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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가(出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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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0월
홍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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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가(出家)
 
2
• 인물
3
실달태자(悉達太子)  가비라성(迦毘羅城)의 왕자.
4
정반왕(淨飯王)  부왕.
5
파사파제부인(波闍波堤夫人)  태자의 이모이며 유모.
6
야수타라비(耶輸陀羅妃)  태자비.
7
기사고 - 다미  노래 잘하는 소녀.
8
행자(行者).
9
병노인(病老人).
10
병걸인(病乞人), 걸남녀(乞男女), 고행자(苦行者), 궁녀(宮女), 전도(前導), 시종(侍從), 시위갑사(侍衛甲士), 갑사(甲士), 가희(歌姬), 무희(舞姬), 나취수(喇吹手), 요발수(鐃鈸手), 小鼓[소고]잡이 어릿광대, 여악사(女樂士), 기타 궁속(宮屬) 등 다수.
 
11
• 장소
12
인도(印度) 가비라(迦毘羅).
 
13
• 시대
14
상고(上古) 거금 2945년 전 혹 2483년 전.
 

 
 

1. 〈서분(序分)〉

 
 

1.1. 1

 
17
• 장(場)
18
가비라성 북문 외.
 
19
• 시(時)
20
늦은 봄 정오.
 
21
• 경(景)
22
시원스럽게 열어 놓은 성문 안으로 왕궁과 민가, 다보탑, 기타 건축물이 즐비하게 들여다 보인다. 성문 밖 우편에는 화말(花末)과 노방석(路傍石)이 있고 좌편에는 야자(椰子)와 종려수(棕櫚樹)가 서 있다. 성문 서측에는 무장갑사(武裝甲士)가 철우(鐵偶)와 같이 양인(兩人)이 대립하여 수위하고 걸인 남녀와 소아 등 7∼8인은 성벽과 노방석을 등지고 앉아서 죽은 듯 조으는 듯 모두가 무상한 생의 권태를 저절로 느끼어 보이는 정경이다. 음울하고도 소조(蕭蓧)한 배광(配光)과 음악.
 
 
23
(행자(行者) 1인이 몸에는 칡빛의 큰 옷을 입고 손에는 바리때를 들고 우편에서 유유하게 등장하여 졸고 있는 걸인들을 유심히 한 번 둘러보더니 무엇을 느꼈는 듯 무엇을 애상하는 듯 이윽히 섰다가 다시 고요히 점두(點頭)하면서 종려나무 그늘로 조용히 들어간다)
 
24
걸인갑   (걸인乙[을]을 툭 치며) 이 사람 왜 이리 졸고만 앉았나. 또 부지런히 돌아 다니며 동냥이라도 해야지 모진 목숨이 그래도 얻어먹고 살지 않나.
25
걸인을   (졸음을 게을리 깨이는 듯) 흥 그 사람 걱정도 성화야. 그래 우리 같은 거러지들이야 무슨 생애가 그리 바빠서 경을 치게 글쎄 그놈의 부지런을 피어…….때마침 봄철이라 사지는 노작지근하고…… (기지개를 켜며 하품) 어 참 몹시도 곤한 걸. (다시 졸기 시작)
26
걸인병   그야 암 그렇지. 그렇구 말고. 하루 한때 제대로 끼니나 어떻게 얻어 먹으면 우리네 살림살이가 차라리 낫지. 안 할 말로 이 나라 상감님은 아무 걱정도 없으신 줄 아나. 아무튼 이 세상이란 천석꾼이 부자는 천석만한 걱정도 있고 만석꾼이 장자라도 만석만한 근심이 있겠지마는 우리 같은 인생이야 그야말로 만사가 천하태평이지 무얼.
27
걸인갑   (보따리를 들고 벌떡 일어서며) 망할 날도적 녀석들. 뱃심이 땅두꺼비야. 그래 남의 집 개발 구유에다 밥줄을 걸어놓고 덤비는 자식들이 겨우 만사가 무슨 천하태평이야?
28
맹노인(盲老人)  아무튼 먹지 않으면 죽는 인생! 그야말로 목구멍이 원수다. 굶고야 살 수 있나. 그나마도 내 천량 없으니 남의 손에 맡겨 놓은 목숨! 집집마다 문전에 개만 짖고 구박에 천대로 죽도 사도 못하는 괴로운 팔자……. 오늘 저녁도 다행히 일수나 좋아야 손쉽게 어느 거룩한 댁 대문간에서 얻은 누룽지에 접시굽이라도 하게 될른지!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은 이 신세…….
29
여걸인갑  하기는 이런 때 마침 가락으로 어느 거룩하고 선심 있는 부자나 한분 지나갔으면, 아픈 다리품이나 좀 덜 팔게.
30
걸인병   흥 그런 입에 맞는 떡이 때맞혀 있으면야 그야말로 허리띠 끌러놓고 누워 먹을 팔자이게.
31
여걸인병  (무심히 좌편을 바라보다가) 응 정말 저기 누가 오는대요. 정말 훌륭한 옷을 입고………….
32
걸인병   참! 얘 이게 어쩐 호박이냐. 정말 됐다 됐어. 저이가 이 가비라성에서는 제일 가는 장자래.
33
걸인갑   흥 이 자식아. 괜히 서둘지 말어. 되긴 무슨 얼어죽는게 돼? 저게 누군줄 알고 그래. 노랑이야. 돼지 꿀돼지. 더구나 행자(行者) 옷을 차려입고 사냥다니는 사라문(娑羅門)이야.
34
맹노인   왜 행자옷을 입고 사냥을 다닐까.
35
걸인갑   아따 수도행자들은 자비스러운 계행(戒行)을 지키느라고 도무지 살생을 하지 않으니까 모든 짐승들이 행자(行者)를 보고는 달아나지 않거든요.
36
맹노인   오라 그러렸다. 달아나지 않는 그놈을 모두 때려잡자는 말이지. 딴은 꾀가 됐어.
37
걸인갑   그래 모두 그따위 수단으로 남의 재물을 함부로 뺏다시피해서 긁어 모은 구두쇠야 구두쇠.
38
걸인을   그러나 제가 한 번 이리만 오면야 그야말로 기어든 업이요 입에 든 떡 인데. 왜 애써 놓쳐 보낼 까닭이 있나. 아무튼 모두 들이덤벼서 한바탕 좁혀 보세나그려.
39
일동    그렇지. 좋다 좋아.
40
걸인갑   쉬 ─ 온다. 와.
 
41
(일동은 모두 기갈이 자심(藉甚)할 형용을 꾸미고 있다. 한 장자가 종복(從僕) 2인을 데리고 좌편에서 등장, 그 뒤에 남녀 병신 거지 6∼7인이 쫓아오며 조르고 떼를 쓴다.)
 
42
병걸인갑  그저 한 푼만 적선하십쇼.
43
장자    허 이거 너무도 성가시럽군. (종복을 돌아보며) 여 봐라. 이 놈들을 모두 휘몰아 쫓아버려라.
44
병걸인을  무어 휘몰아 쫓아버려라? 이건 사람을 사뭇…….
45
병걸인병  아니 그래 당신 눈에는 사람이 모두 개나 돼지새끼로만 보이오. 함부로 휘몰아 쫓게.
46
종복갑을  이놈들아 저리 가 저리 비켜.
47
병걸인갑  (장자의 앞을 막아서며) 우리는 좀 못 가겠소. 하루에 죽 한 모금도 채 못 얻어먹은 병신 거지들이야요.
48
병걸인여  그저 할 수 없는 병신 불쌍한 거지들이올시다. 제발 덕분 한 푼만 적선하십쇼.
49
일동    그저 한 푼만 적선하시쇼.
50
장자    한 푼만 적선? 단 한 푼! 아따 그래라. 어 참 지독한 아토(餓兎)들……. 어찌도 지긋지긋이 쫓아다니며 조르는지. (돈 한 푼을 꺼내던지며) 옛다. 이만 하면 적선이겠지.
51
병걸인갑  (땅에 떨어진 돈을 얼른 주어 갖고 다시 손을 내어밀며) 모두 이것뿐입니까.
52
장자    그럼 한 푼 주었는데 또 무슨 적선……. 이제 그저 저리들 물러가거라.
53
병걸인갑  아니올시다. 여러 주린 목숨들이 그래도 거룩하신 덕분에 죽 한 모금씩이라도 얻어 넘기게 되야 쓰지 않겠습니까. 이걸 가지고야 어떻게 무엇으로 입에 한 번 풀칠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단 한 푼을 가지고는……. 그저 제발 덕분 모두 한 푼씩만 돌려 적선하십쇼.
54
일동    그저 한 푼만 적선하십쇼.
55
장자    허 이거 오늘 실없이 나섰다 정말 봉변이로군.
56
병걸인갑  그저 한 푼씩만 던져주시면 적선이십죠. 봉변이란 말씀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57
장자    이놈들아 그래 온 적선이란 것도 분수가 있지.
58
병걸인갑  장자님께서 그까짓 몇 푼 적선하시는데 무슨 분수가 있사오리까. 그저 거룩하신 선심으로 몇 푼만 더 아끼지 말으시면 되실 것을…….
59
장자    안 돼 안 돼. 난 몰라. 이놈들 사뭇 도적놈들이지……. 그래 온참. (종복을 보며) 얘들아 어서 가자 가. 이놈들을 가리다가는 큰 일 나겠다.
60
일동    그저 몇 푼만 적선하십쇼.
 
61
(장자가 앞을 서고 종복들은 쫓아오는 병걸인(病乞人)들을 막으며 가까스로 무대중앙에까지 이르렀을 적에 아까부터 기대고 앉았던 걸인들이 모두 일어나 장자의 앞길을 막아 죽죽 늘어선다)
 
62
걸인갑   부자님, 장자님. 쌀이나 돈이나 돈이나 쌀이나 그저 무엇이든 되는 대로 던져 주십쇼. 어제 오늘 밥 한 술, 죽 한 모금 못 얻어먹고 모두 거리에 쓰러져 있는 불쌍한 거지들이올시다.
63
장자    무어 밥도 죽도 먹지 않았어? 그럼 어서들 떡을 먹어라. 무릇한 떡을.
64
여걸인갑  그저 거룩하신 덕분으로 주려죽는 목숨들을 정말 좀 살려줍소사.
65
걸인을   그저 적선하십쇼.
66
일동    한 푼만 적선하십쇼.
67
장자    흥 무어 여기서도 또 한 푼! 아니 그래 앞에도 거지떼 뒤에도 거지패. 이거 원 참 점잖은 사람은 못 나다닐 세상이로군. 골목길로 숨어다니나 큰 행길로 나서다니나 수많은 깍쟁이떼가 궁둥이를 주울주울 쫓아다니며 “그저 돈 한 푼만 적선하십쇼” 하며 까닭없이 적선만 하다가 성가시럽게 졸라만 대니……. 이거 온 이놈들 등쌀에 빚걷이 한 푼 할 수가 있나. 밥 한 술 편히 앉아 먹을 틈이 있나. 이러다가는 그예 생사람이 그만 사뭇 말라죽겠는걸. (종복들을 돌아보며) 얘들아 바짝 다가 서, 빨리 가자.
 
68
(종복갑은 장자 뒤의 거지들을 팔로 막아 물리치고 종복을은 장자 앞에 서서 길을 헤쳐 트인다)
 
69
종복갑을  이놈들아 물러서 물러서래도……. 비켜 물렀거라.
70
일동    (기세를 합하여 부르짖으며 지껄인다) 부자님 장자님 적선합쇼. 배고픈 거러지 적선 좀 합쇼.
71
장자    (어찌할 수가 없는 듯) 얘들아, 너희들은 참으로 딱하고도 미욱한 놈들이로다. 내가 아까 그렇게 한 푼을 적선까지 하였는데 종시 찰거머리 모양으로 떨어지지 아니 하고 이렇게 다니고 조르기만 하니……. 아무튼 시방은 도무지 적선할 돈도 없고……. 또 갈 길이 몹시 바쁘니 제발 덕분에 물러서 좀 다오. 정말 진정으로 너희들에게 사정이다 애걸이다.
72
일동    흥 사정! 애걸! 정말 한 푼만 적선하고 어서 가십쇼.
73
장자    온 이거 어떡하노.
74
맹노인   (한 손으로는 어린 소녀의 손을 이끌고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잡아 더듬어 짚고 장자 앞으로 나아가 장자의 옷소매를 잡고) 시방 장자님께옵서 “사정이다 애걸이다” 하시며 자꾸 사정의 말씀만 하시니…… 그러나 정말 그 진정으로 사정하올 말씀은 이 늙고 앞 못보는 거지놈에게서 들어 좀 보옵소서. 보시다 시피 이놈은 앞 못보는 늙은 병신, 슬하에 다만 한낱 자식이 있다가 연전 포살난(抱薩難) 전쟁에 나아가 살에 맞아죽어 없어지고 이제는 의지가지없는 몸. 어느 곳 부칠데없어 떠돌아 다니는 한 아비와 손주! 외롭고 굶주리며 죽지 못해 헤매이는 불쌍한 두 목숨! 제발 덕분 몇 푼만 적선하십쇼.
 
