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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기(失題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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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2월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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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기(失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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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며칠? 십구일? 십구일이 무슨 요일이던가? 토요일? 아니, 그럼 그럴 것 없이 아주 월요일루 합시다. 월요일 아침으로. 뭐 마찬가지지, 일요일이라 공장두 대개 놀께구. 그래, 그렇게 해요. 응, 응, 그렇지 그래. 그때까진 어떻게 될 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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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렇게 전화를 끊고서야 군주는 모들뜨기 숨을 내쉬었다. 이십일일까지란다면 앞으로 닷새는 있다. 그때까지 씌어질 것 같지도 않기는 했지만, 우선 닷새 동안만이라도 숨을 돌리니 살 것 같아서다. 원래 다작을 하는 편은 못 되었지만 이즈음처럼 소설이 안 씌어진 일은 별로 없었던 성싶다. 갈수록 소설이 어려워진다고 후배 되는 사람들한테도 가끔 이야기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런 때는 대개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이제 소설 공부를 시작했거나 쓰기 시작한 젊은 사람들이 너무 지나치게 쉽게 소설을 다루려 하는 성실치 않은 작가 태도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고, 또 한가지 의미로서는 삼십 년 가까이나 소설을 써오면서도 이렇게 소설에 대하는 태도가 경건하고 진실하다는, 말하자면 자기 선전일 경우가 많지만, 이 허세 속에 그의 진실한 고백도 섞여 있던 것이다. 정말 요새처럼 소설이 어려워져 본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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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인의 대부분은 소재의 빈곤에서 오는 것 같아서 준구는 금년 접어들어서는 전후 세 번이나 일주일 내지 열흘씩 농촌에도 가보았고, 여름에는 어촌에도 들러 보았었다. 남들이 하듯 다방에 우두커니 앉아서 명상에 잠겨보는 짓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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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동안에는 어쩌다 그럼직한 테마가 핑 머리에 떠오르는 일도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막상 책상에 앉아서 구상을 하다 보면 그만 싱거워지고 만다. 자기딴에는 괜찮다고 생각한 테마가 쓰자고 들면 평범해진다. 남이 다 쓰고 남은 찌꺼기만 같아 견딜 수가 없다. 그 무슨 기발한 테마만을 고르재서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남들이 다 쓰고 있는 또 써버린 테마를 재탕해 먹을 수도 없었거니와 그런 짓은 그의 생리에도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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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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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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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주변에라든가 아는 사람들 중에 왜 좀 성격이 별난 사람 말요. 소설에 나왔으면 싶은 그런 사람이 있잖아,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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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해질라치면 집사람한테 이런 소리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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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야 꿈을 꾸지, 만날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으니 뭘 듣고 봐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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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한테도 심심하면 장난삼아 같은 소리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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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내 하나 드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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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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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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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원고룐 반반이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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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반반 아니라두 좋아. 삼칠제두 좋구, 다 줘두 좋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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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다 준대도 좋았다. 원고 빚에 졸리기란 돈 빚에 비할 바 아니다. 지면을 남겨 놓고서 아침 저녁으로 달구치는 데는 정말 한 달쯤이면 죽었다 깨어나도 좋을 것 같은 때가 많다. 더구나 요 몇 달은 선금까지 받아 썼고 보니 달리 해석될까봐 겁도 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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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오십쯤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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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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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소설 썼느냐구 사람에, 전화에 달구치는데 날마다 통금시간까지 술타령하구, 집에 들어오시면 화풀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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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끼,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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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신변에서 생긴 이야기를 곧잘 엮어서 소설도 써내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몹시 부러워지면서도 막상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엮다가는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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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으니 어쨌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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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따지고 나면 대답할 말이 없어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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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구한테 이런 입빠른 소리를 잘하는 젊은 의사 친구가 있었다. 외과의사여서 성격도 걸걸하고 말을 해도 수술하듯 척척 해치우는 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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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치고는 문학 방면의 독서를 많이 하는 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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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란 여자가 있다. 이쁘다. B란 남자가 있다. 남자 눈에는 여자가 이뻐 보인다. 여자 눈에는 남자가 또 늠름해 보인다. 으레 그럴 테지. 그래야 연애가 되지 않겠어요. 차를 마셨다. 극장엘 갔다. 그러나 헤어졌다―선생님, 그래 그랬으니 어쩌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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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렇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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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런 게 소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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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인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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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좌석이었었다. 준구는 그러고 웃고 말았었지만 취중에서도 찔리었다. 그 달 호에 그는 그런 이야기를 억지로 하나 엮어서 몇 푼의 원고료와 바꾸어 썼던 것이다. 얼굴이 뜨거웠다. 문학 권외 사람들로부터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는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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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럴수록에 더욱 소설은 씌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시시하게 여겨지기만 한다. 연애도, 결혼도, 실연도, 미인도, 어느 잡지를 들추든지 모두가 비슷비슷한 인물이요 성격이요 사건이었다. 이름도 장소도 대개는 비슷했다. 이야기 줄거리란 것도 그저 대개가 만났다 헤졌다의 되풀이였고 장소도 다방 아니면 극장, 끽해야 덕수궁 창경원에, 주고받는 대화란 것도 이 소설 대화와 저 소설 대화를 바꾸어놔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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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어떤 대중지에서 인쇄소의 잘못으로 이십여 행이 섞바뀌었는데도 교정을 보면서도 몰랐지만 그후 작자들을 만났어도 아무 말이 없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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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주시니 고맙긴 하지만 참 딱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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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기자는 이런 소리까지 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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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그러지 않아도 짝 말라붙은 소설 재료를 더 궁하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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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편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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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기만 했지, 그 달도 또 마찬가지였다. 