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가 나를 두고 간 지가 벌써 석 달이 차고 네가 세월의 빠름을 한탄한 것처럼 내가 너를 두고 마을께 공동묘지로 온 지가 오늘째 석 달 사흘이다. 사흘하고도 두 시간, 두 시간하고도 이십분이나 지났구나.
5
사람처럼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요새 와서 새삼스러이 깨닫는다. 내나 네나 우리가 서로 갈라서기만 하면 둘이 다 따라 죽거나 실진을 하리라고 생각한 우리였건마는 이렇게 이별을 한 오늘날에 너는 너대로 나는 또 나대로 살고 있구나.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그리고 목숨도 다함께 가지고 굳게 맹세한 우리건마는 언제 그런 맹세를 했더냐 싶게 너는 너대로 먹고 너대로 입고 너대로 살고 있지 않느냐? 아니 나도 마찬가지다. 네가 먹을 때에는 나도 먹었고, 네가 입을 때는 나도 입었다. 그리고 네가 걸을 때는 나도 걸었고, 네가 누울 때는 나도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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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너와 나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네 옆에 응당 누웠어야 할 내가 누워 있지 않았다는 것뿐일 것이다. 거칠기는 하나마 미끈한 팔에 어린 것을 눕히고 어지러이 물결치던 머리채도 나의 머리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뿐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토한 피를 씻을 때마다 가늘게 잡히던 이마의 주름살이 펴진 것과 무슨 냄새나 맡아보려고 하루돌이로 귀찮게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지금은 너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나갔다는 것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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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관대하던 내가 지금 와서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변했다면 너무도 변한 나 자신의 심경일 것이다. 그 심경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언제 있었더냐는 듯싶이 구슬처럼 명쾌한 너의 생활에 비하여 너무도 무미한 아니 참담한 지금의 나의 생활이 자아준바 그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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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을 한다고 원망으로는 듣지 말아라. 남녀 관계에 있어서 더욱이 우리같이 의식적으로 결합한 부부에 있어서 원망하는 사이처럼 어리석은 동물이 없다는 것을 네게 몇 번이나 들어서도 잘 아는 나다. 그리고 원망한대야 지금의 너의 귀밑머리털 하나 움직여보지 못할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니 그보다도 나는 너를 원망할 아무 조건이 없다. 나는 나 스스로가 너로 부터 떠난 사나이다. 네가 모래를 가지고 밥을 지어먹는대도 참섭할 계제가 못 되는 나다 그것은 . 네가 나의 옆에 있을 때 네가 나의 아내고 내가 너의 남편이던 그때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아 알았고 내 살로 그것을 감촉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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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너는 너의 할 바를 다했던 것이다. 내가 … 했을 때만 해도 너는 너의 할 바를 다했다고 나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네가 거번에 나와의 (중략) … 때다. 너는 오히려 감사하는 뜻까지 표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지금에 와서 너에게 이런 원망을 늘어놓을 낯도 없는 일이겠고, 내가 나와서도 정양할 겨를도 없이 피땀을 흘려서 얻은 돈으로 나에게 사식을 대어주었다는 그 사실도 지금까지 나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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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내가 폐를 해쳐가지고 드디어 가출옥이 되던 날에 네가 나를 붙들고 울던 일이, 나의 가슴속을 물고뜯는 병균 못지않은 정성으로 나를 간호하여준 일이며, 빤히 보람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너의 몸을 팔아서까지 나의 치료비를 주선한 그 갸륵한 너의 뜻인들 어찌 내가 잊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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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라야, 나는 보아서 잘 안다. 나의 병을 보아주기 위하여 영업까지 뒤엎고 쫓아와준 김 군이 나에게 유언하기를 권했을 때도 그랬거니와 나의 얼굴에 하얀 보가 씌워졌을 때 네가 애통해하던 정경이며 관의 사개 맞추는 소리가 덜컥덜컥 나고서 그래도 지금까지는 칠성판 위에 일곱 매끼로 죄어지기는 했을망정 제법 아랫목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너의 남편 노릇을 하다가 관 속으로 옮아지면서 뚜껑 닫히는 소리가 덜컥 났을 때만 하더라도 네가 애통한 나머지 기절을 한 것만으로도 나는 말이야 못했을망정 잊지는 않는다. 그리고 네가 몇몇 동지 손으로 삼엄한 감시 밑에서 마을께 공동묘지에 매장이 된 후로도 너는 지성으로 틈을 타서는 무덤을 찾아줌도 알았고, 이제 겨우 젖 떨어진 옥이를 등에 매달고도 팔랑개비처럼 잽싸게 몸을 다루던 것도 나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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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를 묻는 달구질 소리가 그친 지 보름인가 된 때인가 싶다. 그러고 보니 내가 죽은 지 열여드레 되던 날일 것이다. 그날 너는 옥이를 봉당에 앉히고서 뉘 것이었던지 삯바느질을 하지 않았더냐. 끝도 무딘 바늘로 뚜꺽뚜꺽 바늘을 옮기고 앉았다가 불시에 눈물을 짤금하고는 급기야는 목을 놓고 울지 않았더냐? 어린것하고 장차 살아갈 것을 푸념하고 먼저 간 나를 원망하는 소리도 나는 들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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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마당 흙을 파헤치며 통곡하는 꼴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렇게 단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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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바닥을 후벼파는 너의 손끝이 빨갛게 피 맺힌 것을 본 나는 몇 번이나 탄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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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혜라야! 나는 보아서 잘 안다. 울 때는 목을 놓고 울고 땅과 가슴을 치는 너이지마는, 그리고 그 순간만을 먼저 간 나를 원망해하며 애통해하는 어리석은 계집으로 변하고 마는 너이지마는 달이 밝다고 눈물을 짓고 궂은 비 내린다고 가슴만 치고 있을 네가 아님을 나는 깨닫는다. 세상에 허다한 여자들이 밟는바 그 길을 그대로 밟을 네가 아님을, 혜라야, 나는 잘 알고 있다. 너는 내가 할일을 시인할 여자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받들어 내놓을 씩씩한 동지임을 나는 믿는 것이다. 그만큼 굳센 신념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의 고초에 꺾이지 않을 것을 그 누가 믿잖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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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것도 보았다. 보았기 때문에 나는 믿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내가 마을께 엄나무 밑에 파묻힌 지 삼사 일 후인가 한다. 