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순신의 백골을 땅 속에서 들추어서 그것을 혀끝으로 핥는 사람, 단군을 백두산 밀림 속에서 찾아다가 사당간에 모시는 사람, 다산을 하수구 속에서 찬양하는 사람, 장백산맥과 한라산의 울울(鬱鬱)한 산 속에서 ‘조선 반만 년 얼’을 져다가 소독수처럼 뿌리는 사람, 춘원 문학과 그의 사상을 「민족개조론」에서 다시 찾는 사람, 이리하여 일찍이 괴테를 바이마르의 속물에서, 헤겔을 국가론에서 찬미하기 비롯한 독일 나치스의 창안은 이 곳이 땅에서 그의 무수한 동지와 모방자를 발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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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기억할 분도 있을는지 알 수 없으나 필자가 일 개월 전 본지 위에 문예시감을 적으면서 이광수 전집 간행의 사회적 의의를 써 나가던 막음에 기술하였던 글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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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몇 줄 안 되는 글귀는 그 후 여러 가지로 말썽이 되어 ‘조선놈이 조선을 더 박대한다든가 ‘너는 조선놈이 아니냐?’ 등등이 격렬한 어조로 반격을 받았으나 이 글을 자세히 읽어 볼 만한 침착성을 가질 수 있을 사람에게는 이 글의 어느 구석에서도 조선을 천대한 글자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므로 필자는 반대자가 무슨 까닭으로 글을 엄밀하게 읽을 만한 침착성을 가질 수 없었는가 하는 원인을 살펴보아 혹자에게는 진정제를 권하였고, 또 혹자에게는 글을 바로 읽는 법을 배워주기 위해 문장 독본을 권하였고, 이 양자의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은 이미 폐물로 되어 버린 두뇌에게는 정신병원으로 가는 행로를 지시하여 주었다. 사실 위에서 전재(轉載)한 바 기술에 있어서는 이순신, 단군 할 것 없이 정다산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이십 년까지의 춘원’에 대하여서까지 조그만 불손이라든가 부당한 평가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독일 나치스의 고전부흥과 고전예찬의 태도와 연결된 상기 서술에서도 역력히 추상(推想)할 것인바, 이네들을(이순신 등) 자기의 국수사상 고취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현금 조선의 ‘우국지사’들과 이른바 문화적 ‘선배’들을 운위하였음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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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이순신의 백골을 땅 속에서 들추어서 그것을 혀끝으로 핥는 사람’의 서술에 있어서는 이순신에 대하여 불손한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을 그 시대성의 정당한 인식에 있어서 파악하려고 하지 않고, 민족개량주의의 선전도구로 또는 국수적 반동사상의 선전자료로 심지어는 어떤 출판물의 영리책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자, 그러므로 그의 두뇌도 아니요, 그의 행동도 아니요, 이미 아무 말도 못하고 흙 속에 묻혀 있는 그의 백골을 혀끝으로 핥는 우리나라의 ‘명사’제위를 말하였던 것이며, 정다산의 진정한 연구는 자기의 사소한 사회적 지위까지를 이용하여 갖은 술책으로 방해하는 한편 다산을 상략적(商略的)인 술책으로 우리 문화의 대해류(大海流)니 대운하(大運河)니 등등의 광고문으로 선전하는 비양심적인 악덕지사들을 그러므로 정다산을 정당하게 평가하려고 하지 않고 다산을 진정히 연구하는 학도에게 편의 대신에 장애를 줌에 의하여 다산을 땅 위에서도 또는 그 시대의 엄밀한 과학적 분석에서도 찾지 않고, 정(正)히 다산을 더러운 하수구 속에 끌고 들어가서 예찬하려고 하는 조선적 ‘간디’와 자칭 민중의 지도자들을 말하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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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고전부흥과 고전연구와 기념제 거행을 나치스 문화 정책의 조선적인 모방이라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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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당의 ‘조선’의 ‘애인’들은 히틀러의 문화정책을 배격하고 나치스를 문화적 죄인으로 재단(裁斷)함에 다른 누구보다도 뒤 떨어지는 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진시황을 문화의 파괴자라고 욕설하고 히틀러를 문화적 살인자라고 선전함에 의하여 자기 자신들의 비문화적 태도를 은폐하려고 하고 있으며 문화의 옹호자와 그리고 학문의 자유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임을 가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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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1935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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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치스가 괴테의 백주기 때에 연출한 태도와 이 땅의 ‘조선의 애인’들이 정다산을 기념하던 때에 폭로한 문화적 태도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구별할 수 있는가? 그리고 진시황과 히틀러의 분서소동과 이 땅의 ‘선배’들이 단군을 과학적으로 구명하고 다산을 정당한 입장에서 평가하려고 하는 젊은 학도의 글을 자기의 사소한 사회적 지위를 남용하여 그 게재를 중지시키는 태도와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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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스의 괴테를 대신(大臣)적인 속물 생활에서 예찬하려고 하였고 나치스의 어용문학자들이 괴테를 그의 내심에 있어서의 두 개의 모순과 투쟁의 상(相)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러므로 「파우스트」에서 또는 「로마의 비가」에서가 아니라 「헤르만과 도로테아」에서 그리고 「협조」와 「질서」와 「반혁명가」에서 예찬한 것은 괴테를 파시즘의 선전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심사였다. 