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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험적인것과 관찰적인것 (발자크연구노트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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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5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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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적인 것과 관찰적인 것(발자크 연구 노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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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관찰문학소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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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과 관찰이 서로 대립되는 개념인지 아닌지는 나의 알 바가 아니다. 내 자신의 문학적 행정(行程)에 대해서 간명한 표현을 가지려 할 때에 비교적 편의적인 생각에서 체험과 관찰의 두 개의 개념을 설정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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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문학자가 사회적 생존의 방식에 따라 두 개의 유형으로 보아질 수 있다면, 그의 하나는 체험적인 것에서 자기를 살리려는 방법에 몸을 의탁하는 작가, 그의 다른 하나는 관찰적인 묘사 가운데서 그것만을 가지고 자기의 사회적 존재 이유를 삼으려는 작가 - 이러한 것으로 나누어질 수 있지는 아니할까. 어떤 사람처럼 그대로 간단히, 하나는 체험하려는 정열, 하나는 묘사하려는 정열이라고 불러버려도 무망하다. 그러므로 전자에 있어서는 자기의 체험이 중요한 데 반하여, 후자에 있어서는 묘사되는 대상만의 관찰에 정신을 잃어버린다. 전자는 자기를 보다 아름답게 살리기 위하여 자기검토와 자기개조를 중심에 두고, 이러한 자기의 체험을 제일의적(第一義的)으로 간주하여 이곳에서 문학, 내지는 작가의 사회적 생존을 주장하려 할 것이오 후자는 자기를 허허(虛虛)히 가지고 대상에 몰입하여 투철한 통찰과 용서없는 가혹한 관찰로써 사회의 전체를, 그 모순과 갈등과 길항(拮抗)과 기만(欺瞞)의 상모(相貌)를 티끌 하나 놓치지 않고 묘사해 보이는 가운데서 자기의 사회생존의 이유를 발견하려 할 것이다. 전자에 있어서는 작품은 하나의 수단이오 차라리 인격에서 자기를 도야하는 것이 일의적(一義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만약 문학적 작품의 거개(擧皆)를 박탈해 버린다고 하여도 그는 종교가나 혹은 도덕가나 또는 인생의 하나의 고행자로서 훌륭히 살아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에 있어서는 문학작품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끝까지 작품의 속에서만 살려고 하고, 그곳에서 한 보를 물러서면 자기는 전혀 무의미하여져도 후회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가 사회적으로 생존한다는 이유를 우리는 그의 문학작품을 떠나서는 알아볼 건덕지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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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에 속하는 작가에 있어서는 그의 작품을 그의 개인적 행동으로부터 분리할 수는 없다. 작가 개인의 체험적인 고행이 항상 문학의 테마로써 취급될 뿐 아니라 문학하는 것은 실로 그것의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에 속하는 작가에 있어서는 문학작품은 작가 개인의 행동이나 체험을 떠나서도 훌륭히 살아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기의 문제보다 대상을 관찰 묘파(描破)하는 것이 중요하였고, 자기를 무(無)로 하여 대상 가운데 침잠 (沈潛)하는 것만이 소중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면 체험적인 것에서 문학적인 생존방식을 살고 그의 최후를 비극으로 장식한 레오 톨스토이는 전자요, 관찰적인 것에 문학을 관철하여 그것으로 자기의 생존을 훌륭히 취급한 작가, 오노레·드·발자크는 후자이다. 톨스토이로부터 「부활」을 뺏어버리고 「안나 카레니나」를 뽑아버린다고 하여도 그는 하나의 위대한 체험가, 인생의 고행자로서 수많은 톨스토이안의 숭앙을 받을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발자크에서 「인간희곡」을 뺏어버리면 그곳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의 비열한 속물 ― 귀족생활에 연연하여 사교계의 여왕의 발 밑에 꿇어 엎데이는 자, 은광(銀鑛)에 홀려서 수천 리의 고난에 찬 여행을 감행하는 황금의 익애자(溺愛者), 왕통파의 고루한 이상을 품고 채귀(債鬼)에 쫓겨서 전전하는 불쌍한 파리의 시민이 남을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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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懺悔)」「나의 신앙」「무엇을 할 것인가」여기선 우리는 차라리 톨스토이의 체험과 관찰의 상극을 발견하여도 좋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란 무엇인가」나 「사옹(沙翁)론」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의 가치평가의 기준을 원시 기독교적 실천의지에 두면서 극단의 예술공리설(藝術功利說)을 주창하여 세익스피어 같은 것은 헌신짝처럼 부인해 버렸다. 