식은 끝이 나고 더구나 고명의 신하 성삼문의 손에서 大寶[대보]는 수양대군에게로 인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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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기괴한 일은 선왕 고명의 유신들도 모두 수양의 즉위 축하연에 참례를 하고 賜盃[사배]을 받고 축배를 들었다. 한 사람도 하야한 사람이 없었다. 후에 모등은 上啓文[상계문] ‘臣[신]’ 이란 글자를 小字[소자]로 ‘巨[거]’ 자를 써서 자기가 이 왕에게 臣仕[신사]치 않았다는 증거를 삼았다. 하나 이것은 눈을 속이는 야스꺼운 짓으로서 이 왕이 명하는 곳에 부임하고, 이 왕이 명하는 일에 집무한 뒤에 요런 눈속임으로써 발뺌을 하는 것은 소인배의 일이니, 만약 명사 내조시의 사실만 없었다면 그는 일생을 ‘臣[신]’ 을 ‘巨[거]’ 로 속이어 가면서 벼슬자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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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이 즉위한 뒤에는 수양 潜邸時[잠저시]의 심복들이 쑥쑥 顯職[현직]에 올라가는 반면에 문종의 고명 유신들은 비교적 閑却[한각]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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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구관이 명관이라는 생각이 움돋고 차차 강렬하여져서 명사 내조를 호기로 상왕 복위를 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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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밀모도 거사 전에 발각이 되어서 왕의 친국까지 받게 되었다. 여기서 신왕의 도량을 볼 수가 있으니 왕은 당신께 반역을 도모하던 이 신하들을 누차 달래고 또 달랬다. 법을 밝히기 위하여 불복하는 신하는 참하고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유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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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금성대군이 노산군을 핑계삼아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이 될 때에 왕은 여러가지로 생각한 끝에, 왕도의 화근을 없이하기로 결심을 하고 노산군에게 사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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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라도 판단만 달리하면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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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사실― 판단은 판단― 우리는 판단에까지 과거의 국가에서 구속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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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개의 사실이 있다 가정하자. 즉,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을 건너가다가 다리에서 물에 툭 떨어져 죽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빚(채무)이 꽤 많이 있고 또 그 사람에게는 애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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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두려 할 때에 만약 그 기록자가 빚에 많이 시달린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채무라는 것을 중대시하였으면 필연코 그 死者[사자]를 ‘채무에 견디지 못하여 자살한 사람이다’ 고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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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 기록자가 빚의 쓰린 경험은 적고 그 대신 애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서슴지 않고 그 사자를 ‘과실로 인하여 다리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다’ 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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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말한 가운데 한 가지의 기록만(전자든 후자든 간에) 남아서 후세에 까지 전하였다 가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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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인이 그 기록을 읽을 때에 무심히 읽으면 ‘빚 때문에 자살하였다’ 는 기록이라도 그냥 그대로 讀過[독과]하여 버릴 것이요, ‘과실로 떨어져 죽었다’ 는 기록이라도 그냥 그대로 독과하여 버릴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냉정히 자기를 중립적 가치에 세워 놓고 옛날의 그 기록에서 ‘단정’이라는 것은 제거하고 ‘사실’ 