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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로 간 동무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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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0
이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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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간 동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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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하는 일 없이 한 여름을 거의 다 보내고 있습니다. 일도 일이려니와 올에는 바다에도 못 가고 산에도 못 오르고 더운 한 고패를 거리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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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니 바다니 듣기만 하여도 그리운 소리니 피서라는 것을 일률로 심술궂게 조롱만 할 것은 아닌 것이, 한철 동안 건강을 길러 새 힘으로 업을 남기게 될 수 있다면, 이 역 필요하고 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서를 못 간 신세의 저로서도 바다에 가신 형을 굳이 원하고 게염내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4
가을 일을 위하여서 부디 남은 여름 햇발을 알뜰히 몸에 받아 인도 사람같이 새까맣게 타 오십시요. 바탕은 여전하더라도 빛이나 탐탁하게요. 빈약한 체질이라 하는 소리가 아니나 남의 곱절되는 몸을 가진 비대한같이 우둔하고 보기 흉한 존재는 없는 것 같습니다. 곱절되는 육체를 채우려면 아무리 하여도 생산가치의 곱절을 소비하면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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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한 사람을 채우기에 곱절의 노동력이 들 것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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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육체가 필요하며, 얼마만큼의 식량이 필요해야 하는지, 이것이 문제 고찰의 한 조그만 조각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든 비대한이란 신통하게도 다 같은 세기의 한 유형인 것입니다.
 
7
피서는 못 갔다 할지라도, 칠십 평에 남짓한 주택 속에서 그다지 무덥게는 지내지 않습니다. 뜰에는 앞 뒤에 초목이 무성하고, 집에는 대문까지 합하여 창과 문이 사십여 폭이 달렸습니다. 벽의 집이 아니고 창과 문의 집입니다. 초목 속에 그윽하게 가리워져 있는 창 속은 제법 부러울 것 없는 피서 장(莊)입니다. 원래 푸른 집인데다가 겨우살이가 함빡 덮쳐 붉은 지붕과 벽돌 굴뚝만을 남겨 놓고는 온통 새파란 겨우살이의 집입니다. 푸른 널을 비스듬히 달고 가는 모기둥으로 고인 갸우뚱한 현관 차양은 바로 산비탈에선 산장의 그것과도 흡사합니다. 이른 아침 겨우살이 잎에 맺힌 흔한 이슬방울이 서리서리 모여, 아래 잎 위로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듣기란 산골짝 물소리를 듣는 것과도 같이 금시에 시원한 산의 영기를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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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설계한 사람은 아마도 산을 무척 좋아한 사람인 듯합니다. 머루, 다래의 넝쿨 없음이 서운은 하나 드레드레 열매 맺힌 포도넝쿨로 대신할 수 있겠고, 바람에 포르르르 날리는 사시나무 없음이 한되나 잎이 같은 탓으로 대추나무 보고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동편으로는 기자릉 송림 위로 모란대와 을밀대가 우러러보이고 , 그 아래에 깔린 벼 밭이 보이고, 옆으로는 익기 시작한 능금밭이 보입니다. 서에는 거리의 한 부분과 풀밭과 그 위에 누운 소와 말과 아귀아귀 풀 먹는 염소가 눈에 뜨입니다. 뜰은 그림자 깊은 지름길만을 남겨 놓고는 흙 한줌 보이지 않게 일면 화초에 덮였습니다. 장미와 글라디올러스와 해바라기는 한철 지났으나, 촉규화, 맨드라미, 반금초, 금잔화, 메꽃, 제비초, 만수국, 프록스, 달리아가 한창이며, 더욱이 봉선화와 양귀비와 채송화는 가장 화려하고 찬란합니다. 코스모스도 얼마 안가 피려니와 담장 밑 고목에 얽힌 울콩 꽃이란 꽃다지같이 다닥다닥 달려 한층 운치를 더하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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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포기, 호박넝쿨도 귀한 것이어니와, 가지밭, 토마토송이도 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소나무, 벚나무, 버드나무, 회양목, 앵두나무, 대추나무, 능금나무, 배나무, 포도시렁 ─ 이 모든 것을 나는 얼마나 사랑하고 끔찍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모두 나와 같이 살아가며 나의 생활과 함께 뜻있는 것입니다. 한 포기 한 잎새가 나의 살이요, 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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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옷을 벗고 잠방이 하나만을 걸치고 그 초목 속에 묻혀 그들과 완전히 동화되기를 원합니다. 다만 그 마지막 잠방이까지를 벗어 버리지 못하는 사람된 비애를 불서럽게 여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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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목은 벌거숭이의 나와 함께 즐겨하며 뭇뭇 감정을 나눕니다. 뜰의 초목은 완전히 풀밭과 나를 위해서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한없이 즐겁고 뛰놀 제는, 그러므로 시절을 따라 변하는 초목과 함께 나의 표정과 감정도 변하는 잎새.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초목이 물들기 시작하고 시들어 가려 할 때 나의 마음은 얼마나 애달파질까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쪽 창에 그득 차 있는 오늘의 이 화려한 뜰의 내일을 생각할 때, 나의 마음은 벌써 서글프게 물듭니다. 