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比較[비교]하여
4
예술이란 무엇이냐, 여기 대한 해답은 헬 수 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그 중 정당한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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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기 기름자에게 생명을 부어 넣어서 활동케 하는 세계 ― 다시 말하자면, 사람 자기가 지어 놓은, 사랑의 세계, 그것을 이름이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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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요구로 말미암아 예술이 생겨났느냐, 한 마디로 대답하려면, 이것이다. 하느님의 지은 세계에 만족치 아니하고, 어떤 불완전한 세계를 자기의 정력과 힘으로써 지어 놓은 뒤에야 처음으로 만족하는, 인생의 위대한 창조성에서 말미암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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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참뜻이 여기 있고 예술의 귀함이 여기 있다. 어떻게 자연이 훌륭하고 아름다우되, 사람은 마침내 자연에 만족치 아니하고 자기의 머리로써 ‘자기의 지배할 자기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사람이 사람다운 가치도 여기 있거니와, 사람다운 사람의 예술에 대하여 막지 못할 집착을 깨닫는 점도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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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술이 생겨날 필요는 있지만, ‘필요’뿐으로는 생겨나지 못한다. 여기는 생겨날 만한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요소는 무엇이냐, 아무 사람에게도 가득 차 있는 에고이즘 ― 즉, 자아주의 이것이다. 극도의 에고이즘이 한 번 변화한 것이, 참 사랑 ― 자기 있고야 나는 참 사랑이다. 이것 ― 이 사랑이, 예술의 어머니라면 어머니랄 수도 있고, 胎[태]라면 태랄 수도 있다. 자기를 대상으로 한 참 사랑이 없으면, 자기를 위하여의 자기의 세계인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자아주의가 없으면 하느님이 지은 세계에 만족하였을 것이요, 따라서 예술이 생겨날 수가 없다.
9
세계에 만족치 못한 ‘사람’은, 국가를 만들었고, 여기도 못 만족한 ‘사람’은 가정을 만들었고, 여기도 만족치 못하여, 마침내 자기 ― 개인의 세계이고도 만인 함께 즐길 만한 세계 ― 예술이라는 것을 창조하였다. 이렇게 자기의 통절한 요구로 말미암은 ‘예술’은, 이것 즉 인생의 기름자요, 인생의 無二[무이]한 성서요, 인생에게는 없지 못할 사랑의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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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와 같은 논리의 안경을 쓰고, 이 세상의 문예 예술가를 내어다 보면은, 참 예술가다운 예술가는 과연 몇 사람이나 있느냐, 인생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인생의 지은 세계는 즉 인생 그것이 아니면 안되니까) 이리 구을리고 저리 구을릴 만한 능력을 가진 문학자가 몇이나 되는가. 어떤 문학자는 ‘인생’을 멀리서 바라보고 감히 손을 대려고도 못하였다. 어떤 문학자는, ‘인생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면서 문만 두드리고 있었다. 어떤 문학자는 인생이라는 것을 쿡쿡 찌르면서 자세히 관찰은 하였다. 그렇지만 어린애도 하느님의 세계에 만족치 않고, 인형이라는 자기의 세계를 사랑하는 이 인생에서, 이 누리에서, 오해한 인생이든 어떻든, ‘자기의 창조한 인생, 자기가 지배권을 가진 인생’을 지어 놓고 자기 손바닥 위에 뒤채어 본 문학자는,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되는가?
11
나는, 이즘 참 위대하다는 두 문학자를 붙들어서 이 두 사람의 참 예술적 가치를 비판하려 한다.
13
톨스토이는 특별히 그의 숭배자 밖에 공정한 비평가에게는 모두 질책을 받았다. 무론, 그의 청년기의 작품 「유년·소년·청년」, 「코 ― 카서스」,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세바스토보리」 등 그가 심기 변화하기 전의 작품은 아무도 이렇다 저렇다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만년의 작품과 논설은 모든 공평한 비평가에게 채찍을 맞았다. 실상으로 그의 만년은 미치광이다. ‘예술론’에서는 모든 예술가, 특별히 잉글리쉬 셰익스피어와 독일 베에토벤을, 그 큰 작곡가와 작극가를 매도하고 시성 단테까지 버리라고 세계에게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 이론은 세계에서 아무도 비웃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톨스토이의 귀족적 교만과, 자기 밖에는 세상에 사람이 없다는 자만심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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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읽고는, 아무도 떨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두운 車室[차실] 안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신비적으로 하는 곳을 읽을 때는, 부르르 안 떨 수가 없다. ‘이것 보아라, 이것 보아라’, 톨스토이는 인생의 가장 악한 면을 붙들어 가지고, 우리의 앞에 내어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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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이리이치의 죽음」에서 톨스토이는, 죽기 전에 뉘우치라고, 무섭게 우리에게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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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움에 반짝이는 빛」에서는, 너희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톨스토이는 호령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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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 예를 들 수는 없으되, 실로 만년의 톨스토이는 광포한 설교가이었었다. 그는, 우리 멱살을 그러쥐고, “이놈, 사랑하여라”라고 명령한다. 그는 우리를 밟고 “겸손하여지겠느냐 안 지겠느냐” 토사를 받는다. 그는 우리 머리채를 잡고 일 년에 두 번 이상은 夫婦同衾[부부동금]을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다. 그는, 도끼를 쥐고 우리 앞에 막아서서, 예배당에 가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고 위협을 한다. 참으로 「참회」를 쓴 다음의 톨스토이는 ‘이상한 경험의 세계로 말미암아, 건전한 재능과 건전한 예술의 분야를 내어던졌다.’ 그리고 자기의 재능에 대한 자신으로 말미암아 중심을 잃고 필요없는 한 횡포한 설교자가 되어 버렸다. 비평가들에게 힐책을 안 받을려야 안하지 못할 경우에 빠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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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반대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와 같은 악평을 안 받았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았다. 그의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군중이 열광하여 그를 환영하였다. ‘사랑의 철학자여’, ‘성인이여’ 모든 사람은 그를 존경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금세에는 이해 못하는 사람이 있으되, 그는 오는 세기의 문학자이다, 선지자이다’ 모든 사람은 그에게 찬사를 바쳤다. 톨스토이는 그의 숭배자에게만 ‘위대한 인격자’라고 칭송을 받고, 그 밖의 사람에게는 ‘악마여’ ‘사회의 죄인이여’ ‘그의 교훈은 모두 노파의 헛소리로다’ 등으로 惡罵[악매]를 받을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인에게 환영을 받았다.
