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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문학개척자(朝鮮文學開拓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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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1.15
최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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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文學開拓者[조선문학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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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菊初[국초] 李人稙氏[이인직씨]와 그 作品[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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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초 이인직씨는 조선 문학상에 있어서 잊지 못할 은인으로 믿는다. 그가 쌓아 놓은 공적과 닦아 놓은 터전은 우리에게 영세의 기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국초 이인직씨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드물다. 그가 두고 간 주옥 같은 저작은 이제에 와서 ‘싸구려 장사’의 입담거리가 되어서 야시장의 먼지 속에 굴러다니건만 누구나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그는 조선의 문단에 큰 공헌을 하고도 세상에 그 이름이 드러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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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조선의 문학 운동을 말하는 때면 먼저 이광수씨나 최남선씨를 든다. 그래서 신시나 시조로는 최남선씨를 말하고 진정한 의미의 소설가로는 이광수씨를 말한다. 이광수씨는 소설가로서만 조선 문단 운동에 공헌이 큰 것이 아니다. 신문체 창작자로서도 크다는 것이 世評[세평]이다. 어느 때엔가 양백화군과 같이 최남선씨를 방문하였더니 氏[씨]도 무슨 말끝에 소위 語文一致體[어문일치체]는 이광수씨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들은 법하다. 나도 여기는 별 이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인직씨의 작품을 다시 의식적으로 접하게 된 뒤로는 문학사적으로 보아서 조선에 진정한 의미의 소설을 보여 준 이도 이인직씨요 조선에 語文一致[어문일치]의 신문체를 보이려고 애쓴 이도 이인직씨란 것을 절실히 느꼈다. 氏[씨]는 이광수씨보다도 10년이나 가까이 앞선 이다. 문학사적으로 보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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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氏[씨]를 ─ 이인직씨의 작품을 위대하게 느낀 것은 4년 전 양주 奉先寺[봉선사]라는 사찰에서 세월을 보낼 때였다. 그때에 주지 스님의 상좌와 같이 가만히 마을 구경을 내려갔더니 그날이 마침 장날이라 ‘돌림뺑이’ 책장사가 장머리에 울긋불긋한 옛날 이야기책들을 벌여 놓고 파는 데로 갔더니 거기에 『귀의 성』이 있기에 38전이던가 37전을 주고 상, 하권을 다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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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많은 이야기책 속에서 『귀의 성』을 사게 된 동기는 이러하다. 나는 어려서 이야기책을 퍽 즐겨서 학과는 빼어도 소설은 쫓아가면서 읽었다. 이때에 『귀의 성』을 읽었다. 춘천집의 참담한 최후와 김 승지 본마누라의 악독은 어린 가슴에 큰 인상을 박았다. 이 인상은 내게서 좀처럼 스러지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10여 년이나 표랑 생활에 끌려서 독서와 인연이 멀었었다. 독서와 인연이 멀수록 독서에 대한 헙헙한 생각은 과거의 기억에 남은 책을 생각하였으나 책을 얻지는 못하고 우보 역 『哀史[애사]』의 장발짠이며 하몽 역 『海王星[해왕성]』의 해왕 백작이며 국초 작 『귀의 성』의 춘천집…… 이렇게 기억에 남은 것만 드문드문 생각하고 있다가 奉先寺[봉선사]에 있을 때 마을에서 『귀의 성』을 보고 산 것이었다. 물론 어렸을 때에 받은 애틋한 인상으로써 산 것이지 거기에 문학적 가치가 있으리라는 생각으로써 산 것도 아니요 또 문학적 가치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내게 어릴 때의 인상만 없었다면 나는 『귀의 성』도 다른 이야기책과 같이 보아 넘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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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귀의 성』을 다시 읽는 때에 받게 되는 인상은 10여 년 전의 그 인상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나는 그 사찰에서 뛰어나와 조선문단사에 있을 때 『조선 문단』에 연재하던 김동인씨의 『소설 작법』에서 이인직씨의 작품에 대한 평을 읽고 크게 공명이 되었고 이래 그의 작품을 애써 구하였으나 겨우 『귀의 성』 『혈의 누』 『치악산』 등을 얻었을 뿐이다. 이것만 보고 그의 작품이라거나 사상을 운운할 수는 없는 일이요 더 자세히 재료를 얻어 본 뒤에 할 일이지만 내가 본 범위내에서 간단히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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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을 통하여 첫째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때의 사회이다. 지금으로 부터 20여 년 전후의 조선 사회상을 우리는 여실히 보게 된다. 그의 붓은 어디까지든지 사실적이었다. 자신 있는 외과의가 신념 있는 해부도를 휘두르듯이 불합리한 주종 관계와 악착한 본처의 질투와 시기며 상호반목하는 노예 계급, 추태가 빈빈한 양반의 가정 등을 조금도 기탄없이 주저치 않고 사실적으로 쪼개 내었다. 소설이라면 신화적·전설적의 것으로 알던 것은 그때의 독자나 작자가 다 같이 느끼고 있던 속에서 이러한 수법을 보인 것은 청천의 벽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그의 사실적 필치는 다만 사실적에만 그치고 만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 쌀쌀하게 쪼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붓끝에는 뜨거운 정과 엄숙한 비판이 있어서 지나가는 잔해 속에서 새로 올 세상을 보았다. 이것이 그의 사회관이요 그의 인생관일 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문체로 보더라도 그는 위대한 공적자이다. 그는 그때에 벌써 語文一致[어문일치]를 쓰려고 애썼다. 지금 같으면 문제도 되지 않지만, 그때는 한문투가 상하 계급을 지배하던 때요 또한 국문은 내서라 하여 배척하고 비천히 보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엄연회 모든 인습과 전설을 벗어나서 신문체를 지어 썼다. 그의 소설이나 문체는 일본 문단에서 배워 가지고 짓고 쓴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의 作[작]에서 일본 냄새나 일문체식을 찾지 못한다. 나는 여기 있어서 그를 우리 조선 문화 운동사에 있어서 첫사람으로 추앙한다. 물론 그의 작품에 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에 비추어 보아서 위대한 사람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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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시간과 지면 관계상 이만 쓰고 말거니와 이인직씨에게 대하여는 그의 작품도 더 읽고 또 그의 경력도 더 알아 가지고 더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그의 평전 비슷한 것을 쓰려고 늘 생각한 지 오래였으나 나의 붓으로는 감히 하기 어려운 것을 늘 느끼고 있던 바인데 이제 八峰[팔봉]에게 대한 文債[문채]를 갚기 위해서 이렇게 허수룩히 쓰게 된 것을 고인과 어울러 독자에게 사과한다.
【원문】조선문학개척자(朝鮮文學開拓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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