장사 건덕지로 겨우 입술을 축이는 너희들 모녀가 두 끼니를 못 끓이고 바로 나의 칠성판이 놓였던 아랫목에 쓰러진 채 넋두리를 하며 울던 것이 그게 어느 날이던가? 그, 당기는 창자에 손을 대고는 분연히 일어나서 외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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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박철의 처자가 이렇게 약해서야 뭣에 쓸 것인가! 혜라야, 너는 박 철의 아내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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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에서 얻어온 싸라기로 달인 미음을 어린것에게 떠먹이면서 어린것의 볼을 쪽쪽 빨던 것도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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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너의 사람됨을 잘 아는 나였기 때문에 내가 죽던 바로 전날 입술 얇은 동리 여편네들이 네가 수절을 하느니 마느니 하고 입방아를 놀릴 때만 하더라도 나는 너의 갈 길은 너의 남편인 나만이 안다고 혼자 고소를 금치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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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이때만큼 자식이란 존재를 크게 평가한 일도 없었다. 만약 너희들 모녀가 없었던들 나는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죽어도 내 뜻을 받아주는 아내가 있거니 ─ 자식이 있거니 생각하니 스스로 마음이 푸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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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믿는 너희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기고 관을 쓰고 묻힌 지가 어느덧 석 달, 석 달하고도 사흘, 내가 여기까지 쓴 동안이 삼십분이라면 세 시간하고도 이십분은 지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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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혜라야 나는 , 보아서 잘 안다. 그것은 내가 이곳에 묻힌 지 일주일 쯤 된 어느 날이다. 찬 서릿발이 쪽 뻗친 흡사히 소년 과부의 얼굴처럼 핏기가 없는 아침이었다. 너는 아직도 이불 속에 있었다. 눈도 못 뜬 강아지처럼 파고드는 어린것에게 건포도처럼 말라비틀어진 젖꼭지를 물리고 시름없이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물이 괼락말락하다가 괼 새도 없이 주르르 흘러 떨어지는 것도 나는 보았다. 그 눈물, 천진한 어린것의 쎄근쌔근하는 숨소리를 들으며 흘리는 그 눈물이 얼마나 나의 가슴을 도려 냈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 눈물이 얼마나 성스러운 눈물이었던 것도 지금까지의 내가 몰랐듯이 너도 또한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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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혜라야, 바로 그때다. K역이 뱉어놓은 사나이 하나가 조그만 가죽가방을 들고 우리집 ─ 아니 너의 집 싸리문 앞에 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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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후리후리하였다. 삼각진 커다란 얼굴에 웬만한 아이의 팔 굵기와 유사한 단장을 들었었다. 오렌지에 가까운 흙빛 스코치에 눈발이 날리듯한 외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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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 의아했다. 너는 나의 둔한 머리를 책망하는가. 이때까지 나의 집 문턱을 드나든 것은 대개가 K시의 노동자 아니면 농민이었다. 그 군정군정한 복색이 갑자기 양복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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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소리를 듣고 나는 더한층 의아했다. 박철을 부르지 않고 너의 이름을 부를 제야 내가 죽은 것을 아는 사람이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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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누구인 것을 보고야 나는 겨우 안심하였다. 김 군! 그렇다. 김 군의 옷이 갑자기 변했다고 그를 몰라보았구나. 하지만 서울 있을 김 군이 이렇게 나타날 줄이야 깜박 생각지 못했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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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반기는 양에 나는 만족하였다. 나는 너의 얼굴빛을 살폈다. 아마 그것이 눈물이었지? 옳다. 김 군을 보고 흘린 눈물이 너에게 잘못은 아니었다. 내게 대한 김 군의 우정이 나를 울렸거늘 나를 울린 김 군을 보고 네가 울었다고 그 뉘가 너를 탓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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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벗을 잊지 않고 이렇게 다시 찾아와 주는 그 우정을 나는 새삼스럽게 느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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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김 군이 팔아온 쌀과 나무로 밥을 끓이고 고기를 굽고 하여 점심을 먹으며 너희들이 지난날의 내게 대한 추억으로 해를 지운 것을 나는 보았다. 김 군의 우정을, 한 사나이가 친구를 그려서 눈물을 머금었다는 엄연한 사실이 다시금 나로 하여금 그의 우정에 탄복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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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라 씨 우선 이것으로 얼마동안 지내보시지요. 나도 서울 가서 다른 도리를 생각해보겠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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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약속을 하고 김 군이 퍼런 지전 한 장을 네게 준 것도 나는 잘 안다. 그리고 네가 굳이 그것을 사양하여 받지 않는 것을 보고 내가 얼마나 불쾌했는지 몰랐다. 피에서 우러나온 우정을. 우정에서 빚어진 그 돈을 ─ 너는 세상에서 흔히 보는 ‘사양’으로 물리치는 것 같았고, 그의 진실한 우정을 값싼 호의로 쓱싹해버리려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네가 지레 내뻗고 그것을 받지 않을까봐서 은근히 마음을 졸이었다 ─ 그러나 너는 그것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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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니 나도 칩칩해졌구나. 나는 사실 김 군의 우정이 언제나 계속되어 어린것이 장성할 때까지만 보아준다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만일 김 군과 나와의 사이가 단순한 우정으로써 결합된 것이 아니고 그 경지를 한 걸음이라도 초월하기만 했던들 이렇게도 생각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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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저희들 모녀가 한 달은 그럭저럭 굶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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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함으로써 나는 겨우 잠을 이루었다. 