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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향(醉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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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12.16
이무영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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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취향(醉香)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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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어쩌면 그래, 인제서야 올까… 남의 눈이 빠지게 기다리게 해놓고… 그래, 지금이 열시우? 내 참, 그래두 열한시든 열두시든 오기나 했으니 장허시우. 난 또 접때처럼 고랑떼를 먹이는 줄 알고 이때껏 혼자서 안달바가질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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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라고? 저 하는 소리 좀 봐… 어디 다시 한마디 해봐요? 어쩌면… 너무 그렇게 사람의 맘을 몰라주시다간 괜히 죄받아요. 아우님두, 어쩌면 장난의 말이라두 그렇게 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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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님이야 나 같은 것 아니고도 친구도 있고 말벗도 있고 또 고국에 돌아가시면 정말 친누님도 계시고 하겠으니까, “그까짓 것!”하고 발 새에 때꼽만치도 날 생각하지 않겠지만서두 참 난 안 그렇다우! 내야 아버지가 계시는 것두 아니구 어머니가 계시는 것두 아니구… 이 넓은 세상과 그 많은 인총에 나란 계집과 촌수 닿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구려. 그런데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이런 땅에 와서 고국 사람들의 얼굴까지 그리고 사는 내가 어쩌자고 아우님을 소홀히 생각하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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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말이유. 아우님하고 의남매를 맺은 지도 벌써 석 달이나 되건만 난 한 번두 아우님을 의동생이거니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내 동생이거니… 피를 나눈 동생이거니… 했지요. 동생이란 것두 아우님이 나보다 나이 십 년이나 차이가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이지 만약 아우님의 나이가 나보다 단 한 살이라도 맏이 된다면 난 오라버님 대우를 깍듯이 했겠으리다. 다섯 해만 맏이라도 나는 아저씨처럼… 아버지처럼 받들었을 게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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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아우님으로 본다면 제까짓 것이 끽해야 기생노릇하던 계집이요, 지금이라야 찻집 마담으로 돈에만 눈이 빨개진 계집이거니쯤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노릇을 한 것두 벌써 십 년 전 이야기고 또 아우님이야 그것을 안 믿어주겠지만 그런 노릇을 했다 쳐도 아우님한테 누님이라고 불려진대도 조금도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한 기억은 없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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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나두 아우. 그야말로 열다섯 살 적부터 삼십까지나 뭇남자들한테 치여난 나요. 요새 십 년간에 그야말로 전세계 종족 틈에 끼여서 살아온 내가 아우님이 장난으로 그런 말을 한 것쯤야 눈치 못 차릴 수야 없죠. 하지만 장난의 말이라두 어쩌면 그렇게 섭섭하게 한다우. 나두 아우님이 또 날 놀리느라고 그러거니 생각을 하면서도 ‘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다면 저런 말이 나올 리가 있을라구 ─ ’하고 생각이 든다우. 그런 때는 그냥 하늘이 쾅 하고 내려앉는 것 같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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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말 잘했수. 이젠 장난의 말이래두 아예 그런 섭섭한 소릴랑 마시우. 자, 이리 좀 다가앉구려. 아냐, 설교는 이젠 그만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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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좀 시켜올까? 괜찮긴, 지금이 몇 시라구. 자정이 거의 되어가는데… 뭘 시킬까, 먹었어? 어디서? 어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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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보우. 그런 게 다 내게 섭섭하게 군다는 게요. 왜 어엿한 누이를 찾아오면서 밥을 사먹고 온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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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날 밥 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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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한다면 오죽 듣기 좋겠수. 그래, 다신 안 그러지? 옳지, 이젠 꼭 이번 맹세를 지켜야 하우. 그럼 술이나 조금 하실까? 몹시 추워 보이는데… 뭔 술을 할까… 포도주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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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영하 사십도나 되는 하르빈 복판에서 포도주를 찾는 사람두 있더람? 아, 그래? 그렇기나 하다면 그건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우. 부디 그 결심을 버리지 마시우. 정말 아우님이 술만 끊는다면 오죽이나 좋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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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사내란 술도 몇 잔 할 줄 알아야 하지요. 가끔 마음껏 취해서 기분을 전환시키는 것두 좋지요. 난 여자래두 그런데 뭘. 하지만 여기선 안 돼! 피스톨이 없는 조선 같은 데 말이지 하르빈서야 피스톨 없는 놈이 있어야 말이지! 걸핏하면 “받아라!” 아유, 무서워라! 난 그 “팡팡!”하는 소리만 들어도 그냥 소름이 쭉 끼칩디다… 하르빈이란 맘 약한 사람이 못 살 데요!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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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님두 부디 그것만은 조심하우. 난 실상, 아우님한테 술을 끊으라고 권하고는 싶지 않아요. 사내란 술 몇 잔쯤은 마실 줄 알아야지. 하지만 여기선 안 돼. 같이 앉아서 술먹고 놀다가도 수 틀리면 꺼내는걸! 아마 우리네 조선 사람들이 욕지거리하는 심사로 사람을 죽이는 것 같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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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것 마시구려. 모처럼 누이가 권하는 술이니… 뭘 설마 또 하나밖에 없는 남매끼리 피스톨이야 꺼낼라구, 아무리 하르빈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잖우? 호호호호. 한 잔 더 드슈. 뭘 그까짓 포도주쯤야… 그리고 오늘은 아우님이 온대서 아우님이 젤 좋아하는 식혜두 좀 만들어놨수. 거봐요, 누님 괄세할 겐가…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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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뭣일까? 뭔 말일까? 남매 맺던 날 밤의 약속? 아,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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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그런 것 아니우. 지금 와서야 아우님한테 못할 이야기가 뭐 있겠소! 하지만…글쎄…그러리다. 하죠! 뭣이? 비장한 결심이라고? 참 말 잘하셨수. 나로 본다면 참 강한 결심이라우. 십 년간, 아니 십 년두 더 되죠. 내가 스물일곱 날 때니까… 십삼 년이군! 그 오랫동안 한 계집이 가슴속 깊이깊이 파묻어두었던 이야기라는 그것만으로도 벌써 값이 있잖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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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유, 아우님. 나는 이때껏 이런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 이야긴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다우. 우리 찻집에 드나드는 사람들만 해두 내가 어떤 계집인가 해서 몸이 달아하는 사람들이 퍽 많아요. 아마 우리 아우님만 해두 처음엔 그런 동기로 우리집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게요. 그렇죠?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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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그것도 나무랄 수도 없지요. 그야말로 전장터 못지않게 날마다 피스톨 소리만 나는 살얼음판인 하르빈, 그나마도 제일 번화하다는 키터이스카야에 와서 이름도 성도 없는 조선 계집이 떡 버티고 앉았으니까 퍽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지요. 그런데다가 인물도 그렇게 추하지 않구 하니까 별의별 소리를 다 들어요. 어떤 사람은 짓궂게 와서 내가 어떤 나라 스파이나 되는 듯이 떠보는 축도 있고, 그야말로 여기 와있는 외국 여자들의 그따위 직업을 일삼기나 하는 줄 알고 내 손에다 지전을 한 뭉치 쥐어주는 쓸개빠진 사람두 있었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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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외국 사람뿐이 아니예요. 여기 있는 외국 사람들은 모두 날 중국 여자로 아는 모양이더군요. 외국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그래도 덜 분한데 같은 조선 사람인 줄 빤히 알면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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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당신의 과거를 좀 들읍시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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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든가 그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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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왜 그리 사람이 쌀쌀하오. 나하구 좀 친합시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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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돈을 쥐어줄 땐 그만 눈물이 좌르르 쏟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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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두, 날 갖다 스파이라구 보는 사람이 제일 많은 것 같습디다. 그렇지요? 그럴게라. 나는 그만한 각오는 하고 있어요. 하지만 날 갖다 스파이로 보는 사람의 눈은… 아니지, 그렇게 보는 것이 마땅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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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 사람들의 눈에 복이 있으라… 하나 아우님! 아우님만은 날 그런 계집으로 보지 않겠지? 나도 그것을 믿어요. 믿지 않는다면 내가 남매라는 천륜에 닿는 인연을 맺을 턱이 있겠수. 뭘 나두 알아들어요. 그야 처음엔 아우님만 하더라도 호기심으로 덤볐겠지만 그 호기심은 차차 없어지고 우정이 생긴 줄도 알아요. 그러구 나만 하더라두 아우님이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라면 가까이나 했겠수. 그러나 아우님! 부디 이 누이를 저버리지 마슈. 이것도 인연이랍네다. 어머님 뱃속에서 맺어지지 못한 인연이 본국도 아닌 멀리 하르빈에 와서 맺어진 게지요. 난 나의 일생을 아우님께다 맡기우.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이 다 아우님 것이라구 생각하구 이 찻점도 좀 맡아주구려. 또 일찍이 오빠 소리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우. 아우님이라는 소리도 이번이 첨이죠. 더없이 외롭고 더없이 쓸쓸한 인생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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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아우님, 내게 다시 한번 맹세를 해주시구려. 아, 내가 미쳤나. 울긴 왜 울까… 그래그래, 안 울게. 나두 술 한잔 마실라우. 맨정신으로는 차마 얘기두 못하겠소.