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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에 있어서의 상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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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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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에 있어서의 상징
2
- 소월시의「초혼」을 중심으로
 
 
3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4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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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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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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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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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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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10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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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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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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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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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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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16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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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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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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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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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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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던 그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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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던 그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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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소월의 시 「초혼」의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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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품을 중심으로 조선시에 있어서의 상징,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 땅 시인에 있어서의 상징의 역할과 독자에 있어서의 상징의 역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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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의 저작 연대는 적확히 알 수 없으나 1925년 12월에 간행된 그의 시집 『진달래꽃』의 「독고(獨孤)」 일련 속에서 볼 수 있고 또 그의 유일한 사우(師友)인 안서 씨의 기술에도 『진달래꽃』안에 있는 모든 작품은 대개 그의 소년기인 오산학교 중학부 시절에 구상이 된 것이라 하니 1903년 출생인 그로서는 이 작품이 스물 안팎의 소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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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미처 3 ․ 1운동이란 거족적인 대사건은 일어나지도 않고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점차 부강해지며 이 땅에 일제 헌병정치는 날로 심하여 갈 때 적도(敵都)에서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교편을 잡은 문학 청년 김안서. 그리고 그의 영향을 누구보다도 많이 따른 소년 김소월. 그러나 이러한 속에서 소월이 중학부 2년급이 되는 해 그들은 조선 사람이면 누구나 일생 동안에 큰 충격을 받았을 1919년 3월 1일을 맞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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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안서는 열렬한 정열의 시인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 땅에서는 제일 먼저 시집을 간행하는 광영을 가졌고 또 그 시집이 서구의 서정 세계를 처음으로 이 땅에 소개하는 영예도 가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환경과 위치는 다감한 그로 하여금 보들레르와 베를렌과 랭보를 근원으로 하는 불란서의 상징파와 아서 시먼스를 일련으로 하는 영국의 세기말파(이것도 상징주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를 좋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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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동경에 있을 때 일본에서도 서구시의 이입에는 우에다(上田敏)와 나가이(永井渮風)등의 상징시 번역이 풍미되었으며 이 땅에서도 그 보다 후에 나온 유위(有爲)한 시인들이 처음에는 이와 같은 경향으로 흘렀으나 여기 구태여 ‘백조’일파의 예를 들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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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이 시를 사랑하고 시를 보는 눈은 안서를 통하여 떴다. 그러니까 그에게서 조금치도 안서의 기운이 들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소월의 상징시와의 관계를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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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초혼」을 읽을 때 시 속에 있는 그대로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를 아무렇게나 생각하여도 좋다. 이름의 주인공(소월이 그처럼 마디마디 사무쳐 부르는 주인공)이 과거 무너져버린 우리의 조국 조선이라고 하여도 좋고 또한 그냥 그의 사모하던 한 여인이나 더 나아가서는 아무런 흥미도 없는 그의 어버이라도 상관이 없다. 시가 독자에게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의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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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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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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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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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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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읽고 나면 우선 가슴에 콱 막히는 것은 애절한 공감이다. 그리고 다음에 느껴지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그와 함께 외친 무언의 부르짖음일 것이다. 