그러나 내가 관 속에 들어온 후로 나의 관심이 쉴새없이 가족에게로 끌려가는 것이 옳지 못함을 못 깨닫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나도 또한 인간이어니 그렇다고 어찌 나 자신을 윽박기만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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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땐지 나는 모른다. 나는 어린것을 안고 추썩추썩하다가 잠이 깨었다. 꿈이더라. 그 꿈이 뽀얀 분위기에서 미처 깨어나지도 못한 때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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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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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웬 잠을 그렇게 주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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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의 다알리아 송이 같은 얼굴이 달처럼 허공에 떴구나. 나는 좀 어색했다. 어저께도 은숙이가 깨워서 겨우 잠이 깨었는데 이틀째나 이렇게 늦잠을 자다가 들키고 보니 시간표 만들어놓고 공부한다던 것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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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라야. 네게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다만 은숙이라는 여자는 너는 기억할지 모르나 너의 선생이었기로 잠깐만 소개해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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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이는 ×여학교 선생이었다. 아마 ‘마리아’라고 해야 너는 바로 알아들을 것이다. 하도 말끝에 “말이야”를 붙여서 흉이 생기니까 “오늘부터 다시 말이야를 안 붙일 테란 말이다!”하고 한술 더 뜨다가 흉을 잡혔다던 바로 그 마리아 선생이다. 그가 어떤 의학박사와의 연애 사건으로 칼모틴 자살을 한 사건을 나는 네게서야 들어서 알았으니까 이 이상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가 낙원동 비지집 안채로 옮겨갔을 때 세상을 떠난 그 마리아가 와서 보니 공교로이도 나의 옆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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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데 오면 사람은 고적해진다. 고적하단 말은 사람이 그립단 말이다. 더욱이 올드미스로 스물아홉에 일생을 끝막은 마리아다. 인사하기가 무섭게 우리는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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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 혜라야. 이렇게 말하는 것도 네가 오해하지 않을 것을 나는 믿기 때문이다. 실상은 나도 유혹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피둥피둥한 사나이가 혼자 자는 방에 젊은 은숙이가 두세 번 들어와서 한강에서 심장마비로 오사를 한 유 박사까지 “심상찮어!”하고는 껄껄 웃더라마는 그것은 웃음엣소리요, 우리는 너라는 사람을 인연으로 가끔 만나 너를 추억하는 정도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도 않았었고 또 장래로도 나갈 염려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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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또 지적지적한 게 또 혜라의 꿈을 꾸셨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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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온 후로 나는 별로이 밖의 사람과 거래를 않았다. 나가면 아는 사람이 없는 바는 아니지마는 모두가 꿈만 꾸는 인간이라 흥미도 없고 나를 무슨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경계하는 눈치라서 불쾌한 까닭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나는 아직 이곳 살림에 길들지를 못해서 물에 기름처럼 융합이 안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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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관계로 지금까지도 그랬지마는 바깥일에 대한 소문은 모두를 이 여자가 내게 전해준다. 오늘 엔젤인가 하는 카페 여급이던 하나꼬가 이곳으로 온다는 것도 실상은 은숙이한테서 들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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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였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이곳으로 온 지 며칠 안 되는 이발장이한테 머리를 깎고 큰마당으로 나왔다. 유 박사를 비롯하여 수학 잘하던 K씨, 원산 흑우동맹의 김 군, 여러 사람이 새 손을 맞기 위하여 나와 있었다 새 손이 들 . 때는 마중을 나가는 것이 이곳의 예의인가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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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라야, 웃지 말아라. 나는 염복이 많은 탓인지 하나꼬도 내 이웃으로 왔다. 하루 이틀 가까이하는 동안에 나이답지 않게 은숙이가 질투를 시작해서 격에 맞지 않는 사랑 싸움의 일막 희극이 날마다 되풀이된다. 한번은 은숙이가 잠자리옷을 입은 채 내 방에 들어와서 밤이 새도록 푸념을 한 일도 있었다. 이것이 어느 친구의 귀에 들어갔던지 이튿날 산보를 나가자니까 어느 친구의 장난인지 절벽에다 이렇게 써놓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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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는 공동변소 판장에다 어떤 얼간이 만화가 한 분이 나와 은숙이가 키스하는 장면을 그리고 그 위에서 하나꼬가 우는 꼴을 그려놓고는 하나꼬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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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한탄을 시켜서 너털웃음을 잘 웃는 양조장 털보 영감의 입을 찢어논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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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네게 무슨 흥미가 있으랴. 기실인즉 내게도 흥미가 없다. 나는 갈수록 권태를 느꼈다. 그리하여 정 군하고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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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의 사업이 되었다. 산술이니 조선어니 우리는 이런 형식을 모두 버렸다. 그리고 아주 자유로운 강화로 시간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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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혜라야. 