체험적인 것을 살리기 위하여는 예술을 몽땅 희생해버려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였음에 틀림없다. 카츄샤를 구원하는 것은 자기를 도덕적으로 부둥켜 세우는 부여된 단 하나의 길이었다. 톨스토이의 리얼리스트로서의 일면은 카츄샤를 구제하려는 그의 행동 앞에 무수히 복재(伏在)해 있는 사회적 결함의 발견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가 리얼리스트이기를 기권하는 장소도 이곳 이외에는 있지 아니하다. 발자크라면 이러한 때 자기를 내버리고, 아니 자기의 날카로운 통찰안(洞察眼)만을 가지고서 대상의 결함의 근원 속으로 몸을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대상과 외부세계에 돌려야 할 관찰을 자기 자신의 내부세계로 돌리고 이곳에 자기적발의 무기를 둔다. - 어찌하여 동생의 눈에 있는 망자(芒刺)는 발견하고 너의 눈에 있는 양목(梁木)은 깨닫지 못하나뇨, 하고 말할 때 또는, - 죄 없는 자 우선 궐녀(厥女)에게 돌을 던지라, 고 말할 때 동생 혹은 궐녀(厥女)는 카츄샤가 아니고 실로 외부대상이었던 것이다. 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양목(梁木)의 추급(追及)없이 사회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그의 체험적인 정열은 드디어 신에 의탁하여 자기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함께 합쳐서 종교의 문으로 가져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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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타방(他方)엔 「인간희곡총서문(人間戱曲總序文)」의 가운데서 자기를 인간 박물지 (博物誌)의 관찰자로 자처하면서 역사가가 떨어뜨린 불란서 사회의 일대 풍속사를 짜는 것으로 일세의 영광을 삼겠다고 당당히 선언하여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발자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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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우에 어느 것이 더 훌륭하고 위대하냐? 하는 등의 질문은 우문(愚問)일 따름이다. 더구나 최근 일부의 비평가들이 ‘어떻게 묘사할거냐’ 보다도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 또한 우둔한 문제의 제출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러한 때에 발자크는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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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소설가)은 인간을 그리는데 의하여 인간을 지배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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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문학하는 것에서, 묘사하는 것에서 생존의 의의를 발견하지 못하는 자는 붓을 꺾고 전업을 함이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으로 자기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묘사하는 사업에 참가하려는 것일까. 붓 한자루를 나파륜(奈巴崙)의 창검(槍劍)에다 비긴 발자크의 말은 산문정신과 소설가의 지위와 사명을 가장 단적으로 표명한 만고불오(萬古不杇)의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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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인례(引例)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문학에서 이러한 두 형을 찾아본다면 춘원과 벽초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춘원 이광수 씨는 말하자면 전자(체험)에 속하는 자이오 벽초 홍명희 씨는 후자(관찰)에 속하는 자일 것이다. 「무정」이 이형식(작자)의 체험의 기록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거니와 주인공의 체험이 20년 뒤에 불교의 문을 두들기며 「육장기(鬻[죽]庄記)」를 쓰고 있어도 의연히 주인공의 체험을 배제해 버리고 문학을 꾸밀 수 없는 점에선 그제나 이제나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임꺽정(林巨[거]正)」의 가운데는 작자의 체험은 주장되어 있지 아니하다. 대상을 묘파하기 위한 치밀한 관찰만이 있을 뿐이다. 끝까지 묘사하는 것 - 이것이 문학하는 것의 일체(一切)의 이유가 되어있다. 전자에 있어서는 작자의 주관의 변천과 발전에 따라 현실은 얼마든지 재단되고 왜곡될 것이다. 그러나 후자에 있어서는 작자의 주관은 아무리 변모하여도 현실을 왜곡하는 경우는 보다 적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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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방법 상에서 체험과 관찰을 이상과 같이 고찰해 놓고서 언뜻 독일의 일(一) 사상가가 시민문학의 양대 방법으로 실례적 방법과 세익스피어적 방법을 토구(討究)해 본 것을 상기하면 이것을 상응시켜서 여기에 흥미 있는 결과를 얻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서간의 일절(一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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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은 개인을 시대정신의 단순한 전성기(傳聲機)로 전화(轉化)해 버리는 실러적 방법에 빠져 있다. 