이 뒤엔 독자가 어떠한 연상을 하든지 각각 자기 깜냥대로 그 의미를 찾는 것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시는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이다. 느낌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이 향수되는 것이 다 각기 한때의 사람으로서 어떠한 공통성을 갖느냐 하는 데에 그 작품의 위치는 결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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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소월의 시 「초혼」은 그의 전 시작뿐만 아니라 8월 15일 이전 일제의 부당한 학정 아래에서 씌어진 조선의 시 가운데에서도 그 한결같은 심정에 있어 그 애절함에 있어 그 모든 것을 다 기울이고도 남는 정열에 있어 이만큼 아름다운 시는 별로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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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을 통하여 느끼는 것은 지금도 우리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것 아니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형언할 수 없는 공허감을 깨닫는 것이요 또 작자와 함께 이 상실한 것에 대한 애절한 원망(願望)을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혼」이 의도한 바는 어느 것이라도 좋다. 적어도 이 땅에 생을 타고난 우리가 여기에서 느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의 운명감이요 피치 못할 현실에의 당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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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시를 받아들일 때 피할 수 없는 것은 그 위치이다. 우리는 어떠한 사소한 감정과 정서를 통하여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시인들의 입에는 무형의 재갈이 물리고 그들의 붓끝에는 소리없는 수갑이 채워져 있을 때, 적어도 그들을 통하여 무엇을 다시금 느끼고 찾으려 하는, 이 땅의 독자에게 있어서는 저절로 어떠한 상징의 세계를 구하지 않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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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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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그스름한 언덕, 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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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더기도 움직이며, 달빛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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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만 남은 노래 서리어 엉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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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상들의 기록을 묻어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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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루 찾노라,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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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적 없는 노래 흘러 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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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가득한 언덕으로 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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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48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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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소월이 다시 ⌜무덤⌟이라는 시를 내놓는다 하여도 우리는 여기에서 먼저와 같은 민족성에서 오는 크나큰 공감을 느끼게 된다. 이 속에서 그 상징성이 비유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다만 그의 예술적 표현이 우수하였음을 말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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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월은 한란계와 같은 시인이다. 혹독한 슬픔과 억압과 절망을 따라 그때그때의 분위기와 환경을 따라 그의 시는 수은주와 같이 상승하기도 하고 하강하기도 하였다. 좋은 의미로 말하여도 그는 정신의 자기 세계를 파악하지 못한 박행(薄幸)한 시인이었다. 이리하여 소월의 시는 조선의 양심적인 시인이면 의례히 가졌을 소극적이나마 반항과 자유를 위한 상징의 세계는 깊이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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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처음으로 서구의 시를 이식한 것이 모두 상징시의 입김이 닿은 것이요, 국내에서도 순전히 문학 청년 출신으로 된 시인(『백조』의 회월, 월탄, 상화)이 배출하여 그들이 즐겨 따른 것도 상징시의 세계였으니 이것은 이 땅의 역사적 환경의 필연적 소산이나, 이 땅의 상징시가 소위 불란서에서 베를렌을 거쳐 말라르메가 주장한 형식의 완벽을 위한 심벌리즘이나 혹은 영국의 아서 시먼스가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자국 내의 세기말의 일파와 행동한 그러한 상징의 세계와도 다른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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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곳에서도 『백조』창간 당시 서구 상징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나타냈다고 볼 수 있는 회월과 월탄도 그 작품 표현에 있어 기분상징(그것도 소시민의 입장에서)의 역(域)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이때의 가장 위대한 시인 이상화 씨도 처음에는 이들과 같은 경지에서 더 나가지 못하였으나 차차로 그의 정신적인 발전은 관념상징의 역(域)에 이르러 의식적으로 민족적인 운명감과 바른 현실을 튀겨내려는 노력에까지 나갔다. 그러므로 상화 씨의 작품 세계가 곧장 경향적인 색채를 띠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자기의 테두리를 벗어나 더 큰 안목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은 그 당시 1920년대의 조선적인 현세에 있어서는 문단뿐 아니라 이 땅 정신사상에 있어서도 큰 혁명적인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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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조선의 시작품이 처음으로 외래의 사조를 받아들인 것도 상징의 세계였고, 또 우리의 정치적인 환경이 양심적인 자의사(自意思)를 표시하려면 저절로 작가가 그 작품 세계에 상징적인 가장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땅의 시인은 누구 하나 상징의 세계의 핵심을 뚫은 이도 없었고 또 이 세계를 형상적으로도 완성한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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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물론, 사상의 후진성과 형식의 미성숙에 연유된 것이다. 이 땅에서 상징의 세계를 받아들일 처음의 본의는 그 받아들인 사람들의 경제적 토대가 아무리 유족한 것이라 하여도 그것은 유락(愉樂)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식민지의 백성으로서의 내면 모색과 정신적 고뇌의 발현 내지 합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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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동인 가운데 또 하나 우수한 소질을 보여준 시인 노작(露雀)은 눈물에 젖은 낭만을 풍기고 뒤의 월탄도 낭만을 지닌 의사를 산문으로 써 보여 주었다. 1920년대―3 ‧ 1운동의 여파와 사이토(齊藤實)의 문교정치의 엷은 틈으로 뚫고 나온 우리 문학의 태동은 돌이켜보면 참으로 눈부신 일이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고 눈물겨운 일이었다. 