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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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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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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둘레가 깔쪽깔쪽한 오십전짜리 은전 한 푼이 나의 총재산이었다. 이 오십전으로 서울까지의 삼백리 길 노자를 해야 했고, 이 오십전으로 백사지 땅이나 진배없는 서울 에서 고학을 해야 했다. 아무리 물가가 싼 시절이라 하지마는 정말 터무니없는 공상이었다. 열세 살 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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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 해도 집에서는 얼마간의 학비쯤은 보태어줄 수도 있는 형편이기도 했었다. 두 섬지기의 광작이었고 남한테 내어준 땅섬지기로 텃도지 들어오는 것도 약간 있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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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이 보조도 바랄 수 없이 일을 저지르고 집을 떠났었다. 서울 공부 가는 것을 방해하는 형을 재떨이로 때리어 머리를 터뜨렸던 것이다. 아버지한테 붙들리기만, 하면 반은 죽는 판이다. 그날 밤을 메밀묵 장사 하는 복순네 집 벽장 속에서 새우고, 이튿날 새벽 먼동이 트기도 전에 길을 떠났던 것이다. 맨주먹으로라도 떠날 작정이었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니가 오십전 한 푼을 주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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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가서 며칠 있다가 오너라. 끼니 거르지 말구 떡을 사먹는지 밥을 사먹든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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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러주신다. 아버지 성미를 아시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보다도 더 겁이 나시는 눈치시었다. 처음 만져보는 닷 냥짜리다. 그때는 어린 생각에는 이 닷 냥만 가지면 조선땅이라도 살 수 있을 것처럼 내게는 큰돈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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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설날 양직 분홍 두루마기를 새로 해입었었다. 양직이 우리 시골에 처음으로 들어왔었다. 값이 비싸서 아무도 엄두도 못 내는데 어머니가 막내 아들이라고 끊어주셨던 것이다. 그것을 입고 이화(모표)없는 마래기(모자)를 쓰고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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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이천까지는 백사십리나 된다. 장원까지는 지름길을 왔으니까 백이십리 폭이지만 열세 살 난 소년한테는 벅찬 길이었다. 그래도 그날로 이천까지 왔었다. 두 끼 먹고 하루 숙박에 한 냥(십전)이었다. 음성 외가댁에 가서 며칠 묵은 일은 있었지만, 집을 떠나서 객지에 나오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저녁을 먹고 앉았으려니까 설움이 복받친다. 나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말았었다. 울다가 곯아떨어졌다. 눈을 뜨니 먼동이 튼다. 나는 아침도 안 먹고 또 길을 떠났었다. 보행 객줏집 할머니가 신통하다고 하시면서 닷 돈(5전)을 되거슬러 주신다. 서울까지는 아직도 백오십리였다. 경안까지 겨우 와서 자고 이튿날 서울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하니 왕십리다. 서울에는 같이 졸업한 화석이가 먼저 와서 있었다. 화석이는 용산에 고모님이 계시기도 했지만, 집안도 넉넉했다. 내가 터무니없는 고학의 꿈을 꾸게 된 것도 실은 이 화석이 때문이었다. 화석이한테 지기가 싫었다. 화석이가 일번 내가 이번으로 졸업은 했지만 사뭇 일번을 번갈아 다투던 화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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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화석이는 반가워했다. 보름턱이나 먼저 올라온 화석이는 전차도 탈 줄 알았고, 학교도 혼자서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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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얘, 저 육중한 것이 어떻게 저렇게 좁다란 쇠길 위로 달리면서도 쓰러지지를 않는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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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내가 희한해했을 때도 화석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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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밥통, 그게 왜 쓰러져! 안 쓰러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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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저도 똑똑히는 모르는 눈치였는데도 이렇게 핀잔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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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학교를 같이 가준 것도 화석이었고 수속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도 화석이었었다. 휘문 의숙이라는 학교였었다. 지금의 휘문중학이다. 백오십 명 모집에 사백 명이나 된다. 그래도 용히 썼다. 상투를 튼 어른들과 같이 다닌 터라 한문도 제법 했느리라 했다. 그러나 방 붙은 것을 보니 내 이름은 없다. 화석이는 있었다.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글썽해 있으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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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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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화석이가 귀띔을 해주었다. 그제야 자세히 보니 맨 끝에“삼백구십오(?)번은 교장실로 오라.”이렇게 씌어 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사무실로 들어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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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삼백구십오번 이용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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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가 확 벗고 키가 늘씬한 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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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시험엔 합격이 됐지만 너무 어리니까 내년에 오너라, 내년에 오면 무시험으로 넣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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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고 보니 그 어른이 교장선생님이셨다. 