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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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기생이 된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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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런 이야기 그만두죠. 나는 그 어떤 경로를 밟아서 나의 이름은 ‘기생’으로 변하고 말았어요. 내 어릴 때 이름이 뭣이었느냐고? 아이, 아우님두. 그까짓 건 알아서 뭘 하우. 소제였다우. 흥, 이름이 좋았으면 팔자가 요꼴이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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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야말루 난 정말 죽어버리려구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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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처음 끌려가던 날 앙탈을 한다고 매를 맞고 몸부림을 하는 통에 유서가 허리춤에서 빠졌던 모양이어요. 그것을 본 후로는 변소에도 혼자 못가게 다그칩디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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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천둥벌거숭이는 정말 어머니를 만나면 어머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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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난 어머니가 다른 데로 절 버리고 가신 줄 알고 이런 유서를 써놓고 죽을려고 했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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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응석이라도 할 작정이었다우. 그런데 이 유서가 나의 사지를 결박할 줄이야 난들 어떻게 알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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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는 사람은 난 참 장한 줄 알아요. 그렇다고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때 생각엔 길이길이 살아서 사랑하는 자식을 이런 구렁에다 팔아먹은 어머니를 생전에 또 한 번이라도 만나서 마음껏 포악이라도 하려고 했었다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벌써 어리석은 생각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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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사람, 교양있고 일평생을 같이 해로할 사람 ─ 유두분면의 가면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나면서도 ─ 그러나 이런 사람을 구하는 것이 유일한 나의 희망이었고 기쁨이었어요. 그런 사람만 만나면 오줌동이를 이고 풀뿌리를 캐어 연명을 한대도 좋다고 생각했다오. 그때나 지금이나 교양있는 신여성들은 이것을 이상이니 뭐니 하고 표현합디다마는 그때의 난 그런 말을 쓸 줄도 몰랐지요. 나의 이 소위 ‘마땅한 사람’이라는 그 개념이 바로 그네들이 말하는바 ‘이상’이란 말과 부합되는 것이겠거니 하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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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야 사람이, 그 마땅한 사람이 화류계에 있을 리가 있어요. 자르르 흐르는 기름과 내풍기는 향내, 그것만에 눈이 어두운 돈푼 있는 집 자식들만이 드나드는 그런 사회에서 마땅한 사람 ─ 요새 말로 한다면 ‘이상’이 맞는 사람이 있을 턱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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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류계의 도덕이란 꼭 연애와 마찬가지예요. 연애처럼… 연애란 말에 뭘 그리 놀라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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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참, 아우님두… 그러나 난 똑같다구 생각해요. 연애란 반드시 서로 속이는 데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닐까? 남자는 여자를 속이고 여자는 또 남자를 속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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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라고? 속이는 데서는 연애가 성립되지 않는다? 흥, 성립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성립이 된다 해도 연애가 아니란 말이지? 그야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 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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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연애 소리에 왜 이리 핏대를 세우시우. 호호호호, 참 모를 일이군! 암만 아우님이 아우님 말을 세우려고 해도 그건 안 될 거요. 왜냐구? 난 이 세상의 연애란 것을 눈이 시도록 봐온 사람이니까요. 귀가 젖도록 들어왔지요. 혹 그런 일이 있지요. 있긴 있어요. 화류계에서도 정사를 한다든가 실연하고 자살을 한다든가… 하나 그건 달라요. 모르는 사람은 흔히 날보고도 그래요… “저 아무개 같은 기생하고 연애를 좀 해봤으면─”이라고요. 목숨을 바치는 사랑도 사랑이 아니냐 말이지? 대단히 불만이 계신 게로군! 하지만 그건 연애가 아니죠. ‘연애’란 그 첩경까지 가다가 마는 게죠. 나두 그런 걸 많이 봤지만 기생의 연애란 그런 거예요. 그 남자가 자기를 버렸다는 그 의식보다도 아름다운 꿈 ─ 사람으로서의 참스러운 생활에 대한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 그 남자가 가진 돈과 권세와 지위가 비춰주는 그 아름다운 꿈이 깨어지는 데서 비관도 하고 술도 마시고 자살도 하는 게지요! 그리고 또 이런 경우도 있지요. 아니, 그것이 아마 기생의 실연 자살에는 제일 많을 겁니다. 말하자면 연극 자살! 기생이 음독하는 일은 많아도 절명되는 경우는 적지요. 혹은 있다면 그건 연극 자살을 하자던 것이 정말 자살이 되는 경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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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어쩌다 보니 얘기가 아주 딴 길로 미끄러졌군. 어쨌든 화류란 그런 데라우. 그러구 화류계에 드나드는 남자들두 저것은 오늘 밤 ‘데리구 노는 계집’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보게 되고, 기생만 해도 이것은 오늘 ‘받들어 주어야 할 놈팽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니까 그저 서로 거짓말만 하게 되는 것이죠. 서로 색안경을 쓰고 서로 속이고 하는 데서 남편을 구한 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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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오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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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이 달 안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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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생각으로 날마다 나 혼자가 되면 이러한 꿈만 꾸던 그때의 누나였다오. 아, 어리석던 그 시절의 취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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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분면으로 달지 않은 술잔을 빠는 중에서도 참삶을 찾는 초조한 생활! 일 년, 이 태, 삼 년, 다섯 해가 흐르는 줄 모르게 흘러갔지요. 그때는 참 삶에 대한 욕구도 희망도 초조도 없이 오직 악만 남은, 판에 박아진 것 같은 생활을 아무 탄력도 없이 계속하고 있었다우.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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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뭇사나이들의 손아귀에서 놀다가 새일녘에야 제 방이라고 돌아오면 기계적으로 눈물이 좔좔 쏟아져요. 울다 울다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지요. 그러고는 오정이나 되어야 일어나서 목욕을 하고 아침 ─ 아니 점심 겸 저녁을 먹고는 화장을 시작합니다. 화장, 남은 참삶을 위해서 하는 화장을 그릇된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기생들의 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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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 아니, 화장을 할 때마다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의 얼굴을 꾹하니 들여다보다가는 이렇게 묻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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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아, 넌 누굴 위해서, 뭣을 위해서 네 얼굴을 단장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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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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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대답이 있을 턱이 있나요. 오직 대답은 한숨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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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너의 팔자도 기구하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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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에 거울 속에 있는 또 한 취향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 흘러 입 속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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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그동안의 나의 생활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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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스무 살 되던 해 어떤 겨울인가 해요. 눈이 펑펑 쏟아졌어요. 박쥐처럼 밤 밖에 모르는 기생들이 해가 지기도 전에 거리로 쏟아져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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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 인력거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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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외치는 소리에 나는 기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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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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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어디냐고 묻지도 않고 인력거에 올라앉았다우. 광천교를 지나서 종로 네거리에 와서야 나는 인력거꾼에게 어디냐고 물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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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원인뎁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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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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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 실쭉했다오. 그때만 해도 일류 기생인 나를 청요릿집으로 부를 위인들이 오죽하랴… 나의 직업의식은 이렇게 대번에 그들의 사람됨을 규정하고 말았지요.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없잖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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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래요. 벌어먹는 것이 찬밥 더운밥 가릴 것은 못 되지마는 언젠가 한번 소위 뱃사람들이 가부시끼라나 뭣이라나 해가지고 날 불러서 갔을 때 한 녀석이 추근추근 달라붙어서 졸라대던 일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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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그예 놀음을 떼어엎고 빠져서 달아오기는 했지마는… 뭘? 그런 줄야 누군 모르우. 소위 뭣이니 뭣이니 하는 명사 따위가 그런 덴 더 추한 줄도 알죠. 하지만 그런 위인들한테는,
 