이것이 군의 최대의 결점이었다. 군은 좀 더 세익스피어적으로 쓰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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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이른바 실례적 방법이란 주관적·수사학적 경향성에 시종(始終)하여 현실을 이상화하고 왜곡하는 문학적 태도를 말함이다. 만년의 실러에 있어서는 작품의 주인공은 주관적인 추상적인 사상의 전성기(傳聲機)였다고 그는 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의 대신에 역사의 진행과 그의 행정(行程)이 내적 모순 채로 노정되는 객관적 사실적(寫實的) 묘사방법으로 세익스피어적 방법을 내세웠던 것이다. 동일한 의견 밑에서 또 한 사람의 철학자는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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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성이란 그에 대한 특별한 의도가 없이 정황과 사건으로부터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가가 자기가 그리고 있는 사회적 갈등의 장래의 역사적 해결을 억지로 독자에게 강권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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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체 관찰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물론 나는 그것을 사변적(思辨的)으로 분석해 볼 맛은 없다. 개념으로서의 관찰을 추상적으로 규정해 볼 흥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발자크의 실례에서 이것을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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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단편소설 「파치노 카네」의 시초(始初)를 그대로 여기에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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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당시에 제군 중에는 아마도 알 사람이 없을 작은 거리, 레디, 기에르가(街)에 살고 있었다. (3행 략) 나는 절박한 생활을 하면서,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저 승려적 생활의 모든 상태를 그대로 달게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날씨가 좋은 때에도 나는 부르동의 큰 거리 같은 델를 산보하지는 않았다. 오직 단 하나의 정열만이 공부의 습관 밖으로 나를 끌어내었느데, 그것도 또한 하나의 공부는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곽외정(郭外町)의 풍속을, 그곳에 사는 주민과 그들의 성격을 관찰하려 가는 것이었다. 예절 같은 것도 갖추지 않고, 노동자들과 같은 너절한 복색을 하고, 노동자들에 대해서 아무러한 조심도 나는 갖지 않았다. 이리하여 나는 그들의 모인 곳에 쉽사리 섞일 수 있었고, 그들이 물건의 값을 정하는 곳이라던가, 퇴근하는 시각, 싸움이 벌어지는 장면 같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나의 심중에는 관찰이 이미 직각적(直覺的)인 것으로 되어 있어서, 관찰은 육체를 무시하는 법이 없이 정신을 관통하였었고, 혹은 즉좌(卽座)에서 곧 그 외부적인 것 이상에 달할 수 있는 정도였다. 관찰은 나에게, 관찰을 받는 개인 개인의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마치 저 천일야화(千一夜話)의 회회교(回回敎) 승려가 어떤 사람에 관해서 주문을 읽으면 그 어떤 사람의 육체와 영혼과를 즉각으로 빼앗아올 수 있었다는 것처럼, 내가 그 개인 개인으로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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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말하자면 관찰자의 태도의 단적 표현이다. 우리는 다시 이러한 태도가 무엇을 하는가를 같은 소설의 계속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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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밤 나는 열 한 시와 열 수 시의 준간 시각에 랑비규·코믹크 좌(座)로부터 나란히 서서 돌아오는 노동자의 한 쌍의 부부를 만나고 장난삼아 그들의 뒤를 밟기로 하였다. 퐁·오·슈 통(通)으로부터 보마르셰 통(通)까지 나는 그들을 쫓아왔는데 이 솔직한 부부는 처음은 지금 보고 나온 연극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자꾸만 꼬리를 물고 계속되어 드디어는 저의 집 살림살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끌고 있었으나 이이의 달래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이야기에 팔려 있었다. 