그리고 ‘조선의 애인’들이 단군론을 쓰는 까닭은 단군을 과학적으로 구명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를 더욱 더 신비한 안개 속으로 이끌고 가서 화랑과 섞어서 빚어 가지고 독가스 같은 ‘얼’적 화합물을 제작하기 위함이었고 그들이 다산을 기념하는 의도는 다산의 진정한 학문적 유산을 정당히 계승하고자 하였음에 있었던 것이 아니요, 그를 운하적 존재로 선전하여 반동 사상에의 통항로(通航路)를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이 땅의 ‘선배’들은 무슨 점을 가지고 자신을 나치스의 비판자라 일컫고 문화의 옹호자라 자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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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과거의 위대한 학자와 예술가와 사상가를 국수주의 선전의 도구로 사용하며 그들의 업적에서 그릇된 것만을 추려서 그것의 무비판적인 예찬에서 그들을 정략과 상략의 도구로 구사하는 경향은 국제적으로 유행의 조류를 형성하고 있는바, 이광수 전집 간행의 사회적 악영향을 적어가는 마당에서 ‘하수구’ 운운의 ‘불손’한 문구로 ‘다산의 애인’과 ‘충무공의 충복(忠僕)’들을 건드렸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등의 ‘불손’한 태도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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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정다산과 ‘다산의 애인’을, 이충무공과 ‘충무공의 충복’을, 단군과 ‘단군의 요술사’를, 그리고 ‘조선’과 ‘조선의 연인’을 혼돈하여 생각할 하등의 권리도 없을뿐더러 이를 일련의 ‘민족의 연인’들이 과거의 조선 위인들을 자기 선전 내지는 국수사상 선전의 수당으로 사용하려는 역사적 비행을 옹호하여야 할 일편의 의무도 가지려는 자는 아니다. 오히려 이 양자를 엄밀히 구별하여 ‘조선의 연인’들의 가장(假裝)을 잡아찢고 그들의 사당으로부터 진정한 조선의 역사적 재물을 찾아올 과학적 의무를 새로운 모든 세대의 공통된 임무로서 부과하고자 하는 의욕에 불탈 따름이다. 그러므로 조선 ‘민족’의 학문적 대표자와 민중 생활의 사실적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는 안재홍 씨의 글에서 조선일보 학예란에 6회에 긍(亘)하여 게재된 「천대되는 조선」과 같은 잡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씨의 ‘높으신 교양’과 ‘가면’을 위하여 슬퍼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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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가면’을 옹호하고 그 껍질 위에 가루분을 발라주는 자리가 아니라 가면을 잡아찢고 ‘민족’에 대한 숭고한 ‘애정’을 해부하는 마당이기 때문이고, 안재홍 씨 자신의 심장으로 쏘아진 화살을 다산으로 충무공으로 돌리고 자기는 그들의 옷자락 뒤에 숨어 ‘아웅’을 하고 있는 치기에 찬 비열한 ‘연정’이 이곳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슬퍼할 만한 장소이기 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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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조선을 천대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누가 조선의 재물을 사랑하고 누가 정다산의 진정한 계승자인가가 이 곳에서 천명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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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1935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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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씨가 요즈음에 그의 분망한 연구의 여가에 친히 붓을 들어 「천대되는 조선」의 일문을 초(草)하게 된 진의는(주지하는 바와 같이 민세〔民世〕안재홍 선생은 조선 지고의 정론가이고 역사가이고 지리학자인 동시에 또한 말하자면 조선 학문의 대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상상컨대 씨는 여간 바쁘신 몸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속에서 일부러 이러한 글을 쓰신 진의는 우리들이 상상하고도 또한 남음이 없지 않다!) 물론 씨가 수년래로 가지고 있던 고전 연구의 태도와 고전 연구의 방법에 대한 의견을 진술하며 조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화재를 학대하는 위지왈(謂之曰) ‘경박한 일부의 청년’들의 ‘조선인으로서의 조선 학대’와 ‘조선인의 자기 폄하’를 폭로하고 이것에 의하여 조선의 문화재를 옹호하고자 하는 데 있을 것이므로 필자 역사 아씨의 고전 연구와 부흥의 태도 방법을 살펴보는 데 논의 주지를 두어야 할 것이로되, 이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위선(爲先) 우리들의 흥미는 안재홍 씨가 어떠한 끝에서 조선인의 자기 폄하와 자기 천대를 발견하였는가를 살펴보는 데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살펴보는 데 의하여 안재홍 씨가 사물을 어느 정도까지 과학적으로 깊이 관찰하고자 하고 있는가 그리고 안재홍 씨 자신의 ‘민족’에 대한 ‘연정’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가 명백하여질 것 같이 생각되는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의 관찰이 또한 씨의 고전부흥의 태도의 비판으로 인도할 것이며 동시에 그 비판의 일부를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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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우리는 안재홍 씨 자신의 서술에서 다음과 같은 조선인의 자기 천대의 점묘(點描)를 발견할 수가 있다. “나는 전차를 흔히 탄다. 