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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여]가 톨스토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안 것은 십 삼사 세 때이다. 그때 여의 長兄[장형] 東元[동원]이 某[모] 사건에 걸려서 尹致昊[윤치호] 씨 등과 영어의 몸이 되었을 때에 톨스토이 작 「부활」이라는 책자를 차입하여 달라는 편지 때문에 그 책을 구하러 다니느라고 톨스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였던 것이다. 그때는 여는 기독신자의 집안의 도령으로 있었더니만치 ‘부활’ 이라 하면 ‘예수의 부활’ 로밖에는 생각을 못하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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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열다섯 살 되는 해에 동경을 유학차로 건너가서 神田[신전]의 古册肆[고책사]를 뒤적이다가 톨스토이의 「은둔」이라는 단편집을 발견하였다. 톨스토이라는 이름은 이미 알았던 바요, 「은둔」이라는 제호가 당년의 음울하던 소년인 여의 마음에 들어서 그냥 사다가 읽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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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이해치 못하던 한 개 동자이었던 여였지만 그 「은둔」(거기는 「비르기 神父[신부]」이하 몇 개 단편들이 수집되어 있었다)에서 놀라운 박진력을 느끼고, 혼자서 얼마나 가슴을 뛰놀리었던가. 문장이라 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이렇듯 격동시킬 수 있다는 점과, 그것이 즉 문학이라는 점을 안 것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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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부터는 톨스토이 작이라면 책가의 고하를 무론하고 책 제호의 호오를 무론하고 사들여서, 중복으로 산 책자도 적지 않으며, 더우기 「전쟁과 평화」의 그 경탄할 만한 거책을 독파하기로 십수 번이며, 장차 문학자가 되겠노라는 꿈을 가지게 된 것도 톨스토이 때문이며 또한 고소를 금치 못한 것은 동경문단의 廣津和郞[광진화랑]이 톨스토이의 사상을 공격한 글을 보고 다시는 廣津[광진]씨의 작품은 대하지 않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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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절부터 이십여 년을 경과한 지금 여의 초기의 작풍에는 톨스토이의 흉내가 적지 않았지만 차차 자기의 길을 개척한 뒤에는 톨스토이의 너무도 사실적인 풍은 자각적으로 거부하기는 하였지만, 이 거인에 대한 애모의 염은 아직 些少[사소]도 사라지지 않고, 그의 사상에 대하여도 찬성치는 못하면서도 숭배는 그냥 하고 그의 思[사]와 行[행]이 불일치한 생애에는 고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그것으로서 인간으로서의 杜翁[두옹]을 더욱 존경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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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를 코웃음치는 여다. 로망 롤랑도 역시 우습게 여기는 여다. 셰익스피어조차 존경할 줄 모르는 여다. 지금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실현되지는 못 하나 장차 그들보다 훨씬 앞서는 작품을 내놓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여다. 그러나 왜 그런지, 두옹에게뿐은 머리를 숙이기를 아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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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상과 수법이 여와 전혀 다른 두옹이지만, 그래도 그냥 여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하는 것은 여의 너무도 놀라운 문학적 감화의 힘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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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每日申報[매일신보]〉, 1935.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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