책상에 엎드렸다가는 공연히 화가 나서 집안 사람들한테 티적이를 놓거나 휭하니 나가되 술타령이나 하고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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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룐 차치하구 그러다간 독자들이 이준구란 이름조차 잊어버리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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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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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써지는 데야 어떻게 하누. 여행두 좀 하구 연애두 좀 해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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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가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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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렇더군. 요샌 모두 여행을 하구 연애만 한답디다. 그래, 그렇게들 소설을 많이 쓰나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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밉살맞아 하는 소리다. 너무 못 쓰니까 옆에서 보기에도 딱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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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치면 씌어질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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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던 판에 마침 돈에 몰려서 한마디 건넸더니 냉큼 내주면서 닷새 기한을 하던 것이다. 몰리면 씌어지겠거니 했었다. 그러나 몰리고 나니까 되레 더 조바심만 났다. 닷새가 열흘이 되고 열흘이 한 달, 기어코 지면까지 내놓고 기다리는 잡지를 이틀이나 인쇄를 늦추고서도 못 쓰고 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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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매일 졸리다시피 하는 것이 오늘째 만 석 달인 것이다. 저쪽에서는 짜증도 낼 만했다. 그러나 이쪽 한 양은 생각지도 않고 아니 밴 아이 안 낳는다고 달구친 다고 맞짜증을 부릴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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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두 잡지 편집 많이 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불쌍히 생각해서라도 이번엔 꼭 실기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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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남기자면 또 좀 나았다. 여기자가 와서 홀짝홀짝 울어대는 데는 딱 질색이다. 그렇게 무능하거든 그만두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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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두 안 주시면 저두 사표 내겠어요. 안 써주셔서 못 가져가는데 제가 성의가 적거나 무능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거야요. 정말 절 좀 살려주세요. 이번에두 못 들여놓으면 더 있으래두 그만두겠어요. 저두 염치가 있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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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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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문을 만 석 달, 그것도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서 받아온 것이다. 둘은 종합잡지였지만 하나는 준구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순문학지였다. 관계자는 당분간 고료를 받지 않기로 되어 있어 두 잡지사에서처럼 선금 고료 때문에 졸리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더 난처했다. 자기가 관계하면서도 고료가 안 나오니까 안 써준다는 오해가 오기도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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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벌써 그런 오해를 받은 지도 반년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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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년 동안에 준구는 단 한 편의 콩트조차도 못 쓰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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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이 무료히 또 흘러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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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구는 그저 벽에 붙은 캘린더만 쳐다보며 사흘을 보낸 것이다. 그가 쓰련 것은 어떤 농촌 청년이 모델이었다. 지난 정월 밀양, 구포, 진영의 영남지방 일대의 농촌을 순회한 일이 있었다. 문학 생활의 대부분인 이 십 년 가까이를 농촌에서 자랐더니만큼 돌바닥뿐인 서울에서 가끔 흙에 대한 애련한 향수를 느껴서였기도 했지만 고갈된 작가생활에 기름을 좀 쳐보고 싶다는 의욕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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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농촌은 준구한테도 벌써 문학의 샘은 아니었다. 어디를 가보나 삼십 년 전 꼭 그대로의 농사였고 생활이었고 사고방식이었다. 오뉴월의 쇠불알 떨어지기를 기다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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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어떻게든지 우리 농군넬 살기 좋게 해줘야 하잖겠십니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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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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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느니 같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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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곡가가 말이 아니어서 영농비는커녕 품값도 나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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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다고 정부만 쳐다보고 있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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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살 의욕조차도 잃고들 있었다. 이 이주일 여행에서 준구는 가족 생활비의 거의 절반이나 되는 돈을 쓰고도 이렇다 할 소득이 없이 돌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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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 소득이라는 것이 진영에서 만난 농대 출신의 최 군이었다. 최군은 의욕도 있었고 기술도 있었다. 자기 촌을 한번 이상촌으로 만들어보겠노라 기염도 토했었다. 토지도 전답 합치면 육천여 평은 된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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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이오. 어쨌든 우리 농민이 살아야 합니다. 정부 정부 하지만 우리 정부만 믿고 있다간 부지하세월이지요. 최 군 같은 청년들이 자꾸 농촌으로 돌아와서 다각적 영농법도 일깨워주고 정부만 믿는 의뢰심두 교육해주구, 그들의 대변인도 돼주구 하면 차차 나아지겠지. 몇 천 년 전 영농법을 아직두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으니 되겠소. 따비밭 같은 덴 뗄 벗기구 약초라두 심어두면 용돈은 뜯어 쓰지 않으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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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구는 손을 잡듯이 최 군을 격려해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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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비의 일부를 덜어서 주막집에다 닭을 잡게 하고 막걸리도 한턱 내었었다. 최 군도 만족해했었다. 그는 자기에게 애인이 있다는 이야기도 했고, 이 봄에 졸업을 하면 결혼도 해서 같이 손을 잡고 농촌운동을 하겠노라고도 했다. S여대생이라고도 일깨워주었었다. 마침 패스를 집에 두고 나와서 사진을 못 보여드리는 것이 유감이라고 몇 번이나 되뇔 수 있는 그런 청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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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잘하오. 서울에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사양할 것은 없어. 공연히 서울 시굴 오르내리면 객비만 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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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나는 객비보다도 딴걱정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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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리 길은 되는 정거장에 마중까지 나와준 최 군과 악수를 하며 준구는 그를 북돋아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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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최 군의 발견이 이주일 여행에서 얻은 유일한 소득이라 해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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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소설이 될 것도 같다. 