양복에 넥타이라도 반듯이 매고 앉았으면 차장이 가위를 들고 ‘어디를 가십니까’(주왈〔註曰〕도찌라데 고자이마쓰까?) 언제는 물색이 아니 나는 두루마기를 입고 여전히 점잖은 체하고 안심하고 앉았더니 차장이 와서 ‘어디가오?’ 이는 개인이 당하는 천대가 아닌지라 냅다 일어서며 ‘고약한 놈’ 하고 주먹으로 볼치를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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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 인용에서 명백한 바와 같이 안씨가 양복을 입으면 차장이 자기를 신사로 대접하고 만일 물색 안 나는 두루마기를 입었을 때에는 자기를 푸대접하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은 안재홍 씨 개인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조선 민족 전체에 대한 모욕이고 천대인 까닭에 분연히 일어나 그 차장의 볼치를 갈기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기에 한참동안 애를 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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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씨의 이 간결하고도 원숙한 풍경의 묘사에서 우리들이 느끼는 바는 무엇인가? 과연 안씨와 한가지로 민족적 차별과 조선 천대의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몇 푼 안 되는 돈에 꽃같이 처녀 시절과 불타는 소년의 한때를 아침 새벽부터 밤 열두 시까지 전차에 까불리고 먼지와 사람에 시달리는 가련한 어린 교통 노동자의 볼치를 후려치기 위하여 때 아닌 장사의 기상을 가슴속에 안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벽력같은 노호(怒號)로 ‘고약한 놈’을 절규하며 차장에게 향하여 ‘너는 조선놈이 아니냐?’ 하고 질문을 발(發)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안재홍 씨보다는 좀더 점잖아야 하고 좀더 냉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 경박하기 짝이 없는 ‘일부의 청년’들은 민족적 의분에 어깨숨을 쉬고 있는 오십 가까운 노장부의 어깨를 두드리며 ‘선생이여!’ 하고 그에게 한 개의 새로운 안경을 권할 것이다. “선생이여! 선생의 안경은 색이 있습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이 과학적인 안경으로 바꾸어 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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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들은 안재홍 씨의 이같은 사물 관찰의 태도에서 일점의 존경할 만한 곳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사물의 왜곡에 있어서 도저히 그대로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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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 스스로 그가 소지(所持)하는 면경(面鏡)과 상의(相議)하면 알 일이지만 양복이나 프록코트에 실크햇을 써도 안재홍 씨 얼굴에서 외국인적 면영(面影)을 발견하기는 좀처럼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차장이 양복을 입는 안씨에게 대하여 친절한 것은 씨를 외국인으로 알고서 고런 것이 아니라, 돈 많은 부자로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고, 씨가 초라한 두루마기로 앉았을 대 차장이 ‘어디요?’ 한 것 역시 씨를 조선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가난뱅인 줄 알고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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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1935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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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안씨가 같은 조선옷이라도 윤택 나는 비단옷에 번득거리는 금시계줄이라도 늘이었던들 차장은 안씨가 희망하는 대로 ‘어디이십니까?’를 공손히 하였을 것이다. 사정은 우리들이 보는 바 이렇게 명료하다. 다시 말하면 차장의 태도에서는 민족적 차별이라든가 조선인의 자기 폄하를 발견할 것이 아니라 빈부의 차별, 그러므로 이 사회의 근본적 모순인 계급적인 관계를 발견하여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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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씨의 사물 관찰에서 표시되는 천대의 정도는 그 다음 서술을 보면 더욱 명백하여지는바, “낭일(曩日) 황금정의 모소(某所)에서 조선인 거지가 말끝에 ‘이까짓 조선 동리에 와서’ 운운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조선이 천대받는 심한 예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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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한가지로 보는 바와 같이 안재홍 씨의 ‘민족’에 대한 숭고한 ‘연정’은 이 곳에서도 그의 표현을 가지고 있는바, 이번에는 다시 조선인 걸인에 대하여 씨의 의분은 날카롭게 폭발되어 있다. 거지가 다 조선을 업수이 보고 거지까지가 그의 ‘민족’관념을 망각하고 있다는 경개(梗槪)가 이 묘사의 골자이다. 그리고 씨는 이것을 가리켜 ‘조선이 천대받는 심한 실례의 하나이라’ 하고 ‘조선인의 조선 천시는 참으로 언어도단이라’ 하였다. 