뿐을 羅立[나립]한 뒤에 관찰하자면 거기는 그 사람의 입장과 환경에 調順[조순]될 만한 그 사람 특유의 판단이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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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만약 애처가 있는 사람이면 고기록의 ‘자살’案[안]은 보았을 지라도 곧 고인의 판단을 의심할지니 ‘아무리 채무가 많다 하기로서니 애처를 버려 두고 자기 혼자서 황천의 길을 밟을 수가 있나 이것은 필시 고인의 誤斷[오단]이로다’고 자기의 단안을 내릴 수가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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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 사람이 채무에 무척이나 시달려 본 사람이라면 고기록의 ‘과실사’ 안을 보고라도 그것을 의심할지니 ‘기록에는 아무리 하였지만 그 사람에게는 채무가 많았다니 자기로서는 감당치 못할 채무 때문에 애처까지도 버리고 저승길을 떠났구나’ 이렇게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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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이라는 것은 주관의 산물이요, 주관이라는 것은 각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니 한 가지의 사실을 보고하는 두 사람의 보고가 각각 다른 것은 이 주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죽음’ 을 ‘귀결’ 로 보는 사람과 ‘종말’ 로 보는 사람, 출생을 ‘비극의 시초’ 로 보는 사람과 ‘경사’ 로 보는 사람, 같은 사실을 보는 이 두 가지의 판단을 중재할 자도 없고 합일케 할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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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생장과 환경과 교양이 모두 어리어서 그 사람의 성격을 만들어 내는 것이요, 그 성격이 주관을 낳는 것이요, 주관이 판단을 낳는 것이매 우리는 고대의 보고서들을 읽을 때에 먼저 그 기록자의 주관이 얼마나 섞이어 있나를 음미하여 볼 필요가 있는 줄 안다. 더구나 이조의 역사라는 것은 王位繼爭[왕위계쟁]과 당쟁으로 종시되었으며 기록자의 주관까지 묵살하고 당쟁적 악의의 曲筆[곡필]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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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미 안에서 단종 시대 전후의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여 가지고 다시 한번 검토하여 보자면 어떤 결과가 생겨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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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시대의 그 크나큰 비극의 遠因[원인]은 벌써 이 태조 개국초에 씨가 뿌려졌다. 왕위 계승에 관하여 분명한 순위를 작정하지 않은 것이 이조 5백년을 통하여 많고많은 비극을 자아낸 그 遠因[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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繼妃[계비] 康氏[강씨]에게 취한 태조는 初妃[초비] 韓氏[한씨]의 誕[탄]한 여러 왕자를 모두 젖히어 놓고 강씨 출의 芳碩[방석]을 세자로 봉하려 하였다. 이 일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일어선 이가 초비 출신의 제5왕자(후의 태종)이었다. 芳藩[방번]․芳碩[방석]의 난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이리하여 개국초에 벌써 왕위계승쟁탈의 비극을 본 태조는 깊이 감한 바가 있어서 제5왕자 芳遠[방원]이 자기에게 승통케 하여주기를 그렇듯 바라는 것도 모르는 듯이(생존한 왕자 중에 장형인) 정종대왕에게 선위를 하고 당신은 상왕이 되어 함흥으로 은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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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씨 개국의 제1功者[공자]인 방원은 심중 불평이 컸다. 자기가 개국 제일 공자거니 태조의 뒤에는 자기가 承統[승통]케 되려니 하였던 일이 뒤집히어 개국에 아무 공도 없는 자기 형이 왕위에 오르고 자기는 역시 臣列[신열]에 있게 되었다. 여기서 방원은 형왕에게 육박하여 자기를 세자로 책봉케하고 다시 육박하여 형왕을 퇴위토록 하고 자기가 승통을 하여 제3세 국왕이 되었다. 즉 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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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왕 정종에게는 嫡出[적출]은 아니나마 15남 8녀나 왕자녀가 있었는데 이 왕자 왕녀를 다 밀고 王弟[왕제]가 승위를 하였다. 왕위 계승의 순위라는 것은 없었다. 이것이 이조 개국자인 태종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근심에 틀림이 없었다. 훌륭한 업은 세워 놓았지만 왕위 계승 문제로 장래에 많고 많은 비국이 왕족 중에 생겨날 것을 짐작하였다. 