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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상 作家[작가] 「펄 벅」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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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도 노벨상이 ‘펄 벅’ 에게로 돌아 갔다. 이 뉴스는 어떤 의미에서나 우리의 자극적인 화제다. 우선 근간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서구의 형편을 알 기회가 적어진 우리로서 서구인의 世界文學觀[세계문학관]을 窺知[규지]할 一機會[일기회]도 될 수 있는 것이고, 반대로 우리들이 비교적 평범히 讀了[독료]해 버린 작품이 과연 인기 이상의 어떤 가치를 가젔는가를 반성할 좋은 기회도 되지 않을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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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여하튼 간에 「大地[대지]」란 소설에 걸려 있는 것이다. 내 자신이 「大地[대지]」란 소설 이외에 ‘펄 벅’이란 작가에게 대하여 백지란 이유도 있을지 모르나, 다른 세계적 작가와 달라 ‘펄 벅’이란 작가는 「大地[대지]」란 소설을 떼어 놓으면 그다지 세계적으로 문제될 만한 사상이라든가 혹은 문학적 문화적 업적을 쌓은 사람이라고 말하긴 어렵지 아니한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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例[예]하면 ‘지이드’ 라든가 ‘토오마스 만’ 이라든가, ‘마르로’ 같은 사람들은 그들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몇개의 작품을 빼낸대도 인간으로서 일정한 업적을 가젔다고 할 수 있으며, 無形[무형]의 사상을 통하여 세계인이 그들과 관계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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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그들의 작품이라는 것도 그들의 인간이나 사상과 독립하여 世界文 學史[세계문학사] 위에 일정한 위치를 요구할 수 있고, 동시에 현대의 精神史上[정신사상] 일정한 계단의 標幟[표치]로서의 가치와 意義[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가 있다. 그러나 ‘펄벅’은 소설 「大地[대지]」의 작자인 이외에 여하한 개인적 업적으로도 사상으로서도 평가될 만한 기여를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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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例[예]이지만 그의 소설에 비하여 그의 傳記[전기]나 현재 생활이 도무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보아도 這間[저간]의 일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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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금번 노벨상 수상은 약간 世人[세인]의 意表[의표]를 나온 感[감]이 不無[불무]한 동시에 지극히 평범한 擧事[거사]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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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노벨상이란 무슨 문학사적 평가나 비평적인 권위를 가젔다는 것보다 극히 퍼퓨러한 의미에서 인류 문화에 공헌한 사람을 골라 업적을 찬양하고 명예를 넓혀 주는, 그저 실로 翰林院的[한림원적]인 성질의 것이라, 나이도 젊고 1931년 이래로 몇 개 소설을 써 인기를 넓힌데 불과한 한 미국 여자를 골랐다는 것은 분명히 異例[이례]라 말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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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벌써 이만치 세계에 인기를 넓히고 있는 작가 (하물며 그것이 통속 작가가 아닌!)에게 그 공적을 인정한다는 것도 理[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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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긴장한 世界史[세계사]의 국면 가운데 荒唐[황당]한 걸음을 달리고 있는 支那[지나]를 取材[취재]로 한 소설의 작자가 아니었다면, ‘펄 벅’의 인기 쯤으로는 노벨상이 차지 되지 않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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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讀書社會[독서사회]만 하더라도 만일 支那[지나]를 취재로 하지 않았더라면, 「大地[대지]」이상의 대중성과 예술성을 아울러 가젔다 하더라도 결코 「大地[대지]」만한 인기를 博[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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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 의 작가로서의 세계성이나, 「大地[대지]」의 소설 가운데 묘사된 현실의 세계성 등이 주목되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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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史的[세계사적] 국면에 등장한 지역만이 항상 세계적 문학의 土壤[토양]에 있다고나 할까?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있어 여러번 되풀이 해 오던 문학에 있어 소위 典型性[전형성]을 再認識[재인식]하는 하나의 기점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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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의 典型性[전형성], 환경의 전형성, 그러고 생활의 전형성, 운명의 전형성 내지는 地域[지역]의 역사의 전형성이라고까지 넓혀서 이해할 수가 있다. 