나는 보아서 잘 안다. 하기는 이러한 큰일을 하면서도 늘 너희들 모자에게 관심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을 경계는 하면서도 전혀 무관심하지 못한 데 나의 약점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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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나는 해가 져서야 집에를 왔다. 집에 와서 저녁이라고 끓여먹고 번듯이 누웠을 때다. 그날 저녁차에 김 군이 내려서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나는 또 보았다. 나는 이번에는 정말 의아했다. 나는 가만히 손을 꼽아보았다. 요전에 김 군이 다녀간 지 한 달이 못 됐다. 그러나 나는 즉시로 나의 잘못을 뉘우쳤다. 아무리 시골이라고는 하지마는 상포빚을 갚고 삼사원으로 한 달을 살지 못할 것을 깨닫자 그의 우정에 다시금 탄복한 나다. 나는 스스로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날도 한 달 살 것을 두고는 그대로 일어서 떠나가는 김 군의 뒷모양을 바라보고는 새삼스럽게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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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의 귀에 조금 거슬린 것은 정거장에까지 따라간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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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마치 제 남편이나 보내고 헤어지는 것 같은 말씨였지마는 그것도 대범하게 생각지 못하는 흠이 내게 있음을 즉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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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것이 어린것이 감기로 앓던 어느 날 밤이 아니었더냐. 그날도 저녁 해가 기울어졌을 무렵이었다. 요전에 김 군이 다녀간 지 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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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내를 젊은 사나이가 이렇게 자주 찾아다니는 것을 옆에서 바라보는 나는 좀 어색하였다. 어색하다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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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 스스로 나를 나무랐던 것이다. 그러자 다시금 그에게 대한 새로운 우정이 솟아오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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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라 씨! 생활 방도를 좀 알아볼 생각이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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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그런 생각이야 간절하지만 취직하더라도 공장뿐이겠는데 인제 공장에선 받아줄 것 같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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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반드시 공장이라야 한다는 논법도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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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실마리가 풀리어 드디어 이야기가 그의 병원에까지 미치자 네가 안심하듯이 나도 마음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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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는 법도 없으니까 그저 심심하시거든 해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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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월급 삼십원에 모든 것이 결말을 보게 되는 것을 볼 때 나의 마음은 한없이 기뻤다. 이만하면 ─ 하고 어린것이 이 세상을 제 눈으로 볼 때까지는 마음을 놓아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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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가 우리집에서 잔 것도 나는 안다. 그리고 그가 굳이 여관으로 가겠다던 것도 나는 잘 알고, 네가 붙들은 그 동기에 조금도 탄할 것이 아니었음도 나는 잘 안다. 그뿐이랴? 그것보다도 불도 변변히 들이지 않는 골방에서 새우잠을 자면서도 너희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을 것도 나는 믿는다. 어느 땐가 네가 자다 말고 올라가서 자리 밑에 손을 넣어보는 것도 나는 보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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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김 군이 일어나서 담배를 피우던 것도 나는 보아서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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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라 씨, 조금도 서먹서먹하게 생각지 마시고 제게 매달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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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간드러지게 웃던 것도 나는 잘 안다. 그리고 네 자리로 돌아와서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윗방을 곁눈질하다가도 어린것을 끌어안던 것도 나는 알았다 아니 김 . 군도 그날 밤만은 잠을 못 자는 눈치더라. 가끔 깨어서는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아도 그의 가슴속에 그 어떤 투쟁이 일어났음도 나로서도 짐작할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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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이었다. 네가 일어나서 불을 지피고 깨어진 화로에 불을 담아다 놓자 김 군도 부스스 아랫방으로 내려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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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그리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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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혜라 씨도 못 주무셨던 모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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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혜라야. 나는 들어서 잘 안다. 김 군이 이렇게 말했을 때 너는 확실히 “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김 군보다는 어색해서 얼굴을 폭 숙이지 않았더냐? 그러고도 잘 다독거려진 불을 공연히 폭폭 쑤시고 있지 않았더냐? 그렇다. 