그래서 이 형의 位[위]를 慕[모]한 신왕이 (인젠 太上王[태상왕]인) 태조께 함흥으로 問使[문사]를 보내고 御寶禪授[어보선수]를 청할 때마다 문안사를 斬[참]하여 신왕의 부당한 찬위를 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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乃兄[내형]에게서 乃姪[내질]에게로 선위될 용상을 가로앗는 신왕은 당신의 이 부당한 왕위를 정당화시킬 심삼으로였는지 당신의 대에 있어서도 당연한 순서로 적출이요, 또한 원자인 讓寧大君[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야 할 것이어늘(일단 책봉은 하였었지만) 양녕대군을 광인이라는 원죄를 뒤집어 씌어서 폐하여 버리고 제2왕자 孝寧大君[효령대군]까지 건너뛰어서 제3왕자 忠寧大君[충령대군]을 세자로 다시 책하였다. 이것은 까닭 모를 기괴한 일이다. 곡필로 惡記[악기]된 사록에나마 막연히 남아 있는 양녕대군의 위인을 보자면 그 문장으로나 무술로나 도량으로나 왕자의 기개를 가진 양녕이거늘 웬 까닭으로 폐하였는지 이것은 단지 당신의 취한 바 부당한 일을 정당화시키려는 고육책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다. ‘왕위는 왕장자뿐이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억지로 시인시키려는 책략에서 나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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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양녕대군에게로 갈 위를 우연히 받은 분이 문제의 문종대왕과 세조대왕의 아버님이요, 단종대왕의 할아버님이신 명군 세종대왕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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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업적이며 처치에 대하여 뉘라서 용훼하는 자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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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글을 지어 내신 어른으로서의 세종대왕은 다른 업적은 모두 지워 버리더라도 영원히 남을 위대한 군주다. 그러나 그분의 일생은 가정적으로는 지극히 쓸쓸하고 불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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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형 양녕에게로 갈 위를 물려받은만치 늘 양심상의 가책이 있었던 것은 사록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부왕이 광인이라 감정한 양녕이라 인제 그 부왕의 선고를 취소할 수도 없고 그러니 또한 당신의 大兄[대형]이요, 당신이 차지한 三位[삼위]의 원래의 권리자이던 양녕을 광인으로 취급할 수도 없고 하여 광인이라는 명칭 아래서라도 그를 위안코자 여러가지의 일을 하여드린 것은 사기에도 남아 있는 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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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방번․방석의 난, 그 다음에는 정종 선위의 변, 또 그 다음에는(자기 몫이 아닌 위에 오른) 당신의 사건, 매대를 건너지 않고 일어나는 이 왕위 계쟁의 내막을 꿰뚫어 본 세종을 당신의 대에서부터는 꼭 적출 연장 왕자로 승통을 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이로니한 일로는 아드님 여덟 분 중에 맏아드님이 가장 심약, 신약, 기약하고 그 위에 지배력까지 모자라는 것이 왕자 8인 중 가장 왕자의 기품이 부족하였다. 둘째 아드님 수양대군의 억센 왕자적 기개에 비기어 너무도 약하고 가련한 존재였다. 왕자로서의 기골을 가진 사람으로서 세자를 책봉하려면 수양대군을 택할 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러나 맏아드님을 버리고 둘째의 수양을 책봉을 하면 수양에 지지않은 야심 많은 안평이라든가 기타 다른 왕자들에게서 불평이 일어날 것이다. 이리하여 세종대왕은 많은 아드님 가운데서(좀 모자라는 분이지만) 李氏[이씨] 永久之策[영구지책]으로 맏아드님을 세자로 책봉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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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가 후에 승통을 하여 문종대왕이 되고 문종의 적출 독자로 문종의 뒤를 이어서 승통한 이가 단종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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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이전까지의 왕위 승통은 여상한 이면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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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문종이 재위 2년간 대행 부왕의 服喪[복상] 기간임을 구실로 온갖 정치 문제를 보류하여 두려 할 때에 왕제인 수양은 여기 반대하여, “복상도 중대하지만 국사는 더욱 중대하외다. 복상 기간을 1년으로 단축시켜야 합니다” 고 말한 것은 수양의 성격을 잘 말함이다. 수양의 눈에는 무엇보다도 국가가 컸고, 무슨 문제보다도 국가 문제가 컸다. 복상을 구실로 靜而不動[정이부동]하는 형왕의 태도가 간지럽기가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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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에게 있어서 왕제 수양의 이 억센 성격이 무서웠다. 