이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는 이처럼 조선을 귀애(貴愛)하시는 씨가 어째서 이 걸인을 이천만 동포의 일원으로 계산하는 아량을 가졌는가 하는 의문이다. 진실로 어떤 외국인이 있어 안씨더러 ‘저것이 조선인 거지입니까’ 하고 물었다면 안씨는 서슴지 않고 ‘아니올시다. 단군의 자손에 저런 몹쓸 놈이 있을 리 있습니까! 저 놈은 우리 민족이 아닙니다’ 하고 대답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바이다. 왜이냐 하면 안씨의 ‘민족애’란 이 정도의 것에 지나지 않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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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 걸인에게 민족 관념을 강요하고 있는 안재홍 시와 안씨에게 민족 애○심이 없다고 책망을 받고 있는 황금정 모소에서 안시와 만났던 걸인을 대비하여 생각해 보면 이것은 명백해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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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언)을 불요하는 바이지만, 걸인이란 계급사회에 있어서 가장 타락한 낙오자이며 생존경쟁에 있어 참패당한, 이미 폐물로 되어 버린 인간으로서 지금의 사회에 있어서는 하등의 생활적 기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최하층의 룸펜이다. 이들은 이 세상에 나서 걸어다니게 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의 집을 가져보지 못하였고 고정된 식이(食餌)를 가져보지 못한 자이다. 한날 한때도 그는 시민적 권리를 가져보지 못하였고 따라서 한날 한때도 그에게는 민족적인 혜택이란 것을 받아볼 일이 없었다.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맛볼 수 있는 특이한 하등의 온정미도 맛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과연 어떤 민족주의자가 있어 대문을 두드리며 밥을 구걸하는 거지를 보고 그것이 이천 만 성원의 일인이라 하여 그에게 따뜻한 밥 한 술을 특별히 권하였던가? 아마 걸인에게 민족애를 강요하는 안재홍 씨도 이를 동포라 하여 한자리에서 자고 이를 조선인이라 하여 밥상을 같이해 준 전례는 가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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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저들 걸인에게 있어서는 고상한 민족 관념도 친애하는 동포도 단군도 기자도 아무 계관(係關)이 없었다. 그에게는 한 술 밥이 고마웠고 북촌쓰레기통보다 조금이라도 안온한 잠자리가 귀(貴)여웠다. ‘밥없어!’ 소리를 빽지르고 벼락같이 대문을 닫아 버리는 곳보다는 찬밥덩어리나마 내던져주는 곳이 그에게는 고마운 것이다. 그의 입에서 ‘이까짓 조선 동리에 와서’ 운운의 소리가 나왔다 한들 무슨 이유를 가지고 이들을 책망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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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조선’은 이들에게 무엇을 주었고 ‘민족’은 이들에게 무슨 혜택을 베풀었기에 숭고한 민족 관념을 요구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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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하여 ‘민족의 애인’들은 이랬거나 저랬거나 ‘민족’의 혜택으로 이때껏 살아온 사람이다. 더구나 조선의 문화적 빈(貧)과 학문적 참(慘)을 이용하여 이 땅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수많은 특권을 가질 수 있은 행운의 과보자(果報者)였다. 그들은 조선에 태어났길래 애매한 정치 상식에 의한 현상설명을 가지고 대정론가임을 자성할 수 있었고 중등학교 이과 교과서의 복사(複寫)를 가지고 대천문학자로 뽐낼 수 있었다. 용서치 ×할 ×를 ×고 도 다시 ‘친애하는 민족이여!’만 외치면 사회적 지위도 월급 자리도 생길 수 있었다. 어찌 조선 민족에게 한 술 밥조차 못 얻어 먹는 거지와 동석에서 그의 받은 바 민족적 혜택을 운위할 수 있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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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조선’이란 것에서 받은 바 민족적 혜택이란 것이 이러하매 민족도 매상의 민족 관념과 걸인의 그것을 동열(同列)에서 대비할 수 없음은 스스로 명백한 일이다. 그리하여 조선을 천대한 것이 차장이나 혹은 걸인이었든가 아닌가는 이미 명백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이 곳에서 보수(報酬)된 것은 조선을 천대하고 모욕한 것은 걸인이 아니라 차장이 아니라 이들에게서 천대를 느끼는 안씨 자신의 감각이었다는 해명이며 이 곳에서 해부된 것은 차장과 걸인의 민족 관념이 아니라 안씨 자신의 숭고하고 극진하다는 민족에 대한 연정이었다. 오! 중학생들의 여드름과 같은 이 땅 ‘자시’의 민족 관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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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기생의 연문(戀文)같은 이 나라 ‘명사’의 조선심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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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1935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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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안재홍 씨의 신작로 잡초제거 공작을 구경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그의 뒤를 따라 길 위를 방황하였다. 