그래서 준구는 만 하루 동안 듬성듬성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남산을 바라다보며 상을 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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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라야 최 군의 꿈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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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군이 먼저 착안하고 있는 것은 부산과 마산, 멀리는 대구 같은 도시를 대상으로 한 부업 장려였다. 계란 한 개만도 앉아서 중간 상인한테는 이환 받기가 힘들지만 부산이나 마산만 가면 삼환 삼십전까지 받는다는 것이다. 열 개나 스무 개쯤 들고 버스를 타고 간다면 앉아 파느니만도 못한지라 울며 겨자 먹기로 몇 다리가 건너는 상인들한테 넘겨주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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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동리서 한데 모아서 리어카 한 대에 싣는대도 몇 천 개는 실을 수 있고 여유가 있으면 호박, 오이 등속까지 도시로 직접 내보내는 운동을 하자던 것이다. 이밖에도 토마토의 조기 생산, 양계의 장려, 축산 지도, 약초 재배 등 매호당 최소한도 백 평정도씩만이라도 판매 경작을 시킴으로써 부수입을 늘리어 일체의 가용에 충당만 시킨다면 우선 생산되는 양식만은 가족이 먹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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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제게 그런 것을 지도할 만한 기술이 있으니까요. 먼저 공동으로 온실을 만들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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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런 소리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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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금씩 재밀 붙이게 되면 나중엔 트럭을 한 대 공동으로 사되 이 부근에서 생산되는 호박 종류까지도 부산 등지에 매일 낼 수 있게 될 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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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일에는 반드시 또 반대자가 나서는 법이다. 공연히 게걸대는 상이군인, 희짜만 빼는 제대군인, 이런 사람들 틈에서 꾸준히 일을 하다 보니 대학 출신인 신부가 늘 불만이다. 사랑은 하면서도 농촌과 맞지 않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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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 대립―이런 부부를 그려보리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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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이백 매는 가져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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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대충 얽어놓기는 했으나 아무리 머리를 짜도 첫 발단이 시원치가 않다. 시작만 하면 씌어질 것 같았고, 또 그의 경험으로 보면 첫 발단만 마음에 들면 어쨌든 풀려 나가기도 했던지라 밤늦도록 테이블에도 앉아보았고, 책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도 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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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시 실마리가 풀리지를 않는다. 의자에 앉았으려면 머릿속의 생각이 주르르 흘러내리어 누전처럼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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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또 이번에는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도 보는 것이었으나 잡념이 무릎에 가서 딱 걸려서 솰솰 배설이 되지 않는 것만 같아 그때문에 또 소설이 안 씌어 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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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또 자리를 옮겨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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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이나 테이블 위에 널려져 있는 책이니 시계 따위의 위치에 어째서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알 수가 없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그 위치였었다. 그것이 기분에 따라서 마음에 드는 위치가 있고 신경이 쓰이는 위치가 있다. 그래서 시계고 재떨이고 스탠드고 심지어 원고지 위치까지 이리 놓고 저리 놓고 하다가 보면 날이 밝는 수가 있었다. 오늘이 마치 그렇다. 원고지의 선과 테이블 가의 선이 꼭 평행이 되어야만 쓰일 것 같아서 아무리 바로 놓아보아도 틀리고 틀리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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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이 약해져서 이런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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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에는 이렇게 단념해버렸지만 실상 아무리 동앗줄 같은 신경이라더라도 이렇게 혹사를 당한다면 약해질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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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이 그날은 진로 작은 병 하나를 사다가 단숨에 들이키어 곯아떨어져 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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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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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잠이 깨고 나니 빗소리가 궁상맞다. 빗소리를 자리 속에서 들으면서 발단 첫 줄을 생각하고 누웠으려니 몇 가지의 서두가 감실감실 입가에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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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오늘은 씌어질 것도 같아 부리나케 일어나며 아래층에 소리를 쳤다. 이상한 버릇이 다른 때는 별로 그런 줄을 모르겠어도 글을 쓰고자 할 때는 내 손으로 방을 치우거나 책상 위를 정리하고 나면 이상할 만큼 원고지를 대하기가 싫어진다. 그래서 원고를 쓰다가도 책상 위가 구중중하게 느껴질 때는 사람을 불러서 책상 위를 정돈시킨다. 물론 그것을 보고 있어서는 치운 기분이 나지 않아 잠시 자리를 피했다가 들어가서 책상 앞에 앉는 습성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치운 것이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재떨이고 책이고 방바닥으로 동댕이를 치면 참는 편이고, 대개는 이층에서 안마당으로 날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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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휙 집을 나와버리면 또 좋은 편이요. 대개는 집사람들과 물맞침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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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성질이지만 그 순간에는 도저히 참아지지가 않는다. 자신도 그런 성미에 싫증이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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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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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다. 집 구조가 그래 그런지 아래층에서 하는 소리는 옆에서 하듯 잘 들려도 아래층에서는 이층 소리가 통 안 들린다는 것을 그 자신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세번째는 이웃집에서 내어다보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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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귀들 먹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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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깨어 여러 애들이 재잘대는 소리에 이 세번째 소리도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103
‘참자… 오늘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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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이런 생각을 했는데 발은 벌써 층계를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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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 적은 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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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귀들 처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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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이 내리는 바람에 아이들이 찔끔한다. 아내가 쩔쩔매며 마루로 쫓아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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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이 떠드는 바람에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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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어째 ! 이 둔해빠진 인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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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었고 보니 소설이 씌어질 리 만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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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들으면 요절을 할 일이지만 준구는 그날 아내와 대판 싸움을 했었다. 그들의 부부싸움이란 이십여 년을 두고 꼭 이런 종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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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에는 원고를 찾으러 온다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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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아침 기분이 꽤 좋았다. 준구는 전에 없이 그 자신이 자리를 개키고 책상 위도 치우고 방까지 싹 쓸어내었다. 그러고는 테이블 앞에 앉아보았다. 기분이 착 가라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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씌어질 것 같아서 마음까지 흥겹다.
 