입궐하는 때마다 강압적 태도로써 장형인 당신에게조차 이렇게 성가시게 구는 수양이니 병약한 당신이 천추만세하는 날에는 어린 신왕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리라, 이렇게 잔뜩 겁을 잡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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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지라 문종 임종시에도, 먼저 믿음직한 대신들부터 부르고 그 뒤에야 환후위중하다는 것을 대군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대군들이 미처 입궐하기 전에 황황히 대신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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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린 세자를 부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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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고명을 하였다. 이 고명은 다시 말하자면 “수리의 날개 아래서 이 힘없는 병아리를 보조하여 주오” 하는 부탁이나 일반이었다. 당면의 가상 적은 당신의 아우님 수양대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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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어린 세자를 수리의 날개 아래서 보호하려는 재상들과 이 어린 세자를 鞭撻[편달]하여 억세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여 보려는 수양대군과 ― 두 개의 세력은 대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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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승하 후에 어린 세자가 승위하였다. 즉 단종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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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린 신왕을 가운데 두고 두 개의 세력이 대치되었다. 고명을 받은 황보인 이하의 유신들의 유왕 지상주의와 왕숙 수양대군의 국가 지상주의였다. 수양이라는 무서운 수리의 날개 아래서 어린 병아리를 보호하라는 고명을 받은 선조 유신들은 어린 왕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양을 미워하였다. 그리고 어린 왕께 충성되기 위하여 어린 왕의 응석만 들어드렸지 왕도와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 한심한 한 가지의 예로는 국왕의 신분으로서 더욱이 복상중의 신분으로서 거진 매일 당신의 매부 되는 정종(鄭悰)의 집에 거둥을 하는 것이었다. 인군 된 지위로선 또는 복상 중의 인자 된 도리로 이런 철없는 유희는 좀 삼가야 할 것이며, 어린 왕이 미처 삼가지 못하면 노신들이라도 忠諫[충간]을 하여야 할 것이어늘 선조 고명 유신들은 이것도 왕께 대한 충성이거니 하고 거둥의 鹵簿[노부]까지라도 더욱 찬란히 하여 어린 왕의 마음을 흡족케 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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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이 모두 수양의 눈에 거슬리었다. 세종말부터 문종조를 지나서 지금까지 나날이 역로로 쏟아져 내려가는 국운을 볼 때에 이대로 가만 두었다는 큰 일이 날 것을 명료히 보았다. 뿐더러 이 유왕이 아무 고찰도 없이 응석으로 보내는 동안에 왕숙 중의 한 사람인 안평대군은 일변 선비들을 모으고 무사들을 모으며 기괴한 운동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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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制[선제]치 않으면 被制[피제]할 것이 분명하였다. 그 위에 국가라는 안목으로 볼 때에 자기가 일어서지 않으면 이 어지러운 정국과 해이된 정치를 바로잡을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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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계유년 10월 수양은 심복인들과 협력하여 자기를 배격하는 선조 유신 중에서 노물 몇 명을 처치하였다. 그리고 안평대군은 유배하였다. 여기 벌써 수양의 원대한 계획의 일단을 엿볼 수가 있다. 선조 유신 중에서 노물들은 모두 제하였지만 청년학자들의 錚錚分子[쟁쟁분자]는 그냥 곱다랗게 남겨 두어서 장래 국가의 동량으로 쓸 예비를 하여 두었다. 수양의 심복인 鄭麟趾[정인지] 일파가 누누이 안평대군을 사사할 것을 강요하였지만 수양대군 자기의 힘으로 눌러 볼 것은 눌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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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한 번의 폭풍우가 지나고 인제는 뜻대로 수양은 영의정 겸이․병조판서, 그 위에 내외병마도통사까지 모아서 군국의 최대권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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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의 극에 올라간 뒤에 수양이 어린 조카님 되는 왕에게 대한 태도는 周公[주공] 대 文王[문왕] 이상이었다. 안으로는 대궐 안에 세세한 곳에까지 주의하여 어리고 외로운 왕의 고적을 위로키에 전력을 하였으며(그 예로는 일찌기 대궐에서 내어쫓았던 혜빈 양씨등을 도로 불러들여서 어린 상감의 고적함을 덜게 함) 밖으로는 아직껏 해이하였던 국정을 그의 억센 팔로 다시 쌓기 시작하였다. 