그 성격 가운데 다른 사람의 縮圖[축도]를, 그 환경 가운데 다른 환경의 精粹[정수]를, 그 운명 가운데 세계사적 운명의 상징을 발견할 수 있을 때만 우리는 비로서 典型性[전형성]이란 말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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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支那[지나]에는 우리 東洋人[동양인] 만이 아니라, 실로 西歐人[서구인]의 운명의 중요한 一端[일단]이 聯絡[연락]되어 있고, 世界史[세계사]의 운명의 결정적인 매듭의 한 알맹이가 풀리고 얽히는 分岐過程[분기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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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思想[세계사상]과 世界文化[세계문화]는 언제나 이러한 조건과 이러한 환경을 토양으로 하여 만들어 지는 법이다. 그러나 「大地[대지]」를 문제삼을 때, 우리들에게 가장 큰 의문으로 남는 것은 어째서 그런 문학이 支那人[지나인] 자신이나 혹은 동양인 자신의 손으로 창작되지 않고 한 서양인의 손에서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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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우리 동양인 즉 동양의 운명을 세계의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있어 노벨상이 어느 사람에게 수여 되었느냐 하는 것보다는 백 배나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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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나 그러나 多岐[다기]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이 문제의 根抵[근저]에 어떤 성격적인 사실을 연상할 수 있다. 그것은 흔히 서양이란 것에 대하여 對蹠的[대척적]으로 씌워지는 동양이란 말의 특이한 의미다. 서양이란 최초부터 동양의 대립자로 등장한 것으로 그것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경제적 우열에서 오는 자연의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劣[열]하다기보다는 뒤떠러진 文化體[문화체]로서의 동양은 周知[주지]와 같이 서양의 수준을 따라가야 한다는게 서양을 이기는 최초의 전제이었다. 先進[선진]한 수준에의 급격한 登渉[등섭] 없이는 後進[후진] 문화는 파멸의 운명에 봉착하고마는 것으로 자연히 이것은 갈등과 싸움의 형태로 전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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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에 동양의 各地[각지]는 표면으로 서양을 숭배하고 그것을 모방하려고 급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은 격렬한 鬪爭場裡[투쟁장리]에 들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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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 對比[대비]되어 씌어질 때의 동양이란 말의 특이성이란, 곧 모든 동양인의 서양에 대한 역사적 운명의 어느 공통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또한 支那[지나]란 것에 대한 그 남어지의 동양인의 인식 능력을 제한하는 限定物[한정물]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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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어 말하면 어떠한 동양인도 서양인과 같이 支那[지나]를 인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차이가 좋은 결과를 낳을지, 그른 결과를 낳을지는 잠시 論外[논외]로 두고 좌우간 동양인이 支那[지나]를 볼 때엔 支那[지나] 가운데서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는 대신, 서양인은 온전히 타인을 보는데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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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을 보는 눈이 밝은가, 자기를 보는 눈이 밝은가는 상식으로 말해도 남을 보는 눈이 밝다고 아니할 수가 없다. 분명히 서양인은 支那[지나]에 대하여 보는 눈의 利[리]를 가젔다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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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大地[대지]」에 나타난 소위 支那的[지나적] 특성이란 것이 대부분은 우리 동양인으로선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운 諸點[제점]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支那[지나]의 근대사회로서의 혹은 일반 인류사회의 進步[진보] 行程[행정]에서 볼 때, 발전이 정체된 채 고착되어 있고 뒤떨어진 부분의 明哲[명철]한 인식이다. 같은 동양인으로서 서양인이 쓴 소설을 통하여 支那[지나]에 뒤떨어진 부분을 비로소 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나, 누구나 「大地[대지]」를 읽고 최초로 받는 강한 인상도 이것일 것이요, 또 가장 뒤에 까지 남은 인상도 이것이 아닌가 한다. 그뿐 아니라 유감이지만 이 소설의 그런 부분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 汲汲[급급]히 서양적 문화를 追及[추급]하는 남어지 채 돌보지 못하고, 또한 아직 掃清[소청]되지 않은 자기 자신의 자태의 일부분을 재발견한다는 것도 우리에게선 은폐할 수 없는 소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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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蘭[아란]이란 동양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忍從[인종] 그것과 같은 동양적 母性[모성]이요, 王龍[왕룡] 그리고 그 아들들과 一家[일가]의 운명과 자식들의 행로, 그것은 사소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동양적인 가족의 현대적 운명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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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허구 많은 동양에 와 있는 서양인 중 하필 支那[지나]에 와 있는 서양인의 손으로 이런 소설이 씌여지느냐 하는 것은 또한 약간 달리 생각할 부분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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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支那[지나]라는 지역의 특수성이다. 