다시 말하면 안씨가 ‘조선인 자기 폄하’의 장본인을 체포하기 위하여 목적지까지 가는 길 위에서 만난 두 개의 잡초를 흥분과 함께 뽑아버리는 사업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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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의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한 개의 전형적 성격, 돈이라는 관념에 붙들린 전차의 어린 차장이었고, 그의 둘째는 이 사회의 최하층의 룸펜인 황금정 모소의 조선인 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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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안씨가 힘을 다하여 이 두 개의 잡초를 제거하여 보니 그 뿌리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은 의외에도 안씨 자신의 초라한 민족주의였다는 것도 우리들이 한가지로 보아온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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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차장의 말에서나 걸인의 입에서 뱉어진 것을 가지고 ‘경박한 일부 청년’에 관한 공격의 전초전을 삼으려고 한 안재홍 씨의 두 눈은 난시임을 불면하였고 차장의 말과 걸인의 입만을 따르고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하여 무관심한 안재홍 씨의 태도는 과학적인 추종방식과는 인연이 먼 것임을 도폐(塗蔽)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뽑아 본 잡초에 목을 매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양에 놀래어 저돌적으로 뛰어드는 안재홍 씨의 육탄을 따라 지금 피의 범인 체포의 광경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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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 씨가 그의 진두에서 ‘경박한 청년’의 그림자를 발견하자 손빠르게 내던진 포탄이 이 글 모두(冒頭)에 전재하였던 바 필자의 ‘이순신의 백골’과 ‘정다산의 하수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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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간 시정의 일은 이미 또 할 수 없고 식자와 선구자로 남달리 긍지하는 일부의 사람들도 여간이 아닌 조선 천시니 단군 세종대왕으로부터 이순신 정다산 혹은 연개소문같은 분들까지가 요새 한참 그 냉조소매(冷嘲笑罵)의 과녁으로 되고 농문(弄文)하는 걸음에 그 분들은 한번 빈정대는 대상처럼 되는 것이 현하 조선의 한 편의 풍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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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들이 위에서 살펴본 데 의하건대 ‘농문하는 걸음에 그 분들은 한번 빈정대는 대상처럼 되는 것이 현하 조선의 한 편의 풍조’가 아니라 안재홍 씨 등에 의하여 이들 이순신 정다산들이 민족개량주의 선전의 도구내지는 민족 사표 예찬의 제물로 되어 있는 것이 ‘한 편의 풍조’이었고 이들 문학적인 조선의 재산을 악덕 지사와 민족 도매상인의 전방(가게 - 인용자)에서 찾아오려는 젊은 학도의 노력이 ‘현하 조선의 다른 한 편의 풍조’이었다. 그리고 단군과 세종대왕과 연개소문을 냉조소매하고 조선을 천시하는 자는 ‘식자와 선구자로 남달리 긍지하는 일부의 사람’이 아니라 이들을 역사과학적인 태도에 의하여 평가하지 못하고, 그의 옳지 못한 것만을 추려서 정략과 상략의 간판으로 이용하여는 조선적 간디와 자칭 민중의 지도자들이었다는 것도 이미 우리들이 살펴온 바이었다. 그러므로 필자의 말썽거리가 된 ‘백골’과 ‘하수구’ 운운의 글귀를 인용하고 그 뒤에 연달아 쓴 다음의 안재홍 시의 글은 우리들로 하여금 ‘냉조소매’의 표적이 될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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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은 한번 웃음에도 차지 않는 듯이 마구 깎는 것이 그들 일부의 태도이다. 이는 반복 음미하고 재삼 구명하기까지도 할 것 없이 단연 그 천박한 비구체 현실적 태도임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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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안재홍 씨의 불행은 2항(項)이었다. 만일 씨에 있어 그 글을 ‘반복 음미’나 ‘재삼 구명’까지도 말고 단지 세심히 읽을 만한 침착성만을 준비하였던들 그러므로 독서 방식을 고치든가 그렇지 않으면 글을 읽기 전에 흥분을 방지하기 위하여 진정제를 먹어두었던들 안재홍 씨는 정신병원에까지 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왜이냐 하면 안씨가 자기에게 쏘아진 화살을 다산이나 단군에게로 돌리고 자기는 그들의 옷자락 속으로 기어들어버리는 그의 피탄술(避彈術)이란 정신병자의 광무(狂舞)로밖에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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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이것을 비판의 상대로 할 시기는 지나가고 말았다. 우리는 씨의 이른바 ‘단연 그 천박한 비구체 현실적 태도’를 지적당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될 시각에 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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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안재홍 씨의 이른바 ‘일부 청년’들의 ‘단연 그 천박한 비구체 현실적 태도’란 무엇이며 이에 대한 씨의 지적은 여하한 것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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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는 「문화옹호와 여시아관(如是我觀)」이란 소제(小題)를 걸고 그 곳에 앙드레 지드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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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근저서부터 불란서인이요. 