뿐더러 세상에서는 혹은 수양이 왕위에 욕심을 두지 않나 의심하는 무리가 많기 때문에 이 의심을 풀어줄 겸 어서바삐(왕위의 장래의 주인인) 왕자를 구하기 위하여 왕비 간택에 힘썼다. 諒闇[양암]중에 왕비를 맞는다 하는 것은 예에 없는 일이지만 수양의 안중에는 선례 유무가 없었다. 첫째로는 고적해하는 어린 조카님을 위해서 둘째로는 하루바삐 왕자를 탄생하여 이 사직의 장래를 굳게 하기 위하여 학자들의 반대도 묵살하고 왕비를 간택하였다. 단종 왕비 송씨가 이때에 책봉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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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왕에게 대한 주공의 지위를 가졌던 수양이 어떻게 마지막에는 찬위를 하게 되었나? 여기는 일대의 정략가 정인지의 술책이 움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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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정]으로 말하면 본시 일을 이만치만 하여 놓으면 수양이 왕위에 오를 줄만 알았더니 사변 후 2년이 지나도록 수양은 왕위에 오를 생각은 꿈에도 않고 주공의 지위에 만족히 있는 것이었다. 수양이 영의정 자리를 그냥 차지하고 있으면 수양의 아래 되는 정은 일평생 영의정이 될 가망이 없다. 수양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후배들도 뒤따라 올라갈 자리가 생긴다. 영의정보다 더 높은 지위는 왕위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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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정은 입궐하여 왕께 은근히 수양에게 선위하기를 종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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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그만 한 가지의 일로 시작하여 그 뒤는 정이 예측했던 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왕은 너무도 무엄한 진언에 몸서리치고 밤에 왕비와 함께 근심하였다. 왕비는 즉시로 당신의 친정에 이 일을 내통하였다. 왕비의 친정에서는 수양의 적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수양이 찬위를 하련다고 급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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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아직껏 주공으로 자임하던 수양은 일조에 찬위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만약 정인지에게 무엄한 진언을 들은 뒤에 왕이 순서를 밟아서 수양을 먼저 불러서 책망이라도 하였다면 정의 계획은 완전히 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어린 왕은 그만한 침착과 도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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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수양을 꺼리던 무리’ ‘수양을 시기하던 무리’ 이렇게 합력하여 한패가 되고 수양과 그 심복들이 다른 패가 되어 정면 충돌이 되었다. 그러나 정권, 군권, 인심 세 가지를 아울러 가진 수양이라 승리가 수양에게로 갈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리하여 수양은 염두에도 안 두었던 왕위에 까지 떠받치어 올라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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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까지 올라는 갔다. 그러나 인제는 자기는 찬위자가 되었다. 이 불쾌한 관사를 자기 위에서 떼 버리기 위하여 이 신왕의 쓴 노력은 눈물겨운 일이다. 인제는 상왕이 된 조카님께 신왕은 한 달에 세 번씩 문안을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상왕은 한 번도 신왕을 보지 않았다. 돈화문까지 거둥하였다가는 문 안에도 못 들어서 보고 도로 쫓기어 들어가곤 하였다. 문안사를 보낼지라도 만나지 않았다. 일국의 국왕으로 번번히 이런 무료한 일을 당하지만 신왕은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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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찬위라는 누명 때문에 당신을 버리고 하야하는 선비들을 무척이도 아꼈다. 당신을 버리고 가는 선비들을 왕은 멀리까지 近臣[근신]을 보내서 송별의 뜻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왕이 선비를 아끼시기가 너무도 후하므로 문종조 고명의 젊은 학자조차 처음 한때는 이 신왕께 熱服[열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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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왕으로서 만약 너무도 新施設[신시설]에만 급급치 않고 선조 유신들을 좀 더 대접하였다면 명사 내조시의 변괴는 생기지 않고 말았을는지도 알 수 없다. 이 선왕의 퇴위는 표면상으로는 병력에 의지한 찬위가 아니요 정정당당한 양위거니, 선왕의 유신들도 신왕에게 반대할 아무 엉터리도 없었던 것이다. 구신들의 대우가 향상된 것이 없는 데서 불평이 생기고 그 불평에서 상왕에 대한 애모의 염이 커지고 그것이 드디어 폭발되어 지금 사기에 남아 있는 사육신의 비극이 생겨난 것이다.
 
64
사육신 중에 가장 눈이 밝고 도량이 큰 사람은 성삼문이었던 모양이다.