75
(장자는 얼굴을 찌프리고 아무 말 없이 팔을 들어 휘뿌리니 노인과 소아(小兒)는 땅에 엎어져 소아는 노인을 껴안고 운다. 일동은 격분하여 뒤떠든다)
 
76
일동    저런 나쁜 놈……. 무지한 놈……. 사람을 막 때린다……. 병신 노인을 막 친다……. 그 자식 짓조아라……. 때려죽이자……. (장자에게로 들이덤빈다)
77
전도갑을  (일동의 야료함을 보고 급히 덤비어 떼어 헤치며) 왜 이래……. 이게 무슨 짓들이야.
78
여걸인갑  저 무지한 이가 앞 못보는 노인을 막 쳐요.
79
걸인갑   동냥은 안 주고 쪽박만 깨트린다고…… 나 온 참 별꼴 다 보겠네.
80
일동    그래 부자놈은 인정도 없다.
81
전도갑   (일동을 제지하며) 쉬 ─ 떠들지 말어. (장자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보아하니 점잖은 체통에 이게 온 무슨 꼴이요. 어서 있는대로 몇 푼씩 보시(布施)하고 가시요.
82
장자    (얼굴을 찌푸리고 입맛을 다시며) 흥 시속 인심이 그만 나날이 달라져서…… 도적놈들……. 온 언뜻하면 이런 봉변이야. (돈을 한 움큼 꺼내어 훑뿌린다.)
83
일동    으아 ─. (소리를 치며 줍는다)
 
84
(장자 종복을 데리고 쫓기듯이 우편으로 바삐 퇴장)
 
85
걸인갑   모두들 몇 푼씩이나 주었나?
86
병걸인갑  (손바닥의 돈을 헤이며) 잘 해야 한 사람 앞에 너더댓닢 꼴이니…….
87
걸인병   (장자가 달아나던 곳을 바라보며) 그놈의 자식이 돈 유세만 하고 함부로 버르장이를 피우고 다시는 모양인데…… 기왕이면 흠뻑 더 짜줄 걸 그랬지.
88
일동    하하하. 그것도 그래……. 그것 좋지……. 그럴걸 그랬지……. 그럼 시방 이라도 쫓아가서…… 아주 요절을 내세…….
89
전도갑   쉬 ─ 떠들지 말고 이제 그만 저리 딴 데로들 가거라. 오늘은 우리 동궁 마마께옵서 사대문 밖으로 유산행차(遊散行次)를 나옵시는 날이니 너희들은 이제 그만 조용조용히 물러가거라. 상감마마께옵서 특별 분부도 계옵셨고 또 이렇게 모처럼 나옵시는 행차역략(行次歷略)에 혹시나 이런 거러지 병신들이 길을 범하면 못쓸 터이니까……. 어서어서. (걸인들의 행구(行具)를 모두 집어준다)
90
걸인갑   (놀라면서도 또 기쁜 듯이) 네 ─? 동궁마마께옵서요! 그러면 저희들도 거동구경이나 좀 합지요. 저리 한 옆에 가만히 숨어서서…….
91
전도을   (일동을 향하여 고개를 험하게 내저으며) 안 돼 안 돼. (걸인을 발로 툭툭 차며) 어서어서 빨리빨리.
92
걸인병   (일동을 돌아보며) 이 사람들 가세 가. (전도(前導) 갑과 을을 노려보며) 가라면 가지요. 그래 우리같이 천한 놈들은 거동 구경도 못하라는 법이 어디있나요. (그러면서도 두려운 듯이 뒤를 슬금슬금 돌아보며 우편으로 퇴장)
93
전도갑   옳지, 어서들 가거라.
 
94
(걸인 일동 우편으로 퇴장)
 
95
전도갑   (걸인들이 퇴장하는 것을 보고 사방을 다시 휘둘러 살피며) 인제는 더러운것들을 거진 다 치워놓은 셈이지.
96
전도을   그럼 이제 아마 행차가 이리로 납실 때도 거의 되었으니 그만 저리로 또 가보세.
 
97
(전도갑과 을은 우편으로 퇴장. 행차가 조용히 종려수 그늘에서 나온다)
 
98
행자    (탄식이 섞인 웃음) 허허허. 이것이 이른바 수라도(修羅道)며 축생도(畜生道)며 아토(餓兎)며 지옥의 현출이로다. 생업에 쪼들리며 아무 여념이 없는 인간도(人間道)! 탐욕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삼독(三毒)의 그 뿌리가 이미 짙었거니 백팔의 그 번뇌를 어찌나 다 ─ 사를고. (우편으로 천천히 퇴장하면서) “삼계열뇌 유여화택 기인엄류 감애장고 욕면윤회 막약구불(三界熱惱 猶如火宅 基忍淹留 甘愛長苦 欲免輪廻 莫若求佛)” (구(求) 읊조리는 소리가 차차로 멀어진다)
 
99
─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며 천천히 막(幕). ─
 
 
 

1.2. 2

 
101
막간 1분 후 막이 열린다. 그동안 객석 조명은 어두운 채 고요한 음악에 싸이여 범패(梵唄) 소리가 멀리서 은은히 들릴 뿐. 배광(配光)이 점차로 밝아지는데 신비스럽고도 황홀한 정경, 무대는 잠깐 공허.
 
102
(걸인갑 우편에서 가만히 등장)
 
 
103
걸인갑   (중얼거리며 좌편으로 가서 두리번 두리번 기웃거리다가 도로 중앙에 가서며) 그래 거지는 거동 구경도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담. 흥 저희들이 암만 그렇게 못 보게 해도 난 그예 좀 보고야 말걸. (우편을 향하여 어서 오라는 듯이 손짓)
 
104
(걸인을과 병 조심스러이 우편에서 등장)
 
105
걸인을   그런데 태자님께서 어떻게 잘 나셨기에 그렇게 거룩하시고 놀라우실까.
106
걸인병   하기는 소문에도 열여덟 해 전엔가 사월 팔일에 태자께서 탄생하셨을 제 상(相) 잘 보기로 유명한 아사타(阿私陀) 선인이 태자님의 상을 보고 무선 유성왕(輸聖王)이라던가 하는 어른의 상호(相好)를 갖추었으니 석가왕실과 우리 가비라 나라를 위하여 크게 경사로운 일이라고 무수히 치하를 하더라는데.
107
걸인갑   그래 아사타 선인이 너무 기뻐서 눈물을 다 흘리더라고 하지 않던가.
108
걸인병   글쎄 그러니 우리들은 비록 팔자가 기박하여 이렇게 거지꼴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마 그래도 그렇게 훌륭하시다는 태자님의 얼굴을 눈결에라도 한 번 뵙기나 해야 그래 그야말로 세상에 났었더란 보람도 있고…… 또 죽어서 저승에 가서라도 한 마디 자랑삼아 얘기해 볼 것이나 있지. 아무튼 시방 요행으로 뵈올 수 있으면 좋고 또 저엉 그렇지도 못하다면 이 자리에서 금방 맞아 죽기 밖에 더 할라고.
109
걸인갑   (주먹을 쥐고) 암만해 봐라. 내 그예 좀 보고야 말걸.
110
걸인을   (걸인갑과 동시에 주먹을 쥐고) 아무렴 그렇구 말구. 그렇다 뿐인가.
 
111
(우편에서 사람들이 오는 자취)
 
112
걸인병   (우편을 쳐다보다가) 에크 그 자식들이 또 오네. 제기자 제겨. 괜히 거동 구경은 하지도 못하고 생목숨만 구치면 무얼하나. 어서 제기세. 제겨. (허둥지둥 좌편으로 퇴장)
 
113
(걸인갑과 을은 어리둥절해서 걸인병을 따라 퇴장. 전도갑과 을 우편에서 등장하여 사방을 둘러보고 아무 이상도 없다는 듯이 안심하는 표정으로 성문 안으로 퇴장. 병노인(病老人)이 좌편에서 등장. 그의 용태는 너무도 늙음에 압박이 되어 극도로 쇠약하였다. 팔다리는 병고에 시달리어 참새다리같이 시꺼멓게 몹시도 파리해 말랐는데 허리는 굽어 땅에 닿을 듯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음 배우는 아이처럼 한 걸음 또 한걸음 발자욱을 어렵게 떼어 놓되 죽을 힘을 다 쓰는 듯 걸음마다 헐떡거리고 한숨을 쉬다가 힘없이 쓰러진다. 머리털은 모자라서 재몽당비같고 얼굴은 주름살이 잡혀 우굴쭈굴하고 가는 모가지 힘없이 뼈만 남은 가슴에 숙여져 있다. 전도갑과 을이 성문안에서 황급히 등장)
 
114
전도갑   이건 뭐야.
115
전도을   어디를 가?
116
노인    (멍 하니 좌편을 바라보며 그리로 가려는 듯)
117
전도갑   (노인을 잡아 일으키며) 어디로 가료.
118
전도을   어서 가요. 어서 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시방 존엄하옵신 행차가 이리로 납시니 어서 빨리 저리로 가요.
119
노인    (간신히 일어나 한 걸음 걷다가 힘없이 쓰러진다)
120
전도갑을  (몹시 조급한 듯) 이거 온 큰 일 났군.
121
전도갑   행계(行啓)하옵시는 통로에 수상한 잡인은 얼신대지도 못하도록 엄중히 신칙(申勅) 하답시는 대전랍 분부가 계셨는데…….
 
122
(태자가 종자(從者)들에게 시위되어 성 중앙 정문으로 등장)
 
123
시종갑을  (엄숙한 경필(警蹕) 소리) 쉬 ─.
 
124
(전도갑과 을은 움찔하여 몸으로 노인을 가리려 애쓰며 국궁(鞠躬) 한다)
 
125
태자    (노인을 주시한다. 너무도 유심하게)
 
126
(전도갑과 을은 몹시 전율한다)
 
127
노인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일어나 국궁(鞠躬) 하는 듯 무엇을 애원하는 듯 손을 들어 합장한 채로 우편을 가리키며 입은 움직여도 말은 들리지 않고 고개짓만 억지로 하고있다)
128
태자    이것이 어찌된 일인고. 무슨 뜻인지 빨리 이르렀다.
129
시종중   빨리 아뢰어라.
 
130
(노인은 여전히 그 모양뿐 전도갑과 을은 황공 초조하다 못하여 복지돈수(伏地頓首) 한다)
 
131
전도갑   네 그저 황공하옵나이다. 저희들이 그만 그저 죽을 때라 잘못 되었소이다. 저희들이 미욱하고 불회하와 이렇게 늙고 더러운 것으로 행계하옵시는 통로에 범예(犯穢)케 되었사오니 그저 저희들을 죽여주옵소서.
 
132
(무수돈수(無數頓首))
 
133
시종갑   고얀지고. 옥가(玉駕)가 지척에 계옵신데 누추한 저것이 무슨 꼴이냐.
134
시종을   (무서운 눈초리로 전도를 노려 보며) 저 더러운 것을 빨리 물리치렸다.
135
태자    아니 아서라. 그런데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매우 의이한 듯)
136
전도갑을  (노인을 끌어내며) 이놈의 늙은이 어서 어서 가…….
137
태자    (손을 들어 만류하며) 아니 아서라. 그대로 두라. (노인의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측은한 듯이 한참이나 유심히 보다가) 너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되었는고.
138
노인    (가슴을 진정하는 듯 침묵, 잠깐 고요히 신음하는 소리로) 네 그저 이 늙은 놈도 옛날 젊었을 때에는……. (가엾은 한숨)
139
태자    (넌지시 점두(點頭)) 너도 나와 같이 젊었을 때가 있었던가.
140
노인    네 ─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놈도 옛날에는 든든하고도 향기로운 청춘이…… 꽃답게 산다는 기쁨이…… 있었더랍니다. (괴로운 한숨)
141
태자    그런데.
142
노인    그렇더니만 이제는 그만 그 모든 것이 꿈과 같이 다 사라지고……. (헐떡거리며 다리가 떨리어 넘어지려 한다)
143
태자    (동정에 넘치는 듯 노인의 팔을 얼른 잡아준다)
 
144
(전도갑과 을이 황급히 노인을 부축해 준다. 시종 일동도 모두 황급한 동작)
 
145
노인    (근근히 다시 정신을 차려서) 그러나 그러나 시방은 그만 늙고 병들어서…… 죽…… 죽어가는 인생이올시다 (잠깐 신음하다가) 응…… 응…… 그런데 당신께옵서는 어느 댁 존귀하신 서방님이시온지……오.
146
시종갑   황공하옵게도 여기 계옵신 이 어른은 우리 가비라국의 동궁마마이신 줄로 알라.
147
노인    네 ─? (너무도 감격해하는 음성으로) 오 ─ 우리 태자님…… 태자님…….
 