이튿날 탈 수 있는 금액을 미리 계산해보고 그 돈의 용도를 스물 몇 군데에다 갈라서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살림살이의 쇄세(瑣細)한 이야기를 시작하여, 감자의 터무니없이 비싼 시세라던가, 겨울이 여느 때 없이 긴 데 비겨서 석탄의 값은 유례없이 고등(高騰)하다는 데 대한 불평, 광장사에 관한 의견의 상이(相異), 그래서 드디어는 언쟁이 시작되고, 그 격렬한 언쟁을 통하여 두 사람의 성격 같은 것이 회화(繪畵)처럼 선명한 언어로써 표시되었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생활 속에 참여할 수가 있었고, 나의 잔등에 나는 그들의 남루를 지니었고 나의 두 발은 구멍이 뚫어진 그들의 구두를 신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걸을 수 있었다. 그들의 희망도 요구도 모두 나의 혼 속에 옮아와서, 나의 혼이 그대로 흠빡 그들의 혼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눈 뜬 사람의 꿈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그들을 박대하는 공장주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돈을 지불치 않는 고약한 점주(店主)에 대해서 격앙하고 노여워했다. 자기의 습관을 떠나는 것, 정신적 능력의 명정(酩酊)으로 해서 자기로부터 다른 사람이 되는 것 마음대로 이러한 장난에 취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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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에 이르면 벌써 관찰자의 즐거움이 결코 고현취미(考現趣味)와 일치하지 않는 단서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세태소설가가 풍속의 관찰자로 될 수 있는 경계와 또한 그의 한계가 여기에 있음을 알 것이다. 발자크는 몇 행을 넘은 뒤 그것의 결과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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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때로부터 민중이라고 불리우는 이질적인 덩어리의 요소를 분해할 수가 있었다. 이때로부터 나는 이 곽외(郭外)의 거리가 영웅과 발명가와 실제적 학자와 무뢰한과 대악인(大惡人)과, 미덕과 악덕, 그러한 모든 것이 가난에 눌리우고, 필요에 목을 졸리어서, 포도주 속에 빠지고, 강렬한 주정(酒精)에 심신을 망쳐버리는, 그러한 일체(一切)의 것을 모두 포함한 이 구역이, 반항의 양성소라고도 할 만한 이 지역이, 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가를 비로소 깨달았다. 이 고통의 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모험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가, 얼마나 많은 드라마가 망각의 구렁텅이로 흘러가 버리는가, 제군들은 아마도 상상조차 미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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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가리켜서 19세기 문학주조사(文學主潮史)의 저자 브란데스는 “자기를 잊어버리고 시대의 가운데 몰입하였다”라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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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관찰이란 것을 생각해 본다면, 관찰이 환경정세의 묘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응당히 성격의 창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찰문학의 입장에서 성격문제를 고려하는 근본적 태도나 또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나는 일찍이 노트 제2회와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전회(前回)에서 취급해 보았었다. 결론적으로 되풀이하면 제2회에서는 ‘전형적 성격’을 ‘유형화된 개성’ 혹은 ‘개성화된 유형’이라고 보는 헤겔 이래의 명제를 발자크의 제작태도에서 구체적으로 재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우리가 토구(討究)해 본 바에 의하면, 발자크는 편집광과 악당으로써 유형을 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하였다) 이것을 환경 묘파(描破)와의 연관성 밑에서 살펴보아 ‘인생사회와의 상사(相似)’를 장편소설의 문학적 사명으로 한다면, 거대한 사회가 포함하는 모든 인물과 성격을 창조하기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리얼리스트는 ‘몰아성(沒我性)과 객관성의 보지(保持)’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확증해 보는 것이, 전회(前回)에서 고찰한 성격문제의 요체(要諦)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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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아온다면 작년도 산문문학의 총평(總評)에 있어서, 최근 일부 비평가들의 추장(推獎)하는 ‘주인공=성격=사상’의 전혀 편파(偏頗)한 주관주의적 공식을 배격하고 (이것은 전술(前述)한 실례적 방법이며, 동시에 자아과시의 태도이다) 이것에 대하여 문학에 있어서의 사상성의 진수를 오히려 객관적 사실적(寫實的) 방법에 두고, 구체적으로 현순간의 우리의 문학의 상태에 있어서는 ‘세태=사실=생활’의 표현이 오히려 가당하리라고 말한 나의 의견의 타당성뿐만이 아니라 일찍이 재작년 나의 최초의 장편소설 개조론에서 지적해 두었던 바, 사상가를 주인공으로 하여야만 사상이 있는 문학이라고 보는 가소로운 원시적 사상주의의 비판에 나타난 나의 성격 창조의 주장도, 또한 여기에 이르러 일층 명확성을 띠게 되는 것이라고 믿어지는 바이다. 