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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호잡기(六號雜記)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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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9
홍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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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호잡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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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이 글을 인쇄에 부치고 나니, 희비교지(喜悲交至)하는 이 마당에, 숨어있던 모든 감회가 한꺼번에 북받쳐오르는 듯하다. 맥이 풀리인 이 손으로 다시 붓을 잡으매, 어린 이 가슴은 온통 무너져버리는지, 속깊은 쓰린 한숨은 다시금 잡을 수도 없이 떨리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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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를 창간한 지도 일년 반이요, 절간된 지도 또 한 거의 일년 반이나 되었다. 풍운다첩(風雲多疊)한 그 때에 무모무각(無謀無覺)한 황발(黃髮)의 1동자! 아무 준비도 없이 나섰던 그 길이었었으니, 된서리 오던 가을 새벽 달 아래서, 눈보라 치던 겨울밤 외따른 길가에서, 소리 없이 울기는 몇 번이었으며, 여각(旅閣) 집주인이 던져주는 밥술이 차든지 더웁든지, 입으로 말 못할 푸대접은 오죽이나 받았었더냐. 불행한 일개인의 사고가 죄없는 이 집에까지 미쳐서, 빛바래인 문화사의 간판은 바람이 불 적마다 마음없이 근드렁근드렁, 동인들은 난산(難散)하고, 사무원은 도망하고……. 이 다음의 귀절은 차마 붓으로는 더 그릴 수가 없다. 슬픔이거나 기꺼움이거나…… 다만 꿋꿋하게 하려고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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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양 누가 병이라고 일컬을 때에, 불행하다 하면서도 매우 행복스러워보이더라. 더구나 ‘병시인(病詩人)……’ 그것은 참으로 쓰린 느낌이 있으면서도, 알뜰히 달콤한 맛이 있어 보이더라. 그러나 행복스럽게 보이던 그것도 동경하던 그때가, 좋을 뿐이지 정말로 병이 온다 하면은 천하에 싫은 것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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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동요……. 나의 시선에 부딪히는 모든 대상물이 점점 몽롱 불투명하며, 모든 색채가 희박하게 보여집니다. 아, 이것이 나의 생의 최말일(最末日)의 일이 아니면 병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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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서도 생에 대한 나의 눈이 좀더 지혜스러웠으면, 영리하였으면 더 한 겸 속 깊이 약아졌으면, 이 기회에서 나의 내외적 생활이 온통 개조가 되었으면, 나는 밤낮으로 빈다. 아마 이것을 말하자면은 신음자의 애타는 입에서 그래도 가느다랗게 떨리는 희망이라 할는지―.” 이것은 벌써 팔개월 전에 (「백조」3호가 발간된다고 떠들 때에 내가 쓴 육호잡기의 한 귀절이다. 그 때는 내가 몹시 앓았었다. 그러나 시방은 다 ― 나아졌다. 병이 들었던 그 때와 건강하여진 이때를 서로 비기어 보면, 나의 살림살이는 말할 수 없이 달라졌다. 어떻든 그 때의 그 신병은, 나의 생활과 의식에 한 전환기를 삼아주었다. 나는 소춘(蘇春)된 기꺼움을 날마다 느끼며 이렇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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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을 하였다가 묵삭이를 하고, 원고를 모았다가 헤쳐 버리기 무릇 몇 차례였더냐. 일껏 별러서 하도 오래간만에 하는 것이니, 아무쪼록 새로운 작품만 모아서 새로운 책자를 내어놓아 보자고 ―. 