148
(운다)
 
149
태자    어 ─ 너무도 가령참혹(假令慘酷)한 정상(情相) 이로다. 여봐라. 그러면 나의 힘으로써도 너의 저렇게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그것을 구해낼 수가 없을까? 혼돈이 조화된 아름다운 생활을 다시 할 수가 없을까? (구슬 목도리를 끌러주며) 이것을 받으라.
150
노인    태자님…….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을 도로 사양하며) 아니올시다. 황공하오나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이 백골에게 그렇게 좋은 보물인들 무슨 소용이 있사오니까. 그저…… 감격하옵신 은택으로…… 한 마디 말씀을…… 죽어가는 이 늙은 놈의 마직막 사뢰는 한 마디 말씀이나 들어주옵소서. (합장하고 애원하는 듯)
151
태자    무슨 말인지 자세히 들을 터이니 아무쪼록 다 이르라.
152
노인    (정신을 가다듬는 듯) 다른 말씀이 아니오라…… 사람이란 것은 제 비록 아무러한 생활을 할 지라도 결국에는 늙음이 찾아오고야 마는 것이올시다.
153
태자    그러면 나도 그대처럼 저렇게 늙을 것인가.
154
노인    (점점 숨찬 호흡) 아무렴…… 누구든지 이 세상으로…… 육체의 몸을 받아 난 이는 존비와 귀천이 없이 모두 늙음의 고통을 면할 수 없삽나이다. 건전한 자에게나…… 병들은 자에게나…… 다 같이 한 시각이 지나갈 적마다 늙음의 나라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차차 올가미 지워가는 것이올시다. 그것이 이른바 사람의 말로올시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누워 잘 때나 깨었을 때나 행복스러울 때나 또 불행할 때나 시시가각으로 간단없이 늙음의 짐은 더욱더욱 무거워만 가는 것이올시다……. (괴로운 호흡)
155
태자    늙으면 저렇게 괴로운가.
156
노인    (점두(點頭)) 네 ─ 그저…… 병들기 전에 또 죽음에 붙들리어 가는 목숨을 빼앗기기 전에는 제 아무리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늙음의 괴로운 비애를 맛보지 않을 수 없삽나이다. 만일 이 세상에서 오래 산다면 오래 살수록 그 사람은 오래 산 그 벌로 말미암아서 허리가 땅으로 차차 가까이 구부러져 필경에 땅 위에 꾸물거리는 버러지와 같이 되고 마는 것이올시다. 그리고…… 그 늙음 뒤에는 병이…… 병 뒤에는 죽음이 그만 닥쳐와서…… 으응……. (기절하다가 다시 살아나서) 응…… 인간의 육체는…… 그만 더럽게도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올시다. (비실거리며 떨고 섰다가 힘없이 쓰러져 가벼운 경련(痙攣)을 일으키며 게거품을 흘린다)
157
태자    이는 또 어쩐 일인고.
158
시종갑   아마 병으로 저리 괴로워하는가 합니다.
159
태자    병으로도? 그럼 나도 필경에는 저와 같이 병이 들고 말 것이냐.
160
시종갑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화합하였던 인연을 한 번 잃게 되오면 어떠한 사람이든지 병고에 걸리어 아픈 신음을 많이 하지 못할 줄로 아뢰옵나이다.
 
161
(노인이 죽는다. 일동은 놀라는 듯 시선을 모두 시체 위에 집중한다)
 
162
태자    (회의적 우울과 경이에 쌓여 긴장한 표정으로 시체를 응시하고 있다가) 또 이것은?
163
시종갑   젓사오나 이것이 이른바 죽음이로소이다.
164
태자    죽음! 죽음! (외면을 하고 한참이나 먼 산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어 시체를 주시한다)
 
165
(장면의 공기는 점차로 엄숙하게 긴장)
 
166
태자    (애련해 하는 표정으로 노인의 우수(右手)를 만져 보며) 이것이 정말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면할 수 없는 것일까.
167
시종갑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 세상에 목숨을 받아 태어난 자는 우리 사람 뿐만이 아니오라 일체 생물은 모두 났다가 늙고 병들어 죽어버리는 것이오 매 남자나 여자나 제 아무리 지혜롭고 존귀하고 감미롭고 아름다운 이일지 라도 짧으나마 꽃다웁다는 그 청춘이 한 번 지나만 가오면 반드시 기력은 쇠약해지고 육체는 무되게 늙어 병이 드는 것이 이치라 하오며 온 세계에서 제일 최상의 큰 힘을 가지고도 여기에는 항거할 수 없사와 필경에는 무서운 죽음에게 생명이란 그것을 받치지 아니치 못하나이다.
168
태자    죽음! 그럼 죽는 인간은 어찌나 되는 것인고.
169
시종갑   사람의 몸뚱이가 한 번 죽어 쓰러지오면 흙과 재로 변하여 버린다 하옵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모든 생물은 하나도 빠지지 못하고 모두 죽음의 나라로 들어가버리오며 또 전하께옵서 시방 친히 보옵시는 이 천지간의 일체 만물은 모두 멸해버리고 마는 것이올시다. 천하만고에 신(神) 잘하고도 장엄하다는 저기 저 히말라야 설산(雪山)까지라도요……. (객석 쪽에 설산이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킨다) 이것이 세상에 정해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로소이다.
170
태자    (고민 장태식(長太息)) 아 ─ 너무도 슬프고녀. 안타까운 청춘! 애욕과 환락 뒤에 너무 빨리오는 비애와 죽음! 어허 이 세상은 공허로다. 단지 공허에 불과하도다. 이 몸 한 번 죽어지면 재가 되고 흙이 된다. 이 세상에 누가 있어 그 한 무더기의 재나 흙을 가리켜 나라고 이를꼬. 오 어드메뇨. 죽음은 어드메며 삶은 또 어드메뇨. 하마나 죽음 뒤에도 목숨이 다시 있어 꽃다운 청춘만을 매양 누리는 그 세계는 어드메쯤에나 있느뇨. 참말로 참말로 아 참말로 한 줌 흙만 남겨버리고 밑도 끝도 없이 사멸해 버린다면! 어허 설운지고, 너무도 얄궂어라. 대체 이 ‘나’라는 것은 무엇이며 또 ‘나’라는 ‘나’는 무엇이 어찌하여야 좋을 것인고. (암흑(闇黑)을 직면한 듯한 우울과 고민, 한참이나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우드커니 서 있다)
 
171
(행자(行者)의 게송(偈頌) 소리가 우편 멀리서 은은히 들려온다)
 
172
태자    저 노래는?
173
시종을   젓사오나 출가수도하는 행자가 부르는 게송 소리오이다.
174
태자    출가수도? 그러면 그 어른을 이리로 뫼셔 오게 하여라.
175
시종    네 ─ 이. (우편으로 퇴장하면서) 여보 행자, 저기 가는 재행자.
176
태자    출가수도! 게송! 행자! (시종갑을 보며) 너도 저렇게 출가 수도하는 행자가 부르는 게송 소리를 전일에 더러 들어본 적이 있는지.
177
시종갑   여쭙기 황공하오나 소신도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소이다.
178
태자    응 출가수도! 행자! 게송!
 
179
(게송 소리가 점차로 가깝게 들리며 시종을이 행자를 데리고 우편에서 등장)
 
180
태자    (행자에게 정례(頂禮)) 듣사오매 출가수도하신다 하오니 출가수도를 하오면 생, 노, 병, 사의 무서운 고해를 벗어날 수가 있사오리까.
181
행자    네 있습니다. 될 수 있습니다. 한 번 출가하여 수도만 하오면 나도 죽고 병드는 그 무서운 고통을 떨쳐버리고 해탈의 자유를 얻어오며 이 세간의 염애(染愛)로부터 벗어나서 출생간의 정법에 의하여 무상의 대도를 뚜렷이 깨우친 뒤에는 대자대비로써 고해에 헤매이는 일체 중생을 제도할 수가 있나이다.
182
태자    (점두(點頭))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까 부르신 그 노래는?
183
행자    네 ─ 그 게송은 “제행(諸行)이 무상하오니 시생멸법(是生滅法)이로다”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으니 이것이 생하고 멸하는 법이로다. “생멸이 멸망하면 적멸이 위락(爲樂)이리라.” 생하고 멸하는 것이 하마 멸해버리면 적적료료(寂寂寥寥)한 것이 낙이 되리라는 게침(偈針) 이로소이다.
184
태자    (환희점두(歡喜點頭)) 그렇습니까. 너무나 거룩하신 말씀을 많이 들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출가수도를 할 수는 있사오리까.
185
행자    그렇습니다. 아무라도 할 수 있삽나이다.
186
태자    정말입니까.
187
행자    행자는 거짓 없는 것이 한 계행이로소이다.
188
태자    정말! 출가수도! 오 그러나 이 인간의 무슨 일이 출가행보다 더 나은 것이 있으랴. 출가수도의 그 길이 정말 나의 찾아갈 유일한 생명의 길이로다. 삶의 길이다. 삶의 길! 이제는 출가다 출가!
189
시종갑을  (기급하며) 마마 동궁마마.
190
시종갑   출가수도 그것이 온 무슨 말씀이시오니까. 만승천자(萬乘天子)의 존엄하옵신 보위를 이으옵실 마마께옵서 출가하시다니 천부당 만부당 온 천만 뜻밖에 그런 분부가 어디 있사오리까.
191
태자    아니다. 아니로다. 내 오래 전부터 혼자 외로이 고민도 하며 번뇌도 하였었더니라. 그렇더니만 이제 이 자리에서 나의 살아갈 밝은 길을 확실히 발견하였도다. 이 무상한 사바 인생에서야 어찌 영생과 진락(眞樂)을 구할 수 있을 것이랴. 내 만일 이대로 살다가 그만 한 번 죽어지면 일개 범부 무명태자로서 북망산(北邙山) 거친 땅에 한 줌 흙만 보태일 뿐이니 이것을 어찌 인생의 참된 길이라 이를 수 있으랴. 무서운 생로병사는 인생에게 그림자같이 알뜰히 따르고 있는 것을 나는 시방 깨달았노라. 나는 그 동안 이 모든 것을 해탈할 길을 찾노라고 애써 헤매었거니 불행히 시방 찾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나의 갈 길을 갈 뿐이니라. (행자를 보고) 행자시여 대단히 고맙습니다. (정례(頂禮)
192
행자    태자 전하, 아무쪼록 영생의 길을 찾아가시도록 하시옵소서. (게송을 부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좌편으로 퇴장)
193
태자    (발을 멈추고 행자의 뒤를 바라보며 기꺼운 듯 게송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열심으로 듣고 서서 합장 정례)
 
194
(시위 일동은 매우 불안하여 하는 동작, 시종 1인이 성문 내에서 급보 등장)
 
195
시종    (태자를 향하여 최대 경례) 지급한 전갈을 아뢰나이다. 금방 야수다라(耶輸陀羅) 마마께옵서 아들 아기를 탄생하옵신 줄로 상달하옵나이다.
 
196
(일동이 경희(驚喜)의 동작)
 
197
태자    내가 큰 뜻을 결정한 이 때에 야수다라는 라후라를 낳았구나. 라후라! 라후라! 이제 또 하나 풀기 어려운 계박(繫縛)! 단단한 결박이 이 몸에 지워지는도다. (시위 일동을 돌아보며) 그럼 아무튼 어서 바삐 궁으로 들어가자.
 
198
(일동이 성문을 향하여 걸음을 옮길 제 기사고 - 다미 좌편에서 물항아리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등장)
 
199
기사고 - 다미  기쁘시오리 아버님께옵서
200
즐거우시오리 어머님께옵서
201
그런 아드님을 두옵신
202
우리 상감마마께옵서는
203
행복스럽기도 하시오리
204
기쁘시오리 동궁마마시여
205
즐거우시오리 공주마마시여
206
그런 태자님을 뫼시는
207
우리 야수다라 공주마마
208
행복스럽기도 하시오리.
 