먼저 나는 동양과 서양의 접촉이 세계사적 의미를 가젔다고 했는데, 그 세계사적 의미의 갈등이 가장 래디컬(radical)했고, 또 가장 먼저 서양과 겨루고 최후까지 서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발버둥 치는 나라가 支那[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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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은 周知[주지]와 같이 자본주의로서 동양에 건너와 支那[지나]에 정착지를 발견함으로서 다시 諸[제] 평화를 작만했는데, 이제는 그 정착된 기정 재산 때문에 서양은 자본주의 사회로서의 곤란한 운명을 마지 했으니, 원인은 서양 자체 가운데 있다 해도 표현의 중요한 또한 가장 노골적인 무대가 支那[지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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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에선 諸國[제국]이 신사복을 입고 다투나, 支那[지나]에 와선 군복을 입고 다툰다. 거기에도 또 중요한 것은 서양의 세례를 받아 지나는 尤甚[우심]히 변화 받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의 한 가지도 철저히 변하지는 않은 점이다. 그래서 현대세계가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의 요소가 전람회처럼 雜然[잡연]히 제대로 羅列[나열]되어 있는 곳이 支那[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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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支那[지나]는 개성적 의미에서 동양의 전형이고, 또한 서양인에겐 일반적인 의미의 세계적 곤란의 典型[전형]이기도 해서, 서양인과 支那[지나]와의 접촉은 아직도 세계사적 중대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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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정이 동양의 다른 지방에 와 있는 서양인이 아니라, 支那[지나]에 와 있는 서양인에게 이런 소설을 씌운 것이며, 한 선교사의 딸에게다가 세계적 大作[대작]을 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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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那[지나]에 있어서 우리가 이미 진부하다고 생각하는 문제 ── 그 實[실] 철저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 가 아직도 신선하며, 또한 우리가 먼 장래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도 迫頭[박두]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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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최근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스메들레’ 女史[여사]나 年前[연전]에 ‘A. 스트롱’ 여사 같은 일개 신문기자가 능히 蕪雜[무잡]한 붓을 가지고 세계적 명성을 날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동양인 자신에 의한 세계사적 행위란 것도 어쩐지 支那[지나]를 무대로 해야만 가능한 것임을 생각할 때, 支那[지나]란 어떤 의미에서 현재 세계사가 전개되는 대무대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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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또한 支那[지나]란 장소는 비교적 용이하게 세계적 인물과 세계적 문학을 만들어 내는 일종 불가사의한 장소로 생각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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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이런 의미에서 말하여 「大地[대지]」는 너무나 용이하게 ‘世界文學[세계문학]’의 영예를 차지한 문학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무엇보다 「大地[대지]」의 思想[사상]이 현대적 思考[사고]의 수준을 一步[일보]도 넘지못한 것일 뿐더러, 현대인이 처리해야 할 곤란한 과제를 상당히 진부하게까지 생각하는, 바꾸어 말하면 현대적 사고의 尖端[첨단]에서 볼 때 적지 않은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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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例[일례]를 들면 20世紀[세기] 西歐文學[서구문학]의 새로운 地步[지보]가 그 가운데 암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19世紀[세기] 문학의 (例[예]하면 ‘발자크’에서 ‘졸라’에 이르는 선) 새로운 의미나 改造[개조]도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동시에 이 소설의 스타일을 제약하는 것으로 장편소설 양식의 무슨 새 발전을 찾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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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기대하고 想像[상상]하는 세계문학은 思想上[사상상]에서 그것을 구하는 것처럼 문학적으로도 전혀 현대적 困難[곤란]의 渦中[와중]에서 支柱[지주]로서 믿을만한 하나의 새 機軸[기축]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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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건을 제 자신 가운데 준비하지 않고 여하한 인기나 명성도 그 작품을 세계문학의 ‘빵떼옹’ 가운데 모셔 울리지는 못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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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벨상을 애써 세계문학 평가의 척도로 과장해 생각하려고 이런 말을 끄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벨상을 이러한 것으로 誤認[오인]할려는 조선식 미신을 타파하고 싶은 일념도 있고, 이런 기회에 