물론 무의식중이었겠지마는 불을 쬐던 김 군의 손과 너의 손이 한 번 스치지 않았더냐? 세번째인가? 너희들 손이 마주 스쳤을 때 김 군의 손이 슬며시 너의 손등을 덮지 않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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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라는 대답은 듣는 나뿐이 아니라 말한 너 자신도 요령없이 한 말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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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을 초월한 느낌까지 있는 김 군의 우정과 현재의 너 자신이 나도 없는 고독감에 눕혀졌다는 것과 안정이 없는 생활에서 오는 불안 ─ 이 모든 감정이 교착되어 너의 손을 만지는 김 군의 손을 비록 뿌리치지는 않았을망정 그날도 아무런 일이 없이 헤어졌다는 것만은 나도 보아 잘 알고 있다. 기실인즉슨 김 군의 손이 화로 위에 놓인 너의 손을 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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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눈에 보이게 너희들의 손이 떠는 것을 나는 보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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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그 순간 나는 두 손으로 나의 얼굴을 가렸었다. 물론 너희들이 서로 손을 잡았다기로서니 무슨 별일이야 있을까마는 어쩐지 나는 그 장면을 그 이상 더 보고 싶지 않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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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감았으니까 너희들의 입술이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도 모른다. 유달리 높아진 숨소리로 ‘쪽’하는 소리가 난 듯한 것으로 나는 너희들의 입술이 닿은 것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너희들을 의심하는 데서 나온 대단히 재미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나 자신 긍정치 않는 바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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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라 씨, 생활 방도를 좀 갈아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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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라야. 김 군은 확실히 이렇게 말했것다? 그때 너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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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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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다. 생활을 갈 수만 있다면야 어찌 너뿐이랴? 어찌 김 군뿐이랴? 어찌 어린것뿐이랴? 나 또한 그러한 점에서 너를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을 돌보고 우울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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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너희들이 서울로 떠난 것도 나는 잘 안다. 언젠가 김 군이 네게 말할 때 너도 그런다고 하면서 김 군의 어깨에 턱 실려보듯이 그야말로 김 군에게 모든 것을 턱 싣고 서울로 떠나는 것을 보는 나는 그지없이 마음이 거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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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섭섭한 것은 그래도 내게 한 번 다녀가려니 생각하고 있다가 그대로 정거장으로 나가는 것을 보는 때는 마음이 좀 섭섭하였다. 물론 너희들도 내가 지금 와서 이런 글을 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게니까 ─ 아니 죽은 사람이니 다시 무엇을 알랴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겠지마는 그 점이 내게는 섭섭했다는 것이다. 남이 본다고 해서 잘 보이려는 것은 말하자면 거짓이 많이 섞였다고 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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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정거장에서 택시로 병원 문 앞에 닿자 너희들을 맞이하던 현숙(그렇지? 이것이 김 군의 부인이지?) 씨의 눈살이 언뜻 보아서는 못 알아볼 만큼 약간 샐쭉해진 것을 나는 보았다. 아니 김 군이야 아내 있는 사람이 아무리 친구의 아내라 치더라도 끌고 들어가는 것이 좀 정도에 지나친 일이라는 것쯤은 여러 번 생각한 후였을 것이고, 너만 하더라도 이번 일이 쑥스럽다는 것쯤은 응당 생각했을 게니까 현숙 씨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으리라고는 나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그랬다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도 또한 만무할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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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야 어쨌든 김 군의 주선으로 너희들의 생활이 안정된 것만은 나도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냥 무조건하고 한집에서 구는 것이 아니라 손에 안 익은 일이라 하지마는 병자 간호를 맡아보고 더욱이 네가 간 지 며칠 안된 날부터 회계까지 맡기는 것을 보니 퍽이나 나도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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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이라는 엄연한 경계선으로 해서 너의 옆을 다시 찾아가지 못하는 나일망정 깨알 같은 주판알을 튀길 때의 너의 그 매촘한 손끝이라든지 하이얀 사무복을 입고 깡똥하게 긁어올린 머리로 하여 그러지 않아도 미끈스러운 하얀 목줄기에 황홀하게 취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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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안 익었으니까 처음에는 좀 괴로우시겠지마는 차차 겪어내시면 뭘 어려울 건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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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생각할수록에 선생님 은혜는 잊지 못하겠어요. 선생님만 아니었던들 떼거지가 돼서 굶어죽기라도 했지 이때껏 연명이나 했겠습니까. 저것이 지금은 철을 몰라서 그렇지만 인제 큰다면 그 공을 알겠습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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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라야. 나는 들어서 잘 안다. 그리고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였다. 확실히 나는 여기까지밖에 듣지는 못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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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생각한다면 너의 그 말끝에서는 반드시 들어야 할 말 한마디가 있지 않았을까?
