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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파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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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8월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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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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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리다. 이름은 아직 없다 ─ 이렇게 쓰기 시작하고 보니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 로부터 그의 인기소설의 허두를 잡았던 하목수석(夏目漱石)의 「나는 고양이다」가 생각난다. 그 뒤에 그 고양이에게는 필시 귀엽고 아름다운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영구히 이름이란 걸 가져볼 수 없을 게다. 아니 우리 족속에서 이름을 가져 본 행복된 조상이 있을 게냐. 생각해 볼 수 없는 막막한 일이다. 우리에겐 종류를 구별하기 위한 ‘장르’적 명칭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 있을 따름이다. 쇠파리, 왕파리, 쉬파리, 청파리, 똥파리, 소파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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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내 자신에 대하여 한 가지 자랑하게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의 출생지다. 사람 치고는 제가 지상에 나온 고장을 모르는 이도 없으련만 다른 동물 중에는 그것이 대단히 많다. 사람들이 항용 주고받고 하는 말에 개구리가 올챙이 때를 잊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을 자기 출생이나 성장에 대한 기억을 상실했거나 망각해 버린 게니 별로 출생지를 모르는 놈팽이라고 말해 버릴 수는 없지만 하필 다른 동물 다 두고 이놈의 이름을 빌렸다. 이러한 속담말을 만든 걸 보면 개구리 한 놈의 건망증을 가히 추상(推想)할만하다. 이눔이 오월 단오 전후해서 논또랑이나 수채구멍이나 사창못에서 재갈거리고 독창인지 합창인지 모르게 떠들어낼 때엔 아닌게 아니라 올챙이때에 모양 숭한 꼬리를 달고 개천 구덩이에서 밀리어 다니던 때를 잊었거나 머구리알 시대를 못알아차리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놈에게 출생지를 묻는다면 도리질이나 일쑤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광산쟁이 모양으로 대포나 꽝꽝할 게다. 시골 논또랑에서 나고도 서울 광회루든가 덕수궁의 연못이든가 창경원 춘당지 연뿌리 밑에서 부처님처럼 솟아나왔노라고 말하기가 십상팔구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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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다. 정직하고도 기억력이 확실하다. 사람들도 제에미 애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출산할 때 일을 알 리가 만무하다. 부모된 자가 공력을 드려 길러가며 똥오줌 받아내고 추울세라 더울세라 그야말로 손끝으로 길러낸 자식놈들이 스물 안짝만 넘어서면 저 혼자 자란 것처럼 부모의 은덕을 잊고 마지막에는 칼부림까지 하는 눔이 수두룩한 세상이니 또 다시 말할 게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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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 크게 말하면 동해 조선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면 하부리 ─ 그런데 딱 질색할 노릇은 아직까지 번지를 모른다. 이게 누구네 주택이라면 문패를 달아맨 곳으로 윙하니 날아가 보면 그만이지만 인가에서 좀 떨어져 있는 밭 가운데서 났다. 밭 가운데라니 무슨 채미밭이나 보리밭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뽕밭이고 감자밭이고 그 새에 있는 도양지 우리 밑에는 번지가 없다. 소유자의 서명이 붙어 있을 뿐이다. 결국 내가 난 곳의 번지를 알려면 밭 소유자를 알아가지고 그 집 밭 증명 서류고로 들어가야 한다. 하두 애쓴 결과 소유자는 알았다. 포목상하는 박아무개네 밭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 집에 숨어 들어가서 고초를 당하면서 금고 옆을 파수보고 있노라니 종시 그 밭증명은 보이지 않는다. 어이된 일일까 했더니 돈을 차용하느라고 2번 저당까지 내서 어느 지주의 금고에 가 있다 한다. 나는 장거리 비상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십리 만한 곳에까지 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 번지를 모르고 있다. 그 대신 도야지 우리 임자를 잘 안다. 전기 박포목상에게 일년에 2원씩 세를 물고 있는데 도야지 우리 문 있는 쪽에 널조각으로 ‘소유자 최가매(崔哥妹)’라고 먹으로 써서 붙여 있다. 이게 어이된 놈의 이름이 이 모양이냐고 조사해보니 최시 동네 첩으로 늙은 퇴기의 호적상 이름이었다. 알고보니 딴은 그럴 듯도 하나 이 고을 사람으로 그의 이름이 ‘가매’인 것을 아는 이는 하나도 없을 게다. 면대해서 대접해 하는 말엔 ‘최씨 동네 할머니’라 부르고 왼곳에선 ‘최씨 동네 노친네’ 또는 ‘방송국’이라 부른다. 남의 흉을 잘 보고 말을 잘 옮기고 음해 잘하고 소식 잘 전한다고 그 집에 와서 순두부나 비지해서 술 잘 사먹는 젊은 주정뱅이 관청나라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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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데기를 거쳐서 파리로 되어나오는 경로는 어느 동물학자에게 들으면 잘 알겠다. 