115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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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제목부터 써놓았다. 지금 세상에 최 군 같은 청년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전설에 속하느니라 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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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준구는 솔직히 말해서 요새의 이십대 내지 삼십대 청년들한테 적지않이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가 접촉하는 청년이란 대개가 학생들이었고 특히 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문단에 나가는 데만 신경을 썼지. 문학에 얼마나 성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가 관계하는 학교의 졸업생은 대개가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증을 갖고 있어서 취직 부탁을 와서는 언필칭 서울이라야 한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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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면 변두리라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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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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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두 선생님이 나서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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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구는 비교적 농촌에 관심을 많이 갖고 살아온 터여서 정치 ‧ 경제 ‧ 문화 모두가 농촌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의 시간 이상으로 열을 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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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반응이 있을까 하고 눈치를 볼라치면 이때껏 어느 집 개가 짖었느냐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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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선 두 장 놓구 갑니다. 꼭 서울 시내루 해주세요. 시골이라두 인천이나 영등포쯤은 몰라두 그밖엔 된대두 전 안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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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준구도 참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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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영등포가 언제부터 시골이 됐던가, 응? 자네 같은 쓰겠단 학교가 있으면 내 점심 싸갖구 다니며 말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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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곧잘 젊은 층의 취직이고 원고의 심부름을 해주면서도 욕은 혼자 먹는 이유도 이런 입빠른 소리 때문이었지만, 진영에서 만난 최 군은 그 태도부터가 마음에 들었었다. 첫째 생각이 성실했다. 계획도 구름을 잡는 이야기부터 시작되는 것이 요새 사람들의 사고방식인데 최 군만은 안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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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만한 일부터 시작해보렵니다. 그래서 차차 발전을 시켜야겠어요. 경험두 없구 아직 나이두 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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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이야. 우리네 일이 매양 겉치레가 많으니. 그렇게 건실하게 출발하는 게 좋을 께요.”
 