 
209
(태자를 향하여 무릎을 꿇고 정례)
 
210
태자    (걸음을 멈추고 기사고 - 다미를 유심히 보다간) 너의 이름이 무엇이라 부르느니.
211
기사고 - 다미  기사고 - 다미라 하옵니다.
212
태자    기사고 - 다미! 매는 곱고 아름다운 이름이로다. 너의 집은 어디며 시방을 어디로 가는 길인고.
213
기사고 - 다미  사옵기는 빛나고 영화로운 가비라성 중(中)이오며 시방 가옵는 길은 인간의 신음하는 네 가지 큰 괴로움을 구제하기 위하여 생사를 여인나라 그윽한 고행림 거룩한 히말라야 영산(靈山)으로 감로수를 길으러 가옵는 길이로소이다.
214
태자    착하고 기특하도다 너의 뜻이여! 든든하고 반가웁도다. 너의 노래여! 기쁘시오리 즐거우시오리 행복스럽기도 하시오리 하는 너의 그 노래는 영안영락(永安永樂)을 의미하는 열반이라는 말과 흡사하도다. 아마 태자의 출가! 일후의 행복을 미리 헤아리고 그것을 기리며 노래했음이 아니냐. 너의 가상한 뜻을 (영락(瓔珞)을 끌러주며) 변변치 못한 이것으로써 감사하노라.
215
기사고 - 다미  (부끄러운 듯 공손히 영락을 받으며) 너무나 감격하도소이다.
 
216
(일동 거룩하고도 환희적 정경)
 
217
시종갑   이것을 보십시오. 가비라성의 상하신민 아니 아동주졸(兒童走卒)…… 이렇게 철 모르는 계집 아이들까지라도 모두 거룩하옵신 전하…… 이 세상에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서 군림하옵실 전하의 성덕을 만만수(萬萬壽)로 송축하고 있지 않삽나이까. 그러하옵는데 전하께옵서 나라나 왕위도 버리시옵고 출가수도하옵시겠다는 아까의 그 분부는 황공하오나 천만부당하옵신 처분입신 줄 아뢰나이다.
218
태자    흥 내가 설령 일후(日後)에 전륜성왕이 되어서 이 오천축(五天笠)을 모두 정복하여 차지해버린다고 한들 그것을 또 얼마나 그리 영구히 존속되어 누릴 수 있는 것일까. 아마나 머지 않은 장래에 쇠멸해버릴 날도 반드시 있겠거니……. 났다가는 사라지고 만났다가도 헤어지며 우람한 부귀도 패망해버릴 날이 있고 소담스러운 영화도 사라져 없어질 때가 있나니. 내가 이 세상에 온 지 한 일에 만에 어마마마 마야부인(摩耶夫人)의 거룩하고도 따뜻한 품을 여의고…… (목이 잠깐 메이다가) 그래도 시방은 무슨 전륜성왕 같은 헛되인 영화를 꿈꾸고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 세상의 무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219
시종갑   그러하오나 황공하옵게도 전하께서는 그리 출가하옵심만 고집하옵시면 만일 일후 비상한 때에 불행히 외방(外邦)이 이가비라성을 침노하여 석가성족(釋迦聖族)까지 멸망해 버리는 지경이 있을지라도 관계치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220
태자    한 나라가 망하거나 흥하거나 쇠하거나 망하거나 흥망성쇠 그것은 모두다 한 가지 번뇌에 지나지 않나니 번뇌에 허튼한 마당 꿈자리……. 만일에 그 번뇌의 뿌리를 온통으로 뽑아버리지 못한다면 우리 일체 중생을 영원토록 이 고해에서 벗어나갈 길이 없으리라. 내가 이미 열두 살 적에 부왕마마의 차가(車駕)를 따라서 춘경제(春耕祭)를 구경하러 나아갔다가 밭이랑의 장기밥이 넘어갈 적에 두둑으로 뒤쳐지는 땅버러지들은 까막까치들의 밥거리로 목숨과 몸을 바쳐버리고 또 기승을 피우며 배불리 쪼아먹던 그 까막까치도 금방에 또다시 성난 독수리에게 채여가 하염없이 수리 밥이 되어버리는 것을 내가 역력히 서서 보았었노라. 약한 고기는 기세인 놈의 밥일세라. 가만한 쥐새끼는 날랜 고양이에게 갈퀴여 죽고 하루강아지는 억세인 범에게 물려가나니……. 이것이 이 세상의 상태이며 운명이었도다. 그러니 만약 여기에서 일체 중생을 구해내이며 사해의 인류를 영겁으로 제도를 하려면은 그것은 예리한 병장기의 힘도 아니요 억세이고 참담한 전쟁의 공도 아닐지라. 다만 오직 거룩한 법력을 빌어 의지하는 수밖에는 달리 아무러한 도리도 없을지니……. 나는 그 법의 힘과 가르침을 널리 끝끝내 펴고 행하고저 함이 시방 출가의 발원이로다. 전쟁하지 않고도 온 천하를 감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법의 힘 하나뿐이매 이 태자는 그 법의 왕 불타가 되어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싶노라. 그러니 그 법의 가르침을 구해 얻자면은 하루 바삐 출가하여 도를 닦는 이외에 달리 아무러한 길도 없는지라. 내 이제 어머니를 여의고 나라도 버리며 사랑스러운 아내도 떼쳐두고 수도의 길을 떠나려 함도 모두 대자대비의 큰 마음에서 우러나옴인 줄 알으라. (일신이 점차로 신성한 풍속으로 변하여 기이하고 성스러운 광채를 발하는 듯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 서서) 내 이 세상에 처음 났을 적부터 원지(圓智)가 맑고 밝은 칠학(七學)의 상호(相好)를 나투었으며 일곱 걸음을 걸어가서 두 손으로 하늘과 땅을 가리켜 사자의 부르짖음으로 억세게 위여처 부르짖은 줄로 깨우쳐지노니 곧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만 호올로 높을 손! 무량한 생사도 이제 여기에 다 하였도다.
 
221
(일동은 이상한 감격에 부딪혀 저절로 땅에 엎드린다. 태자는 전신이 모두 방광(放光)한다. 시위 일동의 몸은 점차로 희미해 보인다. 숭고하고도 순(純) 종교적 음악이 한창 고조해진다.)
 
222
─ 천천히 막(幕) ─
 
 

 
 

2. 〈제1막〉

 
 

2.1. 1

 
225
• 장(場)
226
가비라성 동궁
 
227
• 시(時)
228
여름 오전.
 
229
• 경(景)
230
순 고대 인도식 장엄한 건축, 실달태자(悉達太子)가 편거(便居) 하는 신궁전의 일부이다. 조각한 청홍색 대리석 원주(圓柱)가 무대 전면 좌우편에 액록(額綠)을 조성하여 서 있다. 무대 중앙에는 7∼8단의 대리석 층계인데 광은 3간이나 거의 넘을 듯, 층계 좌우 양단에는 커다란 대리석을 3층 조각으로 가선을 한 홍예가 틀어져 있는데 심옥색(深玉色), 금색, 연분홍빛이 고귀하게 서로 조화되어 아청(鴉靑) 하늘빛 배경에 좋은 대조로 보인다. 홍예(虹霓) 밖에는 만화색리(萬花色裡)에 종려와 염부수(閻浮樹), 홍예 양측에는 열어 제쳐 놓은 황금 조입(彫入)한 청아색 고동비(古銅扉) 이다. 무대 좌편에는 삼단 층계 위에 옥좌를 설치하였고 청과퇴색의 후장 무거운 금수면막(錦繡面幕)은 양측과 상부에 술이 달린 금색 굵은 줄로 걸어 매어 있다. 옥좌 좌편에는 침실로 통하는 조그마한 출입구, 옥좌 우편에는 아치형의 커다란 지게문인데 궁전 현관으로 통하는 출입구이다.
231
무대 우편에는 조금 깊숙이 들어간 각도로 휴게실, 그 양측에는 청색장이 반쯤 드리워 있다. 휴게실 우편은 다른 방으로 통하는 출입구이다. 갸름하고도 높은 금색 테이블과 나즈막하고도 넓은 대리석 테이블, 조각한 의자향로 등이 삼삼오오로 여기저기 배치되어 벽화와 석층계와 황내(皇內) 바닥에 깔은 융단과 모두 화려장미한 조화를 보인다.
232
향로의 향연(香烟)은 몇 줄기 소르르 떠오르는데 정면 홍예 양족에 금창을 들고 철상(鐵像)처럼 서 있는 두 갑사(甲士) 밖에는 무대가 텅 비었다. 멀리서 고조하던 음악소리가 점차 줄어지면서 군중의 환호만세 하는 소리, 박수 하는 소리, 노래 소리, 웃음소리 등이 정원 쪽에서 성고(盛高)히 일어난다. 아마나 태자의 마음을 위안시키기 위하여 성대한 원유회(園遊會)를 차린 듯.
233
(정중한 경필(警蹕) 소리가 나면서 칠십이 가까운 정반왕(淨飯王)은 근 백여 세의 마가남(摩訶男) 대신과 기타 2∼3 중신에게 옹위되어 옥좌 우편 출입구에 천천히 등장)
 
 
234
정반왕   (수심이 만연한 태도로 대리석 층계 옆에 가 서서 옥좌 좌편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쉬며) 온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고. 태자의 출가할 마음을 어떻게 해야만 돌릴 수 있을는지……. 아사타인의 말이 과연 맞으려는가. 마가남 그 때 아사타 선인이 무엇이라고 말했던지 경은 자세히 기억하는가.
235
마가남   젓사오나 대강 기억하옵나이다.
236
정반왕   그러면 그 때 광경을 세세히 한 번 일러오라. 혹시 무슨 방편이 생각 되더라도.
237
마가남   그 때 동궁전하께옵서 탄생하셨을 적에 한 가지 기이하온 일은 하늘에게서 제석천(帝釋天)이 천녀를 데리고 내려와서 흰 비단자리를 깔고 왕자를 바라보셨으며 땅에서는 아홉 마리 용이 솟아올라서 입으로 물을 뿜어 태자의 몸을 깨끗이 씻어 드렸사오며 또 네 송이 연화가 피어올라 태자께옵서 걸음을 걸으시는 대로 발을 받들어 드렸사오며…… 그리하옵고 그 때 태자께옵서는 바람 위에 계옵신 듯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걸으시되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시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시며 외치어 부르시되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이라고요.
238
정반왕   천상천하 유아독존!
239
마가남   그래 그 소리가 끝나자마자 천화(天花)가 우수수 떨어지고 공중에서는 풍악소리가 진동하였습니다. 그 때의 그 광경을 어찌 이루 다 말씀으로 사뢰올지도. (추감(追感)이 몹시 새로운 듯)
240
정반왕   마가남 그리고 그 아사타 선인의 말은?
241
마가남   네 네 옳지 참. 아사타 선인의 말씀이 상법에 삼십이상(三十二相)만 갖추어도 전륜성왕이 되어서 나라를 잘 다스리고 성군의 이름을 만고에 끼친다 하옵는데 팔십 종호(種好)까지 마저 갖춘 이는 그 전륜성왕의 실위(室位)도 초개같이 여길 뿐더러 나라나 처자도 헌 신짝 같이 내어버리고 입산수도하여서 구의(究意)의 대각을 이루고 인천삼계(人天三界)의 대도사가 되어 삼계 중생을 제도하고 대우주의 큰 빛이 된다고 하였삽는데……그러하옵는데 (한숨) 우리 태자께옵서도 삼십이상에 팔십 종호를 갖추시옵셨다고요.
242
정반왕   (침통한 어조로) 마가남 그래 출가 이외에는 다시 아무 도리도 없다고 하던가.
243
마가남   네 ─ 그러하옵는데 아사타 선인의 나중 말씀이 만약 마야 중전 마마께옵서 길이 생존해 계옵시고 또 아무쪼록 태자께옵서 출가만 하옵시지 못하게 하오면 이 세상에서 전륜성왕으로 계옵실 수가 있을 듯도 하다고요.
244
정반왕   (하염없이 눈물을 지으며) 그러나 중전은 벌써 18년 전 태자 난 지 7일만에 돌아갔으니 이제는 이제는 아비된 늙은 몸만 홀로 남아 있어 아무리 만류하나 끝끝내 들을 것 같지도 아니하고…… 아무려나 이제는 마지막으로 야수다라에게나 한 번 당부를 해볼까 하였는데……. (좌편을 보면서) 야수다라를 여기서 만나자고 벌써 아까 기별을 하였었는데 온 어째 이다지도 늦을꼬. (매우 초조하고 근심하는 얼굴)
 
245
(정원에서 환호하는 소리, 대고동라(大鼓銅鑼, 기타 관악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파사파제부인(波闍波提夫人)이 양삼(兩三) 시녀에게 옹위되어 중앙 石階[석계]로 등장)
 