19
톨스토이는 너무 극단으로 나갔다. 너무 미술적으로 나갔다. 그러하니까, 그에게는, 반대자도 많았거니와 또 숭배자도 많았다. 그들은 톨스토이를 ‘구세주’라 부르고, 위대한 인물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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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반대로, 도스토예프스키는, 특별히 ‘숭배자’라는 것을 못 가졌다.
21
만인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지만, 특별히 숭배는 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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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사랑’의 가면을 쓴 ‘위협자’이었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온건한 사랑의 지도자이었었다. 물론 그들의 길의 차이점도 이것이거니와, 세상에 바친 기름자의 각각 다른 점도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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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 위의 평론은, 세상 사람이 다 ― 아는 바요, 그 두 위대한 문학자를 思想[사상] ― 主義上[주의상]으로 논한 점에 지나지 못한다. 한층 더 들어가서 이 두 문학자의 예술적 가치를 평하려면 어찌 될꼬. 예술이란 자아적 사랑이 낳은 ‘자기를 위하여 자기가 창조한 자기의 세계’라는 정의를 세워 놓고 ― 즉, 예술가란 ‘한 개의 세상 ― 혹은 인생이라 하여도 좋다 ― 을 창조하여 가지고, 종횡 자유로 자기 손바닥 위에서 놀릴 만한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정의를 세워 놓고,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비교하면, 그들은 과연 어느 편이 勝[승]하고 어느 편이 劣[열]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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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도스토예프스키를 보자. 그는 마침내 ‘인생’이라 하는 것을 창조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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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것도 훌륭한 ― 참 인생의 모양에 가까운 인생을 창조하였다. ‘사랑으로써 모든 것은 해결된다’는 인생을 창조하였다. 그렇지만 그 뒤가 틀렸다. 그는 자기가 창조한 인생을 지배치를 않고 그만 자기 자신의 그 인생 속에 빠져서, 어쩔 줄을 모르고 헤매었다. 「죄와 벌」에서 그는 차차 자기가 빠졌던 자기 인생 가운데서 떠오르다가, 또 맥없이 푹 빠지며 ‘모든 죄악은 법률로써 해결된다’와 ‘맑은 사랑이 제일이다’라는 큰 모순된 부르짖음을 당연한 듯이 발하였다. 「카라마죠프 형제」도 이와 같이 되어 버렸다. 「악령」도 그렇고「백치」, 「학대받은 자들」, 「불쌍한 사람들」 모두 이와같이 되었다. 자기가 창조한 인생을 지배할 줄을 몰랐는지, 능력이 없었는지는 모르되, 어떻든 그는 지배를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거기 지배를 받았다. 극단으로 말하자면, 그는 자기가 지은 인생에게 보기 싫은 패배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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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톨스토이는 어떠냐, 그도 한 인생을 창조하였다. 하기는 하였지만, 그 인생은 틀린 인생이요 소규모의 인생이다. 그는 범을 그리노라고 개를 그린 화공과 한가지로, 참 인생과는 다른 인생을 창조하였다. 그리고도, 그는 그 인생에 만족하였다. 그리고, 그 인생을 자유자재로, 인형 놀리는 사람이 인형 놀리듯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놀렸다. 꺼꾸로도 세워 보고, 바로도 세워 보고, 웃겨도 보고, 울려도 보고, 자기 마음대로 그 인생을 조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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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위대한 점은 여기 있다. 그의 창조한 인생은, 가짜든 진짜든 그것은 상관 없다. 예술에서는 이런 것의 구별을 허락치를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요구로 말미암아 창조한 그 세계가 가짜든 진짜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자기의 요구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까……. 톨스토이의 주의가 암만 포악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의가 암만 존경할 만하더라도, 그들을 예술가로서 평할 때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담 톨스토이가 아무래도 진짜이다. 톨스토이는, 자기가 창조한 자기의 세계를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자기가 조종하며, 그것이 가짜든 진짜든 거기 만족하였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예술가적 위대한 가치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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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造[창조]〉 제7호, 19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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