 
65
성삼문은 신왕과 知己友[지기우]였다. 상왕께 대한 의리상 신왕께 반역하는 행동은 취하였을망정 신왕의 역량과 수완을 알고 믿은 사람은 오로지 성삼문 한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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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왕에게 불평을 품은 상왕의 신하들은 명국 사신 내조의 期[기]를 타서 상왕과 신왕이 아울러 명사를 창덕궁에 초대하는 날 신왕과 그 및 세자를 弑[시]하고 상왕을 복위케 하기로 꾀를 세웠다. 그날 雲劒[운검]으로 뽑히게 된 사람이 成勝[성승](삼문의 아버지)과 兪應孚[유응부](역시 불평객)다. 칼을 들고 왕의 뒤에 서 있을 책임을 가진 이 운검들은 또한 왕을 시하기는 편리한 지위에 있었다.
 
67
모든 계획은 섰다. 신왕의 생명은 풍전등화였다. 그런데 그 날 신왕과 함께 올 세자는 갑자기 안 오게 되었다. 뿐더러 운검은 중지하라는 왕의 명이 내렸다. 이 뜻않은 착오가 생기기 때문에 겁이 난 武夫[무부] 성승과 유응부가 다닥치는 대로 칼을 부려서 왕뿐이라도 시하려고 할 때에, “세자가 안 왔으니 후기를 기다리자”고 발의를 한 사람은 성삼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삼문의 고통을 볼 수가 있다. 대행왕 문종의 고명을 받았고 상왕 단종의 총애를 받던 삼문, 그 고명과 총애에 보답키 위해서라도 신왕께 열복은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수완 이 역량을 가진 신왕을 시한다는 것은 국가적 안목으로 또 차마 못할 노릇이다. 이 명군 앞에서 장차 빛날 조선을 자기인들 얼마나 보고 싶었으랴. 死[사]하여 의를 세우랴. 生[생]하여 공을 세우랴. 선왕의 고명에 보답키 위해서 자기의 의를 죽일 수는 없으되, 조선이라는 국가로 볼 때에 신왕 또한 시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극력 신왕 시하는 것을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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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발각되어 마지막 형장으로 끌려 나갈 때에 신왕께 복종한 舊友[구우]들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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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하의 선군을 뵈러 가거니와 자네들은 현주를 도와서 나라를 빛나게 하게” 한 말은 그의 진정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신왕도 성삼문을 가장 아꼈다. 당신을 배반한 삼문이로되 삼문의 말은 의심없이 신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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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希顔[강희안]을 역당이라 잡아 올릴 때에 삼문이 왕께 “이 사람은 加謀[가모]치 않았을 뿐 아니라 장래 국가의 동량감이니 살려 두십시오” 할 때에 의심치 않고 희안을 놓아 주었을 뿐 아니라 당신께 배반한 이 당에게 향하여 누차 “마음을 돌려서 건전한 국가를 세우는 데 협력하여 달라”고 종용하여 보았으며 국법을 굽힐 수가 없어서 이 일당을 형장으로 내보내면서도 急使[급사]를 따라 내보내서 도중에까지 마음 돌리기를 권하였다. 이 얼마나 넓고 큰 도량이냐. 진정으로 선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는 당신을 배반한 무리에게 이렇듯 머리를 숙여서 경의를 표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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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봉을 할 때에― 또는 그 뒤 노산군에게 사사를 할 때에 왕은 당신의 총신들과 얼마나 격론을 하였나. 국법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강봉하고 사사한 뒤에도 이 일이 너무도 왕의 마음에 걸리기 때문에 老老[노로]에 악몽이 빈번하여 불안한 殘後老[잔후로]를 보냈다. 억센 일면에 인정에는 또한 매우 약한 군주였다.
 
72
필자는 단종 전후의 史實[사실]을 이렇게 본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서 또는 세조의 업적으로 보아서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이 가장 정당타 믿기 때문이다.
 
 
73
(〈朝鮮中央日報[조선중앙일보]〉, 1934.10.14~24)
【원문】역사와 사실과 판단과 사료에 대한 작자의 입장을 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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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인(金東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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