246
정반왕   화원에서는 유흥이 매우 짙은 모양인데 동궁은 얼마나 즐겨합디까.
247
파사파제  네 글쎄요……. (고개를 힘없이 숙인다)
248
정반왕   그러면 오늘도 역시. (실망하는 태도)
249
마가남   동궁마마를 위하옵시와 이렇게 훌륭한 궁전까지 지으시옵고 오늘은 꽃잔치 내일은 달놀이로 매일같이 동궁마마의 마음만을 위로해 돌려보시려고 하도 진념하옵심…… 국난을 당하와도 아무 충성과 힘을 바치지 못하옵고 그저 성은으로 이 나이까지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 노신 하정(下情)에 죄악이 지중하옴은 너무도 황공만 할 뿐이로소이다.
250
파사파제  오늘도 역시 어제나 다름없이 가무나 음율에는 눈도 거들떠보시지 않고 시녀들이 그리 권하는 술잔도 듭시지 않고 매양과 같이 무슨 근심에 잠기어 침울해 하시기만 하시겠지요.
251
정반왕   아무리 하여도 출가하겠다는 결심은 기어히 돌릴 수 없는 모양입디까.
252
파사파제  네 ─ 글쎄요. 아무튼 이 몸이 친어미가 아닌 만큼 사랑이 부족하였던 탓이겠지요.
253
정반왕   아따 그런 사랑 얘기는 저의 아내인 야수다라나 할 말이지 중전에게야 무슨 그리 불안스러운 사정이 있겠소.
254
마가남   어떻든 존엄하옵신 보위까지 던져 버리시옵고 출가입산하옵시겠다는 그 결심도 모르옵건대 여간하옵신 일이 아니온 줄로 아뢰옵나이다.
255
정반왕   아마나 그것도 천생 팔자라고나 이를까! 반드시 출가수도하여 그 법력으로써 일천 사해(一天四海)를 감복하는 불타가 되리라고 선인이 예언까지 하였었다더니…….
256
마가남   아무튼 그것은 거룩한 아사타 선인의 말씀이오매 설마 과히 거짓말도 아니올 줄로.
257
정반왕   과연 그러하면…… 금방(今方) 이라도 선양(禪讓)해 주려는 이 왕위도 버리고 출가를 한다면……. 이 가비라가 장차 어찌나 될른지……. 무어 이제는 이 나라에 장래할 운명도 뻔히 보이는 일인데……. (암연(暗然)히 낙루(落淚))
 
258
(야수다라가 양삼 궁녀들에게 옹위되어 좌편 침전 출입구에서 등장. 시녀(侍臣)과 궁녀들은 정반왕에게 국궁(鞠躬)하고 양편으로 조금 멀리 물러선다)
 
259
야수다라  (부왕에게 국궁) 시급히 입시하랍시는 처분이 계옵셔서…….
260
정반왕   오 ─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너도 매양 근심하는 바와 같이 근일에는 태자가 주야로 얼굴에 수심이 가득히 차보이니 어버이된 나로서는 잠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고녀.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을고. 너의 생각엔 무슨 좋은 도리가 더러 있는지.
261
야수다라  사뢰옵기 황공하오나 저의 미천한 생각에도 태자께옵서 근일에는 행동하심이 더욱 평소와 다르시옵고 매일 삼시전(三時殿)에서 여러 궁녀들을 시키와 노래와 춤으로써 위로도 드려보았사오나 그런 것들은 모두 귀치않아만 여기시옵고 기나긴 밤이 다 새도록 침실에 듭시지도 않사오며 늘 우울과 비탄으로만 지내시오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사올른지……. 그만 좁고 여린 가슴이 무너지는 듯……. (눈물을 짓는다)
262
정반왕   너의 심정도 응당 그럴 것이로다. 온 궁중이 아니 온 가비라 나라 백성들까지라도 모두 그로 말미암아서 걱정이거늘……. 태자가 월초(月初)에 사문(四門) 밖으로 구경다녀온 뒤부터는 기색이 점점 달라가는 모양인데 네가 어떻게 하여서라도 그의 마음을 아무쪼록 화락하게 돌려볼 무슨 도리가 없을까.
263
야수다라  (국궁) 황공하오나 미욱한 소견에 무슨 도리가 있사오리까. 부왕마마께옵서 아무쪼록 좋은 도리를 분부해 주옵소서.
264
정반왕   내가 여러 대신과 권속들에게 신칙(申勅)하여 이미 왕성의 열두 대문과 서른여섯 소문을 단단히 지키게 하였고 만약 그 문을 한 번 열면 사백리 밖까지 울리게 하는 쇠북을 달아놓았으며 밤이면은 문마다 횃불을 잡혀서 만단의 단속을 철통같이 하여 놓았으나 다만 걱정은 안으로 그의 마음을 돌이킬 아무 방법이 없으니……. 그러나 다행히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이는 오직 동궁비인 너뿐인데……. 남의 아내된 도리이매 아무쪼록 정성을 다하여 어떻게 하여서라도 그의 번뇌와 고민을 풀고 화락한 기색으로 이 나라의 태평성대를 누리도록 하였으면 하는데…….
265
야수다라  젓사오나 부왕마마께옵서 그런 분부를 아니계옵신들 태자마마의 지어미된 저의 몸은 새로 이 가비라성과 석가족속을 돌보온들 어찌 정성과 단심을 다 하지 않사오리까. 비록 미거하오나 부왕마마께옵서 안심하옵시도록 일심정력을 다 하오리이다.
266
정반왕   오 ─ 가상하다. 기특한 말이로다. 나는 이 나라의 천병만마보다도 너의 뜻을 철성같이 굳세게 믿는 것이니 그리 알고 아무쪼록 되도록 잘해 보아라. 그러면 바로 시방이라도 물러가서…….
267
야수다라  (국궁하면서) 그럼 물러갑니다. 다시금 황공하오나 그 일만은 과도히 염려마옵소서. (국궁하고 물러간다)
268
정반왕   오냐 어서 가 보아라.
 
269
(야수다라 궁녀들에게 옹위되어 고요히 좌편으로 퇴장)
 
270
정반왕   오 이제야 마음이 다소 좀 놓이는 걸 야수다라비가 잘 힘만 쓰면 그만 일은 과연 되염즉도 하다마는…… 다행히 실달다(悉達多)가 생각을 관념하고 정말로 이 가비라성의 황통(皇統)을 이어갈 전륜성왕이었으며…… 마가남 그야말로 그 얼마나 반가웁고 경사로울 일일까.
 
271
(중신들은 국궁)
 
272
마가남   젓사오나 성수무강(聖壽無彊) 하옵소서. 미리 이 나라에 올 큰 경사를 축례하옵나이다.
273
정반왕   (화기(和氣)로운 얼굴로) 과연 그리만 된다면…… 그러나 그것도 다 짐의 복이 아니라 모름지기 우러러 제석천궁에 계옵신 선왕선후께옵서 거룩하옵신 음덕을 내리사 도으셨음이겠지.
 
274
(정반왕이 환궁하려고 중신들과 함께 좌편을 향해 걸으려 할 제 전도(前導) 1인이 중앙 석계(石階)에서 급히 등장)
 
275
전도    (정반왕을 향하여 복지(伏地)) 동궁마마께옵서 이리 듭실줄로 아뢰오. (정반왕은 점두 후 발을 멈추고 태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듯, 나취수(喇吹手) 2인이 정면 홍예(虹霓) 양측에 기착(氣着) 정립하여 기가 달린 기다란 퉁나발로 외마디 가락을 길게 길게 분다. 소음과 인군(人群)이 둘려 있는 곳에 8인의 궁녀가 모두 꽃다발을 가지고 들어와서 층계와 실내에 꽃을 흩날릴 뿐이다. 장엄한 음악에 맞추어 12인의 갑사가 들어와 6명씩 석계 양측으로 갈라서서 장검을 앞으로 버쩍 높이 든다. 그 팔자형 의장도 밑을 통하여 실달태자를 선두로 가희 8인, 무희 8인, 궁녀 8인, 시종갑사 4인, 어릿광대 4인, 소고잡이 12인, 요발수 4인, 여악공 6인, 기타 궁속 등 다수가 등장하여 위치를 찾아 즉열나립, 실달태자가 무대 중앙에 이르러 정반왕께 국궁 경례를 한 뒤에 노예들이 가져오는 의자에 시름없이 걸터앉는다. 어릿광대들은 태자를 둘러 책상다리를 하고 땅바닥에 앉는다. 음악소리는 점차로 가늘게 사라져 없어지고 침묵 정적, [小間[소간]])
276
정반왕   (반가움과 근심이 교차하는 듯 태자를 이윽히 보고 섰다가 천천히 걸어 태자의 곁으로 가서 태자의 등을 어루만지며) 오 실달다…….
277
태자    (일어나 부왕께 공손히 국궁하고) 소신이 부왕마마께 알견(謁見) 하옵고저 시방 대전으로 입시(入侍)하려 하옵던 길이옵더니…….
278
정반왕   응 늙은 몸이 너무 외로이 팔중(八重)에만 깊이 들어 있어 하도나 적적하기에 자네 안으로 잠시 소풍이나 하고자 하여 나왔던 길인데……. 그런데 오늘도 저리 깊은 시름에만 쌓여 있어 보이니…… 너무 심상을 그리 괴롭게만 가지면 신색에도 좋지 않을터인데…….
279
태자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인다)
280
정반왕   그래 이제 고만 그 출가하겠다는 뜻을 버리고 아무쪼록 심신을 편하고 즐겁게 갖도록 하여라.
281
태자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침묵)
282
정반왕   다시 더 한번 돌려 생각해 보아라.
283
파사파제  아무렴 그러셔야지요. 동궁마마 부왕마마께옵서는 저리도 춘추가 높으시옵고……. 더구나 천추만대 뒤를 깊이 길이 믿삽기는 오직 슬하의 동궁마마 한 분뿐이옵신데……. 만일 노래(老來)에 하염없는 근심을 끼쳐 드리옵신다면…… 그야말로 동궁마마께옵서 일부러 불효불충한 허물을 범하옵심이 아니겠습니까. 이 노신의 간절한 권청(勸請)이오니 동궁마마 아무쪼록 부왕마마께옵서도 만경(晩境)에 복락안강(福樂安康) 하옵시도록…… 마음을 돌리시와 다시 사려(思慮)해 보시옵소서.
284
태자    그야 모후(母后) 마마께옵서 그처럼 진념 안하옵신들 불초한 소신이오나 그만한 사려야 어찌 없사오리까마는…….
285
파사파제  더구나 꽃 같은 청춘의 야수다라 마마가 가엾지 않사오리까.
286
태자    마마. 이 땅의 일체 중생이 모두 가엾고 불쌍한 목숨들이옵거든…… 어찌 반드시 가비라 왕궁 야수다라 귀비의 꽃같은 청춘만이 오직 가엾다고 이르오리까.
 
287
(정반왕과 파도파제비는 서로 시의(是意)하게 쳐다보며 점두, 아마 태자를 더 이상 권유할 필요도 없다는 눈치)
 