일어를 잘하시던 임경재 교장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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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에 합격이 되었다는 말에 나는 용기를 얻고 떼를 써서 들어갔었다. 어리니 내년에 오란 말은 결국 젖 몇 통 더 먹고 오라는 말과도 같아서 분하기도 했거니와 나는 그대로는 다시 집으로 내려갈 형편이 못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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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가 이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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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그놈! 떼가 대단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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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씀하시며 겨우 입학을 허락해주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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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나의 고학생 생활은 시작이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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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했었다. 입학이 되면 학비만은 보내주겠거니 했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날마다 편지가 왔다. 내려오라는 것이다. 나를 붙들어다가 감농을 시키자는 것이다. 형님은 술도 담배도 안하시면서도 노름과 여자를 좋아하셨다. 그래서 늘 빚을 졌고 집에 붙어 있지도 않으시니까 나를 잡아다 앉히자던 것이다. 나도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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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죽어도 안 내려갑니다. 죽게 되면 한강에 빠져 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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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렇게 엇나갔다. 역심이 나기도 했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이원도 보내주시고 어떤 때는 삼원도 보내주셨다. 식비는 쌀 서 말이었다. 월사금은 이원사십전밖에 안 되었지만 내게는 벅찬 돈이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했다. 은단도 팔았고, ‘겐마이빵’ ‘만주나 호야 호’도 불러 보았고, 이공탄도 사러 다니었고, 석탄 구루마 뒤도 밀고 해서 학비를 얻어쓰고 있었다. 하숙집은 지금의 원효로 종점인 구용산이었다. 전차가 두 구역이어서 남대문까지만 탔고 집에 갈 때는 사뭇 걸었었다. 점심이란 것도 별로 몰랐고, 내복을 입어본 것도 열일곱 되던 해 동경에 가서였다. 남들이 점심 먹는 꼴이 보기 싫기도 했고 회가 동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매양 점심시간에는 공받기로 시간을 보내니, 집에 돌아갈 때는 더욱 지친다. 지금 교감으로 계시는 이종서 선생, 외국어대학에 계시는 박규서 선생, 의사이신 김상린 박사, 우리 나라 양화계의 이채이신 오지호 선생, 보성중학교감이시고 서양화의 대가이신 이마동 선생, 이 모두가 그때 공받기 동무였다. 이종서 선생은 ‘다까보’(高帽[고모]) ‘대갈장군’, 나는 ‘들메’, 오지호(그때 이름은 오점수다)는 ‘땅딸보’, 김상린은 ‘두꺼비’, 모두 이런 별명으로 불리어졌었고 선생님들께도 작고하신 김현장 선생님이 ‘마리아’ 선생, 역시 작고하신 김도태 선생님은 ‘꿀꿀대감’, 우리 영어학계의 원로이신 이일 선생님은 ‘도련님’(나중에 와선 ‘모던 보이’, 이렇게 별명이 붙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김현장 선생님은 나의 사 년간 담임선생님이셨다. 말끝마다 하도 ‘말이야’ 소리를 하셔서 우리가 칠판에다 “그랬단 말이야.” 이렇게 써놀라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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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날 말이야 선생이라구 그런다지? 오냐, 내 오늘부터는 절대로 말이야 소릴 않을 테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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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교실 안이 떠나갈 듯싶었었다. 한참 후에야 선생님도 말이야 소리를 또 했다는 것을 깨달으시고서 하신다는 말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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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습관이 돼서 할 수 없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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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러 선생님 중에서 내게 가장 두려운 선생님이 담임선생님과 체조선생님이셨다. 월사금을 제때에 못 내면 담임선생님이 불러내셨고, 훈육 담당이신 체조선생님이 교문 밖으로 몰아내던 것이다. 대개 조회시간에 월사금 체납자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나는 변소에 들어가서 숨어 있다가 ‘와’ 들어갈 때 섭쓸려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가 ‘와줘’ 선생님한테 몇 번이고 끌려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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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줘’ 선생님이란 체조선생님이시던 이기도 선생님이시다. 누가 잘못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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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이리 좀 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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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신다. 때리시는 일은 별로 없으셨다. 그 대신 볼따구니를 잡아당기시는 것이다. 그것이 더 아팠다. 언 볼을 한번 쥐어뜯기고 나면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반 중에서도 가장 많이 볼을 쥐어뜯긴 것이 나였을지 모른다. 교칙을 가장 많이 위반한 것이 나였기 때문이다. 그때 학생들은 구두를 신게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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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금 사원이라는 돈은 내게는 대금이었다. 삼십전짜리 고무신도 미처 댈 수가 없던 나로서는 구두는 감불생심이다. 그래서 나는 체조시간이면 반드시 ‘들메’를 했다. 고무신이 벗어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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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 이리 좀 나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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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조시간이면 으레껏 한번은 불려 나가서 볼을 꼬집힌다. 그래서 아이들은 체조선생님이 출석부를 들고 이만큼 오시기만 하면 “들메, 이리 좀 나와줘!” 