동시에 근저서부터 국제주의자라고 주장한다’고. 그리고 ‘내가 제일로 지적하고 싶은 불명료한 일은 국가주의자가 국제주의라는 개념을 조국에 대한 혐오 부동의 무관심인 줄로 다루(취급)려 하는 것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은 것을 표시하기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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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안재홍 씨는 자기 동료나 발견한 듯이 의기등등하여 ‘그는 국가주의적 견지에 의해서도 단언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헛통을 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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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이상의 말에 우리들은 반대는 없는가? 물론 번역○의 ○열(○劣)에 의한 것이겠지만 약간의 술어의 불명확을 탓할 수는 있으나 ‘국가주의자들이 흔히 말하기를 국제주의자는 민족을 무시한다고 하나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지드의 본의는 역력히 알 수 있으며 또한 우리들이 그것에 대하여 전적인 찬의를 표할 수 있음도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지드의 말은 소련서의 자국 문화에 대한 ‘형식에 있어서는 민족적인 것으로 남으면서 본질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적이 아니면 안 된다’는 표어와 동의(同義)의 것으로 국제주의는 민족의 한 개의 역사적 과정으로 무시하지 않을 뿐아니라, 민족문화의 가장 철저한 옹호자이며 그의 유일의 계승자라는 것의 표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드의 말은 국제주의를 비방하고 그를 공격하는 자료로 ‘민족문화의 천대’라는 허구의 사실을 위조하고 있는 국가주의자와 민족 파쇼에 대한 통격(痛擊)으로서 지드의 이 말에 의하여 비판받아야 할 조선에서의 장본인은 김남천 등의 ‘일부 경박한 청년’들이 아니라 민족 파쇼의 태두인 안재홍 씨 등이 아니면 아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씨는 지드를 국가주의자로 만들었고 ‘그는 국가주의적 견지에’서도 이같이 말했다 하고 허무한 날조 탄환을 가지고 우리들을 공격하려고 하고 있다. 문노니 대체 상기의 지드의 인용문의 어느 곳에서 그를 국가주의자로 지칭할 자료를 골라내려고 하는가? 안시여! 다시금 또 다시금 세밀히 읽어보라! 지드는 자신을 국제주의자라고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국제주의라는 개념을 조국에 대한 혐오 부동의 무관심인 줄로 다루려고(취급)’ 하는 국가주의자들의 의견과 자신을 첨예하게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 유출유○(愈出愈○)인 안재홍씨의 신기한 마술이여! 그는 드디어 자신의 심장으로 가는 탄환을 다산과 단군으로 돌리더니 이번에는 전후 자본주의가 가질 수 있은 최대의 지식계급의 양심인 앙드레 지드를 국수주의자로 변조하여 자기의 방패로 만들고자 하고 있다. 아마도 불란서의 이 늙은 예술가는 동방 지역의 한중복판에서 새로운 친구를 발견하고 환영의 축배를 올리리라!(아! 만일 이 세상에 ‘조선의 얼’이라는 것이 진실로 존재하건대 원하노니 당신이여! 귀중한 당신의 아들을 이 미혹의 지옥에서 구출하여 주소서! 아멘)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후안무치의 「문화옹호와 여시아관」은 다시, 소련서나 불란서의 국제주의자는 민족문화를 천대하지 않건만 이 땅의 일부 청년들은 의연히 조선문화재를 학대한다고 주장하리라. 그러므로 이 곳에서 우리는 우리들만이 조선의 민족문화를 진실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계승하려는 자이고 또한 이것의 유일한 옹호자라는 것을 실례를 들어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민족적 문화재를 하대하고 천대하는 자가 다름 아닌 안재홍 씨 자신이라는 것이 명백하여질 것이며 동시에 ‘민족문화의 옹호자’라고 자처하여 이 간판 밑에서 갖은 기만을 다하는 민족주의 ‘학자’들의 면모가 일층 더 새로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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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1935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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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구체적으로 예증하기 위하여는 물론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민족적 문화재의 어느 부분을 예로 들어도 이 곳에서 누가 가장 정당하게 그 유산을 계승하려고 하고 있는가가 명백하여질 것이니 위선 문학 부문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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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京鄕)을 물론하고 벌써 몇 백년을 어린 아해(兒孩)의 입에서까지 오락가락하는 예술작품의 백미 춘향전을 놓고 생각해 보건대 민족주의 사가나 문학자들은 이것을 개편도 하고 예찬도 하였으되 한번도 춘향전을 역사 과학적으로 해명하여 보려는 태도는 취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춘향전이 생겨난 시대의 사회적 정황을 분석하고 이 시대적 이상이 춘향전에 여하히 반영되었는가 또는 춘향전이 그 전대(前代)의 소설보다 성격이나 묘사에 있어 얼마나한 문학적 발전을 보였는가 등등을 연구하여 춘향전에서 전승할 수 있는 재물을 미래의 문학적 발전에 자(資)하기 위하여 응당 하여야 할 사업은 저들 민족주의 문학사가에 의하여는 하나도 시행되지 않았고 미약하나마 과학적 해부도를 가지고 이것을 해부해 보려고 한 것의 단초를 지은 자는 역시 민족주의 문학가나 사가들에게서 민족 문화를 무시한다고 공격을 받고 있는 일부의 청년학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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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과거(過去)한 민족적 예술 작품으로서 가장 많이 우리들에게 유산을 상속하고 있다는 시조나 향가를 당해 시대의 과학적 분석에서 천명하고 그것이 그 시대의 객관적 진실을 어느 정도까지 반영하였는가를 살펴보려고 한 것도 역시 저들 자칭 ‘민족 문화의 옹호자’들이 아니고 저들의 냉조소의 적(的)이 되어 있는 ‘일부의 청년’학도들이었다. 