288
정반왕   흥…… 네가 정히 그리 고집을 하니 나도 더 이상 더 권유하지도 않겠노라. 그러나 다만…… 출가는 네 뜻대로 할 제하더라도 아직은 심신을 유쾌히 가지고…… 내 이제라도 만승의 보위를 물리어 줄 것이니 아무쪼록 세간 환락을 마음껏 누리어 보아라. 과연 인간복락을 다 갖추어 맛본 뒤에 출가를 한다 하더라도 그리 과히 늦은 일은 아니니까.
289
태자    아니올시다. 부왕마마. 거친 고해에도 물결을 타고 표랑부침(漂浪浮沈)하는 불쌍한 중생을 제도하오려면 불초 소신의 출가가 한 찰나도 바쁘옵건마는……. 이 나라의 자고로 전래하는 유풍(遺風)이나마 “자식이 되어가지고 성혼하여 아들을 낳기 전에 출가함은 큰 죄악이라” 일컫사오매 부득불 왕손을 낳아 바쳐 왕위를 계승케 하옵고저 하였삽더니……. 이것 왕대를 받들 왕손 라후라가 출생하였건마는 소신이 또 다시 왕위와 애욕에 얽매어 잡혀서 이내 출가치 못한다 하오면 오백 생을 거푸 드나온들 어느 시절에 또다시 출가할 겨를이나 있겠사오리까.
290
파사파제  일부러 출가의 괴로움을 찾아 애쓰느니보다는 만승천자의 부귀복락을 길이 누리어 보는 것이 좋지 않사오리까.
291
태자    그러나 삼계가 모든 화택(火宅)인데 복락의 그 평안한 자리를 부귀 속에서야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 애써 그 부귀라는 허풍선이에게 탐착(眈着)이 되어서 세간왕조 이른바 거룩한 자리에 높이 올라앉아 보온들 제 몸이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오지 못하였으매 무서운 지옥의 초열번뇌(焦熱煩惱)를 어찌 다 견딜 수 있사오리까. (다소 괴로운 듯 주저하다가) 부왕마마 그리하와 소신이 출가하와 한사문이 되고자 하옵는 것은 소신 평생의 간절한 원염(願念) 이오니 윤허하옵시기를 복원하옵나이다.
292
정반왕   (침묵 잠깐) 출가 입산 네가 출가 입산을 하다니…… 안 된다. 안 될 말이다. 내가 떠나서는 안 된단 말이다. 출가가 무엇이며 입산이 다 무엇이냐. 내가 만일 출가를 한다면 늙은 나는 어찌되며 석가족(釋迦族)은 무엇이 되며 가비라왕성은 뉘 것이 되란 말이냐. 그 대답을 먼저 하여보아라.
293
태자    (고민, 침묵)
294
정반왕   왜 대답이 없을까. 무엇을 그리 주저하고 섰는고. 속히 그 대답을 좀 이르라.
295
태자    소신이 봉답하올 그 사연은 부왕마마께옵서 이미 통촉하옵셨을 줄로 아뢰옵나이다.
296
정반왕   그러면 너는 기어코 내 명을 거스리고야 말 작정인가.
297
태자    황공하오나 소신이 오늘날까지 한 번이라도 부왕마마께옵서 하명하옵심을 봉행치 않은 적이 없사온 줄로 아뢰옵나이다.
298
정반왕   (다소 안심한 듯이) 그야 암 그렇지. 출천(出天)의 충효를 가진 내가 군부의 명을 거역할리야……. 그러면 이제 아마 내 명령이면 무엇이든지 모두 순종하겠지.
299
태자    (몸을 좀 떨기는 하나 안색을 동요치 않고 두 눈만 먼하니 저 편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의 영혼은 벌써 아마 왕궁을 떠나 딴 세계에 있는 듯. 그러다가 자아로 돌아와서 부왕 전에 엎디어 공손히 절하며) 용서하옵소서. 부왕마마께옵서 그토록 진념하옵고 만류만 하옵시니 소신의 도리로써 도무지 어찌 할 수 없삽나이다.
300
정반왕   (흔연히) 아무렴 그래야지.
301
태자    그런데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부왕마마께옵서 소신이 출가를 발원하오므로 말미암아 하도 그리 진념하옵시거든 소신의 정상(情相)을 불쌍히 여기시와 소신의 달리 다시 소원하옵는 것을 이루어 주옵시면 출가할 뜻을 버리겠삽나이다.
302
정반왕   (반가운 기세로) 옳지 그래야지. 그러면 너의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출가 말고는 모두 들어 이루어 줄 터이니 너의 소회(所懷)를 세세히 다 이르라.
303
태자    거룩하옵신 성지(聖旨)는 천은이 망극하옵고도 황공하도소이다. 소신의 소원은 네 가지가 있사옵는데……. 첫째 소원은 항상 씩씩하고 꽃답게 있고자 하옵는 것이옵고 둘째 소원은 항상 병들지 않고 살고자 하옵는 것이옵고 셋째 소원은 항상 늙지 말고자 하옵는 것이옵고 넷째 소원은 죽지 않고자 하옵는 것이로소이다. 복원(伏願) 부왕마마 지금 사뢰온 이 네 가지 소원만을 이루어 주옵시면 출가를 하지 않고도 살겠삽나이다. 부왕마마 이 소원만 제발 이루어 주옵소서.
304
정반왕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한참이나 어쩔 줄 모르다가) 실달다야. 너의 소회는 잘 알았다. 그리고 가엾은 그 고충을 뼈에 사무쳐 동정도 하노라. 그러나…… 그러나 인생의 일이란 인력으로 되는 것도 있고 또한 인력으로 못하는 것도 있나니라. 그러니 그러한 헛된 생각 쓸데없는 번민은 하지 말고……. (목이 메인다)
305
태자    (실망하는 듯 침묵)
306
정반왕   (다시 기전(氣轉)) 실달다야. 너무 그리 낙심만 하지 말아라. 이 부요한 가비라의 국토와 거룩하고도 존엄한 역대 사직과 만승천자의 영화로운 보위가 모두 다 너의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이랴. 그리고 또한 이 늙은 아비의 흰 터럭을 좀 살피어다고……. (느끼며) 그리고 또 저 야수다라와 라후라가 가엾지 않느냐. 아무쪼록 마음을 좀 돌리어다고. 일국의 대왕이요 태자의 아비로서 이렇게 손을 모아 (합장하며) 너에게 간원이다.
307
태자    (황공돈수(惶恐頓首)) 부왕마마 황공하오나 그만하옵소서. 그러하오나 왕자의 권위와 궁중의 부귀가 그 아무리 영화스러울지라도 소신의 눈에는 다만 그 속에서 났다 늙고 병들고 죽는 그것만이 보일 뿐이로소이다. 부왕마마 마마께옵서는 다만 궁중 살림의 호화로운 그것만 보시옵고 어찌하여 일체 중생의 고통하는 그 신음소리는 듣지 못하시나이까. 나의 부모는 정반왕뿐만이 아니오라 무량한 중생이 모두 다 나의 부모이며 나의 처자는 야수다라와 라후라뿐만이 아니오라 무량한 중생이 다 나의 처자며 골육이로소이다. 부왕마마 그리하와 소신은 불효 불충 불초하온 이 소자는 이 모든 부모와 처자와 골육을 위하여 출가수도하옵기로 결심하였소이다. 황공하오나 이 미충 하정(微衷下情)을 통찰하여 주옵소서. (국궁)
308
정반왕   (노기를 띠우고 한참이나 태자를 노려보다가) 출가 출가수도! 이 늙은 아비를 버리고 그래 기어코 출가……?
 
309
(풍악소리가 들린다)
 
310
정반왕   (일부러 기전 화기롭게) 실달다야. 자 ─ 그러지 말고 저 삼시전(三時殿)의 풍악소리나 들어보아라. [小間] 요량한 음율! 질탕한 풍악! 저 얼마나 좋은 소리냐. 그러지 말고 어서 들어가 즐겁게 놀아라.
311
태자    (얼빠진 듯이 서 있다)
312
정반왕   (좌편으로 퇴장하려다가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이키어 재삼 무슨 말을 더 다시 부탁하려다가 태자의 수상한 태도를 보고 몹시도 불안이 되는 듯 단념하는 듯 중신 등에게 옹호되어 무거운 걸음을 걸어서 좌편 출입구로 퇴장)
313
태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쥐고 번민)
 
314
─ 조명과 음악소리가 점차 줄어지며 막 ─
 
 
 

2.2. 2

 
316
막간 1분 30초, 객석의 조명은 어두운 채로 고요한 음악과 가희의 노래가 들린다.
 
317
꽃이라 말하오리 달이라 이르오리
318
곱고 둥그올사 꽃도 달도 같아서라
319
지는 꽃 붉은 눈물 여윈 달 푸른 시름
320
붉게 붙는 푸른 불 생초목 다 타옵네
 
321
라후라 굵은 줄이 하마나 풀리오리
322
끊어도 또 옭매듭 그 이름이 사랑이라
323
짧은 밤 길게 잡혀 외돌고 푸돌올제
324
좁은 가슴 쥐여짜 피덧는 하소연은
 
325
막이 열리면 중앙 홍예밖으로 교교한 월색, 무대 좌우편 출입구 밖에서 암바 라잇이 들이비추이며 군데군데 창으로 스며드는 녹색 스포트 라잇의 월광이 비쳐보일 뿐 그 이외는 무대 전부가 암흑이다.
326
(인도 악기의 고요한 멜로디가 멀리서 은은히 들린다. 태자가 좌편 출입구에서 초연히 등장하여 월광을 띠고 중앙에 서서 침전 출입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출가할 결의가 곧세게 보이는 듯 야수다라가 침전 출입구에서 고요히 등장한다. 염려(艶麗)하면서도 천녀(天女)와 같이 유한고결(幽閑高潔)한 품격을 갖추었다. 고요한 음악소리에 싸여 태자는 로맨틱하면서도 부부애의 진심을 가득히 담은 야수다라의 애정을 몹시도 굿기는 듯한 무량한 희열과 얼마 안 있어서 이별하게 될 쓸쓸한 비애를 느끼는 듯)
 
 
327
야수다라  (태자를 향하여 공손히 국궁) 부르심도 없사온데 이처럼 당돌히 출입하옴을 용서하옵소서.
328
태자    (몹시 애련해 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요하고도 또 부드럽게) 오 ─ 야수다라 왜 아직껏 취침하지 않으셨소.
329
야수다라  (고요히 점두(點頭)) 네 어쩐 일인지 이상하게도 별안간 가슴이 몹시 두근두근 울렁거려서요.
330
태자    왜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릴까.
331
야수다라  (태자를 한참이나 유심히 보다가) 아마 전하께옵서는 아무 기별도 없이 이 밤 안으로 출성을 하실 작정이시지요! 아마 꼭 그렇지요!
332
태자    야수다라! 태자가 이제껏 출성치 못하였던 것은 애처로운 그대의 안타까운 그 눈물 그 애정에 얽매어 잡히어…… 이내 헤어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요. 그러나 이제는 태자 일신만의 부질없는 애욕으로 말미암아서 일체 중생의 고뇌함을 아니 돌볼 수가 있겠소. 시방 중생들은 어두운 길에서 헤매이며 한창 괴로워하고 있소. 그러니 얼른 그 고뇌 속에서 구해내어 영원 장구한 안락을 주어야 하지 않겠소? (홍예(虹霓) 밖 화운을 내다보며) 아 ─ 향기로운 꽃도 피었다지며 아름다운 달도 찼다 기우나니 하물며 꽃다웁다는 인생의 청춘이야…….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부왕마마를 비롯하여 일체 모든 중생은 탐진치(貪瞋癡) 삼독이란 미끼에 걸려 생로병사의 그물에 들어가는 가엾은 물고기로다. 내 이제 여기에서 대자대비의 대원(大願)을 발하였노라.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이 고해를 벗어 건네어 영생불멸의 큰 낙을 주고 싶은 것이 오직 나의 소원이로다. 야수다라비여 그대의 마음엔 어떠하신지요. (정다웁게 야수다라를 껴앉을 듯이 들여다본다)
333
야수다라  (잠깐 사색하는 듯) 젓사오나 전하께옵서 그토록 일체 중생을 가엾이 여기시옵거던 그 일체 중생의 하나이온 이 야수다라의 불쌍한 정상 안타까운 가슴도 좀 살펴주옵소서. 헤아려 주옵소서. 그래서 영원한 안락을 주옵소서. 전하! 네?
334
태자    (무언중 부인하는 동작)
335
야수다라  그러면 불쌍한 야수다리는 불행히도 그 일체 중생의 테 밖으로 쫓기어 났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정말 그러시오면 야수다라가 이 자리에서 금방 죽어 없어져도 전하께옵서는 도리어 매우 기꺼우실 줄로 믿사오니 과연 죽어 없어지라고 하고 싶으시오면 차라리 어서 죽어 없어지라고 하시옵소서. 태자 전하께옵서 생각하시는 그 고해보다도 아픈 주검이라 그리 두려워 사양하올 야수다라가 아니옵거든……. (다소히스테리컬한 기미로 서둔다)
336
태자    야수다라! 태자가 야수다라를 알뜰히 사랑하지 않소? 사랑하므로 아니 크게 두굿겨 사랑함으로 말미암아서 시방 우리가 받는 이 고뇌를 해탈해 버리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오!
337
야수다라  시방은 그리 두굿겨 사랑하옵신다 하온들 만일 한 번 이 몸을 떼쳐 버리시옵고 멀리멀리 훌쳐 떠나만 가옵시면……. 사랑을 잃은 이 몸 홀로이 넓은 궁중에 궤발 물어던진 듯이……. (목이 멘다)
338
태자    그야 무얼 사랑에야 때를 타며 곳을 가릴 리가 있겠소. 참된 사랑이란 때와 곳을 떠나서 영원무궁한 것일터인데…….
339
야수다라  그러면 전하께옵서는 기어코 이 야수다라를 버리시옵고 출가를 하실 작정이십니까? 더구나 갓낳은 핏덩이 라후라! 아빠 엄마의 얼굴도 가려알 줄 모르는 아직도 강보의 핏덩이인 그 불쌍한 것을 그냥 내어버리시옵고 꼭 출가만 하옵실 작정이시라면……. 그 아버님 된 이의 마음은 너무도 잔인하다고 이르지 않사오리까. 전하, 전하께옵서는 눈 앞에 방긋거리는 갓난 아기 당신 아드님이 가엾고 사랑스럽지도 않으십니까.
340
태자    그야 아무렴 남 다르게 가엾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기에…….
341
야수다라  아니지요. 그것도 모두 허튼 말씀이시겠지요……. 그러면 왜 그 아기가 탄생하였다는 기별을 들으시옵고 전하께옵서는 라후라라는 이름을 지어 부르셨어요. 라후라! 라후라라는 그 말 뜻은 계박! 장애! 곧 방해물이라는 이름이 아니예요? 그러니 그처럼 당신의 아드님까지도 방해물 원수 구수(仇讐)로 여기시옵는데 천하고도 하잘것 없는 이 야수다라 쯤이야 어느 때 어떻게 구박에 학대를 받사올른지.
342
태자    아니오. 그것은…… 야수다라비가 이 태자의 마음을 잘못 알았소.
343
야수다라  잘못 알았어요? 아내와 자식도 떼쳐버리시옵고 기어코 출가만 하옵시겠다는 그 마음 말씀이셔요? (침전에서 영아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아기의 울음! 그렇게 거룩합신 아버님을 사모하여 섧게 우는 아기의 울음! 저 울음 소리도 전하 귀에는 귀치 않고 성가시럽게만 들리시겠읍지요.
344
태자    야수다라비여. 내말씀을 자세히 좀 들어주시오. 날짐승 길버러지라도 제 새끼는 두굿길 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야 다시 이를 바이 있겠소. 다만 그때 자식의 사랑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평생의 굳은 결심이 무디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속으로 걱정을 하던 중 부지불식 간에 그만 그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던 것이오. “사랑하는 이에게서 떠나가지 않으면 아니 될 터인데 그 괴로움 그 구슬픔의 씨가 또 하나 불었으니 출가하는 데 장애가 더 늘지 않았을까”하고 그만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속깊은 탄식에 섞기여 라후라라는 말이 문득 나왔던 것이오. 야수다라! 그러니 그 때의 태자의 가슴과 정경(情景)을 좀 헤아려주시오. 네?
345
야수다라  낮에는 전하의 곁에 항상 뫼시와 넌즛한 웃음에 푸른 봄철 늘어진 가락을 노래하옵고 밤에는 원앙금침 보드라운 꿈자리에 고요한 안개를 속삭이었삽더니……. 그만 라후라 아기가 탄생한 이후로는 동궁비라 일컬음도 다만 아름답게 헛되인 칭호뿐이고……. (함원(含怨)하는 암루(暗淚)에 떨리는 음성)
346
태자    (어쩔 줄 몰라 잠깐 기전, 실내로 잠깐 거닐다가 별안간 완이(莞爾) 타소(打笑)) 아하하. 그대의 원망은 당연하도다. 애처러운 그 가슴! 안타까운 부르짖음! 그러나 그것만이…… 베개를 같이 하고 살을 섞으며 애욕에 빠져 하둥지둥 얽크러지는 그것만이 부부의 그윽한 원정은 아니련마는. 무우수(無優樹) 위에 뚜렷이 솟은 달을 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한 가지의 방긋이 웃는 꽃을 둘이 함께 바라보며 기쁘거나 슬프거나 갈래가 없도록 마음이 합하고 넋이 어울리는 것이 이른바 삼생연분의 참된 부부가 아니겠소? 참된 부부임의 이러하거니……. (화원꽃을 가리키며) 저를 보라. 저기 저 꽃밭! 꽃다운 향기에 미쳐 날던 한 쌍의 호접도 같은 이슬을 맑게 맛보고 같은 꽃잎에 고요히 쉬는도다. 암나비는 야수다라 그대요 숫나비는 실달태자 나라고……. 피는 봄꽃에 화락한 마음은 둘지언정 어지러운 색에 집착되지는 말어지이다. 야수다라! 그렇지 않소?
347
야수다라  (화성이안(和聲怡顔)에 반기는 미소를 띠고) 일찍이 듣지 못하옵던 반가운 말씀 비 와서 궂은 밤에 보름달을 뵈옵는듯 두굿겨 주옵시는 애처로운 이 몸 쾌생 회춘의 감로수를 먹사온 듯 금방 죽사온들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 있사오리. 이제 저의 가슴에 뭉치어 있던 그 무엇이 금방 한꺼번에 사라진 것 같소이다. 그럼 이제 날마다 뫼시옵고 꽃구경 달구경이나 하옵도록……. (애교를 피우면서)
 
