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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견(杜鵑)과 종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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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5.20
김영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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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鵑[두견]과 종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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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 노름이 조금 지나쳤던 것이다. 새벽녘에 물그릇을 찾느라 더듬거리다가 빈 놋대접만 두어번 만졌을 뿐, 떠놓았던 물은 옆에 코고는 친구가 어느새에 처분해 버렸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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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그릇 들고 새암으로 허청걸음을 바삐 걷다 말고 나는 새 움 나와 하늘하늘한 백일홍 나무 곁에 딱 붙어서고 말았다. 내 귀가 째앵 하니 질린 까닭이로다. 밝은 달은 새벽 같지도 않다. 좀 서운하리만큼 자리를 멀리 옮겼을 뿐 하늘은 전혀 바람과 공기가 차 있지를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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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기름만이 흐르고 있는 새벽, 아 ── 운다, 두견이 운다. 한 5년 기르던 두견이 운다. 하늘이 온통 기름으로 액화되어 버린 것은 첫째 이 달빛의 탓도 탓이려니와 두견의 창연한 울음에 푸른 물 든 산천초목이 모두 흔들리는 탓이요, 흔들릴 뿐 아니라 모두 제 가끔 푸른 정기를 뽑아 올리는 탓이다. 두견이 울면 서럽다. 처연히 눈물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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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그만 시골서는 아예 울어서는 안 될 새로다. 와지끈 와지끈 깨어지는 고로 그 두견이 빚어낸 고사(故事)야 많다. 어려서 들은 글귀로 두견제 두견제 야삼경 화일지(杜鵑啼 杜鵑啼 夜三更 花一枝)란 것인데 첫날밤 동정 처녀가 서서 주고받는 대구로, 백구비 사십리 파만경(白驅飛 沙十里 波萬頃)이라, 아마 남방 어느 시골서 그 동남정녀는 이 5월의 좋은 새벽을 한없이 즐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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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견은 후조라 이곳이라고 해마다 와 울어 주지는 아니한다. 5월에 와 우는 것이 특징이로되, 여러 해 만에 한 번씩 몰려와서는 봄내 울곤 여름이 거의 늦도록 우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새벽같이 술 취했던 덕에 뜻밖에 그 첫소리를 듣는 수도 있지마는 거의 희귀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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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오긴 확실히 왔으니 가끔 울리로다. 이제 3경이니 4경, 5경도 잠은 고만이다. 그리고 저녁마다 새벽마다 매양 그 울음소리에, 잠자고 지내기는 틀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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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봄은 아무 다른 이유 없이 그저 두견 때문에 밤잠을 잘 수 없게 된 셈이다. 밤잠 못 자고 아침 늦잠이나 좀 자질까. 그도 또 틀린 셈이니 두견은 황혼으로 새벽녘까지 울지마는 아침 날빛이 막 돋쳐 오르노라면 이놈은 바로 혼란스럽게 미칠 듯이 노래를 부르는데, 5월을 천하외물(天下外物)은 다 젖혀놓고 저 혼자 즐긴다는 듯이 노래를 퍼붓는 꾀꼬리. 시골이란 원체 숲이 많고 깊고 하여 그 숲은 그런 귀한 손들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이 자랑이요, 숲을 의지하고 사는 시골 사람이야 새벽 잠, 아침 잠을 못 자기로 어디 원망할데도 없는 처지라, 더러 낮잠쯤 자는 것이 흠될 것도 없다 하겠다. 5월은 두견을 울게 하고 꾀꼬리를 미치게 하는 재앙 달. 더러는 사람으로 하여금 과한 탈선도 하게 하지 않는가. 두견은 하늘을 액화시키고 사람들을 그 곳 신비한 심연에 허덕이게 하여 어디까지든지 인간적이라 들새로다. 오! 꾀꼬리야, 날 어서 데리고 가라, 네 고장이 어디고 꼭 있을 것이로다. 너도 후조로다, 까막까치같이 연중 뒤원에 있질 않고 이 5월에 오면, 여름 나고 조금 산들해지는 첫 가을 들어 너는 늬 고장으로 가느니 그 고장이 어디냐. 늬 목청에서 피어나는 흰 구름송이 그 속이냐. 사람이 살지 않는 이른바 선경(仙境)이냐. 꾀꼬리는 두견과는 상극이라 전연 비인간적인 점이 우리 젊은 사람들의 꿈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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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흔히는 그 꿈의 날개는 현실의 모진 매에 후들겨 축 늘어진 바 되지마는 오늘은 모였다. 푸른 잔디 위에 나란히 누워서 쌍쌍이 노래하는 꾀꼬리를 듣고, 코를 찌르는 아카시아 고련근의 철맞은 꽃내음새를 숨막히도록 마시며, 꿈이 물결이나 흐르는 듯한 봄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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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친구야. 현실은 무섭고 괴롭도다. 그렇기로 우리가 그 사이 하루 이 시간을 어찌 갖지 못하랴. 