138
“무덤 속에 있는 그이에게 알려질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기뻐하겠습니까?”
139
─ 이러한 말 말이다. 이러한 의미의 말이 꼭 들었어야 할 것이 아니었느냐?
140
너희들이 서울로 떠나면서도 한 번 내게 들러 가지 않은 것을 섭섭히 생각하면서도 다시 한번 돌려 생각한 나지마는 네가 굳이 나의 이름을 김 군 앞에서 부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은 그런 태도가 보이는 데는 나도 좀 딴생각이 들었다. 나의 기억을 그 김 군의 기억 속에 끌어올리기를 피하는 태도 ─ 그것은 나쁘게 해석한다면 혹 네가 김 군에게 대하여… 아차 이런 말을 함부로 해도 좋을까?
143
그것은 어떤 늦은 봄날인가 한다. 창경원의 야앵이 끝나던 날인가, 끝난 지 며칠 지난 때던가 잘 기억 안 된다마는 어쨌든 너는 집에 있었다. 현숙 씨는 그날 야앵 구경을 갔고 집에는 너와 어린것과 밥어멈이 있을 뿐이었다.
144
밤 아홉시였다 그날 나는 . 혼곤히 술에 취했었다. 여기도 속세를 따름인지 실연을 당하고 온 어떤 여급이 처음에는 음료수를 팔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바와 같은 것으로 변했다. 도마뱀이 검은 벽에 기어다니고 해골이 여기저기 달리어 그것은 마치 기원전 몇 세기 전의 인간 창조 시대의 그림을 보는 듯한 클래식한 것이다.
145
거기서 나는 유 박사와 잔을 나누었었다.
146
집에 돌아와 나는 취하는 정신을 가다듬어 너의 신변에 다시 눈을 보냈다.
147
나는 모른다. 그때까지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그렇게 넋을 잃고 창에 섰었는지 ─ 그러나 내가 본 때는 너는 숙직실에 불조차 끄고 어지러이 흘러들어오는 달빛에 취할 듯 말 듯 서 있지 않았더냐.
148
달빛에 비친 너의 목은 한층 더 희었다. 더욱이 희미한 달빛이 비친 너의 그 모습은 마치 저물어가는 햇녘에 호올로 피인 흰꽃처럼 애틋하게 보이었다. 더욱이 하얀 사무복에 잘끈 동인 잔허리에 펼쳐진 날개처럼 부풀어오른 치마, 그것은 마치 별이나 따러가려는 선녀와도 같았다.
149
그때다. 누군지 살며시 들어와서 너의 눈을 가린 사람이 있었다. 약제사 C인가? 하고 다시 보니 김 군이다.
153
하고 김 군이 웃는데, 너는 금방 깜짝야 하고 놀라고도 어째서,
156
이 눈에 거슬리는 장면을 보고 나는 참으로 의외라 생각했다. 너희들의 그 깨끗하던 교분이 벌써 이렇게까지 전락했는가 생각할 제 참 나는 의외였다. 이때서야 나는 생각하였다. 너희들이 시골을 떠나던 날 아침에 손을 잡는 것을 보고 내가 눈을 가린 그 사이에 너희들은 입술까지 댄 것이 아니었던가? 하고 …
157
“아이참, 날 좀 보게, 불을 끄고 있었네.”
158
하고 너는 불을 켜러 갔다. 그것을 본 김 군은 실색이나 한 듯이 쫓아가서 너의 손을 잡았다. 불을 켜지 말란 것이 너의 손을 잡고 만 것이다.
163
김 군이 너의 손을 잡은 것은 네가 불을 켜지 못하도록 한 것일 것인데 네가 불 켜는 것을 중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 군은 너의 손을 놓지 않았으니 웬일이냐? 그리고 너만 하더라도 그 손을 뿌리치는 눈치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김 군의 왼손이 너의 어깨에 올라가는 것을 너는 달빛에 취한 ─ 아니 무엇에 취한 것인지는 내 알 바 못 된다마는 ─ 밝은 데서 본다면 거의 충혈됐으리라고 생각될 만큼 너의 숨소리는 쌔근덕쌔근덕하였다.
165
김 군은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픽 웃었다. 왜 웃었느냐고? 실상 김 군이 선 자리에서는 달커녕 컴컴한 벽밖에 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 얼마 안 된 후에 네가 갑자기 김 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보고 나는 김 군이 너의 손을 아주 힘있게 꽉 쥐었던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166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지나갔었지? 그런 후에 너의 어깨에 올라갔던 김 군의 손은 어깨통을 살며시 안았었다. 그래도 너는 가만히 있었다. 아니 너는 감사하는 듯한 태도까지 보인 것 같았다.
167
너희들은 취했었다. 너희들이 아무리 변명한대도 나는 그렇게 생각된다. 이것이 나의 억측이 아니란 것은 너희들이 그 도에 지나친 어지러운 포즈를 꾸미고 있을 때 현숙 씨가 들어온 것도 몰랐다는 이 엄연한 사실이 무엇보다도 잘 증명해주리라고 나는 생각하는 바이다.