348
(태자가 야수다라비를 가볍게 포옹, 영아의 울음 소리가 또 들린다. 시녀 1인이 침전 출입구에서 고요히 등장)
 
349
시녀    (열쩍어서 잠깐 주저하다가 넌지시 국궁) 라후라 아기가 선잠을 깨시와 엄마마마를 찾으시는 줄로 아뢰오.
350
야수다라  아기가 오늘은 어째 그리 선잠을 자주 깨어 보채일까.
351
태자    응 그러면 어서 들어가서 귀여운 우리 라후라를 보채지 않도록 하시오.
352
야수다라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잠깐 주저하다가) 그럼 전하께옵서도 침전으로 함께 듭시지요.
353
태자    (다소 주저하는 빛) 먼저 들어가시오. 나는 잠깐 좀…….
354
야수다라  무얼요. 시방 같이 듭시지요. 이 야수다라가 그렇게 보기 싫으십니까. 어서 어서 들어가십소서. (평생 용기를 다 쓰는 듯한 팔로 태자의 허리를 껴안고 떼어밀어 침전으로 들어간다)
 
355
- 음악 고조, 태자가 침실로 들어가며 막 -
 
 

 
 

3. 〈제2막〉

 
 

3.1. 3

 
358
• 장(場)
359
실달태자궁 침전.
 
360
• 시(時)
361
전막의 심야 달밤.
 
362
• 경(景)
363
정면에는 청홍색 대리석 원주가 몇 개 서 있고 그 중앙 근처에 태자와 비의 기거하는 상탑(床榻)이 놓여 있다. 우편으로는 별전(別殿)으로 통하는 소문이요 좌편 후면에 정원으로부터 들어오는 계단문 우편으로 아치형 전망창, 창 밖으로 정원의 기화요초(奇花瑤草)와 멀리 설산(雪山)이 보인다.
364
군데군데 청홍등 불빛이 근심스럽게 꺼물거릴 뿐인데 화려하던 낙원이 음산한 시체로 화한 듯 시녀와 가희(歌姬)와 무희(舞姬)는 모두 송장처럼 여기저기 쓰러지고 엎어져 팔다리를 함부로 내어놓고 혹은 침을 흘리고 혹은 이를 갈며 혹은 군소리를 하며 갖은 추태를 드러내이고 있다.
365
(태자가 부시시 일어나 실내 광경을 두루 한참이나 여겨본다)
 
 
366
태자    (별안간 몸서리를 치며) 송장! 송장! 여기도 송장 저기도 백골 아…… 무서운 무덤! 사바! 지옥! (전망창 앞으로 쫓긴 듯이 달아난다. 한참이나 고민, 달빛에 은은히 보이는 설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엇을 결심하는 듯 별안간 주먹을 힘있게 쥐며) 오 ─ 세상의 환락이란 이와 같이 모두 더럽고 헛된 것이다. 나는 시방 출세간의 무위진락(無爲眞樂)을 구하여. 오…… 오냐 가자. 설산으로 가자. 기어코 설산으로 가자. 히말라야 설산이 나를 부른다. (휙 돌아서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향하여 돌진하다가 야수다라 침상 앞에 이르러 문득 발을 멈추고 다소 주저하면서) 아기와 엄마는 고요히 잠이 들었도다. (라후라를 끌어안고 뺨이라도 대어 보아 최후의 이별을 하려는 듯하다가 다시 단념하는 듯) 아서라 그만두어라. 라후라가 만일 잠이 깨어서 울든지 하여 야수다라마저 잠이 깨이게 되면 이 밤으로 떠날 이 길에 또 방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시방은 박정하나마 무언의 고별……. 차라리 은애(恩愛)를 버리고 무위에 들어서 불과(佛果)를 깨우친 뒤에 다시 만나보리라. (걸어나가려 한다)
367
야수다라  (얕은 잠이 깬 듯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더니 무엇이 반갑고 다행한 듯) 오! 전하 여기 계십니까. 나는 정말…… 그런데 이렇게 밤이 깊도록 왜 취침하지 않으시고 자리에 일어나 계십니까.
368
태자    (어색하게) 아까 잠깐 잠이 깨었다가 시방 막 다시 누우려고 하는 길이요.
 
369
(자기 침상으로 간다)
 
370
야수다라  밤이 아마 늦었나본데…… 그럼 어서 주무시지요. 아이 참 이상도 해라…… 저는 시방 어찌도 무서운 꿈을 꾸었는지요?
371
태자    (시들하지 않게) 무슨 꿈을 꾸었기에?
372
야수다라  (태자 침상으로 가서 태자의 얼굴을 유심히 여겨보면서) 아주 참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를 치며) 아주 몸서리가 처지는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저…… 전하께옵서 저를 그저 떼쳐버리시옵고 성을 넘어서 설산으로 도망해 들어가옵시는…… 그런 아주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에그 전하께옵서 정말 저를 버리고 가옵시면 어떻하나……. (태자의 어깨를 싸고 매어달려 하소연하는 듯)
373
태자    (잠깐 침묵) 무얼 그까짓 꿈을 누가 믿겠소. 설마 하니 내가 그대를 어찌 차마 아주 버리고 갈 수야 있겠소. 그까짓 꿈…… 아무 염려말고 잠이나 어서 잡시다. (일부러 선하품을 하며 자리에 눕는다)
374
야수다라  (자기 침상으로 가서 앉으며) 글쎄요……. 그 꿈이 정말 맞지 말았으면 작히나 좋겠습니까……. 이 야수다라가 전하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가슴을 졸이고 애를 태우기는 벌써 두번째나 되어요.
375
태자    (미소를 띄우며) 언제 언제 두 번째나 그리 알뜰히 속을 태웠더란 말이오.
376
야수다라  한 번은 이번 출가하신다는 통이고…….
377
태자    또 한 번은.
378
야수다라  (부끄러움을 머금은 미소) 또 한 번은 우리가 가례의 인연을 맺기 바로 그 전…….
379
태자    (픽 웃으며) 온 참 서로 만나기도 전의 혼자 꿈타령을 누가 믿겠소.
380
야수다라  아니예요. 그것은 꿈타령이 아리나 정말 생시의 이야기예요.
381
태자    그것은 또 무슨 수수께끼인데?
382
야수다라  그것은요. 저…… ‘수와얀바라’ (자선식) 경기장에서요.
383
태자    왜요. 내가 그 때 최후까지 모든 경기에 최우승을 하였었는데…….
384
야수다라  글쎄 그러니 말이지요. 저는 높은 대상(臺上) 휘장 속에서 혼자 좁은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었었요. “차라리 모든 경기를 중지해 버렸으면…… 혹시 불행하여 전하께서 한 가지 재주라도 다른 왕자들에게 지시게나 되면 어떻게 하나.”하고 온종일토록 어떻게 좁은 속을 태우고 졸이었던지요.
385
태자    그래도 최후의 승리는 내가 얻어서 이렇게 삼생의 가연을 맺게 된 것이 아니요.
386
야수다라  그것은 그렇게 되었지만요.
387
태자    그런데 무얼 사라진 옛꿈 하소연을 이제서 하면 무슨 잠투정이시요.
388
야수다라  아이 참 전하도…….
389
태자    (웃으며) 그러니 그 때는 그렇게 애를 졸이고 넋을 사루며 알뜰히 찾았던 그 인연이 이제 와서는 또다시 말썽을 부린다는 그런 하소연이지요.
390
야수다라  무어 꼭 그렇다는 것도 아니옵지요마는…….
391
태자    (미소를 띄우고) 그럼 이제는 내가 출가하였다가 다시 돌아오는 꿈이나 한 번 꾸어보시오.
392
야수다라  (미소에 섞여 누우며) 글쎄요. 이제 그런 꿈이나 다시 한번 꾸어볼까요. (하품, 잠이 드는 듯)
 
393
([小間[소간]], 등불이 꺼물거린다)
 
394
태자    (누워 자는 체하다가 고개를 드며 야수다라의 동정을 몇 번이나 살피다가 다시 일어나) 오. 이제는 갈 때가 되었다. 출가할 제 때가 돌아왔도다. 일각이 늦으면 일각의 번민 일각의 고뇌……. 만일 또다시 이 때에 떠나지 못하면 영겁의 해탈을 얻지 못하리로다. (소리없는 눈물로 마지막 고별을 하는 듯 무대 중앙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열루(熱淚)를 머금은 최후의 결별. 정원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다소 석별, 계단 문턱까지 이르러 마지막 다시 돌아다 본다)
395
라후라   (꿈을 깨인 듯 별안간에 크게 운다) 으으아아으아…….
396
태자    (최후의 승리를 축복하는 듯, 두팔을 힘있게 번쩍 들더니 휙 돌아서 달음박질 계단으로 내려간다)
 
397
(실내 등불이 별안간 꺼진다)
 
398
─ 음악이 고조, 태자가 아니 보일 때까지 천천이 막 ─
 
 
 

3.2. 4

 
400
• 장(場)
401
궁성 후문.
 