「大地[대지]」를 세계문학이란 수준에서 간략한 反省[반성]이나마 베풀어 보자는 데서 이런 관점을 한번 만들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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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大地[대지]」(혹은 그 외의 작품도)가 평범한 작품인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작자의 傳記[전기] (그나마 조그만 自傳的[자전적] 스케취와 소개를 읽은 데 불과하나)를 본다 해도 미국 출신으로 支那[지나]에서 오래 생활한 한 선교사의 딸로서 그 자신이 支那[지나]의 생활을 장구히 체험하고, 支那人[지나인]을 잘 안다는 이외에 신기한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며, 그의 작품이 역시 세세한 支那生活[지나생활]의 체험과 支那人[지나인]의 이해란 一點[일점]이 오직 光彩[광채]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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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구조는 또한 「大地[대지]」3부가 보여 주는 것처럼, 제1부가 농민 王龍[왕룡]의 一代記[일대기]요, 제2부가 아들 王大[왕대], 王貳[왕이], 王虎[왕호] 3인의 世代[세대]기록, 제3부가 그 孫[손] 王仁[왕인], 王淵[왕연], 王猛[왕맹] 등의 소위 家族史的[가족사적] 양식으로, 19世紀[세기] 西歐小說[서구소설] 양식의 그대로의 移植[이식]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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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大地[대지]」의 가치란 僅僅[근근] 스케일의 거대나 국면의 濶大[활대], 풍속 敍述[서술]의 細微[세미]한 데만 있느냐 하면, 또한 「大地[대지]」는 그렇게 平俗一色[평속일색]의 문학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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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는 「大地[대지] 3部作[부작]만 하더라도 작자가 3대의 계보를 통하여 근대 支那史[지나사]를 그려 낸 공적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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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가족사적 소설 「카라마조프 兄弟[형제]」에 比[비]한대로 작자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는 가족이라든가 系譜[계보]를 社會史的[사회사적]으로 이해 할려고 든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왕룡으로부터 손자 왕인 등에 이르는 동안에서 작자는 근대 支那[지나]가 통과한 모든 역사 계단을 밝게 그려내고 있다. 이 점은 현대의 서구적 장편의 수법을 배우려는 위태로운 우리 현대 작가의 배울점이기도 하며, 이런 사실이란 원래 본격소설 가운데만 담아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케 한 기회도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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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증거로서 작자는 「大地[대지]」가운데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막대한 의의를 부여한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異國作家[이국작가]다운 과장과 감상은 비록 混在[혼재]되어 있다고 할망정 인물들을 시대나 민족, 혹은 그 외의 어떤 것의 體現物[체현물]로서 생각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문학적 形象[형상]을 典型[전형]으로서 파악할 줄 알았다고 말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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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大地[대지]」가운데 이 한 점이 부족하였다면, 다른 외국인의 支那紀行[지나기행]을 좀더 세심히 했다는 정도를 넘지 못했을 것으로 우리가 읽고 문제 삼는 소설은 되지 아니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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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大地[대지]」의 예술적 생명이라고 할 리얼리티는 骨子[골자]를 상실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히려 수법의 낡음이 작자를 도왔다고 말할 수까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단순히 수법의 新舊[신구]의 域[역]을 넘어 이미 리얼리즘이란 문학 정신, 내지는 작자가 支那[지나] 혹은 일반으로 세계라든가 인간이라든가를 이해하는 中核[중핵]으로 옮아 온다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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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의 출생지나 또는 傳記[전기]에서 미루어 볼 수 있듯이, 그는 일개 선교사의 딸이었다는 것보다 순박한 19世紀人[세기인]이 아니었든가 싶다. 이 점은 그의 최근 씌워지는 支那[지나]에 대한 포리티칼한 문장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그밖에 작자가 여성이란 조건도 加[가]하여 대단히 나이브한 오히려 感傷家[감상가]에 가까운 휴머니스트로서 그는 아마 체험과 견문을 요리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감상하기 쉬운 여자로서 붓끝이 그만큼 리얼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며, 阿蘭[아란]을 그린 솜씨는 그가 여자이었다는 사실이 가장 美麗[미려]히 산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이런 요소는 ‘밋첼’ 이 인기를 부르는 미국의 독서사회에서 충분히 명성을 博[박]할 수 있을 것이며, 구라파 중에서도 가장 19世紀的[세기적]인 스웨덴, 아카데미같은 데서 수상의 대상으로 골음직도 한 작품이다. 결국 현대의 西歐文化[서구문화]가 아직 19世紀的[세기적] 전통을 떠난 버리지 못한 증거라고도 생각되며, 또 한편으로 인제와선 19世紀[세기]인 것까지가 대단히 존중된다는 작금의 문화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서 이번 수상을 생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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