70
“아이 선생님, 이런 놀음을 하는 사람을 선생님네가 아껴주시잖으면 어쩝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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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치켜만 세우면 대개 떨어져나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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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수틀리면 놀음을 떼엎을 작정을 하고 대관원에 썩 들어섰죠. 문을 열고 인사를 해도 무서울 만큼 방안이 괴괴해요. 어쩐지 소름이 쪽 끼치겠지요… 둘러보니 모두가 삼십 전후의 노동자 비슷한 청년들, 그중에 두 사람은 밤송이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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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리 와 앉으시오.”
 
74
아기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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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런 유의 사람들이 처음은 아니었어요. 기생 생활 오륙 년에 끽해야 운송부 사무원쯤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도 두 번이나 간 적이 있었어요. 그날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이 섞여 있는 적도 한번 있었던가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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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제서야 맘이 놓이겠죠. 어쩐지 지금까지 그런 사람들만 보아서 그런지 어느 회사 사장이라니, 어디의 아무개니, 어디 부자 누구니 하는 위인들은 얌치없이 핀잔을 주어야 떨어져나가지만 그네들은 퍽 고상하게 놀고 또 유쾌하게… 노는 것이 맘에 들었어요.
 
77
돈 있는 사람들의 놀음은 더없이 풍성풍성하고 호화로우면서도 어딘지 퇴폐적인 ─ 알 없는 대포 소리가 나는데 이네들은 그러질 않겠죠. 의복도 추레하고 술 한 병이 들어와도 주머니 속과 의논을 하는 눈치가 빤히 보이면서도 마치 개선장군들이 승전을 자축하는 것같이 쾌활하고 유쾌해 보이더군요. 사람은 아마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들까지 쳐서 일곱 명이던가 싶군요. 그래도 그중에 좀 반반한 양복을 입은 “박 선생님”이라고 불려지는 사람은 나도 한두 번 본 적이 있었어요.
 
78
그는 그때 어느 신문사 기자였죠.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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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만은 부르기 싫은 노래를 안 불러서 좋더군요. 사람 일곱에 기생 하나고 보니 그렇기도 했겠지만 요리상도 너무 서글퍼서… 온… 그것은 감옥에서 나온 동지를 위로하는 회였어요.
 
80
“자, 먼저 두 분의 건강을 빕시다.”
 
81
이렇게 박이라는 이가 잔을 들기 시작하여 한두 차례는 무거운 침묵 속에 술잔이 돌았어요. 그러더니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잘 기억이 안되어도 기생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겠지요.
 
82
어느 좌석에서든지 기생 이야기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낯 안 간지러울 때는 없다우. 기생을 좋다구 할 사람들이 어디 있어야죠. 대개가 마치 야만종 이야기나 하듯이 푼푼이 내려깎이는구려.
 
 
 

5. 5

 
84
혹 기생을 변명해주는 사람도 없잖아 있긴 해요.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에 어쩐지 그리 천박해 뵈는지요.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깔보여지니 딱하죠.
 
85
─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대개 사람다운 일을 한 기생에 관한 것입니다. 그 누구니 하는 들어본 적두 없는 그 누구라든가 뭐라는 기생이 남편 ─ 한때 세상을 뒤흔든 풍운아를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는 이야기, 대개 이런 것이더군요.”
 
86
“나두 그런 이야기를 이번 한방에 있던 사람한테 들은 일이 있지요.”
 
87
이렇게 묵묵히 앉아서 듣기만 하던 두 사람 중에서도 허우대가 크고 이마에 조그만 흉터가 보기 싫지 않을 만큼 있는 청년이 입을 열겠지요. 그 말소리는 퍽 부드러운 것이었어요. 그리고 퍽 우렁차더군요.
 
88
“그 사람도 역시 들은 이야기라는데 장호원인가 어딘가 하는 조그만 시골이던가보더군요. 그 시골에 우연히 갔다가 계월이라는 기생과 하룻밤을 놀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기생의 채금이 일천삼백원이나 된대서 그 까닭을 물으니까 자기의 동생들을 동경으로 유학시키느라고 그랬다고 그러더군요.”
 