요컨대 천박한 주관주의적 경향성은 진정한 사상의 극도로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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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디얼리즘과 리얼리즘이 대립되는 위치에 놓여 있듯이, 그리고 철학상의 관념론과 유물론이 그러하듯이, 체험적인 것과 관찰적인 것을 절대로 대립하는 두 개의 개념으로서 설정하고 싶지 않다는 나의 생각은, 이 단문의 모두(冒頭)에서 언명해 둔 바와 틀림이 없다. 그것을 나는 내 자신의 문학적 행정(行程)에 대한 비교적 편의한 표현으로서 설정해 보는 것이다. 나의 문학적 행정(行程) - 그것은 사람들이 다분히 조소적으로 말하듯이 변모일는지도 알 수 없다. 아니 그것은 확실한 변모다. 그러나 요(要)는 변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하(如何)히 변모하였으며, 또 변모할 것이냐에 달려있다. 리얼리스트라고 자신하는 사람이 주관적 자기성찰에서 점차로 리얼리즘 본래의 입장으로 변모하는 것 이것은 내가 가장 자아중심의 문학 세계를 허덕이고 있던 자기고발의 맹렬한 제창자이었을 때에도 무한히 갈망하여 오히려 가능치 못한 바이었다. 나는 그러므로 나의 반대의 코스를 권장하고 있는 일부 비평가들의 최근의 태도를 선의로 해석할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씨 등이 자신을 리얼리스트라고 언명함에 이르면 그것은 결국에 있어서는 리얼리즘에 대한 문예사전의 상용할 수 없는 차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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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하여보면 필자 왕년의 자기고발문학은 일종의 체험적인 문학이었다. 그것은 주체재건(자기개선)을 꾀하는 내부 성찰의 문학이었으니까. 이러한 과장은 여하(如何)히 하여 나와 같은 작가에게는 필연적인 과정이었던가. 추상적으로 배운 이데, 현실 속에서 배우지 않은 사상의 눈이 현실을 도식화하는데 대하여 , 자기 자신의 눈을 통하여 현실 속에서 사상을 배우고, 이것에 의하여 자기를 현실적인 것으로서 인식하자는 필요에 응하여서였다. 자아와 자의식의 상실이 리얼리즘을 오히려 그 반대의 경향에 몰아넣어 돌아보지 않는 문학정신의 추락을 구출하기 위하여서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러한 경계나 용의가 없이 이것에 시종(始終)한 것은 아니었다. 자의식 자체가 문학의 목적이 되는 것, 자의식의 관념적 발전이 문학적 자아를 건질 수 없는 자기혼미 속에 몰아넣는 것 - 이것은 내가 극도로 경계한 바이었다. 자기검토의 뒤에 합리적인 인간정신을 두어야만 비로소 자기성찰이 이루어지리라는 것, 모랄 탐구의 뒤에는 과학적인 합리적 핵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 - 이런 것들은 문학상으로는 리얼리즘을 언제나 나의 뒤에다 지니고 있었다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자기고발이 고발문학의 하나의 과제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털어놓고 말하면 「소년행(少年行)」의 봉근이나 「무자리」의 운봉이에게 사상을 의탁하는 그러한 천박한 문학의식으로부터도 나는 떠나고 싶었다. 봉근이는 제가 품었던 인간적 신념의 닷줄이 끊어져 버렸어도 자전거를 타고 약 배달을 나갈 때엔 다시 희망을 품을 수가 있었다. 운봉이는 자기가 꿈꾸던 모든 환영(幻影)이 깨어져 버릴 때, 그러나 자기를 소년 직공으로 재생시켜서 살리려고 하는 희망은 다시 그의 어린 마음에 용솟음쳤다. 이곳에 나타난 것은 혹은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정신이나 사상일는지 모른다. 나는 그것을 부둥켜 잡고 세상은 아직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강성을 획득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것은 나에게나, 또는 이것을 읽고 사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행복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감을 낚기 위하여 무엇이 감행되었는가. 현실의 왜곡이었다. 봉근이와 운봉이의 희망과 불요(不撓)의 정신은 가난한 모든 살림살이에 대한 작자의 모독과 현실왜곡의 소산인 것이다. 현실은 좀 더 험준하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문학사상은 귀여운 환상임을 면치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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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자기고발 - 모랄론 - 도덕론 - 풍속론 - 장편소설 개조론 - 관찰문학론에 이르는 나의 문학적 행정(行程)은, 나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적인 것은 어느 때에나 관찰적인 것 가운데 혈액의 한 덩어리가 되어 있을 것을 믿는다. 이렇게 보아올 때에는 체험과 관찰을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체험의 양기(揚棄)된 것으로 관찰을 상정(想定)하는 것이 오히려 정당할는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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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평론』, 1940년 5월)
【원문】체험적인것과 관찰적인것 (발자크연구노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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