무엇을 받아들이느냐 또 어느 것을 가져오느냐, 여기에도 당황할 일이었으나 사회적인 위치로 보더라도 이 땅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그리 큰 명예도 안 되고 더구나 생활의 수단은 염의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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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문학에의 길로 발 벗고 나서게 한 것은 순전히 이 땅에 삶으로 인하여 벅차는 가슴을 호소하기 위함이요, 자기의 위치를 탐색하기 위함이요, 또 불의의 일에 반항하고 투쟁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문학을 자기의 생명으로 알고 싸워온 이는 거의 모두가 이십 안팎의 소년이었다. 이것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이처럼 깨끗한 피와 끓는 가슴만이 모든 이해 관계를 떠나 오로지 정의와 진실을 향하고 나갈 수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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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현실은 이들로 하여금 정상한 발전을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조건이 누적하였고 또 이것을 무릅쓰고 싸워나가기에는 너무나 과중한 부담이었으며 잠시도 휴식할 사이 없는 투쟁이 필요하므로 언제나 그들은 그들의 청년 시대가 지나감과 함께 문학 생활도 떠나보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물론 나는 여기에서 어느 한정된 범위 내에 자위하고 소극적인 불평과 불만의 표시를-이것조차 내종에는 순수문학에 상치되는 것이라고 배격하는 부류도 많았지마는-하는 타성적인 문학인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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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새로 나오는 청년들, 이네들도 3 ‧ 1운동이니 광주학생사건이니하는 거족적인 정신운동이 점차로 위축하고 일제의 비망(非望)이 더욱더 커감을 따라 우리 시단은 말할 수 없는 저조를 보게 되어 처음 우리땅의 청년들의 빛나고 씩씩하던 그 정신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다만 한정된 자기 세계와 위치를 감수하며 이것을 합리화하려는 비진취적인 무리의 자칭하는 예술 지상적 견해와 그렇지 않으면 건전한 비평정신은 없이 그저 감정적으로 몸부림치고 들뛰는 시인 이것도 주로 청년, 아니 소년이라야만 쓸 수 있었다는 것은 이 땅을 위하여 지극히 불행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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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서구 상징주의의 정당한 해석과 소화를, 그리고 조선내에 있어서 상징세계의 필연성과 그 역할을 논의할 기회조차 없었으며 또한 다른 문예사조와 마찬가지로 깔고 뭉갠 것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떠한 곡절을 거쳐서라도 19세기 말에 전 세계의 문학사장계를 휩쓸던 세기말의 부패한 퇴폐사조와 여기에서 우러난 상징주의는 이 땅을 찾고야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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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에 있어서의 이 사조의 수입은 안서를 효시로 하나 연하여 뒤에 나타난 『백조』 동인의 일부에서도 이것을 어떠한 이념상의 공명과 소화에서 발전시킨 것이 아니고, 당시 너무나 고루하였던 봉건사조에서 처음으로 시민의 한 성원으로 눈뜨기 시작하는 그들이 감정적으로 이것이 심하다면 정서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시인들이 처음으로 문학에 있어서의 상징성을 중대시하고 한 방편으로 쓰게까지 된 것은 외래의 사조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이 땅 식민지적인 질곡에서 그들이 조그만치나 마라도 우리들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 내지는 주장하기 위하여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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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문학상의 상징사조가 서구와 조선에 발생된 근거를 밝히자면 구라파의 상징주의는 그 당시 지배계급에 있는 부르주아지가 정신문화에서 벌써 그의 진보적인 역할을 다하고 행동의 도피에서 오는 현상이었음에 불구하고 이 땅에서는 처음으로 눈뜨는 시민계급이 우선 그 기분적 상징세계에서 자기 위치와의 공감성을 발견한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진보적인 청년들이 처음으로 어느 나라와도 비할 수 없는 후진제국주의의 식민지에서 정당한 자의사와 공통된 민족 감정을 걸고 나와 합법적으로 싸우는 데에 그 거점을 잡은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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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러면 이 땅의 독자로서의 상징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받아들였느냐는 것이겠으나 독자로 앉아서도 이상의 경우를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각 개인의 환경과 체험과 또 그 지식 정도에 따라서 어떠한 작품이고를 느낄 것이겠으나, 하나의 커다란 일치점은, 공동체의 문화 환경을 가진 우리들로서 결정적인 것은 민족 감정에 부딪칠 때에 누구나가 다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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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상에서 조선시에 있어서의 상징세계가 가진 역할과 독자들의 향수한 위치를 밝히었다. 그리고 다시 서구에 있어서의 상징세계는 그 문학적 표현에서 산문에는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과 같이 그 세계가 최고도로 발전하여 이 정신은 벌써 하나의 형이상적 관념 애완에 이르게 되고 시에 있어서는 형식의 너무나 완벽한 말라르메의 도회(韜晦)의 세계를 거쳐 종내에는 발레리의 해설을 위한 해설에까지 이른 것과 스스로 다르다는 것도 명백히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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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조선시에 있어서의 상징은 현 정세 아래에서는 어떠한 양상과 역할을 가질 것인가. 이것은 물론 우리 조선이 세계제국주의의 간섭 아래에 있는 한, 그리고 우리 인민이 식민지적(이것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라도)인 면모를 벗어나지 않는 한 건실한 면에서도 일제 시대에 뜻있는 선배들이 한 방편으로 쓰듯 또한 방편상으로 쓰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여기에서 또 하나의 악용된 영향을 지니고 갈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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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1930년대 이후 더욱이 일지(日支)전쟁의 단초로부터 문학을 지망하기 시작한 젊은 층과 또 사랑하게 된 애호층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받아들인 왜곡되고 보잘것없는 위축된 정신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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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는 이 땅은 물론 비교적 언론이 자유로울 수 있던 일본에서도 당시의 지상에 발표할 수 있던 작가들은 지나간 독일 낭만파와 같은데서 자기와의 합일점을 찾아내어 일로(一路) 어거지로 조작한 일본정신 같은 데에 적극 협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불란서 상징파의 절대적 영향에서 생겨난 독일의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의 순정예술관, 즉 현실의 생활은 진정한 예술의 방해물이요, 인간의 사유와 충동도 예술 가운데에서는 빼내야 할 것이요, 정치적 사회적인 것은 일체를 금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 세계관조차 시와는 무관계한 것이라고 열렬히 주장하는 이 사조를 영합하여 이 일련에서 싸고도는 이론가(쿤놀프와 베르트람)와 작가(한스 카로사와 헤르만 헤세 등), 그렇지 않으면 릴케 (물론 이상에 열거한 사람들이 상징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같은 사람들이 일부 문학청년 간에서 (현실에 영합하는 착의(窄義)적인 면에 있어 비진취적인 점에) 주소를 이룬 것은 사실이니 무어 하나고 일본을 거치지 않고 받아올 수 없는 이 땅의 정세로서는 이것이 끼친 바의 해독―즉 투쟁과 진취를 거세당한―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68
이 철기. 다섯 개의 수챗물 구녕을 가진 연못은 사뭇 권태 속에서 깔고 뭉갠다. 둘러보면 끊임없는 비바람에 씻긴 다만 불길한 빨래터. 모진 비바람을 고(告)하는 지옥의 번갯불에 파랗게 질려 보이는 안쪽 층층대에는 거러지의 떼들이 꿈틀거리고 너는 그들 청맹과니의 푸른 눈동자를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삭신을 두른 때묻은 아래옷을 조소하였다. 아 병대(兵隊)들의 빨래터. 공동의 목욕장. 물은 항상 거멓고 아무리 더러운 병자라도 꿈에조차 이곳에 빠진 놈은 없었다.
69
예수가 맨 먼저 대업을 행한 곳도 여기다. 나약한 사람 같지 않은 무리 와 함께……
 