89
“그런 기생은 장하군!”
 
90
하고 스텐칼라를 단, 얼굴이 거무데데한 사람이 말을 받으니까,
 
91
“그랬더니 학교를 졸업한 동생들이 나와서 그런 것을 알고 더러운 돈으로 공부한 것이 분하다고 함부로 학대를 해서 동생들 눈에 뜨이지 않겠다고 시골로 처박혔노라 그러더라오. 그 이야기를 듣고는 어찌나 분하던지…”
 
92
이렇게 말을 맺습디다.
 
93
─ 그것은 짤막한 놀음이었어요. 두 시간도 채 못 됐던가 해요. 아마 작정이 두 시간이었던 모양인데 지금 생각하니 시간이 지날까봐 그것을 겁냈던 것 같아요. 그러기에 제 시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주춤주춤 일어났던 게죠…
 
94
아마 그것이 기생생활 오륙 년 동안에 가장 인상깊었던 놀음인가 해요.
 
95
무엇이라고 설명키는 어려워도 가슴속에 무슨 뭉클한 감정이 며칠을 두고 남겠지요.
 
96
그중에서도 그 이야기를 하던 젊은이의 인상이 얼마를 두고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디다.
 
97
그날 밤 그 자리가 아마 내게는 기적이었던가 해요. 바로 그날 밤이었어요. 나는 그 사람의 꿈을 꾸었어요. 그 우렁차고 부드러운 말소리로 내 귀에다 대고,
 
98
“취향이, 이런 생활이 그렇게도 좋단 말이오. 달리 방도를 차리시오. 기생생활에 견딜 만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굶어죽기야 하겠소?”
 
99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더라오.
 
100
“내게는 그런 기적이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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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그러나 기적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 소극적이오… 기적을 기다려서는 안 되오. 자진해서 그 기적을 만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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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님! 꿈이란 할 수 없더군요. 바로 요 며칠 전에 잡지에선가 “꿈은 젊은이의 양식”이란 말이 있습디다만 꿈이란 젊은이에게 있어선 안 될 것이라고 난 생각해요! 뭐야요? 글쎄, 그 꿈이란 말이 이상이라는 의미라면 모르겠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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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꿈은 얼마를 두고 나를 울렸어요! 놀음을 갔다가도 문득 그 꿈 생각이 나면 그대로 모든 게 다 시들해지구…
 
104
그것이야말로 기적이었어요. 적어도 내게 있어선 더없이 기묘한 기적이었던 것을… 박복한 취향이는 그 기적을 꼭 잡지 못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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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몇 달을 두고 그 기적은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어요. 우연한 기회에 잠깐 만난 그의 모습이 머리에서 ─ 눈에서 ─ 귀에서 사라지질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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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이란 이름도 이때 동무가 지어준 것이라우. 원래는 취할 취자 취향이가 아니라 푸를 취자 취향이었어요. 그렇다구 내가 그때 술을 먹은 것은 아니지요. 아마 기생생활 칠 년에 하룻밤밖에 술취한 일이 없는 기생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게지요. 언제냐고? 가만 있수, 아우님. 인제 차차 이야기하리다.
 
107
그날 밤 이후로 나는 그야말로 혼 나간 사람 같았어요. 놀음을 나가도 기운이 없고, 집에 오며는 울고… 사랑은 기적만이 가져온다는 말이 있지요? 들으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도 기적이 가져다준 선물이라더군요. 그것은 확실히 기적이었어요. 하룻밤… 아니 불과 두 시간 동안 한자리에서 논 일이 있는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리가 있어야죠!
 
 
 

6. 6

 
109
그것도 줄리엣처럼 아주 유한 계집에 속한 사람이라면 혹 그런 일도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하룻밤에도 몇 십 명 남자에게 노래를 팔고 술을 권하고 손목을 잡히고 하는 나 같은 계집에게 그런 기적이 있다면 누가 그것을 믿겠어요?
 
110
“다시 한 번만 보아지이다…”
 
111
─ 이것이 나의 기원이었어요.
 
112
─ 그러나 아까도 한 말이지만 진실과 기생과는 궤도(軌道)와 같은 것이랍니다. 영원히 영원히 다시 만나보지를 못해요. 그 사람이 다시 화류계에 나타나지 않는 한 어디 가서 그를 만나겠어요? 그와 나는 동과 서에 멀리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동과 서에는 다리도 없고 전신도 통하지 못하는 딴세계인 바에야…
 
113
참다못해 나는 어느 날 오후에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서 ‘박’을 찾아 알아볼까도 했으나 그럴 수 없어 단념하고 돌아왔었다오. 그때만 해도 박은 진실 속의 사람이었던지 놀음터에서도 통 만날 수가 없더군요…
 
114
그런 지 얼마 후였어요… 아마 연말이었던 것 같군요. 어렴풋이 잠이 깨어서 누웠다가 이런 회화를 들었어요.
 
115
“그래, 어떻게 됐니?”
 
116
“자꾸 미안하다구 그러더군요.”
 
117
“그러니까?”
 
118
“나중엔 덤벼들어서 외투두 뺏구, 짐짝을 막 흐트리구!”
 
119
“돈두 돈이지만 순사가 자꾸 찾아오니까 넌더리를 낸대요. 그냥이라두 나가라구 야단야.”
 
120
언젠가도 이 집주인 할머니가 옆집에 있는 웬 젊은 사람이 밥값에 졸리고 앉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어서 그 사람이거니 하고 듣고만 있자니까,
 
121
“인제 나가우! 외투두 뺏기구…”
 
122
하는 소리가 나서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러는고… 하고 쫓아나가서 대문 틈으로 내다보지 않았겠어요? 그랬더니… 그랬더니… 아, 그가 그구려! 그가 그야!
 
123
웃긴 아우님두! 그 말이 그렇게두 우스우?
 
124
정말 그가 그겠죠. 오래전부터 그 집에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그 집 건넌방을 얻어간 지가 며칠 안 됐고 밤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는 터라 못 봤던가보더군요.
 
125
그러니 어떡하우? 잠자리옷을 입고 대낮에 쫓아갈 수도 없고… 그러다가 원래 두 번씩은 오지 않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아는 나로서 그대로 제 발로 찾아온 기적을 눈을 뜨고 잃어버릴 수가 있겠어요?
 
126
나는 할머니를 시켜서 불렀다오. 당신을 잠깐만이라도 보자는 사람이 있다 ─ 이렇게 일러 보냈더니 왔습디다.
 
127
마침 주인의 조칸가 하는 사람이 쓰는 사랑이 비어서 우선 그를 행랑방처럼 된 문간방에 들어가게 하고 옷을 갈아입고 얼굴엔 분기도 안 올린 채 방문을 열고 들어서려니까 그는 주춤 일어납디다.
 
128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129
이렇게 우선 말을 하고 내딴엔 맘껏 부드러운 웃음을 웃어보였죠.
 
130
“기억이 없는데요.”
 
131
“생각해내 보셔요. 전 꼭 한 번 뵌 기억이 있습니다. 모르시겠어요?”
 