그래 출간기가 지연될 적에마다, 동인들이 모두 묵은 원고는 되찾아 가고, 새 원고로 바꾸어 들이었다. 그러니 아마 이번에 내인 작품들은 거지반 일 개월이 넘지 아니한 최근의 작인 듯하다. 나도 새것으로만 내어놓는다고, 며칠 동안을 허둥지둥 들볶아서 써놓으니 온 어떻게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거칠고 잡스러운 것이 많을 줄 안다. 소설 「저승길」은 내가 소설에 붓을 잡은 지 두 번째의 시험이다. 아직 세련이 덜 되어서 그러함인지, 쓰기 전에 먹은 마음과 같이는 잘 맛갑게 되지 아니한 것 같다. 상화(想華) 「그리움의 한 묶음」은 좀 단단히 많이 써보려고 첫번에는 제법 아주 길게 차리었었다. 하다가 지면상의 관계도 있고 또는 지리하고, 너무 고달퍼서, 중간에 붓을 던져버리었다. 그러니 화호불성(畵虎不成)이라 말하자면은 실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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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의 한길은 넓은 거리인 대신에, 쓸데없는 광고 간판이 부질없이 가로 걸린다. 저녁 나절의 서울의 거리는, 술이 취하지 아니한 사람이 보더라도 맑은 정신이 공연히 얼떨떨하여지지마는, 정말로 중둥이 풀리어 비틀거리는 술주정꾼이 넓은 길거리를 좁다고 휘쓸어가다가, 커다란 책사(册肆) 앞에서 있는 한 개의 광고판과, 시비를 걸었다. 그래 발길로 한 번 걷어차 넘어뜨리고 짓밟아버릴 때에, 애처로웁게도 유린을 당할손, 광고문 중의 ‘고급문예’ 네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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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고급문예라는 그것은, 무엇이냐. 어떠한 뜻이냐. 어떠한 것을 이름이냐. 고급? 고급? 사닥다리 위에 있는 문예가 고급문예이냐. 3층집 꼭대기에 있는 문예가 고급문예이냐. 종로경찰서의 탑시계 위가 아니면 종현성당피전침(鍾峴聖堂避電針) 꼭대기에 매달아 놓은 문예가 고급문예이냐. 과연 어떠한 것이 고급문예이냐. 조선극장에서 흥행하던 어떤 극단에서는, 희곡이라는 그 문자를 풀어 알 수가 없어서, 고심 연구하다 못하여 간신히 희극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해버리었다 하는 이 시절이며 또 어느 ‘적(的)’ 자를 잘 쓰는 ‘적화(的化)’ 가(家)는, 언필칭 ‘무슨 적 무슨 적’ 적자를 쓰다 못하여, 나중에는 ‘창피적’ 이라는 말까지 써버리었다 하는, 어수선 산란한 현하 경성 천지이다마는, 그래도 그렇게 훌륭한 문예작품을 광고한다는 간판의 문구로서 ‘고급문예’ 네 자를 대서특서한 것은 뱃심이 몹시 좋은 일이지마는, 정말 그야말로 좀 ‘창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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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간판과 나란히 서 있는 동무 간판은 더 다시 가관이었으니 ‘사랑의 불꽃’이라든가 ‘사랑의 불거웃’이라든가 현대 조선문단의 일류 문사들이 기고를 하였다고 써 있다. 문사! 문사! 일본말로 ‘시모노세끼’가 어떠하냐. 정말로 창피한 일이지, 어떤 얼어 죽을 문사가 그 따위의 원고를 다 함께 쓰고 앉았더란 말이냐. 그것도 그러하지. 자칭 문사라고, 자칭 예술가라고, 자칭 조선의 ‘로망 롤랑’이라고 까불고 다니는 한 키 작고 장발인 ‘예술 청년’도 있다. 굵다란 목 아래에다 늙다리 수건으로 동심결만 매고 다니면, 항용 예술가라고 일컬어주는, 이 조선의 서울이다. 그러나 예술이란 그것이 어찌 그리 쉬운 것이랴. 더구나 문사라는 그 말을 남용치 말라. 아무 때에나 그렇게 함부로 남용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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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들으니, 그러한 책자 그러한 문구를, 예전 우리 문화사 안에서 내어놓았다 하는 풍설이 있기에, 대강 이만으로 좀 버릇을 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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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潮[백조]』 3호, 1923년 9월)
【원문】육호잡기(六號雜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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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