168
현숙 씨가 들어온 것을 모르는 김 군은 너의 어깨통을 좀더 지그시 다가안았다. 그리고 너희들의 입술과 입술은 차츰차츰 가까이 다가붙고 있었다.
171
하고 현숙 씨가 소리를 꽥 지른 것을 너희들이 못 들었을 리야 없었겠지…
174
너희들이 입술과 입술이 쪽 소리를 내고 닿았지마는 나는 그것으로 너희들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가 초월한 체하노라고 관대한 것을 뵈려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을 비꼬는 수작도 아니다. 그 첫째는, 입술과 입술이 좀 닿기는 했지마는 그보다 한 걸음 나간 것도 아니었고, 둘째는 허물이 있다면 그것은 너희에게보다도 현숙 씨에게 더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숙 씨가 듣는다면 성을 발칵 낼 일이지마는 사실 김 군과 너를 잘 알고 친구로 믿고 아내를 의뢰하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는 말이다.
175
그러나 혜라야, 이렇게만 말을 해서는 잘 못 알아듣겠지? 기어이 설명을 해야 할까.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더욱이 젊은 사람들이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까딱 실수를 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그럴진대 너도 젊은 여성이요, 김 군도 파릇파릇한 젊음을 가진 열과 피를 갖춘 청년이다. 그러한 한 젊은 남자와 젊은 여인이 황홀한 기분에 취하여 이성을 잃고 하나는 안고 하나는 안기었다. 그러고 어둠 속에서 두 입술이 서로서로 찾아 헤맸다.
176
그러나 혜라야, 현숙 씨만 아니었다면 너희들의 입술은 닿기까지는 안했으리라고 믿는다는 말이다. 정열에 못이기어 입술이 맞닿을 정도까지 가까이 가기는 했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현숙 씨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너희들은 그 장면이 어그러진 사도의 장면이요, 포즈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 밀치고 헤어졌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성이 너희들에게 아주 짧은 순간에 그만한 찬스를 주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가만히만 뒀다면, 잘못을 깨닫고 죽은 친구의 아내와 그 친구의 친구인 김 군으로서의 우정이 다시금 너희들의 교분에 나타났을지 모를 것을 불의에 꽥 하고 소리를 지르는 그 사품에 깜짝 놀란 두 입술은 쪽 하고 닿았던 것이 아닐까 ─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177
그러나 그야 어쨌든 아주 짤막한 순간에 입술이 서로 닿기는 했을망정 너희들의 신상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은 나도 보아서 잘 알고 있다.
179
“사랑이 없는 부부생활이라면 품 구루마를 끌 듯이 끌고 갈 필요야 없잖습니까? 사랑은 노동이 아니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181
“물론 당신이 내게 대한 애정이 아주 없어서 그런다는 것은 아닙니다. 있기야 있지마는 식었겠죠. 어쩌면 식어가는 과정에 있는 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어쨌든 식은 것만은 사실이겠으니까요.”
183
“애정은 있다. 애정은 있으면서도 친구의 부인 ─ 더욱이나 친구조차 가버리고 어린것을 양육하기 위해서 품파는 갸륵한 여성에게 손을 댄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그려. 계집에서 계집으로 건너다니는 사람이라고요! 그렇잖습니까?”
184
“여보 현숙이,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오. 내 잘못했다는 바에야 어떻게 하오. 우연히 가니까 은연한 달빛 속에 시름없이 서 있는 그가 몹시 가엾은 생각이 듭다다그려. 뭐라구든지 위안을 하러 간 것이지…”
187
혜라야, 내가 이런 것을 왜 되풀이하는지를 너는 모르리라, 하기야 별의미는 없다. 다만 너는 울기만 하더라도 그들 사이에 이런 담판이 있은 것을 몰랐으려니 했기 때문이라는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189
그런 일이 있은 지 삼 개월 동안 ─ 그동안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 오직 나는 놀라고 있을 뿐이다. 오직 의아할 뿐이다.
190
그렇게나 순간적인 그 한 번의 키스가 그만큼이나 믿었던 너와 그만큼이나 믿는 김 군이 그 갸륵하던 자중도 잃고 의지력까지도 잃어버리고는 남국적인 정열의 선풍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는 것만을 이야기해둘 뿐이다. 사실 나는 그것이 그만한 선풍을 너희들에게 일으킬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던 것이다.
191
“나의 이 타는 듯한 정열은 이 우주의 아무것이나를 ─ 모두를 태울 것입니다. 이 지구 덩어리라도 뽀얀 재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선생님. 그만한 정열이 선생님께도 있습니까?”
192
지금까지 질질 끌어오는 너희들의 그 정사를 보는 나는 너희들의 그것도 세상에서 흔히 보는 한 평범한 사나이와 계집과의 연애와 같이 아내의 눈을 속이고 세상의 눈을 피하여 혀나 쪽쪽 빨고 다니는 추하기 짝이 없는 정사로만 생각했던 나는 너의 이 말을 듣고는 그래도 마음이 좀 풀린 것 같았다.