다시 또한 가까운 신문학 발생 이후의 문학사적 연구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그 곳에서도 필자의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국초, 춘원의 문학으로부터 우금에 이르는 문학적인 작품을 분석하고 그 곳에서 예술적 발전의 객관적 일반 법칙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것을 예술사의 서술에 환원하여 써〔以- 편집자〕예술 과학의 건설적인 기초 공작에 기여코자 노력한 것은 역시 민족 문화를 천대한다는 일부 청년들이었었다. 이 곳에서 민족적인 문학적 재산을 상속하려고 한 것은 누구이며 미래의 문학을 위하여 과거의 재물을 옹호하고 그것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자는 과연 누구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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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유독 문학 부문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닌 것이니 조선 역사의 연구에 있어서도 단군을 반만 년 전 신비한 안개 속에서 찾아오고자 과학의 방법을 가지고 그것에 근접한 것이 일부의 청년들이었고 다산의 학문적 유산을 진정히 연구하려고 한 것도, 그리고 전인미답의 학문적 황무지를 향하여 용감한 칼을 들고 조선사회봉건사, 조선경제사 그리고 아세아적 생산양식 등의 연구를 개시한 것도 또한 저주받던 일부 청년학도들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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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사기는 이들을 신앙상의 대상으로 복장을 입히거나 신격적 존재로 변조하거나 또는 이들의 이름 위에 형용사나 수식사를 붙이는 데는 남보다 뒤떨어지고자 하지 않았으나 그러한 저들의 사업은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옹호하려는 목적에서 시행되지 않았고 그것을 국수주의의 간판으로 모시기 위해 전념한 것이었으므로 하나도 학문적인 대상으로 삼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한 달을 사십 회로 붓을 들고, 가는 길 오늘 길에 단군과 다산을 수식사로 예찬하는 안재홍 씨의 저술(?)에서도 이들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는 찾아볼 수가 없으니, 그 곳에 있는 것은 ‘대운하’니 ‘경륜규획(經綸規劃)’이니 하는 술어의 누적뿐이요 다산이 살고 있던 시대의 과학적인 분석이라든가 다산이 ‘경륜규획’이 당해(當該) 사회의 어느 계급의 이상과 합치되었던가의 연구 등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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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한 개 인간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려 할 때에 그를 그 시대성에서 해명하지 못하고 ‘경륜가’라는 술어나 또는 ‘운하’니 ‘해류’니 하는 허황한 명사로 개괄하여 버리는 것은 진실로 그 인간을 사랑하는 소이인가? 그리고 자기네의 파쇼적 지론과는 상이되는 학설이라 하여 젊은 학도의 진지한 과학적 연구 논문을 자기들의 손톱만한 지위를 이용하여 게재 중지를 시키는 것은 진심으로 단군을 사랑하고 다산을 존중하고 조선의 문화재를 옹호하는 소이인가? 진실로 묻노니 「문화 옹호와 여시아관」이여! 이것을 명백히 대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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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사적 인물 평가에 대한 안재홍 씨의 이 같은 속학적 마각은 그의 소위 「동서제가 성충일원론」이라는 소제를 걸로 씌어진 글 속에 더욱 더 명백히 나타나 있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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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인인지사(仁人志士)의 뜨거운 혈성이 불합리를 미워하는 날카로운 양심으로 뛰고 중생을 도제(度濟)라도 하려는 경건 진지한 광구(匡救)의 염원에서 불타고 강압을 물리치려는 벗서는 기백에서 그 생명이 풀풀하게 움직이는 바에 기(機)를 좇고 경(境)에 응하여 제각각 다른 형태로서 역사상에 나타나는 것이니 - (중략) - 무릇 그 감한 바가 숭고한 데 있고, 그 염원이 민생의 때문에 일(興)고 그 분발 작위(奮發作爲)가 일신의 사를 제물로써 바친 바 있는 곳에 금고(今古)가 막힐 것이 없고 갑을이 기이할 바 아닌 것이니, 저 이십세기 최대의 선구자라고 하는 특별한 모갑(某甲)으로 현종 시대 고려 초에 있었던들 강감찬과 일류인이 되었을 것이요, 좀 늦게 남해 위에 두었더라도 또 동일한 취의(趣意)의 어느 인물로 되었을 것이며 상술 제씨자로 이십세기 독특한 모갑의 나라에 몸을 두었던들 역시 그에 상응한 현대식의 선구자 되기에 그 혈성의 최대한을 발휘하였을 것이니 그러므로 성충은 일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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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긴 인용에서 표시된 바 성충일원론이라는 역사적 인물 평가의 기준을 우리들이 한가지로 보는 바와 같이 역사 또는 그것과의 관련에 의하여 평가되어야 할 사적 인물의 하등이 과학적인 구명도 소용이 없고 마치 안재홍씨의 국제정세의 해설에서도 항상 느끼는 바와 같이 모든 사회와 인물을 한가지 선상에 다 갖다 놓고 평가하려는 것으로 사회와 인물과의 관계의 설명에 있어서 무력할 뿐 아니라 역사를 한 개의 발전하는 유동체로서 파악하지 못하는 그러므로 