어디까지든지 현실은 무서워, 별이나 달이나 해나 그 꼴을 보고는 상을 찌푸릴 것인가. 현실이 무서웁다니 사람이란 창자를 왜 한 가닥만 가졌느냐. 단장(斷腸)할 것도 없이 변통(變通)하면 그만인 것을 이 세대에 태어난 불쌍한 천재들이 허덕이다 못해 모조리 변통하지 않았느냐. 그들이 백치가 아니므로 스스로 경멸하게 되고 스스로 뉘우치게 될 것이냐. 어디까지나 외가닥 창자를 두 가닥으로 변통해 쓰고도 의기양양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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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되면 사람들은 좀더 멋대로 뛰고 싶고 제 몸을 좀 달리 만들어 보려는 염원에 타는 듯싶다. 바다에서는 돛 높이 달고 떠나 해방되고 싶고, 땅에선 높이 산봉우리 더 위의 구름 속이라도 들고 싶은 초탈욕(超脫慾)이 이는가 싶다. 사람으로 살려면 오로지 떳떳해야 시원하고, 그러려니 현실이 아프고, 그래 우리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차마 눈을 못 감고 가는 게지. 그 자식들의 세대는 어떠할꼬. 꾀꼬리의 종족들도 보아다고. 아배같이 아배같이 눈 못 감고 가던가를. 월계(月桂)·사계(四桂)·해당화, 각기 향합을 차고 향을 풍기는 꽃은 점이로다. 새순도 또한 점에서 비롯했으나 벌써 점이 아니요, 선이로다. 액이로다. 실개천인가 하면 푸른 강물이라, 이제 넓은 바다를 이루려고 한창 철철 흐르고 있는 신록 댓잎은 잎새마다 신구(新舊)가 서로 바뀌어지고 죽순은 지각(地殼)을 펑 뚫으려고 모든 힘을 한데 모아 대기하고, 칡덩굴을 배암같이 지긋지긋 얽혀진다. 암만 보아도 질서와 계약이 없는 성싶다. 암만 보아도 질서와 계약이 있는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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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훈풍이 어디서 처음 일어나는지를 나는 안다. 5월의 아침 아지랑이가 어디서 처음 깔리는지를 나는 안다. 돛은 유달리 희하얗고 산봉우리는 오늘밤에라도 어디고 불려 가실 듯이 아양에 차 있다. 천 이랑 만 이랑 보리밭이 한결 드흔들리면 이랑마다 이랑마다 햇빛이 갈라지고 쪼개지고 푸른 보릿대는 부끄러운 허리통이 드러나지 않느냐. 그 새에 5월의 종다리 산다. 5월도 늦어야 이놈이 노래한다. 물가에나 산골에서나 밭이랑에서나 각각 멋대로 사는 종다리. 밭이랑에서 사는 놈이 사람의 발치에 가장 많이 쫓기는 놈이다. 두견같이 서럽지 않고 꾀꼬리같이 황홀하지 않아 잔잔한 물소리나 다를 바 없는 그 노래는 가장 알맞은 이 5월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걸음을 멈추고 재재거리는 종달을 치어다본다. 워즈워드의 크게 느낀 바 밭이랑가의 어린 소녀의 외로운 콧노래에는 내 아직 흥겨워 보지 못하였느니 키츠의 나이팅게일에 취한 까닭인가. 내 아직 사람이 덜 되고 만 탓인가. 대자연 시인 워즈워드, 소녀의 콧노래가 그다지도 흥겨워서 무비무상(無比無上)의 노래도 되었다는 것을 나는 지금까지도 해득치 못하고 있는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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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종달은 돛을 따라 오르내리고 구름따라 숨고 날지마는 종시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무던히 재재거리기를 좋아한다. 그래도 들을 때마다 새롭지 않느냐. 내 연인이 일찍이 종달새같이 재재거리다가 내게 책을 듣고 울던 시절도 이 5월, 둘이서 산봉우리 높이 앉아 석의(石衣)를 따담다가 재앙을 부린 것도 이 5월이로다. 온갖 풀내음새, 꽃향기에 숨이 막히어 걸음도 거닐 수 없는 5월의 골목길, 만나는 사람마다 부끄럼인지 기쁨인지 분명치 않은 태(態)를 하고 피하듯이 비켜 가면 아늑한 곳 잔디 위에는 제법 노름판이 벌어지고 장고를 쳐 흥을 돋우며 소리를 질러 명창을 뽐낸다. 웬만한 사랑간이면 반백 노인들은 모여 앉아 풍월 시조 풍류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 고장은 모두들 태고인적 사람들만 사는가 싶다. 다듬이 잘된 모시 겹두루마기를 입고 걸음걸이도 태고인적 그대로 난간에 비껴 앉아 글을 읊는 광경은 이 고장 5월 풍경의 가장 높은 장면일 것이다. 모시 다듬이 옷맵시야 우리 의복 문화가 가장 자랑할 수 있는 것의 하나로다. 고아하고 아주 조선적인 것이 다른 비단옷이 감히 견줄 바 못 된다. 서울의 거리에서야 하루인들 그 고아한 태(態)를 보존할 수 있으랴. 먼지와 매연으로 덮어씌우고, 허드슨 링컨이 달리는 그 새에 그리 어울릴 수는 없으나 더러 길거리에서만 내뵈오면 천년 전 신라 양반이나 고려 양반을 대한 듯한 느낌에 위하고 아끼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아낙네들이 잔주름을 접은 연옥색 모시치마를 입으시고 골목길을 나서는 것을 대할 때 내 눈앞에는 저 멀리 하얀 산길이 굽이굽이 흔들려 들어오고 늘어진 버들가지 밑을 키 작은 나귀가 방울 달고 게을리 걸어가는 환영이 나타나서 바로 그 나귀를 잡아타고 어디고 가고 싶은 충동에 못 이기나니, 나귀를 타면 어디로 가랴. 그 댁 문전에 내 나귀 매일 수양(垂陽)이 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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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 5월같이 중고풍물에의 추모와 동경이 목마르도록 치밀리는 철이 또 있을까. 하는 수도 없다. 모시겹이나 다려 입고 버들가지 밑에나 서 볼까. 서투른 거문고나 타고 이 철을 보낼까. 경소년심(更少年心)하는 이 절기는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을 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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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日報[조선일보]》 1939년 5월 20, 24일
【원문】두견(杜鵑)과 종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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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랑(金永郞)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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