193
너는 못 알아들을지 모르나 나는 너도 필경은 아내 있는 사람과 ─ 말하자면 요새 신여성들이 잘 그러듯이 세상에서 말하는바 제이부인으로 들어앉을 줄 알았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야 한동안 ××적 정열에 날뛰던 너니만큼 너다운 데가 있다고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194
생각하면 야릇한 심사다. 자기 남편이 아닌, 그리고 자기 아내가 아닌 딴 남자와 자기의 아내의 연애가 열정적이라고 그것을 도리어 위안삼는 그 심사야말로 나 자신 이해키 어렵다. 아마도 나는 너를 한 남성의 아내로보다도 한 인간, ××의 정열이 있는 인간으로서 보다 더 관심을 가졌던 까닭이 아닌가 할 뿐이다.
196
아무리 열로 뭉쳐진 나기는 하지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는 하지마는 혜라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을 그렇게 헌신짝처럼 안돌아보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옥이란 년이 나의 말을 했다고 너는 주장질까지 하지 않느냐?
198
이렇게 옥이란 년이 물었을 때 너는 뭐라고 대답하였느냐? 어떤 얼굴빛으로 너는 옥이를 보았느냐?
199
“죽은 아빠는 왜 찾어? 아저씨가 아빠보다 더 잘해주잖니?”
200
“뭘, 아저씬 복순이만 더 귀해주던데.”
201
혜라야, 옥이가 그래 거짓말을 했단 말이냐? 옥이가 그래 터무니없는 말을 했단 말이냐? 너는 김 군에게 눈이 어두웠다. 열병이 걸리면 눈이 침침하다더니만 네가 지금 그 열병에 걸린 것이다. 그렇잖다면 어린것이 그렇게 말을 하였으니 네가 그래,
204
“뭘, 엄만 자꾸 아저씨하고만 이야기하구 언제 나하구 그전같이 놀기나 했나?”
206
어린 딸년에게 이런 말을 듣고 그대로 있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냐. 그래 이 가슴 찌르는 소리를 듣고도 어린것을 쥐어박아야 옳으냐? 지금까지 걸어온 길의 그릇됨을 깨닫고 어린것을 붙들고 과거를 뉘우쳐야 옳으냐? 이 앙증스런 훈계자의 말에 감동이 되어 옥이를 끌어안고 통곡을 해야 옳으냐? 혜라야, 입이 있거든 대답 좀 하려무나.
207
“얼른얼른 커라. 커서 아빠가 못한 일을…”
208
하고 어린것들의 훈계를 하던 그 어미가 남편의 친구인 ─ 그나마도 아내와 자식까지 있는 남의 남편을 차고앉아서 아빠 말을 한다고 쥐어박아야 옳단 말이냐?
209
나는 밤새도록 잠을 못 잤다. 요새도 못 잔다. 이것은 질투가 아니다. 그렇게 천박한 감정이 아니다. 그 어린것에게 힘을 부어주지는 못할망정 순을 꺾는 네게 대한 증오다. 울분이다. 원한이다. 아주 무지한 노인네도 자식을 위해서는 웃음도 팔고 목숨까지 팔아서 어린애들의 장래를 위하여 제물이 되는 것을 너는 보지 못하느냐? 언젠가 너와 내가 옥이란 년의 백일해로 병원에 갔다가 창경원 모퉁이에서 늙은 거지 어미가 그 치마폭을 찢어서 어린것의 목도리를 해주는 것을 본 일이 있지 않았더냐? 그때 너는 그것을 보고 뭐라고 했더냐?
210
“어미란 저런 게야요, 당신네들은 낳기만 하면 기르는 줄 알지마는…”
212
혜라야, 이 일을 보고 울어야 하랴, 웃어야 하랴? 울도 웃도 못하는 이 심사, 이것이 아마 요새 나의 잠을 빼앗는 모양이다.
214
나는 네게 감사할 것이 오직 하나 있다. 그것은 네가 어린것을 K씨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어미를 떨어지는 설움이야 왜 아니 쓰리랴마는, 이것이 얼마나 너희들의 연애를 위해서나 어린것의 장래를 위해서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는 마지막으로 네게 감사하고 싶은 것이다.
216
인제 이것으로 너와 나와의 인연은 영원히 그친 것 같다. 남편과 아내로서의 너와 나 사이에 얽혔던 실마리는 내가 관 속에 들어오던 그 순간부터 그쳤었고, 어린것조차 K의 손으로 떨어져나간 지금에야 자식을 인연으로 한 실마리도 영원히 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17
혜라야, 그러면 부디 잘 있거라. 한 가지 부탁은 ─ 물론 그럴 리도 없거니와 이제부터는 어린것에게서 일체 손을 떼어달란 말이다.
218
몹시 지쳤구나. 네게는 이것으로 끝을 막고 이제부터 나는 나의 어린 후계자 ─ 어린것에게 편지를 쓰겠다. 이것으로 나는 나의 이후의 일을 삼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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