132
“모르겠는데요?”
 
133
나는 이 대답이 그지없이 섭섭하였더라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죠.
 
134
그는 머리를 길렀습디다. 고생에 찌든 탓인지 몹시 얼굴이 상했더군요. 그 전같이 해쓱하지는 않은 대신 시커매진 것이 커다란 눈망울만이 무서울 만큼 이채를 내고 있겠죠.
 
135
그는 나를 몹시 응시합디다. 아마 자기가 그야말로 여우에 흘리기나 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도 같습디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본 기억도 없는 계집이 ─ 더욱이 젊디젊은 계집이 자기를 만나자고 한다면 아무라도 그런 눈으로 뜯어봤겠지요.
 
136
“제가 어디서 뵌 것을 말씀하면 알아내시겠습니까?”
 
137
또 한번 이렇게 물으며 나는 조심성스럽게 앉았었다오. 그랬더니 그는 대답합디다.
 
138
“글쎄올시다. 만난 곳이라도 알려주신다면 혹 생각이 날지도 모르지요…”
 
139
이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140
“아, 옳지!”
 
141
하고 반색을 하겠지요.
 
142
“아시겠습니까?”
 
143
“실례입니다만…”
 
144
하고 반색하는 빛이 다 사라지기 전에 그는 이렇게 묻겠지요.
 
145
“저 중국집에서?”
 
146
나는 얼굴을 붉히고 대관원 이야기를 했지요. 그랬더니 그제서야 생각이 돌았던지,
 
147
“아, 취향 씨! 네 네, 알겠습니다!”
 
148
이렇게 말하며 동생이나 만난 듯이 반가워하겠죠.
 
149
나는 무엇보다도 그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그지없이 기뻤어요.
 
 
 

7. 7

 
151
그를 본 그 순간 나는 꼭 그를 만나야만 할 일이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어요. 그럴 의리 ─ 아니 의무가 있는 것 같이요… 뭣이? 그럴 의리도 있고 의무도 있다고? 호호호호, 있기야 있지요… 하지만 그야 나 혼자만의 이야기겠죠. 그이야 나라는 인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텐데 그에게야 그럴 의무가 있을 까닭이 있어야 말이죠!
 
152
사랑? 사랑이래도 그렇지, 이쪽의 짝사랑이지 그가 사랑인지 건넌방인지 알 턱이 있어야죠. 아니, 나두 그럽니다. 첨엔 그를 불러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아서 불러앉히고 나니 할말이 있어야죠? 나는 그를 불러서 무어라고 한다든가 어떻게 하리라든가 그런 생각은 털끝만치도 못했구려. 아니, 하기야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기야 했지. 그를 본 순간 그대로 불렀으니까요!
 
153
“그날은 퍽 유쾌했습니다.”
 
154
불러논 사람이 하도 말이 없으니까 그는 몹시 어색했던 모양이더군요. 이렇게 당치도 않은 이야기를 불쑥 꺼내겠죠. 그렇다구 낸들 할말이 있어요? 나도 그의 이야기 속으로 살짝 파묻히고 말았지요.
 
155
“그날 오셨던 분들 가끔 만나십니까?”
 
156
“○○신문사 박 군만은 두어 번 만났지요.”
 
157
또다시 말문이 막히겠죠. 하는 수 없이 옷을 좀 갈아입을까 하고 달막달막하려니까 안성맞춤으로 심부름하는 계집애가 내 방을 치워놓았다고 문밖에서 이르더군요. 그래서 총알이나 피하듯이,
 
158
“그럼 제 방으로 좀 가실까요.”
 
159
하고 일어나버렸지요. 그랬더니 그는 ‘싱거운 여편네도 봤다’는 듯이 넌지시 나를 쳐다보더니,
 
160
“글쎄요, 그만 가지요.”
 
161
하고 서두는 바람에 나는 별로 생각도 없이 이렇게 말했더랍니다.
 
162
“잠깐만 좀 놀다 가시지요. 할 이야기도 있고 하니요…”
 
163
“할 얘기?”
 
164
재차 묻는 말에는 ─ 그러나 대답을 못했어요. 그래도 그는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이 나를 따라서겠지요.
 
165
방안은 말끔히 치워졌더군요. 나는 그를 겨울 화로처럼 위해다가 아랫목에 앉히고 담배, 재떨이, 그리고 계집아이를 시켜서 불을 담아다 그의 앞에 놓았지요. 그리고 마치 시댁 손님을 모셔온 것처럼 공손히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지요.
 
166
좀 춥던지 그는 곰의 발 같은 손을 화롯전에 올려놓더군요. 나도 맞은쪽 화롯전에 실상 춥지도 않으면서 손을 쬐이고 있었어요. 한 십분이나 멋멋스런 침묵이 지나갔었다우. 무엇이라고든 말을 꺼내야 할 줄은 알면서도 말이 나오지 않는 그러한 침묵이었어요. 주어진바 그 짤막한 침묵이 계속된 그동안에도 나는 내가 그를 부른 것이 너무 경솔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167
이윽고 그가 먼저 이렇게 입을 엽디다.
 
168
“하신다던 이야기는?”
 
169
나는 그 말엔 대답을 못했어요. 다만 열에 덴 사람처럼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더라우. 곧 말이 나올 듯 나올 듯하다가도 쏙 들어가고 쏙 들어가고 하겠죠. 그래서 나는 그때 나의 감정을 말로써 표현할 것을 단념하고 눈으로써 그에게 전하고자 하였어요. 그랬더니 정서, 정열, 기원 ─ 이러한 다각적 감정을 표현하기에 초조한 그 눈을 그는 윙크로 알았던 것 같더군요. 그는 이렇게 말하겠죠.
 
170
“이야기란 뭔 얘깁니까. 설마 나를 농락거리로 삼자는 이야기만은 아니겠죠?”
 
171
“그런 이야기만은 절대 아닙니다!”
 
172
나는 이렇게 단언했어요. 그리고 생각하니 우물쭈물하다가는 주어진바 이 두번째의 귀여운 기적을 놓칠 것같이도 생각이 들겠지요! 그래서 나는 벼르고 별러서 내가 얼마나 자기를 사모하였더라는 이야기도 한 끝에 달아 했더랍니다!
 
173
그러면서도 나는 사랑이란 말을 입에 내지도 않았다우. 실상 그것은 사랑이 아닐지도 몰랐으니까요. 그런 것을 바로 사랑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겠지요. 아우님, 하나 그날 이야긴 이만큼만 해둡시다. 하여튼 두번째에 돌아온 기적을 나는 놓쳐버리지 않았다우 ─
 
174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어요. 그와 나는 그 짧은 시간에 퍽 다정스러이 지냈다오.
 
175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나의 이름에다 ‘씨’자를 붙이지 않고 그저,
 
176
“취향이!”
 