 
70
차라리, 분노의 시인 랭보가 현세를 지옥으로 느끼고 이것을 두드려부수자고, 이십이 되어 남달리 먼저 자의식에 눈뜬 이 희유한 천재가 틔워준 상징의 세계를 이 땅의 청년들이 받아들였던들 지금의 시인들은 벌써 문학을 집어던졌거나,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격분에 눈을 떠 훨씬 더 찬란한 이 땅의 시문학을 꽃피게 하였을 것이다.
 
 
71
본고는 일단 여기에서 그친다. 그러나 나의 입론이 소월의 「초혼」과 「무덤」을 통하여 하여진 것을 부족히 생각하는 이가 있을까 하여 다시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 순전히 민족적 감정만을 걸고 나온 작품을 몇 개 보족(補足)하겠다.
 
 
72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73
벌 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74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75
즐거이, 꿈 가운데.
 
76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77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78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79
새라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80
이처럼 시작하는 그의 시 「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하는 것도 있거니와 그보다도 더 구체적인 것은 소월이 그 말년에 3 ‧ 1운동 당시 오산에서 그가 다니는 중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조만식 씨를 사모하여 노래한 것이 있으니
 
 
81
평양서 나신 인격의 그 당신님, 제이 엠 에스
82
덕 없는 나를 미워하시고
83
재조 있던 나를 사랑하셨다.
84
오산 계시던 제이 엠 에스
85
십 년 봄 만에 오늘 아침 생각난다
86
근년 처음 꿈 없이 자고 일어나며.
 
87
얽은 얼굴에 자그만 키와 여윈 몸매는
88
달은 쇠끝 같은 지조가 튀어날 듯
89
타듯하는 눈동자만이 유난히 빛나셨다.
90
민족을 위하여는 더도 모르시는 열정의 그 님.
 
91
소박한 풍채, 인자하신 옛날의 그 모양대로,
92
그러나, 아아 술과 계집과 이욕에 헝클어져
93
십오 년에 허주한 나를
94
웬일로 그 당신님
95
맘속으로 찾으시오? 오늘 아침.
96
이름답다 큰 사랑은 죽는 법 없어,
97
기억되어 항상 내 가슴속에 숨어 있어,
98
미쳐 거츠르는 내 양심을 잠재우리,
99
내가 괴로운 이 세상 떠날 때까지.
 
 
100
하는 이 「 제이 엠 에스」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만 읽어도 소월이 직접 정치적인 행동은 없었다 하나 그 민족적인 양심만은 끝까지 갖고 있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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