소리를 하고 나보다도 선생님을 놀렸었다. 그러고 나면 선생님은 들으시고 그러시는지 못 들으시고 이신지는 몰라도 먼저 내 발부터 살펴보시고서 반드시 한마디 하시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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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 이리 좀 나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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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년 때라고 기억한다. 나뿐이 아니라 고학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실로 폭탄 선언이라 해도 좋을 만한 법령이 선포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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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휘문 학교는 국산 장려를 위해서 오는 오월부터 교복과 각반은 우리 나라 본목, 신발은 병정 구두로 통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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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과 각반, 구두 ─ 이 세 가지를 갖추자면 십원 오십전이었었다. 월사금이 두세 달치씩 밀리고 그날그날 은단이나 빵을 팔아 이삼십전씩 벌어 쓰는 고학생한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교칙이었다. 그것도 한 달 여유를 두고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름 동안 갖은 짓을 해도 교복과 각반만은 마련했으나 구두만은 도리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들메’였다. 고무신 뒤축 턱을 옭아서 발등에다 가새목을 질러 매는 ‘들메’가 체조선생님 눈에는 언제나 거슬렸다. 그도 그럴밖에, 전교에서 병정 구두를 신지 않은 사람은 똠방 나 하나뿐이었던 터라 눈에 띌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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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 이리 좀 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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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조시간뿐이 아니라 운동장에서도 나만 만나시면 으레껏 이렇게 불러세우고 볼을 한번 잡아흔드시던 것이다. 인제는 지쳐서 왜 안 신느냐, 언제까지 신겠느냐를 물으시는 일도 없었다. 그저 불러세워놓고는 한번 흔들어놓을 따름이다. 너처럼 질겨빠진 녀석하고는 말도 하기 싫다는 식이었었다. 그래서 나는 ‘와줘’ 선생님만 번득 하면 솔개미 본 병아리처럼 숨어버린다. 그러다가 딱 마주칠 때는 나는 선생님이 뭐라시기 전에 그 앞에서 기척을 하고 서기로 했었다. 그러면 선생님도 아무 말 없이 한번 볼을 잡아흔드시고 그대로 아무 말도 없이 가시던 것이다. 나는 이 ‘와줘’선생님이 호랑이처럼 무서우면서도 슬며시 정이 붙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은사께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예의에 벗어진 일일지 모르나 선생님은 꼭 메기처럼 큰 입에 카이젤 수염을 기르고 계셨고, 우리를 꼬집으실 때는 그 꺼칠한 수염의 가닥가닥이 곤두서면서 제각기 탭댄스를 하던 것이다. 하도 보아 그런지 아프면서도 우스웠고 또 정까지 드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이리 와줘’ 선생님은 가장 인정이 많으시기도 했던 것 같다. 월사금 안 낸 학생을 돌려보내는 것이 선생님이 맡으신 직책의 하나였건만 다른 선생님들이 안 보시는 데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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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섞여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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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관대하기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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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지 은사들께서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휘문 시절이 그리워지지만 ‘이리 와줘’ 선생님께서 실명을 하셨다는 말과 이어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큼 내가 언짢아한 일이 없다. 나는 지금도 아이들에게 가끔 선생님 추억담을 한다. 옛 이야기는 다 그리워지는지도 모르겠다. 담임선생님이셨던 김현장 선생님만 해도 그렇다. 수학 기초를 잘못 잡아서 갈수록 대수 기하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은 사학년에 과정 낙제를 하고 일본으로 갔었지만 수학 문제를 척척 푸는 선생님과 공받기 친구이던 우리 또래 중에서 수학 문제를 나가서 푸는 아이는 ‘신’처럼 우러러보이던 것이다. 수학 이외에는 겁날 것이 없었지만, 그 숫자라는 것은 지금도 질색이다. 지난 봄이다. 광주서 오지호가 올라오고 김상린을 만나서 삼십오 년 만에 은사 이일 선생님을 조용한 집에 모시고 약주를 대접한 일이 있었다. 여러 가지 그때 이야기가 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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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때 자네들이 참 부러웠네. 신처럼 우러러보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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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니까 김상린과 오지호가 박장대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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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이 사람아! 그래, 자넨 우리가 그렇게 수학을 잘한 줄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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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 그래두 구십점씩이나 받지 않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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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 컨닝야! 컨닝! 이 천치야! 우리가 실력으로 구십점을 딴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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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건 정말 억울한데. 저런 것들한테 최대 경의를 표했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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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박장대소를 했지마는 그렇게도 쌀쌀하고 깔끔하고 오르내림이 없던 ‘마리아’ 선생님이 지금도 퍼뜩퍼뜩 오십을 넘은 내 마음속에 살아오는 것이다. 수학은 아주 단념을 하고 문학 공부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것은 문학이 좋아서보다도 수학에 대한 복수심에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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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무렵의 어느 날 체조시간이었다. 삼학년 이학기 방학을 앞둔, 무던히도 춥던 날 맨 끝시간이었다. 대개 체조시간은 끝이어서 이것이 점심을 모르고 사는 나에게는 가장 고통이었다. ‘와줘’ 선생님의 체조란 그저 한결같이 “앞으로 갓.” “뒤로 갓.” “좌향 좌.” “우향 우.” 