177
─ 이렇게 불러주는 일까지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씨자를 붙일 때보다 다정스러이 들립디다. 그러나 그만한 우정을 보여주면서도 그는 나를 경계하는 눈치가 늘 보입디다. 이것은 너무 가까이해서는 안 될 계집이거니 생각하는 것 같은 눈치였어요. 아니, 어떤 때는 아주 드러내놓고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어요.
 
178
“취향이, 호의는 늘 감사하게 받고 있소. 그러나 우리는 서로 현재 이 경계선에서 한 걸음도 더 가까이할 수는 없을 것 같소.”
 
179
“그건 왜 그럴까요?”
 
180
어느 날 나는 야무지게 이렇게 달려들듯 반문했었지요.
 
 
 

8. 8

 
182
그러나 그는 그 이상 더 이야기를 진전시키려고 하지 않습디다. 나는 그러한 그의 태도가 퍽도 섭섭했어요. 그래서 어떤 때는 곧은장으로 대고 쏘아보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183
“이젠 그런 이야긴 우리 그만둡시다.”
 
184
밥상 내물리듯 슬그머니 옆으로 밀어치우는구려. 그런 태도가 못마땅해서 원망 비슷이 비난을 할라치면 그는,
 
185
“취향이도 이젠 그만한 정도로 해두시오. 나 같은 사람한테 호기심을 갖는 취향의 심사를 참 나는 모르겠소.”
 
186
“선생님은 그래, 그것을 단순히 한 계집의 호기심으로만 돌리시나요?”
 
187
나는 팩 대들었어요. 그 호기심이란 말이 어찌도 분하던지 그냥 눈물이 팽 돌겠죠.
 
188
“글세, 취향이 자신은 그것이 호기심이 아니거니 할지도 모르지마는 날 언제 봤다고 밥을 사먹이고 옷을 해입히고, 그리고 용돈까지도 주고… 요새 와선 난 뭐가 뭔지 모르게 되고 말았구려!”
 
189
─ 그 말을 듣고야 나는 나 자신을 돌아다보았더라오.
 
190
사실, 그에겐 나는 아주 허황된 계집으로밖에 뵈지 않았을 겝니다. 그야말로 언제 봤다고 내가 그에게 그만한 호의를 보이게 되었는지 나 자신도 의아했어요. 사귄 지 두어 달이나 실히 되면서도 나는 그가 뭣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몰랐다면 누가 곧이를 듣겠어요.
 
191
사실 그것은 맹목적 호의였어요. 아마 생각건대 대관원에서 만나던 그날
 
192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지전 뭉치로 우리의 몸뚱이를 사려는 사람들은 아니다.”하는 막연한 의식이 그들한테 호의를 갖게 한 첫 조건이었고, 시퍼런 지전장을 내노라고 흔들고 다니는 그런 유의 손님에게서 받아 싸두었던 반감이 “이 사람들은 우리편이거니…”하는 생각이 막연한 호의를 갖게 한 것이 아니었던가 해요. 장구채나 잡고 사내라면 상판대기도 보기 싫으면서도 먹고살기 위해서 놀음판에 나가서는 그저 배싯배싯 남자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보려고 애쓰는 계집들의 손등이나 어루만지고 있는 기름기만 지르르 흐르는 놈팡이들만 보아온 나의 눈에 그네들이 퍽도 인상깊게 보였던 것 같아요. 그 쾌활이… 그… 무엇보다도 나는 그의 유황불 같은 눈이 좋았어요. 그리고 그 씩씩한, 오랫동안 그런 속에서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조금도 그 기개가 꺾여 보이지 않는 그를 볼 때 막연히나마 이 사람은 가엾은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과 또 이후로는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서 일할 사람이리라 ─ 하는 막연은 하면서도 어딘지 진실성이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나는 사로잡혔던 것인가 해요.
 
193
─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아니, 그전에 막연하던 것을 뜻하지 못한 사람이 와서 귀띔해주겠죠. 그것은 참 뜻하지 못한 사람이었어요. 아따, 그렇게도 급하시우?
 
194
K란 이가 한번 찾아와서 그와 가까이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핑계를 합디다. 그 이유로 그는 나쁜 사상을 가진 까닭이라고 합디다. K는 또 이렇게 말하겠죠.
 
195
“이번에도 사 년이나 겪고 나온 놈이다…”
 
196
“아, 그래요?”
 
197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하여 두었지요.
 
198
그러나 그도 하루는 이런 말까지 하더군요.
 
199
‘취향을 나는 존경하오. 지금까지 반년이나 되도록 나의 정체를 캐보려고 하지 않는 그 태도가 퍽이나 듬직하오. 내가 이만큼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모든 것이 스스로 알려질 때까지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여 주오.”
 
200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디다.
 
201
“사람 입을 통해서 알려는 태도를 나는 퍽 싫어하오. 그리고 입을 통해서 어떤 인물의 에누리 없는 정체를 알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나는 자기라는 것을 자기의 입으로 설명하는 ─ 아니 선전하는 사람을 업수이 여기오. 사람이란 사람의 입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에서만 알려지는 것이오. 알아들으셨소?”
 
202
─ 이 행동에서 내가 그를 안 것은 너무나 적었어요. 아니, 없다고 해도 좋았겠지요. 나는 다만 그가 이사를 퍽 자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뿐이었어요. 한 집에서 한 달을 머무르지 않습디다. 어떤 때는 단 사흘이 못 되어 집을 옮기기도 하겠죠.
 
 
 

9. 9

 
204
또 한 가지 그의 행동에서 그를 안 것이 있군요. 그는 참 여행을 잘합디다. 사흘, 나흘, 어떤 때는 보름씩이나.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가는 곳을 알리는 일이 없었어요. 돈이 필요하면,
 
205
“취향이, 돈 좀 있겠소?”
 
206
해서 돈을 받아쥐면 그저,
 
207
“좀 다녀오우.”
 
208
그저 그뿐이었어요. 그리고 나도,
 
209
“어디 가셔요?”
 
210
하고 묻지 않는 것이 버릇이 되었어요. 그도 그랬다오. 그 알뜰살뜰히 푼돈 모은 나의 저금통장에서 ‘즉시불’이라는 도장이 자꾸 늘어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면서도 단 한 번도 미안하다든가 감사하다든가 하는 말을 입밖에 내는 것을 못 보았어요. 나도 처음에는 적이 불안한 생각이 들더니만 그것이 도수가 늘어갈수록 아무렇지도 않고 도리어,
 
211
“그럼 받아 쓰오…”
 
212
하는 그 한마디가 몇 천 마디 인사보다도 믿음직하고 기뻤어요. 돈을 받아 넣고 나가는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저 무사하여지이다 ─ ’ 하고 빌었었다오. 다른 사람들을 보면 건강과 행복을 빕디다마는 또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그저 무사하기만을 비는 버릇이 생겨버리고 말았었다오. 그것은 깨끗한 사랑이었어요 ─ . 우리는 한방에서 밤을 새운 적도 한두 번 있었지마는 우리는 한 번도 방종한 마음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우. 아우님이니까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게지요. 사실 나 자신도 이상스러울 만큼 그와 대좌해서 이야기를 하면 더없이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아요.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정화돼요. 여성으로서의 막연한 동경을 기름기 흐르는 사람들 한테서까지 어떤 때는 유혹을 받는 나면서도 사랑하는 그를 대하면 깨끗이 없어지고 말아요!
 