402
• 시(時)
403
아사타월의 만월(滿月)의 날, 양력 칠 월 일 일 심야.
 
404
• 경(景)
405
정면은 인도식 석병(石屛), 중앙에 네 귀 들린 지붕 있는 소문(小門), 문 우측에는 협문(脇門), 문전에 철망을 걸어놓았고 횃불이 한옆에 거진 다 타 여신(餘燼)만 이따금 꺼물거린다. 기치(旗幟)와 창검 등이 병립, 소문 좌편 구석에 차익(車匿)의 방, 방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비치어 있다. 달빛마저 쓸쓸한 심야 정적한 정경, 성문이 가만이 열리며 실달태자 가만히 나온다.
 
 
406
태자    어허 다행이로다. 다행이로다. 그런데 다행한 중에도 참 신기한 일이로다. 천인의 힘으로도 열지 못한다는 이 철문이 더구나 사백리 밖까지 울리는 쇠북을 달아놓은 이 철문이 소리도 없이 불가사의하게 저절로 열리어졌으니……. 오냐 이제 궐내의 어려운 곳과 금문(禁門)의 경위(警衛)를 벗어나서 시방 이 문턱까지 넘어선 이 한 걸음이 곧 일체 중생을 고해에서 구제해 내일 첫길이로다. 은애(恩愛)를 벗어버리고 하염없음에 들어가 처자의 쇠사슬을 끊어버릴 때는 진실로 이 때이로다. 자 ─ 그럼 이제 어서 차익이를 찾아보아야 할 터인데…… 차익(車匿)이가 있는 곳이 어디였었지? 옳지 저기 있었다. 저기야. (차익이 방 창 앞으로 가서 가만히 창을 두들기며) 차익아 차익아 얘 차익아 빨리 좀 일어나오너라. (독백) 이거 어떻하면 좋을까. (초조) 이 애 차익아!
407
차익    (실내에서) 으응 거기 누가 왔소? (잠 섞인 음성으로 퉁명스럽게)
408
태자    (초조하던 중 일변 반가운 듯) 내다 내야.
409
차익    으 ─ 응 누구야 일 있거든 낼 아침에 오너라.
410
태자    아니 나야.
411
차익    내가 누구야. 알다 모르게 내가. 망할 자식 낼 아침에 오래도.
412
태자    (몹시 초조하며) 아니 내야. 나는 태자다 태자.
413
차익    (놀라워서) 네? (방문을 열고 눈을 비비고 나오면서) 아니 태자께옵서 이 밤중에 나오실 리가…….
414
태자    쉬 ─ 내다 내야. 정말 태자야.
415
차익    네 ─ 그럼 정말! (얼결에 국궁(鞠躬)) 정말 태자께옵서 이같이 깊은 밤에 어찌하여서 여기를.
416
태자    나는 이제까지 몹시 취했다가 시방 막 깬 터이라 감로수 한 모금이 몹시도 급하게 마시구 싶구나. 그래서…… 들으니 그 물은, 그 샘물은 저…… 생사를 여인 거룩한 나라에 존귀한 나라에 있다 하더라. 그러니 나는 시방 그 나라로…… 거룩한 설산 히말라야까지 가서 그 샘물을 찾아볼 터이다. 차익아 말을 그 말을 얼른 타고갈 그 말을 빨리 좀 대령해다오. 어서어서 말을 그 말을…….
417
차익    온 천만의 말씀! 산이 다 ─ 무엇입니까. 이 밤중에 남 다자는 아닌 밤중에 히말라야 설산엔 어떻게 가시며 또 무엇하러 가십니까.
418
태자    시방 말과 같이 감로수를 얻어 마시려고…….
419
차익    안 됩니다. 안 됩니다. 태자께옵서 정말 그렇게 떠나가시오면 대전마마께 옵서와 마가남 대신 기타 중신 아니 온 나라의 일체 신민들가지 얼마나 걱정을 하겠습니까?
420
태자    아니다. 나는 정말 목이 몹시 마르다. 시각이 급하다. 만일 시각이 늦으면…… 남의 눈에 띄이면 안 될 터이니까. 차익아 어서어서 그 날랜 말을 어서 좀 끌어 오너라. (애원, 초조, 고민)
421
차익    안 됩니다. 매우 어려운 일이올시다. 태자께옵서 정 그렇게 분부가 계옵시면 구실이 마부인 이 차익이라 타옵실 말만은 하는 수 없이 대령하겠사오나……. 암만 해도 마가남 대신께 한 마디 여쭈어 보옵고…….
422
태자    (별안간 위엄 있는 동작을 갖추며) 괴이한지고. 너는 내 영을 거역하느냐.
423
차익    아 아니 아니올시다. 그 그럴리가.
424
태자    그러면 잔말 말고 어서 바삐 그 간다가란 말을 이리로 끌어오너라.
425
차익    네 저…… 마가남 대신께옵서 분부가 계옵셨는데……. (머리를 긁으며 매우 주저한다)
426
태자    분부? 무슨 분부! 태자가 나오거든 얼른 말을 대령하라는 분부이냐?
427
차익    아니올시다. 도무지 말을 드리지 말으랍셨는데…….
428
태자    흥 너는 참 미욱한 놈이로다. 그래 이놈아 생각해보아라. 네가 그리 몹시 무서워하는 그 마가남 대감도 나에게는 하잘것 없는 한낱 신하야. 그래 너는 신하의 말만 그리 장하게 듣고 이 태자의 영은 종시 거역할 터이란 말이냐. (일부러 성난 얼굴로 차익을 노려 보며) 그래 그런 법도 더러 있을 수 있을까.
429
차익    (황공돈수) 황공하올시다. 그럴리가…….
430
태자    그러면?
431
차익    (눈물을 씻으며) 그런데 황공하오나 어리실 때부터 한 번도 이 차익이놈을 꾸중하시던 일이 없으신 태자께옵서 여간하신 일이 아니옵시면 이처럼 역정을 내실리가 없으신데……. (다소 주저 사색하다가 결심) 네 끌어옵지요. 날랜 말을 즉각으로 대령하겠습니다. 어디까지옵든지 뫼시고라고 가겠습니다.
 
432
(훌쩍이며 우편으로 퇴장)
 
433
태자    (차익의 가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충복이로다. 차익은 순직한 충복이로다. 그런데 어서 바삐 이 도성을 벗어나 이 밤 안으로 갠즈지강까지…… 갠지즈강이 몇 리라더라? 응 이백여 리! 암만 이백여 리라도 날랜 말로 질풍같이 달려만 가면…….
 
434
(차익이가 황금비 산호안장 진홍 부담의 백마 간다가[乾陟]를 이끌고 우편에서 등장)
 
435
차익    말을 대령하였습니다.
436
태자    어두운 밤에 수고하였다. (말머리를 만지며) 간다가야! 간다가야! 부왕마마께옵서는 너를 타옵시고 일찍이 전지(戰地)로 달리어 왕래하옵시며 여러번 승리에 수많은 축배를 듭시었지. 간다가야! 그럴 적마다 네 등의 수고는 얼마며 네 발의 공로는 또 얼마였겠느냐. 그런데 간다가야! 나는 시방 팔만사천 대마군에게 열겹 스무겹 포위를 당하여 가는 생명이 위기일발에 서있다. 간다가야! 이 때를 당하여 나를 한 번만 도와다고 나를 구해다고. 나는 너의 힘을 빌어서 지혜의 칼날로 마군을 무찌르고 남아 대장부의 웅도가 만고에 빛나는 큰 승리를! 승리의 노래를 부르려 한다. 아무쪼록 힘껏 정성껏 달리어다오. 내가 다행히 승리만 하는 날이면 너희들 축생의 무리에게까지도 무상의 복락을 누릴 날이 있게 하리라. 간다가야! 힘껏 달려다오.
 
437
(건척(乾陟)이 머리를 수그리고 굽을 치며 발로 땅을 긁는다)
 
438
차익    머지 않은 장래 전하께옵서 보위에 오르옵시는 기꺼운 날에 이 말의 영광스러운 고삐를 잡아보려고 주소(晝宵)로 벼르며 축수하옵던 것이……. 그만 천만 뜻밖에 이렇게 초라한 밤길을 뫼실 줄이야…….
 
439
(태자의 다리에 매달려 느끼여 운다)
 
440
태자    (엄연히) 늦었다. 그런 수작은 그런 하소연은 때가 늦었다. 그런 범부를 괴롭게 하는 번뇌의 대적은 쳐서 멸해버리고 무상정편정각(無上正遍正覺)의 큰 열매를 너희들에게 줄 대장부는 이 구담(瞿曇)이다. 실달라 구담이다. 오 ─ 이제는 출가의 첫걸음! 눈물은 부당이다. 범부의 눈물은 부당하다.
441
차익    네 네 ─. (눈물을 씻고 일어나) 그럼 어서 타십시오.
 
442
(천지가 별안간 암담하고 풍우가 소란)
 
443
태자    별안간 풍우가 대작! 차익아 우장을 빨리 준비하여라.
444
차익    네 ─ 이. (차익의 방으로 퇴장)
 
445
(야수다라가 몽유병자처럼 초연(煍然)히 열려진 성문에서 등장. 태자의 광경을 보고 경악하여 화석과 같이 우두커니 섰다가 황급히 달려와 태자에게 매어달린다)
 
446
야수다라  전하 태자 전하! 이 야수다라와 라후라를 버리시옵고 어디로 갑시렵니까 어디로…….
447
태자    (민련(悶憐)해 하는 얼굴로 야수다라를 내려다만 볼 뿐)
448
야수다라  (태자를 치어다보며 몸부림 하는 듯 애소(哀訴)하는 듯) 나의 하늘이요 나의 생명이신 태자 전하! 못 가십니다. 못 가십니다. 당신께서 떠나가옵시면 애처로운 이 몸과 가엾은 라후라! 또 이 가비라의 모든 생명들은 어찌나 되라고 하십니까.
449
태자    (묵연히 야수다라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엄연히) 야수다라여. 나라도 망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은 죽는 것이요. 시방 나는 그것을 구제키 위하여 영원불멸의 국토와 생명을 찾아서 가는 길이니 차라리 기꺼워 할지어정 조금도 서러워는 하지 마시오.
450
야수다라  영원불멸의 나라? 불멸의 그 나라를 어디로 찾아가시렵니까? 멀고도 알수 없는 그 나라! 그 나라로 태자를 떠나 보내임보다는 차라리 이 세상에서 당신을 뫼시고 있사옴이……. (산란한 태도) 아…… 그러함보다도 차라리 이 몸 하나가…… 없어지면……. (땅에 엎드려 운다)
451
태자    (야수다라 등의 번쩍이는 영락(瓔珞)만을 묵연 응시)
 
452
([小間[소간]] 차익이 우장을 가지고 등장)
 
453
차익    (태자의 광경을 보고 섰다가 두어 걸음 태자 앞으로 가까이 가서) 차익이 대령하였습니다.
454
태자    (꿈을 깬 듯 구원을 얻은 듯) 오…… 옳지…….
455
차익    (태자에게 우장을 입히고 말꼬삐를 잡는다)
456
태자    (말을 타려고 돌아서며) 야수다라! 그러면 이제 이것으로 작별이오
457
야수다라  (일어나 원망스럽게 태자를 쳐다보며) 기어코 떠나시렵니까? (울면서 태자의 옷을 잡고) 전하께옵서 과연 이리 떠나갑시면…… 이 몸은 금방 이 자리에서 죽고야 말 터입니다.
458
태자    (야수다라를 잠깐 묵연 응시, 야수다라의 손을 뿌리치며 엄연히 또 힘있게) 죽으시오. 야수다라 마음대로 죽으시오.
459
야수다라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서) 네 ─?
460
태자    (먼 하늘을 우러러 보며) 어리석은 계집아. 물러나라. 나의 앞길을 막는 자는 영원히 재앙이 있을 것이다. 골육이라 친척이라 일컫는 그것도 모두 다 외도(外道)이다. 악마이다. (손으로 야수다라를 가리키며) 사바 속세의 어리석은 계집아.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461
야수다라  (엎어져 기절한다)
462
태자    (합장) 시방세계 제불 제보살(十方世界 諸佛 諸菩薩)! 구담(瞿曇)의 대원(大願)을 성취하게 하소서. (말을 타고 왕궁을 향하여 경배)
 
463
─ 비장한 음악, 번개가 두어 번 번쩍 막 ─
 
 
464
(『現代朝鮮文學全集[현대조선문학전집]』, 193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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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사용(洪思容)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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