하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철봉에 구보였다. 워낙 날이 추워노니까 그랬던지 그날은 풋볼을 갖고 나오셔서 원을 치게 하고 볼 차기를 시키셨다. 그날만은 어찌 되어서였던지 볼을 쥐어뜯긴 기억이 없다. 축구나 야구나 정구나 다 휘문이 세던 시대다. 야구에는 저 유명했던 곰보 피처 김종세 군이며, 축구, 야구, 정구까지 한 ‘다망고’ 이징구 군, ‘두발당성’ 김정식, 명 풀백 강히문, 정구에 김필응, 장은진, 조택원 등 제군이 다 같은 클래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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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갓.” “뒤로 갓.” “좌향 좌.” “우향 우.” 입학한 날부터 되풀이되는 이런 체조에 질린 학생들은 신바람이 나서 볼을 찼었다. 그 볼이 나의 앞으로 굴러왔다. “이리 와 줘.” 할 시간에서 해방이 된 나의 인생은 기쁨 그것이었다. 나는 볼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몸을 솟구쳐 대여섯 발짝 뛰어나가며 본때있게 킥을 했다. 선수는 아니었지만 후보는 되었다.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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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완전히 실패였다 . 분명히 정통으로 찬 볼은 옆으로 살짝 빠져나가고 나는 헛발질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워낙 별러 찬 터라 헛발이 되고 보니 반동도 심했다. 나는 핑그르르 돌다가 퍽 쓰러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웃음이 터졌다. 손뼉을 치고 웃는 패도 있고 허리를 잡고 자지러지는 축도 있다.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너무 열쩍기도 하려니와 창피도 했다. 이 어색과 창피를 얼버무리느라고 나도 껄껄 웃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옆을 보아도 그저 웃고 있고 앞을 보아도 여전히 배를 끌어안고 웃어댄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사방을 돌아 보았다. 그래도들 웃고만 있다. 더 알 수 없는 것은 나를 보고들 더들 자지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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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것들이 미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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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이가 없어 멍청하니 섰으려니까 이번에는 체조선생님과 나와를 번갈아 보며 웃어댄다. 그제서야 나는 체조선생님이 볼을 만지고 계신 것을 알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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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아, 네 고무신짝이 체조선생님 볼따귀를 갈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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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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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볼을 차는 바람에 들메가 끊어지면서 고무신이 벗겨진 것이다. 벗겨진 것까지도 좋았다. 고무신 짝이 붕 떠가서 딴전팔고 ‘이리 와줘’ 선생님의 언 뺨을 후려쳤다는 것이다. 그러니 웃음판이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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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처럼 나는 각다분한 경험을 한 일이 없다. 나는 눈이 다 침침해졌었다. 상기가 된 것이었다. 무슨 벼락이 내릴지 몰라서 나는 조마조마 눈치만 보고 있었다. 선생님도 볼에서 손을 떼고 나를 꾹하니 바라보고 계셨다. 드디어 폭발이 되었다. ‘와줘’ 선생님의 그 우람스럽던 소리가 오늘은 더한층 엄숙하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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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 이리 좀 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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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으로 나섰다. 다리가 사뭇 떨린다. 웃음소리도 그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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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다가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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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분부대로 앞으로 나서니까 선생님은 전에 늘 하시듯이 나의 언 볼을 꽉 집어 잡아흔드신다. 눈이 다 그쪽으로 쏠리듯 아팠다. 이런 때는 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을 직책으로 하고 있었다. 얼마를 쥐어 흔드신 뒤에 선생님은 호령하듯 이렇게 명령을 하시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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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 오늘 저녁 내 집으로 좀 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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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뿐이 아니었다. 모두들 눈이 동그래진다. 사무실이 아니라 분명히 당신 집으로 오라고 하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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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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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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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들와들 떨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나의 귓전을 선생의 우람한 말소리가 또 한번 울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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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는 길에 와줘. 내 조카 헌 구두가 들메한테두 맞을 거야,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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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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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울음이 복받치어서였었다. 이기동 선생님께는 아드님이 하나도 없으시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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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원문】들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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