또는 이즈음 도 위생과에서 시골마다 순회하면서 소학 운동장 같은 데서 영사하는 활동사진을 보면은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대주의자들이 나를 무슨 강도나 호랑이나처럼 취급하여 내가 무심결에 하는 행동을 하나하나 확대해서 어른거려서 머리 아파 볼 수 없는 위생영화를 만들어내고 서푼짜리 화공들을 시켜서 포스터를 그리고 게시판 같은 데 ‘무서운 전염병의 매개자 파리를 박멸하라’고 무시무시한 글을 써붙이곤 한다. 질색할 노릇이다. 내가 무슨 인간을 원수딴 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사람의 원수는 사람들 자신이다. 하필 뚱딴지나 같은 딴 족속이 무슨 용어로 사람의 원수가 된단 말이야. 사람놈들의 법률에도 의식치 않고 적그러논 실수는 과실이라 하여 범죄를 구성치 못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죄가 아주 경감된다. 하물며 딴 족속이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하는 행동인 이상에는 내가 원수가 될 게 뭐냐는 말이다. 대체 만물의 영장이니 고급한 문화인이니 하는 사람놈들이 우리를 원수 취급한다는 것이 벌써 자기 폄하(貶下)도 심한 일이다. 한편으로 ‘저런 파리 같이 더러운 놈’이니 ‘X에 치운 파리같은 놈’이니 하는 등으로 가장 더러운 물건 그 중에도 제일 하찮은 초개보다도 더 가치 없는 것으로 우리를 모욕하고 깔보고 하면서 그런 것을 자기와 대등한 지위에 올려놓고 적이니 원수니가 어이된 일이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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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기울여서 전기를 일으키는 기계를 서양 누구처럼 발명해 낸다든가 하다 못해 우리 조선의 발명가들처럼 셀룰로이드 동정이라도 생각해 놓으면 인류의 생활도 향상될 것이요 또 장사도 잘 될 것인데 무얼 못해 파리 죽이는 약이나 기구를 연구해내고 있다는 말인가. 처음에는 파리채라는 걸로 딱 딱 아이 작난하듯 우리들을 후려갈겨서 우리를 잡아죽이려 들더니 그 다음은 파리통이라는 게 생겼다. 유리로 만든 통이다. 밥알이나 뼉다구 부스러기가 뿜는 향내를 따라서 올라가 본 즉슨 다시 나올 수 없는 통 안이다. 쭉 돌려 물을 두고 미끄러지면 익사하게 마련이다. 우리 조상이 이놈에게 홀려서 기억(幾億)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속는 것도 한두 번이지 두고두고는 그렇게 용이하게 안 된다. 그 다음은 파리약으로 잡자는 겐데 먼저 생겨난 것이 껍젝이다. 부뚜막이나 솟소동 위나 음식물 덮어놓은 헝겊 위에나 어쨌건 우리들이 잘 출입하는 곳에 이 놈을 갖다 놓는다. 알지 못하고 기름이 번질번질 하는 데 홀려, 윙하니 날라갔다가는 마지막이다. 다리고 날개고 도무지 딱 붙어서 뗄에야 뗄 수가 없다. 애쓰면 애쓸수록 점점 더 지독하게 붙어버리고 만다. 우리들이 안타까와하는 것을 보고 무얼 달게 먹는 줄 알고 날라오던가? 구조해주려고 찾아왔던 친구들도 두 말 없이 붙어버린다. 이 부근에는 아예 활주(滑走)는 샘스러 저공비행도 해서는 안 된다. 군자는 모름지기 가까이 하지 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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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몇 년 간 생겨난 것으로 십수 가지의 물약이 있다. 사실 이눔은 질색이다. 우리 동리에서는 국장이나 군수급은 못되어도 그래도 제법 좌수 소리를 들으며 지혜롭기로 행세하는 나도 이눔에게 걸려서 한 번 염라대왕 앞까지 갔던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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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도야지 물 주러 왔던 방송국집 며느리 잔등에 붙어서 윙하니 김아무개네 집 맏아들이 서울서 왔다기에 이눔의 꼬락서니를 좀 보려고 중도에서 그 집 뒷문으로 들어가서 부엌을 지나 그의 방에까지 왔었던 일이 있다. 발을 쳐놓아서 들어갈 수는 없고 문지방에 붙어서 보노라니 대학 다이다 신경쇠약 걸려서 왔다는 놈이 꽃 그린 편지지에 눈이 발개져서 뭘 디리 쓰고 있다. 소 닭 보듯 하는 그의 아내가 뭔 참외인가 뭔가를 깍아가지고 오길래 재치 있게 난 닥 그 위에 올라앉았다. 발을 들치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이 여편네가 들고오는 참외에 정신이 있었으면 왼손으로 휙 나를 날려래도 보려고 들텐데 글자는 몰라도 꽃 그린 편지종이는 뭐하는 겐지 알고 있는지라 금시에 눈에 쌍심지가 서 가지고 남편을 흘겨보고 시작하려기에 나를 몰라 보았다 남편보고는 먹으란 . 말도 안 하고 책상 밑에 내버려둔 참외를 나 혼자 먹으면서 나는 그들의 대화를 자미(滋味)나게 들었다. “어디다 편질 하우”하고 처음엔 제법 노염을 죽이고 질투를 숨긴 채 묻는다. “응 내 동무에게”이러고 쳐다보니 아내의 무사처럼 생긴 얼굴이 심상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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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내가 건 알어 뭘 할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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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난 아내는 휭하니 나가 버렸다. 편지 쓰던 단맛을 잃은 학생놈이 기름 바른 머리카락을 긁적긁적 긁더니 아뿔사 그만 참외 그릇을 보고 말았다. 속으로 한 번 ‘이 눔에 파리’하고 시어머니 역정에 개 옆구리를 차려 들면서 옆에 있는 가죽채를 들어 나를 후려갈긴다.그러나 그렇게 쉽사실는 안 된다. 휙 목을 뻗쳐 천정으로 날랐더니 유까다 바람으로 일어서서 멍하니 쳐다본다. 닭 따라가던 개의 격이어서 다소 이 여드름 친구가 미안하다. 그랬더니 웬걸 농짝 밑에서 사이다 병 같은 걸 꺼내다 구멍 뚫린 쇠를 입에 물고 휙하니 안개 같은 걸 내뿜는다. 나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썼으나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다시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밤은 으슥하여 추운데 나는 청결(淸潔)통 속에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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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1938년 8월호, ‘여름의 정서’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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