뼈를 에이는 듯한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되는 것도 이런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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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이 슬픈 인간 ─ 슬픔을 많이 느끼는 인간도 적을 법 합니다. 나뭇잎의 동정에도 눈물 질 때가 있고, 역에서 흘러오는 기적소리에도 마음 스산한 때가 있습니다. 안정할 바를 모르고 늘 떠 있는 넋입니다. 사실 글자 그대로 마음의 고향이 없어요. 오늘 이 아늑한 집 속에서 초목과 함께 마음을 잡고 있으나 나뭇잎이 날리기 시작하는 날 마음도 또한 지향없이 날아갈 것 입니다. 그 어느 다른 모르는 곳에 그리운 사람이 있고, 그리운 곳이 기다릴 것같이 짐작됩니다. 막상 그곳에 다다르면 도리어 이곳이 그리워지고 그리운 사람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을 알게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과 이 그지없는 마음의 방랑과는 늘 어긋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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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아 정처없이 내닫고 싶은 마음, 한정없이 간 곳에 필연코 찾는 꿈이 있으려니 짐작됩니다. 혹은 없을는지도 모르지요. 그 잃어진 꿈을 생각하고 그 무엇이 늘 부족한 현재를 생각할 때 마음은 마치 벌레소리가 일시에 자지러지게 울리듯 금시에 왈칵 서글퍼지며 눈물이 빼짓이 솟습니다. 음악의 마지막 마디가 사라졌을 때와도 같이 마지막 손님의 발소리가 문 밖에 멀어도 졌을 때와 같이 애닯습니다. 사람이란 천상에 외로운 물건입니다. 외로운 속에서 다 각각 자기의 꿈을 껍질 속에 싸가지고 궁싯궁싯 서글픈 평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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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벌써 제법 벌레소리가 어지럽습니다. 가을 벌레소리같이 창자를 끊는 것은 없습니다. 먼 생각에나 잠길 때에는 구슬픈 벌레소리는 가슴속을 암팡지게 파고 듭니다. 침대 마구리를 붙들고 엉엉 울고 싶은 때조차 있습니다. 그런 때 심회란 첫사랑에 우는 어린 가슴속과도 같으나 그러나 소년시대의 감상 이상의 그 무엇 ─ 태고적부터 사람의 생활을 꿰뚫으고 일종의 안타까운 심사가 가슴을 쥐어뜯는 것입니다. 현실과 꿈 사이에 거리가 있고 그 거리가 영원히 주름잡힐 가이없는 한 이 심사는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가지가지의 욕심과 감정을 이럭이럭 정리할 수 있는 것이나 ─ 가령 노염의 감정 기쁨의 감정 등을 각각 적당한 방법으로 정돈할 수 있는 것이나 이 슬픔의 감정만은 알맞게 정리하기가 거북하고 어려운 듯합니다. 감정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 감정 ─ 슬프니까 아름답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으나 ─ 늘 사람은 하는 수 없이 가슴을 빠지지 태우고 가만히 눈물을 흘리면서 실마리가 진할 때까지 그대로 참고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 외에 어쩌는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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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에도 벌레소리는 요란한 것 같습니다. 청명한 날 밤에는 이슬이 많고 이슬 젖은 밤에는 벌레가 요란하니 말입니다. 책상 앞에서 불을 돋우고 얼마나 마음이 쓸쓸할지 모릅니다. 이 푸른 집을 떠나 마음은 한결같이 다른 푸른 집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 있는지는 물론 모릅니다. 책상 앞을 그리는 마음과 창 너머 푸른 하늘을 그리는 모순된 이 두 가지 마음. 책상은 탐탁하나 푸른 하늘은 찬란한 눈앞의 꽃밭보다도 더한층 매력 있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 가을인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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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글이란 산만하고 두서없이 ─ 마치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꼬리와도 흡사합니다. 슬픔의 명제를 말하고자 하였으나 생각의 실마리는 마음의 꼬리와 함께 푸른 하늘 너머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해가 기우니 뜰 앞 초목은 더한층 신선해 보입니다. 붉은 꽃은 반대로 어두워지고요. 이것은 아름다운 조화라고 생각됩니다. 창밖 벚나무 가지에 참새 한 마리 날아와 갸우뚱거리며 잎새를 쪼으면서도 , 팔만 뻗치면 닿을만한 짧은 거리임에도 그는 나를 돌아다보지 못합니다. 사이에 철사망의 덧창이 가리워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나는 참새의 거동을 지척의 눈앞에 손에 잡을 듯이 내다보는 것 입니다. 나는 문득 한 토막의 암시를 발견합니다. 창밖 꿈을 나는 손에 잡을 듯이 내다보는 꿈은 나를 바로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여기에도 한 토막의 서글픔이 있습니다. 가을은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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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계신 까닭에 뜰 이야기를 많이 적었으나, 도회로 돌아오시면 거리의 이야기를 써 보내지요. 부디 남은 날을 즐기시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십시요. 조수냄새와 파도소리를 그리면서 붓을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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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1936. 10
【원문】바다로 간 동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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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석(李孝石) [저자]
 
  1936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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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9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