213
그러던 그가 하루는,
 
214
“취향이, 오늘부터 이틀 동안만 나의 말동무가 되어주오. 주머니 속도 좀 든든히 해가지고 우리 온천에나 한번 가봅시다.”
 
215
그 말을 거역할 이유가 내게 있을 턱이 있어야지요.
 
216
바로 그날 밤 우리는 경원선 차 속에 있었어요. 역에 나와서야 겨우 권번에 전화를 걸 시간을 만들었고 보니 행장이라는 것이 있을 턱이 있어요. 나는 그의 지시대로 당목 옷을 입고 나섰지요.
 
217
“어디로 가실까요?”
 
218
그는 아무 대답이 없더군요. 어쩐지 그 명랑한 그의 얼굴이 그날만은 퍽 흐려 보였어요.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하고 생각도 했지만 자진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일은 일체 묻지 않는다는 것이 무언중에 약속처럼 되어 있던 터라 나는 그것을 입밖에 내지도 않았지요.
 
219
“왜, 나하구 그런 데를 가는 데 불안을 느끼오?”
 
220
“불안?”
 
221
“응, 불안… 일테면 단둘이 그런 데 간다는 데 말이오.”
 
222
“온, 천만에요!”
 
223
그럴 바에야 애당초에 따라서지를 않게! 하는 의미의 말을 하려다가 참았지요. 그런 말을 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나의 지갑을 그대로 맡기었죠. 그랬더니 오늘만은 자기 주머니도 아주 비지는 않았다고 하며 쓸쓸히 웃습디다.
 
224
나는 그가 어디 차표를 샀는지도 몰랐어요. 그저 경원선 개찰구로 가기에 경원선이거니 했을 따름이죠. 차 중에서도 그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더군요. 그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 밖으로 얼굴을 향하고 앉아서 담배만 뻑뻑 빱디다.
 
225
“원산까지 갑시다.”
 
226
문득 그는 이렇게 말합디다. 나도 그저 그러냐고만 말았지요.
 
227
철원을 지나서자 차는 관 속처럼 괴괴합디다. 저쪽 구석에 앉은 웬 더부룩한 노인 한 분이 일어나 앉았을 뿐 모두 쓰러져 잡디다. 그는 생각 깊은 낯으로 쳐다보곤 하더니 짐짓 마음을 가라앉힌 듯이 입을 열어,
 
228
“취향이! 담에 혹 누가 당신보고 나를 아느냐거든 아는 체 마시오. 설령 당신의 부모같이 믿는 사람이라두…”
 
229
“네…”
 
230
나는 다소곳이 답했었어요.
 
231
“일간 아마 낼이나 모레쯤 혹 당신이 나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오. 그래도 모른다고 하시오.”
 
232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디다. 그렇다고 내가 누구한테 어떤 일을 당할까, 그것을 겁낸 것은 아니어요. 그의 신상이 인제는 지금같이 무사치를 못하려나보다 하는 놀라움이었죠.
 
233
“일이 생겼나요?”
 
234
나는 결심을 하고 굳게 지켜온 약속을 깨뜨렸다오.
 
235
“그렇소. 일이… 생겼다오. 하나 그만둡시다. 밤말은 쥐가 듣는다오. 남 보기 수상하니 당신도 좀 누우시오. 나도 누우리다.”
 
236
이튿날 새벽 원산에 내린 우리는 역 앞에서 택시로 한 십분 달리다가 북촌동으로 올라갔지요.
 
 
 

10. 10

 
238
그는 길 잃은 사람처럼 나를 끌고 다니더니 교회 뒤 큼직한 집 담을 끼고 돌다가,
 
239
“취향이, 나의 아내 노릇을 좀 해주려오?”
 
240
밑도끝도없이 조금도 망설이는 티도 없이 이렇게 말을 합디다. 그 말을 듣자 순간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눈 속이 뜨끈해집디다. 물론 나는 아무 대답도 못했어요.
 
241
“하나, 뭘 여러 날 그럴 필요도 없지요. 오늘 하루만… 아니, 내일 저녁때까지만… 왜 싫소?”
 
242
‘겨우 하루 동안!’
 
243
이런 말이 곧 입 속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나는 꼴깍 삼켰었다우. 그리구 이렇게 대답했었죠.
 
244
“네.”
 
245
그러는 사품에 눈물이 주르르 쏟아집디다.
 
246
까만 판장을 앞치마처럼 두른 단출한 초가로 그는 나를 데리고 들어가서 웬 노파한테,
 
247
“할머니, 제 아냅니다.”
 
248
이렇게 소개하고는 어디론지 나갑디다. 노파는 더없이 나를 반겨하고, 친가며 집안 살림이며 수다스러울 만큼 묻습디다.
 
249
그날 밤… 나는 비로소 그가 조선땅에는 더 지체할 수 없음을 알았어요.
 
250
“그러니 취향이도 그쯤 알고 나를 붙들지 마시오. 나는 실상 취향이를 꼭 데리고 가고 싶소. 하지만 지금 같이 가는 것은 위험해 그러오. 부디 몸 성히 있다가 내가 주소를 알리거든 왔으면 하우. 알아듣겠수?”
 
251
나는 자꾸 울기만 했었어요. 지금까지 나는 그의 앞에서 이렇게 운 적은 없었어요. 참으려고 하면 할수록 눈물이 솟아납디다.
 
252
“취향이!”
 
253
그는 나의 손을 잡으며 다시 불렀어요.
 
254
“내가 당신 옆을 떠나려는 까닭을 아시겠소?”
 
255
“네…”
 
256
“고맙소. 그러면 일후에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하면 그때 와주겠지?”
 
257
“네…”
 
258
어쩐지 이 한마디로는 나의 감격된 감정이 십분의 일도 표현되지 않는 것 같아서,
 
259
“그보다도 전 선생님이 편지를 주실까가 의심이 되어요.”
 
260
“아니오! 그것은 믿어도 좋소.”
 
261
“정말?”
 
262
“정말!”
 
263
내가 그의 한 말에 이렇게 여러 번 다짐을 한 것도 그때가 처음인가 해요.
 
264
“취향이도 곧 그 직업을 버리도록 하오. 직업이란 먹고사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할일을 찾는 것에 의의가 있을 것이오. 사람으로서… 더욱이 우리 처지로서 할일을 찾은 후에도 직업에 매어달렸다는 것은 아주 무의미한 일이오. 나는 어디서 밥벌이를 하든지 그것을 나무라지는 않소. 하나 돈벌이만에 일생을 바치는 사람을 볼 때 더없이 멸시가 갑디다.”
 
265
그는 다시 말을 잇습디다.
 