129
이런 청년은 확실히 전설에 속하느니라.
 
130
첫 발단은 최 군이 졸업하고 와서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시작하기로 하고 네댓 장을 단숨에 써내려갔다. 첫 장은 대개 여남은 장씩이나 버리는 버릇이 있던 준구가 이번에는 단 한 장도 버리지 않고 내리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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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만 가면 내일 새벽까지에 한 백여 매 나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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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삼 매째 숫자를 썼을 때였다. 누가 찾아왔다고 꼬마가 올라왔다. 누군지 모르겠더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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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 보는 아저씨야. 시골서 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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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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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구는 대번 상이 찡그려진다. 시골에서 찾아오는 문학 청년이 준구한테는 딱 질색 이었다. 지금까지 대개가 농촌 상대의 작품만을 써온 터라 독자의 대부분이 면서기, 금융조합, 수리조합 아니면 중고등학교 학생이거나 농촌 출신의 젊은 교사들이었다. 농촌에서 독학으로 소설 공부를 하는 청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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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골 청년들은 순박해서이겠지만 이쪽 사정은 통 생각지도 않고 며칠씩 묵새기려 드는 것이다. 어디고 좋으니 밥값 되는 데만 소개해 내란다. 취직이 될 때까지 버틸 작정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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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돌아다니다가 밤늦게야 집에 찾아드는 사람을 내쫓을 도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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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내년 대학에 들자는 큰놈이 질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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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공부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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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상이 찌푸려지지 않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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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있다구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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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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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오시라구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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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찌푸려졌지만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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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계 올라오는 소리가 그치더니 똑똑 조심성 있는 노크 소리가 들린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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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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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문 쪽을 바라보려니,뜻밖에도 주인공인 진영의 최 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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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최 군이 어떻게―이리 와 앉으우.”
 