역사과학에 있어는 가장 원시적인 강담식 인물 평전의 방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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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이러한 방법을 가지고는 19세기와 20세기와의 연속된 발전과 그 계기를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개인의 역할의 사회적 제약성과 개인의 성질과 재능 또는 개인의 이상과 세계사적 이상의 합치, 상극 내지는 불합치를 전혀 설명치 못하는 것으로 그러므로 안씨 가 말하는 바, 이 곳에서 운위되는 인물평의 객관적 기준이란 오직 ‘인인지사의 뜨거운 혈성’에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씨는 ‘그 감한 바가 숭고한 데 있고, 그 염원이 민생의 때문에 이렇다면 금고가 막힐 것이 없고 갑을 이 기이할 바’ 없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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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 평가에 있어서의 이 같은 태도와 역사과학의 입장과는 전혀 무연한 것으로 안씨의 방법으로 한다면 워싱톤과 루즈벨트의 구별을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장개석과 모택동이 동일한 기준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며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누구가 옳으냐 하는 진실로 초보적인 단정까지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왜이냐 하면 이들은 모두 한가지로 ‘뜨거운 혈성’에서 행동하고 ‘그 감한 바가 숭고’하고 ‘그 염원이 민생의 때문에 이른 것’이기 때문에 소위 ‘금고가 막힐 것이 없고 갑을이 기이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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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들의 인물 평가의 태도는 안씨의 방법과는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것이니 우리는 위선 그 인물을 시대의 분석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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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본질적인 요구와 이상이 무엇이며 세계사적인 욕구는 어떠한 것이었던가를 살펴보고 그 인물이 이 시대의 이상과 합치한 행동을 하였는가를 구명한 뒤에 그 인물의 역사적 가치를 규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물이 하등의 그 시대적 이상을 구현하지 못한자라면 ‘뜨거운 혈성’이 아니라 ‘불같은 혈성’에 의해 움직였다고 할지라도 그를 훌륭한 인간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며 이러한 평가에서 한층 더 나아가서는 이 인간의 이상과 시대적 욕구와의 모순, 상극을 조사하고 그 원인을 구명하여 보려고 할 것이다. 이같이 역사과학의 방법은 역사적 인물을 냉혹하게 그러나 정당하게 평가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있어 누가 그 인물을 진정히 예찬하고 누가 그 인물의 학문적 업적을 계승하는 자인가는 스스로 명백한바 안재홍 씨의 「동서제가 성충일원론」은 이 곳에서 그의 무력과 무식을 폭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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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뒤이어서 안재홍 씨가 논술한 바 「역사 발전의 구환성(久還性)」에서 소련에서의 푸쉬킨제 거행을 예증하면서 소련의 선구자들도 십여 년 전에는 그의 민족적 문화재를 천대하고 학대 배격하더니 지금에야 겨우 그의 비(非)를 각성하였다고 하는 등의 언사는 고소의 표적이 될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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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 푸쉬킨이나 톨스토이제를 거행하는 것은 그들이 국가주의자나 또는 혹은 무저항적 인도주의자라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남겨 놓은 자기 자신의 세계관상의 협애성까지를 파괴한 그들의 창작방법에 있어서의 사실주의를 정당히 평가하려고 함에서 나온 것이요 또는 과거의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적 문화를 천대하였다는 것 역시 허구(虛構)한 악선전에 불과하다. 안재홍 씨는 블라디미르 일리치의 「러시아 ××의 거울로서의 톨스토이」라는 일문을 보았으며 마르크스 엥겔스의 발자크평, 입센론, 괴테론 등을 일독하였으며 플레하노프와 더 올라가서는 체르누이셰프스키, 도보로류보프 등의 예술평론을 보았는가? 이들은 한번도 그의 이른바 민족적 문화재를 천대한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의 가장 철저한 옹호자이며 유일한 정당한 평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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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통틀어 안재홍 씨가 「천대되는 조선」에서 이야기한 바는 자기 자신의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폄하’와 ‘조선적 문화재의 학대’를 은폐하고자 한 데서 나온 고의의 허설(虛說)일 뿐으로 이것에 의하여 마각을 드러낸 것은 안재홍 씨의 자신의 무정견과 민족주의일 따름이다. 이리하여 김남천 등의 일부 청년들에게 뱉어진 안씨의 침은 다시금 안씨 자신의 콧잔등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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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일보』, 1935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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