266
“사람이 제 할일을 찾으려면 알아야 하오. 취향이도 책을 볼 만한 눈은 되는가 싶으니 책을 보시오. 사물을… 현실을 똑바로 볼 만한 힘은 길러야 하오. 나도 조선 청년이지만 나는 조선 청년을 멸시하는 자요.”
 
267
“언제쯤 떠나시나요?”
 
268
무엇보다도 이것이 나는 알고 싶었어요.
 
269
“내일 밤…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270
“내일 밤!”
 
271
“그렇소. 더 연기할 수는 없으리다. 아니, 연기할 수야 있겠죠. 떠나는 대신 도루 서대문 큰집으로나… 간다면…”
 
272
그는 입을 닫습디다. 내일 밤까지라면 이십 시간 남짓하였어요. 그러나 그 이십 시간 동안도 그는 나만을 위해서 앉아 있을 만한 계제가 못 된다는 것을 생각할 제 그냥 가슴이…
 
273
열한시가 지났습니다. 나는 시계를 보이며 그에게 산보 가기를 청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재미없는 듯 대답을 꺼리기에 나는 할머니의 손자라는 여남은 살 된 아이에게 음식과 술을 좀 보내도록 적어서 주었어요.
 
274
그도 그날만은 나의 심정과 같았던지 그것을 굳이 말리지 않습디다.
 
275
화류계 생활 칠 년에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 아니 마지막도 되었죠 ─쓴 술을 마시었어요. 눈물과 술과 반죽을 하여 마시고 하였더라오.
 
276
그도 취하고 나도 취했어요. 알콜이 작용하자 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의 가슴에 안기어 어린애처럼 울었더라오. 그도 나의 상체를 푹 안아줍디다. 이것이 아마 그와 내가 만난 지 일년 만에 처음으로 있었던 일인가 하우. 그러나 그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누가 그것을 믿어주겠소… 아우님이 그것을 믿겠다고? 고마워. 하지만 다른 사람이야 또 있으리까… 아! 가슴 쓰라린 그날 밤! 행복스럽던 그날 밤! 아우님! 그날 밤 하루만의 아내던 나는 영원한 그의 아내가 되고 말았었다오…
 
277
“취향이, 나는 당신을 존경하오!”
 
278
그는 감격하여 이렇게 다시 나를 안아주더이다. 그 말이 내가 화류계에서 굴면서도 순결을 보존한 것을 말함이라고 느껴지자 나는 눈물이 다시 흘렀더라오…
 
279
아, 그날 밤!
 
280
아우님! 내게 그날 밤을 추억함을 더 한 번 용서하여 주어야 하겠소. 나는 그날 밤은 잊을 수 없어요. 지금 내 나이 서른다섯! 사십 평생에 단 하루밖에 없는 그 즐겁고도 쓰리던 그날 밤을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추억케 해주시구려!
 
281
아! 다시 오지 못할 그날 밤이여!
 
282
아, 또 눈물이 흐르는구려! 뭣이? 마음껏 울라고?
 
 
 

11. 11

 
284
…아우님! 그날 밤을 지난 이튿날 멀리 떠나간 그는 가버린 그날 밤처럼 다시 소식이 없었답니다. 내 이야기를 아우님도 들으셨으니까 말할 것도 없겠지마는 그의 편지를 기다리는 나의 심정은 어떠했겠소… 그를 보낸 날부터 나는 초옥이라는 동무와 동거한 것도 혼자만의 시간이 무서웠던 까닭이었다오… 눈물과 눈물의 연쇄!
 
285
아우님! 이것이 나의 생활이었다오. 그런 하루를 거듭하기 칠백여 번!
 
286
놀음에 나가면 집이 궁금하고 집에 앉았자니 분초가 초조하고… 벌써 놀음에 나갈 때면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고 도수장 문지방을 넘는 소처럼 놀음터 미닫이를 열던 그런 옛날의 취향은 벌써 아니었다우.
 
287
나는 하루라도 놀음터가 없으면 못살 것 같아서 놀음터에 가서는 술도 마시고 노래도 마음껏 불렀더라오. 그러다가는 언제든지 울어버리고 말았답니다. 취향이가 술을 먹는다 ─ 이런 소문은 파다하게 서울 화류계를 휩쓸었지요.
 
288
그러나 대개는 이제 취향이도 기생에 이골이 났다고 합디다.
 
289
그가 가고 만 지 이태째 접어들던 겨울 어느 날 아침. 아우님… 나는 그의 편지를 받았었다오! 어디서 어디까지나 그다운 편지…
 
290
“취향이! 두 번이나 편지를 해도 소식 없음은 웬일이오. 나는 세 번까지 참소. 다시 소식 없으면 나도 단념하려오…”
 
291
아우님… 사람의 운명이란 단추 끼우는 것과 같은가 하우. 두 번이나 온 편지. 그것을 초옥이가 가로챘을 줄이야 누가 꿈엔들 생각했으리까요? 그러나 그때는 초옥이도 이미 한강 고기밥이 된 지 여러 달 후… 나는 그 편지를 받은 지 사흘 만에 서울을 떠났었다오!
 
292
상해와 하르빈을 나는 널판처럼 건너다니며 그의 행방을 찾았지만… 이미 십 년, 그는 아마 영원히 갔나보우… 아우님… 아, 술 좀 주오, 포도준 싫어! 그까짓 게 술이란 말이오… 워트카! 워트카!
 
293
뭐라고! 똑똑히 말을 해요! 사내자식이 왜 그리 말을 우물쭈물해! 아이고, 날 좀 보게! 내가 뭔 말을 이렇게 했을꼬… 아우님! 히스테리라고 관대하게 여겨주우. 고맙소. 내가 아우님보고 욕을 하다니…
 
294
자, 다시 한번 뭐라고? 아, 그이 이름? 그것은 알아 뭣하겠수? 본명은 나도 몰라요. 아무개라도? 그는… 그의 이름은 최성환이었다우…
 
295
아? 뭣요? 아우님! 다시 한마디! 그가 아우님의 친구였다고? 선배? 그것이 정말이오? 그래, 지금은? 죽어? 언제? 오오, 그게 정말이오? 아우님! 아 ─우 ─ 님! 그의 무덤…
 
296
그만두우! 그만두우! 누가 아우님더러 무덤을 가르쳐 달랬수? 이름 알아서 그따위 소리 할려구 그랬수… 그따위 소리! 그따위 소리 하는 입 떼버리우! 떼버려!
 
297
아규! 날 좀 봐. 금방 그라고…
 
298
아우님, 노했수? 그래야지! 오늘 밤은, 불쌍한 누이의 하는 노릇이라고 너그러이 봐주구려, 응? 그렇지? 아우님…
 
299
우리, 이 밤이 밝거든 그의 무덤에 갈까? 나는 남편을 찾고 아우님은 친구를 찾고…
 
300
그러지요. 염려 마오. 하나 내야 어디 쓸모가 있어야지… 있기만 한다면 오죽 기쁘겠수… 이대로 죽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아우님, 나 술 한 잔 더 주슈…
 
 
301
〈조선일보, 1934년 12월 16~28일〉
【원문】취향(醉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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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영(李無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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