149
준구는 반색을 했다. 사실 반가웠다. 그동안 이야기라도 들으면 소설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이었다.
 
150
그간의 안부가 끝나자.
 
151
“마침 잘 왔소. 난 지금 최 군 이야기를 하나 쓰던 길인데…”
 
152
이 말에 최 군은,
 
153
“제 얘길요? 아, 그때 그 얘기 말씀이시군요.”
 
154
하더니 해보니 말과 같지 않았다 하고는 중단한 이유를 한참이나 늘어놓고서,
 
155
“그래, 선생님께 서울 어디 밥자리라도 하나 알선해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찾아뵈러 왔습니다.”
 
156
“그래?”
 
157
준구는 단지 이 말 한마디만 했다. 그러고 얼마 동안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158
“아니, 그럼 중단을 했단 말이오?”
 
159
“네.”
 
160
“일년도 채 되기 전에?”
 
161
“아내가 좋아하지 않아요.”
 
162
“그런 걸 예상도 않았던가?”
 
163
“하긴 했지요.”
 
164
하고는 그런 이야기에는 별로 흥미가 없다는 듯이,
 
165
“선생님을 알게 된 것도 한 인연이 아닙니까. 어떻게 어디 좀 알선해주셨으면 합니다.”
 
166
역시 시골 청년이라서 순진해 그런지 진이 쪽쪽 내리게 졸라댄다.
 
167
준구는 통 말대답도 하기 싫었다. 이런 데 졸리기에는 최근에 너무도 피로해 있던 것이다.
 
168
준구는 담배를 피워물고 남산을 바라보고 앉았다가 테이블 앞으로 갔다. 곧잘 씌어지던「전설」은 정말 전설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었다. 원고지의 이십삼을 지우고 잡지사 책임자한테 편지를 썼다. 또 실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한달만 더 참아 달라는 사정 편지였다.
 
169
“최 군, 이야긴 잘 알았으니까 나가다가 이 편질 좀 전해주게. 바루 종로 네거리니까.”
 
170
“제 얘깁니까?”
 
171
“자네 얘기지, 그럼!”
 
 
172
<「자유공론」3호, 1959년 2월>
【원문】실제기(失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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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